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살 것인가? 빌릴 것인가?


방을 옮기려 한다.
그러려면 책장부터 옮겨야 한다.

책장에 꽂혀 있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책을 쌓아놓고 보면 엄청난 양이다. 한 권 두 권 모은 책이 벌써 한 수레를 넘어서는 것을 보면 스스로 기특하기도 하고 좀 미련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권에 6,000원씩만 잡아도 이게 다 얼마야? 하는 생각에 머리가 띵해질 지경. 그렇다고 책을 안 살수는 없는 노릇이고...

학교 도서관에도 매년 수배권의 희망도서를 구입한다. 그래서 내가 읽고 싶었던 책을 몇 권 적어 놓았고 구입되면 빌려서 읽어볼 요량이다. 그렇다고 내가 책을 사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한번 읽고 진열해 두는 책인데 이렇게 사 모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빌려서 읽기는 싫다. 빌려 읽은 책은 왠지 내 것 같지가 않다. 책을 되돌려주는 순간 그 느낌마저도 빠져나가 버리는 것처럼 왠지 모르게 허전해진다. 언젠가는 빌려 읽은 책이 너무 마음에 들어 중간에 새로 구입해 읽었던 경험도 있었다. 책을 읽고 느낌을 정리하고, 그리고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아놓았을 때에야 책읽기가 다 마무리 되는 것 같다.

사실 책을 많이 사거나 많이 읽는 것도 아니다. 한 달에 한 두 권정도. 하지만 이렇게 모여든 책이 쌓이다보니 몇 개의 책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지금도 한 인터넷 책방의 장바구니에는 몇 권의 책이 담겨 있다.
오늘, 아내가 인터넷 쇼핑을 하는 것에 대해선 유난히 까다롭게 굴면서도 나의 쇼핑은 그 대상이 ‘책’이라는 이유 아닌 이유로 너그럽게 넘어간다.
책, 살 것인가? 빌릴 것인가?


- 2009/10/19
  책을 먹으며 살고 싶다. 진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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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사랑이
조영남 지음 / 한길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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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언제부턴가 화장실에서 큰 일을 보면서 작은 소일거리를 만들었다. 이 작은 일이란 다름 아닌 책읽기. 옛날에는 담배를 한 대 피우거나 아니면 손톱을 정리하면서 멍청하게 시간을 보내곤 했었는데 몇 달 전부터 책을 한 권 비치해두고 틈틈이 읽고 있다. 화장실로 처음 책을 집고 들어갔을 때는 이 책을 다 볼 수는 있을까, 읽은 내용들이 기억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몇 번을 읽다보니 거의 습관적으로 책을 찾게 되었다.

이렇게 한 달 가까이 용을 쓰며 읽은 책이 조영남의 <어느 날 사랑이>이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푼수 끼가 다분한 말투와 어눌한 행동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습이 워낙 강하게 남아있는 터라 그의 책을 고르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가수이자 MC 라는 것 외에 별로 아는 것이 없었지만 책 소개를 통해 본 그의 이력은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서울대 음대를 중퇴했지만 대중가수로 성공했고, 최고의 여배우와 결혼을 했지만 결국 이혼을 했다. 화개장터와 <체험, 삶의 현장>을 통해 재기에 성공했지만 일본 관련 발언 때문에 또다시 구설수에 올랐고 그림을 그리며 화가로서도 활동하고 있다는 것. 대충의 이력을 보니 내가 갖고 있던 그에 대한 ‘어눌한’ 인식이 많이 흔들거렸다.
“거칠게도 살아왔군. 그래, 뭔가 있을 거야. 최고에서 최악으로, 삶의 깊은 골짜기를 경험해본 사람이니만큼 할 말도 많을 거야. 거기다 사랑 이야기잖아.”
누구나가 동경할만한 화려한 사랑을 했을 법 보이지만 그 속에는 또다른 무엇인가가 숨어있을 것 같은 기대, 그 기대에 책을 구입했다.

