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반시] 봄호에 실릴 글을 한 편 더 올립니다. [시와 반시] 편집위원으로 있는 함돈균 선생의 요청으로 쓰게 된 글인데, 

앞으로 매호마다 정치 사상가에 관한 코너를 실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번 호에는 에티엔 발리바르에 관한 두 편의 글이 

실릴 예정인데, 제 글하고 최원 선생이 쓴 글이 실린다고 합니다. 이 글 역시 교열과 교정이 완료되지 않은 글이기 때문에 

인용이나 공적인 토론을 원하는 분들은 [시와 반시]에 실린 텍스트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 


관계론, 대중들, 민주주의―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

I. 하나가 아닌 스피노자

 

어떤 철학자의 사상이란, 그의 주요 저작(가령 데카르트의 󰡔성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또는 스피노자의 󰡔윤리학󰡕)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면밀하게 텍스트를 분석하고 내용을 잘 파악하게 되면,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독자들에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의 사상은 각각의 시대마다 수용과 변용, 해석과 굴절, 보존과 창조의 과정을 겪게 마련이다. 따라서 어떤 철학자의 사상, 더 나아가 어떤 철학자는 단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스피노자 역시 단 하나의 스피노자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17세기의 스피노자가 있고, 18세기의 스피노자, 19세기의 스피노자, 20세기의 스피노자가 있으며, 또한 미국의 스피노자, 독일의 스피노자, 프랑스의 스피노자, 한국의 스피노자가 반드시 동일한 것도 아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간단히 말하자면 스피노자 자신이 스피노자 그 자신으로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스피노자의 철학, 스피노자의 사상은 흔히 그의 필생의 저작이라고 불리는 󰡔윤리학󰡕 속에 있는 그대로, 완성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윤리학󰡕이 스피노자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윤리학󰡕은 스피노자 사상의 목적지도 스피노자 사상의 정점도 아니다. 스피노자의 생애는 스피노자 그 자신이 되어가는 (기원도 목적/끝도 없는) 과정이었으며, 스피노자의 사상은 마지막 (미완의) 저작인 󰡔정치론󰡕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형성되고 수정ㆍ변용ㆍ개선되어 갔다. 그런 의미에서도 스피노자의 사상은 탁월한 반목적론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의 텍스트란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거리를 둔, 닫혀 있는 소우주가 아니다.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들을 비롯한 외부 환경과의 끊임없는 교섭을 통해 비로소 실존하고 재생산될 수 있는 것이며(이 점에 관해서는 󰡔윤리학󰡕 2부 정리 13 이하에 나오는 이른바 「자연학 소론」 참조), 텍스트의 내부란, 텍스트 외부의 흔적들의 결과이다. 따라서 스피노자 사상 그 자체는, 스피노자 이전의, 스피노자 바깥의 사상들과의 교섭의 산물이며, 또한 스피노자 이후의 사상들의 영향의 산물이다. 스피노자의 사상은 늘 지금 여기의 사상이다. 이 글에서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의 스피노자 연구를 검토하면서 스피노자의 현재성에 대해 재론해보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필자는 스피노자의 현재성에 관해 이전에 한두 편의 소개글을 쓴 바 있다. 진태원, 「스피노자의 현재성: 하나의 소개」, 󰡔모색󰡕 제 2호, 2001; 「범신론의 주박에서 벗어나기: 프랑스에서 스피노자 연구 동향」, 󰡔근대철학󰡕 2권 2호, 2007.]

 

II. 범신론에서 관계론으로

 

스피노자 철학을 보는 전반적 관점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에티엔 발리바르의 입장은 관계론적인 관점 또는 그의 고유한 용어법에 따라 말하면 관(貫)개체론적(transindividual)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발리바르의 입장은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는 두 가지 주요한 관점, 곧 범신론적 관점과 역량론적 관점에 대한 이중적 비판을 함축한다.

스피노자 철학은 전통적으로 범신론 철학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범신론’(pantheism)이라는 말은, 신이란 초월적이거나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연 만물과 다르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자연 만물 안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도 있다. 첫 번째 의미는 왜 스피노자의 철학이 당대의 유럽에서 혁명적인 의미를 지녔는지, 왜 정치ㆍ신학 권력에 그토록 위협적인 느낌을 주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피에르 벨(Pierre Bayle)에서 하인리히 야코비(Heinrich Jacobi)에 이르는 스피노자 비판가들이 범신론은 무심론이라고 집요하게 비판했으며, 반대로 디드로에서 포이어바흐, 플레하노프에 이르는 유물론 사상가들이 같은 이유로 스피노자를 예찬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하지만 스피노자 자신이 부인하고 있듯이(73번째 편지 참조), 이는 스피노자의 신 또는 실체 개념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아니다.)

