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신자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에릭 호퍼라는 사람, <길위의 철학자>라는 책으로 얼핏 살펴본 이 사람이, 신문지상에 등장했다. 바로 이 책때문이었다. <프레시안>에서는 대중운동 자체의 역동성과 필연성에 주목했다면, <조선일보>에서는 적절한 때에 끝나는 좋은 대중운동의 속성에 주목했다. 원래 아포리즘 형식의 글은 기승전결의 구성이 아니라, 다양한 결론들로 치닫게 되어있다. 상대적으로 불교의 법어와 같은 아포리즘이나 성경 속 잠언들이 그런 경우다. 

1.


호퍼의 부두노조 조합증
 

에릭 호퍼는 노동자 출신의 사회사상가다. 통상 노동자 출신의 글쟁이들이 호평을 받는 조건은, 특정 사상이나 이념에 포함되지 않을 경우다. 사후이기는 하지만, 그가 1983년에 레이건 대통령으로부터 자유훈장을 받기도 한 이력에는 레이건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 그의 말랑말랑함도 한 몫을 했으리라...(논외로 1983년은 테레사 수녀가 자유 훈장을 받은 때이기도 하다. 테레사 수녀와 관련해서는 히친스의 비판적 평가에 동의한다 --;;) 

 

그가 밑바닥의 삶을 살아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래서 <거리의 철학자>라 불리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유가 좀 더 의미가 있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것은 오히려 그에 대한 설명의 빈약함 만은 보여줄 뿐이다. 정확하게 보자면, <맹신자들>에서 보이는 그의 사유는 혼동스럽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프레시안>에서 <조선일보>까지 인용이 가능한 그의 글이 바로 그 증거다.  

2. 

이 책의 원제는 <The true believer>다. 그런데 국역본인 맹신자의 '맹'은 눈을 감고있는다는 뜻이다. 대중운동의 조건으로서 진짜 믿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에 대한 조건과 구성이 달라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아무래도 호퍼가 글에서 다루는 나치즘이나 공산주의의 대중운동을 염두에 두고 부정적인 의미의 맹신자로 다룬 것 같다.  

하지만 아래의 인용에서 보듯이, 대중운동에 대한 열광은 너무나 손쉽게 이용될 수도 있다. 즉 호퍼가 주목하는 것은 대중운동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다양한 대중운동의 다양한 측면들을 서술하는 것에 가깝다.  

   
  노동자들이 자기가 어떤 전체의 일부라고 느끼는 것은 고용주에게 이익이 되며, 그 전체에 고용주도 포함된다면 더욱 유리하다. 강한 연대감은, 인종이 되었건 국가가 되었건 종교가 되었건, 두말할 것 없이 노동소요를 방지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66쪽)  
   

  그렇기 때문에, 대중운동은 언제나 현재에 결박당할 수 밖에 없다. 단결조차 고용주의 이해관계와 부합되는 행위라니.. 그런 점에서 대중운동이 현재를 비하하는 것은, 어떤 운동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대중운동이 추진력을 갖는 하나의 조건이기도 하다. 

   
  대중운동이 설정한 많은 목표가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현재를 비하하는 운동의 일부가 된다. 현실적이고 그럴듯하며 가능한 모든 것은 현재의 일부다. ...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장하지 않고 순수하게 현재만 비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의 저열함을 아무리 한탄한들 미래의 전망이 현재보다 더한 퇴보이거나 변함없는 현재의 연속이라면, 현재의 삶이 아무리 고달프고 보잘것없더라도 하는 수 없이 감내하는 쪽으로 돌아서기 때문이다. (107쪽)  
   

 


만년의 호퍼
 

 분명 호퍼는 극단을 싫어한 것으로 보인다(한 권만 보고 그를 단정할 수는 없으니). 실제로 광신적 공산주의자는 냉정한 자유주의자가 되기보다는 광신적 애국주의자로 전향하거나 광신적 가톨릭 신도로 개종하는 경우가 더 많다(129쪽)는 말을 했다.  

그래서 대중운동은 행동가에 의해 장악되는 것을 요구했다고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소유를 위한 행동가의 출현으로 대중운동의 역동성은 사라진다고도 볼 수 있다. 언제나 행동가는 대중운동의 열망을 자신의 손위에서 통제하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대중운동'과 '나쁜 대중운동'이라는 호퍼 자신이 내놓는 구분은, 자신과 유사한 출신의 맹신자들과 자신을 분리시키는 요인기도 하다.

   
  행동가는 대중운동을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분쟁과 광신자들의 무모함으로부터 지켜낸다. 그러나 행동가의 등장은 대개 대중운동의 역동적 단계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현재와의 전쟁이 끝난 것이다. 진정한 행동가의 목표는 세계 개혁이 아니라 소유다. 역동적 단계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숨결이 저항과 급격한 변화에 대한 열망이었다면, 최종단계는 주로 획득한 권력을 집행하고 영속시키는 문제에 집중한다. (216쪽)  
   
 
대중 정치의 시대, 정치판의 판짜기에만 집중되는 상황. 우리는 왜 여의도 금융가 대신 국회앞에서만 진을 치는 걸까. 참 복잡한 시대에 복잡한 글이다. 그리고 참으로 복잡한 사람이다, 에릭 호퍼라는 사람.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