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수유너머N에서 오는 4월 15일부터 진행될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철학" 강좌 소개글을 올렸는데, 


강사 인터뷰를 하자고 해서 서면 인터뷰를 했습니다. 


앞으로 수유너머N 홈페이지에도 게재가 될 예정인데, 여기에도 참고 자료 삼아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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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철학 강사 인터뷰 질문>



1. 강의의 부제가 “대중, 민주주의, 반폭력” 입니다. 이 주제들을 부제로 삼으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이 세 가지 단어는 제가 보기에 1980년대 이후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사상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라고 할 만한 것을 선별해본 것입니다. 


“대중”이라는 주제는 한편으로는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재해석과 관련되어 있고(네그리와 더불어 스피노자 철학에서 다중(multitudo)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밝혀 준 연구자가 발리바르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맑스주의 전통에서 정치의 주체로 간주된 ‘계급’으로 환원되지 않는 정치적 행위자, 가령 인종, 민족 내지 국민 같은 행위자를 사고하기 위한 준거의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대중”은 정치의 환원 불가능한 복합성을 지칭하는 개념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주제 역시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중핵을 이루는 주제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주제는 겉보기에는 진부한 주제 같지만, 사실 국내에 널리 소개된 유럽 사상가들 중에서 민주주의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이론가는 별로 없습니다. 아마 자크 랑시에르 정도가 민주주의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주목할 만한 철학자이고, 바디우가 됐든 지젝이나 네그리, 아감벤이 됐든 민주주의에 관해 새로운 사상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뒤에서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발리바르의 민주주의론은 그가 “평등자유명제”라고 부르는 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는, 간단히 말하자면, 한편으로 계급 관계에 기초를 둔 맑스주의 정치학과 다른 한편으로 흔히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18세기 프랑스혁명 및 미국 독립혁명에 토대를 둔 근대 민주주의의 유산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발로입니다. 과거에 맑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계급 착취의 현실을 은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일축했고,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자들은 맑스주의 정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무시하는 전체주의 정치학이라고 비판했습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이후 역사적 맑스주의가 종언을 고함으로써 오늘날 이러한 논쟁은 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또 자유주의자들은 결국 승리한 것은 자유민주주의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지난 2008년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가 위기에 처하면서 그 대안적인 체제에 대한 모색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대개 ‘진보적인’ 학자들이 내놓는 답변은 북유럽식 복지국가입니다. 복지국가가 중요한 역사적 업적이기는 하지만, 발리바르는 국민국가의 역사적 성취로서 복지국가 또는 그의 용어법대로 하면 국민-사회국가 내지 사회적 국민국가의 한계를 넘어서는 좀 더 급진적인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반폭력”은 지난 1990년대 이후 발리바르 정치철학을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반폭력은 폭력 일반에 반대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극단적 폭력이라고 부르는 폭력의 극단적 형태들에 반대한다는 뜻입니다. 극단적 폭력은 사람들을 일회용 상품으로 만드는 폭력이면서 자신들과 다른 타자를 극단적으로 증오하고 배척하는 폭력이기도 합니다. 발리바르는 극단적 폭력은 정치적 주체성을 잠식하는 폭력이기 때문에 특히 위험하고 심각한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폭력에 맞서 정치적인 것을 보존하고 확장하려는 노력을 표현하는 것이 반폭력이라는 개념입니다.



2. 발리바르는 80년대 PD의 사상적 준거였다고 하셨는데, 2016년의 우리에게 발리바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 에티엔 발리바르는 오늘날 우리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것 같습니다.


