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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토익 만점 수기 - 제3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심재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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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에 대해선 아마도 상당한 오해가 있을 듯 싶다. 토익 만점 수기라는 말에 혹해서, 혹시? 하는 마음으로 구입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선 말리고 싶다. 이 글은 진짜 의미에서의 '토익 만점 수기'가 아니다. 인터넷에서 조금만 검색해보면 튀어 나오는 '실전을 쌓고자 애썼고 교재는 주로 어디를 참고했으며...' 운운하는 만점자들의 어드바이스 같은 것과는 거리가 오억 광년은 멀다. 이 책엔 어드바이스도, 만점을 위한 실전 노하우 같은 것도 없다. 필승 비법도 없다. 이건 그냥 소설이다.


사실 나는 이 책을 구입하기 전부터 대략적인 정보는 가지고 있었다. 중앙장편문학상 3회 수상작이고, 당시 신문에서는 작가가 문학부 기자를 하다가 일을 그만두고 소설쓰기에 매진했으며 실제 자신이 호주에서 어학 연수를 하며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써냈다는 기사가 떠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설가가 되겠다며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왔다는 작가의 이력도 대단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체험을 참고했다는 이야기에 상당한 흥미를 느꼈었다. 그래서 책이 나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 같다. 이제야 겨우 구매하게 되었지만, 무튼.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다른 건 다 차치하고서라도, 정말이지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재미있다는 말은 개인차가 있으니 공정하지 못한가. 그렇다면 달리 말해보자. '다 볼 때까지 펼친 책장을 덮기 힘들 정도'의 소설이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잠이 오질 않아 슬쩍 첫 장을 펼친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읽는 순간까지 나는 끝내 책장을 덮지 못했다. 화장실도 안 갔다. 이 정도로 푹 빠져서 읽는 글이 정말로 오랜만이어서 다 읽고 난 후에도 한동안 정신을 못 차렸다. 엇, 하는 사이에 다 읽었다고 하면 옳은 표현일까. 그 정도로 재미있다. 재미만 있을까. 흡입력도 굉장하다.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해도 전달력이 떨어지면 소용이 없다. 일단 읽을 수가 없는 글이 대체 무슨 감동을 주고 재미를 준단 말인가. 그런 면에서 심재천은 정말로 신인답지 않다. 독자를 내내 자기 작품에 붙들어 묶을 수 있는 내공이라니. 아이유의 애교 뿐만이 아니라 이런 게 조련이다. 독자를 능수능란하게 조련하는, 그래서 작품을 떠날 수 없게 만드는 '조련'.


이 책의 소재는 신선하지 않으며 동시에 신선하다. 이렇게 느끼게 되는 이유는 이 책의 주된 소재가 '토익'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토익이란 말은 이제 너무 지겹다. 수능 직후부터 토익은 주구장창 우리 주변을 습격하고, 취업을 하고 가정을 가지고 나이를 먹어도 지겹도록 들려온다. 대학을 가도 토익, 취업을 할 때에도 토익, 승진을 준비해도 토익, 이직을 준비할 때도 토익, 자식 걱정에도 토익. 뭐든 하여간 다 토익이다. 토익 점수 얼마를 따야 어떤 직장엘 가고 어떻게 승진을 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부터 토익은 미국의 장사수단에 불과하다는 다소 비난조의 이야기까지, 토익은 정말 곳곳에서 튀어나오며 우리를 괴롭힌다. 


이러니 토익 자체는 사실 신기하지 않다. 그런데, 이 글의 토익은 신기하다. 절대로 토익을 잘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지 말라고, 포기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분명 이 글의 주인공은 토익 점수를 올려 만점을 받고 싶어하고, 그때문에 정말 황당무계한 (스스로 마리화나 운반책이 되고 재배 농장에서 인질을 자처하는 등의) 행동을 일삼고 있지만 그게 이 글의 본질은 아니다. 이 글의 주인공은 어떨 땐 정말 비열하고 안됐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하지만 정말 속이 다 상할 정도로 공감이 간다. 모의 시험에서 800점이 넘은 주인공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면서 '왜 슬퍼하고 있는 건지' 이해를 못하는 스티브도, 토익도 음모론의 일부에 불과하며 다 됐으니 넌 나한테 한국어나 가르치라는 태도의 요코도 너무나 이해가 간다. 이해가 가고 공감이 가는 상황이 우습다. 우스운데, 이상하게 자꾸 슬프다. <나의 토익 만점 수기>는 그런 글이다. 웃고는 있는데 눈물이 난다는 말은 정말 이럴 때 쓰는 모양이다. 웃는데, 나는 기쁜데, 자꾸 눈물이 난다. 그건 이 주인공이 너무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나, 도처에 있다. 토익 990점이 '당연해야하는' 사람들은. 그게 꼭 눈 두 개 달린 것처럼 자연스러운 그런 사람들은.



