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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진중권, <호모 코레아니쿠스*웅진지식하우스>
내 편견일 수 있겠으나, 진중권의 책은 별다른 고려없이 사는 편이다. 나에게 그는 그야말로 이름 하나로 책의 내용을 보증하는 확실한 보증수표인 셈이다.
내가 좋아하는 논객인 '고종석'과 비교해 본다면 진중권은 사실 '되바라진' 경향이 있다. '싸움닭'이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 그의 비판엔 에누리 혹은 에티켓이 없다. 예전엔 상당히 거슬리는 부분이었는데, 지금 생각컨대는 그럴수도 있겠다, 싶다. 그도 그럴것이 예전 그의 되바라짐은 대부분 지독한 보수꼴통에 대한 '거침없는 하이킥'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거침없는 표음'을 상당히 눅인 것처럼 보인다.
미국에 어학연수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단순히 어학만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미국을 고집하진 않았을 터. 그 때 내가 가진 돈은 전세방에 묻어둔 700만원의 보증금이 다였다.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으나 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 세기가 다 지나도록 압도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세계 최강국 미국을 알고 싶다는 욕구가 컸던 게 제일 큰 이유였다. 귀국한 지 2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 때의 생각을 복원하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애당초 그 짧은 시간동안 미국을 관찰해보겠다는 내 대책 없음이 문제다.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 이물감으로 얼핏 기억에 남듯, 이색적인 생활방식에 대한 당시 내 사고의 편린이 설핏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보았던 이색적인 풍경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1. 내가 약 4개월 동안 체류했던 애틀란타는 미국의 전체 도시를 통틀어서도 교통상태가 불량한 곳으로 유명하다. 출퇴근 시간 도로 곳곳엔 상습정체구간이 끝없이 늘어져 있고, 또 웬 도로공사는 이곳저곳에서 계속되는지. 도로상태만 보자면 서울의 여느 곳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병목을 풀어가는 방식이 이 둘을 가른다.
한국에서는 다들 알겠지만 ‘파란불 진입, 빨간불 정지’가 제1원칙이다. 교차로에 이미 차가 꽉 들어차 더 이상 진입할 구석이 없음에도 파란불에는 우선 차머리를 들이민다. 심지어는 빨간불인 상황에서도 교차로의 혼잡함을 틈타 차를 진입시키는 운전자도 있다. 순식간에 도로는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엉망진창이 돼 버린다.
이에 비해 애틀란타에서 병목을 푸는 제 1원칙은 ‘정지선 대기’다. 파란불이 들어와 있더라도 교차로가 혼잡하면 무조건 정지선에서 기다린다. 금세 바뀐 빨간불 탓에 몇 분을 더 기다려야 하지만 보다 분명한 점은 다음 턴엔 그 교차로를 통과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도로엔 항상 차들로 북적대지만 이들의 제 1원칙은 허물어지는 경우가 없다. 파란불 진입이라는 순간적인 이해에 집착하는 사회와 약간의 기다림으로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전체적으로 공유된 사회는 이처럼 다르다.
#2. 역시 애틀란타에서 있었던 일. 내가 가지고 갔던 700만원은 예상처럼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 순전히 잠자리가 공짜로 보장된다는 이유 하나로 난 한국인 carpenter(목수)의 보조수가 됐다. 속된말로 노가다판에 들어간 것이다. 물론 불법이었다. 그러나 부시도 알고, 체니도 알고, 우리 모두 알듯이 미국은 불법체류자들이 먹여 살리는 국가다. 풍요한 사회에 진입한 국가가 폼 안 나오는 직업을 대신해 줄 불법인생을 필요로 한다는 건 익히 아는 상식이다. 작업현장에 가면 근엄하게 오더를 내리는 소수의 Jack들이 있고 이 명령에 못질, 톱질에 열심인 Mr.Kim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 김씨들과 같은 신세의 산쵸들, 즉 히스패닉이 있다.
이들이 작업장에 오자마자 하는 일은 손에 쥐고 있던 카세트를 켜는 것이다. 이들의 라틴은 흥겨운 구석이 있으나 몸을 부리는 일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이에 반해 우리 김씨들은 쉴새없이 손을 놀린다. 몸을 재게 부릴수록 하루에 처리할 수 있는 집의 수가 늘어나며 이에 비례해 주머니가 두둑해짐은 물론이다. 무리하게 받은 오더를 채우기 위해 야근을 자청하고, 토․일요일도 가리지 않는다. 이쯤되면 산초들의 정시퇴근과 자진 5일근무가 부러울 따름이다. 내 사수는 마치 ‘습관’처럼 일을 하곤 했다. 그의 악다구니 근성은 그만큼 몸에 자연스레 배어 있었다. 그리고 아주 가끔씩 일에 지칠 때면 쪽빛 대서양 바다와 야자수나무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미시시피의 한 해안에서…‘카지노’를 즐겼다. 2박 3일 내내. 바다 내음 한번 들이쉬지 않고.
