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을 가꾸다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7월
평점 :
일시품절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이라고? 9월 신간 추천할 때, 이 책은 정말 안중에도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원’이라는 목가적인 단어가 어쩐지 나와 동떨어진 기분, 게다가 저자는 헤르만 헤세였다. <데미안>을 읽고 황홀경에 빠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사고, <황야의 이리>를 샀다. 그러나 둘 다 읽다 말았고, 그 사이 헤르만 헤세라는 독일인과 나는 한 때 열렬했으나-물론 한 쪽에서만- 급히 사랑이 식어버린 관계처럼 느껴졌다. 열렬하면 간혹 애증으로 변하는데, 이 열정은 증오로도 다정함으로도 나아가지 않았다. 갑자기 에세이 신간으로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선정되었을 때도 가만히 책을 들여다보며 저 노랑 표지 가운데 휴지를 줍는 포즈로 무를 뽑고 있는 신사가 아마도 헤세인가 보다, 하며 딴청을 피웠다.

 

읽다보면 헤세가 정원을 가꾸는 작가인지 글을 쓰는 정원사인지 헛갈릴 때가 있다. 그래서 작가로서의 헤르만 헤세를 잠시 잊었다. 데미안도 잊고, 읽지 못하고 항상 죄책감에 시달렸던 다른 두 권의 소설도 잊었다. 그냥 나는 읽었다. 여름목련나무와 난쟁이 분재에 대해 읽고, 이 사람은 여름목련나무처럼 화려하지만 덧없을지도, 저 사람은 난쟁이 분재처럼 단조롭지만 견고할지도, 하며 이 대립적인 식물들을 끝없이 되새겼다. 목련의 하얗고 푸르스름한 잎을 ‘창백하다’고 표현할 때 탐스럽지만 가까이 보면 추위로 몸을 웅크린 목련 꽃이 떠올랐다. 또 바싹 마른 꽃잎을 ‘호소하듯 슬픈 빛을 띤 붉은 잿빛’이라고 하면 건조한 방안에 장작처럼 마른 장미의 검은 꽃잎이 생생했다. 목가적이지 않더라도, 아주 도시적이고 현대적이라도 오래도록 꽃을 보면 그 창백하거나 슬픈 빛깔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그 즈음 생각되자 헤세가 정원을 가꾸는 작가인지 글을 쓰는 정원사인지 구분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사려 깊은 관찰자일 뿐이다. 그가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기계성은 아마도 그와 같은 관찰자의 시선을 거두어 가는 것에 대한 우려이지 않았을까.

 

정원에서 꽃을 보고 나무를 보고 나비를 보는 이야기도 있지만, 미래사회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어두움에 대한 맹렬한 불안을 숨기지 않는 이 대문호의 걱정을 줄줄 읽고 있으면 너무 많은 생각이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류차원에서 걱정하기 시작하면 걱정이 끝도 없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의무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헤르만 헤세에 대한 애정이 툭 끊겨버린 시점에 나는 그 거대한 걱정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소시민적인 삶을 탐하면서 그가 쓴 글들을 어떤 우연으로 다시 읽게 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전쟁이라는 우울한 상황에 지지 않고 오래도록 단순한 삶을 지속하며 생의 기쁨을 발견하고자 애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해준 것이 감사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