책 속에서는 토익 990점 만점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이 눈 두 개 달린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글은 눈 두 개 달린 사람들을 위한 글이 아니다. 때문에 눈 두 개 달린 사람으로 인정 받고 싶은, 토익 만점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들에겐 어울리지 않는 글이기도 하다. 이 글은 오히려 눈이 하나 뿐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눈은 하나 뿐이고, 토익 점수는 반토막이며, 반토막난 토익 점수로 매겨진 인생 등급 역시 그리 높지만은 못한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 양말 하나의 은혜로 이단에 몸을 던진 아버지, 아폴로 13호교를 믿고 있는 요코, 누구보다 달콤한 '풀'을 재배하면서 아내와 2년간 대화 한 번 하지 못한 스티브. 

그들의 인생점수는 반토막이다. '눈 두 개 있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그들은 모두 외눈박이다. 하지만 맛있는 바나나를 먹는 데에 눈은 별로 필요없다. 평양식 물냉면을 먹기 위해서, 2년간 별거한 부부가 한 테이블에 앉기 위해서 반드시 눈이 두 개일 필요도 없고 토익 만점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삶의 질을 판단하는 기준은 너무나 다양하고 그게 꼭 토익일 필요는 없는 거다. 남편과 대화를 하지 않아도 한국어를 배우는 속도는 빠를 수 있고, 아내와 대화를 못하고 한국어 배우는 속도는 느릴지언정 키우는 바나나는 맛있을 수도 있는 거다. 토익 점수 좀 부족하다고 인생이 망하지 않는다. 눈이 하나 없다고 죽는 것도 아니다. 

그게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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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뱅이의 역습 - 무일푼 하류인생의 통쾌한 반란!
마쓰모토 하지메 지음, 김경원 옮김, 최규석 삽화 / 이루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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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찬 블로그에서 작성한 글을 옮겨왔습니다. (원문)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밖에서 담배를 피워도 안 되고, 쓰레기를 버려도 벌금을 내고, 감시카메라 설치를 장려하는 등 왠지 모르게 사람들을 관리하려는 풍조가 강하다. 심지어는 스케이트보드나 자전거의 교통 위반에 벌금을 매기고 PC방에서 밤을 샌 것만으로 범죄자 예비군으로 취급하는 등 얼빠진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사소한 일에 벌금을 매기고 강제로 규제하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 이런 식이라면 공중 화장실에서 화장지를 40센티 이상 쓰면 벌금이라든가 방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어느 정도 이상이면 CD 5장 몰수라든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신경질 사회가 되어버릴 것 같다. 이런 것은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다.
(...) 당치도 않은 질서는 빌어먹으라는 거다. 근거 없는 규제를 지킬 필요는 없다.”


- 마츠모토 하지메, 가난뱅이의 역습 中`




마쓰모토 하지메는 이상한 남자다. 괴짜라고 부르는 게 더 좋을 듯도 싶다. 대학 시절, 요금을 멋대로 올렸는데 맛은 더럽게 없는 학교식당에 대항하기 위해 캠퍼스에서 한 그릇에 10원짜리 카레를 멋대로 팔아 치우는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세상을 유쾌하게 뒷통수 때려주는 일에 늘 앞장서왔다. 롯본기 힐즈의 오픈날엔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나베 파티를 벌였고, PSE 법안에 반대하기 위해 이동식 마루를 트럭 뒤에 끌고 다니며 그 위에서 밥을 해먹고 술 파티를 벌이는 '가정식' 데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DJ가 음악을 틀고 댄서들이 교차로에서 춤을 추고, 하드코어 밴드가 등장하고 사람들은 한바탕 어우러져 들썩들썩 가난뱅이들의 축제를 연다. 세상에, 이렇게 즐겁고도 창의적인 데모라니!

현재 재활용 가게 '아마추어의 반란' 5호점 점장을 맡고 있는 그는 참 다양한 방식으로 부자들을 조롱한다. 이 책은 그가 말하는 아마추어, 또 세상 모든 '가난뱅이'를 위한 메뉴얼이다. 첫장부터 가난뱅이로서, 가난해서 못하지만 '공짜로' 사는 법에 대해 조언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부자들을 악의적으로 비난하거나 공격하며 관계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방식은 아니다. 남에게 폐끼치지 않는 가난뱅이가 되는 것. 경찰도 때로는 친구이고 동료가 되고, 품위에 목숨을 걸고 탁상공론 외엔 관심이 없는 위정자들을 향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는 것. 세상 모든 가난뱅이와 아마추어, 루저들과 서민들을 위한 축제. 한바탕 즐겁게 놀고, 가급적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는 것. 그 꿈의 방식이 서툴고 가볍다고 해서 누가 과연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이것은 세상을 바꾸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사람 : 88만원 세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가난뱅이와 아마추어
이 책을 읽지 말아야할 사람 : 선거 결과와 당적 외엔 관심 없는 정치자, 같은 가난뱅이를 혐오하는 가난뱅이, 정전사태의 책임을 전기를 낭비한 국민의 책임으로 전가시키는 보수 언론, 무조건적인 '독설'이 지성인양 착각하는 논리 없는 진보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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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철도의 밤 - 양장본
미야자와 겐지 지음, 이선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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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이라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은하라서 빛나는 거야."

