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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신진용  (2006-07-28 05:22:24, Hit : 31, 추천 : 4)
제목  
   히로히토의 메모

다른 문화를 들여다 보는 체험은 곧 즐거움이다. 그것은 호기심이며, 여행의 본질이기도 하다. 직접 그 땅에 발을 딛고 오감을 이용해서 여행하는 즐거움 못지 않게, 문헌을 이용해서 다른 사회를 들여다 보는 것 또한 호기심의 충족과 그에 따른 즐거움을 준다.

최근 일본의 니혼게이자이신문에서 보도한 바와 같이, 히로히토 천황이 사망 전년인 1988년,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이 합사 된 것에 대해서 <나는 그 날 이후 참배하지 않고 있다. 그것이 나의 마음이다>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적힌 메모가 발견되었고 이것은 현재 일본사회에서 큰 이슈가 되고 있다. 메모의 진위 여부를 떠나, 여기서 몇 가지 흥미로운  사회현상과 문화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발견된 메모를 대하는 일본사회의 반응은 ① '천황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그럴 리 없다' ② '천황은 충분히 그러실 분이다 평화를 사랑하셨고 그 결정을 이해한다' ③ '메모는 조작이다' 등이다.

역사적 사실에서 알 수 있듯, 히로히토 천황은 태평양 전쟁을 시작하고, 작전을 지휘하고, 전쟁의 항복을 선언한 인물이다. 이러한 사실에 기초해 천황이 그의 전우인 A급 전범들을 경멸하는 발언을 했다는 해석은 필요에 의해 기획된 정신분열이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싫어하는 파이트 클럽적 다중인격이 일본은 왜 필요한가? 일본의 정신중 나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A급 전범으로 인격화 하고 그것을 공격하려 함인데, 이로 인해 그 자신은 정신적으로 편안함을 느끼며 죄책감에서 해방되게 된다. 이러한 사회학적 정신분열은 기이하지만 전혀 이해 못할 일이 아니다. 그 행위는 비논리적이지만, 그 동기는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이번 메모의 발견과 언론 이슈화 동기의 한 측면은 일본국민들을 ②의 상태, 즉 '천황은 충분히 그러실 분이다 평화를 사랑하셨고 그 결정을 이해한다' 라는 정서를 갖게 하기 위함도 있다. 이것은 물론 피지배계급의 레벨에서 수용되는 정신구조이고, 지배계급이 자신들도 믿지 않을 이 거대한 '거짓말'(장정일)을 시도하는 정치적 이유는 분명하게 따로 있다.

지나친 우경화를 지배계급 그 자체가 경계하는 것이다. 일본의 지배계급은 정치적으로 크게 두 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에서 직접 진 지배계급과 전쟁과는 직접적으로 무관한 지배계급. 다소 거칠게 보자면, 전자는 나카소네계이고 후자는 고이즈미계라고 볼 수 있겠다.

고이즈미계의 자신감과 우경화가 일본 자체에 위험이 된다고 생각하는 원조우익들은 천황의 메모를 통해 한 발 발을 빼고 주변국의 눈치를 보라는 명분을 만들어 주고 있다. 아시아 주변국의 말은 굴욕 같아서 듣기 싫지만, 천황이 말리면 못이기는 척하고 발을 빼 줄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영화 '올드보이'에 이런 대사가 있다. "'왜 (나를 15년 동안) 가뒀는지가 아니라 왜 (지금) 풀어줬는가'라고 물어야지요."

그렇다. 메모가 어떻게 그리고 왜 작성되었는가 보다는, 왜 지금 메모가 이슈가 되고 있는가, 그게 더 중요하다. 사실이든 조작이든, 메모는 명분을 준다. 즉, 이런 명분이 통할 것이라는 측면에서 일본사회를 들여다 보면 그 정신구조가 비교적 분명하게 들어온다.

만세일계 천황을 통해 와(화목)를 유지할 수 있고 그런 원리가 통할 것임이 예상되어 천황의 메모 지령이 시도 되고 또 수용되는 사회구조. 현대 민주주의 원리에서 보자면 대단히 낯설게 보이는 구조이지만, 이게 바로 일본 정신문화를 여행하는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낯설지 않으면 흥미가 없고 흥미가 없으면 여행의 의미가 상실된다. 직접 발로 가든, 문헌을 통해서든 일본이 여전히 훌륭한 여행지 인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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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7-28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군.

마노아 2006-07-28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상적이네요. 퍼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