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어록청상 푸르메 어록
정민 지음 / 푸르메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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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김제동 어록(語錄)이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 어록 중에 하날 가져오면 이런 식이다. “키가 작았던 나폴레옹은 자기 자신의 키를 땅으로부터 재면 다른 사람보다 훨씬 작은 키지만, 하늘에서부터 재면 자신의 키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높은 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희망을 가지시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세요.” 키도 작고 볼품없는 외모에 그다지 특별한 재능이 있어보이진 않지만, 말은 참 빠르고 재미나게 잘하는 김제동의 어록이 연일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화제가 되었던 데에는 이런 식의 촌철살인(寸鐵殺人)과 같은 반전과 당대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일순간 꺾어버리는 단순명쾌한 사고의 역전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폴레옹의 일화를(그것이 실제 있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용케도 찾아와 다만 입으로 옮겨놓았을 따름인데도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겐 주옥과도 같은 교훈을 주고 있기에, 김제동만의 어떤 호소력을 높이는 말하기 방법이 곁들여져서이겠지만, 한때나마 화제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서 흔히 어록(語錄)이란 말이 유행이 되었다. ‘누구누구 어록’이라고 해서 재미난 말들, 혹은 말실수들 같은 것을 모아놓고 웃고 즐기는 것이 유행 아닌 유행을 탔다. 가장 최근의 것으로 내가 아는 것 중 하나는 전거성, 즉 전원책 변호사가 텔레비전 토론 등에서 한 발언들을 모아놓은 어록이다. 그 사람 말은 참 황당무계한 면이 없지 않지만, 가히 격분에 찬 말하기 모습은 너무 웃기게 재밌다. 아무튼 이 어록의 유행이 다만 웃기는 말모음 정도로 저급화되긴 했지만, 그 유행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는 김제동의 말모음은 충분히 ‘어록(語錄)’이란 말이 지니는 무언가 거창하고 대단스런 의미에 값하는 것이지 싶다.

  정민 선생도 이 어록의 유행을 감지했던 것일까? 그랬다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요즘 무슨 어록이니, 누구 어록이니 하는데, 누구누구 말실수나 모아놓고 웃고 즐기는 것에 ‘어록(語錄)’이란 거창한 명칭을 붙여놓은 것이 못내 불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어쩌면 정민 선생은 이 어록 유행에 종지부(終止符)를 찍고 싶었을지 모른다. “어록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말이다. 어록(語錄), 말씀 어(語)에 기록할 록(錄)을 쓰는 이것은 그냥 흔하디흔한 말들을 기록하여 모아놓은 것은 아니다. 말 중에서도 말씀이 될 만한 것을, 그러면서도 그것을 베끼어 써서 책으로 만들어 낼 만큼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민 선생은 어떻게, 무엇을 가지고 이 저급화된 어록의 유행에 종지부를 찍을까?

  그것은 바로 정민 선생이 엮고 첨언(添言)한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이다. 최근 다산을 연구하여 방대한 저술을 내보인 정민 선생이지만, 다산의 말과 글들이 어찌나 높고 귀한지 그 방대한 저술을 하고도 끝내 남은 귀한 말씀들이 있어, 아쉬운 마음에 모아 엮어 놓은 것이 이 책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이다. 그런데 이런 아이디어는 오롯이 다산 선생의 방법을 그대로 표절한 것이다. 다산은 이황의 『퇴계집』을 “매일 한 편씩 아껴서 읽”으면서 마음으로 공감한 귀한 글귀들을 모으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들을 덧붙여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엮었다. 다시 정민 선생은 다산의 방법 그대로 다산의 글귀들을 모아 “말게 감상한”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을 펴낸 것이다. 말하자면 정민 선생의 「다산사숙록」인 셈이다.

  ‘다산어록(茶山語錄)’.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어록이야 말로 어록의 지존(至尊)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어록이라는 것이 ‘귀한 말씀’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할 때, 그 귀한 말씀이란 것은 금가루를 갈아 먹인양하여 쓴 글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록으로 남겨 고이고이 간직하고 세대를 넘어 세월을 넘어 읽고 또 듣고, 길이길이 남기고 되새길 만한 그런 말씀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제동의 그 ‘말씀’들은 어느 정도 가치가 있지 싶은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도 좋게 보아줘도 그것이 세대를 넘기고 세월을 넘겨서까지 어록일성 싶지는 않다. 진정한 어록이란 이런 것이야 하고 보여줄 수 있을만한 ‘말씀’들이 어디 한갓 연예인의 입에서 쏟아진 것들이어야 쓰겠는가 하는 구시대적 사고에서 오는 그런 불순한 발상에서만은 아니다. 시대를 넘어 세월을 넘어 아직까지 우리에게 강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귀한 말씀들이 분명히 여기 있기에 그런 것이다.

