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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트 러셀, 비아북, 2011] 



이 사람은 노벨상 수상자로, 논리를 표상하는 수단에 불과했던 수학과 기호를 바탕으로 오히려 논리학을 철학으로부터 분리시킨 수리논리학자이며 캠브리지대학의 교수였고, 양차 세계대전의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파격적인 성윤리관을 피력했다는 이유로 미국에서의 강연이 취소되는 것을 물론 전쟁에 반대하는 글을 쓰고 피켓을 들고 시위에 나섰다는 이유로 벌금과 수감형을 받기도 했으며, 불확정성의 세계로 자신이 구축한 논리학이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과 미소 양 강대국에 의한 핵경쟁으로 우리 인류의 삶 자체도 그렇게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한 '비관론자'이기도 하다.

인생은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그것은 앞서 언급한 단 하나의 사항만으로도 충분하다. 즉, 노벨상 하나로도 평범한 사람에겐 하나의 세계이며, 앞서가는 성윤리관으로 전국적인 논란에 휩싸였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세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러셀은 그렇게 다양한 삶들로 콜라주된 삶을 살았으며, 결국 그가 구축한 것은 노벨상을 받은 이도, 선구적인 성윤리관을 지닌 이도 아닌 '러셀이라는 개인'이었으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 세계를 구축하는데 하나의 위성에 불과하게 만들었다. 장황하지만 러셀을 짧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그의 대표작을 한 두권 권해줌으로서 그의 생각을 보여줄 수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보편성을 지닌 문장의 힘 
 


개인적으로 잠언격의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글은 하나의 단어나 의미소로 분해될 수 없는 총체적인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맥락을 무시한 인용은 원저작자와 무관한 하나의 '리믹스'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러셀의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비아북, 2011) 역시 한계는 명백하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이 책이 가지는 미덕은 분명히 있는데 그것은 비아북이라는 출판사가 러셀의 다른 책인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를 내놓은 곳이며, 더우기 원 저자인 러셀에 의해 감수가 진행된 발췌본이라는 점이 그렇다.

그리고, 러셀의 글이 보여주는 보편성 자체가 발췌본의 한계를 충분히 뛰어 넘고 있다. 어쩌면 평생 분야를 한정하지 않고 70여권의 책을 내놓은 이의 종합적인 시각을 살펴보는데 유일한 방법이면서도, 러셀이라는 개인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데도 유일한 방법은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와 같은 발췌 밖에는 없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정치, 심리, 종교, 교육, 성과 결혼, 윤리라는 6가지 영역에 대한 글을 그의 전체 저작에서 가려 뽑아놓은 이 책은, "지금 이 세계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온정과 너그러움이고,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 것은 대다수의 인류를 부도덕하다고 규탄하는 가혹하고 독단적인 도덕이다."(5쪽)라는 러셀의 서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다수의 복잡한 현실을 보는데 하나의 나침반'들을' 무수히 꺼내놓는다.

이를테면,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이고 정의로운 결과로 가는 길이 얼마나 현실의 때를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길인지와 같은 것따위 말이다.

   
  "제1차 세계대전 전에 여성의 투표권을 막기 위해서 흔히 동원되던 반론 중 하나가 여성은 평화주의적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세계대전 중에 여성들은 이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대대적으로 입증했으며, 피비린내 나는 활동에 참여한 대가로 투표권을 인정받았다."(40쪽)  
   

 

러셀은 당대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여성의 참정권 보장을 주장했던 이다. 따라서 그는 참정권 부여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발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정의한 타협의 산물인지 지적한다. 이를 확장하면, 제한적인 투표권이 전체 남성 국민으로 확장된 때도 전국민적인 동원이 필요해진 1차세계 대전 직전이었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영국의 여성참정론자, 팽크허스트. 그녀의 여성참정권 운동은 1차세계대전의 찬성과 군수물자 제조에의 노력동원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우리가 구축한 현대 세계는 끊임없이 우리 세계 자체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도록 만드는 모순을 지적한다. 다음의 사례를 보라.

