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이 책은 필자가 2001년에 출판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動物化するポストモダン)>의 속편이면서, 현재 일본에서 유통되는 ‘문학’의 한 지류의 전개를 추적하고, 이를 통해 사회와 이야기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독립된 글이기도 하다. 이 책의 논의는 대략적으로는 전작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단독으로도 읽힐 수 있게끔 집필되었다. 전작을 읽지 않은 독자라도 논의를 따라갈 수 있도록 언어 구사나 논의의 순서에 최대한 배려를 했다.
  그렇더라도 독자의 당혹감을 줄이기 위해서는 역시 예비적인 설명을 덧붙여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전작을 읽은 분들에게는 약간 따분할지도 모르지만,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두 가지 정도만 확인해두고 싶다.

 

포스트모던과 오타쿠
먼저 확인해두고 싶은 것은 전작과 이 책에서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오타쿠(オタク)’의 위치이다. 이 책은 지금 기술한 것처럼 현대 일본에서 유통되는 이야기를 주제로 한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서 순문학도 일반적인 엔터테인먼트 소설도, 또 영화나 드라마도 다루지 않을 생각이다.
  대신에 논의의 중심이 되는 것은 아쿠타가와 상이나 나오키 상과도 관계없고, 문학평론에서 취급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으로는 많지만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질 기회는 없었던,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라든지 또 그 주위에서 성장하는 컴퓨터 게임이다. 이들 장르는 각각 ‘라이트노벨’ ‘미소녀 게임’이라 불리고, 독자층은 ‘오타쿠’로 불리는 서브컬처 집단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요컨대 우리들이 여기에서 검토하는 것은 많은 독자들에게 친숙한 문학상 수상작이나 베스트셀러가 아니다. 거기에 비해서 가볍고 마이너적이고 독자층도 한정된 오타쿠들의 문학이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부제가 ‘오타쿠로 본 일본 사회’였다면, 그에 준해 이 책은 공교롭게도 ‘오타쿠로 본 일본문학’이라 불러야만 할 내용이 되었다.
  이렇게 범위를 한정함으로써 일부 독자를 곤혹스럽게 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일본사회를 고찰하는 데 오타쿠가 중요하다는 주장은 동의를 얻기 쉬울지 모르겠지만, 일본문학을 고찰하는 데 오타쿠가 중요하다는 주장은 꽤 당돌하게 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택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전작의 내용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전작인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타이틀이 시사하는 바처럼 포스트모던과 오타쿠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사회 분석서였다. ‘포스트모던’ 혹은 ‘포스트모던화(化)’는 1970년대 이후 여러 선진국에서 생겨난 사회적 변화를 의미하며, ‘오타쿠’라는 것은 같은 시기 일본에서 성장했던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핵심으로 하는 취미 공동체를 의미한다.
  포스트모던도 오타쿠도 일본에서는 유행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 때문에 원래의 의미로 돌아가서 살피는 것이 어려워졌지만, 포스트모던화의 진전과 오타쿠의 출현은 시기적으로도 특징적으로도 관계가 있다. 따라서 오타쿠에 대해 포스트모던의 개념을 사용하고, 또 반대로 포스트모던에 대해 오타쿠의 경험을 참조하여 생각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시점으로부터 지금까지의 일본 사회론에서는 여간해서 언급되지 않았던, 전후 일본의 어느 측면이 부각된다. 필자는 전작에서 이러한 입장을 토대로 오타쿠의 행보에 주목하여, 1995년 이후 젊은 오타쿠가 급속하게 이야기에 관심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것(‘모에’萌え, ‘데이터베이스 소비’의 대두), 그리고 그 변화가 단기적인 유행이 아니고 오히려 포스트모던의 철저화, 다시 말해 ‘큰이야기의 쇠퇴’를 반영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책의 논의는 일단 그러한 상황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우리들은 포스트모던이라 불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포스트모던에서는 이야기의 힘이 사회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쇠퇴한다. 그리고 현재 일본에서는 오타쿠들의 작품이나 시장이 그러한 포스트모던의 성격을 극명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표현이나 작품 소비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2000년대 이야기적 상상력의 행방에 대해 살피기 위해서 일단 그 이야기의 쇠퇴에 가장 가까이 접해 있을 오타쿠들의 표현에 주목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포스트모던과 이야기
다음으로 확인해 두고 싶은 것은 이제까지의 서술에서도 이미 문제가 되었던 ‘포스트모던’과 ‘이야기’의 관계이다. 필자는 이 책에서 전작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포스트모던의 개념에 대해 새삼스럽게 다시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논의에서는 이 용어를 ‘큰이야기의 쇠퇴’ 정도로 이해해도 의미를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어느 정도는 보충 설명을 해두고 싶다.
  포스트모던화는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 다시 말해 ‘큰 이야기’의 쇠퇴로 특징지어진다. 18세기 말부터 1970년대까지 지속된 ‘근대’에 있어서 사회 질서는 큰 이야기의 공유, 구체적으로는 규범의식이나 전통의 공유로 확보되었다. 한마디로 하자면 반듯한 어른, 반듯한 가정, 반듯한 인생 설계의 모델이 유효하게 기능하고, 사회는 그것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에 있어서는 개인의 자기 결정이나 생활양식의 다양성이 긍정되고 큰이야기의 공유를 오히려 억압으로 느끼며, 각각의 감성을 강조하는 것이 지배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1990년대 후반부터 그런 흐름이 명확해졌다. 이것이 전작과 이 책의 전제인 시대인식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시대인식을 제시하면 반론이 따라온다. 그것은, 포스트모던에서는 큰이야기가 쇠퇴한다고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큰이야기가 각양각색의 국면으로 부활하고 증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21세기는 포스트모던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세계적으로는 큰이야기의 쇠퇴는커녕 문명의 충돌이라든지 원리주의의 부활마저 문제가 되었다. 일본 국내만 보더라도 민족주의나 전통의 부활을 바라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영화나 소설을 보더라도 치밀한 설정과 중후한 세계관을 가진 장대한 이야기는 이전과 다름없이 계속 잘 나간다. 화제를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오타쿠의 시장에 한정하더라도, 거기에서도 모에의 유행은 일단락되고, 거꾸로 이야기가 부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애초에 인터넷은 정치 분석으로부터 컬트, 음모론, 내부고발까지 세계 사람들이 투고한 무수한 큰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요컨대 거시적인 수준에서도 미시적인 수준에서도, 현재의 상황은 큰이야기의 쇠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이야기의 과잉이나 범람이라고 파악하는 편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큰이야기의 쇠퇴’라는 표현을 상식적으로 이해한다면 이와 같은 의문이 생기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 반론은 실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포스트모던론에서 제기한 ‘큰이야기의 쇠퇴’는 이야기 그 자체의 소멸을 논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 전체에 대한 특정 이야기의 공유화 압력의 저하, 다시 말해 ‘그 내용이 무엇이든 아무튼 특정한 이야기를 모두 공유해야 한다’는 메타 이야기적 합의의 소멸을 지적한 것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에 있어서도 근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무수한 ‘큰’이야기가 만들어져 유통되고 소비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의 상대주의적 다문화주의적 윤리의 토대에서는, 만약 ‘큰’이야기를 믿는다 해도 그것을 다른 사람도 믿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예를 들어 만약에 당신이 특정 종교의 열성 신자라고 하더라도 현대사회는 그 신앙을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종교를 믿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서 다른 신에 대한 관용을 침해하는 것은, 설령 그것이 신앙의 표현이었다고 하더라도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포스트모던에 있어서는 전체의 ‘큰’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다양한 이야기 중 하나로, 다시 말해 ‘작은이야기’로서 유통되는 것이 허락되고 있는 것이다.(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원리주의다.) 포스트모던론에서는 이와 같은 상황을 ‘큰이야기의 쇠퇴’라 부른다.
  따라서 현대 사회가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큰이야기의 쇠퇴’론에 대한 반증이 되지 않는다. 오타쿠들의 이야기가 설령 내용적으로 기우장대한 기상으로 가득하다 해도, 그것은 다양한 소비자의 기호에 부합할 수 있도록 조정된 ‘관습화’된 것이고, 그런 고로 다른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관용성을 가지고 쓰는 한에 있어서는 그것을 데이터베이스 소비의 토대인 ‘작은이야기’로 다루어야만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다른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관용성’은 본론에서 나중에 논하게 되겠지만, 현대 문학을 생각하는 데 열쇠가 되는 개념이다.

 