책이라는 공간을 뛰어넘어 어느 대폿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소주를 한잔 걸치며 듣는 조영남 식 Live랄까. 그의 진솔한 사랑 이야기가 대폿집에 가득찬다.
문득 현재형의 일들을 꾸밈없이 적어 내려가는 모습에서 뒷수습을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자세히 까발려놓나 하는 걱정도 앞선다. 상대방이 듣기에 불편해할 수 있는 사생활은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인 ‘사랑’에 대해서도 조영남 식으로 해석해서 공개해 버리는 것은 아닌지 의아했다. 물론 자신의 경솔함과 잘못부터 밝히며 과거를 되돌아보고 반성해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입장일 뿐 상대방의 뜻은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이런 거침없는 표현이 오늘의 그를 있게 했으리라. 적당히 눈치를 보며 살았다면 그의 인생을 물들인 검고 붉은 잉크자국은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이런 상처자국을 통해 더 단단해지고 더 깊어졌던 것 같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 그 상대방에게 충실했으며 자신을 둘려 싼 화려한 가면은 벗어던지고 진솔하게 상대방을 맞았다. 쿨하게 사랑을 시작했고 쿨하게 끝맺었다. 아니 집착 없이 놓아버린다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그렇게 얽매임 없이 현실 속에서 사랑하다 보니 바람둥이라는 오명도 많이 받아왔다.
그렇다고 과거에 대한 변명이나 자신에 대한 해명으로만 책을 채워놓지는 않았다. 노래에 대한 열정과 에피소드,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어려웠던 유년시절, 친구와 방송, 종교에 이르기까지 막힘없는 입담으로 풀어놓았다.

사실 조영남 님의 개방성을 따라가기에 우리 사회가 너무 획일적인 것도 사실이다. 자신과 다른 가치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조금 반복적이고 지루할 수 있는 내용도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의식한 무의식의 항변처럼 들린다. 내가 나쁜 놈이고 나로 인해 모든 게 시작됐지만, 나를 조영남 자체로 인정해 달라는, 뭐 그런 식 말이다.
그리고 개인주의라는 말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이익만 쫓아가는 작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큰 의미의 개인주의 말이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결혼과 가정, 직장이라는 틀에 갇히다 보니 자신에게만 백퍼센트 충실하게 살아갈 수는 없는 것 같다. 나 자신의 욕망을 가족과 사회를 핑계로 감춰버리고 반쯤은 가식적인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남의 눈치와 사회적 이목에 자신을 묻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조영남 님이야 말로 자신에게 충실한,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뭐라 하건 자신의 생각을 툭 까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인생 말이다. 그 속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찾으려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기위해서는 우리사회가 좀 더 개방적이고 수용적으로 바꿔야하겠다. 그를 따라다닌 사건의 단편적인 결과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일으킨 ‘조.영.남’이라는 존재 자체를 바라볼 수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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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소원칙
도정일 외 지음 / 룩스문디(Lux Mundi)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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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를 필요로 하는 최근 우리 사회에 대한 사회 각계 전문가들의 반향을 아우른 것”으로 경희대 교육대학원에서의 특별담화를 기록한 것이다. 글에 대해 나름의 일가견을 가진 분들을 초대해 그들의 ‘글’ 이야기를 들어본다. 김훈, 김영하와 같이 그 이름만으로도 글쓰기의 힘을 대신할 수 있는 소설가들부터 교수, 변호사, 평론가까지 여러 분야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었다.
물론 글을 쓰기위한 실천적 방법을 알려주는 책은 아니다. <글쓰기의 최소원칙>이라는 책 제목처럼 글을 쓰기위한 최소한의 마음자세, 혹은 글쓰기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여러 인사들을 섭외하다 보니 아무래도 어려움이 많았으리라. 시작과 끝 부분의 작가들에 비해 중간에 삽입된 작가들은 비중이 떨어지는 것 같다. 글 자체도 어렵고 글쓰기라는 주제와 동떨어진 내용도 보인다. 일정량의 분량을 위해 억지로 끼워 넣은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그렇다고 책이 엉망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여기 책에서도 지적했듯 평하는 글을 적다보면 아무래도 장점보다는 단점이 눈에 띄게 마련이다. 장점부터 이야기하는 게 순서겠지만 나 역시 전문적인 교육 없이 글을 쓰다 보니 적기 쉽고 말하기 쉬운 단점부터 들춰지게 되는 것 같다.
아무튼, 몇 몇 작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도정일 :
개인에게서 출발하는 일상의 글쓰기를 강조한다. 특히 학생들은 여러 실천적 방법을 통한 훈련으로 논술 부담을 떨쳐버리라 한다. 교육현장에서 오래 계셨던 분인지라 지금의 교육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많이 털어놓는다. 학생을 직접 마주하는 교사로서 독서나 글쓰기를 주먹구구식으로 밀어붙이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아무런 준비도 없는 아이들에게 강압적이고 수동적인 글쓰기만을 강요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대담형식의 글 중간에 청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정리, 요약하는 김숙이 교수님의 모습 역시 인상 깊다. 전체의 흐름을 염두에 두어놓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적절하게 이끌어나가는 대화 기술은 서로를 무시한 체 자기주장만을 되풀이하는 우리들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어쩌면 이런 대화 기술 역시 오래된 글쓰기를 통해서나 올 수 있는 산물이리라.