반면 두 번째 의미로 읽으면 범신론은 하나의 신비주의를 뜻하게 된다. 노발리스가 스피노자를 “신에 취한 사람”이라고 불렀듯이,『윤리학』에는 신에 관한 무수한 표현들이 나온다. 사실『윤리학』은「신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붙은 1부에서 시작해서 신을 향한 사랑 및 특히 신의 지적 사랑을 “구원 또는 지복(至福) 또는 자유”의 길로 제시하는 5부로 끝을 맺고 있다. 그렇다면 신이 자연 만물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제시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신과의 합일이야말로 스피노자 철학의, 인간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간주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스피노자 철학을 범신론 철학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 이러한 애매성과 유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난 1960년대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 역량론적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흐름은 하나의 사상사적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이 해석은 스피노자를 애매성의 질곡에서 빼내어 근원적인 해방의 철학자로 복원시켰기 때문이다. 68년의 반역은 역량론적 해석의 동력이었으며, 들뢰즈나 마트롱, 네그리를 비롯한 여러 주석가들에 의해 스피노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마르크스보다 더 탁월한 해방의 철학자로 부활했다. 가령 들뢰즈는 그의 국가박사학위 부논문이었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스피노자를 “미신과 예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철학자”라고 불렀으며, 펠릭스 가타리와 공동으로 저술한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스피노자를 “철학의 그리스도”라고 지칭한 바 있다. 아울러 󰡔제국󰡕과 󰡔다중󰡕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마지막 미완성 저작 󰡔정치론󰡕(1677)에 등장하는 ‘물티투도’(multitudo)라는 개념(이 개념은 국내에서는 보통 ‘다중’이라고 번역된다)을 스피노자 철학의 가장 위대한 유산으로 간주하면서 이 개념을 통해 스피노자는 홉스에서 헤겔에 이르는 근대성의 지배적인 흐름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구성의 주체를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Antonio Negri, The Savage Anomal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0. 이 책은 국역본이 있지만 번역이 좋지 않아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안토니오 네그리, 󰡔전복적 스피노자󰡕, 이기웅 옮김, 그린비, 2004 참조.] 사실 󰡔제국󰡕과 󰡔다중󰡕에서 잘 드러나듯이 어떤 의미에서 1990년대 이후 그의 작업 전체는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이러한 재해석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또한 1960년대 스피노자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은 알렉상드르 마트롱은 그의 대작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이 책은 얼마 전에 국내에 번역되었다. 김문수ㆍ김은주 옮김,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 그린비, 2008 참조.]에서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일종의 “현자들의 공산주의”를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역량론(puissantialisme)[역량론이라는 명칭은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자인 앙드레 토젤이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는 근대 초기 신학-정치론의 구도를 소묘하고 이러한 구도에서 스피노자의 입장이 지닌 독창성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입장을 역량론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역량론은 신인동형론에 기초를 둔 인격신 개념을 해체하면서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자기원인으로서의 실체 개념을 이론적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토젤은 역량론을 스피노자 자신의 철학적 입장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은 1960년대 말 이후 전개된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André Tosel, “Quel devenir pour Spinoza? Rationalité et finitude”, in Lorenzo Vinciguerra ed., Quel avenir pour Spinoza? Enquête sur les spinozismes à venir, Kimé, 2001.]은 그 명칭에서 드러나듯 역량(potentia)[potentia 또는 프랑스어로 하면 puissance라는 개념은 국내에서 간혹 ‘역능’이라는 용어로 번역되기도 한다. 하지만 ‘역능’이라는 번역어는 우리말에 존재하는 단어가 아닐뿐더러 스피노자 철학을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potentia를 ‘역량’으로 번역하는 이유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은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5에 수록된 필자의 용어 해설 “역량-권능/권력/권한” 중에서 특히 317-18쪽 참조. ]이라는 개념을 스피노자 철학의 중심에 놓는다. 스피노자의 자연은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 변화가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자연이며,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에 따라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생산하는(『윤리학』1부 정리 11, 정리 16) 내재적인 원인, 자기 원인이다. 하지만 신이 이처럼 절대적인 역량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유한한 실재들, 개체들에게는 자유의 여지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게 아닌가? 이러한 반문에 대해 역량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신 또는 실체의 절대적 역량이 양태들의 자유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실체와 유한한 실재들이 서로 대립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체와 양태들 사이의 관계를 외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실체는 양태의 타동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1부 정리 18)이다. 곧 실체의 역량은 양태들의 자유를 배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양태들 자신이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코나투스 개념은 유한한 실재들이 스스로 어떤 결과들을 산출할 수 있는 원인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3부 정리 7 및 정리 54 참조)

하지만 역량론적 해석은 스피노자 철학의 독창성, 그 이론적 진면목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을까? 게루, 들뢰즈, 마트롱 또는 마슈레와 같은 대가들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역량론적 해석은 여전히 많은 모호함을 드러낸다.[스피노자의 존재론에 대한 역량론적 해석의 난점들에 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진태원,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학위 논문, 2006) 중 1-4장 참조. 이 논문은 󰡔스피노자 또는 관계론󰡕이라는 제목으로 수정ㆍ확장되어 올해 안에 도서출판 길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면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지니고 있음에도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지와 수동성에 빠져 있는가? 이러한 예속은 어디에서 유래하며 이는 어떻게 개조될 수 있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는 “수동력과 능동력이라는 별개의 힘”을 가정한다. “우리의 수동력은 불완전성 또는 우리의 능동적 힘 자체의 유한성이나 제한에 불과하다.”[Gilles Deleuze,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Minuit, 1969, p. 204.] 이 수동력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이는 “우리 자신과 구별되는 외부 실재로부터 작용을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한다. 다시 말해 본질의 차원에서 우리는 능동적인 원인이지만, 실존의 차원에서, 우리와 구별되는 다른 존재자들과의 마주침의 차원에서 우리는 수동적이며 이것이 우리의 예속의 뿌리를 이룬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불완전성, 유한성, 제한을 극복할 수 있을까? 들뢰즈는 공통 통념(notio communis)의 이론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곧 여러 가지 마주침들 중에서 “좋은 마주침”, 우리의 본성과 합치하는 존재자들과의 마주침을 선별하고 이를 통해 공통 통념들을 형성함으로써, 우리는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존의 차원에서 인간들은 상상과 수동성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이러한 선별이 가능하겠는가? 더 나아가 인간이 외부 실재들에 의해 변용되지 않고서는 실존할 수 없는데, 수동력이 유한성이나 제한에 불과하고 “아무 것도 표현하지 않는다”면, 들뢰즈 또는 역량론적 해석가들이 추구하는 능동성은 외부 실재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남, 곧 해탈함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또는 원초적으로 주어진 능동적인 본질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목적론과 어떻게 다른가?

발리바르가 스피노자 철학을 관계론으로, 그것도 가장 일관되고 근원적인 관계론 철학 중 하나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면, 그것은 역량론을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열어놓은 스피노자 연구의 새로운 차원을 좀더 풍부하게 개척하고 확장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매우 당혹스러운 주장으로 들릴 수 있다. 스피노자는 대표적인 실체의 철학자이며, 따라서 관계론 철학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닌가? 더 나아가 이는 매우 통속적으로 이해될 위험도 안고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가 제안하는 관계론을, 모든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세상에 고립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식의 주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관계론으로 해석하자는 것은 무엇보다 스피노자 철학의 대상과 목표를 좀더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관계론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의 대상은 개체화 내지 주체화 또는 같은 말이지만 ‘사회적 관계에 대한 분석’이다. 그리고 스피노자 철학의 목표는 인간의 원초적인 삶의 조건을 이루는 예속적 관계를 개조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데 있다. 좀더 부연해보자.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서양철학의 전통적인 용법과 대조적으로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하나의 개체 또는 하나의 실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에게 실체는 자연 전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는 오히려 무한하게 많은 인과연관들의 집합 내지 (현대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면) 체계와 다르지 않다. 실체가 지닌 절대적인 역량,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무한하게 생산해내는 역량은 자의적이거나 우연적으로 실행되지 않는다. 그것은 엄밀하게 규정된 인과관계에 따라 필연적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처럼 그러한 생산역량이 자의적이지 않고 엄밀히 규정된 인과관계에 따라 전개되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합리적 인식과 실천적 지향이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존재론’에 대한 인식은 인과연관의 질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다른 내용을 갖지 않는다.(1부 정리 18, 정리 25, 정리 28, 2부 정리 7 참조)

