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erview with old hand 님
Q.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추리소설 읽는 즐거움은?
A. 문학적 소양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서 추리 소설은 내게 온전히 '재미'를 위한 존재입니다. 물론 추리 소설이라고 해서 독자에게 깊은 감동과 묵직한 여운을 남기지 말란 법은 없고, 독서 후 그런 감정을 느끼는 일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건 제게는 별책 부록같은 덤이지요. 장르 문학의 일차적 목적은 역시 재미가 아닐까요. 드라마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거의 보지 않는 제게는 추리 소설이 그 자리(시간과 재미 모두)를 대체해주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Q. '내 인생의 추리소설'을 꼽는다면.
A.
1) <모르그가의 살인>을 위시한 애드거 앨런 포의 추리 단편들
열번을 읽어도, 처음 읽었을 때와 동일한 느낌을 주는 작품. 어른이 되서 읽어도, 어린 시절 읽었을 때의 두근두근함과 짜릿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 추리 문학 뿐만 아니라 지상의 모든 문학 작품들을 통털어도 단연 걸작으로 손에 꼽을 만한 작품. 그것이 내게는 바로 포의 소설들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불우했던 천재가 후대에 남겨준 진귀한 선물입니다.
2) <그리스 관의 비밀>, 엘러리 퀸 지음
홈즈와 크리스티에 탐닉했던 초중고등학교 시절 이래 손에 쥐어지거나 눈에 띄일때나 읽던 미스터리의 세계로 나를 다시 인도한 작품. 추리소설의 본령은 '본격 미스터리'라고 아직도 굳게 믿고 있는 구식 독자인 저는 후기의 원숙한 퀸보다 초창기의 재기발랄한 퀸을 더 좋아합니다. 퍼즐 미스터리가 추구하는 극한의 맛을 선사해 준 국명 시리즈의 걸작.
3) <위철리 여자>, 로스 맥도널드 지음
초창기 챈들러의 영향 아래 묶여 있었던 것만 같았던 로스 맥도널드는 그가 왜 '삼위일체' 중 하나인지를 이 작품을 통해서 증명합니다. 원숙해진 작가의 솜씨는 등장 인물들의 개성을 살아 숨쉬게 하고, 한 가정의 비극과 그 비극을 치유하기 위한 치유자로서의 아처의 활약을 담담하게 묘사합니다. 맥도널드표 하드보일드 소설의 최대 미덕은 미스터리 적인 재미 또한 아주 뛰어나다는 점이 아닐까요.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작가의 능력은 독자에게 행복한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4) <망량의 상자>,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논리와 이성, 기괴함과 호러를 적절하게 조화시켜 성공적인 결과물을 내놓고 있는 교고쿠 나츠히코의 대표작. 교고쿠도의 끊임없는 장광설과 계속해서 바뀌는 시점 속에 얽히고 설킨 사건들이 자리를 잡아가는 작품의 얼개도 훌륭하며, 결말 부분에서도 힘을 잃지 않고 놀라운 폭발력을 보여줍니다. 인과의 틀에 갇힌 인간군상들이 보여주는 지옥도를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한 괴작.
5) <기나긴 이별>, 레이몬드 챈들러 지음
챈들러와 말로에게 큰 애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나긴 이별>이 각별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위대한 작가가 창조한 영웅의 마지막 뒷모습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 때문일 것입니다. 그 이후에 발표된 작품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로의 영웅적인 퇴장을 바라는 저는 이 작품에서의 말로를 마지막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습니다. 고독했던 영웅의 마지막 모습으로 말이지요.
Q. '올해 여름, 필독을 권하는 추리소설' 5권은?
A.
1) <넘버원 여탐정 에이전시>, 알렉산더 매콜 스미스 지음
멀게만 느껴지는 낯설고 이국적인 남아프리카. 결코 평범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아프리카 최초의 여성 사립탐정 음마 라모츠웨의 삶과 보츠와나의 평온한 일상이 어우러집니다. 책장을 덮고 나면 아프리카의 드넓은 초원에서 불어오는 따사로운 산들바람이 느껴질 것입니다. 휴양지나 휴가지에서의 독서로는 최적의 작품.