포스트모던의 세계를 어떻게 살 것인가
이상으로 본론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지만,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이 책의 목표에 대해 다루어두고 싶다.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이 책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속편이고, 전작에 이어서 오타쿠들의 상상력을 다룬다. 이 주제의 선택은 지금도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오타쿠를 둘러싼 언론 상황은 전작의 출판으로부터 지금까지의 5년 사이 심대하게 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새삼스럽게 지적할 것도 없이, 오타쿠들의 작품과 시장은 2000년대 전반에 폭넓은 사회적 인지를 획득했다. 2003년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고, 같은 시기에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가 오타쿠적 의장으로 명성을 얻었고, 2004년에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국제건축전의 일본관에서는 오타쿠가 특집으로 다루어졌고, 2005년에는 <전차남>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모에’가 유행어 대상 톱 텐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 변화는 정치경제의 영역에도 미치고 있다. 이 수년간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 대한 분석이 ‘쿨 저팬’이나 ‘콘텐츠 산업’ ‘지적재산권’이라는 표현으로 논단지나 경제지의 지면을 점유해오고 있다. 유력 정치가 한 사람은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대해 언급하고 오타쿠의 지지를 적극적으로 모으고 있다. 싱크탱크도 오타쿠 연구에 여념이 없다. 오타쿠들이 모인 거리 아키하바라는 지금 일본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거리라고 일컬어지고, 블로그나 SNS 등 2000년대에 나타난 새로운 미디어는 오타쿠적 화제에 친화성이 높다. 전작에서는 우선 오타쿠의 소개로부터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이제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단일한 흐름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거기에는 세대 간 격차를 시작으로 갖가지 차이가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오타쿠들의 상상력이 지금 사회의 정식무대에 나타나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따라서 오타쿠들의 문학을 다루는 이 책의 논의를 그 흐름의 하나로서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 이해를 부정하지 않는다. 본론에서도 다시 한 번 소개하겠지만, 2004년부터 2005년에 걸쳐,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사회 전체의 변화와 연동하여 출판업계에는 라이트노벨에 주목하는 붐이 일어났다. 이 책의 기초가 되는 원고는 2003년부터 2005년 사이에 그 붐의 중심에 있었던 소설지에 연재되었고, 업계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며 씌어졌다. 필자는 이 수년간 비평가나 연구자라고 하기보다는 더 당사자에 가까운 입장에서 작가를 만나고 편집자와 정보를 교환하고 기획에 참여해왔다. 그때 얻은 지식이나 감각은 이 책의 기술에 흘러들어가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확실히 2000년대 전반의 오타쿠 붐, 라이트노벨 붐의 산물이다. 그리고 또한 이 책은 그러한 관점에서 읽히더라도 그것대로 자극적이고 유익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씌어졌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논의에서도 명확해진 것처럼 이 책의 중심은 그러한 유행의 소개나 분석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필자의 관심은 오타쿠들의 특수한 문화를 특수한 문화로서 소개하는 것이 아니고 그 특수성에 깃든 보편적 문제를 추출하는 것이다.
  다른 용어로 바꾸어 말하면, 필자의 관심은 오타쿠라고 하는 공동체나 세대집단의 고찰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삶을 통하여 발견되는 포스트모던의 생 일반의 고찰에 있다. 그것은 이미 유행의 문제도 청년문화의 문제도 아니다. 그 문제의식은 오히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 ‘동물적’이라 묘사한 포스트모던의 소비자가 그럼에도 ‘인간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세계에 접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전작으로부터 이어져온 복잡하고 그리고 실존적인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 필자는 제2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다.
  유감이지만, 필자는 이 책에서 포스트모던의 생(生)과 실존의 문제에는 거의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의 한편으로는 대단히 시대적이고 풍속적으로 보이는 서브컬처 분석이나 작품 분석이, 다른 한편으로 그와 같은 보편적으로 실존적인 문제의식에 밑받침되어 있다는 것을 독자 여러분이 만약 기억해 주신다면, 필자로서는 매우 기쁘리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 책에서는 몇 편의 소설이나 게임을 분석하지만, 논의의 필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이야기상의 수수께끼나 트릭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폭로해버린 경우도 있다. 이른바 스포일러이지만, 그것은 특히 제2장에서의 과 <쓰르라미 울 적에>의 독해에 있어서 유독 현저하다. 그리고 그 스포일러는 논의의 전개와 깊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해당 부분을 빼놓은 다음 넘어가라고 지시할 수도 없다. 독자는 그 점을 미리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A. 사회학


1. 라이트노벨

우리들은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리는 시대를 살고 있다. 포스트모던은 큰이야기의 쇠퇴로 특징지어진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오타쿠의 작품과 시장에서 그 ‘이야기의 쇠퇴’라고 하는 조건이 특히 확실히 나타난다. 서장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우리들은 이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문학의 현재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싶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는, 혹은 오히려 너무 쉽게 성립해버리는 ‘데이터베이스 소비’적 환경에서 이야기는 어떠한 형태로 살아남을 것인가. 그리고 이야기의 그 새로운 형태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가능성을 보여줄 것인가.
  제1장에서는 두 개의 물음을 축으로 하여 몇 개의 새로운 개념을 제안할 것이다. 그리고 계속하여 제2장에서는 그들의 개념을 이용하여 포스트모던하고 오타쿠적인 이야기를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비평을 제안하고 싶다.

 

2000년대의 ‘재발견’ 붐
그런데 처음에 서술했다시피 포스트모던의 문학 상황에 대하여 고찰하기 위하여 이 책에서는 우선 이른바 순문학이나 일반소설이 아니고, ‘라이트노벨’이라고 불리는 소설군에 주목한다.
  라이트노벨이란 무엇인가. 일반적 정의로 그것은 만화적, 혹은 애니메이션적 일러스트가 더해진, 중고생을 주요 독자층으로 하는 엔터테인먼트소설이다. 대개 문고판으로 판매되고 있지만 근년에는 하드커버로 간행하는 예도 늘고 있다. 라이트노벨에는 많은 종류가 있고 출판사 수도 많지만 독자에 따라서는 전혀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독자에게는 일단 서점에서 문고 매장이나 신간 매장이 아니고 코믹 매장에 가서 그 근처에 펼쳐져 있는 패키지로 된 문고본을 찾아볼 것을 권하고 싶다. 그것이 전형적인 라이트노벨이다.
  라이트노벨의 기원은 1970년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소노라마 문고나 코발트 문고는 많은 명작을 냈고, 나중에 라이트노벨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현재 라이트노벨의 특징을 결정한 것은 1988년에 창간된 가도카와 스니커 문고와 후지미 판타지아 문고라고 일컬어진다. 소설가 신조 가즈마(新城カズマ)는 <라이트노벨 ‘초(超)’입문>에서 간자카 하지메(神坂一)가 <슬레이어즈!>를 출판한 1990년을 “‘협의의 라이트노벨’의 발전 방향이 확정된 원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라이트노벨’이라고 하는 호칭이 생긴 것도 그 시기이고, 그 이후 라이트노벨은 일반적 문예로부터 벗어나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시장과 제휴를 계속해, 1990년대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2007년 봄의 시점에서는 다수의 출판사가 끼어들어 라이트노벨의 상표는 30개가 넘는다. 그리고 그 주변에 보통은 라이트노벨로 분류하지 않지만 내용적으로 가까운 작품을 다수 출판하고 있는 레벨(고단샤 노벨스나 하야카와문고 JA 등)이나 라이트노벨 스타일을 차용한 포르노 소설의 레벨(미소녀 게임의 라이트노벨화가 많음), 게다가 그것도 통상은 라이트노벨과 구별되지만 독자층이 겹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을 타깃으로 하는 미소년 동성애 소설 레벨(보이스러브) 등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라이트노벨은 양질의 작품을 다수 산출해왔지만, 그 작품 세계가 기존의 소설이나 비평의 틀에 수렴되지 않았기 때문에 안정된 평가를 얻기 어려웠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필자는 1999년에 전국지 문화부 기자에게 가도노 고헤이(上遠野活平)의 작품을 소개한 일이 있다. 당시 가도노는 베스트셀러 시리즈를 발표하고 있었고 젊은 독자의 사랑이 정점에 달해 있었다. 그 기자는 가도노의 이름을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시리즈의 레벨이 있는 덴게키문고(電擊文庫)의 이름도 모르는 것 같았다. 1990년대 말의 신문 문화란의 인식이 그 정도였다. 그러나 그 상황은 2000년대에 들어서 급속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배경에는 서장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 오타쿠적 엔터테인먼트 일반을 향한 사회의 주목 상승이 있었다. 특히 거기서 눈에 띄는 것은 <이 라이트노벨이 훌륭해!><라이트노벨 완전독본><라이트노벨☆난도질> 등 2004년부터 2005년에 걸친 해설본의 잇따른 출간이다. 그것을 계기로 해서 라이트노벨의 인지는 확장하여 일부 작가는 문예지나 소설지에도 진출하기 시작했다. 만약 지금 독자가 라이트노벨을 전혀 읽지 않는데도 ‘라이트노벨’이라는 말을 들어본 것 같다면 그것은 필시 이 상황의 변화에 의한 것이다. 라이트노벨의 대두는 2000년대 전반의 일본 출판계 전체에서는 큰 주제의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정확을 기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이 라이트노벨․게임은 실제로는 시장의 성장에 의지했다기보다는 업계내의 라이트노벨 ‘재발견’ 붐이라는 현상에 의해 대두했다는 인상이 강하다. 라이트노벨의 역사는 길고 2000년대 이전에도 그 시장은 충분히 컸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라이트노벨이라고 경시했던 양질의 작품이 이것을 계기로 널리 읽혀 회자된다면 당연히 기쁠 것이다.

 

라이트노벨은 ‘장르소설’이 아니다
그러면 라이트노벨은 어떤 소설인가. 내용면에서 추적하자면 라이트노벨의 설명은 대단히 어려워진다. 필자는 여태까지 ‘라이트노벨이라는 장르’라는 표현을 사용해왔지만, 그것은 정확히는 장르라고 부르기가 어렵다.
  서점에서 여러 책을 뒤적거려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라이트노벨의 레벨에는 SF나 미스터리, 판타지나 전기(傳奇), 러브코미디 등 갖가지 장르소설이 혼재되어 있다. 한 사람의 작가, 하나의 작품 안에 복수의 장르가 혼재되어 있는 것도 드물지 않다.
  예를 들어, 앞에서 언급한 가도노 고헤이는 2000년에 도쿠마 듀얼문고에서 <우리들은 허공에서 밤을 본다>를, 고단샤 노벨스에서 <살룡사건(殺龍事件)>을 출판하고 있다. 각각 다른 시리즈의 제1권으로서, 전자는 미래 우주전쟁과 현대 고교생활이 착종하는 이야기, 후자는 이계를 무대로 한 밀실살인의 이야기다. 전자는 SF와 청춘소설의, 후자는 판타지와 미스터리의 융합으로 말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와 같은 장르의 차이를 의식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가도노 고헤이의 독자는 덴게키문고에서 나온 학원 판타지인 『부기 팝』 시리즈로부터 시작된, 어느 작품에도 일관된 스타일을 감지해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세 시리즈는 세계 설정 면에서 공유하고 있는 것이 있다. 하나의 세계관이나 필치가 장르를 횡단하는 일과 같이 계속되는 것은 라이트노벨의 큰 특징이다.
  미스터리나 SF는 자주 ‘장르소설’로 불린다. 그 명칭은 장르의 차이가 독자층이나 유통 경로에 반영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미스터리의 레벨에는 일반적으로 미스터리밖에 수록되지 않고 SF의 레벨에는 SF밖에 수록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현재 라이트노벨의 레벨에는 미스터리도 SF도 구별 없이 수록되고 있다. 신조 가즈마도 자신의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이 특징은 라이트노벨이 미스터리나 SF와 같은 ‘장르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미스터리나 SF에는 독특한 규범이 있고 자주 ‘이것은 미스터리가 아니다’ ‘이것은 SF가 아니다’라는 논쟁이 일어난다. 그러나 라이트노벨에서는 그와 같은 규범이 관찰되지 않는다.