그러나 이러한 인과관계를 결정론적인 관계로,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선형적인 관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는 실체와 다른 존재자, 따라서 사실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양태들’ 내지 ‘변용들’(affectiones)이라고 부른다. 양태라는 명칭은 실체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사이의 관계가 내재적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주며(왜냐하면 양태는 항상 어떤 실체와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실체의 내부에서만 존립할 수 있기 때문에), ‘변용들’이라는 명칭은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과 실존의 양상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변용으로서 존재하는 실재들은 명칭대로 늘 변화하며, 변화를 통해서만 존립한다. 우선 변용들은 다른 실재들에 의해 변용됨으로써 성립하고 실존한다. 외부 환경, 외부 실재들과 교섭하고 이를 통해 변용되지 않는 실재는 단 한 순간도 존립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변용되기는 들뢰즈가 말하는 ‘수동력’이 아니다. 변용되기는 역량의 제한이나 우리의 불완전성의 징표가 아니라 우리의 역량이 성립하고 축적되기 위한 조건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용들로서의 실재들은 또한 변용함으로써 존립한다. 곧 변용되기를 통해 성립한 역량을 바탕으로, 규정된 조건에서 규정된 방식으로 어떤 결과를 산출하면서 실재들은 실존한다. 변용되기와 변용하기는 상관적인 작용 또는 하나의 동일한 과정의 두 측면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 개체들로서의 실재들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변용되기와 변용하기의 관계다(스피노자가 ‘운동과 정지의 관계’라고 부르는 것의 존재론적 함의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이 점에 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발리바르, 「스피노자에서 개체성과 관개체성」, 󰡔스피노자와 정치󰡕 참조.] 스피노자의 개체들은 일종의 원자 내지는 원초적인 존재론적 단위가 아니라, 변용의 인과연관을 통해서 전개되는 개체화 과정의 결과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존재론’은 개체들 내지 존재하는 실재들이 생성, 변화, 소멸하는 과정과 메커니즘에 대한 탐구를 의미한다. 좀더 현대적인 용어법에 따라 말하자면 스피노자주의적인 철학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또는 사회적 관계에 앞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율적 존재자로서의 주체들이 아니라 그러한 주체들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주체화(subjectivation) 과정 내지 주체화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점에 관해서는 특히 É. Balibar, “Le structuralisme: une destitution du sujet?”,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no.1/2005 참조.]

하지만『윤리학』이라는 제목이 가리키듯이 스피노자의 진정한 관심사는 존재론 그 자체, 또는 그 과학적 표현으로서 자연학 그 자체에 대한 탐구에 있지 않았다. 그의 철학함의 대상은 항상 이미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이었으며, 그의 철학함의 목표는 대개는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예속적 관계들을 합리적이고 호혜적인 관계들로 개조하는 데 있었다. 이것 역시 알튀세르와 푸코 등이 이론화한 현대적인 문제설정에 따라 말하자면 스피노자주의가 관심을 기울이는 문제는 주체화와 예속화(subjection)의 갈등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 수동적이고 예속적인(스피노자에게 이 양자는 거의 동의어에 가깝다) 삶을 살아가게 되는가? 스피노자에게 수동성은, 들뢰즈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외부의 실재들로부터 작용을 받는 것(변용되기), 그것들에게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삶의 자연적 조건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는 부정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동성은 우리가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윤리학󰡕 3부 정의2 참조).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것을 수행하거나 생산할 때, 이러한 활동이 우리 자신과 다른 것에 의해 전유되고 활용될 때, 우리는 수동적이고 예속적이다. 반대로 능동성은 외부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활동의 전체적인 원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물리적으로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상태에 있을 수 있으며, 개인적인 역량이 미약하다 하더라도 능동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곧 역량이 양적인 개념이라면, 수동과 능동은 질적인 개념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관계론적인 개념이다.

그렇다면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 또는 예속적인 삶의 조건을 이성적이고 능동적인 방향으로 개조하는 것은 우리들 각자를 부분적인 원인으로 만드는 예속적인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뜻하며, 이러한 관계에 따라 우리들 각자가 수동적으로 개체화되는 양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각자의 윤리적 해방은 예속적인 관계를 개조하려는 집합적인 실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역으로 정치적 변혁은 다른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각자의 윤리적 노력(스피노자가 ‘도의심’(pietas)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는 발리바르가 ‘시빌리테(civilité)’라고 부르는 것의 선구적인 형태로 간주될 수 있다)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III. 정치학자 스피노자

 

