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치 한겨레신문에 실린 샹탈 무페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서평입니다. 


아래 주소로 가시면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808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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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주 동안 프랑스 정국을 뒤흔든 노란 조끼 시위에 관해 에티엔 발리바르가 장문의 분석글을 발표했습니다. 


프랑스어판은 다음 주소에서 보실 수 있고, 



Gilets jaunes: le sens du face à face


https://blogs.mediapart.fr/ebalibar/blog/131218/gilets-jaunes-le-sens-du-face-face.


영역본은 다음 주소에 실려 있습니다. 


‘Gilets jaunes’: the meaning of the confrontation


https://www.opendemocracy.net/can-europe-make-it/etienne-balibar/gilets-jaunes-meaning-of-confron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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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난 번에 제 논문 [루이 알튀세르와 68: 혁명의 과소결정?],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편, 

{서강인문논총} 52집, 2018 (알라딘 서재 http://blog.aladin.co.kr/balmas/10265356에도 실려 있습니다

에서 다룬 바 있는 알튀세르의 글 [대학생의 5월'에 대한 미셸 베레의 논문에 대하여]

("A propos de l’article de Michel Verret sur le ‘Mai étudiant’") 영역본이 

버소 출판사 홈페이지에 실렸네요.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versobooks.com/blogs/4187-louis-althusser-michel-verret-s-article-on-the-student-may?fbclid=IwAR24Zu9gEUMbrV5DqTkgqH2AowrljqiNGxfCM9rnUT_mLg3Ln3gLhx2Ab5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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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30일 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 및 서울대 아시아도시센터 공동 주최로 열린 [포퓰리즘 시대의 민주주의] 


토론회 녹취록 가운데 제 발언 부분만을 올립니다. 전체 녹취록 내용은 참여사회연구소에서 간행하는 [시민과 세계] 


33호, 2018년 겨울호에 실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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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퓰리즘의 국내적 용어법의 부정적 효과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아이디어도 좋지만, 이를 을의 민주주의라 부르는 건 어떻겠나? 왜냐하면 포퓰리즘을 우파, 좌파로 나누게 되면 마치 포퓰리즘이라는 일반적인 ’()라는 게 있고 그 아래 양쪽으로 스펙트럼이 나뉘면서 좌파 포퓰리즘, 중도 좌파 포퓰리즘, 중도 우파 포퓰리즘, 우파 포퓰리즘 같은 식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러면 좌파 포퓰리즘의 문제의식들이 상당히 희석될 여지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을의 민주주의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했을 때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마르크스주의 정치, 노동자계급 중심의 정치가 이제는 힘들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넓은 의미의 좌파정치는 연합, 교차적인 연대, 다중적인 연대 등의 정치를 추구해야하는데, 나는 이라는 기표를 갖고 정치와 민주주의를 사고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적절한 입장이라고 생각했다.

 

발제문에 적었지만 국내에서의 포퓰리즘 용법은 상당히 특이하다. 국내에서 포퓰리즘이란 용어를 쓰는 건 주로 자유한국당 같은 정치 세력과 조중동’, 경제신문들을 중심으로 한 보수언론이다. 진보적 또는 중도적인 쪽에서는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를 잘 쓰지 않는다. 외국에서, 특히 유럽쪽에서는 포퓰리즘이 주로 극우파 정당이나 정책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는데, 국내에서 포퓰리즘은 주로 우파 세력들에 의해 보편적 복지 정책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국내의 용어법은 굉장히 협소할 뿐만 아니라 특이하고 정략적인 용어법이다. 국내에서 포퓰리즘에 관한 합리적인 토론이 힘든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정치적 용법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정치적 상황을 보면 2000년대 한국정치라는 게 좌파정치든 우파정치든 모두 포퓰리즘적 특성을 갖고 있다. 정치적 세력화가 촛불집회부터 노사모, 박사모에 이르기까지 제도정치 틀 바깥의 대중 동원에 의지하고, 박정희가 우파 정치의 표상이 되고, 노무현이 진보정치의 표상으로 군림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대한 열망이 이러한 동원의 중심에 있다. 또한 여기에는 항상 엘리트와 다수 서민 사이의 대립구도가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2000년대 한국정치를 포퓰리즘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이야기하기 어렵다. 요컨대 실제로는 포퓰리즘 정치가 광범위하게 나타나는데 반해 포퓰리즘이라는 용어 자체는 보편적 복지정책을 비판하기 위한 정략적 언어로 협소화되고 굴절되어 활용되는 게 한국의 상황이다. 그것의 부정적 효과는 수구적 반공주의와 재벌 중심의 지배 체제에 기반을 둔 기존 자유주의 정치질서를 정상화, 규범화하는 것이다.

 

착취, 배제,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이라는 문제

 