 

라이트노벨적인 것
라이트노벨을 규정하는 내적 기준이 없다면, 그 범위는 외적 요소, 결국 레벨이나 패키지로 정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가도카와 스니커 문고나 후지미 판타지아 문고에서 출판한 것이라면 라이트노벨, 표지에 캐릭터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다면 라이트노벨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당연하다. 실제 필자가 현역의 라이트노벨 작가나 편집자들을 만나보면,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그 판단 기준을 채택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그 기준도 현실에는 그다지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현재는 라이트노벨 이외의 레벨로부터 출판한 소설이 독자에게 ‘라이트노벨적 소설’로 취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장 알기 쉬운 예가 2002년에 <잘린 머리 사이클>로 데뷔하고, ‘헛소리’ 시리즈로 인기작가가 된 니시오 이신(西尾維新)일 것이다. 니시오 이신은 현재 라이트노벨 붐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그 시리즈는 <이 라이트노벨이 훌륭해!>의 2005년도판 작품 랭킹 1위를 획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작품은 2007년 봄의 시점에서 (한 편의 노벨라이스를 제외하고) 전부 고단샤 노벨스, 더러는 고단샤 Box로부터 간행되었고, 전형적인 라이트노벨의 레벨로는 한 작품도 출판되지 않았다. 표지를 장식하는 일러스트도 애니메이션적 필치로부터는 많이 벗어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반드시 예외적 현상인 것은 아니다. 니시오 이신의 활약은 1990년대의 모리 히로시(森博嗣)나 세이료인 류스이(淸涼院流水)에 의해 준비된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모리 히로시나 세이료인 류스이의 소설은 라이트노벨로 볼 만한 것이 많지만, 당시는 미스터리로 출판되었고 특히 일러스트도 더해져 있지 않았다.
  동세대를 보더라도 니시오 이신의 주위에는 같은 고단샤 노벨스에서 데뷔한 후에 문예지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토 유야(佐藤友哉)와 마이죠 오타로(舞城王太郞)나, 2001년 가도카와 서점에서 데뷔해 의 만화화로 폭넓은 인기를 얻은 다키모토 다츠히코(瀧本龍彦), 라이트노벨 출신으로도 근년에 활동 무대를 넓히고 있는 오츠 이치(乙一), 미소녀 게임의 시나리오 작가로 활약하면서 소설도 발표하고 있는 나스 기노코(奈須きのこ)라고 하는 개성적 작가가 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는 라이트노벨 작가로 불리지 않지만 그 독자는 확실히 니시오 이신과 겹치고 있으며, 또한 라이트노벨의 레벨로 출판된 작품과도 겹치고 있다. 요컨대 현재 라이트노벨 붐은 그 중심에서 라이트노벨의 외부와 깊이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서장에서도 설명했듯이 이 책의 출발점이 된 원고는 2003년에 창간된 <파우스트>라고 하는 소설지에 연재된 것이었다. 이 잡지에는 확실히 니시오 이신이나 사토 유야, 마이죠 오타로, 다키모토 다츠히코 들이 기고하고 있었고 라이트노벨 그 외부 경계 영역에서 독자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따라서 이 잡지를 라이트노벨 잡지로 부르는 것이 당연한지 어떤지 독자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런 것에 얽매이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 현재 일본에는 미소녀 게임이나 보이스러브 소설로부터 협의의 라이트노벨을 거쳐, 미스터리나 SF 같은 장르소설이나 순문학 일부까지 연속해서 유지되고 있는 일정한 감성이 있고 그것이야말로 막연히 ‘라이트노벨’이라고 불리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우선은 그 현상인식으로부터 마땅히 출발해야 할 것이다.



 
 
 

 

 

지방대 나와 노동하는 수미에게

 

여기 지도가 있다.
어서 지옥을 떠나,
자유의 땅으로 가라.

 

 

철학자 김상봉은 "왜 기업의 사장은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란 하나의 질문을 두고 20년 높게 고심했다. 소유와 경영의 문제에서 시작한 이 질문은,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적 원리인 주식회사를 사유의 중심으로 삼아 자본주의와 삶을 넓은 지평에서 살펴볼 철학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기업의 주인은 주주이고, 전문경영인이 합리적으로 운영하는 게 맞다는 경영학자와 경제학자들의 반복된 답변에서 벗어나 '다른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찾아보자.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머리말과 마지막 꼭지를 미리 공개한다.

 

“기업을 참된 의미의 생산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노동자들에게 경영권을 돌려주는 일이다. 이를 위해 많은 일을 할 필요는 없다. 누구에게 부당하게 피해를 줄 필요도 없다. 필요한 것은 하나의 법률조항, 바로 이것이다!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

 

[머리말]

이 책을 하나의 깃발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크게 세 가닥의 실로 짜여 있다. 하나의 실은‘ 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 하는‘ 물음’이다. 나라의 대통령을 국민이 뽑듯이, 또는 국립대학의 총장을 학교 구성원들이 뽑듯이 회사 사장도 종업원들이 뽑으면 안 되는가? 다른 실은‘ 대답’이다. 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라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되는 경우도 있고 안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동네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식당 사장을 선거로 뽑자고 주장한다면, 당연히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이런 사정은 순수한 개인 기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개인 기업이란 기업주의 사적 소유 재산이므로 그것의 운영권 역시 당연히 소유주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식회사라면 원래 주인이 없는 기업이므로 얼마든지 노동자들 또는 종업원들이 경영권의 주체일 수 있으며 스스로 사장을 선출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최종적으로는 노동자 경영권을 확립하기 위해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라는 법 조항을 상법에 신설하자는 주장에까지 나아간다. 세 번째 실은 어떤 의미에서 주식회사의 경영권이 노동자에게 귀속되어야 하는가 하는 ‘근거’들이다. 나는 다시 이 근거를 부정적인 근거와 긍정적인 근거로 나누어, 먼저 주식회사만의 고유성으로부터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다는 것을 노동자 경영권의 소극적 근거로서 제시한 뒤에, 기업 공동체의 이념으로부터 노동자 경영권을 위한 적극적 근거를 이끌어내려 하였다. 질문과 대답 그리고 근거, 이 세 가지 실로 천을 짜면서 맨 마지막에 새겨 넣은 말은 이것이다. -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
  누가 쓰지 말라 해도 어떻게든 이 책을 썼겠지만, 직접적인 계기는 3년 전 이맘 때 내가 진보신당의 강령 제정 소위원회의 위원장 직책을 맡은 것이었다. 전문(前文)과 본문(本文)으로 이루어진 강령에서 본문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기초한 문서를 강령소위에서 다듬은 것이었으나 전문은 당의 이념을 담은 지극히 철학적인 문서로서 그 초안을 작성하는 일이 나의 몫이었다. 나는 그 일에 최선을 다했고 나름대로 부끄럽지 않은 강령을 만들었다고도 생각하지만, 한 가지 점에서는 시급하게 보완해야 할 결정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강령이“오직 자본주의를 극복함으로써만 인간의 자유와 참된 만남의 공동체가 가능하다”고 선언하면서도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구호가 몽상적인 헛구호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자본주의라는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인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같이 걸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강령을 처음 기초할 때, 강령제정에 참여했던 나를 포함해서 누구도이 문제에 대해 책임 있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랬으니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당 차원의 토론도 실천도 없었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결과 당의 생존을 둘러싼 소모적 논쟁으로 날밤을 새다가 당의 대표를 지냈던 사람들이 당을 버리고 떠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다. 하지만 당의 깃발을 만든 사람으로서 당을 버릴 수도 떠날 수도 없었던 나는, 내가 기초한 강령의 한계를 스스로 뛰어넘는 것 외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왜곡된 재벌경제체제가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은 내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절박하게 느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극소수의 특권층을 위해 작동하는 재벌경제체제를 해체하고 우리 모두를 위한 나라를 만드는 것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철학자가 자기와 직접 상관도 없는 주식회사의 경영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는 것은 학문적 월권이나 일탈이 아닌가? 혹시라도 이렇게 물을 사람이 있을까 하여, 대답 대신 서준식 선생의『옥중서한』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원래 철학이라는 학문의 특징은 그것이 현존의 사회질서 속에 특정한 분야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것은 어려운 말이지만, 요컨대 경제학이 현존질서 속에서 경제현상이라는 대상을 차지하고 정치학이 정치분야를 갖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철학은 현존 사회질서 속에 그 귀속성을 갖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철학이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현존 질서 속의 일부가 아니라 그 현존질서 전체, 즉 그‘ 통째’이다. 따라서 다른 분야의 학문이 자칫하면 현존질서 전체를 주어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 그 일부분으로서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하는 것과 달리 철학은 현존질서 전체가 과연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가를 정면에서 문제 삼게 되며, 때로는 잘못된 현존질서 속에 매몰되지 않고 그것과 대등한 처지에서 대결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철학을‘ 세계관의 학문’이라 부르는 이유이고, 철학이 다른 학문분야들의‘ 통괄자’로서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이유이며, 그리고 나아가서는 역사 속에서 철학이 많은 박해를 받아온 이유이다.

