달리기와 존재하기
조지 쉬언 지음, 김연수 옮김 / 한문화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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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오늘도 달린다. 퇴근 후 아이들이 잠자리에 든 시간을 이용해 어둠이 깔린 강변에 선다. 찌뿌등한 몸을 좌우로 흔들며 하루 동안에 쌓인 긴장을 풀어준다. 크게 심호흡을 한번하고는 양팔을 가볍게 털고 서서히 몸을 움직인다. 쌀쌀한 밤공기가 셔츠 사이로 파고든다.
  점점 호흡이 빨라지더니 적당히 데워진 몸이 점차 안정되면 뻣뻣하던 몸도 데워진 땀과 함께 부드러워진다. 규칙적인 들숨과 날숨 사이를 건너뛰며 도시의 야경을 가른다. 나를 달린다.
  일주일 서너 번씩 반복되는 달리기지만 그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내일 있을 회의를 생각하거나 아이들의 학원비를 걱정하기도 한다. 혹은 MP3의 음악에 심취하거나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하기도 한다. 하지만 달리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 내가 달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달린다."는 말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달리기와 존재하기>는 달리기를 통한 명상법이자 그 결과물로 형이상학적이면서 철학적이고, 함축적이면서 정신적이다. 그래서 달리기에 대한 테크닉이나 기술보다는 러너의 정신적 허기를 채워주는 명상서적에 가깝다.  하지만 달리기만을 국한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의 뇌리를 스치는 여러 생각과 느낌들을 달리기라는 테마를 통해 묶어놓았다는 편이 옳겠다.
  그래서 조금 산만하고 난해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를 때도 있다. 그저 멍하게 텍스트만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마치 오랜 달리기에 길들여진 다리처럼 아무런 느낌 없이 스쳐지나가기도 한다. 내가 아직 달리기의 진정한 맛을 깨닫지 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지 쉬언의 글은 여전히 모호했다. 
 
  또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운동을, 운동선수를 애찬하며 운동만이 세상의 진리인 것처럼 말한다. 물론 정기적으로 달리고 운동을 하는(적어도 하려고 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뿌듯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조금 지나친 감도 없질 않다. 보약도 몸에 좋다고 장복하면 오히려 독이 되듯이 운동의 장점만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것이 자칫 운동이 갖는 소소한 재미를 오히려 방해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그런 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마음에 와 닿는다. 부담스러운 칭찬이나 거창한 이론보다는 달릴 때의 징~한 느낌을 담담히 그려낸  하루키의 글이 오히려 진솔해 보였다.   
 
  달리고 싶다. 다시 한 번 42.195km에 도전하고 싶다. 2011년에 경주에서 열린 동아마라톤에 나갔다가 30km 이후로 거의 자포자기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 열망을 더없이 간절하다. 물론 5시간 이내에 완주하려면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겠지만, 최소한 지금만큼은,  이 책을 읽고 있는 지금만큼은 여느 서브3(풀코스를 3시간 이내에 완주) 주자 못지않은 마음이다. 

  이 느낌을 올 가을까지 유지하며 춘천(춘천마라톤)을 달려야겠다. 나의 한계, 그 위태로운 경계선을 뛰어넘고 싶다. 화이팅, 프리즘(free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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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 가장 나답게 사는 길은 무엇일까?, 개정판
파커 J. 파머 지음, 홍윤주 옮김 / 한문화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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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에 어느 블로거가 남긴 평을 보고 장바구니에 넣어둔 책이다. 하지만 충동적으로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이내 지워버리는 여느 책과는 달리 몇 년을 묵혀두고 말았다. 아마도 제목 속에 포함된 '삶(life)'이라는 단어가 내 마음에 무겁게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책 표지에 소개된 파커 J. 파머의 프로필(미국의 유명한 교육지도자, 사회운동가)을 보니 예전에 그의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라는 교육관련 서적으로 교사의 마음가짐을 적어놓은 책이었지 싶다. 아무튼 오래전에 알았던 사람을 다시 만난 것 같은 반가움과 함께 책을 제대로 골랐다는 안도감, 혹은 자부심이 든 것도 사실.

  하지만 이번 책은 교육에 대해, 혹은 사회에 대해 실질적인 방향을 제시한다기보다는 그가 살아왔던 인생을 통해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명상서라고 하겠다.