오늘날 스피노자 철학이 새삼 주목받는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그의 철학이 지닌 정치철학적 함의 때문이다. 스피노자를 범신론자로 규정하는 것이 낳은 주요한 효과 중 하나는 스피노자 정치학의 배제 또는 스피노자 철학의 정치철학적 함의에 대한 부인이었다. 사실 근대 서양사상사에서 스피노자는 대개 형이상학자로 간주되었을 뿐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한다면 정치학자로 여겨지지 않았다. 여기서 핵심은 스피노자를 형이상학자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가 형이상학자라는 사실을 이유로 스피노자가 정치학자라는 점을 (원칙적으로) 부정하는 데 있다. 곧 스피노자는 형이상학자라는 언표는 암묵적으로 스피노자에게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정치학이 없다는 언표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좀더 미묘한 형태로 변형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가 정치적 저술을 남기긴 했지만, 역시 스피노자 철학의 본질 내지는 요체는 그의 형이상학에 있다는 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좀더 구체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의 본질 내지는 요체는 󰡔신학정치론󰡕이나 󰡔정치론󰡕이 아니라 󰡔윤리학󰡕에 있다고 표현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경우 범위는 다시 더 좁혀지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윤리학󰡕은 5부로 이루어져 있고, 1부에서 5부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부는, 상이한 제목이 달려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상이한 논의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시 이런 식의 주장이 제기되곤 한다. 곧 󰡔윤리학󰡕의 핵심은 1부에 있는데, 왜냐하면 「신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붙은 데서 알 수 있듯이 1부는 유일한 실체로서 신을 주제로 하고 있고, 바로 여기서 형이상학이 논의되기 때문이다.[이는 사실은 헤겔로부터 유래하는 태도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피에르 마슈레, 󰡔헤겔 또는 스피노자󰡕, 앞의 책 1장 참조.] 또는 프랑스의 스피노자 주석가였던 마르샬 게루(Martial Gueroult)가 󰡔윤리학󰡕 1, 2부에 대한 기념비적인 주석서를 남긴 데서 알 수 있듯이, 존재론을 다루는 1부와 인식론을 다루는 2부가 󰡔윤리학󰡕의 핵심이라는 주장을 듣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 경우 배제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그렇다면 왜 스피노자가 자신의 철학의 요체를 담고 있는 이 책에 󰡔제 1철학󰡕이나 󰡔형이상학󰡕 또는 그냥 간단히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하필 󰡔윤리학󰡕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왜 그는 1부와 2부로 끝내지 않고, 그보다 훨씬 더 길게 5부까지 책을 썼을까? 물론 다음과 같은 질문은 더욱 더 제기되지 않는다. 왜 그는 󰡔윤리학󰡕의 집필을 중단하고 5년여 동안이나 󰡔신학정치론󰡕 같은 사소한 책을 쓰는 데 몰두했을까? 왜 그는 생애의 말년에 󰡔정치론󰡕 집필에 몰두했으며, 왜 그럼에도 그 책을 완성하지 못했을까?

1960년대 이후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프랑스(및 이탈리아)의 스피노자 연구의 가장 중요한 의의 중 하나는 지난 150여 년 간 스피노자 해석의 역사를 지배해왔던 범신론적 관점을 대체하는 새로운 관점을 구성했으며,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에 정치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해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피에르 마슈레의 간명한 구분법에 따를 경우 18세기의 스피노자가 유물론적 스피노자였고 19세기의 스피노자는 범신론적 스피노자였다면, 20세기의 스피노자는 정치적 스피노자라고 할 수 있다.[P. Macherey, “L'actualité philosophique de Spinoza” in Avec Spinoza, PUF, 1992 참조.] 발리바르 역시 네그리를 따라 “스피노자의 사상이 철저하게 정치적”[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148쪽.]이라는 점을 긍정하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사상이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는 주장이 그 자체로 일의적인 것은 아니며 상이한 관점의 여지를 함축하고 있다.

가령 알렉상드르 마트롱은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자들 중에서도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에서 정치학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체계적으로 입증한 사람인데, 그에게 스피노자의 사상이 정치적이라는 주장은 발리바르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에게 이 주장은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에 함축되어 있는 개체성에 관한 일반 명제로부터, 또 󰡔윤리학󰡕 3부 이하에서 전개되는 인간학에 관한 명제로부터 체계적으로 연역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역으로 󰡔윤리학󰡕으로 대표되는 스피노자의 체계는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관한 논의를 통해서만 완결될 수 있다는 점을 뜻한다. 따라서 마트롱은 󰡔윤리학󰡕의 마지막 5부에 나오는 (겉보기에는) 매우 수수께끼 같고 비의적秘義的인 내용들이 사실은 정치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특히 알렉상드르 마트롱,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 참조. 그 이후 발표한 여러 논문에서 이런저런 문제들에 관한 마트롱의 생각은 조금씩 변화하고 좀더 치밀하게 다듬어지고 있지만, 이런 점에서는 불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욱이 마트롱은 80년대 후반 이후에는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곧 그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체계적으로 고찰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반면 네그리 같은 경우는 마트롱과 달리 스피노자의 체계는 연역적이고 통일적인 게 아니라, 단절적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은 초기부터 후기까지 변화하지 않은 채 완전한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근본적인 단절을 경험한다. 이러한 단절은 바로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을 집필하던 시기(1665~1670년)에 발생했는데, 이를 통해 스피노자는 신플라톤주의 형이상학자에서 실천적인 구성의 정치학자로 변모한다. 다시 말해 마트롱의 주장과 달리 󰡔윤리학󰡕 1-2부에 담겨 있는 스피노자의 철학은 르네상스 신플라톤주의 신학의 유산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초월적 형이상학이며, 스피노자 철학의 정수, 스피노자 철학의 진정한 핵심은 󰡔윤리학󰡕 3-4부와 󰡔정치론󰡕에 담겨 있는 실천적 구성의 존재론/정치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에게 “스피노자의 철학이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면, 이는 스피노자의 형이상학과의 단절을 먼저 요구한다.

