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레스 클레이본 - [할인행사]
테일러 핵포드 감독, 제니퍼 제이슨 리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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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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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8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8 14: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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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두 얼굴 - 사랑하지만 상처도 주고받는 나와 가족의 심리테라피
최광현 지음 / 부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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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대해 작정하고 고백할라치면 누구든 능히 책 몇 권씩은 나오지 않을까. (최승자 시인의 문장을 빌리면) 그러나 가족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무슨 말도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무슨 할 말도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해도 가족은 여하튼 존재한다는 배짱 혹은 체념 혹은 위안에서가 아니라, 그러나 가족에 대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책의 부제 '사랑하지만 상처도 주고받는 나와 가족의 심리테라피'의 비결은 특별한 게 아니다. 상대를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의 결핍과 상처부터 직시하고 보살필 것. 가족 사이의 갈등 역시 회피하지 말고 직면할 것. 그대로를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늘 소통의 끈을 놓지 않으려 노력할 것. 요는, 부단히 수행하라는 얘기였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가족도, 문제 같은 건 없다고 믿는 가족도, 원가족으로부터 독립하여 홀로 지내는 사람도, 새로운 가족을 이제 막 꾸려보려는 사람도 읽어볼 만한 책이겠다.

 

*        

 

환상은 언제든지 현실로 돌아올 수 있을 때에만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환상으로부터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족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가족의 인정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 즉 블라인드 스폿(blind spot)을 알고 있어야 한다. 블라인드 스폿은 원래 자동차의 사이드미러에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가족 안에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 즉 불편한 진실을 대면하고 인정해야 한다. -p.58

 

어린 시절 불행한 가족관계를 재현하려는 귀향증후군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어린 시절의 가족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곳에서 경험한 감정에 용기 있게 직면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 먼저 자신의 가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자신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고 힘들었는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헤아려야 한다. 이렇게 자신과 가족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하고 나면 배우자의 선택과 만남 속에서 발생하는 불안과 긴장에 좀 더 초연할 수 있다. -p.85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의 안정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간다. 노력할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의 삶이 안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착각인 경우가 종종 있다. 평온함 이면에 끊임없는 긴장과 불안이 도사리고 있는 가족관계가 적지 않다. 분명히 무언가 있고 그 때문에 불안과 긴장이 항상 느껴지지만 함부로 표현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어떤 일이 가족 내에 존재할 때, 심리학에서는 그것을 '가족 비밀'이라고 말한다. (...) 왜 이런 가족의 비밀이 존재하는가? 가족 비밀은 현재의 가족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즉자적 대응이다. 현실을 인정하는 순간 언제 닥칠지 모를 가정의 변화를 두려워하여 가족으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사건이나 문제를 부인하게 만든다. 가족은 변화에 저항한다. 가족 시스템에는 일종의 관성이 있어서,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을 고수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이러한 가족 시스템의 경향을 '항상성'이라고 부른다. 가족의 붕괴를 두려워하고 변화에 저항하려는 항상성 때문에 가족 비밀이 만들어지지만 그로 인해 가족 사이의 갈등은 증폭된다. (...) 가족 비밀은 결코 우회적인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가족의 비밀을 인정한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작업이지만 그 진실을 마주할 때에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다. -p.125

 

부부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고스란히 결혼생활에 가지고 온다. [억압, 투사, 동일시 등과 같은] 방어기제들은 우리가 어린 시절 문제에 직면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사용한 아주 오래된 습관이다. 방어기제는 우리의 고통스런 감정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닌 무뎌지게 하는 임시 수단에 불과하다. 그 사실을 '의식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관계에서 이뤄지는 일정한 행동 패턴을 관찰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가족은 언제나 일정한 틀 속에서 관계를 맺고 소통한다. 가족 사이에 만들어져 있는 패턴을 찾아내 그 안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방어기제에 이름을 붙이면 그 부작용을 해소할 길도 열린다. 사물이나 현상을 구분 짓고 서로 다른 이름을 붙여 구별하는 것은 가족심리학에서 매우 주효한 해결책 중 하나이다. -p.191