 

  우선 저자는 "네 인생의 목소리를 들어보라."고 말하며 외부적인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고 재생산된 이상에서 벗어나 자신 내부로부터 들리는 목소리를 직시하라고 한다. 이른바 '소명'에 충실 하라는 것!

  그러면서 자신의 어두웠던 지난날과 이를 통해 채득하게 된 삶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사회적 지위나 명성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단점은 감추게 마련인데 그는 오히려 자기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고 드러냄으로써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이런 작지만 대단한 용기가 그를 미국 교육계의 대부로 성장시킨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자신의 현실 앞에 당당할 수 있었던 그의 용기가 인상 깊다.

  책이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극적인 사건이나 엄청난 깨달음이 있는 것이 아닌, 작가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느낌을 적다보니 조금 밋밋하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심심함이 오히려 이 책의 매력이 된 것 같다. 저자 자신의 깨달음을 자랑하거나 강요하지 않으면서 현재의 자기 모습을 관조할 수 있도록 도와주니 말이다.

  사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뭔가 특별한 사건에 의해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소소한 일상이 모여 의식의 작은 부분들을 변화시키지 않던가. 느린 강물에 떠밀린 모래가 거대한 삼각주를 만들듯 우리의 삶도 부지불식간에 완성되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200페이지 안쪽의 얇은 책이지만 여기에 담겨진 내용은 자못 진지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거부하거나 회피하려들지 말고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보라고 했다. 우리를 따라다니는 고통이나 괴로움을 외부적인 운으로만 돌리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이해하는 지침으로 삼으라고 했다. 결국 소명을 이해하고 발견해가는 과정을 통해 진실한 삶을 꾸려나가라는 것이 파커 J. 파머가 말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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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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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근처 하천을 달렸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움츠렸던 몸이 하천변에 핀 벚꽃처럼 화사하게 깨어났다. 겨울 동안 쉬었던 뻣뻣한 몸도 시원한 봄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하얀 꽃잎이 되었다.
  오래전에 읽다가 포기한 책이 있었다. 미국의 대표하는 소설이라 할만큼 문학적 가치와 대중적인 인기를 동기에 받고 있는 고전으로 그리 두꺼운 책도, 어려운 문장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이상하게 읽어내기가 어려웠던 책이다.
  새봄을 맞아 묵은 옷을 정리하듯 오래전에 묵혀두고 정리하지 못했던, 읽어낼 수 없었던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펼쳐든다.

  하지만 역시 종잡을 수 없었다. 뭐랄까, 이야기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자꾸 끊어지는 느낌이랄까. 하나의 이야기에 빠질만하면 전체상황과 동떨어진, 의미를 알 수 없는 모호한 문장에 난감해졌다. 원작의 느낌도 이런 것이었을까? 어쩌면 번역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전체의 흐름보다는 문장의 구조에만 집착한 단편적인 번역이 미국을 대표한다는 고전을 난해하게 만들었지 싶다. 더욱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1910년대 후반의 미국, "무너져가는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에 더 책읽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법, 인터넷을 뒤져 개츠비의 줄거리를 찾아본다. 그러자 막혀있던 내용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런 내용이 있었는데 난 왜 몰랐을까. 등장인물이 헛갈려서인가? 아니면 조금은 난해한(사실이 그렇다) 번역에 신경을 쓴 나머지 줄거리의 흐름을 놓쳐버린 것인가?" 아무튼 이제야 본 괘도에 올라온 느낌이다. 흑흑, 1/3 가량 읽은 책이 아깝긴 하지만 다시 첨부터 봐야겠다. 나야말로 소소한 번역문에 집착하지 말고 이야기와 그 속내에 집중하며 읽어야겠다.