발리바르의 입장은 이 두 사람의 관점과 구분된다. 우선 그는 네그리와 달리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내지 존재론과 정치학 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발리바르의 관점에 따를 경우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특징짓는 관개체론적 관점에 따라 논증되고 서술되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존재론(및 인식론)은 정치학의 주장 및 분석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적인 전제 또는 적어도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정치학의 논의에 내재적인 것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형이상학과 정치학의 인위적인 구분 내지 절단은 스피노자 사상의 일관성을 파악하는 데서나 스피노자 사상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데서나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관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마트롱과 달리 존재론과 정치학의 관계는 연역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곧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정치학에 관한 논의는 그의 형이상학적 기초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존재론에 내재한 난점 내지는 아포리아를 드러내고, 또 더 나아가 이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해준다는 것이다(이는 특히 「스피노자 반(反)오웰」에서 대중들이라는 개념 또는 ‘대중들의 공포/대중들에 대한 공포’(la crainte des masses)라는 개념에 대한 분석에서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네그리처럼 양자 사이에 단절이 존재한다고 파악하지는 않지만, 스피노자의 정치학이 그의 형이상학 체계에 대해 파생적인 위치에 있지 않고 구성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네그리에 좀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발리바르가 네그리와 공유하고 있는 또 다른 점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당대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정세 속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트롱은 스피노자의 정치학을 그의 철학 체계로부터 엄밀하게 연역해내는 데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당대의 정세와 같은 ‘외재적인’ 요인들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는 반면[이런 점에서 마트롱은 스피노자 연구에서 마르샬 게루의 구조적ㆍ발생적 방법론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루는 󰡔윤리학󰡕의 1, 2부, 곧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연구의 대상으로 한정하고 있고(그는 󰡔윤리학󰡕의 나머지 부분들은 그의 연구서 3권에서 다룰 예정이었으나, 죽음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서양 철학의 전통과 스피노자 철학을 매우 체계적으로 대비하여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트롱과 대비되지만, 구조적인 방법을 택한다는 점이나 이론적 체계 외부의 요인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마트롱과 일치한다. 이는 크리스치안 라즈리(Christian Lazerri)나 로랑 보브(Laurent Bove) 같은 그의 제자들의 연구에서 마찬가지로 엿볼 수 있는 특징이다.], 네그리와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당대의 정치적 상황이나 이데올로기적 형세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또 그것들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변모하고 발전해 나갔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다만 네그리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관계라는 좀더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을 채택하여, 스피노자의 철학적 발전을 발흥하고 있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대한 해방적 생산력의 저항과 대응이라는 노선 위에서 고찰하고 있는 반면[네그리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지배관계와 생산력/해방 운동이라는 두 가지 대립항에 대해 매우 체계적으로(그리고 얼마간 독단적으로) 두 가지 사상적 계보를 할당하고 있다. 곧 전자는 홉스에서 루소, 헤겔로 이어지는 초월적 매개의 노선이며, 후자는 마키아벨리에서 스피노자를 거쳐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노선, 다시 말해 일체의 외재적 매개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조직하고 표현하는 내재적 구성의 노선이다.], 발리바르는 넓은 의미의 이데올로기론의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정치적 개입과 이론적 분석을 고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두 사람의 차이는 네그리가 스피노자에서 마르크스에 결여된(또는 마르크스를 능가하는) 정치적 존재론(다시 말해 해방적인 생산력을 이론화할 수 있는 개념적 수단)을 찾고 있는 반면[이러한 스피노자의 정치적 존재론, 특히 다중 개념은 마이클 하트와 공저한 󰡔제국󰡕이나 󰡔다중󰡕의 핵심적인 이론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에게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또는 일반화된 경제론)을 보완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 비판(또는 일반화된 이데올로기론)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스피노자, 루소, 마르크스: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서 정치의 타율성으로」, 󰡔스피노자와 정치󰡕 참조.]

따라서 발리바르에게 “스피노자의 철학이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면,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이라는 두 가지 저서로 축소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 이 두 권의 저서야말로 스피노자의 가장 중요한 저서라고 주장한다는 뜻도 아니다. 이는 당대의 네덜란드 연합주 공화국에서 제기되었던 정치적 쟁점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관심과 개입으로부터 스피노자의 정치학이 자신의 문제, 자신의 대상을 얻어왔으며, 이러한 문제, 대상은 󰡔윤리학󰡕을 포함한 스피노자의 성숙기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정치학, 더 나아가 현실의 정치적 쟁점에 대한 그의 개입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철저하게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IV. 다중 또는 대중들

 

지난 1980년대 이후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개념을 하나 든다면, 물티투도multitudo라는 개념을 들 수 있다. “많은”, “다수의” 또는 “큰”이라는 뜻을 지닌 물투스(multus)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하지만 스피노자 정치학에 고유한 어휘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및 키케로 이래 서양의 많은 정치철학자들에서 등장하고 있으며, 17세기 철학에서는 특히 홉스와 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홉스의 경우 물티투도는 법 제도의 틀 안에서 구성된 인민(people)과 대립하는 것으로서, 고유한 정치적 실재성을 지니지 못한 군중 내지는 무리라는 의미를 지닌다.[󰡔시민론De Cive󰡕 영역본에서는 이를 crowd로 번역하고 있다. Hobbes, De Civ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참조.] 따라서 홉스 정치학의 원칙에 따를 경우 물티투도는 적법한 정치적 지위를 갖지 못하고 심지어 전혀 정치적 행위를 수행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물티투도는 정치학의 대상이 될 수 없지만, 불법적인 소요와 폭력으로 정치적 질서를 위협한다는 점에서는 홉스 정치학이 꼭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 홉스는 물티투도를 서로 독립해 있는 “다수의 개인들” 또는 “다수의 의인(疑人)들(persons)”로 해체함으로써 이 과제를 해결하려고 했다.[이 문제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신학정치론󰡕에서 홉스 계약론의 수용과 변용: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계약론의 해체 I」, 󰡔철학사상󰡕 제19집, 2004 참조.]

반면 스피노자는 물티투도에 대해 좀더 미묘한 태도를 보여준다. 정치학에 관한 스피노자의 첫 번째 주저인 󰡔신학정치론󰡕(1670)에서 이 개념은 단 세 차례만 사용되고 있으며, 거의 이론적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6년 뒤에 씌어진 󰡔정치론󰡕에서는 사용 빈도도 늘어날뿐더러, 스피노자의 논의의 핵심 대상으로 등장한다. 󰡔정치론󰡕에서 이 개념은 한편으로 주권 내지 통치권을 규정하는 위치에 놓인다.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정의되는 법/권리를 보통 통치권(imperium)이라 부른다. 공동의 동의에 따라 국정의 책임을 맡은 이가 이 통치권을 절대적으로 보유한다.”(󰡔정치론󰡕 2장 17절(강조는 인용자). 또한 3장 2절, 7절, 9절도 참조)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스피노자는 물티투도를 결코 자기통치적인 주체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는 물티투도의 삶을 지배하는 정념적인 동요에 대해 두려움을 품고 있었고, 이를 조절하고 제어할 수 있는 제도적인 매개를 추구했다. 따라서 󰡔정치론󰡕에서 물티투도는 기본적으로 양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물티투도가 스피노자 정치학의 핵심 개념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네그리의 스피노자 연구서인 󰡔야생의 별종󰡕(1981)과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반오웰」(1982)이라는 논문 덕분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물티투도 개념이 스피노자 정치학만이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 전체에 대해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어떤 점에서 이 개념이 중요한가에 관해서는 상당히 다른 입장을 보여준다.

