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철학회에서 발간하는 [가톨릭철학] 29집에 수록될 논문 한 편 올립니다.


이 글은 최종 교정이 끝나지 않은 글이니, 토론이나 인용을 원하는 분들은 [가톨릭철학]에 수록된 


글을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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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율권력, 통치, 주체화: 미셸 푸코와 에로스의 문제

 

 

I. 푸코 사상의 수수께끼와 을의 민주주의

 

미셸 푸코(1926~1984)가 사망하고 난 뒤 2000년대 전반기에 이르기까지 푸코 연구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 중 하나는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1976)󰡔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1984) 󰡔성의 역사 3: 자기에의 배려󰡕(1984) 사이의 공백내지 단절이라는 문제였다. 단일한 제목을 달고 있는 연작의 1권과 2-3권 사이에 8년의 시간적 공백이 있다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더욱이 푸코는 8년 동안 아무 책도 출간하지 않았다), 양자 사이에는 또한 커다란 주제 상의 차이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감시와 처벌󰡕(1975) 󰡔앎의 의지󰡕에서 전개된 권력의 계보학에서는 규율권력에 의한 예속적 주체의 생산이라는 문제가 중심 주제였던 반면에, 󰡔성의 역사󰡕 2-3권에서는 오히려 윤리적 주체의 구성이라는 주제가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성의 역사기획의 변화에 관한 푸코 자신의 해명으로는, Michel Foucault, “Le retour de la morale: entretien avec G. Barbedette et A. Scala”, “Le souci de la vérité: entretien avec F. Ewald”, in Dits et écrits, vol. II, “Quarto”, Paris: Gallimard, 2001 참조.]


이 때문에 푸코의 계보학 기획은 실패했으며, 󰡔성의 역사󰡕 2-3권은 푸코가 고전적인 주체 개념으로 회귀했음을 나타내는 증거라는 비판들이 숱하게 제기되었다.[이런 비판은 각자 상이한 철학적 입장에 근거를 둔 다음 저작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낸시 프레이저, 푸코의 권력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경험적 통찰과 규범적 혼란(1982), 정일준 엮음, 󰡔미셸 푸코의 권력이론󰡕, 서울: 새물결, 1994; Charles Taylor, “Foucault on Freedom and Truth”, Political Theory, vol. 12, no. 2, 1984; 위르겐 하버마스,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이진우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 1994; Peter Dews, Logics of Disintegration: Post-tructuralist Thought and the Claims of Critical Theory, LondonNew York: Verso, 1987; 사토 요시유키, 󰡔권력과 저항󰡕, 김상운 옮김, 서울: 난장, 2012; Lois McNay, “‘The Foucauldian Body and the Exclusion of Experience”, in Hypatia, vol. 6, no. 3, 1991; Foucault: A Critical Introduction, Cambridge: Polity Press, 1994. 프레이저는 비판이론적페미니즘적 관점에서 푸코에게서 규범적 이론의 부재를 지적하고 있으며, 테일러는 자율성의 원천으로서 주체 개념의 부재를 드러내고 있다. 하버마스는 새로운 보수주의라는 시각에서 푸코를 비판하고 있으며, 듀스는 포스트구조주의 일반의 관점을 탈통합의 논리로 제시하면서, 푸코의 권력론과 후기 푸코의 윤리적 주체이론 사이의 비일관성을 비판하고 있다. 사토 역시 이러한 비일관성을 지적한다. 또한 맥니는 권력과 신체의 관계를 드러낸 점이 푸코 이론의 장점이지만, 여기에서는 해방 이론을 위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하면서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에 주목하고 있다. 이들의 비판에 맞서 통치성 내지 통치의 관점에서 푸코 사상의 연속성을 보여주려는 주목할 만한 시도들도 많이 제시된 바 있다. 특히 Thomas Lemke, “Foucault, Governmentality, Critique”, in Rethinking Marxism, vol. 14, no. 3, 2002; “Foucault’s Hypothesis: From the Critique of the Juridico-Discursive Concept of Power to the Analytics of Government”, in Parrhesia, no. 9, 2010 Mark Bevir, “Foucault and Critique: Deploying Agency against Autonomy”, in Political Theory, vol. 27, no. 1, 1999 참조.] 하지만 1997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은 8년의 공백기 동안 푸코가 통치(gouvernement) 내지 통치성(gouvernementalité)이라는 새로운 문제설정을 실험하고 있었으며, 이는 권력의 계보학과 단절하거나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권력이 생산하는 예속적 주체화 양식과 구별되는 주체화 양식을 모색하기 위한 시도였음이 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더 이상 지난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제기되었던 류의 비판들은 이론적 적실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푸코와 민주주의: 바깥의 정치, 신자유주의, 대항품행,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편, 󰡔철학논집󰡕 29, 2012 Thomas Lemke, “Foucault’s Hypothesis: From the Critique of the Juridico-Discursive Concept of Power to the Analytics of Government”, op. cit. 참조.]


내가 이 글에서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규율권력에서 통치성 내지 통치의 문제설정으로의 이행이 어떤 이론적 쟁점을 지니고 있는지 검토한 뒤, 통치의 문제설정에 따라 새롭게 제기되는 주체화 양식의 관점에서 에로스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다. 지난 1980년대 이래 여러 비판가들이나 주석가들이 주장해왔던 것과 달리 통치성의 문제설정에 따라 고찰해보면, 성 또는 에로스의 문제[내가 사용하는 에로스(eros)라는 개념은 넓은 의미의 성적 관계를 뜻한다. 곧 이성애만이 아니라 동성애 관계를 포함하며, 성욕이나 성적 쾌락의 관계만이 아니라 부부, 동반자, 연인 사이의 관계 및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윤리적정치적 실천들을 지칭한다.]는 예속적 주체화와 다른 자유로운 주체화 양식을 모색하려는 푸코의 일관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푸코가 성 또는 에로스의 문제에서 탐구하려고 했던 실존의 미학은 권력의 계보학과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연속적이라는 것이 내 주장의 논점이다.


푸코와 에로스의 문제는 이미 여러 연구자들의 관심을 끈 주제였다. 푸코 자신이 동성애자였던 만큼 푸코 저작은 특히 동성애 활동가 및 퀴어 연구자들의 주목을 끌었고,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나 이브 코소프스키 시즈윅(Eve Kosofsky Sedgwick) 또는 데이비드 핼퍼린(David Halperin) 등과 같은 저명한 퀴어 이론가들의 작업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이로든) 큰 영향을 미쳤다.[퀴어이론에 대한 표준적인 개론서로는, 애너매리 야고스, 󰡔퀴어이론 입문󰡕, 박이은실 옮김, 서울: 여이연, 2012를 참조하고 푸코와 퀴어 이론에 관한 전반적인 논의는 푸코와 퀴어 이론”(Foucault and Queer Theory)을 특집으로 엮은, Foucault Studies, vol. 14, 2012 참조.] 또한 존 라이크만(John Rajchman)1991년 저작인 󰡔진리와 에로스󰡕에서 푸코 후기 윤리학의 핵심을 에로스의 문제로 파악하면서, 이를 자유의 기술 내지 실천에 입각하여 설명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John Rajchman, Truth and Eros: Foucault, Lacan, and the Question of Ethics, New YorkLondon, Routledge, 1991, p. 112.] 또한 최근에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인 린 허퍼(Lynne Huffer)는 푸코의 초기 대표작인 󰡔광기의 역사󰡕의 문제설정에 따라 푸코 사상에서 에로스의 문제를 재구성하려는 야심적인 작업을 수행한 바 있다.[Lynne Huffer, “Foucault’s Ethical Ars Erotica”, in Sub-Stance, vol. 38, no. 3, 2009; Mad for Foucault: Rethinking the Foundations of Queer Theor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0 참조. 그는 에로스의 윤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합리주의적 도덕성에 대한 윤리적 대안곧 그 도덕적 프레임에서 풀려난 성적 경험이라고 우리가 상상해볼 수 있는 어떤 것이 내가 푸코의 에로스의 윤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Ibid., p. xvi)] 이 글에서 나는 여러 연구자들의 연구를 참조하면서, 주체화의 문제설정에 입각하여 에로스의 문제를 살펴보려고 한다.


내가 에로스라는 주제를 통치성 및 주체화 양식의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단지 푸코 사상에 대한 학문적 관심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2~3년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는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와도 관련되어 있다.[진태원, 을의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철학적 단상, 󰡔황해문화󰡕 96, 2017 참조.]


주지하다시피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헬조선’, ‘망한민국’, ‘흙수저금수저등과 같은 자조적 담론과 더불어 갑과 을이라는 용어가 사회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하청업체에 대한 대기업의 횡포, 프랜차이즈 본사의 가맹점주 및 알바생에 대한 갑질,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 대학원생에 대한 교수의 갑질, 다문화 가정과 이주노동자, 장애인, 여성을 비롯한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 등이 이러한 사회적 담론이 유행하게 된 배경을 이루고 있다. 더 넓게 본다면 이러한 현상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도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세계화의 주요 특징 중 하나가 소수자/약소자(minority), 을의 다수화라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사회화는 노동자 계급 조직을 비롯한 사회적 연대 조직을 약화시키거나 해체하고 더 나아가 개인들이 속해 있는 소속 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듦으로써(비정규직화, 조기 정년, 프리랜서, 자영업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대다수 개인들을 단자화(單子化)하고 불안정한 존재자들로 만든다. ‘은 수적으로는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사실 자신들의 독자적인 조직과 네트워크로 연결되지 못한 단자적이고 불안정한 소수자들/약소자들이다.”[진태원, 을의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철학적 단상, 같은 글, 61.] 따라서 대다수의 국민이 을의 지위로 전락하고 있지만 그들 사이의 연대나 조직화는 매우 문제적이고 불분명한 상황이야말로 오늘날 민주주의의 쇠퇴 경향의 주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역으로 이는 약소자들의 삶과 사회적 지위를 더욱 약화시키는 악순환을 낳는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프랜차이즈 가맹점주 및 알바생, 영세 자영업자, 대학원생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약소자들에 대해서는 사회 전반적인 동정 여론이 존재하고 정책적 대안이 모색되고 있지만,[물론 여기에도 집요한 저항이 존재하며, 더욱이 이러한 정책이 얼마나 일관성 있고 철저하게 전개될 수 있는가 여부도 불확실한 상황이다.유독 성적 소수자들 문제에 관해서는 첨예한 찬반 양론이 맞서고 있으며 더욱이 반대 여론이 우위를 보이고 있다. 최근 문제가 되는 혐오 담론이 여성을 비롯한 성적 소수자들에게 집중되는 현상이 이를 방증해준다.[혐오 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쟁점이 되면서 이 문제에 관한 여러 논의가 나오고 있다. 특히 여성 혐오 및 성적 소수자 혐오에 관해서는, 윤보라 외,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서울: 현실문화, 2015; 이현재, 󰡔여성혐오, 그 후󰡕, 파주: 들녘, 2016; 홍재희 외, 󰡔그건 혐오예요󰡕, 서울: 행성B(행성비), 2017 등을 참조.]된장녀에서 김치녀로 이어지는 여성 혐오 담론은 오늘날 페미니즘 일반에 대한 공격과 혐오로 나타나고 있으며,[최근에는 학생인권조례폐지운동본부라는 명칭을 가진 보수 학부모단체가 학교에서 페미니즘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교사를 고발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페미니즘' 가르친 교사를 검찰에 고발한 학부모단체”, 󰡔경향신문󰡕 2017920. 또한 인권의 최종적인 보호자가 되어야 할 대법원장 국회 인준의 주요 쟁점 중 하나로 동성애 문제가 부각되고 있고, 대법원장 후보자는 자신이 동성애를 지지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김명수 동성애 지지한 적 없어 ... 허위사실 유포에 심각한 우려””, 󰡔뉴스1󰡕 2017.9.20.] 보수적인 정치적 입장을 지닌 이들만이 아니라 문재인 정권을 지지하고 경제적 민주화를 요구하는 이들 중 상당수도 이러한 공격을 지지하거나 방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젠더 폭력 개념을 둘러싸고 또 다른 인식론적정치적 경계선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권은 대통령 직속기구로 성평등위원회를 설치하고 가칭 젠더폭력방지기본법을 제정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지만,[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 설치젠더폭력방지기본법 제정”, 󰡔KBS뉴스󰡕 2017.7.10.(http://news.kbs.co.kr/news/view.do?ncd=3513071)]이때 젠더 폭력의 대상이 여성으로 한정되는 것인지 아니면 성적 소수자 일반을 지칭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며, 이러한 불분명함은 문재인 정권의 지지자들 사이에 성적 소수자에 대한 입장에 상당한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반면 제1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젠더 폭력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무지할 뿐더러 그 사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음이 최근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홍준표, “젠더폭력이 뭔데? ... 여성정책토론회서 혼쭐”, 󰡔뷰스앤뉴스󰡕 2017.9.19.(http://www.viewsnnews.com/article?q=149523)]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성적 소수자들은 단순히 을이 아니라 을의 을이라고 불릴 만한 존재자들이며, 우리가 을의 민주주의을을 위한, 을에 의한, 을의 민주주의라고 간략히 규정할 수 있다면,[진태원, 을의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철학적 단상, 앞의 글 참조.] 성적 소수자들의 문제야말로 을의 민주주의를 사고하기 위한 시금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을 또는 을의 을로서의 성적 소수자의 문제는 착취 관계나 정치적 지배 관계로 환원되지 않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를 예속적인 지위에 놓이게 만드는 (불평등과 부자유로서의) 지배의 관계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반면 국내의 혐오 논의는 푸코의 규율권력이나 통치성 개념보다는 크리스테바의 개념인 비체’(abject)에 입각하거나(특히 이현재 등이 그렇다) 아니면 넓은 의미의 인권의 문제설정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우리가 푸코의 통치성 개념에서, 그리고 에로스의 문제를 주체화 양식의 문제로 이해하는 그의 시각에서 이러한 쟁점을 사고하는 데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이것이 이 글을 인도하는 또 다른 주요 관심사다.

 


II. 규율권력에서 통치성으로: 어떤 이행?

 

1. 규율권력과 예속적 주체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푸코는 1975년 출간된 󰡔감시와 처벌󰡕에서, 평등과 자유에 입각한 근대 민주주의 정치 제도의 기원에는 예속적 주체화(assujettissement) 메커니즘으로서 규율권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다음 두 개의 인용문은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의 이론적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잘 드러내준다.

 

사람들이 말하는 인간, 그리고 사람들이 해방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그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이미 그 자체에서 그 인간보다도 훨씬 깊은 곳에서 행해지는 예속화의 성과인 것이다. 한 영혼이 인간 속에 들어가 살면서 인간을 생존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은 권력이 신체에 대해 행사하는 지배력 안의 한 부품인 것이다. 영혼은 정치적 해부술의 성과이자 도구이며, 또한 신체의 감옥이다.[M.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Paris: Gallimard, 1975, p. 38;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 서울: 나남, 1994, 60-번역은 수정.]

 

부르주아지가 18세기를 통해 정치적 지배 계급이 된 과정은 명시적이고 명문화되고 형식적으로 평등한 법적 틀의 설정과 의회제 및 대의제의 형식을 띤 체제의 조직화에 의지한 것이다. 하지만 규율 장치의 발전과 일반화는 이러한 과정의 어두운 이면을 만들어 놓았다. 원칙적으로 평등주의적인 권리 체계를 보증했던 일반적인 법률 형태는 이러한 사소하고 일상적이며 물리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규율로 형성된 본질적으로 불평등하고 불균형적인 권력의 모든 체계에 의해 그 바탕이 만들어진 것이다. (...) 현실적이고 신체적인 규율은 형식적이고 법률적인 자유의 기반을 마련했다. 인간의 자유를 발견한 계몽주의 시대는 또한 규율을 발명한 시대였다.” [Ibid., p. 258; 같은 책, 322~23-번역은 수정했으며 강조 표시는 인용자가 추가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푸코는 관계론적 권력론이라 부를 수 있는 관점에 입각하여 주체에 관한 서양 근대 철학 및 정치학의 관점을 뒤집고 있다. 곧 전자의 인용문이 인간 또는 주체에 관한 근대적인 관점을 뒤집고 있다면, 후자는 근대 정치의 질서에 관한 자유주의적계몽주의적 관점을 전복하고 있다.[푸코의 관계론적 권력론에 관해서는 진태원, 푸코와 민주주의: 바깥의 정치, 신자유주의, 대항품행, 앞의 글 참조.]


