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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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이 다 그럴 것이지만, 특히나 문학은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한다. '문학'하면 시와 소설로 대표되는데, 시를 쓴다는 것이 얼핏 머릿속으로만 상상하여 꾸며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기실은 발품을 팔아가며 세상을 보고 자연을 보고 그 안의 온갖 사물을 보고 또 보아야 참 된 몇 줄의 시 한편이 나오는 것이다. 좋은 시인은 발품을 많이 판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일일이 조사해 본 결과는 아니다. 의심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있을 것이다.'로 읽으면 될 것이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소설만큼 작가의 발품이 많이 필요한 것을 찾기는 어렵다. 『토지』를 쓴 박경리 선생이나 『아리랑』『태백산맥』『한강』의 대작을 완성한 조정래 선생 등이 보여주듯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수십 수백 리 길의 발품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발품이라는 것이 다만 돌아다니는 것뿐만은 아니다.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 정리해야 하고, 등장 인물에 알맞은 언어, 문화, 생활까지, 나아가 다양한 분야의 왕성한 독서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품을 모두 팔았을때 한편의 소설은 탄생될 수 있는 것이다.

살만 루슈디의 소설 『분노』를 일으면서 먼저 든 생각이 바로 루슈디의 발품이 무척이나 많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해박함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한 편의 소설을 쓰기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치밀한 구성 또한 이러한 발품의 노력의 성과이기도 할 것이다.

살만 루슈디는 독서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이름이다. 어쩌면 그의 책 한 권쯤은 읽어낼을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전자일 뿐이고, 그가 『악마의 시』를 써 시끄런 소동을 일으켰다는 정도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또한 쉽게 읽힐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익히 알고 있기도 했다. 이 책 『분노』를 읽으면서도 나는 그러한 내 생각을 마냥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일주일간 이 책을 읽어내면서 시종일관 앞장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말릭 솔랑카 교수'다. 그는 영국의 '사상사 학자'였고, '인형 제작자'였고, 순간의 '분노'에 휩싸여 처자식을 죽이려했던 적이 있었으며, 이때문에 처자식을 버리고 뉴욕으로 도피한다. 뉴욕에서 은둔하며 지내던 그의 삶을 속내 깊이 파고드는 서술로 이 소설은 구성되어 있다. 그는 뉴욕으로 건너온 이후에도 그가 제어하지 못하는 순간적 '분노'를 표출하고, 이로인해 고통스러워한다.

이 소설의 테마는 바로 이 '분노'이다. 그가 왜 분노하고, 어떻게 분노하는지 명쾌히 말해주지 않는다는 데에 이 소설의 난해함이 있으며 동시에 긴장감이 생긴다. 그가 무엇에 분노하는가 또한 명확하지 않다. 겉만 본다면 그의 분노는 정신이상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한마디로 '미친 것'이다. 간혹 그는 몽유병 환자같은 행동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 또한 확실하게 서술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분노는 사소한 것에서 기인하는 듯도 하고, 어떤 뿌리 깊은 심연에서부터 오는 것인 듯도 하고, 아무런 이유없음에 기인하는 정신질환에서 기인하는 듯도 하다. 그러면서도 그가 어떻게, 어떤 행동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지도 우리는 쉬이 알 수도 없다. 이 점에 대해 분노한다면 우리는 이 소설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furia'는 분노, 광기를 뜻하는 라틴어이다.(p.70 각주 참조) 동시에 부정적인 감정만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열광, 격정 등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p.436 각주 참조) 따라서 '푸리아'는 이중적이며 역설적이다. 중의적 표현이라는 소리다. 이 소설에서 솔랑카의 분노는 그의 '열정'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소설의 결론은 그가 분노로부터의 해방을 이뤄냈을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그가 만들어낸 '퍼핏 킹'들의 그 증거이기다.

그런데 그의 분노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왜 분노하는가? 왜 뜬금없이 처자식을 죽이려 했는가? 그의 순간적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왜? 왜? 왜?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분노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가족, 친구, 또는 알 수 없는 그 누구-에 의해서건, 우리를 감싸고 있는 환경에 의해서건, 세상의 온갖 체제에 의해서건 끊임없이 분노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솔랑카의 분노는 어쩌면 이런 분노 유발의 원인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는 듯 하다. 우선 그가 사상사를 강의하면서도 별난 취미인 인형 제작을 하는 것을 바라보는 그의 대학 동료 교수들의 편견에서 그의 분노가 유발되는 것은 아닐까? 그의 '리틀 브레인'이 왜곡되고 자신을 배반하는 상황이 또한 그를 분노케 하는 것은 아닐까? 후반부에 그의 어릴적 아픈 기억이 고백되는 것에서 알수 있지만, 의붓 아버지의 성추행에서도 깊은 분노의 원인이 있기도 한 것은 아닐까?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의 '분노'를 유발하고 그 분노에서 그를 주체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모든 분노의 외적 원인에도 불구하고, 그가 직면한 가장 큰 원인은 그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 소설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푸리아의 역설은 분노라는 동전의 이면에 열정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외적 분노의 인자는 내적인 분노를 유발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다른 이면의 열정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닐라'의 등장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분노로부터의 해방구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실히 열고 있고, 이 소설은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끝맺고 있는 것이다.

살만 루슈디가 이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분노 유발 인자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음을 한 인물을 통해 보여주면서, 그 분노가 어떻게 열정과 삶의 긍정적 측면으로 변화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루슈디의 해박함과 폭넓은 지식, 그리고 명쾌한 독설, 칼날 같은 풍자, 머리아프게 하는 난해함은 이 소설을 더욱 가치있게 만들어 주고 있으면서도, 어렵게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를 분노케 하는 모든 것들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방될 수 있고, 우리 내면에 내재한 그 '푸리아'를 어떻게 열정의 푸리아로 이끌어 낼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렵게 읽어내면서도, 충분한 이해를 갖지 못했으면서도, 루슈디의 『악마의 시』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루슈디의 어법의 매력을 이 책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나의 '푸리아'는 이런 쪽으로 작용했으면 하는 작은 갈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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