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가는 문 - 이와나미소년문고를 이야기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서혜영 옮김 / 다우출판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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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본 구판을 실제로 본 적은 없고 [책에 대한 책에 대한 책]에 소개된 글을 보고 관심이 갔으나 이미 절판이 되었다 하여 구판 중고알림을 등록해두었더니 얼마전 재출간 알림이 와서 개정판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냥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지만 1/3 내지 1/2 정도만 컬러인쇄인데 어차피 컬러인쇄를 기획했다면 그냥 통으로 컬러인쇄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뒷부분은 흑백인쇄라 살짝 아쉽다. 원서도 본 적이 없어서 컬러인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재출간 해주셔서 감사 또 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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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후쿠나가 다케히코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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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오미 시게시와 요양원의 같은 병실을 쓴다. 그리고 그가 죽기 전 유품으로 남긴 두 권의 노트에서 열여덟 살의 봄과 스물네 살의 가을을 회상하는 그를 만난다.

어린 날에 만났더라면 조금 위험했을지 모를 그는 고독을 이야기했고 한발 물러나 관전할 수 있는 나이에 다시 마주한 청춘은 내 좌절과 절망의 시간에 기름을 끼얹지 못했다.

그럼에도 내 마음이 동요한 것은 아마도 시오미 시게시가 죽는 날까지 극복하지 못했던 허무감 속에 나 역시 아직도 완전한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머물고 있는 까닭이다.

내가 요양원에 있는 동안은 열 명 이상의 사람들과 한방을 썼다. 그들은 다들 ‘우연‘이 인생의 도중에 가져다 준 한때의 친구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낮에는 낮의 불안을 함께하고 밤에는 밤의 공포를 함께하는 이 여섯 명의 환자들 사이에 깊은 우정이 흐르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것을 한때라고 부른다면, 한때가 아닌 우정이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한 사람은 한 사람만큼의 고독을 품고, 저마다 폐쇄된 벽안에 웅크린채, 자신의 고독의 무게를 헤아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한 사람 한 사람은 서로 다른 나이, 서로 다른 인생 경험, 서로 다른 병증에 따라 독립되어 있어, 서로를 잇는 우정과 우정 사이의 틈새에 질투나 선망, 증오같은 감정, 무엇보다 에고이즘이 숨겨진 감정이 감춰져 있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 P15

사람은 누구나 죽을 것이고, 나 역시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런 건 처음부터 알고 있다. 다만 사람은 그것이 언제일지 미리 알수 없기 때문에 마음 놓고 일상 속에서, 살아 있다는 걸 깨닫지도 못한 채 헛되이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 P59

옛날의 나는 무지몽매한 소년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인생의 미로를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내 마음은 갈망으로 넘쳐흘렀고, 인생은 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오로지 영혼을 아름답게 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열여덟살의 내가 사랑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 내게 없다. 스물네 살의 내가 바랐던 것처럼 바라는 사람은 지금 내게 없다. 나는 결코 옛날에 살았던 것처럼 지금을 살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정말로 그럴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과연 내가 그렇게 눈부시게 과거를 살았을까? - P63

"하지만 전 어디에 있어도 제 존재가 쓸데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제 고독이야 어쩔 수 없지만, 남한테 피해 줄 생각은 없으니까요." - P115

"난 말이야, 진짜 고독이란 그 무엇에도 상처받지 않는 것, 어떤 괴로운 사랑에도 견딜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 그건 영혼의 강하고 적극적인 상태라고 생각해. 예를 들면, 기도하고 있는 인간의 상태 같은 거지. 기도는 신 앞에서는 갈대처럼 나약한 모습이지만, 인간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뺏길 게 없는, 한계까지 다다른 강함을 보여주지. 고독이란 그런 게 아닐까?" - P117

"전 너무 두려워서…... 그게 아니라도 우리에겐 선천적으로 사랑해야 할 사람이 주어져 있어요. 부모나 형제 같은…… 전 어릴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어요. 그런 어머니의 애정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걸 어머니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에, 전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제가 좋은 성적을 얻으려고 미친 듯이 공부하는 것도 오로지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에서예요. 지에코도 있고, 보세요, 전 주어진 것만으로도 너무 힘에 겨워요. 더 이상 저 스스로 누군가를 선택할 수도 없어요…..." - P131