데카르트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칸트 이래로[󰡔니체󰡕 2권에서 서양 철학사를 형이상학의 역사(또는 역운’(歷運, Geschick))으로 이론화하면서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개념을 cogito me cogitare의 의미로 풀이하고 이를 주관성의 형이상학의 기원으로 제시한 사람은 하이데거였다. 하지만 18세기 프랑스혁명 및 미국혁명이라는 고전적인 부르주아 혁명과 이에 관한 철학적 성찰 속에서 근대적 주체 개념이 성립했다고 본다면, 근대적인 주체의 기원은 데카르트가 아니라(사실 그에게는 근대적인 의미의 주체개념이 나타나지 않는다), 칸트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한 더 상세한 논의는 Etienne Balibar, “Citoyen sujet”, in Citoyen sujet et autres essais d'anthropologie philosophique, Paris: PUF, 2011 참조.주체라는 범주는 서양 근대 철학의 핵심 개념으로 존재해왔다. 근대 철학의 기본 범주로서 이해된 주체는 무엇보다 인식과 실천의 원리, 곧 인간의 모든 인식 및 도덕적 실천의 토대로 기능하며, 따라서 그보다 상위의 원리에 예속되지 않는 자율적인 존재자로 간주된다. 또한 서양 근대 정치학의 지배적인 모델을 이루는 사회계약론은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사회계약을 통해 정치사회를 구성하려는 개인들의 자발적인 의지에서 근대 국가의 규범적 토대를 발견한다. 따라서 사회계약론의 자명한 전제는 자유롭게 토론하고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개인 주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푸코는 권력에 대한 분석에서, 자유의지에 따라 자신들의 권력을 자유롭게 양도하는 이상적 주체들에서 출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상적 주체들 또는 자유로운 개인들은 권력 관계 이전에, 그리고 그 바깥에서 항상 이미 성립해 있는 존재자들이 아니라, 권력 관계를 통해서만 성립하고 존재하고 재생산될 수 있는 존재자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권력 관계는 사람들을 근대의 지배 질서가 성립하고 유지되는 데 필요한 순종적인 주체들로 생산하는 예속적 주체화를 핵심 기능으로 삼는 권력 관계이며(푸코가 규율권력이라고 부른), 이러한 예속적 주체화를 통해 비로소 근대적 주체들은 주체들로서 성립하게 된다. 따라서 근대적 주체들은 권력 관계의 기원에 놓인 정치적 질서의 창시자들이 아니라, 지배 질서에 예속되어 그러한 질서를 유지하고 재생산할 임무를 부과 받은 예속적 주체들이다.


여기서 영어로는 subject, 또는 불어로는 sujet라는 말이 지닌 이중적 의미를 유념해야 한다.[subject 내지 sujet 개념에 함축된 이중적 의미에 관해서는 Etienne Balibar, “Subjection and Subjectivation”, in Joan Copjec ed., Supposing the Subject, LondonNew York: Verso, 1994; “Citoyen sujet”, in Citoyen sujet et autres essais d'anthropologie philosophique, 앞의 책 참조.] 근대 철학이나 정치학에 의해 subject가 자유롭고 자율적인 주체로 부각되기 이전에, 또는 그 이면에서 subject는 예속적인 존재자, ‘신민’(臣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푸코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중적 의미를 염두에 둔 것이다. “권력을 관계의 원초적 항들로부터 출발해서 연구할 게 아니라, 관계야말로 자신이 향하고 있는 요소들을 규정하는 것인 한에서, 관계 자체로부터 출발해서 연구해야 한다. 이상적 주체들에게 그들이 스스로 예속될(assujettir) 수 있도록 그들 자신으로부터 또는 그들의 권력으로부터 양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를 묻기보다는, 어떻게 예속 관계들(relations d'assujettissement)이 주체들을 제작할(fabriquer) 수 있는지 탐구해야 한다.”[M. Foucault,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5-1976), Paris: Gallimard/Seuil, 1997;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김상운 옮김, 서울: 난장, 2015, 315번역은 수정했으며, 강조는 인용자가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근대 철학과 정치학, 그리고 그것이 정당화하는 근대 사회(곧 자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회)는 권력 관계 이전에, 그리고 그 바깥에서 이미 존재하는 자유로운 개인 주체들을 가정하고 있지만,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가정은 그 이면, 그 하부구조에서 작동하는 규율 권력, 곧 예속적인 주체들을 생산하는 예속적 주체화의 메커니즘을 은폐하고, 이에 따라 자유롭고 자율적인 주체들이란 사실은 이미 예속적 권력 관계들에 의해 생산된 예속적 신민-주체들이라는 점을 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2. 규율권력에서 통치성으로

 

푸코의 주장에 대해서는 당연히 여러 가지 비판이 제기되었고, 특히 푸코의 규율권력론은 일종의 기능주의적 권력론이라는 고발이 이루어졌다. 다시 말하면 규율권력론에 따를 경우, 규율권력을 통해 제작된 개인들은 자본주의 체계의 재생산 속으로 완전히 포섭되기 때문에 더 이상 변혁이나 심지어 저항의 가능성을 사고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감시와 처벌󰡕 이후 푸코의 작업은 규율권력론에 내재한 난점들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해법을 모색하기 위한 작업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푸코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했던 강의록이 유고집으로 출판되면서 우리가 더 잘 알게 된 것이 이 작업에서 통치 내지 통치성이라는 개념이 핵심적인 중요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통치성은 품행인도(conduire des conduites 영어로는 conduct of conducts)라고 규정할 수 있다.

 

2.1. 관계론적 권력론으로서 통치 개념

 

이것은 몇 가지 함의를 지니고 있다. 첫째, 푸코가 말하는 통치성 내지 통치는 그가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1󰡕에서 이론화한 관계론적 권력론 또는 권력의 계보학과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심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통치라고 말하는 것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별에 의거하여 주권자인 국민(또는 인민)의 동의에 따라 선출된 합법적인 정부의 활동을 지칭하지만, 푸코는 이러한 통치 개념이 법적 관점에 기반을 둔 권력론의 산물이라고 간주한다. 실제로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1󰡕에서 푸코는 주권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법적 권력론을 생산적이고 다원적이며 유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관계론적 권력론으로 대체하고자 시도했으며, 이러한 권력론에 따라 푸코가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에서 발전시킨 것이 통치 개념이다. 1981~82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인 󰡔주체의 해석학󰡕의 한 대목은 이를 아주 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더 일반적인 통치성, 곧 단순히 정치적인 의미로 이해된 통치성이 아니라 더 넓은 의미에서 권력 관계의 전략적 장으로 이해된 통치성의 문제에 권력, 정치권력의 문제를 위치시키면서 다룬다면, 우리가 통치성을 권력 관계가 갖는 유동성전환 가능성역전 가능성을 지닌 권력 관계의 전략적 장으로 이해한다면, 통치성 관념에 대한 성찰은 반드시 자기가 자기와 맺는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주체의 요소를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도로서의 정치권력에 관한 이론은 보통 권리 주체에 관한 법적 관점에 준거하는 반면, 통치성에 대한 분석다시 말해 역전 가능한 관계의 총체로서의 권력에 대한 분석은 자기가 자기와 맺는 관계에 의해 규정된 주체의 윤리에 준거해야 합니다. [Michel Foucault, L’herméneutique du sujet: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81-1982), Paris: Gallimard/Seuil, 2001, pp. 241~42;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심세광 옮김, 서울: 동문선, 2007, 283~84(번역은 약간 수정).]

 

2.2. 규율 개념의 진정한 함의


둘째, 새로운 통치 개념의 근저에는 권력과 주체의 관계라는 문제가 놓여 있다.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규율권력 이론의 핵심 중 하나가 예속적 주체화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만약 주체가 권력 이전에 성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 관계를 통해 비로소 주체로서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것이라면,[이점에서 푸코의 규율권력론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두 이론 사이의 연관성과 차이 및 갈등이라는 문제는 독립적으로 다뤄볼 만한 주제다. 기존의 논의로는 특히 Warren Montag, “Althusser and Foucault: Apparatuses of Subjection”, in Althusser and His Contemporaries: Philosophy's Perpetual War,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3 참조.] 주체가 권력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때문에 푸코를 기능주의자나 허무주의자라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푸코의 새로운 권력이론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여전히 자유와 대립하는 것으로, 곧 억압하거나 금지하고 통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권력 바깥에서만 자유가 가능하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는 푸코의 규율권력 개념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겨나는 비판이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규율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신체의 활동에 대한 면밀한 통제를 가능케 하고 체력의 지속적인 복종을 확보하며 체력에 순종-효용(docilité-utilité)의 관계를 강제하는 이러한 방법을 규율’(discipline)이라고 부를 수 있다.”[Michel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p. 139;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216.그리고 조금 뒤에서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규율의 역사적 시기는 신체의 능력 확장이나 신체에 대한 구속의 강화를 지향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메커니즘 속에서 신체가 유용하면 할수록 더욱 신체를 복종적인 것으로 만드는, 또는 그 반대로 복종하면 할수록 더욱 유용하게 만드는 관계의 성립을 지향하는, 신체에 대한 새로운 기술이 생겨나는 시기다.”[Michel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p. 139; 미셸 푸코, 같은 책, 217. 번역은 약간 수정했고, 강조는 인용자가 한 것이다.따라서 규율은 신체를 단순히 통제하거나 억압하는 기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주체를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이런 점에서 한 연구자의 다음과 같은 논평은 인용할 만하다. “그렇다면 규율, 감시 또는 파놉티즘 개념들은 가치론적인 측면에서 중립적이라는 점(또는 항상 그래야 마땅하다는 점)을 상기시켜두는 게 좋을 것이다. 규율 또는 자기감시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며, 주체화 내지 자기 실천은 필연적으로 긍정적이고 탈소외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 개념들은 서술적인 것이며, 이 개념들이 지칭하는 실재들은 일정하게 정치적으로 규정된 저항들 내지 투쟁들의 관점에서만 비판될 수 있다.” Stéphane Legrand, “Le marxisme oubliée de Foucault”, in Actuel Marx, no. 36, 2004, p. 27. 강조는 원문.] 그것의 핵심은 신체를 더욱 더 유용한 신체로, 더 생산적이고 유능한 신체로 만들되, 동시에 그 신체가 권력의 지배적인 질서에 잘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이며, 역으로 지배적 질서에 잘 복종하는 것이 신체의 유용성을 증가시키는 조건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스피노자는 바로 이것을 수동 개념이라고 불렀다. 이에 관한 더 상세한 논의는 진태원, 스피노자와 푸코: 관계론의 철학(), 서동욱진태원 엮음, 󰡔스피노자의 귀환󰡕, 서울: 민음사, 2017 참조.이것은 신체로 하여금 일정한 매뉴얼 또는 표준적 규범(예컨대, 군대의 총검술이나 사격술, 학교의 글쓰기 자세, 공장의 생산 과정의 표준화, 감옥의 세세한 일과표 등)에 따르도록 만드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이렇게 해서 생산성을 높이고 신체의 능력을 증가시키면서 동시에 신체가 권력의 지배에 잘 복종하게 되는 메커니즘이 확립되는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어쨌든 이것이, ()근대적인 주권 권력과 구별되는 규율권력의 특징이었다.

 

2.3. 규율 권력론을 넘어서

 

따라서 푸코를 기능주의자로 고발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부당전제에 입각한 비판이지만, 낸시 프레이저나 찰스 테일러 등이 제기한 규범적 쟁점은 여전히 남게 된다. 곧 푸코 식의 규율권력론에 입각할 때 부당한 권력과 정의로운 권력의 차이,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거나 억압하는 권력과 이를 가능하게 하고 고무하는 권력 내지 역량의 차이는 어떻게 식별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더욱이 근대 정치 및 윤리가 인식과 실천의 근거로서 주체의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푸코의 규율권력은 이러한 주체를 권력의 산물로 간주하고, 따라서 주체는 본래적으로 예속적 주체일 수밖에 없다면, 이 문제는 더욱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문제로 나타나게 된다.

푸코의 통치 개념은 관계론적 권력론을 포기하지 않고 그것에 입각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푸코의 논점을 이해하려면 그가 권력과 지배 개념을 구별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는 자유들 사이의 전략적 게임으로서의 권력 관계이러한 전략적 게임은 어떤 사람들이 타인들의 행위를 규정하려고 시도하게 만들며, 여기에 대해 타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규정되지 않게 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처음의] 타인들의 행위를 역으로 규정하려고 시도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보통 권력이라고 부르는 지배 상태를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양자 사이에서, 권력 게임과 지배 상태에서 우리는 통치 기술을 갖게 됩니다. 통치 기술이라는 이 용어는 아주 넓은 의미, 곧 제도를 통치하는 방식만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통치하는 방식도 포함하는 의미를 지닙니다.[Michel Foucault, “L'éthique du souci de soi comme pratique de la liberté”, in Dits et écrits, vol. II, p. 1547; 자유의 실천으로서 자기 배려, 󰡔미셸 푸코의 권력이론󰡕, 123-24. 번역은 다소 수정.]

 

푸코에게 권력은 지배 계급이 다소간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계급 지배의 도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운 주체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전략적 게임이며, 또한 자유로운 주체들의 존재와 행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Michel Foucault, “The Subject and Power”(1982) in Paul Rabinow & Nikolas Rose eds., The Essential Foucault: Selections From the Essential Works of Foucault 1954-1984, New York: New Press, 2003, p. 342.따라서 권력 관계는 가변성과 역전 가능성(곧 통치와 피통치자의 지위)을 핵심으로 한다. 반면 푸코는 대개 권력으로 통칭되는 것을 지배라는 개념으로 규정한다. 권력과 달리 지배는 관계의 두 항 사이에 존재하는 비가역적이고 불평등한 상태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갑과 을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말한다면, 갑이 항상 갑의 지위에서 행위하고 을은 항상 을의 지위에서 행위하게 될 때가 바로 지배가 작동하는 경우이며, 역으로 갑과 을 사이에 가변성과 역전 가능성이 존재하는 경우가 푸코가 말하는 권력 관계다. 따라서 권력은 자유나 해방의 대립말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와 해방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 되며(그 역도 성립한다), 해방은 어떤 권력의 지배적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권력 관계를 열어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푸코가 규율 권력 개념을 통해 제시했던 주체와 권력의 관계가 상이한 방식으로 재규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치 개념에 입각해 보면 규율 권력론의 특징과 한계는 다음과 같이 집약될 수 있다.


1) 권력 관계 이전에 항상 이미 존재하고 있는 주체들, 특히 인식과 실천의 중심으로서의 주권적 주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근대 철학 및 정치학의 인간주의적-계몽주의적 관점은 기각된다. 이러한 관점은 푸코가 후기에도 여전히 견지하고 있는 관점이다.[푸코는 자신의 관점을 간명하게 밝히고 있다. “첫째, 저는 실로 도처에서 발견되는 주권적이고 정초하는 주체, 보편적 형식의 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주체에 대한 이러한 관점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며, 그에 적대적입니다. 반대로 저는 주체는 예속화의 실천들을 통해 구성된다고, 또는 좀 더 자율적인 방식으로는, 고대에서 볼 수 있듯이, 자유화, 자유의 실천들을 통해 구성된다고 믿습니다. 이는 물론 문화적 맥락에서 재발견되는 일정한 수의 규칙, 스타일, 관례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Michel Foucault, “Une esthétique de l‘existence”, in Dits et écrits, vol. II, p. 1552.]


