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들 - 돈과 기름의 땅, 오일샌드에서 보낸 2년
케이트 비턴 지음, 김희진 옮김 / 김영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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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재미있는 그래픽노블 참 많다. 지난해, <모비 딕>을 그래픽노블로 읽었고, 올 초에는 카프카의 <실종자>도 그래픽노블로 만났다. 두 책 모두 고전소설을 기반으로 다시 쓴 그래픽노블이었다. 이번에 만난 <오리들>은 창작(?) 장편 그래픽노블이다. 저자는 캐나다 출신의 베스트셀러 만화가인데, 그가 만화가로 명성을 얻기 직전 캐나다 서부 석유 매장지 앨버타의 오일샌드 채굴 현장에서 보낸 2년간의 경험을 담은 회고록이다.

캐나다 동부의 해변 마을에서 자란 케이트는 고향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되자 ‘돈이 흘러넘치는 곳’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서부의 오일샌드 광산으로 떠난다. 목표는 단 한 가지, 학자금 대출을 갚아버리고 원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 그렇게 그녀는 오일샌드 광산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녀는 무엇을 겪게 될까?

작가는 오일샌드에서의 시간이 십여 년쯤 지난 후에야 이 책 <오리들>을 쓸 수 있었다. 여기에는 앨버타의 장엄한 자연을 배경으로 석유 산업이 펼쳐놓은 거대한 기계 설비와 그 속에서 하루하루 간신히 버텨가는 노동자들이 있다. 여성보다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지리적으로 고립된 작은 사회 안에서 젊은 여성이었던 주인공 케이트는 너무 쉽게 희롱의 대상이 된다. 지루함과 고립감, 외로움, 우울감 속에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그저 버텨야 했던 이들은 자기들만의 작은 사회 안에서 세상의 단순한 규칙들을 으깨어버린다. (남성이 여성보다 수적으로 50 대 1까지 우세할 때, 젠더 폭력은 일어난다. 이는 멀쩡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냐는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는 ‘일’은 석유를 캐는 것. 당연하게도 오일샌드는 공해를 낳고, 점점 늘어나는 정착민 인구는 그 지역의 원주민 공동체에 심각한 사회 경제적, 문화적, 환경적, 또 건강상으로도 악영향을 끼친다. 단지 ‘돈’이 많이 ‘도는’ 곳이라고 해서, 학자금 대출을 빨리 갚아버리려고 오일샌드에 왔던 케이트가 당장에 오일샌드의 사회적 문제를 보기는 어려웠겠지만- 그것은 끝내 그들 앞에 오리들로, 검은 물로 모습을 내비친다.

오일샌드에서의 2년은 그녀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생각보다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그녀는 목표했던 학자금 대출 갚기에 성공했다. 끔찍한 순간도 많았지만, 그럭저럭 지낼만할 때도 있었다. 저자가 그런 날, 그러니까 ‘그럭저럭 지낼만할 때’도 이 이야기에 담아주어 좋았다. 끝내 이 이야기를 세상에 해 준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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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반에 디지털 악당이 있다고? - 안전하고 즐거운 온라인 바른 생활 처음부터 제대로 19
김경희 지음, 김준영 그림 / 키위북스(어린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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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한 영화 <댓글부대>는 20대 청년들의 온라인 악행을 보여줍니다. 이들의 장난 같은 아이디어는 익명의 수많은 네티즌들을 거쳐 누군가를 죽이기도 하고, 어떤 사업을 망가트리기도 하죠. 영화는 세 명의 청년에 집중했지만, 사실 보이지 않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게시된 내용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그것을 진짜라고 믿었던 사람들이죠. 온라인 세계가 대중에게 열린지 벌써 30년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온라인의 익명성과 그로 인한 피해도 새로운 문제만은 아니에요. 하지만 안전하게 길을 건너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듯, 온라인 안전교육도 늘 중요합니다.


<우리 반에 디지털 악당이 있다고?>는 저학년 아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에피소드로 구성된 온라인 생활예절에 관한 문고예요. 얇은 문고본이라 대부분의 아이들이 한 호흡에 다 읽어나가겠지만, 사실 안에는 다섯 개의 큼직큼직한 이야깃거리가 들어있습니다.