(1) 제가 「좌파 메시아주의라는 이름의 욕망」([황해문화] 2014년 봄호)에서 말한 바 있지만, 최근 우리나라에서 각광받는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조르조 아감벤, 안토니오 네그리, 또는 어느 정도는 자크 랑시에르 같은 이론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바깥의 정치’를 추구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바깥의 정치라고 부르는 사상은 현대 정치의 대표적인 모델로 간주되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를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억압하거나 배제하는 지배의 체제라고 간주하며, 따라서 인민의 권력으로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바깥에 존재하는 진정한 정치의 장소를 발견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그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여기에 대해 여러 가지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그 중 두 가지 측면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첫째, 우선 바깥의 정치의 사상가들처럼 반동적 정치체제로서 자유민주주의와 거기에서 벗어나는 해방적인 정치 체제를 전면적으로 대립시키는 것은 외관상으로는 명쾌하고 선명해보이기는 하지만, 이런 관점으로는 정치체의 역사를 제대로 분석할 수 없습니다. 둘째, 더 심각한 것은 이런 관점은 역설적이게도 제도적인 민주주의 정치가 지배의 체제로 기능하는 것을 이론적ㆍ실천적으로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입니다. 바깥의 정치에서 주장하듯이 제도적인 정치가 본성상 지배의 체제라면, 그리고 진정한 민주주의 정치는 그 바깥에서 추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제도적인 정치 자체를 내부에서 개조하는 일은 헛수고에 불과하거나 사소한 문제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 제도적인 정치 내부에서 어떠한 퇴락이나 퇴행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비판하거나 제어하는 것 또는 그것을 개혁하는 것은 어렵게 됩니다. 제도적인 정치는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배자들로서는 오히려 환영할 만한 관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반면 발리바르는 바깥의 정치 사상가들처럼 제도적인 정치 바깥에서 진정한 정치의 장소를 찾지 않으며, 최장집 교수처럼 제도적인 정치(특히 정당정치)야말로 진정한 정치의 영역이라고 강변하면서 운동을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바깥의 정치와 제도 정치 사이의 변증법에 주목합니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근대 민주주의는 1789년의 프랑스혁명과 같은 봉기적인 사건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제도적 민주주의의 퇴락과 보수화 경향에 맞서 그 생명력을 유지ㆍ강화시켜 주는 것 역시 시민들의 봉기적인 투쟁입니다. 하지만 봉기가 일회적인 사건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강한 의미에서 제도화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발리바르는 봉기와 제도의 변증법 속에서 자신의 민주주의론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2) 우리나라에 널리 소개되어 있는 동시대의 많은 유럽 사상가들에게 특징적인 점은 매우 환원적인 사상적 성향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특히 앞에서 이야기한 바깥의 정치를 주창하는 이론가들이나 특히 제가 좌파 메시아주의 사상가들이라고 부른 바디우, 지젝, 아감벤은 지극히 환원주의적인 사상가들입니다. 가령 아감벤에게서 정치의 문제는 주권과 생명의 문제로 환원되고, 지젝은 고전적인 혁명론을 실재의 차원에서 되풀이하고 있으며, 바디우나 네그리는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이론화한 공산주의야말로 진정한 정치라고 주장합니다. 반면 제가 5강에서 다루겠지만, 발리바르는 근대 시민혁명의 핵심을 이루는 해방(emancipation) 개념, 맑스주의와 푸코 정치학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변혁(transformation) 개념, 그리고 반폭력의 정치의 요체를 이루는 시민다움(civility) 개념 같이 적어도 세 가지 개념을 통해 정치의 복합적인 다면적인 측면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는 맑스주의적인 변혁의 정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근대 시민혁명에서 유래한 민주주의의 이상과 연결하려는 시도이며, 또한 두 가지 정치만으로는 제대로 개념화할 수 없는 폭력의 문제를 시민다움 개념으로 사고하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현대 사회처럼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에서 한 가지 개념이나 관점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헛된 시도에 그칠 수 있으며, 더욱이 체제 전체를 단숨에 뒤집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중 매체의 관심을 끌기는 좋겠지만, 의미 있는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지기는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구체적인 실천을 중시하는 진보적인 활동가나 연구자들의 경우에는 오히려 복지국가론이나 제도적 민주주의론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제도권 정당 활동에 투신하는 현상도 나타납니다. 이런 연구나 활동이 나름대로 중요성을 지닌다는 점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발리바르의 작업은 바깥의 정치냐 제도 정치냐, 정당이냐 운동이냐, 대항폭력이냐 비폭력이냐 하는 불모의 양자택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사고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3. 발리바르의 “평등자유명제”라든지, “시민다움”과 같은 개념들은 계몽적인 느낌이 나는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좌파지식인이 이런 주제에 천착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발리바르의 민주주의론은 사실 한편으로 맑스주의적인 정치학과 다른 한편으로 18세기 프랑스혁명 및 미국혁명에서 표출된 근대 시민혁명 또는 부르주아 혁명의 유산을 함께 사고하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등자유명제”라는 것 자체가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발표되었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 대한 재해석에서 도출된 명제입니다. 보통 맑스주의자들은 계급적 관점에서 근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이를 넘어서는 진정한 민주주의 또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주창하곤 했습니다. 「인권선언」에서 제시된 인간의 권리나 시민의 권리 같은 것은 이미 낡았을 뿐만 아니라 형식적이고 제한적인 민주주의의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맑스주의적인 민주주의론은 숱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제대로 사고하지 못한다는 자유주의적인 비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 곧 당의 독재에 대한 옹호론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또한 최근 국내에 번역된 [불화: 정치와 철학]에서 랑시에르는 맑스주의적 정치학을 메타정치라고 규정하면서 그 한계를 고발한 바 있습니다.


