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 훔치기 - 한 저널리스트의 21세기 산책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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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를 아는가? 잘 알다시피 그는 신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프로메테우스가 건내준 이 불로 인해 인간은 밝은 세상, 곧 文明의 세계를 열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에게는 '코카서스 산중에서' 영원히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얻었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윤동주, 「간」부분)

고종석. 그는 프로메테우스가 아직도 저 '코카서스 산중에서' 간을 쪼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금, 21세기의 서막에서 불이 아닌 '코드'를 훔치고 있다. 인류가 불로써 개안(開眼)을 얻었다면 새로이 맞이하는 세 번째 천년에는 새롭게 변화할 세상과의 접속이 필요한 것일까? '코드'가 맞아야 '접속'이 가능할 터이다. 이 '불확실한' 21세기에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접속'하여 생존의 전류가 흐를 수 있는 '코드'가 필요하다. 이 코드를 고종석이 훔치고 있다.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제우스의 응징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기억하는가? 온갖 악과 질병과 고통이 온 세상에 퍼져나갔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친 대가라나. 이 상자가 닫혔을 때 그 안에 희망만이 남았다고 한다. 고종석이 '코드'를 훔친 대가는 무엇일까? 그의 '우둔과 경박'에 대한 비난과 질타일까? 인류에게 주어질 또다른 판도라의 상자일까? 그 둘 모두일수도 있겠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미리(먼저) 생각하는(아는) 자'란 의미를 갖고 있다. '선지자(a prophet)'라고 옮길 수 있을 터이다. 선지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곧, 예언이 된다. 그러므로 그는 예언자이기도 하다.

"모색은 부분적으로 전망이다. 모색이 일반적 전망과 다른 것은 그 속에 의지나 욕망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망은 일종의 예언이다."(8쪽)

고종석은 여기서 21세기를 모색한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전망'이다. 또한 그것은 '일종의 예언'이다. 그는 조심스러워 하지만, 그가 훔쳐내고 있는 '코드'는 프로메테우스가 훔친 '불'이며, 따라서 그는 프로메테우스이길 자처한 것이다. 곧 우리 에피메테우스들을 일깨우는 선지자요, 예언자가 된 것이다. "너무 구체적인 예언은 엇비슷하게 맞추었더라도 꼬두리를 잡히기 쉽다. 추상적으로 두루뭉실하게 얘기함으로써 도망갈 구멍을 미리 마련해 놓는 것이 슬기롭다."며 넋두리를 부리긴 하지만 말이다.

'예언'하면 아무래도 노스트라다무스가 생각이 난다.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지금도 자신들을 예언자라고 떠벌이지만, 아직까지 노스트라다무스란 이름을 따라 올 자는 없어 보인다. 고종석 자신의 훔쳐낸 그 '코드'의 비밀들이 21세기를 살아갈 우리,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유효하게 된다면, 그를 이렇게 불러도 좋으리라. '고'스트라다무스 라고. 그럼 '고'스트라다무스 고종석이 펼치는 21세기의 예언들을 맛보는 것이 좋겠다.

고종석이 21세기의 '코드'를 훔쳐내려는 발상은 아무래도 그 자신에게서 온 것은 아닌 듯 하다. 그보다 앞서서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가 먼저 21세기를 예언했다. 『21세기 사전』(1998)이 그것인데, 지금은 대부분의 인터넷 서점에서 품절이다. 구해 보고 싶어도 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자크 아탈리의 예언이 어떤 것인지는 고종석이 언급하는 정도밖에는 알 수가 없다. 아무래도 썩 신통치는 않은 모양이다. 신통한 것이었다면 여전히 잘 팔리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니면 어쩔 수 없고.

