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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생각해
이은조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근 6개월 동안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앞으로는 너만 생각해’이다. 그리고 이 책 <나를 생각해>를 읽었다.
기억 속에 삼형제를 나란히 무릎 꿇어 앉히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자백하기를 끈질기게 기다리는 화난 엄마가 있다. 까마득히 어린 나는 내가 그랬노라고 허위자백을 했다. 아마도 자백이 불러올 엄마의 관용에 기대를 걸며 셋이서 긴 시간 벌을 받기보다 혼자 벌을 받는 게 낫다는 계산을 했나 보다. 허위자백으로 형제들에게 떨어질 벌이 가벼워졌는지 기억에 없지만 그때의 행동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이유는 처음으로 남을 생각해서 한 행동이었다는 자의식 때문 아닐까 싶다.
위장 이혼이 진짜 이혼이 돼버린 배우 엄마와 사는 유안이 있다. 유안의 할머니와 엄마, 언니, 그리고 유안 자신으로 이어지는 모계의 가족은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제각기 다른 형태의 사랑을 하며 다른 형태의 사랑을 하는 가족들을 이해하지 못해 상처를 주고 아파한다.
-우리 집안 내력인가 봐. 진실을 자꾸 숨긴다.
-그 진실이 뜨거우니까 그랬겠지.
그들은 깨진 유리처럼 뿔뿔이 흩어진 가족의 모습 같지만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을 쫓아가다 보면 여전히 가늘지만 질긴 끈으로 이어져 있다.
극작가이자 홍보담당자인 유안이 있다. 유안은 협찬을 얻기 위해서는 폭탄주를 마시고 막춤을 추면서도 자신이 쓴 희곡에 대해서는 배우와 타협하지 않고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다. 지나가버린 과거에 변명하지 않고 기껍게 자신의 능력을 시험대에 올린다. 5년째 연애 중인 유안이 있다. 일상처럼 돼버린 오랜 연애가 끝난 순간에도 유안은 무연히 주저앉지 않고 자신의 온 감정을 실어 연인을 붙잡으려 한다.
소설은 가족과 일과 사랑이라는 그물 속에서 유안과 유안을 둘러싼 사람들을 촘촘하게 잘 엮어 보여준다. 제각각 다른 형태의 삶을 살며 사랑을 하는 인물들을 통해 서로의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틀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침내 할머니가 남긴 편지들에서, 유안이 블로그에 쓴 아버지 글에서 유안을 통해 작가는 그들을 보듬고 위로한다. 세상을 향한 작가의 포용력 있는 시선이 느껴진다.
아버지, ‘밥’이라고 해봐요. 나는 아버지 옆으로 가 입을 크게 벌리고 말했다. 아버지는 신문을 보던 시선으로 나를 보며 말한다. 밥. ‘사과’ 해봐요. 사과. ‘벌레’ 해봐요. 벌레. 내 귀에 희미하게 닿는 아버지 음성. 나는 아버지 목소리를 더 잘 듣고 기억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다시 한 번 말한다. ‘사랑해요’ 해봐요. 녀석. 아버지가 쑥스럽게 웃는다. 사랑해요.
다 커서 아옹다옹 함께 나이 먹어가는 형제들에게 문득 그때의 일을 물었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벌을 준 엄마조차도 그런 일이 있었냐며 반문했다. 내 행동은 누구의 기억 속에도 흔적을 남기지 못한 무의미한 행위였는데도 나는 그때의 허위자백을 선행상장처럼, 등짐처럼 지고 나이를 먹어버렸던 것이다. 자신의 앞가림을 잘하면서 다른 사람까지 챙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앞가림은 제쳐두고 다른 사람을 걱정하거나 훈수를 두는 사람으로 나이를 먹은 건 아닐까. 나의 삶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수고와 노력을 하지 않고 그저 공허한 말로 걱정을 하고 훈수를 두며 사소한 우월감과 함께 만족했던 건 아닐까. 이 소설은 나에게 나를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좀 늦긴 했지만 이제는 나를 생각하라고, 지금은 타인의 상처나 힘겨운 감정들에 눈길을 주지 말고, 쓸데없는 허위자백 같은 건 하지 말고 유안처럼 자신의 능력을 의심 없이 믿고 보듬고 챙기라고 말이다.
유안의 모습에서 작가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만난 적은 없지만 긴 시간 글을 놓지 않고, 묵묵히 한곳을 보며 꾸준히 걸었을 작가에게 애정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