2) 주체는 권력 관계의 산물이지만, 이는 주체가 완전히 타율적이라는 것, 또는 전적으로 피동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규율의 핵심은 신체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것이며, 따라서 주체의 능력 내지 역량을 신장시키는 것이다.


3) 그런데 이러한 주체의 능력의 신장은 지배적인 권력에 대한 주체의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며, 따라서 규율 권력을 비롯한 권력의 핵심은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이되 권력의 인도에 순종하는 주체들을 생산하는 것, 곧 예속적 주체화의 작용이다.


4) 통치 개념을 제안하면서 푸코가 자신의 이전 작업에 대해 비판적으로 묻는 것은, 이것이 주체 생산의 유일한 방식인가, 주체화의 방식, 절차에는 이러한 방식밖에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에는 권력의 본성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가 함축되어 있다. 주체가 권력의 산물이라는 것, 권력 관계의 핵심은 주체의 생산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푸코는 이미 규율권력론에서 권력 관계에 의해 생산된 주체는 전적으로 타율적이거나 피동적인 주체가 아니라는 점을 밝혔는데, 규율권력이 생산하는 주체는 유능한 주체, 효율적이고 우수한 수행성을 발휘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이 지배 권력 또는 권력의 지배적 관계에 대한 복종의 결과라는 점이다. 따라서 주체가 자신의 능력을 신장하는 길은 지배 권력이 부과하는 주체화 절차에 따르는 길밖에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푸코가 계몽이란 무엇인가?(1984)라는 말년의 글에서 제기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질문이다. “어떻게 능력의 신장이 권력 관계의 강화와 분리될 수 있는가?”[M. Foucault, Dits et écrits, vol. II, p. 1595.]

 

3. 규율권력론의 세 가지 정정

 

3.1. 존재론적 정정


이러한 질문에서 통치 개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 측면의 정정이 필요하다. 우선 관계론적 권력 개념을 존재론적 측면에서 더 심화할 필요가 있다. 통치의 문제설정에 입각해 보면 규율권력론에 함축된 권력 개념은 관계론적인 개념이기는 하되, 매우 제한적인 것이었다. 이를 이해하려면 푸코가 통치의 문제설정에 따라 어떻게 권력을 새롭게 개념화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푸코는 주체와 권력에서 통치성 내지 통치의 관점에서 권력 관계를 정의하는 것은 타인들에게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고유한 행위에 대해 작용하는 행위 양식이다. 행위에 대한 행위(une action sur action), 잠재적이든 현행적이든, 미래의 행위든 현재의 행위든 간에 행위들에 대한 행위”[M. Foucault, Dits et écrits, II, p. 1055. 강조는 인용자.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푸코는 이러한 행위에 대한 행위가 정확히 말하면 가능성의 장()” 위에서 작동한다고 말한다. 권력 관계는 가능한 행위들에 대한 행위들의 집합이다. 권력 관계는, 행위하는 주체들의 행동이 기입되는 가능성의 장 위에서 작동한다. 그것은 고무하고 유발하고 우회하고 촉진하거나 아니면 더 어렵게 만들고 확장하거나 한정하고 개연성을 높이거나 저하시킨다.”[Ibid., p. 1056. 강조는 인용자.그리고 푸코는 이를 콩뒤트”(conduite, 영어로는 conduct) 개념, 품행개념과 연결시킨다. “‘품행이라는 용어는, 그것이 지닌 다의성과 함께 아마도 권력 관계에 존재하는 종별성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용어 중 하나일 것이다. ‘품행은 타인들을 (다소간 엄격한 강제 메커니즘에 따라) ‘인도하는행위이면서 동시에 다소간 개방된 가능성들의 장 속에서 처신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권력의 행사는 품행들을 인도하는’(conduire des conduites, conduct of conducts) 것에, 그리고 개연성을 관리하는(aménager) 것에 있다.”[Ibid.]


이것은 간단해 보이지만, 이전의 규율권력론에 대한 중요한 존재론적 정정을 제시하는 정의다. 규율권력론에서 권력의 규율 기술은 신체에 대해 작용한다. 하지만 이것은 신체를 직접, 무매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겨냥하는 대상인 신체가 일정한 방식으로 행위하도록, 신체 자신이 권력이 원하는 방식, 인도하는 방식대로 행위하도록 작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규율권력 개념은 이미 권력의 핵심은 행위에 대한 행위라는 것을 함축한다. 하지만 푸코가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인 작용작용에 대한 작용내지 행위에 대한 행위를 구별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권력이 겨냥하는 신체는 피동적인 대상, 곧 외부로부터 어떤 직접적인 작용이 있어야 비로소 작용하게 되는 관성적인 물체가 아니라 스스로 행위하는 행위자, 따라서 일정한 능동성 또는 행위 능력(pouvoir)을 지니고 있는 행위자라는 점이다. 행위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 대상에 대해 작용하는 것을 푸코는 권력이라고 부르지 않고, 사물들을 대상으로 하는 도구적 기술 관계 또는 객체적 능력”(capacités objectives)의 관계라고 부른다. 그런데 행위 능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현실태가 아닌 가능태의 영역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다수의 가능성들 사이에서의 선택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푸코가 권력의 행사를 타인들의 행위에 대한 행위 양식으로 정의할 때, 이를 어떤 인간들의 다른 인간들에 대한 통치”(이 단어의 가장 넓은 의미에서)로 특징지을 때”, 여기에는 중요한 한 가지 요소, 자유라는 요소[Ibid.]가 포함된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다. 하지만 이때 푸코가 말하는 자유는, 관계론적 권력론이 폐기한 법적인 권력론에 가정되어 있는 자유로운 주체, 다시 말해 권력 관계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주체의 자유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권력은 자유로운 주체들에 대해서만, 그들이 자유로운한에서만 행사된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주체라는 말을, 자신들 앞에 가능성의 장, 곧 다수의 품행, 다수의 반작용 및 다양한 처신 양식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을 갖고 있는 개인적이거나 집합적인 주체들로 이해하도록 하자.”[Ibid. 강조는 인용자.]

 

3.2. 윤리적 정정


이처럼 권력 관계가 가능한 행위들에 대한 행위를 의미하고, 여기에는 가능성의 장을 갖고 있는자유로운 주체가 전제되어 있다면, 규율권력은 권력 관계의 특수한 한 가지 방식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규율에 대한 푸코의 관점에는 그 관계론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권력 관계를 맺는 파트너들사이의 대칭성이라는 논점이 결여되어 있다. 통치의 관점에서 보면 규율 권력은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비대칭적인 관계로 특징지을 수 있는 권력이다. 곧 규율의 관계에서 피통치자는 자신의 행위 능력을 신장하기 위해 통치자가 설정한 행위 내지 품행의 표준에 자신을 맞추는 것 이외에 다른 가능성을 갖지 못한 (또는 매우 적은 가능성들만을 갖고 있는) 행위자인 셈이다. 그리고 이때 피통치자에게서 윤리는 행위의 규칙 내지 법칙(곧 규율권력이 설정한 규범)에 맞춰 행위하는 것이 될 것이다.


반면 통치의 관점에서 재정의된 권력 관계에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대칭성이 존재한다면, 이는 통치자만이 아니라 피통치자 역시 자기의 기술로서 윤리적 실천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치 개념의 중심에는 주체화 양식의 관점에 근거를 둔 윤리적 실천의 문제가 존재한다. 푸코는 1980년 미국 다트머스 대학에서 주체성과 진리라는 제목 아래 이루어진 강연에서 통치의 문제를 두 가지 기술의 접합의 문제로 해명한다.[Michel Foucault, “About the Beginning of the Hermeneutics of the Self: Two Lectures at Dartmouth”, Political Theory, vol. 21, no. 2, 1993.] 그에 따르면 기술(technique)에는 세 가지 종류가 존재한다. 사물들을 생산하고 변형하고 조작하는 생산 기술과, 기호 체계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의미작용 기술,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들의 행위를 규정하고 그들에게 어떤 의지들을 부과하고 그들을 어떤 목적 내지 목표에 종속시키는”[Ibid., p. 203.] 지배의 기술이 그것이다(다소간 용어상의 혼동이 있을 수 있지만, 여기에서 푸코가 지배의 기술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다른 맥락에서 푸코가 통치술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는 성(sexuality)에 관한 탐구를 통해 이 세 가지 기술 이외에 또 다른 기술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자기의 기술(techniques or technology of the self)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개인들이 그들 자신의 수단을 통해 자신들의 신체와 영혼, 자신들의 사고와 행위에 대해 일정한 숫자의 작용을 실행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전환시키고 변형하고 완전성과 행복, 순수성, 초자연적 능력 등과 같은 일정한 상태를 획득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Ibid.]을 의미한다. 통치는 바로 지배의 기술과 자기의 기술이 접촉하는 지점이다. 다시 말해 통치는 한편으로 개인들이 지닌 지배의 기술이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 행하는 자기의 기술에 의거하는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기의 기술이 강압이나 지배의 구조로 통합되는 지점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개인들 각자가 지닌 자기의 기술과 개인들 각자가 타인들의 행위를 인도하기 위해 행사하는 지배의 기술의 상호 전제와 상호 연관성, 상호 접촉 관계를 푸코는 통치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통치의 범위가 보통 말하는 좁은 의미의 통치를 넘어서 인간들 사이의 훨씬 더 다양한 사적공적 관계로 확장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통치는 갑과 을 사이에 존재하는 대칭적이고 비대칭적인 관계가 단순히 외적인 강압 관계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며, 갑의 자기의 기술과 을의 자기의 기술 또는 갑과 을 각자가 실행하는 지배의 기술의 복합적 작용의 표현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을과 병, 또는 병과 정 등과 같은 또 다른 관계에 대해서도 타당할 것이다.

 

3.3. 정치적 정정: 탈주체화와 대항품행


이렇게 규율권력에 기반을 둔 권력론에서 통치의 문제설정으로 나아가면서 권력 개념이 존재론적이고 윤리적 측면에서 정정될 뿐만 아니라, 정치적 차원에서도 정정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은 권력에 대한 저항을 새롭게 사고하는 방식이다. 푸코는 󰡔성의 역사 1󰡕에서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으며 ... 권력과 관련하여 하나의 위대한 거부의 장소(반역의 정신, 모든 반란의 온상, 혁명가의 순수한 법칙)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제각기 특별한 경우인 여러저항들 이 있다”[Michel Foucault, Histoire de la sexualité I, La Volonté de savoir, Paris: Gallimard, 1976, pp. 125-27;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 이규현 옮김, 서울: 나남, 2010(수정 3), 109-11.]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1978년 프랑스철학회에서 했던 비판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강연에서는 더 나아가 비판을 “‘통치 받지 않기 위한 기예(art)’, 다시 말해 이런 식으로, 또 이런 대가를 치르면서 통치 받지 않으려는 기예’”[Michel Foucault, Qu’est-ce que la critique suivi de La culture de soi, Paris: Vrin, 2015, p. 37; 󰡔비판이란 무엇인가? 자기수양󰡕, 오트르망 옮김, 파주: 동녘, 2016, 45. 번역은 약간 수정.]로 정의하면서 탈예속화또는 탈예속적 주체화(désassujettissement)[Michel Foucault, Ibid., p. 39; 같은 책, 47.]를 비판의 본질적 기능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안전, 영토, 인구󰡕 강의록에서는 탈예속화 내지 탈예속적 주체화와 긴밀하게 연결된 또 다른 개념, 대항 품행(contre-conduite)라는 개념을 도입한다.[이 개념의 함의에 관해서는 특히 Arnold I. Davidson, “In Praise of Counter-Conduct”, in History of the Human Science, vol. 24, no. 4, 2011 참조.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이 개념을 발전시키려는 최근의 시도들로는 특히 Daniele Lorenzini, “From Counter-Conduct to Critical Attitude: Michel Foucault and the Art of Not Being Governed Quite So Much”, in Foucault Studies, no. 21, 2016 Lauri Siisiäinen (2016) “Foucault and Gay Counter-Conduct”, in Global Society, vol. 30, no. 2, 2016 참조. 앞의 글은 대항 품행의 문제가 푸코 사상에서 비판 내지 비판적 태도의 문제와 깊이 결부되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뒤의 글은 대항 품행에 입각하여 게이 운동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논평하겠다.]


푸코가 말하는 대항 품행은 어떤 통치성의 인도에 따라 행위하는 대신, 그러한 통치성이 원하는 것과 다른 식으로 행위하는 것을 가리킨다. 푸코는 초기 기독교의 사목 권력의 특성을 인간의 품행을 대상으로 삼는 매우 특이한 유형의 권력”[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오트르망 옮김, 서울: 난장, 2011, 269.]이라고 규정하면서, 사목 권력은 동시에 품행과 관련된 특이한 반란”, “품행상의 반란”[미셸 푸코, 같은 책, 269-270.] 또는 품행상의 봉기”[미셸 푸코, 같은 책, 313.]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수반했음을 지적한다. “주권을 행사하는 권력에 대한 저항과도 다르고, 착취를 확보하고 보장하는 [권력에 맞서는 경제적 반란]과도 구별되는 품행상의 반란의 사례로 푸코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12세기 여성수도원에서 일어난 여성의 지위와 관련된 반란, 18세기에 나타난 비밀결사, 곧 프리메이슨이나 혁명가들의 비밀결사, 18세기 말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의학에 대한 강한 거부 등의 사례를 든다. 그러면서 이러한 품행상의 반란을 지칭하는 새로운 개념으로서 대항 품행”[미셸 푸코, 같은 책, 285.]이라는 단어를 제안한다.


󰡔안전, 영토, 인구󰡕에서 대항품행 개념은 시론적이지만, 매우 중요한 개념적 위상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 이것은 품행상의 반란 내지 품행상의 봉기가 단지 초기 기독교나 15~16세기 기독교의 전환기에서만 의미를 갖는 현상이 아니라, 모든 봉기와 혁명의 조건이라는 위상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완전히 다른 목표와 쟁점을 지닌 봉기와 혁명의 절차에서도 품행상의 봉기, 품행상의 반란이라는 차원이 늘 존재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 17세기 영국의 혁명에서 ... 프랑스 혁명에서도 ...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도 품행상의 봉기라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소비에트, 노동자 평의회 등은 [그것의] 현시, 유일한 현시였습니다.”[미셸 푸코, 같은 책, 314. 강조 표시는 인용자.] 다른 한편 대항 품행은 국가 이성 및 내치(內治, police)의 도입을 통해 개시된 근대적 통치성과 대립하면서 그것과 분리될 수 없는 대항 통치성으로의 위상을 지니게 된다. 푸코는 맨 마지막 강의(197845)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이러한 대항 품행의 세 가지 형식을 지적한다. 첫 번째는 국가권력이 시민사회 속으로 흡수되는 것을 꿈꾸었던 19~20세기의 혁명적 종말론”[미셸 푸코, 같은 책, 481.]이며, 두 번째는 국가에 대항할 수 있는인구가 지닌 절대적 권리 ... 혁명 자체의 권리라는 형식이며, 세 번째는 사회의 진리, 국가의 진리, 국가이성 등은 이미 국가 자체가 보유해야 할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가 그 보유자가 되어야 한다는 형식이다. 요컨대 시민사회를 국가에 대립시키는 것, 인구를 국가에 대립시키는 것, 국민을 국가에 대립시키는 것”[미셸 푸코, 같은 책, 483.]이 근대적 통치성과 대립하면서 그것과 분리될 수 없게 결합되어 온 대항품행의 형식들이라는 것이다. 대항 품행이라는 개념이 이처럼 󰡔안전, 영토, 인구󰡕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니고 있지만, 다음 해의 강의에서는 더 이상 출현하지 않는다.


