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에서 ‘촌지’를 찾으면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정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주는 돈.” 사전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정성을 드러내고자 주는 촌지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촌지는 조금 더 나은 대우를 받기 위해, 최소한 불이익은 받지 않기 위해 뿌려지니까.
내가 유일하게 아는 땅부자가 어느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특실의 화려함에 취해 병문안이란 본연의 목적을 잊어버릴 무렵 담당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환자가 많기로 소문난 분, 난 황망히 자리를 피했고, 밖에서 교수님이 나오시기만을 기다렸다. 문틈으로 봤더니 교수님은 환자 옆에 서서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계셨고, 그 상담은 30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그 분의 회진을 따라간 적은 없지만, 학생 때 내가 겪은 회진은 그런 다정한 모습은 아니었다. 인턴이 먼저 들어와 텔레비전을 끄게 하고, 교수님은 잠시 후 전공의들과 실습 학생들을 우르르 대동하고 환자 옆에 선다. 레지던트가 환자에 대해 보고를 하면 교수님은 한두 마디 말씀을 하신 뒤 다음 환자로 이동한다. “별 이상 없죠?” 환자가 입원 후 교수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때이건만, 환자들은 1분도 아깝다는 듯한 교수의 태도에 눌려 하고픈 질문을 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교수들이 그럴 것이다. 일인당 맡은 환자 수가 많고, 강의와 연구에 전념하려면 시간이 없을 만도 하다. 하지만 그리 중한 병도 아니고, 이렇다 할 연고도 없는 병실에 30분이 넘도록 머무는 교수님의 모습은 좀 씁쓸했다. 내 지인이 제공할, 혹은 제공했던 많은 촌지가 아니었다면 교수님이 그렇게 긴 시간을 투자하셨을까?
그 병원에서 오래도록 부친의 간병을 했던 내 친구는 ㅇ 교수가 아니면 아버지께서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했을 거라고 얘기한다. ㅇ 교수는 물심양면으로 친구 부친을 돌봐주셨는데, 회진 때 말고도 병실에 틈틈이 문병을 왔고, 궁금할 때마다 ㅇ 교수의 방으로 찾아뵐 수 있는 특권도 누리게 해줬다. 교수가 관심을 갖는 환자인지라 친구 아버님은 간호사와 전공의들한테도 따스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는데, 전부는 아니겠지만 친구는 ㅇ 교수의 친절을 자신이 수시로 제공했던 촌지 덕분이라고 말한다. “촌지를 받고도 여전히 성의가 없는 교수님들도 많은데 ㅇ 교수는 얼마나 훌륭하니?”
그럼에도 친구는 ㅇ 교수에게 일말의 서운함을 표시한다. “아버지께서 4년이나 입원해 계시느라 매달 내야 할 병원비가 장난이 아니었어. 그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촌지를 한 번도 거절 안하신 거 있지. ‘그냥 입원비에 보태 쓰세요’라고 한번만 말해줬으면 그 교수님을 더 존경했을 텐데 말이야. 설마, 그런다고 우리가 촌지를 다시 거둬가겠냐.”
몇 해 전, 환자 보호자에게 무안을 줘가면서 촌지를 돌려준 교수가 있었다. 그 얘기가 그 병원 보호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것은 그런 교수가 워낙 드물기 때문이리라. 사회학자 김종엽은 〈시대유감〉에서 촌지가 부도덕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다른 거래에서 촌지를 주지 않아 손해를 보게 된다면, 그 손해를 감수해야 할 사람은 바로 촌지를 주지 않은 사람이 된다. 이것은 도덕적 자유의 행사 대가이며, 자유인은 자유의 행사 대가를 스스로 부담하는 자이다. 그러나 교사와의 관계에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사람은 촌지를 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의 자녀가 된다. 이런 상황은 일종의 인질극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사는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있는 사람이며, 촌지는 몸값이 되는 것이다.”
병원 의사가 환자 보호자에게서 받는 촌지는 과연 얼마나 다를까.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기생충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