"그건 그런데, 거기 곶 끝에 말이야, 너 거기 간 적 없어?"
"곶 끝에요?" 후지키는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거긴 자주 갔어요."
"자주? 아무도 안 가는 거기에?"
"생각할 게 있으면 종종 그곳에 갔어요. 그런데 선배는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거기 한 번 산책 간 적이 있거든. 널 보고 불렀는데 안 들렸나 보네. 왠지 너무 황량해서 우울해질 것 같은 곳이야."
"그런가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왜?"
"왜긴요. 어디에 있든 똑같아요. 어디에 있어도 외로워요." - P172

"꿈이라도 좋잖아. 난 그런 식으로 살아 있는 거야. 난 매일 직장에 나가서 속된 이탈리아어로 편지 따위를 쓰고는 있지만, 그보다는 하숙방에서 페트라르카를 읽고 있는 쪽이 훨씬 더 진짜 내 모습이야." - P190

"나한테 외부의 현실 따위는 문제가 아냐. 내부의 현실만이 문제야. 물론 나도 징집되면 이런 소리는 할 수 없겠지. 게다가 언제갈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그때까지만이라도 가장 나답게, 후회 없이 내 시간을 쓰고 싶은 거야." - P191

"오빠는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에요. 네, 그래요. 옛날에 시노부 오빠를 좋아했을 때도 오빠는 꿈을 꾸고 있었어요. 난 시노부 오빠가 한 말을 잊을 수가 없어요. 시오미 선배는 꿈을 꾸고 있어, 하지만 난 그걸 볼 수가 없어, 라고요. 나도 그래요." - P193

하지만 난 그 1달란트를 땅에 묻은 하인을 쫓아낸 주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어. 머리도 나쁘고 재치도 없고, 그저 주인의 말을 중히 여기고 어리석은 행동을 했어. 그게 쫓겨날 짓이라면 그 종교는 너무 엄해. 너무 비인간적이야. 아니면 너무 이해타산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 P219

말하자면, 나는 무엇에나 다 반항했다. 기독교에도 마르크스주의에도, 가정에도 학교에도, - 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미온적인 반항, 나 자신이 손해 보지 않을 정도의 반항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을 딜레탕트로도, 학자로도, 또한 예술가로도 만들지 못했다. 나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어찌할 줄을 모르는, 겁쟁이에다 고독한 청년이었다. - P228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회한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리 입이 닳도록 이야기한들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지에코가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될수도 없고, 내가 신을 믿고 기독교인이 될 수도 없다. 사랑도 역시, - 어쩌면 사랑 역시 인간이 마음속에다 그린 이미지를 자신의 고독으로 색칠하고 자기 멋대로 꿈을 꾸고 있는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 P258

나는 나의 고독을 죽일 수가 없었다. 그토록 무익한 고독이 지에코에게 있어 하나님의 존재처럼, 내 작은 존재이유의 전부였다.
이 고독은 무익했다. 그러나 이 고독은 순결했다. - P264

그분이 저를 볼 때, 어떤 이상형을 두고 저를 보고 있다는 생각은 제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저는 평범한 여자입니다. 그런 저를 그분은 비범하다는 듯이 보셨습니다. 그런 착각은 언젠가는 깨어지는 법입니다. 언젠가는 그분이 환멸의 눈으로 저를 바라볼 거라는 생각을 하면, 저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분은 꿈을 꾸며 사는 사람이었고, 저는 현실밖에 볼 줄 몰랐습니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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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 재욱, 재훈 (리커버 에디션)
정세랑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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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하달 수도 시시하달 수도. 하지만 훈훈한 이야기.

"회사원들도 힘들구나."
재훈이 애늙은이처럼 말했다.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 뭘 해도 힘드니까 최대한 하고 싶은 걸 하며 힘든 게 낫잖아." - P12

그나마 작은아버지는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방탕한 생활을 정리하고 가정을 지켜낼 수 있었는데, 언젠가 사업이 잘되면 또 모를 일이었다. - P19

"그냥 이제 이혼하면 안 돼? 우리가 엄마 생활비 줄 수 있어.
제발 이혼해, 엄마."