발리바르의 경우는 맑스주의에 대하여 자유주의적인 의미의 개인의 권리나 자유를 보충하거나 접합하기보다는, 민주주의 개념 그 자체를 다시 사고해보기 위해 1789년 발표된 「인권선언」 텍스트로 되돌아가 이 텍스트에서 “평등자유명제”를 추출해냅니다. 이 명제의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는 프랑스의 정치철학자였던 클로드 르포르의 작업이 꽤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르포르는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구별을 통해 근대 민주주의의 본질을 새롭게 사고하려고 시도한 바 있습니다. 프랑스어에서 정치를 가리키는 단어는 라 폴리티크(la politique)이며, 르 폴리티크(le politique)는 원래 ‘정치가’를 뜻하는 말입니다. 반면 르포르는 경제나 사회, 문화와 구별되는 인간 활동의 한 영역을 지칭하는 정치와 구별되는 좀더 근원적인 차원, 곧 어떤 사회를 하나의 사회로 성립하게 해주는 상징적 차원을 가리키는 말로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이라는 개념을 정의합니다. 특히 ‘정치적인 것’은 정치적 근대성 및 그것을 창설한 프랑스혁명의 새로움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고안되었습니다(L’invention démocratique, Fayard, 1981; Essais sur le politique, Seuil, 1994).


그에게 근대 민주주의 체제가 이전의 체제와 다른 점은, 예전에 왕으로 대표되던 주권자의 자리, 곧 “권력의 자리”를 “빈 장소”로 비워놓았다는 점입니다. 이 자리는 상이한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를 가진 집단들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영원히 차지할 수는 없으며, 그 자리의 점유자는 주기적인 선거를 통해 교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전체주의 체제는 총통이나 수령, 당의 이름으로 비어 있는 그 자리를 (영속적으로) 메우려고 했으며, 이것이 두 체제를 가르는 본질적인 차이점입니다.


이처럼 민주주의를 반(反)전체주의로 규정하고 주기적인 선거와 다당제를 그것의 핵심 특징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르포르 정치학은 일면 자유주의적 성격을 지닙니다. 하지만 르포르가 르포르가 상징적 통일성과 현실적인 분열 사이의 괴리를 가리키는 ‘빈 장소’를 강조할 때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인권선언」에서 표방된 권리가 제도화된 법적 틀을 넘어선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것은 법적ㆍ제도적인 틀을 기초 지으면서 동시에 그러한 틀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권리의 창조를 촉발하는, 근대 민주주의의 봉기적 원천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발리바르가 ‘평등자유명제’로 재해석하려는 것이 바로 근대 민주주의의 이러한 봉기적 특성입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제도화된 자유민주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의 근저에 놓여 있으며, 그러한 역사적 제도의 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시민다움’(civility)이라는 개념은 반폭력의 정치를 사고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약간 곤혹스러운 측면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프랑스어의 civilité나 영어의 civility에는 우리말로 하면 ‘공중도덕’ ‘사회적 예법’ 같은 의미도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버스나 지하철에서 노약자나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 거리에 침을 뱉지 않고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 것 등이 civilité나 civility의 일상적 용법일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데, 문제는 이처럼 공중도덕이나 사회적 예절을 강조하는 것이 쉽게 치안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로 동원된다는 점입니다. 가령 2005년 프랑스의 방리유 소요를 촉발했던 계기 중 하나도 당시 프랑스 내무장관이었던 사르코지가 내걸었던 ‘엥시빌리테(incivilité)와의 투쟁’, 곧 사회 질서나 공중 예절을 어지럽히는 무뢰배들(주로 이주자들)과의 투쟁이었습니다.