 

철학은 언제나 세계 전체 또는 존재 전체를 생각하는 보편적 학문이다. 당연히 철학이 탐구해야 할 그 전체 속에는 경제도 포함된다. 그리고 그 영역에 속하는 주식회사 역시 하나의 존재자로서 철학적 성찰의 대상일 수 있다. 그런데 철학자라면, 경제・경영학자나 법학자와 달리, 주식회사를 삶의 전체 지평으로부터 성찰해야 한다. 경제학자들이나 경영학자들은 경제적 효율성의 측면에서 주식회사의 가장 이상적인 경영 방식을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법학자들이라면 주식회사에 관계하는 모든 이해당사자들의 법적 권리의 균형이라는 측면에서 주식회사법의 정당성을 탐구할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법학자들은 주식회사의 경제적 측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경제・경영학자들은 주식회사의 법적 권리균형의 측면에 대해서 치열한 성찰을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문제되는 한에서만 주식회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철학자는 무엇을 보든 존재(存在)에서 무(無)에 걸쳐 있는 삶의 전체 지평으로부터 그것의 존재 의미와 진리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주식회사를 성찰하는 경우에도 철학은 그것의 경제적 측면과 법적 측면은 물론이거니와, 역사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 등 생각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측면을 두루 살펴, 삶의 총체성으로부터 그것의 의미와 진리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들이 다 마찬가지이지만 주식회사 역시 이처럼 철학적 성찰을 통해 끊임없이 그 의미와 진리가 비판적으로 되물어지는 한에서만, 삶의 총체성의 지평 속에서 제 자리를 잡을 수도 있고 제 모습을 유지할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서준식 선생의 표현에 기대어 말하자면 철학은 주식회사를 위해서도 그 존재의 본래적 진리를 드러내고 그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고 또 제시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주식회사는 오늘날 우리의 삶을 가장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지평이자 존재의 진리가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장소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하이데거가‘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 말한 것에 맞서, 주식회사야말로‘ 존재의 집’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본질적으로 노동자이다. 노동자가 존재하는 장소는 회사이다. 그리고 모든 회사들 가운데서 가장 지배적인 회사가 주식회사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식회사의 존재의 진리를 묻는 것은 오늘날 우리 모두의 삶의 진리를 묻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철학자인 내가 주식회사의 본질을 물었으나, 나는 이 문제가 나처럼 보잘것없는 학자에겐 버거운 과제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나는 다른 훌륭한 학자들이 묻지 않았던 까닭에 할 수 없이 이 물음을 물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허술하고 빈 구석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러 해 동안 준비를 하고, 지난겨울 집중적으로 책을 쓰는 동안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구하려 애쓰기는 했으나, 내 말에 관심을 가지는 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으며, 그러므로 경영권은 그 자체로서는 누구의 것도 아니므로 노동자들에게 위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말을 꺼내면, 진보적인 학자들조차 흘려듣거나 아니면 마치 지동설을 처음 듣는 중세의 신학자들처럼 반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가운데서 꼭 한 번 내 생각을 듣고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질문하고 반론을 펴면서 장시간 토론해준 경제학자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가 배재대학교의 김진국 교수이다. 지난여름 그와의 토론 후 나는 이제 내 생각을 책으로 옮겨도 좋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회사법의 전문가인 전남대 법대 정영진 교수는 원고를 읽고 친절하게 자문해주었다『삼성을 생각한다』의 김용철 변호사와는 책을 쓰기 전부터 생각을 나누었고 책을 쓰는 과정에서도 수시로 원고를 보내 자문을 청했는데 그 분의 호의적 관심과 흔쾌한 동의가 내겐 대단히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강화도의 박진화 화백은 노동자 경영권을 두고 기업인들과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는데, 이 역시 내겐 확신을 굳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대학생 대안포럼〉과 진보신당 학생위원회의 〈적록포럼〉에 초청받아 노동자 경영권을 주제로 강연을 해왔는데, 그 때마다 대학생들의 적극적 관심과 날카로운 질문이 내 생각을 갈고 다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노동자들과는 이 주제를 두고 대화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지난해 봄 진보신당의 진로를 둘러싼 토론회에 초대 받아 갔을 때 나는 간략하게나마 노동자 경영권에 대해 말을 꺼냈다. 뒷풀이 자리에서 오랫동안 노동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하다 지금은 해고되어 힘겨운 복직투쟁을 하고 있는 이경수 대림자동차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위원장이 왜 그런 얘기를 지금까지 아무도 한 사람이 없었느냐고 물으면서 팸플릿 형태라도 좋으니 빨리 책으로 내달라고 부탁했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열 명의 학자보다 한 사람의 노동자의 격려가 내겐 더 큰 힘이었다. 그 부탁에 응답하여 처음엔 팸플릿처럼 짧고 읽기 쉬운 책을 쓰려 했으나, 계획과는 달리 책은 점점 더 길어지고 나는 조금씩 조바심이 났다. 그렇게 시간에 쫓기며 이 책을 한참 쓰고 있던 어느 날 밤, 깊은 어둠 속에서 문득 또 다른 내가 나에게 물었다. ‘노동자 경영권에 대한 책인데 중학교 졸업한 노동자도 이해할 수 있게 쓰고 있어?’ 내가 큰 소리로 웃으며 또 다른 나에게 대답했다. ‘요즘은 노동자들도 태반이 대학 나온 사람들이야!’ 또 다른 나는 말이 없었다. 침묵이 흐른 뒤에 내가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누구나 곱씹으면 이해할 수 있도록 써야겠지.’
  쉽게 이길 수 있는 싸움은 없다. 자본과의 싸움도 마찬가지이다. 준비가 철저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내가 이 책을 쓰면서 스스로 설정한 첫 번째 기준은 빈틈없는 철저함이었다. 철저성의 원칙이 대중성과 충돌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책을 읽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현장의 노동자들이 이 책을 한 번 읽고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두 번 세 번 다시 곱씹어 읽으면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다시 말하거니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극히 단순한 말이다.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다. 그러므로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이 지휘자를 선택하듯이 노동자들이 사장을 뽑으면 된다. 이 쉽고 단순한 주장에 대해 근거를 알고 싶은 사람은 이제 본문을 보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서출판 꾸리에의 강경미 대표와 문부식 선생께 감사드린다. 그분들이 아니었더라면 이 책이 지금 나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분들 같은 친구들을 새로 만날 수 있으니, 늙어가는 것도 마냥 서운한 일만은 아니다.


 

[상상력과 의지를 위한 간단한 준칙]

