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1.
참, 이래저래 회색빛 나날을 살고 있다. 제주도에 태풍이 올라오고 하루에 300밀리가 넘는 비가 쏟아지고.... 서울 하늘에도 다시금 비가 내리고 있다.
그리고 주민투표, 헌정사상 최초로 주민들의 청원에 의해 발의된 직접민주주의의 한 제도적 형태를 보면서 사실은 사건이 됨으로서 그 본래의 의미를 갖추게 된다는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래 저래, 이번 여름은 꽤나 눅눅하고 오히려 이열치열이랄까 왠지 묵직한 책들에게 눈이 갔다.
2.
첫번째 책과 두번째 책은 좀 무겁다. 하지만 이런 책들이 '선택' 될 수 있는 생물학적 기간이 짧을 것이기 때문에 마치 종 보호에 나서는 환경운동가와 같은 마음으로 찜해 둔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
우리는 이상한 고전의 복귀를 목도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칼 슈미트의 귀환이 대표적이다.
누가봐도 민주주의적 법사상과 거리가 먼, 그의 독재관과 대의민주주의관에서 무언가 계기를 찾겠다며 나서는 사상가들의 무당파성이라니...
그런면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기대어 근대의 법체계 역사를 되짚어보는 블로흐의 저작은 충분히 '카운터 헤게모니'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우리에겐 유토피아의 철학자로 알려진 그가 과거에서부터 당대까지의 주요한 법철학을 살펴봄으로써, 법을 통해서 이상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얼마나 한계지워진 것인지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법 이전/이후에 존재하는 인간 자체의 도덕률이 어떤 모습인지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리링의 논어, 세번 찟다]
고전이 무색 무취의 경전이 되면, 그 자체로 역사적 폭력성을 갖게 된다. 예수라는 이방인이 100년 전만 해도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았던 이 땅에 각종 '땅 밟기'라는 형태의 무속형 신앙운동이 벌어지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공자가 스스로를 칭하며 말했던 상가집 개라는 표현을, 그대로 논어 자체에게 돌려주었다는 이유로 논쟁이 된 이 책은 '살아있는 고전'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교본이다. 종으로 횡으로 논어를 찟어내면서 중국사회의 '고전열풍'이 보여주는 역설을 짚어내는 그의 필력이 궁금하다.
3.
다음은 책의 내용을 넘어서는, 희귀종의 보호 차원에서다. 이런 시도는 충분히 높은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보는 입장인데 엄숙한 분위기 탓인지 조금만 '사짜' 냄새가 나도 진정성을 의심한다. 유쾌하지 않는 철학이 세상에 스며들 수가 있겠는가.
[도올의 중용한글역주]
어쩌면, 금세기에 일가를 이룰 수 있는 토종 사상가 중 한명이 도올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그의 생각을, 당대에 함께 생존하면서 알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까지는 아니어도 다행스러운 경험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4.
마지막으로는 저항이라는 키워드다. 약간은 이상한 조합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조합이 지금 이 시점에서 택할 수 있는 저항의 두 측면이라고 본다.
[박홍규의 이반 일리히 평전]

아마 서구 사상가나 이론의 토착화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영남대 법과 교수인 박홍규는 참 비범한 사람이다. 초기 에드워드 사이드의 글을 번역하더니, 윌리암 모리스에 대한 글을 써내고 아렌트니 토크빌이니 하는 책을 내더니 뜬금없이 멈포드 평전을 써내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꾸준하게 저자가 언급한 사상가는 아마도 이반 일리히일 것이다. 저자가 추구한 교육의 가치와 아니키즘적인 사회사상은 일리히의 가치관과 닿아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에서 이반 일리히에 대한 평전이 나온다면 당연히 박홍규일 것이라 생각했고, 당연히 그 이기에 이 평전이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전환의 세기에 이반 일리히를 불러낸 저자가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건낼 것인가. 벌써 부터 긴장이 되기 시작한다.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제국주의와 국제정치경제]

이 사람은 꽤나 한국 방문이 잦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함께 하는 국제 사회운동 조직의 한국지부가 매년 행사를 주최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의 방문에 맞춰 신간이 소개되었다.
국제사회주의자이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중앙위원이기도 하고 영국 요크대 교수였다가 지금은 킹스칼리지로 옮긴 사회학자이기도 한 캘리니코스가 그 사람이다. 통상 맑스주의 학자라고 하면, 맑스의 인용에서 시작해서 맑스의 인용으로 끝을 낼 것 같은 훈고학자 이미지이지만, 캘리니코스는 우파 전통에도 해박할 뿐만 아니라 앤소니 기든스와 같은 중도파 학자들과도 교분을 과시하는 전방위적 학자다.
또한 영국적 전통에서 네그리류의 자율주의적 사회운동에 대항하는 정통파 운동가이기도 하다. 이 사람의 해법이 어떤 것이든 고루할 것이라거나 근거없이 편향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안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저작 중 대다수가 국내에 번역되어 왔다는 것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5.
이제 다음 달 신간 소개를 쓰면, 가을 바람이 소솔하게 불어올 것이다. 한 계절의 중간에 다음 계절에 대한 기대를 품게 된다는 것.. 왠지 나이들었다는 뜻인것 같아 쓸쓸하다. 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