김훈 :
몇 해 전 독서토론회에서 봤던 그가 생각난다. 나지막하면서 어눌한 듯 이어지는 김훈님의 억양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았다가는 무슨 말인지 놓쳐버리기 쉬운, 조금은 난해할 수 있는 말로 글쓰기를 이야기한다.
국어가 갖고 있는 모호함을 인문학에 대한 체계적 접근을 통해 과학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나 역시 우리말을 너무 함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지금도 글을 쓰고 있지만 글자 한자 차이로 문장의 의미와 뜻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도 있고, 한 문장을 놓고 어떤 표현이 더 적당한지 갈피를 못 잡을 때도 많이 있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을 위해 국문법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도 필요하지 싶다.
또한 기자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글쓰기에 대해서도 간단히 얘기한다. 칼럼과 에세이의 본질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최재천 :
통섭을 통해 학문 간의 소통을 이뤄내자고 말한다. 깊이 파려면 넓게 파려면 넓게 파야한다지만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넓게 파다가는 한도 끝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여럿이 함께 파자고 말한다. 각자의 분야를 파되 다른 사람의 분야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편협한 개인플레이로 치닫고 있는 우리사회에 가장 필요한 덕복이 아닐까 싶다.

배병삼 :
고전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글쓰기를 말한다. 단어와 구절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바탕에 놓고 낯설고 간결하게, 현실에 맞게 적으라 한다.
하지만 고전은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배병삼 교수님의 글, <고전, 현재형으로 끊임없이 다시 써야 할 ‘오래된 미래’>는 쉽게 다가오지 못하고 겉돈다. 일단은 고전에 대한 나의 무지 때문이리라. 그리고 나를 이해시키지 못한 교수님의 글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리라...

김수이, 이문재:
김수이 교수님은 일단 많은 글을 읽고, 많은 글을 쓰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생긴 ‘결핍’과 ‘잉여’의 경험을 수사적이고 미학적으로 표현해보라고 한다.
이문재 교수님은 좀 더 실천적 방안을 제시한다. 메모하고 관찰하고 필사해보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쓰라고 한다.
하지만 글이라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수많은 문학 지망생이 존재하지만 세상에 빛을 보는 사람은 극소수일 뿐 독서와 사색이라는 오랜 담금질이 없이는 몇 페이지의 글도 채울 수 없는 것이 바로 글이다. 좋은 글이 나오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학적 경험이 충만해야 할 것이고 이것을 스스로 소화하고 토해낼 수 있는 문학적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지 싶다.
아, 어려운 글쓰기여...

계속해서 박원순, 민승기, 이필렬, 차병직, 최태욱 님의 글 이야기가 쏟아진다. 하지만 다소 어렵게 다가오는 글도 있고 글쓰기라는 실천적 행위와는 멀게 느껴지는 글도 보인다. 초반부에 지닌 힘과 집중력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는 느낌이다. 비록 책의 말미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김영하 님을 불러 앉혔지만 ‘글쓰기의 최소원칙’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마무리 짓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인다.

그리고, 김영하 :
김영하 님의 잡기에서부터 최근의 소설,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어려움까지, 글과 관련된 그의 오늘 날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글쓰기에 대한 정규교육 없이 어린 시절의 독서와 평범함에 대한 조율을 통해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확실히 다지고 있는 그를 보자니 부러움과 시샘이 몰려온다. 진지하면서도 기발함이 느껴지는 ‘힘’ 쎈 작가, 김영하.

