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으로 용어 해설 하나 더 올립니다.

책에는 몇 가지 용어 해설이 더 있는데, 여기에는 그냥 이 정도만 올리겠습니다.

역량potentia-권능/권력/권한potestas


우리가 역량이라고 번역한 포텐샤potentia/puissance 개념은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다(피에르-프랑수아 모로 같은 이는 심지어 스피노자를 “역량의 철학자”로 부르기까지 했다). 이는 라틴어의 “포세posse”라는 어근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보통은 “~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 개념은 자신의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고유성은 당대의 이론적ㆍ이데올로기적 맥락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적 입장의 특징을 매우 잘 표현해주고 있다. 스피노자의 포텐샤 개념의 고유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개념을 포테스타스potestas/pouvoir라는 개념과 결부시켜 고찰하는 게 좋다. 스피노자가 대개의 경우 이 두 개념을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 두 개념의 상관적인 용법은 두 개념의 차이뿐만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의 이론적 고유성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1) 존재론-신학적 의미

존재론-신학의 영역에서 두 개념은 대립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곧 포텐샤는 합리적으로 인식된 신의 본성을 나타내며, 포테스타스는 신의 본성에 대한 상상적이고 미신적인 견해를 나타낸다.

  󰡔윤리학󰡕에서 포텐샤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분명한 규정을 얻고 있다.

“포텐샤는 실존할 수 있는 있음이다posse existere potentia est.”(󰡔윤리학󰡕 1부 정리 11의두 번째 또 다른 증명)

“신 자신과 모든 실재가 그에 따라 존재하고 행위하는 포텐샤는 신의 본질 그 자체다Potentia Dei, qua ipse, et omnia sunt, et agunt, est ipsa ipsius essentia.”(󰡔윤리학󰡕 1부 정리 34의 증명)

  이 두 가지 규정은 각각 분명한 이론적 목표를 지니고 있다. 첫 번째 규정은 포텐샤를 잠재력으로, 곧 실행될 수도 있고 실행되지 않을 수도 있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하여 항상 현행적인 힘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포텐샤가 현행적인 힘으로 이해되는 것은, 스피노자가 “실존할 수 있음”과 “실존할 수 없음”을 존재론적으로 불균등한 사태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에게 “실존할 수 없음은 무능력/비역량posse non existere impotentia est”(1부 정리 11의 두 번째 또 다른 증명)이며, 따라서 실존하지 못하게 만드는 특정한 원인이 지정될 수 있는 사태이지(“모든 실재에 대해 그것이 실존하는 사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실존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도 이유 또는 원인을 지정해야 한다.”(1부 정리 11의 첫 번째 또 다른 증명)), 원초적인 무와 같은 것이 아니다. 

  두 번째 규정은 신과 피조물 또는 오히려 자연 실재들 사이에 초월적인 거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모든 실재들의 실존 및 행위의 내재적 원인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이미 정리 18 및 정리 25의 주석 등을 통해 증명되었지만, 스피노자는 1부 마지막 부분에서 포텐샤의 관점에서, 곧 원인의 관점에서 신과 자연 실재들의 내재적 관계를 해명하고 있다. 따라서 신은 항상 능동적이고 수동적일 수 없기 때문에, 신에 의해 실존하고 행위할 수 있는 역량을 부여받은 모든 자연 실재는 항상 최소한의 포텐샤, 곧 원인으로서의 능동성을 지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윤리학󰡕 1부가 “그 본성으로부터 아무런 결과도 따라나오지 않는 것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정리로 끝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포텐샤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표준화된 현실태-가능태의 구분법을 해체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반면 포테스타스는 초월자(이는 신학자들이 말하는 초월적 인격신을 의미하지만, 바로크 시대의 절대군주를 함축하기도 한다)의 의지에 따라 실행되거나 실행되지 않거나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며, 주로 논쟁적인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 포텐샤 개념의 경우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인과관계와 그 작용을 가리키는 데 반해, 포테스타스는 이러한 인과적 필연성을 초월하는 어떤 목적을 전제하거나 (초월적) 주체의 의지의 무한성에 의존한다는 점에 양자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의 구분은 당대의 신학 및 존재론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며, 실제로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정리 17의 주석이나 1부 정리 33의 따름정리 2 같은 곳에서 역량의 관점에서 포테스타스의 신학ㆍ존재론에 대해 매우 신랄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은 신이 자유로운 원인인 이유는―그들은 이렇게 생각하는데―우리가 그의 본성으로부터 따라나온다고 말했던 것, 곧 그의 권능 안에 존재하는 것을 그렇지 않게끔, 다시 말해 그 자신에 의해 산출되지 않게끔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1부 정리 17의 주석)

“모든 것을 신의 어떤 무관심한 의지에indifferenti cuidam Dei voluntati 종속시키고 모든 것을 신의 기분에 의존하게 만드는 이러한 의견은, 신이 모든 것을 선을 고려하여 실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보다는 진리에서 덜 멀어진 것 같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 왜냐하면 이 후자의 사람들은 신에 의존하지 않는 어떤 것, 신이 자신의 작용에서 표본으로 삼거나 마치 정해진 목표인 것처럼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어떤 것을 신 바깥에 설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신을 운명fato에 종속시키는 일과 다르지 않다.”(1부 정리 33의 주석 2) 

  스피노자가 이처럼 포테스타스의 신학ㆍ존재론을 치열하게 비판하고 있는 이유는, 포테스타스 개념을 중심으로 자연을 설명하게 되면, 자연을 구성하는 실제 인과관계 및 그 일부로서 인간 자신의 본성을 적합하게 인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초월적인(곧 비합리적인) 위치에서 자연을 지배하는 인격신이나 주권자에 대한 맹목적인 예속을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이는 특히 󰡔윤리학󰡕 1부 「부록」에 잘 나타나 있다).