첫째, 두 사람은 물티투도 개념이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 전체를 새롭게 고찰하는 계기를 제공해준다고 본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네그리는 물티투도 개념이 󰡔윤리학󰡕 1, 2부의 핵심 범주들인 실체, 속성 같은 초월적인 형이상학적 개념들 없이 유한양태들의 차원에서 완전한 구성의 존재론을 전개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을 중시하며, 이 때문에 이 개념이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를 재정초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본다. 곧 네그리가 볼 때 물티투도 개념이 스피노자의 최후의 미완성 저작인 󰡔정치론󰡕에서 비로소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은, 이때에 이르러서야 스피노자가 󰡔윤리학󰡕 1~2부를 비롯한 초기 저작에 여전히 남아 있는 초월적인 형이상학적 잔재를 극복하고 온전한 내재성의 존재론, 곧 다중의 정치학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반면 발리바르에게 물티투도라는 개념의 중요성은 이 개념이 󰡔윤리학󰡕 1부와 2부에서 전개된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존재론’을 대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있지 않고, 오히려 ‘존재론’에서 자연학, 그리고 인간학에서 정치학에 이르는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를 관개체성의 관점에서 재고찰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둘째, 네그리가 물티투도를 일종의 정치적 주체, 더 나아가 해방 운동의 주체로 간주하는 데 비해, 발리바르는 물티투도가 근본적으로 양가적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큰 차이를 보인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물티투도가 현대 사회학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대중(mass)이나 군중(crowd)과 구분되는 존재론적 위상을 지닌다고 본다. 곧 대중이나 군중은 자신의 독특성을 상실한 익명적인 개인들의 집합, 따라서 지배장치에 포섭되어 있는 수동적인 집단을 가리키는 데 반해, 스피노자의 물티투도는 능동적인 역량과 독특성을 지닌 개인들의 결합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는 물티투도는 초월적인 통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율성을 지닌 다수의 독특한 개인들의 결합체라는 점에서 해방 운동의 정치적 주체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물티투도는 ‘존재론적’으로 토대의 위치에 있기는 하지만 수동적인 집단으로서 대중이나 군중이라는 차원도 포함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그리고 발리바르에 따르면 물티투도에 고유한 이러한 양가성, 이중성은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스피노자의 역량의 존재론이 관계론적 존재론이라는 것, 곧 능동과 수동의 끊임없는 변이과정이라는 것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적대와 갈등을 환원 불가능한 정치의 요소로서 사고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리바르에게 물티투도의 양가성이라는 관점의 중요성은 정치를 막연한 유토피아적(또는 목적론적) 이상이 아니라 실질적인 개조와 변혁 운동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개념적 토대가 된다는 점에 있다.

셋째, 이러한 차이점은 두 사람이 선호하는 용어법의 차이로 이어진다. 네그리는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라틴어 물티투도(multituo)를 줄곧 멀티튜드(multitude)라고 번역해서 사용한다. 그리고 국내의 네그리 연구자들은 다시 이를 다중(多衆)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물티투도가 지닌 ‘다수, 여럿’의 의미(곧 주권의 초월적 ‘하나’에 대립하는)를 포함하면서 동시에 네그리의 주장과 일치하게 물티투도를 정치적 주체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번역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발리바르는 물티투도에 대한 가장 좋은 번역어는 ‘masses’, 곧 ‘대중들’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으며, 스피노자의 물티투도 개념을 단수로 쓰인 multitude, 곧 ‘다중’으로 번역하는 데 대해 명시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이는 스피노자의 물티투도 개념이 지닌 이중성 내지는 양가성을 보존하기 위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라틴어 원어는 하나인 데 반해, 이 용어에 대한 적어도 두 가지 상이한 현대적 번역과 용법이 존재하는 셈이다.

 

V.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

 

물티투도를 이해하는 관점의 차이는 민주주의 및 정치에 대한 상이한 해석들과 직결된다. 오늘날 많은 스피노자 연구자들 및 현대 정치 이론가들이 스피노자의 민주주의론에 주목하는 데에는 얼마간 역설이 존재한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민주정을 “가장 자연적인” 국가, “본래적인 국가에 가장 근접한”[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 Traité théologico-politique / Texte établi par Fokke Akkerman, traduction et notes par Jacqueline Lagrée et Pierre-François Moreau, PUF, 1999, p. 648.] 국가라고 주장했으며, 미완성으로 남은 󰡔정치론󰡕의 마지막 11장에서는 민주주의야말로 “완전하게 절대적인” 정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스피노자 민주주의론 및 그의 정치학의 진면목은 그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분석하고 설명하느냐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신학정치론󰡕 16장 및 20장에서 민주정은 형식적인 정의(“민주주의는 자신의 권력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집합적 주권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연합된 전체다”[같은 책, pp. 514-16.])와 더불어 규범적인 가치 부여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제도적 면모는 분석되지 않고 있다. 더욱이 󰡔정치론󰡕은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막 시작되는 11장에서 겨우 4절만 쓰고 중단된 채 미완성으로 남고 말았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가장 자연적인 국가 내지 완전하게 절대적인 정체로 규정하면서도 그것의 구체적인 제도적ㆍ정치적 면모는 어느 저작에서도 충실히 설명하지 않고 있는 것이 스피노자 정치학의 근본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러한 민주주의론에서 스피노자 정치학의 핵심을 발견하려는 스피노자 연구자들의 태도는 더욱더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볼 때 스피노자의 󰡔정치론󰡕이 미완의 민주주의론으로 남겨졌다는 사실은 스피노자 정치학의 중요한 공백이자 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령 마트롱이나 네그리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저러한 보충을 통해 그러한 공백을 메우려고 시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텐데, 발리바르는 이러한 공백을 메우려고 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러한 공백의 사실 자체에서 스피노자의 민주주의론의 최대의 강점을 발견한다. “이 때문에 역설적으로 󰡔정치론󰡕의 미완성은 이론적 이점을 내포한다. 즉 민주주의의 이론 대신에 그것은 모든 체제들에 응용될 수 있는 민주화의 이론을 부각시키는 것이다.”[발리바르, 「스피노자, 정치와 교통」, 윤소영 옮김, 󰡔알튀세르의 현재성󰡕 공감, 1996, 180쪽(강조는 발리바르).] 󰡔정치론󰡕의 미완성에서 민주주의의 이론 대신 민주화의 이론을 발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음 두 개의 인용문이 이러한 질문에 대해 한 가지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민주주의자라는 용어에 부여할 수 있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아마도 오히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우리 시대에 예속화에 맞서 사고할 수 있는 시사점들과 수단들을 제공해주고 있으며, 이는 그가 민주주의 제도들을 기술하는 데 성공했을 경우보다 더 오래 지속적인 의의를 지닐 것이다.”[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207-08쪽.]