좌파 포퓰리즘 또는 오히려 을의 민주주의의 쟁점을 3가지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착취, 배제,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 문제다. 신자유주의가 불평등을 심화한다고 말하는데 복지국가나 사회국가, 사회안전국가를 주장하는 논자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라는 문제는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의 현 국면이라는 게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고려하지 않고는 제대로 사유할 수 있겠나 싶다. 오히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건 오히려 자본가나 자본가의 싱크탱크 같다. 자본주의에 대한 전통적인 사회주의적 대안이 어려울 것이라고 상당히 많은 이들이 생각하고, 교조적인 전통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모종의 트라우마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사고하지 않거나 쟁점화하지 않는 것 같다. 신자유주의의 극복이나 대안을 얘기하는 것이 결국 자본주의의 대안, 자본주의에 대한 기존의 대안에 대한 새로운 대안들을 모색하는 것과 분리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내 생각에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라는 문제를 사고하기 위해서는 결국 착취라는 문제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쟁점은 결국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인 착취 개념을 어떻게 개조하고 확장할 것인가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배제의 문제다. 배제를 말하는 이유는 유럽의 포퓰리즘이 됐든, 아니면 한국의 포퓰리즘이 됐든 그것의 굉장히 부정적인 특성은 소수자와 약소자에 대한 배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엘리트에 대한 서민·민중적인 분노라는 통일성을 강조하지만 이질적이고 약소하다고 생각되는 이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상당히 배타적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외국인, 이주자, 난민에 대한 배타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이나 성적 소수자 등에 대한 배타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좌파 포퓰리즘을 선뜻 포용하고 수긍하기 어려운 게 포퓰리즘의 고유한 특성 중 하나가 이질성, 다양성을 결여하고 약소자에 대해 배타적이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배제의 문제가 중요한데, 첫째는 페미니즘, 특히 마르크스주의-페미니즘의 문제제기에 따르면, 기존의 착취 개념은 여성에 대한 착취(특히 가사노동의 착취)라든가 인종적인 착취 같이, 정상적인 착취에 추가되는 착취, 또는 오히려 정상적인 착취가 작동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요구되는 초과착취 내지 (낸시 프레이저 같은 사람의 용어법을 빌리자면) 수탈/비전유(expropriation)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를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그러한 착취에 전제되어 있는 또 다른 착취를 배제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지적할 수 있겠다


다른 한편으로 미셸 푸코의 규율권력론 역시 배제를 사고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준다푸코에 따르면 규율권력에 의해 예속적 주체가 생산이 될 때는 항상 배제의 경향이 뒤따른다. 정신박약자를 만들어내는 게 학교의 규율권력이고, 비행자를 만드는 것이 치안권력이고 탈영병을 만들어낸 것이 군대의 규율권력이다. 규율권력 등과 같이 예속적인 주체를 만드는 권력은 정상적인 예속자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항상 비정상적인 예속자들, 즉 배제된 자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마르크스와 알튀세르 사이의 푸코,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편, 󰡔철학사상󰡕 68, 2018을 참조). 갑을 관계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이면서 배제의 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과 그에 대한 대안의 모색에서 배제의 문제를 사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결국 포퓰리즘의 맹점을 넘어서는 문제와 같은 문제다.


세 번째는 리프리젠테이션 문제다. 촛불에서 제기되었던 중요한 구호는 광장민주주의다. 광장민주주의가 현재 실현된 것이 국민청원게시판인데, 이는 광장민주주의의 희화화된 형태다. 광장민주주의는 기존의 대의제에 대한 불만과 혐오, 그걸 넘어설 수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을 무매개적인 직접민주주의와 동일시하는 것보다 리프리젠테이션의 개조와 확장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의제에 대한 기존의 사고에 갇혀 있는 리프레젠테이션에 대한 새로운 상상, 제도화, 기존의 틀을 변혁하는 방법을 어떻게 모색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 미국 학자의 말을 빌린다면 리프리젠테이션의 반대말은 참여가 아니라 배제인 것이다.(좀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마르크스주의의 탈구축: 네 가지 신화와 세 가지 쟁점, 인천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편, 󰡔인문학연구󰡕 30, 201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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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 인문학연구소에서 펴내는 [인문학 연구]에 게재될 글 한 편 올립니다. 


올해 발표하는 마지막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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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의 탈구축: 네 가지 신화와 세 가지 쟁점

[이 글은 201861일 인천대 인문학연구소 초청 콜로키움에서 처음 발표되었으며, 그 이후 수정과 보완을 거쳐 완성되었다. 좋은 질문과 논평으로 논문을 더 다듬을 수 있게 도와주신 콜로키움 참석자들 및 논문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린다.]

 

 

 

I. 머리말

 