하지만 발리바르가 시빌리테 또는 시빌리티라는 용어에서 주목하는 것은 오히려 마키아벨리적인 유산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탈리아어인 키빌리타civilità라는 용어가 발리바르가 말하는 시빌리테의 더 직접적인 이론적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키아벨리 시대에 ‘시민적인 것’(시민적인 업무/활동)과 ‘시민적인 삶의 양식’을 가리키던 이 개념은 발리바르의 시빌리테라는 개념이 목표로 삼는 것을 잘 드러내줍니다. 시빌리테라는 개념은 단순한 사회적 예절이나 공중도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 극단적 폭력으로 인해 그 존재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시민적인 것, 곧 정치적인 것의 영역을 가리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영역을 보존하고 확장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 특히 그것을 뒷받침하는 시민들 자신의 윤리적 노력과 의지를 표현하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시빌리테라는 개념은 시민권 내지 시민성(citoyenneté/citizenship)이라는 개념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개념들이 계몽적인 개념인 것처럼 보인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습니다. 발리바르는 이 개념들을 군주정이나 봉건 질서에 맞선 근대 초기의 시민들의 투쟁이나 시민혁명 그리고 그에 대한 이론적 성찰에서 이끌어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발리바르의 이론적 작업은 ‘새로운 계몽주의’를 추구하려는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단, ‘새로운 계몽주의’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두 가지 점만 간략하게 지적해보겠습니다.


말년에 푸코가 관심을 기울인 텍스트는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이었습니다. 이 글에 대해 강의도 하고 또 같은 제목의 논문도 발표하면서 푸코가 강조한 점 중 하나는 ‘소수파/약소자/미성년’이라는 다양한 뜻을 갖는 minorité/minority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소수파/약소자/미성년에서 벗어날 것인가가 계몽주의의 핵심 주제였으며, 푸코 자신의 ‘역사적 존재론’의 화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는 들뢰즈-가타리의 작업에서도 중요한 문제였고, 랑시에르도 매우 강조하는 논점이었습니다. 랑시에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해방이란 소수파/약소자/미성년(minorité)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도 자기 스스로의 힘을 통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소수파/약소자/미성년에서 탈출할 수 없다. 노동자들을 해방하는 것은 노동을 새로운 사회의 정초 원리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소수파/약소자/미성년의 상태에서 탈출하도록 만드는 것이자, 그들이 정말 사회에 속해 있음을 증명하고, 그들이 정말 공통 공간 속에서 모두와 소통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 도래할 사회를 지배할 대항-권력을 정초하는 것보다는 능력을 증명하는 것―그것은 또한 공동체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이 중요하다. 스스로 해방된다는 것은 이탈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 세계를 함께-나누는 자로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 비록 겉모습은 다르지만 우리가 상대와 같은 게임을 할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길, 2013, 93쪽)


어떻게 노동자 또는 대중 또는 민중 또는 을(乙)들이 소수파와 약소자 또는 정치적 미성년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는, 18-19세기에만 중요했던 질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 여기에서 제일 간절한 질문입니다. 헬조선, 망한민국, 금수저, 흙수저라는 혐오 담론이 유행하고 있지만, 그 담론들이 증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약소자들, 소수파들, 정치적 미성년들이 다수를 이루는 사회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실로 이것이, 다시 말해 민중, 다중을 약소자들/소수파들/미성년들의 다수로 또는 을들의 다수로 만드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효과입니다. 이 문제를 중요한 정치적 질문으로 간주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계몽주의입니다.


둘째,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약소자/소수파/미성년 또는 을이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는 간단한 숫자로 드러납니다. 몇 년 전 뉴욕에서 벌어졌던 오퀴파이 운동의 구호는 “1 : 99”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숫자는 심각한 착각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를 염두에 둔다면, 오히려 더 현실성 있는 숫자는 “51 : 48”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후자의 숫자는 지난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득표율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50대 이상, 특히 60대 이상의 노년 유권자들은 박근혜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노년 유권자들 중 대다수는 우리가 방금 전에 약소자/소수파/미성년 또는 을이라고 불렀던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한국 정치에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선거공학적인 숫자놀음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매우 새로우면서도 심각한 현상입니다. 저는 이것도 역시 새로운 계몽주의가 화두로 삼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4. “평등자유명제”가 궁금합니다. 이름만 들어도 호기심이 생기는데 “자유”와 “평등”을 한꺼번에 말할 수 있다는 건가요?


“평등자유명제”(proposition of the equaliberty)는 2010년 발리바르가 프랑스어로 출간한 책 제목이면서, 그가 1989년에 발표한 논문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 제목에서 흥미로운 표현은 “평등자유”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프랑스어로 하면 l'égaliberté이고 영어로 하면 equaliberty입니다. 보시다시피 이것은 ‘평등’을 뜻하는 égalité/equality와 ‘자유’를 뜻하는 liberté/liberty를 합쳐서 만든 합성어입니다.


