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님의 질문

 

사정상 저번 스터디가 해체되고, 이번에 다시 [법의 힘]을 읽고 있습니다.
1부를 다 읽었는데요. 세번째 아포리아 부분이 되게 어렵더군요;
그래서 관련 질문 드립니다.

데리다는 정당한 결정의 긴급성 혹은 환원불가능성을 "'언어 행위들'에, 그리고 정의나 법적 행위들 같은 행위 일반의 수행적 구조에 귀속"(57)시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진술문과 수행문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술문 역시 정확성이라는 의미에서는 정당할 수 있지만, 정의라는 의미에서는 결코 그럴 수 없다. 하지만 한 수행문은 오직 관습들, 따라서 다른 수행문들-묻혀 있든 아니든 간에-에 기초를 둠으로써 정의라는 의미에서 정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항상 자신 안에 모종의 파열적 폭력을 지니고 있다."(57)

여기서 어떤 수행문의 정당성이 왜 다른(혹은 기존의) 수행문에 기초를 두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령 이 문장은 정당한 결정이 자신을 정당하게해주는 무한한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앞의 주장과 모순되는 건 아닌지 헷갈리네요.

 

질문에 대한 답변

 

무영님의 질문의 초점은 마지막 단락에 있는 것 같군요.

"여기서 어떤 수행문의 정당성이 왜 다른(혹은 기존의) 수행문에 기초를 두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령 이 문장은 정당한 결정이 자신을 정당하게해주는 무한한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앞의 주장과 모순되는 건 아닌지 헷갈리네요. "

수행문의 정당성이 왜 다른(혹은 기존의) 수행문에 기초를 둔다는 말은, 우선 행위의 결정은 행위에

 앞서 존재하는 이러저러한 지식의 체계, 규범적 원칙에 근거를 둘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가령 규칙의 판단중지에 관해 말하는 첫번째 아포리아에서 데리다는 판사의 판결을 예로 들고 있죠.

판사의 판결이 정당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법전이나 판례를 단순 적용해서는 안되며, 자신의 책임 아래

법의 원칙에 대한 새롭고 자유로운 해석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하죠.

따라서 판결과 같은 언어행위는 이론적, 규범적 규칙이 아니라 다른 수행문들, 다른 언어행위들에만

의존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데리다가 말하는 다른 수행문들은 두 가지 종류가 있죠. 하나는

창설적인 수행문이 있을 것이고, 또 하나는 기존의 관습, 관레와 같은 것들이 있겠죠. 데리다가

보기에 이 양자는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구별될 뿐입니다. 이 양자는

이론적인 지식, 어떤  타당한 근거에 기초를 두고 있는 이론적인 법칙이나 진리와 달리

자기 자신의 권위 부여 구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입니다. 따라서 데리다의 논점은

혁명과 개혁, 또는 정초와 보존의 이분법적 대립을, 수행성의 관점에서 해체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혁명적인 것이든 관례적인 것이든 수행문, 수행적인 언어 행위는  어떤 진리나 공리,

불변적인 원칙에 근거를 둘 수 없으며, 결정 주체의 행위, 결정에만 의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데리다가 지식이나 계산, 또는 법적 규범의 체계를 모두 거부하지는 않죠. 이는 무엇보다도

결정의 수행적 성격은 어떤 불변적인 원리에 근거를 둘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최악의 결정, 최악의

판단, 최악의 결과를 낳을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새로운 어떤 것, 창설적인 어떤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감수해야 할 위험입니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러한 위험을 최대한

축소하는 길은  결정이 낳을 수 있는 위험한 결과들, 도착들에 대해 치밀하게 계산하고 숙고하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죠.