2016년 촛불집회 이후 지난 2년 동안 국내외의 변화의 흐름이 너무 급격하고 숨 가쁘게 전개되고 있어서 우리가 곧잘 망각하게 되지만, 시계를 3-4년 정도 되돌려보면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의 정세가 얼마나 비관적이었는지 금방 깨닫게 된다. 2014년 봄 세월호 참사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슬픔과 고통을 겪었고 박근혜 정권의 무책임과 무능력을 비판했지만, 곧이어 벌어진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야당이 참패했으며, 당시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은 거칠 것 없이 승승장구했다. 이에 따라 한 정치학자는 앞으로 자유주의 정치 세력의 재집권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이광일, 자유주의 정치 세력의 재집권은 가능한가?, 󰡔황해문화󰡕 85, 2014년 겨울호 참조.] 이것은 비단 이 정치학자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진보 정치학자 및 언론의 견해이기도 했다. 실제로 2016413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압승을 예견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비관적 전망은, IMF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된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인 재편과 관련해 볼 때 더욱 뼈저린 것이었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전 세계적인 범위에서 부의 집중과 불평등의 확대, 사회적 안전망의 해체와 비정규직의 확산에 따른 사회적 불안정과 개개인들의 삶의 고통의 심화, 거버넌스 체제의 확산과 그에 대한 반동으로서 포퓰리즘의 부상 같은 현상들을 수반했으며, 따라서 빈곤과 삶의 불안정, 정치적 대표성의 결여에 따른 불만의 증가와 같은 객관적인 사회적 변화의 여건이 축적되었음에도, 좌파 및 진보 진영에서 기대하는 대중들의 결집된 정치적 행위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변혁의 객관적 조건은 존재하는데 주체적 조건은 부재하거나 매우 미약하게 표출되는 이러한 현상이, 길게 보면 지난 20여 년 동안, 짧게 보면 지난 10여 년 간의 사회적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본다면 지난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로 촉발된 금융 위기 이후 세계 진보학계의 주목할 만한 움직임은 마르크스주의를 복권하려는 흐름이었다. 올해가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지만, 이미 2009년부터 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를 중심으로 한 급진 이론가들이 공산주의의 이념 the idea of communism’이라는 주제로 연속 학술대회를 개최한 바 있으며, 󰡔자본󰡕을 비롯한 마르크스의 주요 저작들에 대한 새로운 번역 및 해설, 연구서들도 활발하게 출간되어 왔다.[최근 국내에 번역된 미하엘 하인리히, 󰡔새로운 자본 읽기󰡕, 김강기명 옮김, 쿠리에, 2016이나 데이비드 하비,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강의󰡕, 강신준 옮김, 창비, 2011;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2󰡕, 강신준 옮김, 창비, 2016 참조. 또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문제를 다루는 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 최재인 옮김, 갈무리, 2014 및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 여성, 신체 그리고 시초축적󰡕, 황성원김민철 옮김, 갈무리, 2011; 󰡔혁명의 영점: 가사노동, 재생산, 여성주의 투쟁󰡕, 황성원 옮김, 갈무리, 2018(2); 이은숙, 󰡔페미니즘 자본축적론󰡕, 액티비즘, 2017 등을 각각 참조.] 이러한 학술적 운동이 아직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주목할 만한 새로운 재해석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지만,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논의하려는 움직임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시 마르크스를 읽고 토론하게 되었다는 것과 마르크스(주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 이론적정치적 전망을 제시해주느냐 하는 것은 다소 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곧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토론은 현실적인 변혁운동과 거리를 둔 채 다소 아카데믹한 학문적 논의에 그칠 수 있으며, 실제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마르크스주의에게는 매우 기묘한 정황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는 지난 20세기 내내 해방의 이론과 운동의 대명사처럼 작용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마르크스주의는 특히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하려는 이론과 운동을 대표하는 명칭이었다. 따라서 변혁운동과 연결되지 않은 마르크스주의는 이론 그 자체 내에서 이미 생명력을 상실한 것이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가 이러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은 알다시피 지난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신호탄으로 하여 전개된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체는 마르크스주의의 물질적 근거를 소멸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이론적 타당성 및 규범적 적합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마르크스(주의)가 다시 한 번 변혁운동에 기여할 수 있는 이론적정치적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조건적일 수밖에 없는데, 지금까지의 상황을 고려하면 전망이 썩 밝아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효력이 오늘날 완전히 소실되어 버렸다거나 마르크스가 또 그 이후에는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기했던 여러 가지 쟁점들 내지 문제들(가령 가치, 잉여가치, 착취, 계급투쟁, 소외, 프롤레타리아 독재, 공산주의 등)이 더 이상 의미 있는 문제들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존 사회주의체제의 실패를 통해 뚜렷이 드러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 자신은 이러한 실패 내지 한계들에 대해 성찰하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여러 가지 신화들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이 글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의미 있는 이론적정치적 힘으로 작용하는 것을 가로막는 네 가지 신화를 해체하면서 이러한 해체 이후에 마르크스주의의 재구축을 위해 제기해야 할 세 가지 쟁점을 살펴보려고 한다.

 

II. 마르크스주의의 네 가지 신화

 

1. 중심의 신화

 

우선 마르크스주의는 일종의 중심의 신화에 깊이 사로잡혀 있다. 중심의 신화란, 마르크스주의가 변혁 내지 사회운동의 중심에 존재하며, 또 마땅히 중심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20세기 후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흐름은 이러한 중심의 신화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1965년 출간된 󰡔마르크스를 위하여󰡕󰡔자본을 읽자󰡕에서 루이 알튀세르는 저 유명한 과잉결정 surdétermination’ 개념을 통해 최종 심급의 고독한 순간은 도래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자본과 임노동 사이의 모순은 항상 이미 다른 모순 들에 의해 과잉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Louis Althusser, Pour Marx, Paris: La Découverte, 1996(초판 1965);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관모 옮김, 후마니타스, 2017; Louis Althusser et al., Lire le Capital, Paris: PUF, 1996(초판 1965).] 또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본과 임노동 사이의 모순은 여러 가지 적대들(가령 성적 적대, 인종 간 적대, 환경 문제를 둘러싼 적대 등) 중 하나일 뿐이며, 모든 사회적 적대들은 등가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에르네스토 라클라우샹탈 무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이승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2. 라클라우무페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강점 및 난점에 관한 좋은 (하지만 이론의 여지가 있는) 논의는 서영표, 라클라우가 말한 것말할 수 없는 것’: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해석, 󰡔마르크스주의 연구󰡕 131, 2016 참조.] 아울러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근대의 거대 서사들에 대한 해체의 맥락에서 이러한 신화를 날카롭게 고발한 바 있다.[-프랑수아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적 조건󰡕, 이현복 옮김, 서광사, 1992; 󰡔쟁론󰡕, 진태원 옮김, 경성대출판부, 2015를 각각 참조. 이는 물론 리오타르를 비롯한 이들의 주장을 모두 수용한다는 뜻은 아니다.] 따라서 계급적 모순은 다른 모든 사회적 모순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모순이 아닐뿐더러, 마르크스주의 역시 더 이상 다른 모든 사회적 모순들을 해명할 수 있는 이론적 중심이 아니라는 점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선언되고 또 경험적으로 입증된 바 있다.[이는 포퓰리즘이 유럽과 남아메리카만이 아니라, 북미 대륙과 아시아 등까지 널리 확산되는 데서 잘 나타난다. 포퓰리즘의 범세계적 확산의 문제에 관해서는 진태원 엮음,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소명, 2017 및 존 B. 주디스, 󰡔포퓰리즘의 세계화󰡕, 오공훈 옮김, 메디치 미디어, 2018을 각각 참조.하지만 현존하는 노동운동이나 그 활동가들 및 주변의 마르크스주의자들(특히 경제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여전히 이러한 중심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금융위기나 유럽의 재정위기 이후 다시 이러한 중심의 신화, 곧 계급 모순의 해결이야말로 다른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모순이라는 신화가 소생하고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신화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금융위기나 재정위기를 맞아 세계 어디에서도 이 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대대적인 노동자운동(총파업을 비롯한)이 전개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구조조정이나 합병, 비정규직의 확산 등으로 인해 노동조합의 힘은 더 약화되고, 노동자 계급 중 상당수는 이민자에 대한 적대감 속에서 극우 정당의 지지자로 돌아섰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경험적 연구들이 입증한 바 있다. 이 때문에 노동자운동이나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적 운동들의 중심에서 그 운동들을 이끌어간다는 것은 말 그대로 환상에 불과하며, 그것은 오히려 다른 사회적 운동들과의 연대나 협력을 더욱 어렵게 할 뿐이다.