아무튼 예속적인 주체화 양식이 함축하는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비대칭적인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 이를 위해 탈예속화 및 대항품행의 양식을 발전시키는 것, 이것이 푸코가 규율권력론에 대해 제시하는 세 번째 정치적 정정이라고 할 수 있다.

 


III. 주체화의 문제로서 에로스

 

1. 주체화의 의미

 

이처럼 통치, 품행 인도, 대항 품행 같이,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에 등장하는 푸코의 새로운 개념들을 통해 우리는 1976년 무렵부터 푸코가 예속적 주체화에서 탈예속화로의 이행의 가능성을 사고하고자 했음을 인식할 수 있다. 푸코는 여기서 더 나아가 좀 더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 새로운 개념, 곧 주체화(subjectivation)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 용어는 1983년 무렵 푸코가 이런저런 학술지에 발표한 글에서 처음 발견된다.[가령 순결의 투쟁(Le combat de la chasteté), Communications, no. 35, 1983; 자기에 대한 글쓰기(L'écriture de soi), Corps écrit, no. 5, 1983; 쾌락의 활용과 자기의 기술(Usage des plaisirs et techniques de soi), Le Débat no. 27, 1983. 이 글들은 모두 Dits et écrits II권에 수록돼 있다.] 하지만 이 용어는 푸코 자신에 의해 온전하게 이론적으로 가공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처음 제안될 당시에는 얼마간 애매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애매성은 주체화라는 개념이 한편으로는 지배 권력에 의한 예속적 주체 생산 양식을 가리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예속적 주체 생산 양식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주체 형성 양식을 뜻하기도 한다는 데서 생겨난다.


한 편으로 주체화라는 개념은 푸코가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1󰡕에서 도입한 예속화 개념의 연장선상에 사용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주체화라는 개념은 객체화”(objectivation)를 뜻한다. 이 경우 주체화는 개인들을 대상으로 삼아 그들을 주체들로 변형하는 과정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푸코는 주체와 권력에서 바로 이러한 객체화의 관점에서 자신의 작업 전체를 분류한 바 있다. “나는 우선 지난 20여 년 동안 나의 작업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말하고자 한다. (...) 나의 목표는 우리 문화에서 인간이 주체로 되는 방식인, 상이한 양식들의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내 저작은 인간을 주체로 변형시키는 객체화의 세 가지 양식을 다루어왔다.”[M. Foucault, Dits et écrits, II, pp. 1041-42.]


첫 번째는 이른바 고고학 시기의 작업에 해당하는 것으로(1960~1969), 푸코는 이러한 작업을 자기 자신에게 과학의 지위를 부여하고자 하는 질문양식들에 관한 탐구로 규정한다. 여기서 인간은 이러저러한 앎의 대상으로서 객체화된다. 두 번째는 1970년대에 푸코가 전념했던 이른바 계보학적 작업으로서, 여기에서는 내가 분할하는 실천들이라 부르게 된 주체의 객체화를 연구했다. 주체는 자기 내부에서 분할되거나 또는 다른 이들로부터 분할된다. 이 과정은 그를 객체화한다. 미친 자와 정상인 자, 병자와 건강한 자, 범죄자와 착한 소년들이 그 예들이다.”[Ibid.] 세 번째는 인간이 자신을 그 또는 그녀라는 주체로 전환시키는 방식(이것이 나의 최근 작업이다)”에 관한 작업이다. 푸코는 1970년대 말~80년대 초부터 1984년 사망하기 직전까지 바로 이러한 세 번째 작업, 곧 윤리적 주체화에 관한 작업에 전념한다.


푸코가 이러한 작업을 객체화의 한 양식으로 규정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푸코의 작업은 1970년대 수행되었던 권력의 계보학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푸코의 관심은 1960년대 이래 서구 사회 및 비서구 사회(곧 탈식민주의 사회)에서 막 등장하고 있던 새로운 투쟁의 형식과 목표를 해명하는 것이었다. 푸코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세 가지 투쟁 유형이 존재한다. 하나는 지배의 형식들(민족적, 사회적, 종교적)에 대한 투쟁이며, 두 번째는 개인들을 그들이 생산하는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착취 형식들에 대한 투쟁이고, 세 번째가 개인을 그 자신에게 묶어 놓고, 이런 식으로 그를 타인들에게 복종시키는 것에 대한 투쟁(예속적 주체화에 대한 투쟁, 주체성과 복종(soumission) 형식들에 대한 투쟁)”[Ibid., p. 1046.]이다. 이러한 투쟁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규정하는 과학적 또는 행정적인 심문에 대한 거부이며, 권력의 테크닉과 형식을 공격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때 공격의 대상이 되는 권력은 개인을 범주화하고 개인을 그의 개별성에 따라 표시하고 개인을 그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에 결부시키고, 그가 인정해야 하고 타인들이 그에게서 식별해내야 하는 진리의 법칙을 부과하는 권력, 개인을 주체들/신민들(sujets)로 만드는[Ibid.] 권력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주체화라는 개념은 이처럼 종속화 내지 객체화라는 뜻과 구별되는 좀더 적극적인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주체와 권력에서 이미 이러한 새로운 의미의 단초가 엿보인다. 푸코는 4절로 이루어진 이 글의 첫 번째 단락을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짓고 있다. “아마도 오늘날의 목표는 우리란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재(ce que nous sommes, what we are)를 거부하는 것일 것 같다. (...) 우리 시대의 정치적, 윤리적, 사회적, 철학적 문제는 국가나 국가제도들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국가로부터 그리고 국가와 결부되어 있는 개체화의 유형 둘 다로부터 해방시키는 데에 있다는 것이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수 세기 동안 우리에게 부과되어 온 이런 종류의 개체성을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형식의 주체성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Ibid., p. 1051. 강조는 푸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의 존재를 거부할 수 있는가? 수 세기 동안 우리에게 부과되어온 개체성,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의 주체성을 추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사실 말년의 푸코 작업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푸코의 강의록, 특히 1980년대 초의 강의록들[󰡔주체의 해석학󰡕, 앞의 책; Le Gouvernement de soi et des autres: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82-1983), Gallimard/Seuil, 2008; Le Courage de la vérité: Le Gouvernement de soi et des autres II: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84), Gallimard/Seuil, 2009.]이 밝혀주고 있는 것은 푸코가 1970년대 말에 이르러 규율권력에 대한 분석으로 환원될 수 없는 윤리적 차원, 곧 자기로서의 주체가 자기 자신 및 타인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차원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푸코는 이를 통치 내지 통치성의 관점에서, 그리고 자기의 기술이라는 관점에서 탐구하며, 이러한 탐구를 통해 근대 사회에서 지배적인 개인들의 객체화 양식과 구별되는(따라서 그것의 역사적 한계 및 대안에 대해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고대적인 자기의 기술, 주체화 양식을 발견한다. 사실 푸코는 이미 󰡔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성의 역사 3: 자기 배려󰡕에서 이러한 상이한 주체화 양식들의 특징과 차이에 관해 설명하고 있지만, 그러한 논의가 갖는 함의를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1980년대 초의 강의록들을 통해서다. 이 강의록들은 󰡔성의 역사󰡕 2권과 3권에 대한 초기 독해들이 제시했던 것처럼, 푸코의 실존의 미학이 관계론적 권력론과 단절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고대 그리스로마, 그리고 초기 기독교에 나타난 윤리적 주체화 양식에 대한 푸코의 분석이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쟁점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곧 푸코가 고대의 윤리적 주체화 양식을 찬양했다거나 이를 근대적인 예속적 주체화 양식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했다는 생각, 아울러 그 핵심은 법적인 형식을 띤 주체화 양식에 저항하는 자기 제어또는 자기 주인화의 기술에 있다는 관점은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주체화 양식의 단선적인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긍정적이거나 그 자체로 부정적인 주체화 양식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오히려 이제 한계에 직면한 기존의 주체화 양식과 다른 새로운 주체화 양식을 모색하는 것이고, 과거의 주체화 양식들의 역사에 대한 검토를 통해 그 가능성의 지평을 좀더 넓히는 일이다.[이하에서는 원래 고대 그리스로마, 초기 기독교의 윤리적 주체화 양식들에 관한 푸코 분석들을 검토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전체 논문의 구도와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있어서 이 부분은 별도의 논문에서 다뤄볼 계획이다.]


2. 주체화, 대항 품행, 에로스

 

이러한 주체화 및 대항 품행 개념에 입각하여 푸코에게서 에로스의 문제를 다시 살펴볼 수 있다. 곧 푸코가 󰡔성의 역사󰡕 1권 및 2~3권에서 추구했던 작업은 사실은 대항 품행으로서 주체화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푸코는 동성애자였으며, 동성애의 경험은 그의 지적 작업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러한 영향은 그가 생전에 출간한 저작들 속에서 명시적인 주제로 다루어지기보다는 그의 저작의 암묵적인 실천적이론적 동기로 작용했다. 따라서 동성애자로서의 푸코의 경험이 그의 이론적 작업, 특히 그의 후기 주체화에 관한 문제설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고, 역으로 그가 주체화 개념에 입각하여 동성애 문제를 어떻게 이론화하려고 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재구성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것은 푸코가 1970년대 말~1980년대 초에 했던 여러 대담들이다. 푸코는 이 시기에 게이 운동에 참여하는 활동가들과 여러 차례 대담을 했으며, 이 대담을 통해 명시적으로 주체화 및 대항 품행에 입각하여 동성애 운동의 함의를 규명하려고 했다.


푸코는 삶의 양식으로서의 우정이라는 제목의 대담에서 동성애에 대한 단순화된 이미지, 동성애란, 거리에서 만난 두 명의 젊은 남자애들이 서로를 눈짓으로 유혹하고 서로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서로 쾌감을 느끼면서 즉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Foucault, “Amitié comme mode de vie”, in Dits et écrits, vol. II, p. 983.]은 외관과 달리 기성사회가 별로 문제시하지 않는 것이며, 오히려 그렇게 비치도록 조장하는 것이다. 반면 동성애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동성애적] 성행위 자체가 아니라 동성애적인 삶의 양식”[Ibid.]이다. 곧 이성애적인 사회 질서 및 관습, 규범과 맞지 않는 동성애적인 삶의 양식(또는 주체화 양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관습적인] 규범이나 확립된 행위 양식이 부재한 가운데새로운 관계 설정의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관계들은 기존의 성적 관계들이나 삶의 관습 내에 단락(court-circuit)을 창출해내며, , 규칙, 관습이 존재해야 할 곳에 사랑을 도입한다.”[Ibid.]는 것이다. 푸코가 개인적인 동성애의 경험을 넘어, 동성애 운동에서 주목한 것은 바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출해내는 능력, 또는 대항품행의 가능성을 도입하는 힘이다.

 

[동성애] 문화는 개인들 사이에 진정으로 새롭고, 일반적인 문화적 형식과 동질적이지 않은, 또한 그러한 형식에 강요되지도 않는 관계 양상, 실존 양식, 가치 유형, 교환 형태를 발명해냅니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게이 문화는 단순히 동성애자들을 위한 동성애자들의 선택으로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이성애자들에게도 전달 가능한 관계들을 창출해낼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다소 전도시켜, 사람들이 이전 시기에 말했던 것처럼, “사회적 관계의 일반적 정상성 속에 동성애를 재도입하도록 하자라고 말하기보다는, 그와 정반대의 것을 말해야 합니다.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우리에게 제안된 관계 유형들로부터 그것[동성애]이 가능한 한 멀리 탈주할 수 있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가 직면해 있는 빈 공간 속에서 새로운 관계적 가능성들을 창출해내도록 하자.”[Foucault, “Le triomphe social du plaisir sexuel: Une conversation avec Michel Foucault”, in Dits et écrits, vol. II, p. 1130.] 

 

이 대목에서 드러나듯이, 푸코가 동성애자 운동에서 주목한 것은 좁은 의미의 인권 운동이나 인정 투쟁이 아니다. 곧 푸코는 기존 사회의 법이나 사회적 규범, 삶의 양식의 근저에 있는 일반적인 원칙, 곧 인권 등에 의거하여 소수자로서 동성애자들의 성적 권리 및 개인적 권리를 옹호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푸코가 보기에 새로운 법을 만들고 이것에 의거하여 동성애자들의 성적 권리와 개인적 권리를 보장하려고 하는 것은 (특히 동성애의 권리가 심하게 억압받고 사회적인 불관용의 대상이 되는 곳에서는)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혁신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성애자들의 결혼의 권리와 동일한 동성애자들의 결혼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개인적인 관계를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받으려는 욕망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은 곧 기존의 삶의 양식이나 규범적 관계를 되풀이하는 것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개인적 권리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성애적인 것과 동일한-인용자] 결혼 관계를 재생산해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성취된 진보는 사소한 것이 될 것입니다.”[같은 글, p. 1128.]


오히려 푸코는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서 동성애자 운동에 고유한 창조의 능력, 기존의 사회 질서나 규범, 법체계가 구속하고 협소하게 만든 주체화의 능력 및 삶의 양식의 가능성을 발굴하고 확장할 수 있는 능력에 주목한다. 동성애자 운동이 이러한 대항 품행의 가능성, 탈예속화 내지 주체화의 전망을 발굴할 수 있을 때, 동성애자 운동은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의 규범과 관계, 삶의 양식을 똑같이 영위할 수 있도록 허락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성애자들을 포함한 사회 전체의 성적 관계, 삶의 양식, 행위 방식의 변화를 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 운동의 윤리적 의의는 정상성으로서의 보편성을 균열시키고 그 안에 차이를 도입할 수 있는가 여부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자기의 윤리를 확립하는 것은 오늘날 긴급하고 근본적인 과제, 정치적으로 필수불가결한 과제다. “만약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와 다른, 일차적이고 궁극적인 저항의 지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294.이러한 자기의 윤리, 주체화를 확립하는 데서 성의 문제가 특별히 중요성을 지닌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성이 우리 영혼보다 더 중요하고, 거의 우리의 생명보다도 더 중요해”[Michel Foucault, Histoire de la sexualité, t. 1, p. 206; 󰡔성의 역사 1󰡕, 181.]졌기 때문이다. 곧 현대 사회에서 성은 우리의 가장 내밀한 쾌락과 고통, 비밀을 함축하고 있는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내면적인 어떤 것, 우리의 자아 내지 자기와 거의 등가를 이루는 어떤 것이 된 것이다.


반면, 성이 이렇게 내밀해지면 내밀해질수록, 성은 더욱 더 공적 담론, 비판적 토론의 대상에서는 제외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철학이 성의 문제를 주제로 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아마도 허버트 마르쿠제나 빌힐렘 라이히, 또는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같은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전통, 또는 정신분석학적인 전통 또는 조르주 바타이유 같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철학에서 성이라는 문제는 금기의 대상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푸코가 󰡔성의 역사󰡕 연작을 비롯한 후기 작업에서 성의 문제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다면, 그것은 한편으로 개인들 그 자체와 거의 동일시될 만큼 내면화되고 개인화되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공적인 침묵의 대상이 된 성의 문제야말로 예속화와 주체화, 품행 인도와 대항 품행의 쟁점이 집약된 주제였기 때문이다.