정리하자면,  수행문의 정당성은 다른 수행문들에 의존한다는 말은 정당한 결정이 자신을 정당하게

 해주는 무한한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앞의 주장과 전혀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서로 일관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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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lesas 2006-07-07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감사합니다^^. 다음 질문 드릴께요. 여기서 데리다가 진술문과 수행문을 분리시키는 가정(1)에서 출발해서,그 구분을 해체(2)하고 있기에 제가 좀 혼란스러웠던 것 같아요. (1)에서 데리다는 진술문의 사실성과 수행문의 정당성이 명확하게 분리된다는 전통을 따르다가도, (2)에서는 진술문의 사실성 또한 자체 안에 이 진술은 타당하다 라는 정당성 계기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는 듯 보이거든요. 그래서 다음 장에서는 "진리는 정의를 전제한다"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즉 어떤 법, 법적 규범이나 규칙이 진술적인 형태로 사실성 주장을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정의의 정당성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정당한 결정의 수행성이란 곧 법적 규범과 규칙(더 이상 진술적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는)의 자기 해체와 동시적이며, 타자와의 관계에서 매번 규칙과 규범을 재창설 해야만한다 라는- 요컨대 제가 이해한 게 맞는지 궁금하네요;

balmas 2006-07-08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무영님의 이해는 옳은 것 같습니다. :-)

cplesas 2006-07-13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국이 어지러운데 주변에서 계속 책 질문만 하려니 속상하네요-

[법의 힘] 68페이지의 두 문장 입니다.

(1) "게다가 벤야민은 1921년에 이미, 근원적 악과 타락(벤야민에게 이는 언어가 표상으로 타락하는 것을 의미한다)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만큼 더욱더 표상/대의의 질서에 잘 저항하는 이 궁극적 해결책의 가능성과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가설을 지지할 수 있는 방법은 언제든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아무리 이 문장을 뜯어 봐도 이해되지 않네요 그러니까 데리다는 벤야민이 1940년에 사망했지만, 1942년에 가결된 나치의 유대인 학살 방안인 '궁극적 해결책'을 미리 사유할 수 있었다는 맥락에서 나오는 말 같습니다. 그런데 이 다음에 연결되는 위의 문장은, 벤야민은 과 방법은 이라는 두 가지 주어가 한 문장 내에 있는 것 같아서요. 추측하면 이 문장의 뜻은 1940년에 벤야민이 죽었더라도~ 궁극적 해결책의 가능성만을 생각했다는 가설을 지지할 수 있다- 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가설을 지지할 수 있는 이유는 벤야민이 언어가 표상으로 타락하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 같고요. 그래서 "근원적 악과 타락에서 ~ 잘 저항하는"은 [벤야민이 아니라] 궁극적 해결책의 가능성을 수식하는 문장으로 보입니다. 수고스럽지만 확인 좀 부탁드릴께요.

(2) "우리가 그의 담론의 지속적인 논리를 신뢰한다면, 여러 징표들로 미루어 볼 때 벤야민은, [1942년에 채택된] '궁극적 해결책'이었던 게 될 이 표상 불가능한 것 이후에는 담론 및 문학, 시가 불가능하지 않게 될 것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장은 제가 벤야민의 언어철학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해되지 않는 대목인데요. 앞 문장에서는 궁극적 해결책이 표상적 언어에 저항한다 라고 정의했고, 그래서 "이 표상 불가능한 것 이후에는" 이름들의 언어 및 명명의 언어가 도래할 수 있다는 맥락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제게는 궁극적 해결책이 타락한 언어(표상적 언어)와 연관된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게 되네요; 아니라면 아렌트가 그랬듯 악이란 "사고의 결여"라고, 그래서 생각 속에 떠올릴 수도 없는 무엇이기에 표상 불가능하다 라고 보아야 하는 건지요. 발마스님은 궁극적 해결책이 구체적으로 무슨 사건인지 역주에 달아놓으셨지만, 이것이 데리다가 벤야민을 읽는 과정에서 특히 벤야민의 언어철학과 관련해 어떻게 파악되고 있는건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 또 좌절. OTL


balmas 2006-07-13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조금 있다가 답변해드릴게요. :-)

balmas 2006-07-16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영님,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

(1)번 질문은 문장 전체의 주어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집약되는 것 같은데, 이 문장 전체의 주어는 “방법은”입니다. 따라서 무영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이해할 수 있겠죠.