따라서 노동자운동과 마르크스주의가 실천적이론적 중심에 존재한다는 신화를 해체하는 일이야말로 오늘날의 세계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무언가 의미 있는 기여를 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가 된다.

 

2. 대문자 주체의 신화

 

이러한 중심의 신화는 대문자 주체의 신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대문자 주체의 신화란 프롤레타리아 내지 노동자 계급이 사회 변혁의 주체이며 역사의 주체라는 신화를 말한다.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1923)에서 가장 탁월하게 사변적으로 표현된 이러한 신화는 중심의 신화를 뒷받침하는 철학적 지주의 역할을 하고 있다.[게오르크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박정호조만영 옮김, 거름, 1999. 주지하다시피 루카치에게 프롤레타리아는 역사의 객체이면서 동시에 주체라는, 관념론적일뿐더러 종말론적인 역사철학의 관점에서 개념화되고 있으며, 마르크스의 소외 및 물신숭배 개념을 새롭게 개념화한 사물화 Verdinglichung 개념에 근거하여 귀속된 계급의식을 갖춘 ()선험적 주체로 제시되고 있다. 󰡔역사와 계급의식󰡕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이론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데, 이 저작에서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발굴하기 위해서는 사물화에 대한 논의를 그 관념론적이고 종말론적 관점과 분리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신화에 불과하다. 프롤레타리아 내지 노동자 계급은 단일한 주체가 아닐뿐더러, 변혁의 보편적 행위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전자처럼 노동자 계급을 단일한 주체로 이해하는 것은 노동자 계급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분화와 갈등(정규직과 비정규직, 내국인노동자와 이주노동자, 젠더 관계 등)을 고려하지 않거나 그것을 실체의 본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수적인 우연적 속성으로 간주하는 관점이다(이는 아주 오래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실체론과 다르지 않다). 또한 후자처럼 보편적 행위자로 간주하는 것은 노동자 계급이 부르주아 계급 및 다른 집단들과 더불어 국민주의/민족주의 nationalism, 그리고 인종주의 이데올로기 및 실천에 사로잡혀 있으며, 또한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 및 실천에도 포획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더욱이 국민주의/민족주의와 인종주의, 그리고 가부장주의는 단순히 허위의식이나 가상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고유한 물질적 구조 및 제도에 뿌리를 둔 독자적인 갈등 내지 적대이며, 따라서 계급 적대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에 대한 신화의 배경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주의당 선언󰡕에서 노동자 계급은 잃을 것도 없고 따라서 환상도 없다고 선언했던 것이 깔려 있다.[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지켜야 할 자신의 것이라고는 없다. 그들의 지금까지의 모든 사적 안녕과 사적 보장을 파괴해야만 한다.” 또한 노동자들은 조국이 없다. 그들에게 없는 것을 그들로부터 빼앗을 수는 없다.”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주의 당 선언󰡕,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 박종철출판사, 1991. 인용문은 각각 411, 418.]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은 착취와 수탈의 대상일뿐더러, 그 자신 아무런 생산수단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곧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환상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처럼 아무런 소유도 갖고 있지 않고 아무런 환상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적인 착취 및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와 물신숭배)에 맞서 가장 철저하게 투쟁할 수 있는 계급이라는 것이 대문자 주체의 신화의 핵심이다.


