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 조선의 운명을 바꾼 김옥균 암살사건
조재곤 지음 / 푸른역사 / 2005년 11월
품절


갑신정변의 실패는 예견되었다. 정변의 주역들과 일정 부분 이해를 같이 했던 윤웅렬은 갑신정변의 실패 요인을 다음의 여섯 가지로 꼽았다. 윤웅렬은 윤치호의 아버지로, 군부대신 등 고위 관료를 역임한 인물이다. 윤웅렬의 평가는 1과 5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객관적인 입장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1. 군주를 위협한 점
2. 외세를 믿고 의지한 점
3. 민심이 따르지 않은 점
4. 청국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한 점
5. 왕과 왕비의 의향을 어긴 점
6. 당붕黨朋의 도움 없이 일을 조급하게 처리한 점-.쪽

갑신정변의 행동대장으로 정권의 핵심 인사 살해에 앞장섰던 서재필은 후일의 회고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독립당의 계획은 부실한 것도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제일 큰 패인은 그 계획에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 민중의 무지몰각이었다." 그는 민중의 원동력과 잠재력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매도했다. 정변은 이들의 지지가 전혀 없이, 즉 국민적 동의 없이 진행된 것이다. 또 다른 핵심 행동대원이었던 이규완도 개화당 지도자들의 나이가 적었던 점, 민중이 무지하여 정변에 호응하지 않고 도리어 '사대당'의 세력을 따르는 사람이 많았던 점, '사대당'의 배후에 있는 청국군이 강했던 반면 일본군의 세력이 약했던 점 등을 들어 정변의 실패를 미리 짐작했다고 술회했다. 김옥균도 후일 "또 신들이 당시 외국의 힘을 빌렸다고 평하는 자가 있사오나 이것은 당시 안팎의 사정으로 보아 실로 만부득이한 데서 나왔다는 것을 폐하께서도 깊이 아시는 바가 아니옵니까"라고 하여 정변의 미숙성을 일부 시인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정변을 합리화하기 위한 그의 변명에 불과했다.-.쪽

홍종우는 기메박물관에서 《춘향전》, 《심청전》, 《직성행년편람直星行年便覽》 등 한국의 고전과 점성술 책, 일본과 중국의 고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일에 종사했다. 그의 도움을 받은 보엑스Boax 형제 중 형이 《춘향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1892년 파리의 발르와 광장 3번지 당뛰서점에서 《향기로운 봄 Printemps Parfume》이란 제목으로 간행한다. 삽화는 메롤드와 미티스가 그렸다. 삽화에는 춘향과 이도령, 방자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춘향은 전형적인 서양 여자풍, 이도령은 한국풍, 방자는 고깔모자를 쓰고 있어 상상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프랑스어로 번역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1999년에 재출간되었다.-.쪽

당시 대다수 유학생들은 국가나 세도가의 절대적 지원을 받으며 서구 사상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선진문화를 맹목적으로 경탄하고 추종한 나머지 그것을 조선의 현실과 제대로 접목시키지는 못했다. 조선의 재래 가치를 무시하고 선진문화를 수용하는 것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 결과 일본으로 간 많은 유학생들이 러일전쟁 후 민중의 변혁과 반일운동을 폄하했다. 심지어는 그것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으며, 통감부와 총독부의 핵심 인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홍종우는 이들과 생각을 달리했다. 그는 고학으로 서양 문화를 배웠고, 이를 조선의 현실에 적용해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려는 혁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홍종우는 서구화를 일차적 과제로 삼았지만, 그것이 조선의 전통문화와 단순 대치될 순 없다고 보았다. 오히려 문제 해결의 모티브를 조선 구래의, 즉 동양적 가치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서양의 기독교와 동양의 노자, 공자의 사상에 대해 파리 시절 친구였던 야생트 르와종에게 보낸 <헌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속을 초월한 문제들을 평가한다면, 아마 당신은 지나치게 가톨릭적이고, 나는 또 지나치게 이교도적인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당신은 가톨릭보다 더 높은 것이나, 이에 비길 수 있을 만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의 낮선 교리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공자에게서 당신들의 어떠한 교리에서보다 지혜를 더욱 잘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거의 초인간적인 지혜를 가진 노자Lao-Tseu는 내가 어렴풋이 예감하거나 꿈꾼 사물들보다 더 높은 곳으로 나의 생각을 이끌어 주어, 마침내 나의 사고는 영원 속에 젖어듭니다.-.쪽

홍종우의 목표는 조선의 전통과 서양 문화를 조화ㆍ절충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대중을 계몽하는 데 있었다. 서양 문화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는 인식이 전제가 된 것이다. 그동안 수구정객으로 평가되어온 모습과는 사뭇 다른 면모다. 홍종우는 성리학적 질서와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척사위정론자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민족 주체성과 민족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있었다는 점에서 감상적 근대화 지상주의론자와도 구분되었다.
홍종우의 사상을 단적으로 말하자면 군주권을 중심으로 조선을 주체적으로 근대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레가미의 말에 따르면 홍종우의 바람은 조선이 중국이나 일본 또는 러시아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것과 조선이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 그가 프랑스에서 배우려는 유럽 문명이 조선에 도입되어 일본과 같이 근대화되는 것이었다. 홍종우는 외세에 의한 근대화, 군주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방식의 근대화를 결코 바라지 않았다.
한말 당시 우리나라는 근대국가 성립 초기 단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군주국가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시기에 여러 정치 세력 간에 근대 개혁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진 것은 우선 국왕을 설정해놓은 상황에서 신권이 우선이냐 왕권이 우선이냐 하는 정국 운용을 둘러싼 의견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개화당이 신권 우선을 지향했다면 홍종우는 군주 지배권을 강화해 국가 질서를 확립한 후에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프랑스 체류 시절의 경험이 이러한 정체관을 형성하게 되는 확실한 계기가 된 듯하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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