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재생기】 - 다시 보고 싶은 21세기

      2006년 1~2월, 겨울

 

    주말이었을 것이다.
    친한 동생 Y 와 산책을 하러 잠깐 나왔었다.  오후 4시 거의 다 된 시간, 하늘은 흐렸지만 아직 밝았고
    겨울의 상쾌한 공기를 마실겸 가벼운 마음으로 나왔었다.
    내가 늘 걷던 곳을 지나 좀 더 먼 곳으로 가자고 했다.
    조각 공원이 있는 곳까지 가고 싶었었다. 음악 분수를 보여주고 싶었었다.
    라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고 '그냥 산책' 쯤으로 생각하고 가벼운 옷 차림으로 따라 나왔던 착한 동생은
    나중엔 '우리 어디 가?' 라고 묻고 말았다.
    바보 같은 나는 그 때서야 '아!' 하고 목적지를 말하는 것을 깜박했다고 말했다.

    목적지까지는 무사히 왔지만 30분 넘게 걷고 나니 동생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 아니..이게 무슨 산책이야..쿨적 (추위에 약간의 맑은 콧물이 나오는 듯) "

    " 그러게 말이야... 쿨적 (나 역시 차가운 공기와 함께 맑은 콧물을 들이켜야 했다) "

    조각 공원을 코 앞에 두고, 우리는 잠깐이라도 차가운 몸을 달랠겸 화장실이 있는 음료 파는 건물로 들어갔다.
    어느덧 해는 산 넘어 자러 가려 하자 추위는 더해졌지만, '그냥 산책'으로 나온 우리는 주머니에 돈이 없었다.
    그런데 낭패감을 느끼며 주머니에 손을 넣자 구세주처럼 500원짜리 동전이 만져지는게 아닌가!

    망설일 필요도 없이 뜨거운 커피캔을 자판기에서 뽑아 우리는 함께 손과 얼굴을 데폈었다.
    집에 다시 돌아가는 것이 엄두가 안 나서 멍하니 벤치에 앉아 그렇게 5분 정도를 쉰 다음,
    우리 피부에 있던 차가운 기를 흡수하느라 미지근해진 커피를 나눠먹으며 다시 집으로 향했다.
    처음과는 달리 목적지를 알게 된 동생의 걸음은 나보다 빨라졌고, 우리는 빈 손으로 나온 것을 후회한다는 둥의
    농담과 웃음을 주고 받으며 귀가했던 기억이 난다.

    딱 1년이 되는 이 비슷한 시기, 오늘, 나는 사랑하는 개와 함께 같은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 공원의 그 건물, 그 자판기에서 똑같은 커피캔을 뽑아 얼굴을 녹이며 기억 재생을 하기 시작했다.
    커피는 여전히 따뜻했고, 하늘은 맑았으며, 잎사귀 없이 겨울의 운치를 드러내는 공원의 나무들도 아름다웠다.
    달라진게 있다면 커피캔이 500원에서 600원으로 올랐다는 것 뿐,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흐르는데도 캔의 따뜻함은 그대로였었다.

    하지만 왜일까.
    돈 하나 없이 달랑 500원으로 뽑았던 커피가 두꺼운 지갑을 들고 가서 뽑은 600원짜리 커피보다 더 따뜻했고,
    더 맛있었다고 느껴진 것은.

    1년 전의 그 공원에서 얻은 따뜻함이 500원짜리 커피캔이었지.
    오늘 내가 얻은 따뜻함은 추위속에서 기다린 나를 위해 C와 S가 사다 준 핫바의 짭조름한 맛이었다.

    그렇게 기억이란, 같은 장소에서 다른 색과 다른 사람으로 채색되어져 추억속으로 들어간다.

    1년 후, 그 장소에서 나는 또 무슨 따뜻함을 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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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2-11 0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500원의 행복!
추억은 그렇게 아름답게 채색되어간다죠.
좋아요~ 님과 함께 하는 알라딘에서도 이런 행복이 몽글몽글 피어올라 추억을 물들이겠죠. 고마워요!!

L.SHIN 2008-02-11 11:14   좋아요 0 | URL
하하핫. 네, 나중에 기억 재생을 했을 때 빙그레 웃을 수 있는 것들만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저도 고마워요-!!

2008-02-11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1 1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유 2008-02-11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으면서 참좋은 느낌이에요..반가워요.무슨뜻인지 아시죠??

L.SHIN 2008-02-11 13:56   좋아요 0 | URL
네 알죠~,저도 반갑습니다.^^ 헤헤..

무스탕 2008-02-11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뚱 댓글..)
지금 막 즐찾 느는 소리가 들리시죠? :)

L.SHIN 2008-02-11 13:57   좋아요 0 | URL
푸하하, 네, '철거덕' 하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는데요? ^^

다락방 2008-02-11 14:26   좋아요 0 | URL
즐찾 하나 추가요~ :)

L.SHIN 2008-02-11 14:57   좋아요 0 | URL
오, 다락님 방가요~ (>_<)
또 한번 '철거덕'~

뽀송이 2008-02-11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낫!! 와락!! 무지무지 반가워요.^^
히힛^^ 저도 '즐찾' 하나 추가요~~~~~^.~

이런이런~ 서재가 더 멋있어졌잖아요.^^

L.SHIN 2008-02-11 15:27   좋아요 0 | URL
아쿵 쑥쓰럽게~ 몰라욤 퍽퍽 ( >_>)

2008-02-11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1 2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1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