지금까지 주식회사의 경영권이 어떤 의미에서 노동자에게 귀속되어야 하는지 그 근거와 실천적 순서까지 제시했으니, 이제 독자의 지성(知性)을 돕기 위해 내가 더 보탤 말은 없다. 하지만 상상력과 도덕적 의지를 위해서는 하나씩 보태어야 할 말이 있다. 먼저 독자들의 상상력을 돕기 위해 내가 여기서 제시한 주식회사의 모델을 말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등장한 뒤 지난 몇백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길을 제시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이론들이 제시되었으나 내가 생각하기에 도대체 그들이 생각하는 새로운 사회나 기업의 모델이 무엇인지는 제대로 제시된 바가 없었다. 우리가 명확하게 상상할 수 있는 모델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극복의 당위를 아무리 외친다 하더라도 그 외침이 사람들을 움직이기 어렵다. 아무것도 상상이 안 되는데 나보고 무엇을 어쩌란 말인가.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예노동 대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 등장할 것이라 말하는데, 과연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조직, 어떤 기업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는 말해주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후예들은 더러는 그것이 코뮌이라 하기도 하고 소비에트라 하기도 하며, 요사이는 어소시에이션이라는 이름까지 사용하면서 거기에 무언가 심오한 뜻이 있는 것처럼 우리를 가르치려 들지만, 나는 나의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 모든 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려보려 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내가 마르크스 편에서 유일하게 상상할 수 있는 기업조직은 협동조합이다. 그리고 나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협동조합이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에 주된 기업형태가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협동조합은 소유와 경영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주식회사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극복의 길을 협동조합에서 찾으면서 협동조합과 주식회사를 구별 없이 뒤섞어 말하지만) 협동조합의 모델을 가지고서 주식회사를 혁신할 수는 없다. 이것이 이 책에서 내가 협동조합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오직 주식회사에만 집중한 까닭이다.
  이처럼 내가 생각하는 노동자 경영권이 실현된 주식회사가 협동조합이 아니라면, 그것은 과연 어떤 조직일 수 있겠는가? 이렇게 독자들이 묻는다면, 내 대답은 이것이다. 가장 이상적이 주식회사의 모델은 오케스트라, 곧 교향악단이다. 서양에서 의외로 많은 교향악단이 주식회사였고 주식회사이다. 예를 들어 베를린 필하모니는 지금은 재단법인이지만 원래 주식회사였으며,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독일라디오(40%), 연방정부(35%), 베를린 정부(20%), 자유베를린방송(5%)이 대주주인 주식회사이다. 그런데 재단법인이든 아니면 주식회사든, 교향악단의 가장 중요한 경영자는 지휘자이다. 교향악단 지휘자들 가운데서는 뉴욕 필하모니의 아르투르 로진스키나 시카고 심포니의 프리츠 라이너처럼 전설적인 독재자들이 드물지 않았다. 그런 독재자들의 이미지 때문인지 마르크스도『 자본』 1권에서 교향악단의 지휘자를 거대 기업의 자본가에 비유했고, 우리 시대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철학자 로버트 노직 역시 교향악단에서 연주자들이 지휘자의 지휘와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존감을 잃지 않는다면서 지휘자나 경영자를 선출하느냐 아니냐가 문제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짐작으로 하는 말일 뿐이다. 주식회사든 재단법인이든 아니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소속된 기관이든 적어도 세계 수준의 교향악단의 경우에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단원들이 선출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 방식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이를테면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볼프강 자발리슈를 상임지휘자로 초빙할 때처럼 먼저 경영진이 200명의 세계적 지휘자 명단을 작성한 다음 그것을 교향악단 단원들의 비밀투표에 부치는 방법도 있고 아니면 베를린 필하모니가 카라얀의 후임으로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초빙할 때처럼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온전한 자율적 선거를 통해 결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방식이 어떻든 지휘자를 선택하는 것은 단원들의 몫이다. 그러니까 로버트 노직이 마치 교향악단 단원들이 스스로 선출하지 않은 지휘자에게 기꺼이(노예적으로!) 복종하는 것처럼 책에서 말한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선출한 뒤에도 단원들과 지휘자들 사이에는 얼마든지 예상치 못한 불화가 생겨날 수 있다. 그들 모두 어른이므로 스스로 불화를 해결해 나가야 하겠지만, 만약 그것이 심각한 상태에 이른다면 결국 떠나야 하는 쪽은 지휘자이다. 대개 100명이 넘는 단원들은 객원 지휘자라도 다른 사람을 데려오면 그만이지만, 단원들이 아무도 없는 무대 위에서 지휘자가 혼자 교향곡을 연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절에 이판도 있고 사판도 있는 것처럼 주식회사에도 연주하는 단원들뿐만 아니라 돈 계산을 하고 경영을 책임진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경영진이든 지휘자든 주주든 다른 누구든지 간에 오케스트라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연주자 단원들을 삼성이 노동자를 노예 취급하듯이 다루지는 못한다. 오케스트라의 생명인 연주는 오로지 단원들과 그들이 선출한 지휘자에 의해 자율적으로 수행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교향악단은 설령 주식회사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단원들 자신에 의해 통치되는 작은 공화국이다.
  바로 그런 주식회사가 내가 이 책에서 말한 노동자 경영권에 입각한 주식회사의 모델이다. 다른 주식회사와 마찬가지로 교향악단 역시 이윤을 산출하는 노동에 해당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연주자들이다. 마찬가지로 생산활동의 계획을 수립하고 노동자들을 지휘하는 경영자에 해당하는 사람은 음악감독, 곧 교향악단의 지휘자이다. 그러므로 그 지휘자를 교향악단의 단원들이 선출한다는 것은 주식회사의 경영인을 종업원들이 선출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만약 그런 교향악단의 주주라면, 이런 운영체제에 대해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왜냐하면 누가 생각하더라도 연주하는 단원들이 지휘자를 스스로 선택할 때 그들은 가장 뛰어난 화음으로 가장 좋은 연주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게으른 연주자들이 있다. 하지만 지휘자는 그들에게 연주 기회를 주지 않을 권한이 있으며, 심한 경우에는 그런 연주자들을 해고할 수도 있다. 그래도 연주가 형편없고수익이 오르지 않는다면? 당신은 주식을 처분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것은 교향악단의 단원과 지휘자 모두에게 심각한 경고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모든 주식회사가 교향악단처럼 운영되면 안 될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런 까닭은 없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때 거기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구성원이다. 바이올린이나 플루트에 비해 트라이앵글이 아무리 하찮은 악기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에서 트라이앵글을 연주할 사람이 없다면, 그 곡은 연주될 수 없다. 그리하여 오케스트라는 모든 구성원이 똑같이 소중한 공동체이다.
  모든 주식회사가 이런 오케스트라가 될 수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워질지 한번 생각해보라. 만약 주식회사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진리가 가장 탁월하게 표현되고 실현되는 장소라면, 모든 주식회사가 오케스트라가 된다는 것은 이 세계에 넘쳐 흐르는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아름다운 음악소리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일 것이다.
  다음으로 독자들의 도덕적 의지를 위해 보태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과연 노동자들에게 국가의 시민권을 주어야 하는지를 묻고 그에 대해 스스로 대답하기를 주지 않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대답한 까닭은 굳이 보수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민은 권력에 참여하여 나라를 스스로 형성하는 자이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 걱정이 자기의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오직 자기의 입 하나만을 걱정하는 인간이 시민이 될 자격이 있겠는가?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노동자에게 시민권을 주지 말라고 말했던 까닭이다.
  물론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유를 따를 생각이 없다. 아니 도리어 노동자의 시민권을 단순히 정치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경제적 차원에서, 생산 현장에서 보다 급진적으로 뿌리 내리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자 경영권이란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 시민권의 확장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과연 노동자들이 시민이 될 자격이 있느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려 섞인 물음을 망각한다면, 저 염려가 현실이 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지금에 이르러 거의 파탄에 이른 노동운동의 실제  상황에 대해서 아픈 말을 더 보태지는 않으려 한다. 하지만 노예로서 지배자와 싸우는 것은 차라리 쉬워도 긍지 높은 자유인으로서 책임지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오랫동안 한국의 진보 정치권 언저리에서 떠돌았던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말은 그 말을 입에 올리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정치권에서 노동자의 집단적 세력 강화를 뜻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참된 의미에서 정치는 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임 있는 주체로서 형성하는 활동에 존립한다.
  복수노조가 현실이 된 시대에 과연 지금의 한국 노동운동이 이 험난한 형성의 과제를 떠맡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문외한인 나는 감히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을 뻔히 앞에 두고도 왔던 길을 계속 되돌아가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우리 모두 낡은 진보와 이별할 때가 아니겠는가?




 
 
 

 

 

4월 11일 총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국회의원은 한 자리가 늘었는데, 그만큼 국민의 삶이 나아질지는 알 수 없는 오늘입니다. 각 정당에서는 공천 논란이 벌어지고, 서로 헐뜯는 목소리만 높아갑니다. 그렇다고 넋 놓고 구경만 할 순 없겠죠? 주권이 국민에게 있듯 선거를 흥겨운 잔치판으로 만들 권리와 의무 역시 우리에게 있을 테니까요. 이에 나꼼수 김용민 피디와 황덕창 작가가 힘을 모아 정치 DIY(Do It Yourself)를 제안합니다. 무려 100가지 방법이나 되니 각자 상황에 맞게 고르고 응용해서 실천하면 어떨까요. 오늘은 그중 두 가지 방법을 공개합니다. 특히 두 번째 방법은 공천 시기인 지금 꼭 필요한 내용입니다.

 

재미나게 읽어보시고 여러분의 의견을 댓글로 남겨주세요.(3월 9일까지) 다섯 분께는 퍼플카우 출판사에서 펴낸 <견디면 이긴다>를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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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일은 빅엿데이, 대선일은 빅엿마스
화이트 데이 다음은 빅엿데이, 크리스마스 전에는 빅엿마스. 정치와 연애, 1석 2조의 날로 만들어 보아요
 
실천 난이도 : ▶▶▶▶     정치적 효과 : ★★★   

주의사항 : 솔로들은 속 뒤집어질 수 있으므로 그냥 넘어가셔도 좋습니다.


국회의원 선거일, 대통령 선거일, 좀 딱딱하게 들리시나요? 그러면 부드러운 이름을 써 보면 어떨까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일은 4월 11일, 그리고 18대 대통령 선거일은 12월 19일입니다. 날짜를 보면 국회의원 선거일은 3월 14일 화이트데이로부터 대략 한 달 정도 뒤고, 대통령 선거일은 크리스마스 엿새 전입니다. 뭔가 오묘하지 않나요?
 
4월 11일 국회의원 선거일 : 빅엿데이
이날은 사랑하는 애인들이 각하의 시대에 빅엿을 선사하는 날입니다. 특히 젊은 애인들이라면, 청년 실업을 아주 악화시켜놓고 등록금은 치솟아 오르게 만들어서, 알바에 시달리느라 데이트도 마음대로 못 하게 만든 각하에게, 확실하게 빅엿, 그레이트엿을 드리는 날입니다. 투표가 끝나면 애인들끼리 만나서 엿을 주고받으면서 사랑을 속삭여 보세요.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일 : 빅엿마스
한 해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때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이  세상을 바꾸어놓은 것처럼, 각하에게 빅엿을 선사하고 새해부터는 이 나라를 좀 더 상식이 통하는 세상으로 바꾸어놓는 날입니다. 빅엿마스 이브에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세요. 그리고 다음날 투표장으로 갑시다!

 

 

고위 공무원의 정계 진출, 3회 거부로 막아내자
진보 진영의 X맨들, 확실하게 가려내야 해요.

 

실천 난이도 : ▶▶▶▶     정치적 효과 : ★★★★    

유효기간 : 선거철과 정권교체기

 

선거가 다가오면 벌어지는 일들 가운데 하나가, 높으신 공무원 분들이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줄줄이 사표를 쓰는 모습입니다. 정부에서 시원하게 잘 해 드신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금배지까지 달겠다고 하는, 이 분들의 욕망은 과연 그 끝이 어디인지 참으로 놀랍기만 하지요.
공무원뿐만이 아니라, 판사나 검사 출신들, 의사, 약사를 비롯해서 우리 사회에서 전문직 또는 기득권층으로 여겨지는,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아주 똘똘 뭉치는 분들도 우르르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쏟아져 나오곤 합니다.

이런 분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보수든 진보든, 어떤 당의 간판을 걸고 나오든 정말 조심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정권이 어느 쪽에 서 있든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싸울 가능성이 아주 높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야당에서도 경제 관료를 오랫동안 해 왔던 사람들은 그 성향이 야당 안에서 무척 보수적인 데다가 심지어 재벌이나 부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야당 안의 X맨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야당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지금은 새누리당이 된 당시 한나라당이 FTA를 날치기 통과시킬 때 민주당이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당시 원내대표를 비롯한 경제 관료 출신 야당 정치인들의 활약(?) 덕분이었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이런 분들은 그 당의 간판이 무엇이든지,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3회 정도는 투표에서 무시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보수 정당이든 진보 정당이든 소속을 가릴 것 없이, 다수 국민이나 서민들의 이익보다는 재벌과 부자, 기득권을 가지고 똘똘 뭉친 집단의 이익을 챙기는 데 더 열을 올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예 공천 과정에서 선택받지 못하게 계속해서 떠들고 압박해야 합니다.
결국 공천을 받았다면, 이런 사람은 찍어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을 찍어주기는 싫은데 보수 정당이 더 싫어서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찍어줄 수밖에 없다면? 대의를 위한 선택을 하더라도 다음 선거 때는 더 치열하게 대응해야죠.
이런 사람들이 당선되었다면? 절대로 중요한 직책을 맡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떠들고 압박해야 합니다. 원내대표라든가 국회의 각 상임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지 않도록 감시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정당에서도 그들에게 공천을 주는 수가 줄어들 것입니다. 운 좋게 국회의원이 되더라도 우리들의 눈치를 훨씬 많이 보게 됩니다. 지금처럼 여론의 온갖 비난을 받으면서도 자기가 소속된 집단의 이익을 챙기겠다고 덤비기는 힘들 테니까요?