사건1. 친구가 인터넷에 올린 숙제를 그대로 베껴서 발표한다.

사건2. 게임을 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에게 욕을 한다.

사건3. 친구가 도둑이라는 가짜 뉴스를 학교 익명 게시판에 올린다.

사건4. 친구가 혼자 춤추는 모습을 몰래 찍어 인터넷에 올린다.

사건5. 친구가 상처받는 것은 아랑곳 않고 익명으로 악성 댓글을 단다.


하나하나의 사건을 두고 아이들과 이야기 나눠본다면, 저작권은 무엇이고 사이버 폭력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거예요. (결국 온라인 세계와 오프라인 세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면 훨씬 안전한 온라인 세계가 될 거라는 것도요!)


요즘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디지털 세계를 만납니다. 거울이 아니라 카메라를 통해 ‘또 다른 자아‘를 만나죠. 그래서 오프라인 생활교육을 잘 하면, 온라인에서도 건강한 생활을 할 거라고 쉽게 생각해버리기도 하는 것 같아요.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사람들이 대개 친구들이나 가족에 한정된 경우가 아직은 많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오프라인으로는 하지 않을 말을 온라인에 기대 쉽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불필요한 메시지를 너무 많이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온라인에서의 말투는 어떤지, 대화의 시작과 끝은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말이죠. 이런 것들은 저학년 때 이야기 나누고, 다듬어나가지 않으면 점점 사생활의 영역이 되어 종잡을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엄마, 아빠라고 아이의 핸드폰을 언제든지 열어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아이들 교실에서 일어나는 사이버 폭력을 보니 마음이 복잡해요.

여러분들은 어떤 미디어 고민하고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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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궁 이야기 - 몸의 중심에서 우리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하는 존재에 관하여
리어 해저드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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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궁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자궁이 생리나 임신 중일 때 말고 다른 때에는 무슨 역할을 하는지, 여자아이들 몸속에 있는 자궁은 어떤지, 폐경 이후의 자궁은 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렇다 하게 생리 증후군도 없는 나는 자궁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물론, 임신 기간에는 자궁의 존재감을 매일 느꼈지만.


이 책은 자궁에 대해 생각한다. 무려 500여 페이지를 할애해 자궁에 대해 쓴다. 자궁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취급되어 왔으며, 유아기에서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우리 몸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여성에게만 있는 장기이므로 더욱 복잡한 오해를 받아온 자궁이 하나의 장기를 넘어 어떤 과학적, 역사적, 문화적 맥락 위에 놓여있는지 살핀다. 당연히 수정과 임신, 수축, 진통, 상실, 제왕절개, 폐경 등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는 여성으로 살면서도 꽤나 낯선 텍스트였다. 그것은 생리는 숨겨야 하는 것이며 임신은 성스러워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에 동화된 결과일 테다. 주지하다시피 전 세계 문화권에서 생리하는 사람과 그들이 흘리는 피에는 수치심과 오명이 덧씌워졌다. 성서와 문학, 구전 역사에는 생리하는 소녀와 여성을 불결하고 부정하며 악마에 가까운 존재로 취급해온 수많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여성의 피에는 더럽히고 훼손하는 힘, 사냥이나 추수, 축제와 같은 중요한 행사를 방해하고, 성욕이나 여성의 쾌락을 금지하는 힘이 있다고 여겨졌다(p.39) 반면 임신은 아름다워야 했다. 생명이 탄생되는 순간은 거룩해야 했고, 모든 순간은 축복으로 가득해야 했으므로 임신 기간에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축소되거나 삭제되어야 했다. (벌써 십 년 전 이야기인데도 잊을 수 없는, 입덧의 매운맛이더라도)


자궁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그것이 내 몸속에 있으면서도 끝내 나의 것이 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생김새가 모두 다르듯 우리의 자궁도 모두 다를 거라는 생각도 이전에는 하지 못했다. 내내 낯설었지만 새롭거나 놀랍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이상 숨겨야 할 것이나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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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더, 많은 숫자의 지배 - 숫자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똑똑하게 사는 법
미카엘 달렌.헬게 토르비에른센 지음, 이영래 옮김 / 김영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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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덮어둔 책 표지를 보고 남편이 “숫자만큼 정확한 게 없지!”라고 말했다. 맞다. 숫자는 정확하다. 구체적이고, 정밀하고, 명료하다. 하지만 숫자가 표현하고 있는 이 세계는 정직하지도, 통제 가능하지도, 중립적이지도 않다. 회색으로 가득한 이 세계를 숫자는 어떻게 그토록 명료한 세계로 바꾸는 것일까.