2) <아웃>, 기리노 나쓰오 지음
건조한 인생과 비루한 생활에 눌려 있던 네 명의 여인들이 벌이는 현실 탈출. 그러나 그들의 일탈은 우리가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봐왔던 것들과는 달리, 결코 유쾌하거나 통쾌하지 않습니다. 시종일관 어둡고, 건조하며 강렬한 작품. 다크한 작가 기리노 나쓰오의 거침없는 필력과 묘사는 읽는 이의 간담을 서늘케 합니다.
3) <저주받은 피>,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북구의 나라 아이슬란드. 한 남자의 시신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메시지와 함께 발견됩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아이슬란드 식 살인'입니다. 잊혀졌던 과거를 하나씩 밝혀내며 사건의 진상에 접근해 가는 에를렌두르. 인간이기에 느껴야 하는 고독과 절망, 상처와 치유에 대한 진지한 묵시록. 세월속에 묻혀져 있던 진실과 마주할 때 독자들은 전율할 것입니다. 후속작 <무덤의 침묵> 역시 필독.
4) <명랑한 갱이 지구를 돌린다>, 이사카 고타로 지음
"로망은 어디인가?" 정통 미스터리 장르에 속하지는 않지만, 미스터리적 요소를 즐겨 차용하는 이사카 고타로의 경쾌 발랄한 활극. 각기 독특한 능력을 갖고 있는 네명으로 이루어진 갱단은 유쾌한 은행강도들입니다. 소설은 네명의 갱들의 시선을 번갈아 따라가는데, 머리를 탁 치게 만드는 놀랄만한 반전은 없지만, 잘 짜여진 복선과 경쾌한 대화,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잘 버무러진 유쾌한 작품입니다.
5) <종신 검시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사라진 이틀>, <클라이머즈 하이>로 국내에 소개된 요코야마 히데오의 연작 단편집. 독특한 카리스마의 검시관 구라이시 요시오의 매력이 돋보입니다. 국내에 소개된 전작들에 비해 본격 추리적인 요소가 풍부히 들어 있으면서도 작가의 장기이기도 한 경찰 내부의 박력있는 묘사와 함께 따스한 인간미를 물씬 느낄 수 있습니다.
Q.내 인생의 '첫' 추리소설은?
A. 역시 셜록 홈즈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 경이었던 것 같고, 당시 계림 출판사에서 나오던 단편 단행본과 계몽사 소년 소녀 세계 문학전집에 들어있던 세계 추리 걸작 선집 중 어느게 먼저였는지는 알쏭 달쏭 합니다. 가장 먼저 읽었던 홈즈의 단편 단행본은 <그림자 없는 괴도>(원제 : 금테 코안경)였습니다. 최초로 읽은 장편 추리 소설은 역시 계몽사 전집에 들어 있던 코넌 도일의 <네개의 서명>이었습니다. <도난당한 편지>, <얼룩 끈>, <푸른 십자가>등이 같이 수록되어 있었지요.
Q. 재출간을 바라거나,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길 바라는 추리소설/작가가 있다면?
A. 현대 일본 미스터리가 트렌드의 주류로 등장한 이후 영미 고전 미스터리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많이 수그러 들었습니다. 가끔 나오더라도, 애호가들 사이에서 조차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이 좀 안타까운데요. 영영 출판 기회가 멀어져 가는 것이 아닌가 싶은 황금기 시절의 미번역 걸작들이 재출간, 혹은 새롭게 소개 되길 바랍니다. 제가 소개를 바라는 작품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울리치의 <새벽의 데드라인>, <밤은 천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Black 시리즈>.
딕슨 카의 <유다의 창>,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사건>, <흑사장 살인사건>
그리고,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 펠 바르, 마이 슈발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
# 자기 소개
중년을 바라보는 평범한 IT 노동자. 타고난 한량 기질로 인해 결코 직업과 밀접한 취미 활동은 하지 않는다. 추리 소설을 읽는 것도 전공이나 직업에 대한 본능적인 반동이 아닐지.
셜록 홈즈의 세례를 받은 유년 시절 이래 오랜 기간 추리소설 독자였지만, 본격적인 탐독을 시작한 것은 30대 이후이다. 앨러리 퀸, 딕슨 카 같은 고전 본격 작가부터 로스 맥도널드, 더실 해미트 같은 하드 보일드 작가, 제임스 앨로이, 로렌스 블록 같은 현대 작가, 교고쿠 나츠히코, 기리노 나쓰오 같은 현대 일본의 작가까지 특별한 취향 없이 전반적으로 즐기는 편. 추리 소설 이외에 만화와 스포츠 시청을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