하지만 이미 마르크스 자신이 1848년 혁명의 실패 이후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이러한 신화가 그릇된 것임을 자각했으며, 이는 그가 이후 죽을 때까지 정치경제학 비판 연구에 몰두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1847)이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1852) 같은 저작에서는 혁명적 노동자 계급과 구별되는 룸펜 프롤레타리아라는 범주를 도입했고,[이 개념은 이미 공산주의당 선언에서도 나타난다. 󰡔브뤼메르 18󰡕에서 이 개념은 부랑자, 제대 군인, 전과자, 탈출한 갈레 선 노예들, 사기꾼, 노점상, 유랑 거지, 소매치기, 요술쟁이, 노름꾼, 뚜쟁이, 포주, 짐꾼 ... 요컨대 뿔뿔이 흩어져 떠다니는 불확실한 대중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며, 루이 보나파르트는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장또는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표자로 지칭된다.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2󰡕, 박종철출판사, 1992. 인용문은 각각 339, 390.]즉자계급대자계급의 구별을 도입하기도 했다.[사실 이 용어들이 그 자체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다음과 같이 양자를 구별할 뿐이다. “이리하여 이 대중은 자본에 대해서는 이미 하나의 계급이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직 그렇지 않다. 우리가 단지 그 몇몇 국면들만을 지적했던 투쟁 속에서 이 대중은 결합하고 자신을 대자적 계급으로 구성한다.”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철학의 빈곤󰡕,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 295. 󰡔브뤼메르 18󰡕에 나타난 구별법은, 같은 책, 382-383을 참조.] 더욱이 20세기의 역사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변혁보다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안정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을 더 선호했음을 보여주며, 이것이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의 역사적 분열, 또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분열의 배경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20세기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에 관해서는 특히 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 김유진 옮김, 후마니타스, 2010 참조.] 그리고 이러한 분열의 또 다른 배경에 바로 국민주의 내지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영향이 존재한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의 여러 사회민주당들, 특히 독일의 사회민주당은 제1당이었음에도 군국주의 독일의 전쟁 개시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전쟁 수행을 위한 재정 지출을 의회에서 승인했으며, 따라서 독일의 많은 노동자들이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과의 전쟁에서 희생되는 것을 방조했다.[제프 일리, 󰡔The Left: 1848-2000.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 유강은 옮김, 2008 7장 참조.] 1차 세계대전 당시 이러한 제국주의 전쟁에 노동자 계급 및 사회민주당이 말려드는 것을 거부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시킬 것을 촉구한 대표적 인물이 레닌이었으며, 이것이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노동자 계급 및 사회민주당들이 제국주의 전쟁 속으로 스스로 말려들게 된 것은 이들이 철저하게 국민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곧 노동자 계급은 자본가 계급과 대립하는 계급이기 이전에 독일인이거나 프랑스인, 영국인이라는 점을 스스로 받아들인 것이다.[계급, 인종, 국민의 관계에 관한 고전적인 논의로는 Etienne Balibar/Immanuel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e: Les identités ambiguës, Paris: La Découverte, 1988을 참조. 또한 에티엔 발리바르, 9, 유럽에는 아무런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유럽의 시민들? 세계화와 정치의 재발명󰡕,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도 참조.]


여기에 더하여 과연 노동자들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존재였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데, 사회의 가장 하층에 놓인 노동자들도 여전히 무언가를 갖고 있고 또한 그로 인해 갑으로 군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 특히 남성 노동자들이 소유한 것은 다름 아니라 그들의 가족, 특히 여성이었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공산당이라는 전위당을 중심으로 전개된 역사적 마르크스주의 또는 공산주의는 성적 차이라는 문제가 경제적 착취 내지 계급적 관계라는 문제와 별도의 정치적 쟁점을 이룬다는 사실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으며, 이에 따라 당 내에서, 그리고 당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중 조직들에서도 성적 배제와 차별을 체계적으로 구현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현실의공산당들은 (...) 특정한 형태의 가부장제와 지적 가부장제 위에’, 그리고 가족의 강화 및 이성적으로남성적인 권위에 대한 여성들의 동의 위에, 또한 활동가들(‘동지들’) 간의 형제애그 수혜자는 자연히남성들이다위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공산당에서 여성들은 기층에서는 하위주체 subalterne의 지위로 포함되면서 동시에 정상에서는 배제되었다.[Etienne Balibar, “Le genre du parti: Féminisme et communisme”, https://socio13.wordpress.com/2010/10/06/le-genre-du-parti-par-etienne-balibar/ (2018.10.25. 접속) 이 글은 발리바르가 2010106일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에서 했던 강연 원고이며, 프랑스어 원문은 출판물 형태로는 발표되지 않았다. 다만 이 글은 영역되어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인터넷 학술지에 실려 있으며(“The Genre of the Party”, The Viewpoint Magazine, 2017.3.15. https://www.viewpointmag.com/2017/03/15/the-genre-of-the-party/ (2018.10.25. 접속)),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있다. 당의 성별/유형, 서영표 옮김, 󰡔웹진 인-무브󰡕, 2017.11.16 (http://en-movement.net/114) 이 글에서는 우리말 번역을 참조하되, 약간의 수정을 했다. 이글은 웹에 올려 있는 글이기 때문에 프랑스어 원문이나 우리말 번역 모두 쪽수가 없다.]

 

다른 식으로 표현한다면, 공산당들은 여성들이라는 을에 대한 지배와 차별(역으로 말하면 남성들을 또 다른 갑으로 구성하고 조직화하는 )에 근거를 둔 보편적 해방의 조직이었던 셈이다. 이는 유럽 마르크스주의 또는 유럽 공산당들의 역사에서만 나타났던 현상은 아니며, 또한 과거에만 존재했던 현상도 아니다. 우리 사회의 진보적인 운동 단체, 진보적인 지식인들에게서도 이러한 현상들은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노동운동 조직이 대개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되고 운영되며, 진보 지식인들이 겉으로는 페미니즘을 옹호하면서도 미투 운동을 폄하하거나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3. 이행의 신화

 

이 두 가지 신화가 여러 가지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잔존할 수 있는 이유는 마르크스주의에는 이행의 신화 같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행의 신화란,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역사의 목적 내지 운동의 궁극적인 귀착점이라고 간주하는 사고방식을 가리킨다. 곧 이는 우리가 현재 목도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순들이고 바로 이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가 심각하게 위기에 처해 있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역사적 대안은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가 유일하기 때문에, 이러한 모순들 및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바로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신화다. 이는 조야한 형태의 목적론적인 또는 진화론적인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가장 비판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벗어나지 못했고, 또 오늘날에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신화다.