아탈리의 21세기 예언을 살짝 보면 "갈기갈기 터지고, 희희낙락하고, 야만적이고, 행복하고, 무분별하고, 기괴하고, 살아내기 어렵고, 해방적이고, 소름끼치고, 종교적이고, 세속적이고 … 그것이 21세기일 것이다."라는 식이다. 고종석은 얼핏 그 말에 동의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21세기도 틀림없이 모순의 시대일 것이다." '모순의 시대'라!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고, 둘 다 일 수 있고,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즉, 갈피를 잡을 수 있다는 말인데, 애초에 21세기를 예언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는 소리인가? 그렇다면 이 책 『코드 훔치기』는 '책 앞에'를 써놓고는 더는 자판을 두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모순의 시대'란 역설에서 무언가 특별한 의미찾기를 그는 '모색'하고 있다.

그의 예언은 앞서 그가 피할 구멍을 미리 파놓은 듯 한 넋두리와는 다르게 구체적이면서도 단호해 보이기까지 하는 것들이 많다. 이를테면 첫 장에서부터 그는 '사회주의의 미래'를 단호히 점친다.

"확실한 것은 두 가지다. 첫때, 사회주의가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의 형태로서다. 사회주의 '체제'의 부활은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불가능하다. … 둘째, 그 살아남는 사회민주주의는 제3의 길이 아니라, 조스팽식 사회주의에 가까울 것이다."(22~3쪽)

이런 단호함 속에도 피할 구멍은 파놓는 치밀함도 엿보이긴 한다. 이것은 그의 명석함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단호함 속의 치밀함은 허무맹랑한 예언 속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치밀함'은 그가 단호하게 예언할 수 있도록 그의 사고의 끈을 잡아 물고 늘어지고 있기도 하다.

21세기에는 '개인주의 혁명'을 완성해야할 시기로 명명한다. 곧 개인들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예언의 말씀이다. 그는 21세기 시대의 정신 또한 부여한다. 곧 "더불어서 살겠다는 정신"이다. 그런가 하면 '여성 해방'에 대한 모색도 보인다. 이런식이다. 그는 예언하면서 명령하고, 시대의 정신을 부여하고, 모색한다. 그럴때에 21세기는 가치있어지고, 그 가치에 접속할 수 있는 '코드'를 고종석은 훔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40여개의 테제 속에서 21세기를 예언한다. '자연과 문명'의 미래를 예견하고, 지식인의 운명을 점치며, 민주주의를 모색한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그 많지 않은 테제를 통해 21세기를 살아갈 우리 인류가 붙들어야 할 가치들을, 구체적인 사안들에서부터 거시적 정신과 사고까지 다양한 '코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의 예언들은 간혼 낭만적 여린 심성도 느껴진다. 문학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남을 것임을 예견하면서 "문학이 있기 때문에, 한 어린아이가 굶주려 죽는 것은 추문이 된다. 그것이 문학이 남아 있어야 할 이류"라고 제시한다.

사회주의를 말하고, 개인을 말하며, 우리와 타자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사회생물학에도, 문학, 권력, 종교, 언어, 노동, 민족주의, 생태주의, 교육, 문화와 정치, 전쟁, 도시, 세대, 생명공학, 마리화나에까지 이 많은 것들을 한 예언자 고종석이 말하고 있다. 그가 이 시대 프로메테우스인 사실을 다시 한 번 입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명석함과 박식함, 그리고 이 시대 인류에 대한 따뜻한 애정, 변화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예리함, 그리고 그의 모색 속에 들어있는 '의지'와 '욕망'들을 통해 볼 때 그가 훔친 이 코드들은 믿음직스러운 예언임에 분명할 듯하다. 그것은 고종석이 '고'스트라다무스가 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믿거나 말거나, 그가 훔쳐 낸 '코드'로 우리 나중 안 자들은 동이 튼 21세기의 새벽 이때에 일찌감치 새로운 시대로 접속해 보는 것 어떠하겠는가? 분명한 것은 아무도 '선배 저널리스트의 우둔과 경박을' 비웃지는 못 할 것이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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