2) 인간학적-윤리학적 의미

인간학-윤리학의 영역에서 두 개념의 용법이나 관계는 존재론-신학의 경우와 좀 차이가 난다. 왜냐하면 인간학의 영역에서는 유한한 자연 실재로서 인간이 문제이기 때문에, 포텐샤 개념이 항상 능동적이고 현행적인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포텐샤는 코나투스, 곧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는 노력”(󰡔윤리학󰡕 3부 정리 6)으로 표현되며, 이러한 코나투스는 모든 자연 실재의 현행적 본질로 정의된다. 그리고 인간의 경우 코나투스는 “충동appetitus” 또는 "욕망cupiditas"로 제시된다. 이처럼 코나투스나 욕망으로 규정되면 포텐샤는 항상 능동적인 힘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능동성과 수동성의 경향적인 차이를 통해 표현된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는 대부분의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수동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능동성을 얻는 길이다. 󰡔윤리학󰡕 3부 이하의 논의는 이처럼 인간이 수동적인 정서 또는 정념들에 종속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인간학-윤리학의 영역에서 포텐샤-포테스타스의 관계는 상이한 쟁점을 갖게 되는데, 핵심적인 것은 정신 또는 의지에 대한 신체 활동의 종속이라는 문제다. 이는 특히 󰡔윤리학󰡕 3부 정리 2의 주석과 5부 「서문」에서 잘 나타난다.

  스피노자는 3부 정리 2의 주석에서 두 가지 대립항을 설정하고 있다. 하나는 스피노자 자신의 관점으로서, 그에 따르면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재이며, 이것은 때로는 사유 속성 아래서 때로는 연장 속성 아래서 인식된다. 이로부터 실재들의 연관과 질서는 자연이 이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아니면 저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간에 하나이며, 따라서 우리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는 본성상 우리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함께 간다simul는 점이 따라나온다.” 반대로 스피노자의 가상의 적수들은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가 상반되며, 더 나아가 “말을 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정신의 포테스타스에만 달려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하며, 따라서 다른 많은 것들은 정신의 결단mentis decreto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후자의 관점은 “자신의 행동은 의식하지만suarum actionum sunt conscii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결정하는 원인은 알지 못하기causarum a quibus determinantur ignari 때문에 자기가 자유롭다고 믿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가상에서 유래한다. 곧 정신이 내리는 결단이나 신체의 행동이나 모두 하나의 동일한 코나투스 또는 그 인간적 표현인 욕망에서 생겨나지만, 가상에 빠진 사람들은 이러한 인과관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이를 정신에 고유한 포테스타스, 또는 의지의 권능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신랄한 표현에 따르면, 젖먹이는 자유 의지로 젖을 원한다고 믿고, 겁쟁이는 자유 의지로 도망친다고 믿고, 술주정뱅이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유 의지로 지껄인다고 믿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5부 「서문」에서 스토아학파 및 데카르트, 특히 󰡔정념론󰡕의 데카르트 역시 이러한 가상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곧 이들은 “정서들이 절대적으로 우리의 의지에 의존하며 우리는 정서들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다absolute imperare고 믿고” 있으며, 데카르트의 경우는 “송과선”(뇌 안에 존재하는, 정신과 신체가 결합하는 부분)이라는 “은밀한 성질qualitas occultus”로 정서들에 대한 정신의 지배력, 포테스타스를 확립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러한 가상 역시 우리의 신체와 정신의 작용을 규정하는 것은 동일한 코나투스이며, 우리 신체와 정신의 능동과 수동은 함께 간다는 사실을 몰인식한다는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학-윤리학에서 포텐샤-포테스타스 관계의 쟁점은, 신체에 대한 정신 또는 의지의 권능으로 표현되는 포테스타스의 관점이 우리의 인간학적 조건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가로막고, 이에 따라 윤리적인 능동화의 과정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3) 정치학적 의미