 

정신분석적 개념인 '자아 분화'는 자녀가 얼마나 엄마로부터 분리와 독립을 할 수 있는가를 의미한다. (...) 자아분화는 감정, 특히 그 중에서 불안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능력과 밀접한 관계를 이룬다. 가족은 복합적인 감정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가족 안에서 서로 상처를 주지 않으려면 먼저 자신의 지적 능력, 즉 이성의 힘을 사용해야 한다. 이성의 힘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자아분화 능력이다. (...)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누가 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가보다는 스트레스를 얼마나 잘 다루는가에 있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스트레스를 적게 받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스트레스와 불안을 건강하게 해소하는 사람이다. 스트레스를 잘 해결하지 못하고 불안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은 자아분화가 낮은 사람이다. 반면 스트레스에 잘 대응하고 엄습해 오는 불안을 잘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자아분화가 높은 사람이다. 결국 자아분화라는 것은 외부 환경이 아닌 자기 내면 상태이다. 똑같은 위기 상황에 처해있다고 해도 자아분화가 어떠한가에 따라 반응과 대응 방식이 다르며 그 결과도 달라진다.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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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디자인
하라 켄야 지음, 민병걸 옮김 / 안그라픽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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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는 개인이 사회를 마주보는 개인적인 의사 표명으로 발생의 근원이 매우 사적인 데 있다. 따라서 아티스트 자신만이 그 근원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점이 아트의 고독함이면서 또 멋진 점이기도 하다. (...) 한편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그 동기가 개인의 자기 표출 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쪽에 있다. 사회의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해석해 나가는 과정에 디자인의 본질이 있다. 문제의 발단을 사회에 두기 때문에 그 계획이나 과정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어 다른 사람들도 디자이너와 같은 시점에서 그 길을 따라갈 수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류가 공감할 수 있는 가치관이나 정신이 태어나고, 그것을 공유하는 가운데 만들어지는 감동이 바로 디자인의 매력이다. -p.39

 

1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을 구분하는 상업성의 경계가 모호해져버린 오늘의 상황에서는, 자폐적 나르시시즘에 갇혀 아우라를 위한 아우라에 천착하면서 뒤로는 교묘하게 이윤을 획책하는 '아트'보다 "사회의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해석해 나가는 과정"에 그 본질을 두는 '디자인'이 차라리 더 양심적인 분야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실제로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디자인 제품들이 나에게는 몹시 감동적으로 와닿았다. 비싼 값에 팔리는 기이하고 충격적인 현대미술 작품들에선 좀처럼 얻을 수 없는 종류의 어떤, 진정성이 느껴져서일까. 적어도 디자인은, '사기'는 아닌 것 같다. 이 책에서 하라 켄야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치적 배경 속에서 근대 디자인의 정신적 원류인 바우하우스 사상이 태동한 역사적 사실을 들면서 근대 디자인 개념의 기저에 이상주의적인 사회 윤리가 전제되어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런 대목도 예사롭게 읽히지 않는다. 

 

'디자인'이라는 개념의 탄생 배경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시대적 요청이 있었을까. 책에 따르면 디자인은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존 러스킨의 사상과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 공예 운동 등으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수공예를 통해 정교하게 갈고 닦여온 하나의 '형태'가 기계에 의해 천박하게 해석되고 왜곡되어 빠른 속도로 대량 생산되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자신의 생활과 문화에 대해 애착을 가진 사람들이 위기감을 느꼈다는 것. 생활 환경을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산업의 구조 안에 감추어진 둔감함과 미숙함에 대한 미적 감수성의 반발, 이것이 바로 디자인이라는 사상, 또는 사고방식의 발단이 되었다고.    

 

3 일본 생활잡화 브랜드 MUJI(무인양품 无印良品)를 좋아한다. 사실 이 책도 저자가 무인양품의 아트 디렉터라고 하길래 읽어본 것인데, 알고 보니 디자인 업계에서 유명한 분이었다.