돈을 벌 요량으로 애틀란타로 옮기기 직전,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봤던 '남북전쟁 재연'광경을 찍은 사진이다. 싸이월드에 올린 사진이었는데, 이 사진 밑에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아놓았었다.
"우연히 미국의 civil war를 재연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는데...요즘 들어 부쩍 더워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사람들이 나왔고, 그들 중 대부분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수고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이 내세우는 노예해방이나 자유, 평등, 등등의 가치 이면에 숨겨져 있는 civil war의 본성을 아는 이가 이들 중 얼마나 될 것인가."
당시 난 미국에 대한 반감이 극도에 달했을 때였다. 지금도 뭐 딱히 미국에 대한 내 감정이 그리 호의적이진 않다. 다만 배울 건 배워야겠다는 '용미'를 어설프게 습득했을 뿐. 이 사진을 보니, 이들의 '국가주의적 면모'도 어렸을 때부터 '전쟁 재연'이라는 '군대화'를 거쳐 형성된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본다.
“‘국민성’, ‘정체성’보다 이 책의 의도에 더 적합한 것이 있다면, 아마 ‘하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일 것이다. 우리말로 흔히 ‘습속’이라 번역되는데, 거칠게 말하면 특정 사회 성원들의 사고방식, 감정구조, 행동양식의 총합이라 할 수 있다.(중략) 모든 인간은 같은 ‘류’로서 이른바 공통된 ‘유적’ 특성을 가지나, 특정 사안에 대한 생각, 특정 사건에 대한 느낌,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은 민족에 따라, 시대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 인간의 몸에는 타고난 자연의 바탕 위에 사회적,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층위가 얹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목적은 한국인의 몸에서 그 ‘구성된’ 층위를, 다시 말하면 한국인의 하비투스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pp.11-12)
진중권이 책을 냈다. 습관처럼 책을 샀다. 진중권. 이름 하나로 책의 내용이 보장되는 몇안되는 필력가 중 하나다.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한국인의 몸에 아로새겨진 습속을 드러낸 글이다. 이를 위해 저급 단어인 ‘국민성’ 대신, 전체주의적 발상이 묻어나는 ‘정체성’ 대신 ‘하비투스(habitus) 개념을 끌어들였다.
이 책에서의 한국인의 습속, 즉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근대화’, ‘전근대성’, ‘미래주의’가 한 몸에 뭉뚱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서양에 비해 너무 급속하게 진행된 근대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처럼 근대화가 압축적으로 진행된 사회에는 종종 전근대와 근대의 시간 축이 공시적으로 존재하게 마련이다.”(p.110) 그리고 이 근대화 과정은 호모 코레아니쿠스들을 ‘산업전사’로, ‘반공투사’로 만들었다. 군대화가 곧 근대화였던 셈이다. “산업화가 이루어지던 1970년대에 노동자는 일터에서는 ‘산업전사’였고, 일터 밖에서는 ‘반공투사’였다. 이 군대의 은유에는 좌우의 차이가 없어, 1980년대 좌익들이 즐겨 부르던 ‘인터내셔널가’의 한국어 버전은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라는 군사적 은유로 시작한다.”(p.32) 전근대적 타성에 젖어 있던 한국사회를 ‘근대적 군대’로 바꾸기 위해서는 전면적 인간개조가 필요한 법. 그리하여 박정희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제는 제도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개인에게 있는 것이다. 또한 민족 운명의 공동체라 하더라도 역시 민족의 구성 요소는 개인이다. 우리가 차제에 인간 개조를 부르짖고 민족적 자각을 요청하는 소이도 바로 여기에 있다.”(p.25)
이 책에 소개된 조형예술 사진. 압축적 근대화를 온몸으로 감내한 한국인의 자화상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항상 '더 나은 미래'를 좆아 끊임없이 손을 내밀지만, 사실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헐레벌떡하는. 원래 '더 나은 미래'는 허구다. 오늘 생각한 '더 나은 미래'가 내일 이루어진다 해도, 우리의 성장 일변도 의식은 '더 나음'을 요구하기 때문에 말이다.
호모 코레아니쿠스들은 이 사진처럼 '헐겁다.' 남루한 회사 옷차림에 호모 코레아니쿠스들.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이들을 가냘프게 만든다.
마르크스는 '종국에 노동은 유희의 형태'로 온다고 말했다. 진중권 역시 미래의 노동은 '유희적' 성격을 지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대한민국의 노동은 '유희를 위해 온 몸을 바치는 노동'이다. 아니, 극단적으로 유희 없는 노동만 가득한 노동. 노동을 위한 노동 일꾼들이 바로 우리들, 한국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개조 프로그램도 뼛속 깊이 박혀 있는 ‘하비투스’를 쉽게 바꿀 순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근대화는 전근대적 습속과 공존하는 특이함을 보인다. 요컨대 일반적 의미의 근대화는 ‘합리적 계산능력’이 행동양식의 주된 근거로 활용되는 것을 말한다. 냉철한 이성에 근거한 경제인이 합리적 인간의 표본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양식은 이성적이라기보다는 정념적이다. 한국인을 묘사하는 단어로 자주 쓰이는 것은 “냄비 근성을 포함, 강인함, 활력, 승부 근성, 도전 정신, 자신감, 대담함, 빨리빨리 문화, 신바람, 악바리 근성, 잡초 근성, 거침, 격정, 난폭함, 떼거리 근성 등”(p.84)이다. 정념의 홍수에 빠져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앞서 서두에 소개한 예를 주목해 보자. 우리의 ‘파란불 진입’은 합리적 이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 아니면 나 하나 빨리빨리 가보겠다는 정념의 소산인가. 밤잠 못자고, 휴일까지 반납하며 죽어라 일만한 Mr.Kim이 카지노에서 애써 모은 돈을 탕진하는 건 경제적 인간의 모습인가, 디오니소스의 감정인가.