(2)번은 사실 어려운 문제를 잘 파악한 질문이군요. 어쩌면 이 문제가 이 책에서 데리다가 제기하는 핵심 주제 중 하나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데리다의 이야기는, 간단히 말하자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나 그와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 다른 글들에 담겨 있는 벤야민의 사고는 궁극적 해결책에 대한 추구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 “궁극적 해결책”이라는 것은 나치가 실제로 추진하고 집행했던 역사적인 궁극적 해결책과 다른 것이고 가장 대립적인 것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모든 인간적인 사고와 판단의 지평을 초과하고 심지어 대학살, 대대적인 폭력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시도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것 역시 최악의 것과 공모할 수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데리다가 “궁극적 해결책”이라고 지시하는 것을 나치가 추진한 실제의 역사적 정책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타락한 언어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죠. 하지만 “궁극적 해결책”이라는 것을 역사의 타락, 인류의 타락을 해결하기 위한 궁극적인 방법, 예컨대 혁명적인 폭력이나 메시아주의적인 정치 일반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표상 불가능한 차원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죠.

cplesas 2006-07-16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음,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 문장은 좀 수정될 여지가 있지 않나 생각되네요. (2) 그렇다면 이 '공모'를 어떻게 '선별' 하느냐가 문제되는 거겠군요.. 그래도 이런 선별은 궁극적 해결책을 표상하거나 표상하지 않거나 로 단순 수렴될 행위는 아니니까, 제 머리가 더욱 복잡해진다는 것에는 큰 변화가 없네요;;

balmas 2006-07-18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은 문장이 너무 복잡하죠? ^^; 한번 더 생각해보죠.
(2)가 선별의 문제라는 건 옳은 지적입니다. 어려운 문제지요. :-)

cplesas 2006-07-24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감탄으로 읽어가고 있습니다. ^-^

다름 아니라, 혹이 발마스님이 법의 힘 관련해서 남겨놓은 코멘트가 있을까 해서 뒤적였더니, 문장상이나 번역상에 약간 문제되는 부분이 있으면 리플로 올려주시라고 하길래, 물론 책이 출간되었을 때 얘기지만 뒷북삼아 책도 읽으면서 찾아낸 거 걍 올립니다.

 

"벤야민의 글이 부분에서 괄호 속의 문장은, 전쟁-평화의 쌍에서, 전쟁 역시 비자연적인 현상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것은 평화의 의례라는 점을 강조한다. (91)"

- 벤야민의 글의 이 부분에서 ?

분명 우리가 사형을 공격할 때, 우리는 여러 형벌 중 중 하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기원, 법질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다. (95)

- 중 자가 두 개 -_-

경찰 다만 그 집행자에 불과한 것으로 가정되고 있는 법을 경찰 자신이 생산하도록 인도해온 것 바로 근대의 정치·기술적 상황에 처한 근대 경찰이다. (101)

- 선생님 이건 제가 몰라서 그러는데, 문법상 하자가 없는 듯이 보이지만, 이해에 되게 불편하다면 제가 좀 글을 모르는 건가요; 앞단어의 경찰은 -> 경찰이 가 된다면 더 매끄러운 듯 싶어서요-

 

참 그리고, [법의 힘] 다음으로 [에코그라피]를 읽으려고 하는데

제가 알아본 인터넷 서점은 죄다 품절이더군요ㅠ

같이 읽는 분이 책이 없으셔서 그런데

어디에 재고가 남았는지 혹시나 알고 있으신가요?

(민음사에 또 멜 보내야되나...)


balmas 2006-07-24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잘하셨어요.
지난 번 2쇄 찍을 때는 시간이 없어서 대충 몇 가지 보이는 것만 고쳐서
냈는데, 다음 번에는 좀더 꼼꼼하게 읽고 고쳐서 내야겠어요. :-)

리브로나 몇몇 서점에서는 계속 팔았는데, 이제 정말 다 떨어졌나보네요. -_-

cplesas 2006-07-25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 [독립 선언들]만 읽으면 [법의 힘] 다 읽겠네요!!
책을 음독해본 건 이번이 첨인 거 같네요;

후-기를 읽고 나니, 궁극적 해결책과 관련해 발마스님이 남겨주신 리플이 다시금 강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하여간 엄청난 책이더군요-

그렇지만 어쨌든 교열될 문장들은 올려야지요-

반대로 예컨대 어떤 슈미트는 (119)
-> 어떤?

나치즘은 자신의 한계인 '궁극적 해결책'으로 논리적으로 귀결되기 때문에(130)
-> 으로, 으로

balmas 2006-07-26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느라 수고했네요. ㅎㅎㅎ
지적해준 대목들은 나중에 고쳐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