미국의 고위급 핵 전문가가 말했다. '방사능이 없는' 폭탄 제조법을 발견했으며 이는 인도주의적 동기에 의한 것이라고. 러셀은 이에 소련에도 알려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그는 그런 행위가 불법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러셀은 개탄한다.(50쪽) 결론적으로 그는 소련인들의 목숨만 구하고 싶어하고 미국인들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다고 말이다.

사용되지 않고 단순히 억지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무기가 실상 적국보다는 자국민에게 더욱 위험이 된다는 모순을 단적으로 꼬집는다.

이를테면 다음의 구절은 일본 핵발전소 붕괴 이후에도 끊임없이 '안전'만을 외치고 있는 우리나라 핵물리학자에게 던져줄 법한 말이다. 새로운 국면이 발생하면 의견이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과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인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내 의견이 바뀌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1900년에 활동을 시작한 물리학자가 50년 동안 한 번도 자기 의견이 바뀌지 않은 것을 자랑할 수 있을까?"(135쪽)

 
   

 

대화의 방식으로서 유머, 확실성을 향한 풍자 
 


사실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를 각각의 문장이 놓인 시대적 배경과 떼어 놓고 이해하기 힘들고, 무엇보다 러셀의 유머가 전체적으로 다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유효한 어떤 문제에 대한 글을 보면, 당대에 그의 글이 가진 불편함을 가늠할 수 있다.

이를테면,

   
  "젊은 교수들에게는 첫 번쩨 저술은 몇몇 박학한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도록 어렵게 쓸 것을 권한다. 한 번 그렇게 하고 나면 그 후에는 언제나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투로 쓸 수 있다."(156쪽)
 
   


는 경우는 지금의 상황에서도 굉장히 실용적인 제안일텐데, 역설적으로 지금도 어렵게 '밖에' 글을 쓰지 못하는 학자들의 한계를 꼬집는다. 즉, 여전히 몇몇 박학한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도록은 쓰지 못하는 주제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를 보자.

"언젠가 신문에 내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나는 증거를 세심히 검토해본 후에 그것은 잘못된 기사라는 결론을 내렸다. 주장이 먼저 나오고 증거가 나중에 나올 때는 주장과 증거를 대조하는 등의 '확인' 과정이 따른다."(83쪽)

이런 상황은 "선교사들은 버트런트 러셀 씨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라도 용사받을 수 있을 것이다."(125쪽)라는 어느 선교회 신문에 실린 러셀의 부고문과 함께 읽을 때 그 유머의 진면목이 나타난다. 그것은 확실성에 대한 신념이다. 러셀은 자신이 즉각적으로 오류를 밝혀 낼 수 있는 '그의 부고'를 앞에 두고도 '확인' 작업을 했다는 말이다.

   
  "어렵고 희귀하다는 이유로 명확성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입장에 대한 거부감이 바로 내가 하는 모든 철학적 활동의 가장 근본적인 충동이다."(206쪽)

 
   

이와 같이 러셀의 유머와 재치는 그의 삶을 밀고 가는 하나의 원칙으로 수렴된다. 그것은 확실함과 명확함이다. 유머는 그가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악세사리가 아니라 그와 같은 부조리를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맨얼굴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마지막을 제시하지 않았다. 마치 원천적인 질문에 붕괴될 것임을 알면서도 수학을 통한 논리학의 성채를 구축했듯이 말이다. 러셀의 책을 마무리하면서, 어떤 사상이나 이념도 그 자체로 완결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의 일화를 던져놓고 같이 고민하길 청한다.

   
  "... 이 책을 "러셀 최고의 재치, 최고의 지혜, 최고의 풍자를 모은 결정판"이라고 소개하면 어떻겠느냐 ... "결정판이라는 말이 좀 꺼림직합니다. 나는 아직 죽은 게 아니잖아요." 당시 그는 97세였다. "(6쪽)
 
   


죽음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오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완결을 짓는 것은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할 수 없는 것이다. 언제나 종착점은 다음 세대에 의해 밀려나야 하며, 러셀이 보여주는 것은 그런 삶의 방식이다. 이 책의 미덕은, 마치 매직아이처럼, 각각의 문장이 희미해질 수도록 러셀이라는 개인이 뚜렷이 떠오른다는 점일 수도 있겠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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