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비평 146호 - 200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엮음 / 창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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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창비신인상 당선작 가운데 진은영 시에 대한 평론이 있었는데, 얼마 전 진은영의 <우리는 매일매일>을 갸우뚱하며 읽었던 나로서는 간지럽던 부위가 시원해지는 평론이었다. 진은영의 시 <아름답다>에서 이미지의 기저에 배어 있는 언캐니한 느낌에 대한 발견, <청춘3>이 정치적 의미로 확장되어 읽힐 수도 있다는 것, <눈의 여왕>에서 ‘피 묻은 자줏빛 살덩이’라는 구절의 해석 등은 이 글을 읽으며 얻은 수확이다. 좋은 평론은 시집을 다시 뒤적여보게 하는구나.  

이 글에 따르면, 진은영의 시는 "시어의 지시성을 의도적으로 회피함으로써 의미의 가독성을 경계하고 특정한 메시지를 지닌 언표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시적 발화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 그녀의 시는 그림으로 치면 구상회화가 아니라 비구상 꼴라주이며, 이 꼴라주 속에서 불화하는 이미지들의 고유한 배치가 때로 언캐니한 느낌을 만들어 내어 "단어가 환기하는 익숙한 의미체계에 불편하고 이질적인 느낌을 전달"한다는 것.  

그러고 보면 익숙한 의미체계에 종속되어 있던 이미지들을 방생하고 온존하게 독립시키는 일이 진은영 시의 주된 작업일 수도 있겠다. 그녀의 시를 읽으면서 받았던 인상, 그러니까 두 눈이 핑핑 돌면서 잠시 환각 상태에 빠졌다가 그만 노곤해지고 결국엔 공허해져 버리는 경험(?)을, 나는 그저 이미지의 인플레이션과 그로 인해 상대적으로 빈곤해져버린 의미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평론을 읽고 나니 진은영 시에 대한 그간의 내 느낌들이 피상적 독해에서 비롯되었던 건 아니었나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진은영에게 시의 유토피아란 아마도 감성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서로를 투신하여 ‘미적으로’ 결합하는 상상일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감성과 난해한 문법으로 무장하는 젊은 시인들의 지형 안에서 그 상상의 영역은 지극히 빈곤해 보이며, 때문에 그녀의 곤경과 고투는 충분히 격렬한 것이 된다." -p.315 

<우리는 매일매일>을 읽으면서, 흡사 포탄처럼 쏟아지던 무수한 이미지들을 받아내느라 시각적 피로감을 겪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읽는 내내 나는 마치 기백이 넘치는 명랑한 이웃집 언니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는데, 이 건강하고 씩씩한 기백이야말로 "격렬한 고투"의 추진력이자 진은영 시의 미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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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개인주의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0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훈 옮김 / 책세상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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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역사, 사상, 예술을 막론하고 유럽 문명의 세례 속에서 탄생한 작품들을 하나씩 일별해 나갈수록 어쩔 수 없이 서구문명에 대한 동경심이 내면에 깊숙이 뿌리내려 가는 것 같다. 서구 문명의 저작들 앞에서 지적 압도감을 느낄 때마다 불가피하게 맛보게 되는 사대주의적 열패감은 나로서도 당혹스럽다. 음모와 조작으로 점철된 전형적인 개도국의 발전사라고밖에는 평할 수 없는 오욕과 수난의 한국현대사를 알아갈수록 이러한 당혹감은 배가 된다. 그리고 그와 비견되어 유독 더 찬란해 보이는 서구인들의 전반적인 사고방식, 삶을 대하는 태도, 보편적인 가치관 같은 것들, 그리고 그러한 무형의 것들이 이루어낸 유형의 창조물들... 이런 게 바로 자문화혐오증의 초기 단계가 아닐까 염려되던 차에 읽게 된 소세키 선생의 말씀이 마음을 울린다.  

   
  어느 쪽이든 내가 한 차례 경험한 번민(가령 종류는 달라도)을 반복할 경향이 많지 않을까 추측됩니다. (...) 아무래도 한번 자신의 곡괭이로 팔 수 있는 곳까지 (스스로가 자신감과 안심을 갖게 될 때까지) 진행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진행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만약 팔 수 있는 곳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평생 불유쾌하고 시종 엉거주춤한 자세로 사회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 따라서 혹시 나와 같은 병에 걸린 사람이 이 가운데 있다면 아무쪼록 용감하게 나아갈 것을 바라 마지않습니다.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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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 기념시선집 창비시선 300
박형준 외 엮음 / 창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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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번부더 299번까지의 창비시선집 각 권마다 시 한 편씩을 뽑아서 엮은 책이다. 제목 그대로 아흔 아홉 걸음 걸었던 자리마다 유독 빛나는 시들만 추린 모양이다. 지난 달 초순부터 겨드랑이에 품고 다니면서 자기 전이나 밥 먹기 전이나 하는 무렵에 한 두 편씩 아껴가며 읽었었다. 정복의 야심을 품고 전투적으로 읽었던 책은 읽고 나면 개운하고 의기양양해지는 반면에, 시집은 다 읽고 나면 사람을 떠나 보내는 것마냥 헛헛한 기분이 든다. 김선태 시인의 <조금새끼>는 제일 마지막에 실린 시이다. 아쉬워서 옮겨적어 본다.   