발리바르가 이렇게 두 개의 단어를 합쳐서 합성어를 만든 첫 번째 이유는 평등과 자유라는 것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본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바로 프랑스혁명 및 「인권선언」의 철학적ㆍ정치적 핵심을 표현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평등과 자유를 정치의 핵심적인 원리이지만 또한 서로 상반된 또는 적어도 매우 상이한 지향을 갖는 원리라고 간주합니다. 평등을 추구할 경우 자유가 침해되거나 약화되고 반면 자유를 추구할 경우 평등이 위태로워지거나 훼손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발리바르가 ‘평등자유’, 곧 평등=자유라는 개념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평등이 반박되고 부정당하는 역사적 상황은 자유가 반박되고 부정되는 역사적 상황과 정확히 같다는 사실, “평등을 억압하거나 제한하지 않으면서—즉 폐지하지 않으면서—자유를 억압하거나 제한하는 조건들의 사례는 없고, 또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둘째, 중요한 것은 개인적 자유와 집단적 자유,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을 구별하고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우선시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과 자유를 서로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어떤 것인지 묻는 것입니다. 예컨대 자유가 평등이 아니라면, 곧 자유가 불평등의 조건 속에서 성립하는 자유라면, 그때 자유는 우월성이나 특권의 표현(강자의 자유, 귀족의 자유 등)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자신보다 우월한 어떤 힘이나 세력에 복종할 수 있는 ‘자유’(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신분적 예속으로부터, 생산수단으로부터 이중으로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가 평등과 분리되어 실제로는 전혀 자유가 아닌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평등과 결합되고, 그것과 동일화되어야 합니다. 역으로 평등은 “모든 예속과 지배에 대한 근본적 부정의 일반 형식으로, 곧 자유 그 자체의 자유화/해방(libération)으로 사고되어야” 합니다. 요컨대 우리는 불평등한 상태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고, 또한 자유롭지 않은 가운데 진정으로 평등할 수 없다는 것이 발리바르가 평등자유명제를 통해 근대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로 추출해낸 명제입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평등자유명제를 「인권선언」의 이론적 핵심으로 제시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근대 정치, 근대 민주주의의 본질은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의 선언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억압받고 착취 받고 차별 받는 피지배자들, 을들의 해방은 을들 스스로 쟁취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는 점입니다. 근대 정치는 더 이상 신과 같은 초월적 원칙이나 본성이나 혈통 같은 자연적 원칙에도 근거하지 않고, 시민들 자신의 상호 이익 내지 호혜성을 위한 결사체라는 데 자신의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5. 끝으로 발리바르를 처음 읽는 수강생들이 미리 읽었으면 좋을 만한 책을 1~2권 소개해 주시죠.   


제가 권하고 싶은 책은 우선 제가 번역한 [정치체에 대한 권리]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발리바르의 다른 책에 비하면 분량도 많지 않고, 문체도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 편입니다. 특히 「국민우선에서 정치의 발명으로」 같은 글은 1990년대 발리바르가 고민했던 민주주의의 핵심 쟁점을 아주 구체적이면서 설득력 있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글입니다. 


두 번째로 권하고 싶은 책은 [스피노자와 정치]라는 책입니다. 특히 1부를 권하고 싶습니다. 이 책의 1부는 원래 프랑스에서 문고판 단행본 저작으로 출간된 바 있으며,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정치학에 관한 가장 탁월한 입문서로 평가받고 있는 책입니다.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을 이해하려는 독자나 발리바르 정치철학에서 스피노자가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려는 독자 모두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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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2016-03-26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모호했던 발리바르에 대해 적확한 해설 감사합니다. 주말 오전부터 너무 좋은 글을 봤습니다.

balmas 2016-03-26 16:32   좋아요 0 | URL
ㅎㅎ 도움이 되셨다니 반갑습니다.

촛불승 2016-03-27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아주 유용하게 잘 정리된것 같습니다. 강의 듣고 싶지만 너무 멀어서... 녹음 파일이라도 있으면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듯합니다만... 오늘 문득 보니 책장에 오래 전부터 꽂혀있는 <EQUALIBERTY>가 에베레스트 산보다 높아 보입니다. 갈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항상 선생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balmas 2016-03-27 23:18   좋아요 0 | URL
격려 말씀 감사합니다. 나중에 영상이나 녹음으로 기록할 기회도 있겠지요. :)

궁금 2016-03-27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강의 일정이 바뀌었나요.
밑에는 4월 8일로 되있었는데
위에서는 15일이라고 하셔서요.
15일이 맞는 건가요?

balmas 2016-03-27 23:19   좋아요 0 | URL
예 제가 4월 8일에 다른 일정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한 주 뒤로 연기했습니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철학˝ 강의 시작 날짜는 4월 15일이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