  ‘청상(淸賞)’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맑게 감상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감상하는 이의 자세를 나타내는데, 감상하는 그 대상이 분명 맑고 청아하게 울릴 때에야 비로소 청상(淸賞)이 가능한 것이다. 정민 선생이 ‘청상’한다고 하였으니, 그가 그렇게 맑게 감상하는 것은 다름 아닌 다산 정약용 선생의 ‘귀한 말씀’이다. 다산의 방대한 저술들 중에 “삶의 자세 전반에 관한 성찰과 충고”를 추려 엮은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을 손에 들고 한 말씀 한 말씀 되새기는 것은 정말이지 “우리의 복이요” 큰 기쁨이다. 그래서 나도 “함께 나누고 싶다.”

  200년 전 쯤에 살았던 다산 선생의 말씀이 그 당시에도 그러했겠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산은 이렇게 말한다. “죽는 날 사람과 뼈가 함께 썩고, 한 상자의 책도 전하는 바가 없다면 삶이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人與骨俱朽, 一簏之書無所傳, 猶之無生.)” 여기에 정민 선생은 좀 더 격하게 덧붙인다. “마음공부를 하라 하면 ‘한가한 소리 하고 앉았다’고 빈정댄다. 책을 읽으라면 ‘따분한 말 좀 그만 하라’고 한다. 온통 돈 벌 궁리, 부자가 되어 떵떵거리고 살 생각뿐이다. 결국 이룬 것 없이 죽어 몸뚱이가 식기도 전에 이름과 같이 잊혀진다. 자식들은 그 재물을 두고 싸움질을 한다. 세상을 살다 가는 보람은 그런 것들 속에는 들어 있지 않다. 속에 품은 생각의 크기가 대인과 소인을 가른다. 개돼지도 배부르면 기뻐한다. 개돼지도 별 걱정 없이 살다가 간다.” 이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뼈아프게 다가오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돈만을 좇아가는, 썩어질 것들에만 충성하는, 물신(物神)의 광신자들만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은 말이 주는 울림이 적다고 하겠는가?

  “성인(聖人)이 되느냐 광인(狂人)이 되느냐는 뉘우침에 달려 있다.(其聖其狂, 唯悔吝是爭.)”라거나 “진실로 부모에게 능히 효도하는 사람은 비록 배우지 않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고 하겠다.(苟於父母能孝者, 雖曰不學, 吾必謂之學矣.)”는 다산의 어록에는 날카로운 칼날로 찔러오는 그 무엇이 있다. 항상 생각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것은 미친놈이 되지 않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나와서 석사가 되고 박사가 된들 무엇 할 것인가? 이 시대 재주가 뛰어나고 박사들이 넘쳐난다지만 그 중에 사람구실 제대로 하는 진짜 사람을 몇이나 될까? 제 부모도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이 말씀들은 가히 촌철살인, 그 자체다.