- 미야자와 겐지 <은하철도의 밤> 中



이 책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은 내가 좋아하던 작가와 작품들 속에서 숱하게 읽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원작자인 마쓰모토 레이지와 감독 린 타로는 이 동화에 영감을 받아 은하철도 999를 제작했다.) 단 한 권의 동화책은 너무나 많은 이에게 영감을 주고, 너무나 많은 곳에 영향을 끼쳤다. 아마 우리가 현재 읽고 있는 일본 작가, 만화가, 영화 제작자들의 대다수가 이 책에서 한 줄 정도의 영감은 받지 않았을까. 그 정도다. 때문에 상당히 알려져 있던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동화는 즐겁지 않다. 무엇보다, 달콤하지가 못하다. 동화가 보여주는 꿈과 환상을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이 꿈은 전혀 달거나 행복하지 않다. 여행을 함께 하는 조반니와 캄파넬라는 꿈 속에서마저도 온전히 꿈을 즐기지 못한다. 꿈을 꾸면서도 그것은 조반니가, 캄파넬라가 잊고 싶어하던 현실과 맞물린다. 은하수를 달리는 꿈을 꾸고 있으면서도 꿈은 온전한 꿈이 아니다.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마음이 묵직했던가.


꿈이 쏟아지는 은하수의 축제와 함께 열차에 올라 우주를 누비던 꿈은 한 순간에 현실로 돌아온다. 꿈에서 깨어나면 누구나 허탈하고 누구나 서럽다. 꿈에서 깬 것과 동시에 현실은 도둑처럼 닥쳐오고, 이 어린 아이들에게 그 현실은 너무도 잔인하고 서글프다. 그래도 조반니는 웃으며 강둑을 달린다. 사랑하는 친구를 잃은 상실감보다 보고 싶었던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소년은 웃는다. 그게 참 좋았다. 꿈의 거짓이 아닌, 이따금 괴롭고 잔인하긴 해도 소중한 사람을 만나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을 향해 뛰어가는 소년. 

누구나 한 번은 꿈을 꾼다. 꿈은 누구나 꿀 수 있다. 꿈을 꾸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건 사춘기의 열병처럼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래도 마냥 꿈 속에 잠겨있지만은 않기에 이 글은 슬프다. 또 마냥 꿈만 꾸는 것이 아니기에 이 글은 참 아름답다. 글의 묘사가 아닌, 전체적인 텔링을 두고 아름답다고 말해도 될런진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는 참 아름답다. 이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 내가, 그래도 이 현실을 잘 살아가고 있는 내가 참 뿌듯하다. 


은하철도의 밤은 언젠가는 끝난다. 꿈이 끝나듯 현실이 온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간다. 살아는 진다. 그렇게 모두 자란다. 어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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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를 부탁해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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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운동선수는 범인에게 반성을 촉구한다.”

오쿠다 히데오, <야구를 부탁해> 中



+) 나는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좋아한다. 오쿠다 히데오 최고의 매력은 역시 한 번 펼치면 책을 닫지 못하게 하는, 무섭도록 몰입하게 만드는 그 스피디한 전개와 군더더기가 없는 문체라고 생각하는데 그 매력의 정수는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에서 확인할 수 있는 듯 싶다. 네 편의 소설을 읽었고, 에세이집은 이번이 두 번째지만 조금도 실망스럽지 않다. 오히려 기껏 돈주고 산 책을 한 호흡에 후르륵 읽어버려서 화가 날 지경. 어쨌거나 오쿠다 히데오는 읽을 때마다 날 숱하게 감탄하게 한다. 다 읽고 난 후에야 '어 다 읽었네' 싶은 그 전개 방식, 깨알 같은 유머와 읽고 난 후 진득하게 따라붙는 여운과 단지 가볍지만은 않은 시선까지. 적재적소에 찔러넣는 위트는 또 얼마나 달인의 솜씨인지. 그 매력의 정수가 아마 에세이집들이 아닐런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자기자랑 냄새가 나지 않으면서 이렇게까지 재미있는 에세이를 쓰는 작가라니. 