   
 

조금새끼 / 김선태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 사는 목포 은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말이 어떻게 생겨났나고요? 아시다시피 조금은 바닷물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고 쉬는 때랍니다. 모처럼 집에 돌아와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조금 물때는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해서 뱃속에 들어선 녀석들이 열달 후 밖으로 나오니 다들 조금새끼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은 훗날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에 묻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인 셈이지요. 하여, 지금도 이 언덕배기 달동네에는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이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새끼 조금새끼 하고 발음하면 웃음이 나오다가도 금새 눈물이 나는 건 왜 일까요? 도대체 이 꾀죄죄하고 소금기 묻은 말이 자꾸만 서럽도록 아름다워지는 건 왜 일까요? 아무래도 그건 예나 지금이나 이 한마디 속에 은금동 사람들의 삶과 운명이 죄다 들어있기 때문 아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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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부인 김승옥 소설전집 4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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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소설전집 1권 <무진기행>편 서문에서 작가는 <강변부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설가로서 항상 머리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소설이란 재미있는 이야기이다'라는 공식을 편하게 즐겨보려는 태도로 써내려갔던 것이 <강변부인>이다. 1978년, 일요신문에서 연재가 끝나자 당시 한진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는데 만여 부가 판매되었을 때 나는 출판사측에 절판을 요구하며 출판을 중단시켜버렸다. 안이한 태도로 써낸 이 소설 한 편이 그동안 다작을 스스로 경계하면서까지 소설이 천박한 한 토막 이야기여서는 안 된다고 고집하던 나의 신념을 송두리째 훼손시켜버리는 듯하여 그 역겨움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악취미라면 할 말 없지만, 이 책을 읽은 것은 순전히 '작가 스스로 출판을 중단시켜버릴 정도의 퀄리티'라는 건 대체 얼만큼의 수준일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비록 도중에 출판을 중단시켜버렸을망정 <강변부인>과 같은 전형적인 통속소설을 별 거리낌 없이 세상에 내놓았던 작가를 보면, 그 비상한 문학적 재능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학에 대한 결벽이나 순정 혹은 어떤 완고한 장인정신 같은 것은 그다지 강하게 지니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토록 미련없이 문학계를 떠나버린 걸까마는.

재능은 빈한한데 자의식만 투철한 대부분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역시 천재는 마인드부터 쿨하구나 감탄하게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문학에 대해 좀 더 우직한 순정과 진지한 장인정신까지 갖추었더라면 그 빛나는 재능과 어우러져 한층 치열하고 중후한 작품을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가진 재주가 많아 문단에 오래 눌러앉아 계시지도 않았던 분이 그 얼마 되지도 않은 짧은 기간 일부를 <강변부인>같은 걸 쓰면서 소진해 버렸다는 사실이 새삼 안타깝다. 내내 입가의 미소를 거두질 못하고 재미나게 읽어놓고도 안타깝다고 말할 수 밖에 없으니 그게 또 한번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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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의 삶과 문학
박해현.성석제.이광호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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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기형도를 앓았었다. 한자로 된 시어를 읽기 위해 옥편을 구입했었고, 시어의 뜻을 국어사전에서 물어다 여백에 주석처럼 달아놓기도 했었다. 밤늦게 엎드려 누워 <기형도 전집>을 펼쳐놓고 몇 가지 시와 산문들을 베꼈다.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 <카뮈를 추억함>과 <일상적 삶>은, 그가 대구로 가는 여행길에 챙겨든 책이 아니었더라면 구태여 찾아 읽지 않았을 책들이다. 시인의 20주기 기념 문집인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기형도 전집>을 다시 꺼내 펼쳐본다. 밑줄과 메모와 무수히 접힌 페이지 따위로 나의 <기형도 전집>은 꽤나 요란한 편이고,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는 시인은 여전히 스물 아홉이다. 내후년이면 이제 우리는 동갑이다.

'그가 요절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그를 그토록 열렬히 앓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은, '내가 좀 더 나이 들어 그를 만났더라도'라는 가정으로 시작되는 마찬가지의 질문처럼 우문이겠으나, 그럼에도 그의 범상치 않은 죽음의 정황은 어쩔 수 없이 시의 연장으로, 연장된 텍스트로 읽히는 점이 있다. "그로 인해 그의 시는 일정한 부가가치를 얻은 대신 문학으로서는 갇힌 부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나희덕) 이 점과 관련하여 책 앞부분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이 읽은 기형도>라는 꼭지의 대담에서는, "기형도 시 작품에 나타난 죽음의 이미지를 자기실현적 예언이나 예감처럼 읽는 독해 방식이야말로 기형도의 삶과 관련된 이런저런 정황에 지나치게 경도된, 그로 인해 시 텍스트 자체를 읽는 데 소홀한 독해일 수 있으며"(조강석), 사실상 "그가 죽었기 때문에 '죽음'이 시적 사건이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의 시 세계 내부에서 '죽음'이 (객관적인) 시적 사건으로 추구되었다고 봐야 하고"(하재연),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죽음을 실존으로 보는 게 아니라 하나의 알레고리로 대하는(알레고리적인 장치로 사용하는) 태도가 기형도 시의 핵심인 것 같다(심보선)"는 이야기가 오가기도 한다.

이 책 2부에 수록된 지인들의 회고담에 따르면, 시인은 그가 남긴 시와는 다르게 한없이 밝고 유쾌한 사람이었던가 보다. 심지어 어떤 이는 "나를 포함한 주위의 친구들에게 그의 시는 과장이거나 상상적 허구였고 현실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자신의 모습을 배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검은 활자를 먹어치우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란색 연필로만 밑줄을 그었다던 사람, 자신이 썼던 모든 시를 줄줄이 기억했다던 사람, 좋은 시를 읽을 때나 기막힌 미인을 거리에서 발견하면 "죽여준다. 죽여줘."라고 했다던 사람. 지인들이 들려주는 생활인으로서의 시인은 시적 화자로서의 시인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그런 생경한 모습조차도 나에게는 여전히 '기형도'라는 텍스트를 감싸는 또 한 겹의 아우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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