  내(닉 케러웨이)가 이사 간 집 옆에는 개츠비라는 젊은 거부가 살고 있다. 그는 매일같이 파티를 열지만 정작 그는 술을 마시지도 않을 뿐더러 파티에 한발 비껴선 모습이다. 그의 이런 모습이 세간의 흥미를 자극했지만 사실은 5년 전에 헤어졌던 여인,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고 화려한 파티를 통해 그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톰 뷰캐넌이라는 사람의 아내였기에 데이지와 친척관계인 내가 중간에서 만남을 주선하게 된다.
  개츠비와 만난 데이지는 돌아온 옛사랑, 그것도 거부가 되어 돌아온 개츠비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의 남편(톰 뷰캐넌)이 이를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발생한 사고를 통해 개츠비의 사랑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개츠비는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이는 자신을 떠나간 그녀를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인 동시에 사랑을 지킬 수 있는 열쇠가 되리라 굳게 확신했다. 개츠비는 그렇게 그녀를 찾은 듯 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면에 감추어진 질투는 개츠비의 금빛 차양을 거침없이 파괴해버렸다.
  인간의 사랑, 하지만 돈과 권력에 의지한 사랑은 늘 질투와 좌절을 불러왔다. 우리를 둘러싼 물질문명은 언제 사그라질지 모르는 신기루였기에 이를 붙잡기 위해선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권력이 필요했다. 결국 커져버린 배를 감당하지 못하고 죽어버린 개구리처럼 인간의 그릇된 욕망에 순수했던 사랑도 죽어버렸다.
  개츠비는 한창 산업화와 주식시장의 급증으로 호황을 누리던 20세기 초의 미국사회에 닮아 있었다. 무일푼의 젊은이에서 순식간에 대부호로 성장했고 연일 파티를 열며 자신의 부를 과시했다. 하지만 돈만 있으면 사랑마저도 살수 있다고 믿었던 세상이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대공황으로 산산 조각나 버렸듯이 개츠비의 꿈도 이네 사그라져버렸다. 


  아침 출근길에 바닥에 쌓인 하얀 꽃잎들을 본다. 봄 햇살을 받으며 화사하게 빛나던 벚꽃은 휘몰아친 광풍에 쓸려가 마른 가지만 남아버렸다. 영원할 것 같은 화려함은 한순간의 꿈이었나 싶게 사라져버렸다.
  <위대한 개츠비>는 인간의 욕망과 물질문명의 허상을 사랑이라는 코드로 노래했기에 아직도 읽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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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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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말로 소설을 시작된다. 생일잔치를 위해 시골서 올라온 아버지는 함께 올라온 어머니를 서울역에서 놓쳐버린다. 그렇게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기 위해 아들과 딸, 아버지는 서울 시내를 이 잡듯 뒤지고 다닌다. 큰아들이 서울로 올라와 처음 자리 잡은 동네에서부터 그들이 살았던 곳을 거쳐 가며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보지만 어머니를 봤다는 사람은 좀처럼 만나질 못한다. 
 
  소설은 어머니를 찾아 헤매는 가족들의 시선을 통해 그녀의 잊혀졌던 과거를 하나씩 끄집어낸다. 자식과 남편의 뒷바라지에 몸 편할 날이 없었던 어머니는 자신의 욕망을 가슴 속에 묻어둔 체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한 명의 여자였던 것. 너무나 평범했던 나머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그네들의 삶을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되짚고있다.
  어머니, 그 이름 속에는 세상의 무엇과 바꿀 수 없는 따뜻함과 어떤 상황에서도 기꺼이 반겨줄 포근함이 묻어있었다. 어떤 투정도 다 받아줄 것 같고 어떤 부탁도 거절 없이 들어줄 것 같은 마법의 상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우리는 이 보금자리를 처음부터 늘 그곳에 있어왔던,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언제까지 그곳에 있을 것처럼 여기며 무시하고 외면해버렸다. 
  이렇듯 자식과 남편을 위해 반평생을 살아온 대가치고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결과였지만 우리들의 어머니는, 당신과 나의 어머니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빌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한 번의 투정이나 불평도 없이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책을 읽으면서 부끄러워지는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대학 보내 달라, 결혼시켜 달라, 집 사 달라, 얘 봐 달라, 학원비 보테 달라며 늘 손만 벌리는 내 모습에 비해 뭐 하나 제대로 해드린 것이 없다. 어제의 안부를 묻는 말에도 건성으로 말해버렸고, 피곤해하는 어머니를 보더라도 선뜻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이제는 바꿔야겠다. 나의 안위를 부탁하기에 앞서 그녀의 건강을, 즐거움을, 행복을 부탁해야겠다. 나에게, 그리고 어머니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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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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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진기행> (1964)
  잘나가는 처가의 도움을 받으며 그럭저럭 제약회사에 다니던 윤희중은 전무 승진을 앞두고 무진으로 휴양을 온다. 그의 고향이었지만 별다른 특색 없는, 아니 자욱한 아침 안개가 유달리 인상 깊은 무진에서 이곳 생활의 답답함을 호소하는 음악선생을 알게 되고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급한 회의가 있다는 아내의 전보를 받고 서둘러 상경하게 된다.
  1964년  발표된 김승옥 님의 대표작으로 고향에서 만난 낯선 여자와 중년 남자의 사랑을 그린 '불륜'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끌고 있다. 1964년이라는 시대를 감안한다면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이지만 무진이라는 갑갑한 공간과 의미없던 서울 생활의 묘한 교차로 인해 그리 외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한창 진행되던 산업화에서 점점 존재감을 잃어가던 우리들의 아버지, 60년대 중년들의 소외감을 무진이라는 습기찬 풍경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서울 1964년 겨울> (1965)
  고등학교 졸업 후 구청 병사계에 일하는 나, 부잣집 장남에다 대학원생이던 안, 그리고 죽은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아 받은 돈을 오늘 밤에 다 써버리려 작정한 서적외판원, 이렇게 셋이서 서울의 밤거리를 헤맨다. 술을 마시고, 불구경을 하고, 여관에서 잠을 청한다. 하지만 다음날 나와 안은 서적외판원이 자살한 것을 알고는 서둘러 여관을 도망 나온다.
  여러 사람들이 서로 단절된 체 살아가는 서울, 단지 그곳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원죄를 범하는 것일까? 어떤 평론가는 이 단편을 두고 "한국 시민사회의 자화상"이라 표현했건만, 그 스산한 분위기 속에 감추어진 '무엇'을 발견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생명연습> (1962)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김승욱 님의 등단작으로 형과 어머니, 성직자, 예술가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과의 싸움, 극기(克己)를 재구성한다. 
  치열한 그 무엇을 향해가는 꿈틀거림, 절규 같다고나 할까. 미완성인데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모순투성이의 우리 인생을 보는 것 같다.
 