 

IV. 비판적 고찰

 

푸코의 사상은 적어도 세 가지 측면에서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첫째, 그것은 푸코의 이론적 작업의 대상과 관련되어 있다. 전통적인 철학 및 동시대 철학자들과 관련하여 철학자로서 푸코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가 보통 철학의 대상이라고 간주되는 것과 다른 대상들에 관심을 쏟고 그것의 이론적현실적 중요성을 드러내기 위해 애썼다는 점이다. 가령 그의 초기 저작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인 󰡔광기의 역사󰡕광기또는 광인들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1970년대의 계보학 연구에서도 다른 권력에 대한 분석자들이나 정치철학자들과 달리 저명한 정치철학자들의 작업을 탐구하거나 국가 권력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감옥, 병원, 학교, 군대 같은 사회의 말단 조직들에서 작용하는 권력을 탐구했으며, 헤르큘린 바르뱅(Herculine Barbin), 피에르 리비에르 같은 비정상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을 또는 을의 을들의 삶과 그들을 분류하고 규율하고 감시하고 처벌하는 권력이 곧 그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둘째, 이는 방법론과도 연결된다. 푸코는 1975~76년 강의록인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자신이 수행한 계보학적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에서 “‘예속된 지식의 반항”[Michel Foucault,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p. 9;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28. 강조는 인용자.]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예속된 지식(savoir)이라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학문과 인식의 체계 안에 포함되어 있되, 그 속에서 안정된 지위를 누리지 못하거나 그 과학성 내지 학문성을 의심받고 있는 지식을 가리킨다. 정신의학이나 정신병리학, 범죄심리학 등과 같이 푸코가 󰡔광기의 역사󰡕󰡔감시와 처벌󰡕 또는 󰡔성의 역사󰡕 등에서 분석했던 지식들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한편 예속된 지식이라는 것은 권력과 지식의 전문가들의 대상이 갖고 있는 지식을 뜻한다. 감옥에 갇힌 죄수들의 지식, 정신병리학의 대상이 되는 비정상인들의 지식 등이 그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예속된 지식을 분석하고 드러냄으로써 국지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권력들의 구체적인 기능 방식을 밝혀내려고 했고,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사소하고 하찮아 보이는 이런 지식들과 권력들이 우리 사회와 역사, 정치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드러내려고 했다. 이 때문에 푸코는 자신이 일반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문제를 극단적으로 파편화거나 국지화’”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자신의 탐구 방식의 정당성을 굳게 주장한다.

 

권력의 문제란, 광기, 의학, 감옥 등등의 문제 속에서 작동하는 권력관계들과 권력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문제로서, 어떠한 이론 체계도역사철학도, 일반적인 사회이론 혹은 정치이론에서도다루지 못했던 문제입니다. (...) 정신병자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신 병동에서의 삶은 어떠한가? 간호사의 일은 무엇인가? 병자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 내가 제기하는 문제들, 즉 일상생활과 관련된 성, 광기, 범죄 등의 복잡함은, 쉽게 해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 문제들을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관련된 풀뿌리 수준에서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발언과 정치적 상상의 권리를 사람들에게 되돌려주기 위해서는, 수년 혹은 수십 년의 작업이 필요할 겁니다.[미셸 푸코, 󰡔푸코의 맑스: 둣치오 뜨롬바도리와의 대담󰡕, 이승철 옮김, 서울: 갈무리, 2004, 142~152. 이것은 철학자 또는 이론가들이 역사를 소비하는 데, 곧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역사를 사용하는 데 만족할 것이 아니라 직접 역사적 분석을 수행하고자 노력”(같은 책, 121~22)해야 한다는 그의 일관된 방법론적 원칙과 연결되어 있다.]

 

셋째, 권력론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푸코의 권력 개념이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법적인 권력론에 대한 비판과 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푸코에 따르면 법적인 권력론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는 권력의 핵심을 금지하고 허가하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권력의 실제 작동방식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뿐더러, 권력 또는 지배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변화시키는 전략을 사고하기도 어렵게 만든다. 특히 이는 공적인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는 아래쪽에 위치한 사람들, 을들 및 을의 을들이 예속적 지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반면 푸코 자신의 말을 빌리면 그가 196868혁명 이후에 권력에 관한 탐구에서 목표로 삼은 것은 바로 예속된 사람들이 스스로 예속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것이었다.

 

나는 권력의 현실적인 작동 메커니즘을 이해하려고 고심해 왔습니다. 내가 이 작업을 한 이유는, 그 권력 관계 속에 위치한 사람들이, 실천과 저항, 반란을 통해 그것들로부터 탈출하고, 그것들을 변환시켜 더 이상 예속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이 속한 권력관계를 인식하고 그것에 저항하여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고자 결심한 사람들 자신에 의해 고안되고, 계획될 수 있는 수많은 할 일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미셸 푸코, 같은 책, 164~65. 강조는 인용자.]

 

따라서 푸코의 권력론에 의거하여 우리는 을과 을의 을이 누구인지 조금 더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다. 을은 피통치자, 따라서 권력 관계에서 통치자에 의해 행위들의 가능성을 일정한 방식으로 제한당하는 행위자라고 규정할 수 있으며, 을의 을은 이러한 가능성이 극도로 축소된 행위자, 따라서 통치자들이 부과한 매우 한정된 방식 이외의 다른 행위 양식을 시도하거나 사고하기 어려운 행위자라고 규정할 수 있다. 푸코의 개념을 따른다면, 이들은 예속적 주체화 양식에 따르도록 강제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면 푸코가 지배 상태라고 부른 상태에 가까이 놓여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성적 소수자들을 을의 을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면,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이들이 갑(또는 여러 유형의 갑들)으로서의 통치자들이 부과하는 품행의 방식과 다른 식으로 행위하고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극도로 축소된 행위자들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부르는 명칭이 바로 갑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갑질은 단지 법적(계약적)제도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푸코가 말하는 넓은 의미의 품행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성적 소수자들이 법적제도적인 틀 내에서 이성애 연인들과 동등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성적 지향을 표현하고 결혼을 비롯한 결합 양식을 추구할 수 없을뿐더러, 그것을 스스로 제한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감추도록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자기 제한 및 은폐에 실패하거나 그것을 거부한다면, 여기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따라서 어떻게 이러한 을의 을로서의 성적 소수자들이 강압적인 형식의 예속적 주체화에 저항할 수 있는지, 이러한 강요된 예속적 주체화에 맞서 대항 품행을 수행하고 탈예속화 및 다른 형식의 주체화를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는 물론 성적 소수자들에게만 고유한 질문은 아니다. 그것은 을들 일반 및 특히 을의 을이라고 부를 수 있는 행위자들(가령 장애인들이나 무국적자들, 또는 중첩된 방식의 예속과 종속, 착취를 경험하는 이들) 일반에게 모두 해당되는 질문이다.


그런데 성적 소수자들의 대항 품행 양식과 관련하여 푸코 자신의 몇몇 인터뷰들만이 아니라, 푸코에서 영감을 얻은 퀴어 이론가들 및 운동가들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뚜렷한 경향이 존재한다. 그것은 성적 소수자들의 대항 품행의 핵심을 기존의 성적 질서 및 문화적 질서에 대한 위반에서 찾으려는 경향이다. 이는 1990년대 게이 및 레즈비언 이론가들의 저작에서 이미 나타난 바 있으며, 최근에도 다수의 이론가들이 이러한 관점을 피력하고 있다. 퀴어 이론가들의 입장에서는 남성 가부장제의 억압적 질서를 강조하고 여성의 평등 및 해방을 추구하는 페미니즘조차 이성애 질서를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해방적이지 못하며,[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조현준 옮김, 파주: 문학동네, 2008 참조.] 진정한 의미의 대항 품행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이고 유기체적인 질서에 기반을 둔 성적 질서도 거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정신신체의 이분법 및 이성애동성애라는 관례적 이분법까지도 중단”[Lauri Siisiäinen (2016) “Foucault and Gay Counter-Conduct”, in Global Society, op. cit., p. 303.]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퀴어 개인들 및 집단들에 고유한 정서적 관계 및 문화적 태도(가령 공유(sharing)와 끊임없는 실험과 생성적인 삶의 양식) 등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요구한다.[가령 Mark Kingston, “Subversive Friendships: Foucault on Homosexuality and Social Experimentation”, in Foucault Studies, Vol. 7, 2009, pp. 717; Steve Garlick, “The Beauty of Friendship: Foucault, Masculinity and the Work of Art”, in Philosophy and Social Criticism, Vol. 28, No. 5, 2002를 각각 참조.]


하지만 한 연구자가 지적하듯이 이것이 과연 푸코적인 의미의 대항품행인지 질문해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식은 “‘사회적인 것을 고질적으로 규범적인 것으로 구성함으로써 ... 격렬하고 독특한 성적 향락이 주는 쾌락이 ...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에 고유한 이성애 규범적이고 재생산중심적인 논리에 포섭되지 않는 위반적이고 (따라서) 저항적인 경험의 지평에 접근하는 독특한 지점을 제시해줄 것이라고 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퀴어의 성적 경험을 이성애적 관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하고 몰아적(沒我的)인 것으로 제시하고 또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그만큼 그것을 시공간 바깥에, 의미의 역사적이고 사회적 영역 바깥에[Shannon Winnubst, “The Queer Thing about Neoliberal Pleasure: A Foucauldian Warning”, Foucault Studies, Vol. 14 (2012), p. 95.] 위치시키고, 따라서 탈역사화하는 위험을 겪게 될 것이다.


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도 가능하다. 주디스 버틀러는 푸코의 비판 개념에 관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자기(self)는 자기 자신을 형성하지만, 주체화 양식으로 특징지어지는 일련의 형성적인 실천들 내에서 자기 자신을 형성한다. 이러한 주체화 양식들에 의해 그것의 가능한 형식들의 범위가 미리 한정된다는 사실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자기가 온전하게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 하지만 만약 이러한 자기 형성이, 어떤 이가 그에 따라 형성된 바로 그 원칙들에 대한 불복종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이 경우 미덕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탈종속 내에서 형성하는 실천이 되며, 이는 이 자기가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탈형식화의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을 의미한다.[Judith Butler, “What is Critique? An Essay on Foucault’s Virtue’, in David Ingram ed., The Political, Oxford: Blackwell, 2001, p. 226.]

 

곧 주체로서의 자기 또는 자기로서의 주체는 항상 이미 권력 관계 내에 실존하며, 따라서 자기가 자기 자신을 형성하고 자기 자신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방식은 항상 이미 기존의 권력 관계 및 (예속적) 주체화 양식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권력 관계 및 주체화 양식 바깥에, 그 이전에 존재하는 주체 내지 자기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자기에게 남은 유일한 길이 기존의 권력 관계와 주체화 양식이 부과하는 정체성과 생활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길인 것은 아니다. 주체의 자기 형성은 자신이 그 속에 존재하고 또한 자기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는 그 권력 관계 및 주체화 양식에 불복종하여, 자신에게 부과된 (특정한)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거부하고 탈-주체화하는 방식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권력은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인 행위가 아니라, 행위에 대한 행위이며, 따라서 자신이 작용하는 대상의 행위 능력 및 자유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기존의 주체화 양식에서 벗어나려는 주체가 원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권력 관계가 행위자들의 자유를 전제한다면, 그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를 실행하는 방식(또는 그 가능성의 범위)권력 관계에 의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버틀러가 말하듯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탈형식화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곧 탈-주체화, -예속화라는 것은 주체의 자기 무화(無化)의 위험을 항상 내포하는 것이다.


이것은 윤리적 차원에서 본다면,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한 지적이다. 하지만 정치적 차원에서 본다면 이는 상당히 제한적인 함의를 갖는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첫째, 기존의 주체화 양식에 저항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론적 가능성이 항상 이미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실행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푸코는 권력 관계와 지배의 상태를 구별함으로써 기능주의 내지 허무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벗어났지만, 우리가 규율권력과 같은 또는 더 심한 경우는 노예제와 같은 지배 상태에 처해 있을 때 여기에서 어떻게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대칭적 관계로서의 권력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곧 푸코 식으로 말하면 해방/자유화(liberation)와 자유의 관계에 대한 질문,[“L'éthique du souci de soi comme pratique de la liberté”, in Dits et écrits, vol. II, op. cit; 자유의 실천으로서 자기 배려, 앞의 책 참조.] 또는 에티엔 발리바르 식으로 말하면, 해방(emancipation)과 변혁(transformation), 시민다움(civility)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충분히 답변하지 않았다. 이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 존재론적 가능성 및 윤리적 자기 관계의 가능성을 밝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둘째, 다양한 형태의 권력 관계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서로를 강화하는지 또 때로는 서로 갈등 및 길항 관계에 놓이게 되는지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푸코는 때로는 마치 주권적 권력과 규율 권력, 그리고 생명 권력과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사이에 역사적인 계승 관계가 존재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이점에 관해서는 Thomas Lemke, “Foucault, Politics and Failure: A Critical Review of Studies of Governmentality”, in Jakob Nilsson & Sven-Olov Wallenstein eds., Foucault, Biopolitics and Governmentality, Huddinge: Sodertorn University the Library, 2013 참조. 곧 주권적 권력이 전근대적인 또는 절대주의적인 군주정 시기의 권력 유형이라면, 규율 권력은 17세기 후반에, 그리고 생명 권력은 18세기 이후,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20세기에 등장한 권력이라는 식(따라서 마치 상호 대체의 연속적인 관계에 있는)의 역사적 서사를 제시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권력들은 계승 관계나 대체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전제하거나 강화하고 또는 갈등을 빚는 복잡한 연관망 속에서 작동한다. 가령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단순히 기업가 주체를 생산함으로써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규율 권력과 결합하기도 하고(예컨대 대학이 점점 기업화되고 기업에 필요한 인적 자원 양성소로 변화하는 것이나 사회 곳곳에서 점점 확산되는 인턴제도 같은 것 또한 분단 체계 속에 놓인 우리 사회 전반에 확산되어 있는 군사 문화 등이 그 사례가 될 것이다) 때로는 주권적 권력을 불러오기도 하며(중국의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는 시진핑이나 러시아의 푸친, 미국의 트럼프 등), 새로운 생명 권력과 결합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권력들이 동시에 그 권력에 고유한 주체화 양식들을 수반하는 것이라면, 대항 품행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이 권력들이 작동하고 결합되는, 또는 서로 갈등하는 방식에 대한 분석과 분리될 수 없다. 을의 을로서 성적 소수자들의 대항 품행, -예속화의 실천에 관한 질문의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다. 이를 위해 푸코의 이론은 필수적인 준거점이 되겠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조금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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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북사랑 2017-10-31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모르고 클릭했다가....출력해서 한 문장 한 문장 읽어야하는 글이었네요. 공유 감사합니다.

balmas 2017-11-01 01:26   좋아요 0 | URL
ㅎㅎ 예 감사합니다.

dldiddn8429 2017-11-03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늘도 많이 배워 갑니다!!

2017-11-04 17:22   좋아요 0 |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17-11-04 23:1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데리다 철학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말씀하신 그 논문은 지금 다듬고 있고, 내년 봄쯤에 학술지에 발표할 계획이니, 그때쯤이면 완성된 글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

dldiddn8429 2017-11-0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감사합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벌써 아시겠지만, 서교인문사회과학연구실에서 운영하는 "웹진 인무브"에 제가 번역한 


에티엔 발리바르의 [공산주의와 시민성: 니코스 풀란차스에 대하여]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이 글은 제가 번역하고 있는 발리바르의 {평등자유명제}(그린비 출판사 간행 예정)에 수록된 글입니다. 



그밖에도 "웹진 인무브"에는 여러 흥미롭고 유익한 글들이 많이 있으니 한번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http://en-movement.net/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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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고양이 2017-09-22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goo.gl/UV4Exq

혹시나 (저처럼) 진태원샘의 글을 두리번거리며 찾으시는 분들을 위해 찾아보았습니다. ^^;; (댓글에 하이퍼링크가 안 걸리면 복사&붙여넣기를...;;)
 

철학연구회에서 펴내는 [철학연구]에 수록될 논문 한 편 올립니다. 