이 책은 숫자가 우리 사회를 명료한 수의 언어로 번역하는 사이, 삭제되거나 축소-과장된 무엇에 대해 말한다. 우리의 세계를 뒤덮은 숫자는 우리의 일상과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문화를 계산기 안으로 밀어 넣는다. 이 세계가 너무 복잡해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건 우리 인간이지만, 그 사이 우리 삶까지도 요약되고 축소되어 버렸다. 다채롭던 우리 삶이 단순하고 정확한 것으로 바뀌었고, 수로 표기되지 않은 것들은 의미를 잃고 녹아내린다. 내가 느낀 음식의 맛보다 별점이, 눈으로 보는 것보다 몸무게가, 얼마나 편안한지 보다 매매가가 더 큰 의미를 가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 걸까. 



물론, ‘수’는 아무 잘못이 없다.


잘못은 수에 말보다 많은 정보가 있다고 ‘믿는’ 우리에게 있다. 그 어떤 수도 다른 정보를 모두 대체할 수는 없다. 다른 정보를 이용해 수를 해석하도록- 그리하야 수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애써야 하는 건 오늘의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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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 모두가 똑같고 모두가 고립된 세상에서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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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24일 일본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제1원전 내 오염수를 기어코 바다에 방류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다섯 달이 지났다. 그 사이 국내외의 뜨거웠던 논란은 일단락된 것 같다. 방류된 ‘처리수’가 인체를 비롯한 생태계에 안전한 것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길이 없다. 도쿄전력에서 하고 있다는 ‘과학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처리 과정에 대해서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국제원자력기구는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믿어줬다. 그 모든 것은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무엇에 대한 전문가일지는 몰라도) ‘전문가’와 함께 진행되었다. 우리는 지난 두 번의 토론을 통해서 여기서 말하는 과학이 ‘어떤 과학’이며, ‘무엇’을 위한, 또 ‘누구’를 위한 과학인가 하고 되물었다. 그리고 그 사이, 비단 과학뿐만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모든 세계가 오염수가 방류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었던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정면 돌격이 사라진 세계


  한병철의 신간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는 혁명을 꿈꿀 수 없고, 할 수도 없는 현대 사회를 조망한다. 히스테리적으로 죽음을 거부하면서 미용 지상주의를 추구하는 ‘보톡스 좀비’나 ‘피트니스 좀비’를 지적하며 설 죽은 삶의 모습들이라 말한다. 여기에 더해 이제는 낯설지 않은 질문을 다시 한번 던진다. 과연 우리의 소비 행태, 가족 상황, 직업, 취향, 거주 형태가 ‘우리가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클릭이 저장된다는 메시지가 더 이상 놀랍지 않은 세계에서, 빅브라더인 거대 IT기업이 우리를 대신해 생각한다는 것도 더는 낯선 주장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지배 체제는 왜 이토록 안정적일까? 그 체제에 맞선 저항은 왜 이토록 적을까? 왜 저항들은 모두 이토록 빠르게 물거품으로 돌아갈까? 부자와 빈자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혁명은 어찌하여 더는 불가능할까? (8)