 

무인양품이 목표하는 상품의 수준, 혹은 상품에 대한 고객의 만족도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적어도 돌출된 개성이나 특정의 미의식을 주장하는 브랜드는 아니다. '이것이 좋다', '이것이 아니면 안 되겠다'라는 강한 기호를 갖게 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수많은 브랜드가 그러한 방향성을 추구한다면 무인양품은 그에 반대되는 방향을 목표로 해야 한다. 즉 '이것이 좋다'가 아니라 '이것으로 충분하다'를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으로'에도 정도가 있다. 무인양품의 경우에는 이 '~으로'의 수준을 가급적 높이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이다.

 

'~이'는 개인의 의지를 확실히 보여주는 강한 태도가 느껴진다. 오늘 점심에는 무엇을 먹고 싶냐는 물음에 '우동으로 충분해요'라고 대답하는 것보다 '우동이 좋아요'라고 대답하는 편이 기분도 산뜻하고 우동에 대해서도 실례가 되지 않는다. 이와 똑같은 말을 옷에 대한 취향이나 음악의 기호, 생활 스타일 등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기호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태도는 '개성'이라는 가치와 더불어 언제부터인가 필요 이상으로 존중받게 되었다. 자유란 '~이'에 가까운 가치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이'는 가끔 집착을 포함한 에고이즘을 만들어 불협화음을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결국 인류는 '~이'를 향하여 지나치게 줄달음치다 이제는 막다른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닐까? 소비 사회도 개별 문화도 '~이'로 달음박질치다 세계의 벽에 가로막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으로' 속에 작용하는 '억제'나 '양보' 그리고 '한발 물러선 이성'을 평가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으로'는 '~이'보다 한 수 높은 자유의 형태가 아닐까? '~으로'에 포기나 작은 불만족이 포함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으로'의 수준을 높인다면 포기나 작은 불만족을 완전히 털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으로'의 차원을 창조하여 자신만만하면서도 지혜로운 '이것으로 충분하다'를 실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무인양품의 비전이다. -p.122

 

하지만 무인양품의 비전에 걸맞지 않게도, 무인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인양품으로 충분한 게 아니라 무인양품 필요할 듯ㅎㅎ. 소비주의를 지양하는 절제와 검약의 라이프 스타일을 소비시장에서 구매를 통해 익혀 나간다는 게 웃픈 아이러니긴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무인양품 매장에 갈 때면 흥분(?)된다. 단정하고 간결하며 기능에 충실한 제품들로 가득한 그곳이야말로 나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의 에듀케이션'의 현장이기에. 하라 켄야는 이 책에서 '무인양품의 사상'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4 디자인을 꼭 사물에만 적용되는 개념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겠다. 생활 환경과 삶의 방향과 어쩌면 우리 자신의 운명까지- 디자인의 외연을 확장하여 생각해볼 때 이 책이 주는 울림은 보다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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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철학으로 읽기>라는 책에서 '돌아온 탕아'라는 제목이 붙은 이 그림을 처음 보게 되었는데, 눈에 밟혀 이후로 자꾸만 생각이 난다. 렘브란트는 왜 이런 걸 그렸을까. 그는 이 장면을 거리에서 실제로 본 것일까. 용서를 비는 저 탕아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저들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런 이야기도 안 잊혀진다. "한 선비가 기녀를 사랑하였다.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 의자에 앉아 백일 밤을 지새우며 기다린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 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흔 아홉 번째 되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

 

김영승의 <슬픈 국>이라는 시도. "모든 국은 어쩐지 / 괜히 슬프다 // 왜 슬프냐 하면 / 모른다 무조건 // 슬프다 // 냉이국이건 쑥국이건 / 너무 슬퍼서 // 고깃국은 발음도 못 하겠다. // 고깃국은... / 봄이다. 고깃국이." 지하철 안전벽에서 우연히 본 이 시도 간혹 생각이 난다. 