가령 예전에 에티엔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는 두 가지 핵심적인 이론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Etienne Balibar, Cinq études du matérialisme historique, Paris: François Maspero, 1974; 󰡔역사유물론 연구󰡕, 이해민 옮김, 푸른산, 1989.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역사유물론 5연구󰡕인데, 한국어판에는 3장 부록인 레닌, 공산주의자, 이민(Lénine, communistes et l’immigration)5마르크스주의 이론사에서 유물론과 관념론(Matérialisme et idéalisme dans l’histoire de la théorie marxiste)이 번역에서 빠졌다.] 그 중 하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으로서 잉여가치이론이며,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사회성으로서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이론이다. 간단히 말하면, 자본주의 내에는 이미 모순적인 두 가지 사회성이 갈등적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하나는 자본의 축적 운동에 고유한 사회성의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 계급(따라서 피착취자들 일반)에 고유한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성의 경향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착취와 지배에 맞서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사회 내에 이미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대안적 사회성을 발전시키는 일이 필수적이다. 문제는 이러한 관점이(과잉결정 및 그것이 함축하는 복잡한 사회적 전체 개념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의 적대 내지 갈등(가령 성적 적대, 인종적 적대, 지적 차이 등)을 좁은 의미의 계급적 갈등, 곧 자본주의적 착취관계를 둘러싼 적대로 환원한다는 점이며, 따라서 정치적 지배 및 이데올로기적 예속화 문제의 독자성을 충분히 사고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발리바르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1976)에서도 그대로 견지되고 있으며,[1980년대 이후 발리바르는 더 이상 이러한 입장을 유지하지 않는다. 단선적인 이행 대신 다수의 역사적 인과성을 사고하려는 그의 시도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마르크스의 철학󰡕, 배세진 옮김, 오월의 봄, 2018 4시간과 진보: 또 다시 역사철학인가?참조.] 그의 스승인 알튀세르 역시 1970년대 말까지 줄곧 이러한 관점을 고수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최근 출간된 󰡔검은 소: 알튀세르의 상상 인터뷰󰡕(1976)라는 유고다.[루이 알튀세르, 󰡔검은 소: 알튀세르의 상상 인터뷰󰡕, 배세진 옮김, 생각의 힘, 2018. 이 책의 의미와 한계에 대해서는 한국어판 해제인 필연적이지만 불가능한 것: 󰡔검은 소󰡕 한국어판에 부쳐참조.]


내가 다른 글에서 보여준 것처럼 1960~70년대 알튀세르의 이론적 작업은 이런 점에서 볼 때 교훈적이다.[진태원, 루이 알튀세르와 68: 혁명의 과소결정?, 󰡔서강인문논총󰡕 52, 2018 참조.알튀세르가 1965󰡔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화두로 삼았던 것은 어떻게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였던 러시아에서만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이를 해명하기 위해 그는 과잉결정 및 지배소를 갖는 구조, 구조인과성 같은 새로운 개념들을 고안했다. 반면 익명으로 발표한 문화혁명에 대하여(1966)에서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해방의 확실한 보증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사회주의의 고유한 특성은 자본주의로 퇴보할 수 있는 위험이 늘 상존한다는 점이라고 주장한다.[Louis Althusser, “Sur la révolution culturelle”(1966), Décalages, vol. 1, no. 1, 2014. http://scholar.oxy.edu/decalages/vol1/iss1/8/ (2018.12.5. 접속)] 따라서 알튀세르에 따르면 중국의 문화혁명의 중요성은 모든 퇴보의 위험에 맞서 사회주의를 지속 가능하게 보존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혁명과 경제적 혁명에 대해 제3의 혁명,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을 추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선언”[Louis Althusser, Ibid., 6.]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고 생산관계 및 소유관계를 변혁하는 것에 더하여,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 가운데 특별히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의 중요성이 강조된다면, 이는 사회주의에서는 공산당이 통치 정당이 되며, 따라서 계급 지배의 도구인 국가와 융합될 수 있는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이 수행해야 할 과제가 바로 공산당 및 노동조합과 구별되는 대중 조직을 통해 당이 국가와 자신을 구별하도록 강제하는[Louis Althusser, Ibid., 17. 강조는 원문.]일이다.


알튀세르의 분석은 (그것이 지닌 난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라는 것이 자본주의의 모순들에서 벗어난 해방된 사회가 아니라, 여전히 모순들을 포함하는 사회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1973년 이후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더 엄격하게 구별하면서 전자는 독자적인 생산양식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모순적인 이행기라고 주장하게 된다. 아울러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짧은 이행기가 아니라 사회주의 그 자체와 동일시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엄격히 구별하려는 이 노력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야 마땅하다.


알튀세르가 끝까지 질문하지 않은 것, 또 질문할 수 없었던 것은, 만약 사회주의는 독자적인 생산양식이 아니라 모순적인 이행기이며, 따라서 사회주의는 지속적인 혁명을 통해서만 공산주의로 전진할 수 있다면, 그럼 공산주의는 하나의 생산양식이며, 이행의 최종 목적지인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공산주의에 대한 관점은 역사철학이나 진화론, 그리고 경제주의에서 벗어나 있는 것인가?[진태원, 루이 알튀세르와 68: 혁명의 과소결정?, 앞의 글, 432. 강조는 원문.]

