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침묵의 봄 - 개정판 ㅣ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는 미시간대학에서 철새인 울새를 연구하는 연구자의 사례가 나온다.
미시간 대학 구내에서 쉽게 만날 수 있던 울새들의 사체가 연속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왜 그랬던 걸까? 전해 나무의 방재를 위해 뿌린 살충제가 원인이 되었다. 그 살충제는 울새의 먹이 사슬 밑에 있는 지렁이에게도 흡수되었고, 그 지렁이 11개면 울새의 치사량이 되었던 것이다(131쪽).
그래서 봄이 왔음에도 새들이 침묵하는 캠퍼스가 되었다.
위의 사진은 후쿠시마에서 일어난, 엄청난 지진과 그로 인해 벌어진 해일이 지나간 다음의 풍경이다.
최근 <시사인>의 현지 취재에 따르면, 밭을 일구던 한 노인은 땅이 갈라지는 모습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지구가 아픈가보다"
그런데, 후쿠시마는 지구가 아픈 것을 넘어서서 인간의 탐욕과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인재가 되었다. 그래서 그 노인의 말은, "사람이 아픈가보다"라고 정정되어야 한다.
1.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과학교양서가 아니다. 우리 식으로 보자면, 고발서에 가깝다. 당시까지 자연속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던 화학자들의 시대에, 그렇게 만들어 놓은 화학약제들이 자연에 그래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밝혀냈다.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그런 인간이 자초한 재앙이 <침묵의 봄> 이후에도 변함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것이 앞서 언급한 후쿠시마다. 여전히 서울의 100배에 이르는 방사능이 나오고 있는 후쿠시마는 침묵의 봄이 아니라 절망의 봄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다.
2.
그래서 <침묵의 봄>을 읽는 내내 내 머리속은 살충제의 위험이 아니라 후쿠시마가 떠나지 않았다.
이를테면, '잔류허용량'이라는 개념을 보자(201쪽 이후). 잔류허용량은 통상 안전과 불안전의 기준점으로 언급되곤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다. 그 기준이 의미하는 것은, 반복적인 허용량의 접근에 대해서도 안전을 보장하는가 문제이다.
통상 허용량의 기준은 성인 1명이 한회에 적용되는 범위다. 그런데, 그것이 반복된다면? 즉, 특정한 영향이 배출되는 시간과 새로 흡수하는 시간에 시차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작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당시, 카이스트 교수라는 자와 서울대 교수라는 자가 공항에서 들어온 사람들의 피폭량이 '허용치'를 밑돌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취지의 말을 한 바 있다. 하지만, 허용량의 기준은 방사능을 내뿜는 물체가 아니라 그것을 수용하는 대상의 총량으로 접근해야 타당했다.
3.
<침묵의 봄>은 전혀 낡은 이야기가 아니다. 살충제 즉, DDT를 방사능으로 바꾸면 바로 당대의 문제가 된다. 개인적으론 오히려 지금 사용이 금지된 살충제의 용어가 나오는 바람에 마치 옛날 책을 보는 듯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거북했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을 단지 과학교양서 정도로만 읽게될 그 '시차'가 불편했다는 말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침묵의 봄>이 가지고 있는 현대적 의미일 것이고, 곧 다가올 후쿠시마 1주기는 그런 현재성을 다시금 고민하는 데 시금석이 된다. <침묵의 봄>은 절대 지나간 일이 아니라, 오히려 확산되는 침묵의 시작을 보여주는 책이다. 인간이 새의 침묵에 무대응할 때, 결국 인간 스스로가 침묵할 수 없다는 고발을 담은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의 재출간이, 조금은, 두렵기도 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