 

+1 tip : 마찬가지로 관료 출신 정치인으로 X맨 구실을 톡톡하게 한 사람들이, 정권이 바뀐 다음에 다시 장관이나 비서관 같은 자리로 가는 것 역시 반대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국회의원으로 있는 것보다도 더 위험합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댓글로 남겨주세요.(3월 9일까지) 

다섯 분께는 퍼플카우 출판사에서 펴낸 <견디면 이긴다>를 보내드립니다.




 
 
누리사랑 2012-03-04 13:59   댓글달기 | URL
빅캣(고양이) 기용민의 새 책 기대됩니다.

가로등 2012-03-05 11:16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억울하면 선거하자 !! 빅엿데이 좋네!

T-T 2012-03-05 14:21   댓글달기 | URL
<보수를 팝니다>에서 문제 제기를 했다면, 이 책은 그 답을 제시하는 내용이 되겠군요!

비달 2012-03-05 16:43   댓글달기 | URL
총선을 앞두고 공천기간 중인 요즘. 제1야당이 보여주고 있는 뻘짓에 실망감이 듭니다. 우물쭈물하다가 큰일 다 망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김용민 피디의 정치생활 가이드는 유용할 듯싶네요. 아자아자, 승리합시다!!

silverrocket 2012-03-06 11:07   댓글달기 | URL
요즘 조금씩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정치생활가이드라는 제목이 반갑네요. 책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더 기대돼요!

혁이 2012-03-08 02:36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김용민 Daum팬카페 http://cafe.daum.net/fuckmbfuck (운영진 혁이) 김용민 차장님 화이팅~!

알라딘인문MD 2012-03-19 10:46   댓글달기 | URL
누리사랑 / 가로등 / T-T / 비달 / silverrocket 이상 다섯 분께 <견디면 이긴다> 책 보내드리겠습니다. 발송은 이달 안에 진행합니다. 고맙습니다.
 

 

 

 

 

 

 

 

 

 

 

 

 

 

 

 

 

 

 

 

 

 

 

지난주 <한겨레21>과 <한겨레>에는 2012년 2월 20일을 예고하는  티저 광고가 실렸다. 왼쪽에는 국가살해라 부를 만한 '국가범죄'를 나열하고 오른쪽에는 제목인지 선언인지 알 수 없는 글자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를 넣었다. 2월 20일 오늘 밝혀진 이 광고의 주인공은 바로 박노자의 신작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다. 두어 개의 매체에 한두 차례 나누어 실려 애초의 기대만큼 효과를 얻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선한 시도였다. 이를 기억함과 동시에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로 움직인 푸른 눈의 한국인 박노자의 국가주의 비판을 소개한다. 아래 글은 이 책의 머리말 '국가의 실체를 직시한다' 전문이다.

 

 

국가의 실체를 직시한다

 

‘국가주의’라는 말은, 요즘 보수 사이에서도 그다지 인기가 없다. 국가보다는 다국적화된 거대 자본 위주의 시장적 사회·경제 질서, 즉 신자유주의가 보수들의 이념이 되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좌우간 ‘멸사봉공’, ‘애국애족’ 류의 표현은 이제 ‘조국 근대화’ 프로젝트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 같다. ‘조국 근대화’ 시절 국가주의의 화신처럼 보이는 박근혜가 한때에 최고 인기를 누리는 정치인이었지만, ‘성공적’인 사업가인 안철수가 그녀에게 성공적으로 도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봐서 이제 ‘국가관’보다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능력’이 훨씬 더 큰 ‘매력 포인트’가 된 모양이다. 박정희나 이순신은 여전히 세인들의 머릿속에 강력한 이미지로 각인돼 있지만, 요즘에는 ‘국가 권력자’나 ‘국가에 충성을 다한 장수’보다는 ‘효율적인 경영인’으로 더 부각되는 것 같다. 확실히 공업화 초기와 같은 모습의 국가주의는 점차 박물관 진열대의 유물이 돼가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국가’라는, 근대가 만들어낸 유사종교의 주박(呪縛)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인가? ‘주의’까지는 붙이지 않지만, 국가는 여전히 우리 시좌(視座)의 맨 중심에 놓여 있다. 국내에서 국가 최고 통치자 선거(대선)와 국가 입법부 선거(총선) 등이 한꺼번에 있는 2012년, ‘진보’까지도 모든 관심이 거기에 쏠려 있지 않은가? 정권이 극우에서 자유주의 우파로 넘어가든, 혹은 계속 극우의 차지가 되든, 민중의 삶과 연결된 경제·사회 정책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외환위기 이후 15년 동안 충분히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국가의 지도자’와 국정을 움직일 ‘국회의원’이 누가 되는가는 우리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질문이다. 서구의 경험으로 본다면 공산당 등 급진 진보가 입각(入閣)하거나 조각(組閣)한다 해도, 자본주의 국가의 기본 성격이 변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꼭 민중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국정이 흘러가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1996~1998년 이탈리아는 공산당 후계 정당 중의 하나인 좌파민주당(PDS)이 참여하고, 그 좌파민주당보다 더 급진적인 또 하나의 공산당 후계 정당인 재건공산당(PRC)이 지지한 좌파·중도 연립내각이 통치했는데, 이들이 주로 한 일은 결국 2011년 경제위기 속에서 이탈리아의 민생경제를 파괴한 원인이 된 유로존 합류를 위해 각종 신자유주의적 준비 작업(예산 삭감과 적자 폭 감소 등)을 하는 것이었다. 이미 개혁주의로 흘러가긴 했지만, 주로 조직 노동자를 지지기반으로 삼는 공산당이 국정에 적극 참여한다 해도 자본주의 국가는 그 생리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산당이나 사회민주주의 정당도 아닌 민주통합당 같은 자유주의 우파의 ‘국정 주도권’ 획득에 일희일비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보다는 노조가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진보신당과 같은 진보정당이 영세업자나 청년과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개혁의 전제조건이 될 ‘민중운동’ 조직화와 위력화 차원에서 훨씬 더 생산적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풀뿌리 민중의 조직화 같은 ‘하찮은’ 이야기보다 ‘거대’ 전국 정치판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게 들린다. 국가에 대해서 도대체 어떤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기에 이렇게 되는 것인가?
  우리는 기본적으로 ‘우리’ 국가가 국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무국적(또는 미국 국적)의 약탈적 자본과 이들이 ‘자유무역’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생계파괴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길 원한다. 문제는, 노무현 정권이 입안·추진하고 이명박 정권이 비준·발효한 한미FTA의 사례에서 보듯이, 극우냐 자유주의 우파냐의 구별 없이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모든 주류 정치세력은 하나 같이 바로 신자유주의적인 ‘자유무역’의 장려에 ‘국가’의 힘을 모두 쏟아부어왔다는 점이다. 우리는 국가에 ‘시장으로부터의 보호’를 주문하고 싶지만, 국가야말로 시장주의적 민생파괴의 견인차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자세히 논하겠지만, 지배계급의 ‘사무총국’과 같은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보면 이는 불가피하고도 당연한 일일 뿐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는 시장, 즉 대자본의 고도의 도구에 불과하다. 이렇게 된 이상, 자본의 도구가 될 집권 정치인들이 어느 정당 출신이냐보다는, 자본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인 민중운동의 발전 상태가 어떤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의 주술에 걸려 있는 사람들에게 이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국가주의는 갔지만, ‘조국 근대화 프로젝트’의 시대가 남긴 또 하나의 유산인 병영국가는 어디 가지 않았다. 고문이 없어지고 형량이 줄어들었을 뿐,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민중적 교파의 신도를 위시한 병역거부자가 감옥에 가고 평생 이등 시민으로 살아야 하는 병영사회의 규칙은 그대로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아주 쉽게 망각된다. 군사주의 선전이 한국 자본과 함께 고도로 발전(?)되어서 그런 것인가? 이제 ‘멸사봉공’ 이야기를 듣기는 쉽지 않겠지만, 인터넷 포털 뉴스를 볼 때마다 군 복무 중인 인기 연예인이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대한 건아답게 군 생활을 잘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들이 밝은 표정으로 이렇게 이야기함으로써 군 복무는 ‘남자의 당연한 의무’가 된다. ‘군복을 입은 인기 얼짱’ 덕분에 군의 의무적인 살인 교육이 ‘쿨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심신을 유순하게 만드는 그 살인 교육의 ‘효율성’을, 이 사회의 실질적인 주인인 자본도 이제 탐낸다. 회사마다 직원들을 해병대 캠프에 보내거나 군대식 극기훈련을 시키는 게 인기 있는 ‘사기 진작 방법’으로 통한다. 다수가 군에 갔다 오거나 적어도 군대와 별반 다를 게 없는 ‘합숙 교육’을 받아본 사회에서, ‘군기’는 사회의 주된 문화적 코드가 되어버린다. 회식 자리에서 상사의 구령에 따라 일제히 일어나 “위하여!”, “건배!”를 큰 소리로 외쳐대는 월급쟁이들의 모습에서 우리 삶에 스며든 군대의 살기를 그대로 발견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광경을 보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국가’에 주박되어 있는 정도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국기에 대한 경례부터 일사불란한 의례적 행동까지 국가에 대한 거의 무의식적으로 의식화됐다 싶은 믿음과 군사주의는 이미 우리 속살에 배인 일상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일상은 보통 반성적 고찰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일각의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은 ‘민주화’된 국가는 내부적으로 폭력을 훨씬 덜 쓰게 되는 만큼 외부적으로도 과거의 권위주의적 국가에 비해서 훨씬 덜 호전적이라고 본다. 이와 같은 시각이야말로 ‘국가에의 주박’의 극치라고 생각한다. 본문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논하겠지만, 소외된 ‘타자’에 대한 국가의 내부적 억압기구(경찰 등)의 태도는 여전히 극도로 폭력적이다. 단, 구미권에서는 주요 폭력의 표적이 되는 소외되는 타자의 자리에 ‘토박이 노동자’ 대신 인종적 혹은 문화적으로 다른 이민자 등이 들어선 것뿐이다. 물론 쌍용자동차 투쟁의 폭력적 진압이나 용산 참사에서 볼 수 있듯이, 국내에서는 여전히 ‘토박이 노동자’도 ‘대들기’만 하면 크게 얻어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또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의 본산쯤 되는 미국이 냉전 종식 이후 감행한 모든 침략(소말리아, 세르비아, 이라크, 아프간 등)을 생각해보면 자본주의적 국가의 틀 안에서 제도적 민주주의가 군사주의와 얼마나 호환성이 좋은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최근 미군의 침략 현장마다 공범 내지 종범으로 열심히 나서고 있다. 민주화가 다 됐다지만, 전 세계에서 수감된 병역거부자의 약 90%가 매년 대한민국의 감옥에서 옥고를 치른다. 진정한 민주주의, 즉 노동자의 일터 관리까지 포함하는 직접적인 민주주의가 실행되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부르주아적 ‘제도민주주의’ 또는 ‘의회민주주의’가 세계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은 유해한 허상일 뿐이다.