정치학의 영역에서도 두 개념은 체계적으로 구분되어 사용되지만, 존재론-신학이나 인간학-윤리학의 영역과는 달리 두 개념 사이의 관계는 대립의 관계로 나타나지 않고, 비제도적인 또는 선(先)제도적인 행위 능력으로서 포텐샤와 법제도에 의해 부여받은 권력 또는 권한으로서 포테스타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난다. 곧 정치학의 영역에서 포텐샤는 법적ㆍ제도적 질서의 존재론적 기초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 제도로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정치적 행위의 자연적 기초를 표현한다면, 포테스타스는 법제도에 따라 규정된 행위 능력이나 권한을 의미한다. 이 점은 󰡔신학정치론󰡕이나 󰡔정치론󰡕 모두에서 살펴볼 수 있지만, 특히 󰡔정치론󰡕에서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먼저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또는 그렇다고 가정되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 실재들의 행위는 그가 갖고 있는 자연권 곧 그의 포텐샤에 따라 규정된다. “나는 자연권을 자연의 법칙들 자체로, 또는 모든 사물이 생산되는 규칙들, 곧 자연의 포텐샤 자체로 이해한다. 바로 이 때문에 자연 전체의 자연권 및 따라서 각 개체의 자연권은 그것의 포텐샤가 미치는 곳까지 확장되어야 한다.”(󰡔정치론󰡕 2장 4절)  

  반면 사회 상태에서 각각의 개인은 그가 지닌 자연권을 계속 보존하고 있지만, 이제 그의 행위는 자연권 자체가 아니라 법적으로 부여받은 권한, 곧 포테스타스에 의해 규정된다. “만약 국가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기질에 따라 살아갈 권리, 따라서 포테스타스[권한]를 부여한다면, 이로써 국가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셈이며, 이를 그 자신이 이러한 포테스타스를 부여한 사람에게 양도한 게 된다.”(3장 3절)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포테스타스는 법제도, 궁극적으로는 주권자에 의해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게 부여된 권력 내지는 권한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권력 내지 권한으로서 포테스타스는 자연 상태에서는 성립할 수 없으며, 오직 주권이 존재하는 국가 안에서만 부여받고 행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횡단보도를 걸어갈 수 있는 자연적 역량, 곧 포텐샤를 지니고 있지만, 교통법규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권한, 곧 포테스타스는 갖고 있지 않다.

  국가 전체의 차원에서 이러한 포텐샤와 포테스타스 사이의 관계는 일차적으로 대중들의 포텐샤와, 주권, 곧 최고의 포테스타스summa potestas 사이의 관계로 표현된다. 󰡔정치론󰡕 3장 2절은 이를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는 자연의 권리와 다르지 않으며,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 인도되는 듯한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 따라서 둘 사이의 관계는 존재론-신학이나 인간학-윤리학의 영역과 달리 대립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주권이 없이는 국가, 정치 질서가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정치의 영역에서 포테스타스는 단순한 가상이나 착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포텐샤의 철학, 곧 역량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편으로는 매우 적절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포텐샤-포테스타스의 관계를 일의적인 대립 관계로 파악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포텐샤와 포테스타스의 용법은 이 개념들, 특히 포테스타스라는 개념을 한 가지 용어로 번역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 개념들에 대한 번역어를 선택한다면, 나는 포텐샤의 경우는 “역량”이라고 번역하고, 포테스타스의 경우는 각각의 영역에 따라 “권능”, “권력”, “권한” 등으로 번역하고 싶다. 

  포텐샤는 그동안 국내에서 주로 “역능”이라는 용어로 번역되어왔다. 이 번역은 “역능”이라는 단어가 우리말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라는 점에서 일차로 포텐샤의 번역어로 부적합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단어가 특별히 스피노자의 포텐샤 개념의 의미와 용법을 잘 표현해준다면, 이를 사용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위에서 본 것처럼 이 단어는 내용상으로도 스피노자의 포텐샤 개념을 제대로 표현해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단어를 굳이 사용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이를 “역량”(力量)이라는 말로 번역한 것은 스피노자 당대의 과학적 세계관의 변화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 시대는 거대한 과학혁명의 시대였고, 이러한 혁명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양화하는 데 있었다. 자연적 실재들이 제각각의 고유한 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 자연 전체를 일양적(一樣的)인 법칙에 따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자연의 인식 가능성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각각의 개체나 실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질이나 특성을 양적인 차이들로 환원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능성possibilitas”이나 “실재성realitas”, “완전성perfectio”이나 우리의 주제인 포텐샤 같이 형이상학 영역에서 사용되는 통념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또는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우리는 “실재성의 정도”나 “완전성의 정도” 또는 “포텐샤의 차이”(곧 “힘의 양의 차이”) 같은 표현들을 접하게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철학적인 어휘에서 배제되는 경우도 목격하게 된다(스피노자의 형이상학에서는 “가능성” 같은 관념이 그렇다. 하지만 이는 “윤리”의 영역에서는 고유한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포텐샤는 각각의 자연적 실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나 비교 불가능한 힘을 가리키기보다는 양적으로 측정될 수 있고, 따라서 상호 비교될 수 있는 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포텐샤라는 용어는 “역량”이라는 말로 옮기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이 두 용어는 불어로는 각각 “puissance”와 “pouvoir”이라고 번역하고 독어로는 대개 “Macht”와 “Gewalt”로 옮기지만, 영어로는 모두 “power”로 옮기고 있다. 이는 영미권 주석가들이 그동안 이 두 가지 용어의 구분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네그리 번역자들 중 일부가 전자를 대문자로 된 “Power”로, 후자는 “power”로 옮기거나 전자는 “potential”로, 후자는 “power”로 옮기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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