  <건(乾)> (1962)
   간밤에 있었던 빨치산의 습격으로 마을은 엉망이 되었고 계획되있던 형의 무전여행도 무산되었다. 나는 등굣길에 윤희 누나를 통해 '빨갱이'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반 친구들과 함께 묘한 흥분 속에서 구경을 했다. 그날 오후, 아버지와 형, 형 친구들과 함께 '빨갱이'의 시체를 묻고 오는 길에 윤희 누나를 마주친다. 형과 그의 친구들은 그녀를 겁탈할 계획을 세우지만 나는 이런 계획을 알면서도 은근히 돕기까지 한다.
  사람의 죽음마저도 한낱 유희거리로 전락해버리던 시절이니 여고생 하나쯤 유린하는 것이 무슨 대수랴!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우리는 너무 잔인해졌다. 죽음마저도 무덤덤하게 지켜보는 우리는 이미 공범자들이었다.
 
  <역사(力士)> (1963)
  판자촌에서 함께 하숙을 했던 서씨 아저씨는 대단한 힘의 소유자였다. 어느 날 밤, 동대문의 벽돌을 옮겨 보임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스스로 증명한다. 하지만 판자촌에서의 생활은 옛 기억이 되었다. 새로 옮긴 하숙집은 쓰러져가는 판잣집이 아니라 깔끔하게 지어진 양옥이었다. 더구나 가풍을 세운다는 집안 어른의 말씀처럼 모든 것이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빛의 세계였다. 
  카인의 징표를 놓고 고민하던 싱클레어를 보게 된다. 어둠 속에서만 맛볼 수 있는 자유의 즐거움이랄까. 온갖 규제와 질서로 갑갑해진 현실을 되돌아보게 된다.       
  
  <차나 한 잔> (1964)
   일간신문에 연재하던 만화가 며칠째 실리지 않았다. 신문사로 찾아간 나는 "차나 한 잔 하러 가실까요?"라고 문화부장의 뒤를 따라 찻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예상했던 데로 해고 통지를 받았다. 다른 신문사를 찾아가봤지만 상황은 마찬가지. 아침부터 따라다닌 설사처럼 그의 삶도 쓰라리기 시작했다.
  차나 한 잔 하자는 단순하면서도 일상적인 말 한마디, 그 속에는 사과, 아부, 부탁, 거절과 같이 쉽게 표현하기 힘든 우리의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커피의 달콤함으로도 무마하기 힘든 쓰디쓴 인생이여~
 
  <다산성> (1966)
 상당히 길고, 상당히 모호하다. 야유회에서 잡아먹을 돼지와 연극에서 등장하는 토끼, 그리고 어느 날 사라져버린 노인은 하숙집 숙이와의 비밀스런 사랑과 함께 <다산성>이라는 제목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었다. 다산성? 무엇을 다산(多産)한다는 말이지?
  한 블로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무기력하고 왜소한 주변인의 일상을 통해 인간소외 문제를 생각케하는 세태풍자소설"이라 했지만 어디에서도 '풍자'를 느끼진 못했다. 나의 얕은 문학성을 원망하는 수밖에...
 