엄마의 인생은 어느 시점부터 고정되어 버렸고, 엄마를 구하기에 너무 늦어버렸다는 걸 큰딸들은 대체로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 P23

울음을 그칠 기미가 없는 엄마를 내려주고 대전으로 돌아가며 재인은 생각했다. 이십대 내내 가장 힘들게 배운 것은 불안을 숨기는 법이었다고 말이다. 불안을 들키면 사람들이 도망간다. 불안하다고 해서 사방팔방에 자기 불안을 던져서는 진짜어른이 될 수 없다. 가방 안에서도 쏟아지지 않는 텀블러처럼 꽉 다물어야 한다. - P24

세사람은 각자 자기가 구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게다가 어쩌면 구해지는 쪽은 구조자 쪽인지도 몰라."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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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연대기 (리커버 특별판)
C. S.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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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싸서 살까말까 살까말까 몇 날 며칠을 고민했더니 배송만 늦어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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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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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관심이 갔던 것은 아니다. 빨책 피드에서 제목을 보고 에라이 금수만도 못한의 금수인 줄 알고 계속 이것만 건너뛰고 듣다가 더이상 들을 에피소드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대체 이 책은 뭐야 하고 눈길을 주었는데. 일단 hellas님의 리뷰를 통해 가가 가가 아니더라는 정보를 입수 (금수는 금으로 놓은 수 였던 것이다!), 난데없는 호기심이 발동해 미리보기까지 꼼꼼히 읽은 뒤 급기야는 작가의 전작인 환상의 빛까지 세트로 주문을 하기에 이른다.

(아래 스포일러 있습니다.)




미야모토 테루는 이 금수라는 독특한 제목의 책을 통해 뜻하지 않은 일로 파국을 맞게 된 남녀관계의 종결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대로 매듭을 짓지 못하고 헤어진 두 남녀가 각자 십년이라는 세월을 혼란과 후회, 그리고 죄책감속에 살아오다 정말 우연한 재회를 계기로 몇차례 편지를 주고 받게 되고, 그를 통해 마침내 서로를 옭아매온 과거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 나아갈 방향을 잡는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첨엔 그냥 막연히 십년전 오해를 풀고 우리 다시 한번 잘해보자고 쓰는 편지인 줄 알았다. 다 읽고 나서 보니 아키라는 여자가 전 남편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는 (본인도 무엇때문에 쓰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했으나) 어처구니없이 끝나버린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무언가 납득할 만한 closure을 받아내고 싶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어쩌면 자신이 현재와 미래를 온전히 살아내기 위해서는 과거를 매듭짓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생존의 본능처럼 느끼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더이상 원치 않는다는 그의 직접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편지는 계속된다. 아키는 단 한번도 아니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죠 하며 흥분해서 따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와 그런건 아무래도 좋다고 말하며 원치 않는 편지를 자꾸 보내게 되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하지만 쓰고 싶으니 계속 쓰겠다고, 그 후로도 멋대로 이어지는 그녀의 편지는, 되레 더욱 끈질기게 상대의 해명을 요구하는 무언의 압박에 가깝다. 진짜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면 편지쓰는 것을 그만두었겠지. 사실 미안한 마음보다는 당신이 나한테 잘못한 게 있는데 이 정도는 해주어야지요 하는 보상심리가 더 크게 깔려있었던 게 아닐까. 남자 역시 편지를 받고 며칠동안 서랍에 넣어두지만 결국 무음의 신호처럼 저항할 수 없어 읽고 말았다고 후에 털어 놓는다. 오히려 나약하고 위태로웠던 것은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아리마 야스아키라는 남자였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요즘 같이 지내는 여성 레이코에 대해 아키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 저는 레이코가 울어서 아주 만족했습니다. 아직 저는 당분간 레이코와 헤어질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심한 일이지만 레이코와 헤어지면 저는 당장 내일부터 먹고살 수가 없습니다. 저는 레이코의 입에서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말이 듣고 싶어서 어제도 오늘도 헤어지자, 헤어지자며 그녀를 괴롭혔던 것입니다 -

이 아리마 야스아키라는 남자는 내가 근래 본 심리서에 등장하는 가면 속 어린 아이의 표본이다. 어른의 모습을 하고서 살지만 실은 성장이 멈춘 이기적인 어린 아이. 사람이란 아무래도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 법이므로 레이코 역시 이 남자에게 비빌 언덕을 제공한 댓가를 치르는 것이겠지만 만일 레이코가 내 친구였다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말렸을 최악의 남자다. 완전 여자 등쳐먹는 놈이 아닌가! 내가 보기엔 유카코나 아키에게도 결코 좋은 남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어리광을 다 받아주고 무작정 그에게 휘둘리고 있는 줄만 알았던 레이코가, 아직 어린애같은 그를 은근슬쩍 조련하기 시작한 것은 뜻밖의 반전이었다. 뭐 굳이 그런 남자한테 투자를 하고 고생을 사서 하겠다면 맘대로 해라. 사랑은 자유니까.