아이러니한 것은 압축성장으로 기인하는 근대와 전근대의 공존이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 어느 곳보다 앞선 인터넷 문화가 그 증거다. 인터넷에서 범람하는 창조적 상상력의 ‘콘텐츠’들을 보라. 수초 안에 배꼽을 잡게 만드는 동영상이 넘쳐나고, 기지가 번득이는 패러디도 가득이다. 컴퓨터가 야기하는 디지털 문화는 근대적 텍스트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전근대적 그림, 즉 영상의 영역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호모 코레아니쿠스의 한계가 있다. 즉 우리 한국인은 IT 강국이되, 그 사이에 ‘소비’라는 말을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 IT 소비 강국. "프로그래밍을 하는 이들은 문자-수자 코드로 그림을 그리고, 이로써 가상의 ‘창조자’가 된다. 반면에 프로그래밍을 당하는 사람들은 그림을 세계로 받아들임으로써 가상의 ‘소비자’에 머문다.(중략) 한국의 영상문화는 서구처럼 문자문화의 강력한 저항을 받지 않았다. 문자문화의 전통이 약한 게 외려 신속하게 디지털 영상문화로 이행하는 데에 유리한 조건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게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서구는 속도는 느려도 문자문화의 바탕 위에서 서서히 영상문화로 이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자 없는 그림을 선사 시대의 주술적 상상력이고, 문자로 그린 그림은 디지털 시대의 기술적 상상력이다. 우리의 것은 이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p.209)
이 어찌 유쾌한 상상력이라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지금 인터넷의 바다에서는 이런 '유쾌함'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우리의 IT가 새지평을 열 수 있는 희망적 조짐이다. 다만 진중권이 우려하는 것은 근대적 이성에 기반한 '텍스트'가 부재하다는 것. '이미지'로만 이루어진 콘텐츠는 '의미없음'으로 이루어진 게 대부분이다. 또한 IT는 '프로그래밍의 생산'보다는 '소비'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물론 텍스트의 부재로 기인한 것이다.
결국 진중권이 말하고 싶은 바는 우리의 몸엔 ‘전근대’와 ‘근대’, ‘미래’의 습속이 교묘히 섞여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신체가 아무리 그로테스크해 보여도 오늘의 한국을 만든 것은 바로 그 몸이다. 다만 그 신체는 급조된 근대화에 따르는 부작용으로 고통받고 있고, 미래로 나아가야 할 시점에서 아직도 과거의 타성에 사로잡혀 있다.”(p.289)는 필자의 우려가 제법 묵직하게 들린다. 필자는 이 우려를 극복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한국은 세계에서도 이런 변화가 가장 신속하고 극단적으로 일어나는 곳. 이곳에서 신체가 받는 중력의 하중은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하지만 신체는 권력의 생체공학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나, 동시에 어느 정도는 존재미학을 통해 제 스스로 디자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잠재성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자신을 늘 새롭게 디자인하는 신체는 최소한 강요된 유목에 따르는 고통을 적게 받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유례가 없던 가능성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즉 앞으로의 세기는 ‘새로움’을 디자인하는 시대인 것이다. 근대적 텍스트와 미래주의적 영상이 결합한 창조적 상상력이 그 해답이다.
미래의 동력으로써의 ‘상상력’은 이미 진중권의 이전 저서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이하 놀이)에서 강조했던 바다. <놀이>가 개괄적 이론서라면,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그 이론을 한국인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원체 많은 자료를 가지고 많은 이야기를 하려 했다. 앞에서 소개한 예 이외에도 한국인의 습속이라고 할 만한 수많은 행동양식이 소개된다. 과연 진중권스러운 관찰력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발견이다. 다만 그의 경험칙이 호모 코레아니쿠스의 일반화로 넘어가는 급격한 전환을 지적할 수는 있겠다. 한 사람의 시선은 ‘편견’으로 가득차 있을 수 있으니. 그러나 ‘정교한 이론화’를 결여했다고 해서, 관찰의 표본수가 적다고 해서 그의 주장이 싸그리 부정될 순 없을 듯 보인다. 통계엔 허수가 가득하다는 일반적인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그리고 진중권이라는 이름이 보증하는 ‘칼날 같은 이성’을 믿는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