  <염소는 힘이 세다> (1966)
  "염소는 힘이 세다. 그러나 염소는 오늘 아침에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염소 고기로 국을 끓여 팔자 생활은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고깃국을 먹으려 드나들던, 승합 운전수를 감시하던 아저씨에 의해 누나는 강간당한다. 나는 그 아저씨가 죽도록 미웠지만 승합차 안내양으로 취직시켜준 것밖에 모르는 할머니는 그를 고맙게만 여긴다. 
  힘의 논리에 저항할 수 없는 소시민의 모습이 안쓰럽다. 육체적인 힘은 물론 돈과 권력이 힘, 그리고 취업의 힘까지. 염소로 대변되는 정의는 힘의 논리 앞에 무색해져 버렸다. 외면할 수 없는 현실... 
 
  <야행> (1969)
  사내 결혼을 숨기며 살아가는 현주는 휴가 마지막 날, 자신을 손목을 잡아끄는 이름 모를 남자와 함께 여관에서 동침을 한다. 숨기고 싶은 기억이었지만 불현듯 다시 그런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한 남자의 손에 이끌려 호텔 앞까지 갔지만 자신의 얼굴을 힐긋 돌아보던 남자가 갑자기 혐오스러워졌다.
  일회적이며 우연적인 남자들의 일탈과 결혼마저도 숨길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우리 사회가 바라는 '여성의 정조'는 무엇이며, 여자이기에 숨겨야했던 욕망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서울의 달빛 0장(章)> (1977)
  유명 여배우와 결혼한 나는 그녀의 의심스런 과거와 문란한 현재를 확인하고는 이혼을 했다. 그리고 살던 집을 팔아 최고급 차를 사고 나머지는 통장에 넣어 그녀에게 주려했다. 하지만 뭔가 새로 시작될 것 같은 기대는 찢어진 통장처럼 산산 조각나 버렸다.
  성적인 가십거리로나 등장하는 연예인을 통해 사랑과 결혼, 가족의 숨은 의미를 들춰본다. 점점 개방되어가는 성문화 속에서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는가, 상품화된 성을 욕하기에 앞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직도 사랑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믿는 것은 아닐까...   
  
 
변명의 여지도 없는 완전한 참패랄까. 도시화, 상업화와 같은 시대상황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우리 소시민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신과 이웃, 돈과 명예, 사랑과 욕망 등 궁색하게 고립된 우리들의 아픈 과거를 흔들어 깨우며 잃어버렸던 인간애를 되돌아보게 한다.
  김승옥 님은 이렇게 까발려진 우리들의 민얼굴을 통해 현재를 직시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을 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50여년이 지난  지금, 물질적으로 풍족해진 변화 외에는 그리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가슴 속에는 여전히 높은 벽으로 막혀 있는 것 같다. 
  '서울, 2012년 겨울'의 모습은 어떠할지 자문하게 된다...

  그리고 단편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덧붙이자면, 잘 이해되지 않는 내용도 있었지만 평론가나 블로거의 글을 찾아 읽다보니 그 속에 숨어있는 다양한 상징과 의미를 새롭게 알 수 있었다. 어렴풋이 머릿속에 남아있던 생각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면서 모호하게만 느껴졌던 단편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틀리지 않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런 눈 맛에 다시금 단편을 찾게 되는 것 같다.
  모호한 단편에 대한 정보를 찾던 중 그의 작품으로 진행되는 인터넷 수능 강의를 봤다. 작품을 등장인물과 시점, 배경과 사건으로 구분해 도식화하고는 명쾌하게 설명했다. 물론 이런 분석이 문학을 이해하는 올바른 모습이라 보기는 힘들지만 내용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 예술작품에 대한 '분석'을 '작품의 폭넓은 해석'을 막는 걸림돌로만 생각하지는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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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2012-03-14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숙제로 잘 쓰겠습니다 ^^

프리즘 2012-03-14 23:00   좋아요 0 | URL
선생님은 다 알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