정신없이 낄낄낄 웃고 나니 '아 오쿠다 히데오였구나' 하고 이제사 뒤늦게 감이 온다. 다 읽으니 왠지 개운하고 후련한 밤. 다 읽으면 항상 시원하게 져버린 기분이 든다. 오쿠다 히데오의 글은.






* 원글은 2011년 8월 23일, 달찬블로그 (http://dalchan.tistory.com/171)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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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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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너에게는 너무나 많은 일요일이 찾아올 거야.

네 소원이 이뤄지는 일요일도 분명히 찾아올 거야.

그러니 너는 돌아가. 너의 삶 속으로."


- 김연수 <원더보이> 中







나름 손을 꼽아 기다리던 김연수의 신간이 드디어 나왔단다. 출간 되었다는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당장에 장바구니에 넣고 구입을 했다. 이번 글은 어떨까 싶어 받기가 무섭게 첫 장을 열었다.

오늘 저녁의 일이다. 그리고 난 참 난감해졌다. 눈물이 도저히 멈추질 않아서.



사실 난 김연수 작가의 글에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없다. <달로 간 코미디언>을 제외하고 늘 김연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난 도도하고 시크하게 굴었다. 습작생에게 김연수의 문장은 늘 명문이고, 어떻게든 본받고 싶은 구석을 찾아내 배움을 강탈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눈을 열고 읽어댔던 모양이다.


<원더보이>는 그런 글이 아니다. 첫장부터 도무지 도도하게 굴 수가 없어서 나는 정말 난감했다. 실실 웃으며 빠져 들었고, 여러 다양한 캐릭터의 모습들에 웃기도 하고 비통하기도 하고 짠해지기도 하고. 한참 읽던 차에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게 정말 난감하다. 이건 이상한 일이다. 이 책은 전혀 슬프지 않다. 억지로 감동을 쥐어 짜는 것도 아니고 클리셰에 가까운, 때문에 누구라도 울 수밖에 없다는 소위 '최루탄급'도 아니다. 사실 재미있다. 정말 즐거운 글이다. 즐겁고 재미있고 우스워야 하는데, 웃기지가 않다. 재미있지만 우습지는 않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꼼꼼히 보면, 이 소설엔 참 기이한 풍경들이 많이 나온다. 겉으론 태연히 희극을 진열하면서 뒤돌아 곰곰히 생각해보면 전혀 우습지가 않다. 아니, 슬프다. <원더보이>를 생방송 무대 위에 올리고 청와대로 들여보내야 하는 인공적인 연출이 우습다가도 그들이 울고 있는 모습에 나도 운다. 원더보이에게서 시작된 눈물은 사람들을 울리고, 책을 읽는 나에게까지도 전이 되는 모양이다. 


난 80년대를 잘 모른다. 그 시대를 살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이라곤 올림픽 개막식에서 굴렁쇠를 굴리던 소년의 얼굴이나 호돌이 정도다. 숱한 책이나 매체 속에 놓여 있는 그 시대는 늘 내게 인공적이었다. 잘 짜여진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처럼 사람들은 그린듯이 웃고, 그린듯이 환호한다. <원더보이> 속에 담겨 있는 그 시절은 좀 더 인공적이다. 모두가 웃고 모두가 밝고 건강하다. 감동이 생산되고 웃음을 창작하던 시대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 글은 개운하다. 내게도 그렇지만, 아마 이 글 속의 인물들이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 웃으라며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줘서 웃는 대신 사람들은 운다. 웃음이 상처를 잊게 할지 몰라도 낫게 하는 것은 결국 눈물이다. 누군가는 눈물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마음을 낫기 위해서라고 그랬었던가. 그래서 운다. 덕분에 나도 운다. 그리고 지금은 후련하다. 덕분에.





개인적인 이유에서, 내게 <원더보이>는 꼭 필요한 소설이었다. 재미있고 즐겁고 유쾌하지만 이 글은 내게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걸 다시금 깨닫게 한다. 아직 울 수 있다는 것. 그래도 맘껏 울 수 있고 아파할 수 있다는 것. 언젠가는 눈물도 사치가 되는 그런 세상이 오지 않을까. 모두가 괜찮고 모두가 잘 살고 있다며, 다 잘 해결 될 거라면서 덮어놓고 웃기만 하는 세상이 오게 되면 우린 정말로 눈물을 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이 글이 참 고맙다. 아직 울 수 있어서 기쁘다. 맘껏 울어서 원더보이에게 고맙고, 글에 고맙고, 마음을 찔러준 문장들에 고마우며 이것들을 모두 잘 빚어내준 김연수 작가에게 가장 고맙다.


이유 없이 울 수 있는 소설이 존재한다는 것, 웃으면서도 울 수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김연수는 정말로 좋은 소설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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