 

다시 말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정확히 구별하려는 알튀세르의 노력은 사실 계급사회에서 계급 없는 사회로의 이행을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으로 늦추고 장기화한 것에 불과하며, 사회적 모순들과 갈등에서 면역되어 있는 사회로 공산주의를 이해한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또 하나의 유토피아적인 사고방식, 또 다른 형태의 목적론적인 역사철학을 포함하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가 역사를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이라고 규정했던 것을 염두에 두면 더욱 더 그렇다. 그리고 그렇다면 내가 보기에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역으로 공산주의 역시 모순에서 자유롭지 않다면(...), 그렇다면 이행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 역시 모순적인 계급투쟁이 존재하고 사회주의 또한 그렇다면, 그리고 공산주의 역시 모종의 계급투쟁에서 면제되지 않는다면, 이행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의문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이행은 역사적 과정 내에 항상 이미 존재하며, 결코 끝이 없는 어떤 것, 따라서 사실은 역사의 갈등적인 과정 자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진태원, 같은 글, 433. 강조는 원문.]

 

따라서 역사적 사회주의가 종언을 고한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비슷한 시기 알튀세르가 제시했던 또 다른 고찰이 의미심장하다. 그는 1977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라는 유명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만약 사람들이 사회주의로 향하는 여러 길’[곧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한 길이 아닌 의회를 통한 길-인용자]이 존재한다는 진술에 만족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현재의 상황을 실제로 사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줄 뿐입니다. 이런 진술만으로는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다른 길을 통한 사회주의가 현존하는 사회주의와 동일한 결과에 이르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질문에 좌우됩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왜, 어떻게 해서 스탈린에게, 그리고 현재의 정권에 이르게 되었는가?”[Louis Althusser, “Enfin la crise du marxisme!”, in Yves Sintomer ed., Solitude de Machiavel, Paris: PUF, 1998, 270; 루이 알튀세르, 마침내 맑스주의의 위기가!, 󰡔당 내에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될 것󰡕, 60.]

 

알튀세르가 40여 년 전에 했던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어쩌면 더 절실하게 제기되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가 다시 위기에 처해 있고 또한 이 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법은 사회주의(내지 공산주의)라고 말하는데, 그런데 이러한 사회주의(또는 공산주의)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와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무엇이 보장해주는가? 더욱이 이러한 사회주의가 현재 위기에 처해 있는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사회가 되리라는 것을 무엇이 보증해주는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기에 대해 확실한 답변을 갖고 있는가? 이행의 신화가 문제적인 것은 이것이 오늘날의 사회 질서의 변혁과 관련된 여러 가지 쟁점들, 가령 생태적인 전환 및 성장 내지 발전에 대한 새로운 발상, 가부장제 질서의 변혁, 권력 관계의 개조 등의 문제들을 오직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그것도 아주 낡은 관념에 입각한)로의 이행이라는 단일한 도식으로 환원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가 사고해야 할 것은 이처럼 환원주의적으로 이해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그 대안에 대한 대안()일 것이다. 새로운 혁명은 혁명 및 이행이라는 관념에 대한 새로운 사고가 수반되어야 한다.


4. 진정한 민주주의의 신화


마지막으로 거론하고 싶은 또 다른 신화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신화다. 현존 사회주의 체제가 존재하던 시기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여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또는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고발하면서, 그것은 법적형식적으로만 민주주의일 뿐 사실은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비판한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적인 자유 및 자신의 지배자를 선택할 형식적인 정치적 자유만 인정할 뿐, 노동자들을 비롯한 피지배 계급들이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권리를 허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이러한 비판은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여러 이론가들이 현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라기보다는 포스트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대부분의 서민들 또는 을들은 내적 배제상태에 놓여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콜린 크라우치, 󰡔포스트민주주의󰡕, 이한 옮김, 미지북스, 2009; 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2015; 진태원, 󰡔을의 민주주의󰡕, 그린비, 2017 참조.]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주의자들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데 필요할지는 몰라도 충분치는 못하다. 이러한 비판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진정한 민주주의, 을들에게 형식적 권리 이상의 실질적 권리 및 자유와 평등을 보장해줄 수 있는 분명한 해법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과연 역사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내지 자유민주주의보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구현했는지는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발리바르의 분석을 원용해볼 수 있는데, 발리바르는 가장 해방적인 운동을 대표하는 정치 조직으로서의 공산당들은 자신들이 극복하려고 하는 부르주아적인 정치 조직이나 단체들에 비해 덜 민주주의적이었다고 비판한다. “내가 보기에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자신이 세우고자 하는 사회보다 공산당이 어떤 의미에서는 덜 민주적이라는 사실, 심지어 내부 조직원리 면에서는 공산당이 (공산당의 모태 노릇을 한) 자유주의 사회보다 덜 민주적이라는 사실에서 비롯한 영속적 긴장이다.” 이러한 역설은 원칙적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은 공산주의의 내적 논리에서 생겨나는 문제점이다.

 

하지만 더 사변적으로 말하자면, 공산주의를 준비하는 운동, 제도들 또는 조직들 내부에서 집합적 해방으로서의 공산주의를 선취하는 것을 어떻게 상상해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자신이 공산주의를 사회 전체로 혁명적으로 일반화하기 위해 자신들의 고유한 조직 관계 속에서 공산주의를 자기 설립하는 문제 바로 그것인데, 이렇게 되면 공산주의 당이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용어모순 또는 대립물의 통일이 된다. 레닌이 국가가 아닌 국가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당이 아닌 당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Etienne Balibar, “Le genre du parti: Féminisme et communisme”, op. cit.]