 

“나는 우리가 스피노자를, 그 자신의 보수적인 테제들에 맞서 그의 변혁적인 경향에 좀더 가깝게 변혁/전환시킴으로써 읽을 수 있다는 입장을 제기하고 싶다. 하지만 그의 변혁적 경향은 민주주의 국가를 정의하려는 실패한 시도에 있다기보다는 민주주의를 국가―또는 국가장치―의 변혁/전환으로서 엄격하게 사고하려는 견줄 수 없는 노력에 있다.”[발리바르, 같은 책, 201쪽(강조는 발리바르).]

 

첫 번째 인용문에서 발리바르가 지적하고 있듯이 스피노자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한편으로 스피노자가 권리=역량이라는 관점에 따라 주관적 권리 개념, 곧 오늘날의 용어법대로 하면 인권이라는 개념에 대해 지극히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스피노자는 인민의 자발적인 자기 통치 내지 대중의 자기 통치라는 관념에 대해서도 지극히 회의적이었다.[이 점에서 적어도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네그리나 하트가 주창하는 다중의 정치학과는 거리가 있다. 이 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대중의 정치란 무엇인가? 다중의 정치학에 대한 스피노자주의적 비판」, 󰡔철학논집󰡕 제 19집, 2009 참조.]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대중들로의 복귀라는 표현인데, 스피노자는 󰡔정치론󰡕 이곳저곳에서 대중들로의 복귀를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하는 위험 또는 파국적 상황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다음 두 개의 인용문에서 이런 함의가 잘 드러난다. “국가의 형태는 동일하게 남아 있어야 하며, 따라서 왕은 유일해야 하고, 항상 같은 성이어야 하며, 권력은 분할 불가능해야 한다. [...] 그렇지 않을 경우 주권적 권력은 필연적으로 주민 대중에게 넘어가게 되는데, 이는 가능한 변화 중 가장 큰 변화이며, 따라서 매우 위험하다.”(󰡔정치론󰡕 7장 25절) “왕들은 유한하고 회의체들은 무한정하게 영속된다. 따라서 일단 회의체로 양도된 권력은 결코 대중에게로 복귀하지 않는다. [...] 따라서 우리는 충분한 다수로 이루어진 회의체에 부여된 권력은 절대적이라고, 또는 이러한 조건에 아주 근접한다고 결론내리게 된다.”(󰡔정치론󰡕 8장 3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피노자를 보수주의자나 반민주주의자로 간주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스피노자는 근대 민주주의론의 맹점을 잘 드러내주고 그것을 극복하거나 적어도 보완할 수 있는 이론적 대안을 제시해준다. 이것은 특히 세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1) 스피노자가 대중들로의 복귀를 위험한 것 내지 파국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가 아나키즘의 원칙적 가능성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실천적으로 해방적이지도 않다고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나키, 곧 정치적 관계의 해체는 폭력과 갈등의 폭발을 의미하며, 개인들에게는 생명과 안전의 위협을 뜻한다. 따라서 자연 상태와 유사한 이러한 아나키 상태에서 개인들의 평등과 자유는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상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스피노자가 “시민 사회의 목적은 평화와 삶의 안전”(󰡔정치론󰡕 5장 2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좀더 근원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스피노자가 민주주의(및 정치적 관계 일반)를 본질적으로 취약한 것, 또는 선험적인 토대가 없는 것으로 간주했음을 의미한다.

2) 하지만 스피노자는 어떻게 보면 모순적이게도 대중들의 역량을 정치체의 기초로 간주했으며,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단순히 보수주의자로 머물지 않고 매우 새로운 민주주의론을 사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네그리가 간주하듯이 스피노자가 다중 또는 대중들을 자율적인 정치적 주체로 간주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피노자의 의도는 정치란 초월적(가령 신)이거나 자연적인 토대(가령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에 기초를 둘 수 없으며, 오직 인간들, 대중들의 집합적인 실천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데 있다(또는 적어도 그것이 발리바르가 스피노자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스피노자에게서 “개인들이나 한 국가의 모든 시민 사이의 내용 없는 평등이 아닌 진정한 평등은 제도들 및 집합적 실천의 결과로만 성립할 수 있”[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96쪽.]는 것이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의 민주주의는 보수주의 전통이 주장하는 중우정치로서 민주주의라는 관점과 다르지만, 근대 계약론에서 유래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법적 관점과도 다르다. 게다가 이는 루소나 마르크스주의에서 유래하는 인민민주주의 개념과도 차이가 있다. 전자의 두 관점이 대중의 근원적인 정치적 무능력과 통제 불가능성을 가정하고 있는 데 반해, 후자는 대중의 혁명적 역량을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전자처럼 대중 그 자체는 정치체제에 파괴적이고 위협적인 존재라는 보수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후자처럼 대중은 정치체제를 구성하는 근원적인 역량이라는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전자와 후자의 관점 모두에게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기형적인 괴물(또는 네그리의 저서의 제목을 빌리면 ‘야생의 별종’)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정치론󰡕의 마지막 11장에서 민주주의야말로 “완전하게 절대적인” 정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대중 개념을 포함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 개념을 제대로 사고할 수 없으며, 역으로 민주주의 개념을 “절대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모든 정체의 구성적 토대로 대중 개념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이는 스피노자 정치학의 아포리아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몰락 이후 한층 더 분명하게 드러난 근대 정치학 자체의 아포리아다.

따라서 부재하는 원인으로서의 스피노자의 역설적인 민주주의론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것은 계약론에서 유래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법적 관점을 비판하는 의미를 지닌다. 곧 민주주의를 하나의 통치 유형이나 정체로만 이해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치적 핵심을 법적 제도의 틀 안에 가두는 결과를 낳게 된다. 따라서 둘째, 민주주의는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봉기와 구성, 해체와 재구성을 거듭하는 과정으로서 존재한다.