  특히 다산 선생은 독서를 많이 하기로 유명하다. 다산의 말씀들 중에 독서에 관한 언급은 책 한 권으로 따로 엮어내어도 충분할 만큼 어느 하나도 소중한 말씀이 아닌 것이 없다. 다산은 독서의 방법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보탬이 안 되는 책을 읽을 때는 구름 가고 물 흐르듯 해도 괜찮다. 하지만 백성과 나라에 보탬이 되는 책을 읽을 때는, 단락마다 이해하고 구절마다 깊이 따져 대낮 창가에서 졸음을 쫓는 방패막이로 삼아서는 안 된다.(凡無益於世之書, 讀之可如行雲流水. 若其書有裨於民國者, 讀之須段段理會, 節節尋究, 不可作午牕禦眠楯而已.)” 여기에 정민 선생의 이런 첨언도 또한 명쾌하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읽느냐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다산의 어록을 읽으면서 정민 선생이 청상(淸賞)한 바를 또한 훔쳐보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이다. “평생 가까이에 두고 스승으로 삼을 책 한두 권을 갖는 것이 독서의 큰 보람이요 행복이다.” 정민 선생의 ‘청상(淸賞)’ 중에 하나를 좀 길지만 옮겨보자. “과문은 과거 시험장에서 쓰는 글이다. 실용과는 거리가 있다. 이문(吏文)은 아전들이 행정 실무에 쓰는 실용문이다. 요령만 있으면 된다. 고문은 삶의 지혜가 담긴 말씀이다. 배우기는 고문이 가장 쉽다. 과거 공부를 하는 사람은 과문만 공부한다. 고문을 공부하라고 하면 시험에 안 나오는데 왜 하느냐고 되묻는다. 고문을 열심히 익히면 과문은 저절로 잘 써진다. 과문에만 힘 쏟으면 고문도 안 되고 과문도 안 된다. 글은 테크닉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쓴다. 테크닉을 아무리 익혀도 정신의 뒷받침이 없이는 한 줄도 쓸 수가 없다. 과문을 배우는 지름길은 고문을 천천히 익히는 것이다. 좋은 글을 쓰려면 먼저 생각의 힘을 길러라. 글쓰기의 기술과 잔재주를 익히는 것은 별 도움이 안 된다. 기본기를 충실히 닦아라.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온다.” 다산 선생의 말씀을 좀 더 쉽게 옮기면서 보다 직접적으로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특히나 논술이라는 감옥에 빠져버린 어린 학생들에게 일침을 주는 또 다른 어록이다. 다산과 정민을 함께 읽는 두 배의 즐거움이 이 책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에 있다.

  이 밖에도 구구절절한 다산의 어록이 많다. “즐거움은 누림을 급히 하지 않아야 늙도록 이어지고, 복은 다 받지 않아야만 후손까지 미친다네.(樂不亟享, 延及耄昏. 福不畢受, 或流後昆.)”, “무릇 재물을 비밀스레 간직하는 것은 베풂만 한 것이 없다.(凡藏貨秘密, 莫如施舍.)”, “대저 이미 동서남북의 가운데를 얻었다면 어디를 가든 중국 아님이 없거늘, 어찌 이른바 동국으로 본단 말인가? 대저 어디를 가도 중국이 아님이 없을진대, 어찌 이른바 중국으로 본단 말인가?(夫旣得東西南北之中, 則無所往而非中國. 烏覩所謂東國哉! 夫旣無所往而非中國, 烏覩所謂中國哉!)” 등의 말씀들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이렇게 200년 전을 살았던 다산 정약용의 어록은 오늘날에도 구구절절이 유효하고 새롭다. 오랜 세월을 묵혀 읽어도 새롭게 발효되는 말씀이고 나서야, 진정한 어록이라 이름하는데 손색이 없지 않겠는가? 김제동 어록이 따라올 수 없는 지경에 다산의 어록이 있음을 새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정민 선생이 정리하여 첨언한 이 책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은 다만 인터넷 검색으로 간단히 찾아 여흥삼아 읽고 보는 김제동 어록을 비롯한 누구누구 어록과는 달리, 책상 위 한 곳에 고이 모셔두고 하루하루 읽고 되새기며 ‘맑게 감상’하고 나를 돌아보게 하는, 진정한 이 시대의 어록이지 싶다. 이쯤 돼서는 일전의 어록 유행도 더는 나대기가 어렵지 않겠나? 연암(燕巖) 어록이 나온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서가에는 3, 4천 권의 책을 꽂아두고, … 마루에 올라 방에 들면 거문고 하나와 투호 하나가 있다. 붓과 벼루, 책상과 도서의 배치가 고아하고 정결해서 기뻐할 만하다.(揷架書三四千卷, … 上其堂入其室, 有琴一張, 投壺一口. 筆硯几案圖書之觀, 雅潔可喜.)”는 다산의 말이 어찌 내 마음과 똑같은지 너무 기쁘고 즐겁지 않을 수 없었다. 40세 이전에 4천 권의 책으로 방안의 네 벽을 채우고, 책상 위에는 볼펜과 연필을 채운 단정한 필통이 한 곁에 놓여 있고, 한 쪽엔 컴퓨터가 있으며, 한쪽 구석엔 기타와 피아노가, 또 다른 쪽엔 바둑판과 바둑알이 놓여 있는 곳, 들어서면 오랜 된 책 향기가 깊게 배어나오는 그런 서재 하나 갖고 싶은 내 마음이 간절하다. 다산이 기뻐했던 그런 공간과는 많이 다르면서도 그 맥은 다르지 않은 그런 공간, 그런 곳을 하루 빨리 마련하여 다산의 그 마음과 나의 이 마음이 서로 통하는 그 기쁨을 만끽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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