그들의 미래가 어찌되려건 간에 나는 이 책을 상당히 재밌게 읽었다. 그래도 딱 두가지만. 내가 공감할 수 없었던 것 딱 두가지만 말해야겠다. 첫째, 야스아키의 여자들이 하나같이 너~~무 쿨하다는 것이다. 이건 작가의 판타지인가?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나름 행복했던 다년간의 결혼생활이 파탄이 났는데 어째서 아키는 따져 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가. 게다가 십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왜 못다한 울분을 토해내질 않고 오히려 숙이고 들어가 야스아키의 입장을 먼저 헤아리는 (혹은 헤아리는 척하는) 자세를 보이는가. 왜 저렇게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고 깍듯한가. 헤어진지 십년이란 세월이 흘러서? 세월이 약이라서? 혹은 아키는 장애아를 낳아 키우면서, 야스아키는 수차례의 사업 실패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 둘다 정신적으로 대단한 성장을 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야스아키의 새 여자인 레이코도 그렇다. 야스아키가 전 부인 아키에게 받은 편지들을 다 읽고나서 한다는 소리가 그저 ˝전 당신의 부인이었던 사람이 좋아요.˝라니.. 같이 사는 남자의 전 부인이 좋아요~ ♬ 라니!!! ㅡㅡ;; 그리 유복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지만 혼자 열심히 벌어 당당히 자립하고, 모아논 돈도 좀 있고, 부모님 생활비까지 보태는, 이정도 따위 일엔 흔들리지 않을 저력이 있는 여성이라 이거냐. 아침드라마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 여자들 쿨해도 너무 쿨하다. 불쾌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미성숙한 태도라고 일관하는 것 같고, 또 한편으로는 남자의 외도에 대해 작가가 꿈꾸는 이상적인 여성상의 성숙한 리액션을 그려놓은듯한 의구심마저 든다. 하물며 야스아키를 한 눈에 반하게 한 유카코의 매력도 나이에 맞지 않는 성숙한 자태가 아니던가. 모두 쿨방망이로 궁둥짝을 한대씩 때려주고 싶다. 도대체 얼마나 쿨해야 성숙한 여자인거냐.

두번째로 공감할 수 없었던 것은 작가의 세계관인지 등장인물들이 가진 세계관인지가 참 모호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정의? 아키와 모짜르트 까페주인, 그리고 야스아키의 입을 통해 계속해서 반복되는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은 어쩌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라는 아키의 말에 나는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세 사람은 이 말에서 마치 무슨 거대한 우주의 비밀을 깨우친 것 마냥 이 말이 주는 의미를 각자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하고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다. 내가 종교가 있어서 그런지 어떤지는 몰라도 내게 있어 큰 울림이 있는 구절은 아니었다.

그들이 서로에게 그토록 장문의 편지를 쓰게 될 줄 몰랐듯 나도 내가 이렇게 기나긴 리뷰를 쓰고 앉아 있게 될 줄 몰랐다. 내가 쓴 리뷰중에 젤 길다. 별점을 다섯 개를 매긴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할 말이 많았는지 모르겠다.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이제 철이 좀 들려고 하는 야스아키의 말을 남긴다. 작가가 등장인물의 말을 빌어 뭔가 대놓고 교훈을 주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해도, 좋으니까.

미용실을 찾아서 걷는 이 행위가, 과장된 표현이지만 인생 그 자체 같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네거리에 서서 자, 어디로 갈까, 하고 생각하여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점점 인적이 드물어지고 어쩐지 공장가를 헤매게 되어 미용실 같은 건 절대 있을 것 같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상당한 거리를 와 버렸기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어 공장이 길게 이어진 길을 바보처럼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가까스로 동네다운 곳에 이르렀을 때는 날이 저물고 게다가 그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돌아가야 좋을지 알 수 없어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충동에 시달립니다. 이렇게 녹초가 된 상태로 미용실 한 곳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귀가한 일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네거리에 와서 에잇, 이쪽이다, 하고 걷기 시작하면 곧바로 신흥 주택이 늘어선 곳이 나와 개점한 지 얼마 안 된 미용실을 발견하고 간단히 계약을 할 때도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갈까, 왼쪽으로 갈까, 꼭 인생이구나, 하며 묘하게 감탄하면서 저는 매일 계속해서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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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a1001 2017-03-19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정부 유카코는 쿨하지 않았죠. 그래서 그의 목에 칼을 댄 것 같습니다 :)
그나마 유카코가 나머지 두 여자의 쿨함을 중화해준게 아닐까..도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