여기 올리는 판본은 아직 교정이 완료되지 않은 판본이니 인용이나 토론을 원하는 분은 


[철학연구]에 실린 판본을 대상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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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폭력과 시민다움: 에티엔 발리바르의 반폭력의 정치에 대하여


 

1. 발리바르 폭력론의 문제설정

 

폭력이라는 문제는 자명한 문제이거나 무기력한 문제가 되기 쉽다.[이하 1절은 논의는 {폭력과 시민다움} [역자 후기]의 일부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폭력의 문제가 자명한 문제인 이유는, 폭력을 비판하거나 폭력에 반대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폭력이 현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문명 원칙인 인간의 권리,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폭력에 관해서는 기본적으로 비폭력이, 정치적 입장에 상관없이 가장 자명한 원칙으로 확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폭력의 문제가 무기력한 문제로 간주되는 이유는, 폭력이라는 것에 대해 딱히 대응할 만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폭력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이 가장 널리 의지하는 것은 법과 공권력이다. 그런데 만약 법과 공권력 자체가 또 하나의 폭력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곧 법과 공권력 자체가 지배를 위한 수단이거나 인권 및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또 다른 폭력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비단 내전이나 준 내전 상태와 같은 예외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아프리카나 중동 또는 남아메리카 사람들에게만 제기되는 질문이 아니다. 한국 현대사는 수많은 국가 폭력의 기억들로 점철되어 있거니와, 이른바 민주화 이후에도 이러한 국가 폭력의 자취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최근의 예를 든다면, 20144월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 당시 많은 사람들은 침몰해가는 배 안의 승객들에 대한 국가의 태만한 무관심에서, 냉혹한 폭력 기계 또는 치안 기계로서 국가의 모습을 목도한 바 있다(진태원 2015b 참조).


20세기 초에 이미 막스 베버가 국가를 적법한 (또는 적법하다고 간주되는) 폭력Gewalt이라는 수단에 기반하여 성립되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관계라고 규정했거니와, 독일의 비평가철학자였던 발터 벤야민은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벤야민 2008a)에서, 또 자크 데리다는 󰡔법의 힘󰡕(데리다 2004)에서 각각 불법적인 폭력 대 정당한 공권력이라는 구도가 지닌 허구성을 날카롭게 드러낸 바 있다.(진태원 2010 참조) 따라서 공권력 역시 불법적인(또는 불법적이라고 간주되는) 폭력과 다르지 않은 또 하나의 폭력이라면,[물론 이것은 정당한 권력과 부당한 권력, 권력과 폭력, 합법적 질서와 비합법적 무력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차이들이 근거하고 있는 토대가 자명한 것도 객관적인 것도 아니며, 단순히 역사적 상대성에 입각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2010)의 평주를 참조.] 폭력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수단은 또 하나의 폭력 이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폭력의 문제는 비폭력의 자명함과 대항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 사이에서 순환하는 듯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폭력의 문제를 현대 정치의 핵심 쟁점으로 간주하는 것은 다소 엉뚱한 발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Etienne Balibar)에 따르면 폭력의 문제, 특히 극단적 폭력의 문제는 정치라는 개념 자체의 개조”(Balibar 2010c, 42)를 요구하는 문제다. 역으로 말하자면, 발리바르의 폭력론은 그의 정치철학의 개념적 독창성 및 이론적 적합성을 측정해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 실제로 내가 보기에 폭력에 관한 발리바르의 사유는 동시대의 다른 철학자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독창성의 핵심을 이룬다.


첫 번째 독창성은 폭력의 문제를 맑스주의의 아포리아, 또는 맑스주의의 역사적 모순들이라는 문제와 긴밀하게 결부시켜 사고한다는 점이다. 폭력이라는 주제는 가령 데리다[특히 데리다(2004) Derrida(2003) 참조. 후자의 책은 국역본이 있지만(데리다 2003), 번역이 좋지 않아 참조하기 어렵다.]나 아감벤[특히 Agamben(1998); 아감벤(2008); Agamben(2005); 아감벤(2010) 참조.] 같은 철학자들의 정치사상의 핵심 주제를 이루고 있으며 두 사람 모두 폭력의 문제를 해방의 관점에서 사고하지만, 이들은 맑스주의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문제설정에 입각해 있다. 반면 발리바르는 게발트’: 맑스주의 이론사에서 본 폭력과 권력이라는 논문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글에서도 늘 맑스주의를 몰락하게 만든(따라서 그것이 재개되기 위해 해결되어야 하는) 아포리아라는 관점에서 폭력의 문제를 다룬다.[발리바르(2012) 참조. 사실 발리바르가 폭력에 관해 처음으로 발표한 글에서도 폭력의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의 아포리아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Balibar(2010c)에 수록된 Violence et politique: quelques questions참조. 이 글은 1992년에 처음 발표되었다.] 현대 정치철학의 동향에 대해 얼마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이, 여전히 맑스주의의 역사(그 쟁점들과 모순들)를 사고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이거니와, 폭력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그러한 역사를 고찰한다는 것은 맑스주의에 대한 오랜 천착과 더불어 상당한 지적 용기가 수반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발리바르 폭력론의 첫 번째 독창성은 폭력의 문제를 맑스주의의 역사적 모순의 핵심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찾아야 마땅할 것이다.


둘째, 폭력의 문제를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들이라는 관점에 따라 사고한다는 것이 발리바르 폭력론의 또 다른 특징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폭력을 대항폭력이나 비폭력의 관점에서 다루지 않고 ()폭력의 문제설정에 따라 사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슬라보예 지젝이나 알랭 바디우 같은 이론가들의 저술에서 볼 수 있듯이 폭력을 대항폭력의 문제로 간주하는 것은 사실은 폭력을 하나의 독자적인 이론적 문제로 간주하지 않음을 의미한다.[특히 지젝(2011) 참조. 지젝과 발리바르 폭력론을 비교하고 있는 김정한(2011)도 참조. 김정한이 발리바르의 폭력에 관한 글이 많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폭력과 시민다움󰡕의 존재를 간과한 발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폭력의 문제를 대항폭력의 문제로 간주하게 되면, 가능한 두 가지 선택지가 남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자연주의적 관점으로,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정치의 문제는 순수한 힘의 문제가 된다. 자연 생태계 속에서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지배하듯이 인간 역사 속에서도 두 개(또는 그 이상)의 세력들 사이의 무력 다툼만이 존재할 뿐이며, 거기에는 아무런 궁극적인 정당성이나 부당성의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또는 정당성이나 부당성의 문제를 최종 심급에서 결정하는 것은 힘의 크기다). 고전적인 맑스주의로 대표되는 다른 관점은, 지배 세력의 구조적 폭력에 맞서는 피지배자들의 폭력적인 저항은 정당하며, 특히 자본주의적 폭력에 맞서는 노동자 계급 및 피지배 계급들의 대항 폭력은 언제나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대항 폭력은 착취 없고 지배 없는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정당한 목적이 수단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것이다.[이는 사실은 1950년대 이후 사르트르가 대표했던 관점이기도 하다. 폭력의 문제를 둘러싼 사르트르와 카뮈의 논쟁에 대해서는 베르네르(2012). 또한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진보적 폭력의 가능성을 옹호하지만 좀 더 미묘한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입장에 대해서는, 메를로-퐁티(2004) 참조.] 따라서 폭력은 수단 내지 전술의 문제일 뿐 독자적인 이론적 대상을 이루지는 않는다. 이러한 관점은 명시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을지 몰라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당수의 좌파 이론가들이나 활동가들이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관점이다. 그런데 발리바르는 바로 이러한 관점 속에서 맑스주의를 역사적 몰락으로 이끈 궁극적인 원인 중 하나를 발견한다.


반대로 비폭력의 관점은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폭력 그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금기시한다. 비폭력의 입장에서 보면 폭력은 악의 구현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곧 비폭력의 관점은 목적이 정당한 것이든 부당한 것이든 간에 폭력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고 악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비폭력의 관점 기저에 존재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선악 이분법이라고 할 수 있다.[반대로 악에 맞서 인간의 존엄성 내지 인권을 옹호하려는 이러한 비폭력적인 입장에 반대하여 선의 존재론적 우선성에 기반을 둔 윤리학(및 따라서 선에 근거한 폭력의 정당성)을 옹호하려는 알랭 바디우(내지 그와는 다소 다른 관점이기는 하지만 슬라보예 지젝) 같은 입장도 존재할 수 있다. 발리바르는 폭력과 시민다움에서 이러한 관점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다. 발리바르(2012), 150 이하.]  하지만 발리바르는 폭력은 역사의 동력중 하나이며, “고유한 창조성’”(발리바르 2012, 124)을 지닌다고 보기 때문에, 폭력을 무차별적인 비난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비폭력의 관점에 대해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다만 간디가 주창했던 비폭력 운동의 경우 그것은 제국주의적 지배와 폭력에 맞선 정치 투쟁의 한 형태를 이룬다는 점에서 시민다움civilité의 한 전략으로서 독자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으며, 가령 레닌(또는 마오) 같은 사람이 발전시킨 바 있는 맑스주의 전통 내의 시민다움 전략과 대조해볼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Étienne Balibar, “Lénine et Ghandi”(Balibar(2010c)에 수록) 참조. 또한 간디와 마오의 공통점을 지적하고 있는 Balibar(2011)도 참조.]


이러한 관점들과 달리 발리바르는 폭력의 문제를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라는 문제로 다룬다. 이것은 곧 폭력의 문제는 정치라는 일차적인 수준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과 관련된 이차 수준의 쟁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차 수준의 쟁점이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는 이렇다. 정치(특히 고전적인 의미에서 해방의 정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가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프롤레타리아이든 민중이든 아니면 시민이든 간에, 정치를 수행할 수 있는 주체가 성립하지 않는 한 정치가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발리바르가 보기에 폭력, 특히 그가 극단적 폭력extrême violence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폭력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을 잠식하고 더 나아가 파괴하는 폭력이다. 따라서 정치적 주체를 성립 불가능하게 만드는 극단적 폭력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또 그것을 제거하거나 적어도 감축할 수 있는 실천적 해법을 모색하지 않은 가운데 해방의 정치를 주장하거나 새로운 주체 형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는 공문구에 그치기 십상이다.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알튀세르가 이론화한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경유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극단적) 폭력이라는 훨씬 더 까다로운 문제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 마지막으로 발리바르 폭력론의 또 다른 특징은 반()폭력의 문제를 새로운 민주주의 정치의 발명의 문제와 연결하여 사고한다는 점이다. 사실 폭력과 대항폭력의 이항 대립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발터 벤야민 이후, 또 한나 아렌트[이런 관점에서 중요한 저작은 폭력론이라기보다는 󰡔전체주의의 기원󰡕이다. 어떤 의미에서 발리바르는 󰡔전체주의의 기원󰡕의 관점에서, 폭력론󰡔혁명론󰡕, 󰡔인간의 조건󰡕에서 제시된 아렌트의 몇몇 보수적인 테제를 탈-구축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폭력론(아렌트(2011)에 수록) 및 아렌트(2006) 참조. 아렌트에 대한 발리바르의 독해로는, 폭력과 세계화: 시빌리테의 정치는 가능한가?(발리바르(2010) 7) “Arendt, le droit aux droits et la désobéissance civique”(Balibar(2010b)에 수록)을 각각 참조.]나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들뢰즈와 가타리의 폭력론은 󰡔신학정치론󰡕 「서문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유명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실로 군주정 체제의 최고의 비밀monarchici summum arcanum, 그 주요 관심사는, 사람들을 기만하고, 그들을 매어놓아야 할 두려움을 종교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은폐하여, 사람들이 마치 자신들의 구원을 위한 것인 양 자기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게 만들고, 한 사람의 영예를 위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명예인 것처럼 간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Spinoza(1925), 7. 이 질문은 󰡔()오이디푸스󰡕의 화두이자 또한 󰡔천 개의 고원󰡕의 핵심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사람들은 여러 세기 동안 착취와 모욕, 예속을 감내해 왔으며,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해 착취와 굴종, 예속을 원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라이히가 파시즘을 설명하기 위해 대중들의 몰인식이나 미망에 의지하는 것을 거부하고, 욕망에 의한, 욕망의 견지에서 이루어지는 설명을 요구했을 때, 그는 사상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다. 아니 대중들은 속지 않았다. 그 순간, 그 상황에서 그들은 파시즘을 욕망했고, 해명될 필요가 있는 것은 군중 욕망의 이러한 도착이다.” 들뢰즈가타리(2014) 64-65(강조는 들뢰즈-가타리가 한 것이고 번역은 약간 수정했다).], 자크 데리다(데리다(2004) 및 데리다(2014) 참조) 이후 현대 폭력론의 공통의 과제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이항대립의 극복이 중요한 이유는 현대 정치철학이 역사적 맑스주의의 몰락과 파시즘(또는 전체주의’)의 유령이라는 20세기의 두 가지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고 있기 때문이다.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마르크스주의가 프롤레타리아운동이자 계급투쟁이론이라는 자신들의 토대 위에서 나치즘과 대결하는 데 무력했으며, 나치즘을 분석하고 나치즘이 위력적인 이유들을 이해하는 데 무능력했(발리바르(2010), 188. 강조는 발리바르.)기 때문에 이 두 가지의 유산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 가지의 유산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맑스주의를 포함하는 해방의 정치가 어떻게 그 자신의 관점에서, 그리고 그 자신의 토대 위에서 파시즘을 물리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 유산을 (데리다 식으로 표현하면) 상속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수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맑스주의가 그 본질적인 한계 때문에 파시즘과의 대결에서 무능력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한계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수의 해석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또한 그러한 한계를 지양하거나 전위(轉位)시키려는 다수의 실천 전략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리바르의 독창성은, 거의 대다수의 현대 철학자들이 반()국가적인 관점, 더 나아가 반()제도적인 관점을 택하고 있는 데 반해(가령 바디우, 랑시에르, 아감벤, 네그리, 지젝 등[현대 정치철학에서 반()국가적 관점 및 메시아주의적 관점에 대한 비판적 토론으로는 Dean & Villadsen(2016) 참조. 국내의 논의로는 진태원(2012) 및 진태원(2014)를 각각 참조.]), 파시즘과의 대결이라는 문제, 더 나아가 극단적 폭력의 퇴치라는 문제를 시민권 제도의 쇄신 내지 재발명의 문제와 결부하여 사고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시민권 제도야말로 폴리테이아politeia, 곧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본질을 이루며, (정치적) 주체화의 핵심 메커니즘을 구성한다는 발리바르의 깊은 이론적 신념에서 비롯하는 생각이다. 반폭력의 정치가 오늘날 진보 정치의 근본 과제 중 하나를 이룬다면, 그것은 극단적 폭력의 메커니즘이 폴리테이아 또는 시민권 헌정 내부에서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을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며, 역으로 시민권의 재발명이라는 과제가 반폭력의 정치를 위한 조건을 이룬다면, 그것은 시민권의 재발명 없이 정치적 주체화를 사고하고 실천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반폭력의 문제는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중핵을 이루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 극단적 폭력 개념

 

반폭력의 정치철학의 두 가지 이론적 핵심은 극단적 폭력과 시민다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극단적 폭력은 몇 가지 개념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2.1.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는 폭력

 

극단적 폭력은 우선 정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념과 연결되어 있다. 이 경우 정치는 개인들과 그들이 일부를 이루는 공동체 사이의 상호관계를 설립하는 근본적인 양식, 즉 개인들을 집단화하고 역사적 집합체의 성원들을 개인화하는 (물질적이자 상징적인) 양식(발리바르 2012, 101)으로 규정된다. 이처럼 넓게 정의된 정치에는 맑스주의적인 혁명적 정치만이 아니라 자유주의적인 정치까지 포함된다.