3) 스피노자가 아나키즘을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고 실천적으로는 위험한 발상으로 간주하는 이상, 민주주의가 구현될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은 정치 제도 및 대표를 강화하는 방식뿐이다. 그러나 흔히 오해되는 것처럼 이러한 대표는 힘이나 권한의 전면적인 위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피노자가 유명한 50번째 편지에서 홉스와 자신의 차이를 “저는 항상 [사회상태에서도] 자연권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어떤 국가이든 간에 주권자는 그가 신민을 능가하는 역량을 발휘하는 만큼 신민에 대한 권리를 가질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연상태에서 늘 그렇듯이 말입니다”[Spinoza opera, vol. 4, ed, Carl Gebhardt, Carl Winter, 1925, pp. 238-239. ] 라고 명시할 때 염두에 둔 것은 역량의 완전한 양도, 따라서 권리의 완전한 위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스피노자적인 의미의 대표란, 그가 대중들의 역량을 국가의 토대로 간주하는 한에서 시민들이 공적 기능을 수행하기 자신들의 힘 내지 권한을 대표자들에게 양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러한 대표를 통해 시민들이 좀더 커다란 집합적인 역량을 획득할 수 있고 이를 통해 통치자들의 자의적인 권력이나 권한의 남용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통제를 통해 “인민은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들을 얻게 된다.”[É. Balibar, Droit de cité, PUF, 2002, p. 185.] 실제로 스피노자는 󰡔정치론󰡕에서 군주정과 귀족정을 분석하면서 두 정체에 본질적인 한계(군주정은 권력의 독점, 귀족정은 계급 불평등)를 교정하기 위해 대중적인 토대를 강화하고 정치를 합리화할 수 있는 수단들을 찾는다. 그것은 각 정체에 고유한 한계 내에서 국가 장치를 개조하고 민주화하려는 작업, 각 정체를 “완전화”하려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군주정과 귀족정이 민주주의에 가까워질수록 각 정체의 법적 구별은 형식적인 것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에게 민주주의는 하나의 특정한 정체의 이름이 아니라 국가 장치의 지속적인 민주적 변혁/전환의 과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2010-02-25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는 스피노자의 역량의 존재론이 관계론적 존재론이라는 것, 곧 능동과 수동의 끊임없는 변이과정이라는 것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적대와 갈등을 환원 불가능한 정치의 요소로서 사고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말한 바로 그 전쟁의 정치와 연관되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장점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인가요? 같은 전쟁으로서의 정치학이 반동 귀족(불랭빌리에)와 인종주의에서도 사용되었는데 말이죠.

그리고 그러한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 혹은 민주화로서 스피노자를 읽는다면 그것이 지금 처한 구체적 상황들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건가요? 대중들의 공포(대중들이 느끼는 공포)는 항상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구체적인 논리와 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라고 불러도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권리를 양도한다" 는 것이 우스꽝스러워지는 것은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아닐까요? 이데올로기는 먼저 권리를 이미 양도되었다고 간주하고 또 그 이데올로기로 실질적으로 대중들을 설득하니까요. 과연 그런 상황에서 국가-이데올로기 장치이자 그 결과물-로의 회귀가 적절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요? 전 이런 생각이 가끔 두렵고 항상 반대합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전 프랑스어 원서를 읽을 줄 모릅니다) <대중들의 공포(도서출판 b, 최원/서관모 옮김)>의 번역에서는 "철저하게 정치적인 한에서의 스피노자"라고 되어 있는데, 이 번역이 잘못된 것인가요?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balmas 2010-02-27 01:33   좋아요 0 | URL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제가 그런데 지금은 시간내기가 어려워서 내일 답글을 드릴게요.

balmas 2010-03-02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이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사실 질문들이 상당히 좋고 근본적인 쟁점들에 관한 것이어서, 답글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사실은 "스피노자와 푸코에서 통치의 문제"라는 논문을 한편 쓰고 있는 중인데, 그 논문에 제기하신 질문 중 일부에 대한 답변이 담길 것 같습니다. 첫번째 질문의 경우가 그런데요, 적대와 갈등을 환원 불가능한 정치의 요소로 사고한다는 것이 장점이 될 수 있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더욱이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는 전쟁으로서의 정치의 문제가 "반동 귀족"인 불랭빌리에와 관련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장점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셨죠. 이 질문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세 가지 답변만 드릴게요. (1) 적대와 갈등을 환원 불가능한 정치의 요소로 본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런데 글의 맥락에서 제가 이 점을 장점이라고 본 이유는, 바로 이러한 관점 때문에 스피노자의 정치학이 근대 사회계약론의 맹목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회계약론이 정치의 궁극적인 지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당연히 장점이 될 수 없겠지만, 그것이 지닌 한계 내지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는 장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은 사회계약론 전체를 파괴한다거나 배척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2) 불랭빌리에에 관한 쟁점인데요, 불랭빌리에는 사실 스피노자주의자였습니다. 프랑스어로 스피노자 저작을 번역하기도 했죠.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를 단순히 "반동 귀족"이라고 보는 건 좀 성급할 수 있습니다. (3) 스피노자와 푸코의 사상을 전쟁으로서의 정치학, 또는 정치를 갈등과 적대로 보는 두 가지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양자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지만 또 상당한 차이점도 있죠. 두 사람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히는 문제는 현대 정치 이론의 쟁점들을 해명하는 데도 꽤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 질문은, 민주화로서의 스피노자주의가 현재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질문하셨죠. 그건 한 마디로 답변드리기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다만 제가 질문을 잘 이해했다면, 질문의 핵심 논점은 국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와 결부돼 있는 것 같습니다. 곧 국가는 기본적으로 지배의 도구로서 국가장치인가 아니면 국가는 시민들의 자기-통치 제도인가와 관련된 문제죠. 원칙적으로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가 공유하고 있는 점은 국가를 지배의 도구로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스피노자가 의미가 있다면 국가의 양면성, 따라서 해방 또는 민주주의의 양면성을 잘 이해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관한 질문을 하셨는데, 그건 오역이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은가요? 왜 그걸 오역이라고 느끼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스피노자의 사상"이 아니라 "스피노자"라고 해서 그렇게 생각하신 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