  국가의 실체와 함께 국가폭력의 실체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무엇보다 그 폭력이 여태까지 어떻게 합리화되고 낭만화되어왔는가 하는 ‘과정’을 중점적으로 조명한다. 불교부터 기독교까지 애당초 평화주의적 요소가 강했던 세계종교들이 어떻게 해서 군사주의와 결탁하게 됐는지, 《일리아드》부터 영화 <람보>나 <300>까지 군사적 폭력이 어떻게 문화적으로 낭만화되어왔는지, ‘폭력적 남성성’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고정화되어왔는지도 이 책의 주된 초점이 될 것이다. 또한, 이와 함께 국가폭력과의 투쟁이 세계사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어왔는지 조감할 것이다.
  국가폭력과의 투쟁은 결국 계급사회와의 투쟁, 평등사회를 만들기 위한 투쟁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총체적인 반계급·반자본 투쟁의 과정에서도 특별히 국가폭력과의 투쟁에 중점을 두고 신경을 써야 할 이유는 명백하다. 현재의 교육제도나 매체 등이 갖는 특성 때문에 다수에게 대대적으로 계급사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전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수많은 도시, ‘적’을 포로로 잡아 학대하거나 그 시체 위에 오줌을 싸는 등 인간으로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행위를 저지르는 미군을 보면 의분을 느낄 사람이 다수일 것이다. 본능적으로 전쟁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이 다수가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만이 전쟁의 종식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 사회의 이념지도는 다소 바뀔 수 있을지 모른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다수의 생각은 하나의 물리력이 되니, 이와 같은 세계관의 변화가 결국 사회·정치적인 진보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믿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

  끝으로 이 책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신 모든 분께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심장원 2012-02-20 17:08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게 이 광고였군요.
무지 궁금했는데 좀 허탈하네요.
가운데 있는 토끼는 뭘까요?
책을 읽어봐야 하는지...

알라딘인문MD 2012-03-02 13:42   URL
아, 안녕하세요. 엄청 늦은 댓글입니다 ^^ 토끼는 특별한 의미는 없고요. 국가라는 폭력 앞에 선 약자의 모습을 드러낸 이미지라고 합니다.
 

 

 

 

 

서울대 최고 인기 교양강좌를 책으로 옮긴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의 저자 이상원을 만났다. 인터뷰 준비로 책을 살피면서 뭔가 기발한 교수법과 학습법을 기대한, 여전히 글쓰기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 나를 돌아보았다. 인터뷰 때 만난 그 역시 비슷했다. 꾸미거나 치장하는 말이 없었다. 질문은 거리낌 없이 그의 생각으로 들어갔다가 있는 그대로 답변으로 튀어나왔다. 그를 만나 글쓰기에 대한 생각과 글쓰기 수업을 대하는 태도를 들으며 "글은 한 번 쓰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소통의 출발점이자 너와 나,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지는 과정의 일부'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수업에서 글을 쓰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라며 낮은 자세로 학생들의 글을 마주하는 이상원의 인문학 글쓰기 강의를 만나보자.

 

 

 

알라딘에서는 이 책을 바탕으로 인문학스터디_인문학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합니다. 실제 글을 쓰고 함께 읽는 형식의 모임으로 2월 1일부터 세 차례에 걸쳐 진행합니다.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book.aspx?pn=20120112_inmunstudy11

 

 

 

인문학 글쓰기,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나?

 

책 서두에 6년 전부터 강의를 시작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제 기억으로는 그때가 여러 대학에서 학부대학 등 새로운 교양 교육 과정을 만들면서 글쓰기 강좌를 연 시기인데요. 대학 글쓰기 교육의 초창기부터 함께하신 셈인데요. 처음 시작하셨을 때와 지금 글쓰기 교육의 환경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궁금한데요.

글쎄요, 관련한 책은 많이 나왔는데 전체적인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해요. 여전히 학술적 글쓰기라 불리는 논리적, 논증적 글쓰기에 치중한 수업이 대부분이거든요.

 

선생님 수업하고는 사뭇 다른 느낌인데요.

네, 제가 이단아 같은 느낌도 들어요. 그래서 자주 스스로 묻게 되죠. 잘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나 혼자 다른 데로 가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해요.

 

강의하시는 학교의 수업은 인문학 글쓰기, 사회과학 글쓰기, 과학기술 글쓰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역할이 어떻게 구분되어 있나요.

사실 이름은 다르지만 세 가지가 모두 학술 글쓰기의 하나로 큰 차이는 없어요. 다만 애초에 그렇게 나눈 이유는 수강생의 전공 차이가 아닌가 싶어요. 이공계 전공생들이 과학기술 글쓰기를 듣고, 사회과학 글쓰기는 사회과학적 접근을 필요로 하는 전공생들이 주로 들으니까요. 다만 인문학 글쓰기는 누가 듣는지 애매한 부분이 있어요. 인문학 공부하는 사람들은 글쓰기 수업 별 필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어쨌든 듣는 사람에 따른 구분인 듯해요. 물론 다른 두 글쓰기는 상대적으로 양식이나 논지 전개 방식 등이 정해진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이걸 가르쳐주고 학생들이 여기에 맞춰 글쓰기를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거죠. 그런데 인문학 글쓰기는 좀 다른 듯해요. 미운 오리 새끼 같다고 할까요. 예를 들어 철학 글쓰기와 어문학 분야의 글쓰기도 상당히 다르잖아요. 기준을 정하기가 쉽지 않은 듯해요.

 

그럼에도 인문학 글쓰기란 강좌를 맡은 초기부터 나를 소개하는 글, 감상 에세이, 주제 에세이 세 가지의 글을 쓰고 함께 읽는 워크숍 형태의 커리큘럼을 구상해서 수업에 적용해오셨잖아요. 초기부터 이런 방식의 수업에 확신을 가지셨던 건가요?

2006년부터 글쓰기 수업을 시작했는데 그 이전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번역 수업을 진행했어요. 그때 수업이 학생들이 번역한 원고를 서로 읽어가며 이야기하는 방식이었거든요. 글쓰기 수업을 맡기 전에 모의수업을 했는데, 여기에서 같은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는데 평가가 괜찮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까지 이어오게 된 거죠. 이후에 상황에 따라 약간의 수정은 있었지만 큰 방향에서는 변화가 없었어요. 고민이 부족했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그보다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번역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선생님께서는 글을 쓰시면서 글쓰기를 가르치시고, 번역을 하시면서 번역을 가르치신 경험이 있으시잖아요. 개인의 경험으로나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나 상호작용하는 측면이 있을 듯한데요.

개인적으로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게 말이죠. 제 글쓰기 수업을 보면 글을 쓰고 고치는 일 못지않게 ‘읽기’가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거든요. 다른 친구들의 글을 읽어줘야 하니까요. 결국 열심히 읽기라는 게 제가 번역을 하고 번역 수업을 했던 경험에서 오는 것 같아요.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는 저자의 생각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게 상당히 중요하거든요. 저는 이게 글쓰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이런 면에서 수업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겠지요.

 

 

학생들이 만드는 자유로운 글쓰기 수업

 

학생들에게 글쓰기 과제를 주실 때 주제나 소재를 주지 않고 자유롭게 골라서 쓰게 하시잖아요. 오히려 학생들이 혼란스러워 한다거나 부담스러워 할 것 같은데요.

물론 처음에 주제를 스스로 잡아서 쓰라고 하면 우왕좌왕하죠. 실제 글을 쓰기 전에 기획 발표를 하는 과정이 있는데, 이때까지도 방향을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이 친구들의 관심사가 다양하거든요. 게임이라든지 만화라든지 자기가 심취한 분야가 있는데, 여기에 대해 글을 써볼 기회는 가져보지 못한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이걸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경우들도 있고, 이런 도전 자체가 글쓰기에 있어서 중요한 공부하고 생각해요. 글쓰기의 중요한 단계이기도 하고요. 대학에서 글쓰기 과제는 대개 주제나 범위가 정해지잖아요. 그래서 그렇지 않은 글쓰기도 경험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자유롭게 진행을 하면, 학생들이 써오는 글쓰기의 주제가 정말 다양하겠네요.

네, 주제는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해요. 솔직히 깊이라는 면에서는 얕은 부분도 있죠. 그런데 이 글은 그 학생이 살아가면서 쓸 수많은 글 가운데 한 편이고, 그 과정에서 겪는 하나의 시도이기 때문에 저는 이 부족함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책에서 예로 든 오렌지주스나 초코 과자에 대한 글을 깊이 있게 끌고 가기는 어렵겠지요.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 고민하고 써보는 경험 자체가 소중하니까요. 깊이 못지않게 접근의 다양성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글쓰기의 주제뿐 아니라 수업의 흐름도 무척 자유로운 듯한데요. 교사로서 개입하고 싶은 마음은 없을까요? 그런 마음이 드는데 참는 편인지 아니면 그런 마음 자체가 크지 않은지 궁금한데요.