앞서 말했듯이 발리바르에게 폭력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맑스주의적인 정치, 곧 혁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게발트라는 논문에서 극단적 폭력의 문제를 다루는 맑스의 두 가지 방식 사이의 긴장을 강조한다. 한편으로 맑스는 극단적 폭력을 “‘자연화하려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원인과 결과의 연쇄 속으로 통합’”(발리바르 2012, 37)하려고 시도한다. 이 경우 극단적 폭력은 일차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이 지닌 허무주의적인 차원을 지칭하게 된다. 곧 맑스는 자본주의는 이전의 생산양식과 달리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해 자신들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프롤레타리아트]의 삶과 재생산 조건을 파괴하고, 그리하여 부르주아지 자신들의 존재 조건을 파괴하게 된다”(발리바르 2012, 42)고 간주한다. 이는 특히 󰡔자본󰡕 1권의 노동일에 관한 분석이나 기계와 대공업에 관한 분석에서 잘 드러나듯이 자본주의적인 착취가 경향적인 과잉착취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점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로부터 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살아 있는 원천, 곧 대지와 노동자를 파괴함으로써만 사회적 생산과정의 기술과 결합을 발전시킨다”(발리바르 2012, 44)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고유한 이러한 극단적 폭력의 경향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연성이 정당화된다. 그렇다면 맑스는 극단적 폭력의 문제를 적대적인 두 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의 변증법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한 계기로 간주하는 셈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맑스는 극단적 폭력에서 정치의 실재le réel de la politique라고 불릴 수 있는 것, 즉 정치에 비극적 성격을 부여하는 예견 불가능한 것 내지 계산 불가능한 것”(발리바르 2012, 37. 강조는 발리바르)을 발견하려고 시도한다. ‘정치의 실재라는 라캉적인 정식화가 시사하는 것은 자본주의적인 극단적 폭력에 대하여 그 적대자들이 맞세우는 혁명적 폭력이 과연 극단적 폭력을 종식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맑스가 다분히 회의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노동자 계급의 투쟁에 압력을 받아 국가가 자본에 대하여 개혁을 강제하는 길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시초 축적이 산출하는 과잉착취와 극단적 폭력의 효과를 주변부로 수출할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불가피성이라는 생각에 전제되어 있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극단화 경향이 다른 수단들을 통해 완화되거나 우회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러나 더 결정적인 것은 과연 혁명의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를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라는 의문이다. 맑스 자신이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에서 보여주었듯이 루이 보나파르트의 집권을 가능하게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룸펜프롤레타리아의 지지였다. 자본주의에 고유한 궁핍화 과정의 산물인 프롤레타리아 또는 적어도 그 중 일부는 이러한 궁핍화 과정 및 착취에 맞서 조직적으로 저항하기보다는 자본과 그 대표자들의 지지자로 변모한 것이다. 또한 이후의 맑스주의 이론가들은 문화산업론(프랑크푸르트학파), 이데올로기론(알튀세르), 통제사회론(들뢰즈) 등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발적 예속의 효과를 낳는 예속적 주체화 작용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게 된다. 그렇다면 노동자 계급의 주체화, 곧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로의 전화는 무한정하게 멀어지는 지평으로, 그럴 법하지 않은 반경향으로, 심지어 역사의 진행과정에 대한 기적적인 예외로 나타”(발리바르 2012, 56)나게 된다고 말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더욱이 게발트라는 것이 마음대로 활용 가능한 도구인가라는 질문도 제기된다. 이 문제는 혁명적 계급의 조직화라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노동자 계급을 혁명적 주체로 전화시키기 위해서는 조직화가 필수적이고 조직화를 위해서는 노동자 조직, 특히 노동자 정당이 불가결하지만, 이러한 정당이 어떻게 부르주아 국가장치의 일부가 아닐 수 있는가, 또는 국가장치의 전도된 거울 이미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는 매우 어려운 문제다. 그리고 실로 19세기 말 노동자 계급 정당이 등장한 이래, 또한 러시아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가 지배 계급으로 구성된 이래, 맑스주의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결국 붕괴에 이르게 만든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이 문제가 아니었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1970년대 말-80년대 초에 발리바르 연구의 중심 주제를 이루었던 것이 바로 이 문제들이다. 이 주제에 관한 발리바르의 탐구는 특히 다음 연구에 집약되어 있다. “La vacillation de l'idéologie dnas le marxisme”(Balibar(1997)에 수록). 이 글의 국역본은 맑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의 동요(발리바르(2007)에 수록)인데, 번역에 다소 문제가 있다. 이 시기 발리바르 이데올로기론에 관한 논의는 서관모(2011)을 참조.] 


자유주의 정치의 경우 극단적 폭력이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문제, 일차적으로는 자유주의 국가의 이중적인 본성에서 생겨나는 문제다. 곧 자유주의 국가는 한편으로 근대 민주주의의 보편주의적 측면을 구현하는 국가로, 보편적 인권과 시민권을 제도화하고 성원들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 국가는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국가이며, 이러한 이익을 위해 언제든지 치안 기계로 전화될 수 있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국가는 법치국가이지만 또한 치안국가이기도 하다. 개인들과 집단들을 시민들의 공동체로 통합하는 국가이지만 또한 반항자, 비정상인, 일탈자 및 이방인들을 배제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사회국가이지만 또한 자본주의 시장 및 그 불굴의 인구 법칙과 유기적으로 결합된 계급국가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적이고 문명화된 국가이지만 또한 무력국가이자 식민주의적제국주의적 국가이기도 하다. 잠재적이지만 때로는 공개적인 방식으로 극단주의는 단지 주변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또한 중심에 위치해 있다.(Balibar(2010c), 328. 강조는 발리바르)

 

더 나아가 이는 근대 민주주의 정치체에 고유한 배제라는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다. 이는 근대 민주주의의 병리성이나 이런저런 특수성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보편주의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다시 말하면 근대 민주주의는 그것의 고유한 보편주의적 원칙으로 인해 이전의 정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근본적인 배제를 산출한다. 이는 외연적 보편주의와 내포적 보편주의의 두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이 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발리바르(2010) 4공동체 없는 시민권?“Arendt, le droit aux droits et la désobéissance civique”(Balibar(2010b)에 수록) 참조. 또한 이에 관한 평주는 진태원(2011) 및 진태원(2013b)을 각각 참조.] 외연적 보편주의의 측면에서 보면 근대 민주주의 정치체는 단순히 약탈이나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선교나 문명화의 관점에서 식민화를 추구했지만, 식민지의 비유럽적인 인민들은 같은 국민들로 포섭되었음에도 본국의 시민들과 동일한 시민의 지위를 누리지 못했다. 따라서 동일한 정치체 내에 법적으로 동등한 시민이기는 하되 또한 불평등한 시민들이 존재한다는 점이 바로 외연적 보편주의가 산출하는 배제의 양상이다. 하지만 좀더 심각한 것은 내포적 보편주의의 측면인데, 발리바르가 말하는 내포적 보편주의는 인권선언에서 구현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것, 곧 평등=자유라는 명제를 가리키며, 또한 그것과 내재적으로 연결된 인간=시민 명제, 곧 인간은 무매개적으로 시민이라는 명제를 가리킨다.(진태원 2013a 참조) 문제는 근대 민주주의를 정초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평등자유명제에 따라 모든 사람은 그가 사람인 한에서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시민으로 존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 성립한다고 해도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원리가 근대 국민국가 체제에서는 그가 시민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만, 곧 특정한 정치체에 속하는 특정한 국민적 시민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만 실효성을 얻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보여준 바 있듯이 모든 인간은 그가 어떤 국가의 국적을 갖고 있지 않는 한에서는, 곧 그가 이러저러한 국민이 아니고, 따라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들을 누리지 못하는 한에서는 실제로는(잠재적으로는) 인간성을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진태원 2011, 188) 이것은 근대 보편적 민주주의에 고유한 배제 형식이며, 인권선언또는 그 핵심으로서의 평등자유명제의 아포리아를 구성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인권선언은 아주 근본적으로 평등주의적인 것이어서 모든 특수한 차별받는 사람들 또는 배제된 사람들(프롤레타리아, 식민지인, 여성, 오늘날의 이주민)이 기성 질서에 맞서 투쟁할 때 이를 원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근대 역사에서 바로 이러한 인권선언의 기치 아래 이 배제들이 유지되어 왔고 또 강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평등자유의 사회에 선행했던 어떠한 신분 또는 위계 사회에서도 우리 사회에서와 같은 절대적인 배제 형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곧 사회가 위계화되어 있고 불평등한 자유의 원리에 따라 기능할 때에는 정치 참여 또는 기본권이 부재한 사람들을 굳이 인간 종에서 배제할 필요가 없으며, 또는 그들을 열등한 인간들로 전환시킬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Balibar 2010a, 12)

 

극단적 폭력이 근대 민주주의 또는 근대 문명 바깥의 어떤 특정한 예외적 상황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근대 민주주의 문명의 중심에 놓여 있다고 보는 이러한 생각은 벌거벗은 생명 및 주권적 폭력에 관한 아감벤의 관념과 얼마간 공명하면서도 또한 그러한 관념과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데, 이점에 관해서는 뒤에서 좀 더 부연하겠다.

 

2.2. 주체의 가능성을 잠식하는 폭력

 

극단적 폭력이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는 폭력이라면, 이는 이러한 폭력이 주체성의 가능성을 잠식하거나 와해시키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발리바르는 이를 저항의 문제와 관련시키고 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저항이란 기성 질서에 반대하고 불의에 맞서 정의를 옹호하는 부정적인 또는 소극적인 의미의 저항을 넘어 능동적 주체성과 집합적 연대가 형성되는 장소라는 적극적 의미의 저항”(발리바르 2012, 118)을 가리킨다. 그는 이러한 의미의 저항에 대한 철학적 정식화를 스피노자에게서 찾는다. 이는 생존해 있는 모든 개인에게 포함되어 있는 억압 불가능한 최소라는 생각, 곧 개인성 자체는 근본적으로 관개체적(transindividual)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하면 스피노자에게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개인들의 능력을 이루는 것, 단적으로 말하면 개인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개인이 항상 이미 다른 개인들(이들은 개인 자신의 일부를 이루고있으며, 개인 자신 역시 다른 개인들이라는 존재의 일부를 이룬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총화”(발리바르 2012, 119)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극단적 폭력은 한 가지 방식으로만 실행되지 않는다. 발리바르는 특히 극단적 폭력의 두 가지 형태를 제시한다. 우선 그가 초객체적 폭력ultra-objective이라고 부르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는 인간 존재자들을 상품의 세계 속에서 마음대로 제거될 수 있고 도구화될 수 있는 사물의 지위로 환원”(발리바르 2012, 129)하는 폭력이며, “극단적인 빈곤과 기근 및 기타의 소위 자연적재앙들(전염병, 가뭄, 홍수나 지진 같은 재난시 사회적 보호망의 부재 등. 지역에 따라서 아주 불균등하게 인명 피해 효과를 낳는 이런 현상들에는 그 명칭 말고는 자연적인것이 전혀 없습니다)”(발리바르 2010, 244)을 통해 표출되는 폭력이다. 또한 그가 초주체적ultra-subjective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도 존재하는데, 이는 “‘의 세력을 일소한다는 기획의 집행자, 즉 주권적 권력의 광기에 개인과 공동체를 제물로 바”(발리바르 2012, 129)치는 폭력이다. 이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나 아프리카 내전 등을 통해 격렬한 형태로 표출된 바 있는 증오의 이상화를 낳는 폭력이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증오의 이상화는 자기 내부에 있는 타자성과 이질성의 모든 흔적을 제거함으로써 동일성을 순수하게 구현하려는, 심지어 자기 자신을 파괴하면서도 그것을 구현하려고 하는 맹목적이고 (구체적인 개인들 및 집단들의 의지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초주체적인 의지 작용이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 정상적인 개인 주체들로 하여금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종교라는 이름 아래 어제까지 같이 살던 이웃에게 총부리를 겨누거나 심지어 성폭력을 통해 다른 민족 내부에 자신들의 씨앗을 남기려는 끔찍한 잔혹성을 실행하게 만드는 극단적인 폭력의 힘, 그것이 바로 발리바르가 말하는 초주체적 폭력이다.


이 두 가지 형태의 폭력은 인간 주체를 상품이나 사물 또는 일회용 인간으로 환원하거나 아니면 무의식적인 충동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어떤 초주체의 의지를 집행하는 단순한 대행자(또는 자발적 예속의 주체)로 환원함으로써, 합리적인 정치적 행위의 가능성을 잠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극단적 폭력의 형태가 서로 구별되기는 하지만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하는 것이 중요하다. 초주체적 폭력과 초객체적 폭력은 다른 여러 폭력들과 함께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이를 가장 절절하게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발리바르가 인용하는 피에르 세나르클랭이라는 인도주의의 활동가의 아프리카 상황에 대한 보고문이다. 발리바르(2010), 249.]


2.3. 전환 불가능한 폭력

 

또한 극단적 폭력은 전환 불가능한inconversible 폭력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폭력의 전환이나 전환 가능성이라는 관념은 근대 정치 문명에 고유한 관점으로, 발리바르는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이러한 관념이 가장 뚜렷하게 제시되어 있다고 간주한다. 발리바르가 전환conversion이라고 부르는 것은 폭력이 (역사적으로) 생산적인 힘으로 전화되는 것, 파괴력으로서의 폭력의 소멸과 제도들의 내적인 에너지 내지 역량으로서의 재창조를 의미”(Balibar 2010c, 61)한다. 헤겔에게서 폭력의 생산력으로의 전환은 역사에서의 이성, 따라서 역사적 목적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은 역사적 목적론을 단순히 비난하거나 처음부터 기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헤겔의 역사적 목적론의 핵심은 우연의 제거로서의 역사”(Balibar 2010c, 73)라는 관념이다. 역사를 우연의 제거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은 고대적인 섭리론이나 운명론과 대립하는 근대적인 합리성의 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정확한 의미에서의 섭리나 운명이란 자연적인 필연성에 거스르거나 그것을 파열하면서 실현되는 외재적인 또는 초월적인 힘을 뜻하기 때문이다. 반면 헤겔 식의 역사적 목적론은 역사 과정에 내재적인 필연성을 뜻한다. 곧 겉보기에는 비합리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작용이나 힘들이 사실은 어떤 내재적인 경향이나 목적의 실현 방식이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 헤겔의 역사철학이다. 그런데 헤겔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향이나 목적 또는 역사의 의미가 이미 시초부터 존재하고 있었다고 전제하거나 아니면 먼 장래에 이러한 목적이나 의미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예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역사에 내재하는 목적들은 그것들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수단들(인간, , 의지, 제도)과 동일한 현재내부에서 생산된다는 것”(Balibar 2010c, 74)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 과정의 시초에는 역사적 필연성 내지 목적과 부합하지 않는 수많은 우연들로 가득 차 있지만,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 또는 정치적 제도 등과 같은 수단들을 통해 이러한 우연성을 제거하고 역사의 목적과 부합하는 방향으로 역사가 진행되게 하는 것이 바로 우연의 제거로서의 역사가 뜻하는 바이다. 헤겔은 프랑스혁명 이후 법치국가(또는 인륜적 국가)의 구성을 통해 결국 인류가 우연의 전면적인 제거에, 곧 역사적 목적의 실현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발리바르가 폭력의 전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헤겔 식의 역사적 목적론이 더 이상 유지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더 이상, 과거나 현재에 산출되었고 또한 산출되고 있는 수많은 폭력, 특히 극단적 형태를 띠는 폭력들이 역사적 진보를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라는 생각이나, 무의미한 폭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어쨌든 적어도 그러한 폭력들은 궁극적으로 역사의 진보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발터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9번째 테제에서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벤야민 2008b, 339)으로 역사를 묘사하면서도, “과거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비밀스러운 합의 ... 약한 메시아적 힘”(벤야민 2008b, 336)에 대해 말할 때, 벤야민은 이러한 불가능성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함축하는 실천적 결과를 극복할 수 있는 인식론적 수단을 (절망적으로) 찾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2.4. 합리성을 초과하는 폭력