  ‘구글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보다 1987년 독일에서 인구조사에 맞서 (바리케이드까지 설치할 정도로) 격렬하게 저항했다는 이야기가 새롭다. 독일 정부가 알아내려 한 정보들은 그다지 대수로운 것들도 아니었다. 직업이나 학력, 가족상황, 출근 거리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에 당시 독일인들은 무섭게 분노했다. 폭탄이 터지고, 대규모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오늘날 우리라면 간단하게 체크박스에 ’동의‘하고 말 일이다. (실로 우리는 더한 정보도 쉽게 공유하고 있지 않나. 은행이 아닌 포털사이트도 우리의 ’자산 내역‘을 소상하게 알고 있다) 우리는 왜 누군가가 폭탄을 던질 일에 쉽게 동의하고 마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왜 그런 분노가 일지 않는가. 혹은 왜 우리의 분노나 저항은 모두 이토록 빠르게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일까.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가 ’처리수‘로 이름을 바꾸는 사이, 과학자는 입을 다물었다. 오염수가 안전하다는 데 모두 동의해서만은 아니다. ’어떤‘ 위험이 있는지, 아직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하지 않은 것이라면 확실해질 때까지 보류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하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정치는 ’언젠가‘ 밝혀질 과학적 진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빠른 결정은 정치의 중요한 능력 중 하나니까. 그렇게 방류되는 오염수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 사회를 뒤덮은 ’불확실성‘과 ’불안’을 마주한다. (‘확실하지 않은 것은 말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꼭 과학자가 아닌 우리도 종종 듣고 커 왔지 않나)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인류는 아주 오랜 시간 ‘확실한’ 것, 그러니까 진리를 찾아 헤매왔지만 결코 찾아낼 수 없었다. (그저 공통된 감각을 위해 ‘표준’을 약속하고, 그를 지키기를 모두에게 요구했을 뿐) 게다가 현대사회의 능력주의와 유동성은 그 불확실함을 개인에게로 돌렸다. 더 이상 불안함은 이웃과 공유되지 않는다. 나의 불안은 오롯이 나의 몫이며,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그 누구도 돌봐주지 않는다. 그것이 모두를 괴롭게 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회는 부러 안전망을 설치하지 않는다. 그것이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포르노의 시각적 영향력은 지각 자체를 장악하여 포르노적으로 만든다. 오늘날 우리는 느린 것, 긴 것, 조용한 것을 견디지 못한다. 끝없는 결합들과 상황 전환들에 빠져드는 길고 느린 이야기를 위한 참을성이 더는 없다. 대세는 유혹과 에로티시즘 없이 신속하게 실사로 직행하려는 포르노적 강박이다. 유혹적인 것은 감정적인 것에 밀려난다. 직접 전염을 위하여 암시가 기피된다. (87)


  우리는 철저히 생산을 지향하는 사회, 철저히 긍정성을 지향하는 사회에 산다. 이 사회는 생산과 소비의 순환을 가속하기 위해 타인 혹은 이방인의 부정성을 없앤다. 오로지 소비 가능한 차이들만 허용한다. 다름을 빼앗긴 타인을 사랑할 수는 없다. 단지 소비할 수만 있다. 때문에 우리의 불안은 초조를 낳는다. 뭔가를 계속 해야겠는데, 불안한 마음이 집중을 어렵게 한다. 무의미한 바쁨만 반복해서 생산된다. ‘시성비’가 올해의 트렌드인 것도 같은 맥락일테다. 영화나 드라마는 물론이고 뉴스도 해석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아, 그렇구나’에 덧대어 ‘와우!’면 충분하다. 해석하기를 원하지 않고, 해석되기를 기다리지 않는 세계에서는 어떤 결합도, 변화도 일어날 수 없다. 그저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집회도 없고, 권력자의 결정도 없는데 일은 계속 진행된다. 전문 지식은 과연 정치적 결정을 대체할만 한가. 추락하는 정당의 지위와 우리의 무력함은 내일을 어떤 세계로 이끌 것인가.


  디지털과 연결된 투명성은 총체적 예측 가능성을 추구하죠.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해야 해요. 하지만 예측 가능한 행위는 없습니다. 행위가 예측 가능하다면, 그것은 행위가 아니라 계산일 거예요. 행위는 항상 예측 불가능한 영역으로, 미래로 뻗어나갑니다. 바꿔 말해, 투명사회는미래가 없는 사회예요. 미래란 완전한 타자의 시간적 차원이니까요. 오늘날 미래는 다름 아니라 최적화된 현재예요.(150)


  시간을 두고 익어야 할 것들이 있다. 그리고 사회는 결과가 정해져 있지 않는 실험공동체여야 한다. 실험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그 결과를 알 수 없을 뿐더러, 같은 실험은 반복해서 일어날 수 없다. 실험의 조건들이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단 한번밖에 할 수 없는 실험의 참여자라는 책임감이 필요하다. 2024년의 한국을 살고 있는 사람은 미래에 다시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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