아, 저는 그런 마음이 크지 않은 편이에요. 앞에서 혼자 떠드는 걸 싫어해요. (웃음) 일방통행이잖아요. 물론 뒤에 앉아 있어도 말을 하고 싶을 때가 있죠. 그럴 때도 주로 참는 편이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을 때 공백을 메우기 위해 끼어드는 편이에요. 그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힘들진 않아요. 저는 학생들이 절 잊어버리길 바라요. 다만 제가 앉아 있는 이유는 학생들이 수업에 제때 와야 한다는 정도의 의무감을 전해주는 거죠. 그 다음은 학생들 몫이고요.

 

앞서 잠깐 나온 부분인데, 글쓰기 주제를 미리 발표하고 다른 친구들의 의견을 듣는다는 부분이 기억에 남는데요.

하나의 글쓰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글 주제를 발표하는 게 아니라 앞선 글을 다듬어가는 과정에 새로운 글쓰기 주제 발표가 맞물리는 거죠. 사실 즉흥적으로 시작한 과정인데요. 학생들이 주제에 대한 생각을 갖고 글쓰기에 들어가도록 해주는 역할도 있고, 서로의 글에 관심을 갖게 만들어주는 효과도 있어서 좋은 방법론이 아니었을까 감히 생각을 합니다. 다른 글쓰기 선생님들께서도 ‘이건 괜찮은데’라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결국, 글쓰기는 소통이다

 

학생들이 온라인 공간에서 자유롭게 댓글을 주고받게 하시잖아요. 오프라인 수업과 온라인 공간에서의 의견 교환이 잘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보통 게시판 문화에서는 좋지 못한 모습도 자주 보게 되는데요.

일단 익명성이 배제된 온라인 소통이라서, 배설하는 식의 댓글을 남기게 되면 다음 수업에서 글쓴이가 그 친구에게 물을 수밖에 없거든요. 왜, 무슨 의도로 이런 댓글을 남긴 건지 말이죠. 그런 면에서 책임과 압박감이 있지요. 그냥 ‘잘 읽었습니다’ 정도의 댓글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자기 의견을 전개할 정도의 분량은 나오는 것 같아요. 그리고 수업 시간에 논의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이 있기 때문에 게시판 내에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소통하는 경우도 있어요. 댓글을 통해서 잘못을 확인하면 금세 글을 수정하고 바뀐 내용에 대해 다시 댓글로 남겨두기도 하거든요.

 

글을 고치는 일이 정서적으로 쉽지 않은데 게시판에서 그 정도로 활발하게 움직인다면, 상황을 지켜보는 선생님 입장에서는 꽤 즐거운 일일 듯하네요. 글쓰기 분량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면 좋겠는데요. 선생님 수업에서는 분량 제한은 없지만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은 주시잖아요. 그런데 의아했던 게 감상 에세이나 주제 에세이보다 나를 소개하는 글의 최소 분량이 적은 점인데요. 아무래도 자기 이야기를 쓰는 글이니 할 말들이 더 많을 듯한데요.

최저 분량을 정해놓으면 물론 생각의 폭이 제한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학생들 가운데 30% 정도는 최저 분량을 훨씬 넘겨서 써요. 글의 분량에 제한을 둔다기보다는 지나치게 짧아지는 부분만 경계한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고쳐 쓰기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요. 수업을 하다보면 거의 고치지 않는 친구들도 있어요. 의견은 경청하되 최종 판단은 자기 몫인 거죠.

 

선생님 글쓰기 수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질문은 아니지만, 손으로 글을 쓰는 것과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것. 선생님께서는 둘의 차이를 경험해본 세대시잖아요. 차이를 느끼시나요?

저는 학부 때까지는 손으로 쓰고, 대학원 때부터 컴퓨터를 활용했는데요. 너무 악필이어서 컴퓨터가 아니라면 번역을 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혜택을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지 둘의 차이랄까 손으로 글쓰는 일의 의미랄까, 이런 부분에는 크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다만 글쓰기 계획을 하는 과정에서 마인드맵핑을 할 때는 손으로 작업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모니터 앞에서는 하기 힘든 작업이니까요. 그런데 문장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손으로 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필사를 강조하는 분들도 계신데, 저는 실제로 해보지 못해서 도움이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드는 공력에 비해서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싶어요. 물론 아예 문장을 만들지 못하는 정도라면 필요할 수도 있겠지요.

 

수업 평가 관련해서 두 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우선 첨삭이 없다는 부분이 의아한데요. 많은 분들이 글쓰기 수업을 듣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강사가 조목조목 짚어주기 때문일 텐데요.

제 첨삭이 없다뿐이지, 저는 실제 첨삭이 있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이 서로 첨삭을 해주고 있으니까요. 제가 첨삭한다고 했을 때 이야기할 부분은 학생들의 이야기 속에서도 거의 다 나오거든요. 만약 안 나온다면 제가 개입해서 한두 마디 더할 수도 있고요. 제가 첨삭을 안 하는 부분은 비판받을 여지도 있을 텐데, 첨삭이 일방향 소통이 되거나 제가 제시하는 정답을 보여주는 데 그친다면 오히려 제가 생각하는 수업의 방향과는 배치될 수도 있으니까요. 당연히 첨삭을 꼼꼼히 해주시는 선생님들의 노고는 칭찬받아 마땅하지요. 다만 전체 수업의 그림에서 이런 선택을 한 거라는 변명 아닌 변명이에요. (웃음)

 

수업의 평가는 절대평가인데요. 다행입니다. (웃음) 세 가지 글을 써내는 일에서 낙오하는 학생들은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상대평가였다면 채점자 입장에서는 난감할 듯하거든요. 물론 절대평가라 해도 기준은 있을 터인데,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글 세 편을 제때 썼는지, 친구들의 글에 댓글을 제대로 달았는지는 양적 지표로 나오는 것이고요. 수업 시간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지는 제가 판단하는 부분이지요. 그게 다죠 뭐. 출석도 수치로 나오는 거고요.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면 A+나 A0를 받는데, 절대평가 수업이라서 A0를 받은 학생들의 이의제기가 많아요. 할 수 없어요. 싸워야죠 뭐.

 


모든 글은 귀하다

 

나를 소개하는 글, 감상 에세이, 주제 에세이 세 가지 유형 가운데 어떤 글을 읽을 때 가장 즐거우세요?

다 재미있죠. 비교는 어렵고요. 각자 다른 재미지요. 나를 소개하는 글은 기발한 내용이 많은 데다, 서로 모르는 상황에서 글을 읽고 실제 강의실에서 얼굴을 마주하기 때문에 둘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어요. 감상 에세이는 서로 다른 경험을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재미있어요. 영화라든지 여행이라든지 하는 내용이니까요. 마지막 주제 에세이는 내용을 두고 논쟁이 많이 벌어져요. 이렇게 각자 재미가 있는 거죠.

 

본문에서 학생들의 글 일부분을 직접 보여주는데, 이 부분이 본문과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느낌은 덜했거든요. 그리고 뒷부분에 학생들의 글을 일부분이 아니라 통으로 보여주시는데 이렇게 배치하신 까닭이 궁금합니다.

일단 밀접한 연관성을 느끼지 못하셨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드릴 말씀이 없는데, 우선 저는 보여주고 싶었어요. 말로만 설명하기보다는 학생들이 실제 어떤 글을 쓰는지 보여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앞부분에는 일부분만 보여주기 때문에 전체를 보여주자는 생각에 뒷부분에 따로 글 전체를 넣은 건데, 여기에는 다른 생각도 하나 있어요. 이 책이 단순히 글쓰기 강의를 보여주는 걸 넘어서 요즘 학생들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했어요. 읽어보셨겠지만, 상당히 감동적이거든요.

 

한 학기 수업으로 마무리가 되는데요. 학생들이 이후에는 각기 다른 글쓰기를 경험하게 될 텐데,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선생님의 수업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각자 다른 인생 경로가 펼쳐질 텐데요. 공부를 해나갈 학생들은 주로 주제가 정해진 글쓰기를 경험할 텐데, 그렇더라도 내 글을 읽는 사람을 미리 생각해보는 경험이 될 것 같아요. 읽을 사람들을 배려하는 시도를 하게 될 거라 기대해요. 회사에 들어가서 기획서를 쓴다거나 하는 친구들에게는 형식과 내용의 기발함이 도움이 될 것 같고요. 자유롭게 글을 쓸 친구들에게는 자기 글을 두고 일종의 합평을 해보았다는 경험이 앞으로 글을 쓸 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주제 에세이나 감상 에세이를 소설로 쓰는 친구들도 있거든요.

 

결국 읽는 이를 미리 생각해본다는 점이 중요한 부분이군요. 책에서 가장 와 닿았던 말이 “모든 글은 귀하다”였거든요. 우리는 늘 다른 이의 글을 평가하는데, 선생님 글쓰기 수업은 거기에서 끝내는 게 아니라 각자의 생각을 나누기 때문에 모든 글에 이유가 생기는 것 같아요.

제 개인적인 깨달음이기도 해요. 저도 논문을 썼고, 다른 사람들의 논문을 읽기도 하는데,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이걸 읽는 태도도 달라졌어요. 글쓴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 결과이기 때문에 존중해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학생들도 서로의 글을 그렇게 대해주기를 기대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해주는 것 같고요. 자기는 절대 공감할 수 없는 주장을 하는 글이라도 열심히 읽어주고 내가 왜 동의할 수 없는지 찾아보는 게 그 글에 대한 합당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이런 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태도인 것 같아요.

 

알라딘 인터뷰의 공식 질문이 남았습니다. 글쓰기에 관한 책을 추천해주셔도 좋고, 선생님 강의를 들을 학생들에게 추천해주셔도 좋습니다.

어쩌면 저에게 제일 처음 글쓰기에 영향을 주신 분이 이오덕 선생님인 것 같아요. 초등학교 시절에 선생님 글을 처음 읽었는데, 그야말로 꾸밈없는 글을 강조하신 분이시잖아요. 제가 하고 있는 많은 생각이 선생님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요즘 학생들은 책 이외에도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여러 곳에서 생각을 찾거든요. 그래서 뭘 하든, 운동이든 여행이든, 여기에서 그치지 말고 생각을 이어가면 좋겠어요. 이걸 내가 왜 좋아하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런 식으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