 

따라서 극단적 폭력의 전환 불가능성이라는 관념에 깔려 있는 생각은 합리성 자체 내부에 환원할 수 없는 비합리성의 잔여가 존재한다는 점,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화의 형식과 제도 자체에 인간에 의한(곧 사회문화에 의한) 인간적인 것의 생산인간에 의한 인간적인 것의 파괴가 공존한다는 점, 극한적으로는 서로 식별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발리바르 2012, 130. 강조는 발리바르)이다. 이로부터 극단적 폭력의 현상학이라는 생각이 나온다. 발리바르는 폭력의 현상학에서 극단적 폭력의 세 가지 측면을 강조한다. 첫 번째는 인간에게 고유한 저항 가능성이 소멸되고 인간이 사물화되는 현상이다. 그는 시몬 베이유의 󰡔일리아드󰡕에 대한 주석에 의거하여 이를 설명한다. 베이유에 따르면 극단적 폭력은

 

죽이지 않는 힘, 곧 아직은 죽이지 않는 힘 ...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을 사물로 만드는 권력[이다]. ... 죽지도 않는 가운데 생애 내내 사물이 되어버리는 가장 불운한 존재들도 있다. 그들의 나날에는 어떤 놀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 자신의 내면에서 생겨나는 것을 위한 어떤 여지도, 어떤 빈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도, 다른 이들보다 사회적으로 더 아래쪽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다. 그들은 다른 종류의 인간, 인간과 시체의 타협물이다. ... 죽음이 끝장내기 이전에 이미 얼어붙게 만드는 그런 삶인 것이다.(발리바르 2012, 105)

 

이처럼 살아 있는 사람을 사물처럼 만드는 폭력의 기저에 존재하는 두 번째 측면은 죽음보다 더 나쁜 것으로서의 삶이라는 측면이다. 이것은 고문을 당하는 사람이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경우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지만, 발리바르가 세네갈 출신의 철학자 아쉴 엠벰베를 원용하여 지적하듯이 식민지나 포스트식민지에서 끝없이 계속되는 폭력의 상황에서 존속하는 삶의 경우에도 찾아볼 수 있다.


극단적 폭력의 현상학의 세 번째 측면은 목적 합리성, 효용성을 초과하는 것으로서의 폭력이라는 측면이다.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는 아무런 사회적 효용성도 없고 경제적 합리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무익한 낭비에 불과함에도 대대적인 비용을 들여서 유대인 대학살을 모의하고 실행하는 경우가 대표적이거니와, 합리적인 효용과 무관하게 심지어 자기 손해나 자기 파괴를 무릅쓰면서 감행되는 폭력이 나타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든 바로 극단적 폭력의 이 세 번째 측면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극단적 폭력이 자양분으로 삼고 재생산하는 전능함의 환상, 극단적 폭력이 그 희생자들을 무기력으로 환원하는 것(극단적 폭력의 내재적 목표가 바로 이것이다) 사이에 상호연관성이 존재”(발리바르 2012, 112)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상호연관성에는 폭력의 대상을 이루는 희생자들이 폭력에 감염되는 차원”(발리바르 2012, 112)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은 우리 시대에 자살폭탄테러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공포감을 통해 대표적으로 나타나듯이, 제국주의적 폭력과 그에 맞선 절망적인 대항폭력 사이의 악순환과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프리모 레비가 회고록에서 묘사한 바 있고 지그문트 바우만이나 조르조 아감벤이 나치즘에 관한 자신들의 분석에서 각자 분석한 바 있는, 도살자와 희생자 사이의 구별 불가능성이라는 문제 또는 희생자 자신을 도구로 삼아(이른바 특수부대’) 희생자를 도살하는 잔혹한 폭력의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극단적 폭력이 합리성을 초과하는 폭력이라면, 이는 극단적 폭력에 의해 개인의 삶과 인간의 문명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규범들이 애매해지거나 식별 불가능해진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으며, 역사적 진보는 고사하고 목적 합리성과도 무관한, 따라서 경제적 효용이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자행되는 폭력들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이는 극단적 폭력이 의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무의식의 차원, 특히 환상의 차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이 때문에 극단적 폭력에 대한 분석에서는 정신분석(여기에는 자캉 라캉과 앙드레 그린 같은 정신분석가만이 아니라 조르주 바타이유,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자크 데리다 같이 정신분석에 관한 탐구를 수행하는 철학자이론가들의 작업도 포함된다)에 대한 준거가 본질적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Étienne Balibar, “Violence: idéalité et cruauté”(Balibar(1997)에 수록) 참조. 이 글의 번역본은 폭력: 이상성과 잔혹(발리바르(2007)에 수록)인데, 번역에 다소 문제가 있다. 또한 Balibar(2010c) 1부 두 번째 강의도 참조.] 물론 이 때의 환상은 순전히 심리학적인 의미의 환상, 곧 주관적인(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개인적인) 망상이나 공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이고 관개체적인(Balibar 2011, 227)환상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에서 극단적 폭력이 합리성을 초과한다는 것이 함축하는 또 다른 의미가 드러난다. 그것은 극단적 폭력은 그 인과관계를 분석하기가 어려운 폭력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어떤 사태의 인과관계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태의 원인이 정확히 식별될 수 있어야 하는데, 극단적 폭력의 특징은 관찰 가능하지만 그 원인(대개 중요하고 궁극적인 원인)부재하는효과들의 구조”(발리바르 2012, 129)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발리바르는 극단적 폭력에 대한 구조적 분석이나 인과적 설명 대신에 일종의 현상학적 기술을 제안하고 있다.[하지만 이러한 폭력의 현상학이 인과관계에 대한 분석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실증적인 차원에서 완결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가리킨다.]

 

3. 시민다움의 전략

 

시민다움에 관해서는 간략하게 몇 가지 핵심적인 윤곽만 제시해보겠다.[시민다움의 전략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2015a)를 참조.] 발리바르는 극단적 폭력을 중심으로 한 폭력에 맞서는 정치, 곧 반()폭력의 정치를 시민다움의 정치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반폭력의 정치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전적인 부르주아 정치 또는 근대 민주주의 정치로서의 해방의 정치와 맑스주의적인(또는 푸코적인) 변혁의 정치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정치를 이루고 있다.[Étienne Balibar, “Trois concepts de la politique: Émancipation, transformation, civilité”(Balibar(1997)에 수록). 이 논문의 국역본(발리바르(2007)에 수록)에서는 논문 제목이 정치의 세 개념: 해방, 변혁, 시민 인륜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시민 인륜이라는 번역어를 시민다움라는 표현으로 대체했다. 그 이유는 봉건적인 도덕 질서를 가리키는 인륜이라는 용어를 발리바르가 말하는 civilité 개념에 대해 사용하는 것은 (시민이라는 한정이 붙는다 해도) 얼마간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시민다움이라는 번역어에 대한 제안은 역자 후기: 수구 세력이 반역을 독점하게 만들지 말자(발리바르(2011)에 수록) 참조. 그렇다고 해도 발리바르 자신이 말하듯이 civilité라는 개념 자체가 기본적으로 번역 불가능한 용어라는 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Balibar et al.(2015)(이 좌담은 발리바르의 폭력론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 Rue Descartes nos. 85~86, 2015에 수록된 것이다) 참조. 곧 이 개념의 번역은 독자적인 개념적 발명의 작업이 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여전히 새로운 개념적 발명의 가능성들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 곧 해방의 정치 또는 정치의 자율성은 인권선언을 비롯한 고전적인 시민혁명 내지 부르주아 혁명을 정초하는 문헌들에서 잘 나타나듯이 인간 집단(인민이나 국민, 국가 또는 인류 등과 같은)이 이제는 어떠한 자연적이거나 초월적인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권위 및 역량에 기초하여 자기 자신을 통치한다는 정치의 권리 선언에 준거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변혁의 정치 또는 정치의 타율성은 정치를 규정하는 (물질적상징적) 조건들, 특히 지배 구조 및 권력 관계들의 변혁을 중심적인 대상으로 삼는 정치를 의미한다(발리바르는 맑스와 푸코를 변혁의 정치의 대표자로 제시한다). 반면 시민다움의 정치는 행위자들 사이의 인정과 소통, 갈등의 조절을 가로막는 극단적 폭력의 형태들을 감소시킴으로써 정치적 활동(그 실행의 시간공간’)의 가능성의 조건들 자체를 생산하는 것”(발리바르 2010, 229)을 목표로 삼는다.


시민다움의 정치에 관해서 발리바르는 세 가지의 전략을 구별한다. 우선 헤겔의 지틀리히카이트Sittlichkeit 개념[이 개념은 임석진 교수가 인륜성이라는 번역어를 제안한 이래로 국내 헤겔학계에서는 대부분 인륜성으로 번역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말의 인륜 내지 인륜성이라는 용어가 전근대적인 도덕적 질서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데 반해, 헤겔의 지틀리히카이트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근대적인 도덕성 및 개인성을 전제하고 그것을 지양하려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 번역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개념을 그냥 음역해서 사용하겠다.]을 통해 고전적으로 표현된 바 있는 헤게모니의 전략이 존재한다. 발리바르가 이를 그람시의 용어법을 빌려 헤게모니의 전략이라고 부른 이유는, 헤겔의 지틀리히카이트 개념이 표현하는 것이 의고적 민족주의나 심지어 유기체론적인 전체주의가 아니라 하버마스가 제안한 바 있는 헌법애국주의Verfassungspatriotismus와 유사한 것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곧 지틀리히카이트를 구현하는 헤겔 식의 국가는 시민들의 공동체로 간주된 근대적인 국민국가다. 이러한 의미로 이해된 국민국가는 가족 및 친족과 같은 일차적 공동체에 대한 속박에서 개인들을 해방시켜 국가 자신이 조직하는 이차적 공동체(, 공공성과 관련된)로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또는 법치국가의 헤게모니 아래 근대적 다원성을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재구성하는 헤겔의 정치철학은 오늘날 많은 헤겔 연구자들의 관점과 더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가령 Siep(1982), Kervegan(2008), Pippin(2008), 7-8, 김준수(2012)를 각각 참조.] 그럼에도 발리바르는 헤겔 식의 헤게모니 전략은 여러 가지 난점을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가령 헤겔은 일차적 동일성에서 개인을 분리시켜 이차적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해방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폭력적인 과정(푸코적인 의미에서 규율적 폭력이면서 부르디외적인 의미에서 상징적 폭력인)이라는 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근대적인 헌정국가는 동시에 허구적 민족성에 기반을 둔 국민적인 국가, 따라서 본래적인 배제와 차별을 함축하는 국가라는 점 역시 간과하고 있다. 아울러 헤겔 식의 시민다움 개념은 공과 사의 구별에 관한 지나치게 규범적인 관점, 곧 사적 영역에 대하여 정상성을 강제하는 관점에 입각해 있다는 점 역시 중요한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발리바르는 두 개의 상이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는 이것을 각각 다수자 전략소수자 전략이라고 명명한다. 다수자 전략은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고전적인 해방 운동에서 나타나는 주체화의 전략이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전략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근본적인 아포리아를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아포리아의 핵심에는 피지배자들의 다수-되기가 존재하는데, 발리바르의 이 개념을 피지배자들의 비지배적인 주체-되기라는 문제로, 곧 피지배자들이 이전과 같은 지배 계급(곧 피지배자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에 기초를 둔)으로 구성되지 않으면서 헤게모니적인 집단적 주체가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진태원 2015a, 222. 강조는 원문)로 번역해볼 수 있을 것이다. 소수자 전략은 푸코 및 들뢰즈-가타리의 저작이 대표하는 것인데, 이것의 핵심에는 “‘국가 장치와 국가 권력의 폭력에 맞서고 그것을 소멸시키려고 했던 혁명 운동의 역사가 이러한 폭력을 재생산하거나 모방하게 되었다는 생각(Balibar(2010c), 180. 강조는 발리바르)이 놓여 있다. 따라서 다수자 운동, 곧 대중운동에 고유한 미시파시즘적인 욕망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이 소수자 전략의 핵심을 이룬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수 되기라는 개념이 이 전략의 핵심을 이룬다.[아래로부터의 시민다움의 전략이라는 발리바르의 문제설정에 입각하여 한국 현대 문학사를 재구성하려는 매우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시도로는 김익균(2017)을 참조.] 문제는 소수자들minorities(이들은 어원이 말해주듯이 또한 약소자들이면서 (정치적사회적) 미성년자들이기도 하다)의 확산(이것을 시사적인 용어법에 입각하여 ()들의 확산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을의 민주주의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2017) 참조))으로 특징지어지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시대에 탈정체화의 작용을 특권화하는 소수 되기의 개념만으로는 정체성에 기반을 두지 않는 연대와 결합의 과정, 또는 그들의 용어법대로 하면 이접적 종합의 과정을 사고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발리바르는 다수자 전략과 소수자 전략의 결합,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양자의 동시적인 변증화를 요구하고 있다.

 

4. 몇 가지 쟁점

 

이제 끝으로 간략하게 몇 가지 논평을 제시해보자. 바깥의 정치 또는 좌파 메시아주의에 입각해 있는 현대 정치철학의 흐름의 영향으로 인해 국내외에서 (따라서 국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곧 법은 폭력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확산되어 있다. 아마도 이를 가장 도발적으로 표현한 사람은 조르조 아감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충격적이게도 근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인권선언을 벌거벗은 생명들의 주권적인 포섭을 천명한 문헌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이렇게 되면 인권선언과 강제수용소 사이에는 직접적인 논리적정치적 연속성이 존재하게 되며, 일체의 법은 주권적 폭력의 표현이 된다.(이점에 관해서는 특히 아감벤 2008 중 3부 참조) 극단적 폭력의 현상학의 차원에서 본다면 발리바르의 분석과 아감벤의 분석 사이에 몇 가지 공통점 내지 유사성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인권선언에 대한 해석 및 민주주의와 근대 시민권 제도의 관계에 대한 분석에서 양자 사이에는 뚜렷한 대립 관계가 존재한다. 발리바르는 󰡔폭력과 시민다움󰡕에서 아감벤과 자신의 관점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나는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들(불가능성의 조건들과 분리될 수 없는)은 정치의 와해의 형태들로부터 사유되어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는 아감벤에 동의하지만, 이러한 와해의 형태들이 유일한 모델(그것이 수용소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간에)로 귀착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조건들은 이질적이며, 그 조건들은 어떤 존재론이 아니라 어떤 구조의 정세적 변이에 속하는 우연적 상황들 속에서만 자신들의 효과를 산출한다고 믿는다. 2) 이 때문에 내가 보기에는 역사 개념”(좀더 근원적으로는 역사성의 도식)을 그 목적론적 정식화들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본질적이다. 그런데 여러 시각에서 볼 때 아감벤이 벤야민의 테제들에 대한 심층적인 독서로부터 발전시킨 역사성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은 여전히 목적론의 지평 속에 위치해 있다. 이 관점은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주권과 그의 권력을 서양 정치의 형이상학적 운명으로 만든다(이 때문에 특히 아감벤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주권적역량에 대한, 그리고 비오스 폴리티코스와 시민권의 설립을 통한 조에의 내적 배제에 대한 최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