 

이런 것들이, 잊혀지지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몸 속 깊은 곳에 무슨 결석처럼 쌓여가는 것 같다. 발음도 못 하겠는 그런 것들이, 차곡차곡. 왜 그러냐 하면 모른다 나도. 나도 그냥 괜히 그렇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그런 게, '국' 같은 게, 독서의 동력이 된다. 뭐라도 더 읽고 싶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런 것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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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철학으로 읽기 - 예술의 형이상학적 해명
조중걸 지음 / 한권의책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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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당대의 이념과 사상, 세계관을 반영한다. 이 책은 유사 이래 미술과 철학의 교호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 한 시기에 새롭게 출현한 미술 사조가 함의하는 당대의 인식 지형의 변화가 어떤 것이었는지 통시적으로 훑고 있다. 저자는 구석기 벽화의 자연주의 양식에서 구석기인들의 과학적(=주술적) 신념과 자신감을 읽어내고, 신석기시대의 기하학적 양식으로부터 기존의 구석기적 세계관의 붕괴로 인해 신석기 인류가 겪었을 실존적 고통을 가늠하기도 하며, 피로한 표정의 로마황제 두상을 주목하면서 로마 제국의 스토아주의적 극기와 현대의 실존주의를 유비 관계에 놓기도 한다. 섬세하고 날카로운 통찰의 힘으로 책 곳곳이 눈부시다.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저자가 고딕 양식을 중세철학의 유명론 이념의 예술적 대응으로 보고 있는 대목이다. 거칠게 요약하면, 중세 말에 대두한 유명론이 실재론이 지배적이었던 기존의 중세 세계관을 뒤흔들었고 이것의 건축적 반영이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고딕 양식으로의 변화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유명론의 대두를 실재론에서의 유명론으로의 ‘위대한 형이상학적 전환’이라는 과감한 표현으로 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전환’이라기보다는, 자칫 도전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소수의 어떤 의문들이 생겨났고 거기서 촉발된 신학적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면, 중세 말의 고딕 양식은 유명론의 반영이라기보다는 유명론이라고 하는 사유에 맞서 실재론적 입장을 강화하기 위한 일종의 ‘과잉면역반응’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고딕 양식은, 유명론이 자기도 모르게 말실수처럼 무의식적으로 제기하고 말았던 신 존재에 대한 회의와 의문 속에서, 중세적 세계관이 점차로 자기 붕괴되어가는 와중에 나타난, 한 세계가 몰락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극단적 화려함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내 요지는, 고딕 양식이 ‘이념의 반영’이 아니라, 차라리 어떤 애처로운 ‘강박적 심리 증상’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

 

역사는 진보한다기보다는 변전 혹은 변화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그러나 또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진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런 눈부신 도약의 순간이 역사의 마디마디에 분명 찬란히 빛나고 있기도 한 것이다. 그러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는 인간의 자질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으로 '미적 감수성'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나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법과 제도 및 풍습은 견고한 대신 가장 후속적이다. 윤리와 도덕은 법과 제도보다는 좀 더 빠르게 나아가지만, 윤리 도덕보다 더욱 빠르게 나아가는 것은 흔히 센스와 감각이라고 일컬어지는 미의식, 즉 '미적 감수성'이다. 이것은 상상력이라는 엔진을 달고 정말이지 급진적으로 나아간다.

 

미술사를 돌아볼 때마다 매번 감격하게 되는 까닭은, 그것이 미적 감수성이라고 하는, 한 시대의 정신이 개화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가장 선봉에 섰던 것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살짝 바꿔보는 편이 어쩐지 좀 더 예뻐보이는 것 같다.'라고 하는, 감각적 당위에 근거한 새로운 미학적 시도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러한 시도를 감행하기 위해서는 단지 창초적 발상만이 아니라 때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기에 미술사는 곧 인류가 보여준 위대한 용기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 책과 함께 서양미술사를 돌아보면서 실로 오랜만에 그 감격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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