글이란 확실히 부담스러운 존재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오는 경험의 재생산이나 한편의 글을 마무리 지었을 때의 뿌듯함도 크다지만 그에 못지않게 글쓴이를 고달프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머릿속에 맴도는 수많은 영상들을 단어와 문장이라는 기호로 표현하려다보면 머릿속이 절로 뜨거워진다.
하지만 하나씩 쌓이는 나의 결실들을 대할 때면 창밖에 뛰어노는 자식들을 보는 것만큼이나 흐뭇해진다. 수십 번을 고쳐가며 글을 다듬다가 자신을 마음에 딱 들어맞는 글을 찾았을 때의 즐거움은 글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것이리라. 이런 이유 때문에 지금도 글을 적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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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 읽기의 시작


군대시절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OO이가 읽은 책”이라는 목록을 만들고 한권 읽을 때마다 거기에 순번, 책 제목, 저자, 읽은 날 등을 적어 넣었습니다. 1, 2, 3, 4... 제대할 땐 순번이 백 번 정도까지 늘어났던 기억이 납니다.
책에 관심 없었던 저에게는 그런 과시용 '목록'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더군요. 몹(괴물)을 사냥해 경험치를 올리는 RPG게임처럼 '권 수'에 연연해 읽다보니 책읽기의 참맛을 조금씩 알겠더라고요. 자기가 경험해보지 못한 시공은 물론 제3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접함으로써 직접경험에서 얻을 수 없는 인식의 한계를 넓힐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예전처럼 무식하게 읽어치우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의무감이나 과시용으로 읽고 있는 것은 아닐지 늘 경계하고 있습니다.
많이 읽는 것도 좋지만 '잘 읽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갔습니다.


- 2009/08/26
  http://cliomedia.egloos.com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의 댓글로 올린 글을 편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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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반양장) 사계절 1318 문고 2
로버트 뉴턴 펙 지음, 김옥수 옮김 / 사계절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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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은 바로 아버지가 죽던 날이었다. 평생 돼지 잡는 일을 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날이었기에 그날은 아버지의동료들까지 돼지 잡는 일을 쉬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아버지(로버트 헤븐 펙)는 버몬트에서 돼지 도살장에서 일하며 농사를 짓고 소, 돼지를 키우며 살았다. 글자는 몰랐지만 세이커 교도로서 성실하고 검소하게 생활했다.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며 한평생을 버몬트의 농부로 살았다.
아버지가 죽기 몇 해 전, 이웃인 태너 아저씨에게서 송아지의 출산을 도와주고 선물 받은 돼지, 핑키를 아버지와 함께 도살했다. 내(로버트 뉴턴 펙)가 정성들여 키운 돼지인데다 가축박람회에서 '가장 예의바른 돼지에게 주는 일등상'까지 받은 녀석이었다. 덩치는 커지고 먹는 양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발정이 나질 않아 새끼를 갖지 못했기에 더 이상 그냥 놔 둘 수는 없다고 했다. 눈이 소복이 내린 다음날 아침, 슬픈 일이지만 아버지와 나는 침묵 속에서 그 일은 처리했다.
“어디든지 나를 그렇게도 따라다니던 귀엽고 깔끔한 하얀 핑키, 처음으로 나에게 주어졌던 유일한 소유물. 내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던 유일한 친구. 하지만 핑키는 더 이상 이곳에 없다. 한순간에 눈과 섞여 축축한 진흙탕이 돼 버린 피범벅뿐이었다.”

모든 것에 운명이 있듯 아버지도, 핑키도 결국 떠나버렸다. 이젠 이 농장을 가꾸고 어머님을 돌보는 일을 혼자 힘으로 해야 한다. 세월의 흔적이 짙게 베인 아버지의 연장으로 농장 일을 꾸려나가야 한다.
"괜찮아요. 오늘 아침에는 푹 주무세요. 일어나지 않으셔도 돼요. 내가 아빠 일까지 다 할게요. 더 이상 일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제 푹 쉬세요."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아버지는 나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최고의 방법을 선물하셨다. 언젠가는 아버지가 그러했듯 나에게도 성실한 땀 냄새가 짙게 베어날 것이다.


- epilogue
학생 생일날 선물하기 위해 구입해 놓은 책이다. 매번 선물을 하지만 제대로 읽는 경우는 몇 번 없는 것 같아 내가 먼저 일어보고 전해주고자 했다. 텔레비전 미니시리즈나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화려하고 극적이진 않지만, 그 이면에 흐르는 잔잔함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껍데기 속에 감춰진 진실함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www.freeism.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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