 

공산주의 당이라는 표현이, 공산주의 운동의 내적 논리에서 볼 때 용어모순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 때문이다. 한편으로 공산주의는 보편적인 해방의 운동이며, 따라서 가장 평등하고 자유로운 운동이어야 하고, 모든 해방의 운동을 대표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미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주의당 선언󰡕에서 말했던 것이 바로 이점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 계급의 직접적인 이해관계 및 목표를 위해 투쟁한다. 하지만 현재의 운동에서 그들은 동시에 운동의 장래를 옹호하며 대표한다. (......) 한 마디로 말하면,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나라에서 기성 질서 및 정치에 맞서 모든 혁명 운동을 지원한다. (......)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나라의 민주주의 당파들의 통합 및 상호 일치를 위해 도처에서 작업한다.[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주의당 선언,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 431-33. 강조는 인용자.]

 

진정한 의미의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만을, 또는 노동자 계급만을 조직하고 그들의 이해관계만을 대표하는 이들이 아니라, 더욱이 우리나라의, 우리 정파의, 우리 조직의 이해관계만을 대표하는 이들이 아니라, “모든 혁명 운동을 대표하며, “모든 나라의 민주주의 당파들의 통합 및 상호 일치를 위해 활동하는 이들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공산주의 당 communist party’은 본질적으로 당파적인 것을 가리킨다. 곧 명칭의 어근이 말해주듯이 당은 특정한 세력이나 집단의 이해관계 및 의지를 대표하는 조직이며, 더욱이 공산주의 당 또는 공산당은 전위적인 조직인 만큼 본질적으로 통일성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규율이 필수적인 조직이다. 따라서 이라는 이념은 닫힘 clôture”을 함축하며, 또한 “‘분리되고’, ‘동질적인’(또는 동질성이 자율성의 조건이 되는 식의) 정치[Etienne Balibar, “Le genre du parti: Féminisme et communisme”, op. cit.]를 표상하게 된다. 이처럼 공산주의 당(또는 어떤 진보적인 정파나 집단)이 다른 세력이나 집단, 다른 이해관계에 맞서 특정한 세력이나 집단의 이해관계를 위한 배타적인(또는 순수하고 헌신적인) 조직으로 구성되면, 대외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대내적으로도 위계적이고 비민주적인 경향에 빠져드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이 관료제적이고 위계적인 경향을 띤 정치 체제들이었던 것이나 운동권 조직들 역시 집행부 및 남성 중심의 관료제적 형태를 띠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 및 그것에 근거를 둔 현실 운동 조직이 배제적인 민주주의의 경향을 띠는 것은 단지 상황의 압력 때문만이 아니라 그 내적인 논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III. 세 가지 쟁점: 착취, 배제, 리프리젠테이션

 

지금까지 검토한 마르크스주의의 네 가지 신화는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좀 더 설득력 있는 분석을 가로막는 이론적 장애물임과 동시에 변화된, 그리고 변화해가는 현실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도 어렵게 만드는 실천적 장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것들이 신화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이러한 신화들에 의존하는 것은, 미국의 페미니즘 철학자 린다 제릴리 Linda M. G. Zerilli의 적절한 표현을 빌리면 마르크스주의의 네 가지 신화가 위안에 대한 욕망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Linda M. G. Zerilli, Feminism and the Abyss of Freedom,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5 중에서 1“Feminists Know Not What They Do: Judith Butler’s Gender Trouble and the Limits of Epistemology” 참조.] 곧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개별적인 현상들에 적용되는 일반 법칙과도 같은 보편적인 이론에 대한 열망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열망에는 도구적 활동으로서의 정치에 대한 관점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일반적 주체(곧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피착취계급 일반)[페미니즘의 경우에는 아마도 무엇보다 생물학적 성기에 의해 규정되는 여성일반이 될 것이다.]로 하여금 그들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때로는 보편사에 대한 목적론적 관점에 입각하여) 지정해주고(이는 대개 주체 내의 다양한 이해관계들을 중재하거나 진정한 목표를 향해 개인들 및 집단들을 선도하는 전위당이 담당해온 역할이다), 더 나아가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설명해주는(또는 명령하는) 것이 바로 보편적 이론에 부여된 지위다. 우리가 이론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유지하는 한에서 이론의 보유자인 지식인(대개 남성인)이야말로 능동적인 지도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며, 대중들은 지식인이 제시하는 이론에 따라 지정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적 행동을 수행하는, 그 자체가 수동적인 도구로서의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의 탈구축이 추구하는 것은 기존의 보편적 이론 대신 새로운 보편적 이론()을 제시하는 것에 국한될 수는 없다. 오히려 문제는 대중들의 삶과 운동 바깥에서, 말하자면 아르키메데스의 점과 같은 초월적 위치에 서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이론을 제시(하고 그들을 선도)한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알튀세르가 말한 바 있는 이중적인 장소론 topique의 관점을 택하는 것이 필요하다.[Louis Althusser, “Le marxisme aujourd’hui”, in 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textes, op. cit.; 오늘의 맑스주의, 서관모 엮음, 󰡔역사적 맑스주의󰡕, 새길, 1993 참조.]

곧 한편으로 계급관계 및 지배복종관계, 주체화예속화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분석을 항상 자신이 분석하는 관계들의 당사자 중 하나의 집단적인(또는 오히려 관개체적(關個體的)transindividual) 작업으로 수행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론적 작업은 대중들 자신의 투쟁 및 주체화 활동, 그리고 그 담론적 실천의 일부이며, 그러한 작업에 입각하여 개조되고 변형되어야 하는 것이다.[넓은 의미의 해방운동에서 이론 또는 비판의 지위라는 문제는 더 상세한 토론이 필요한 문제다. 앞서 언급한 Linda M. G. Zerilli, Feminism and the Abyss of Freedom 이외에 Etienne Balibar, “What does Theory Become? The Humanities, Politics and Philosophy (1970-2010): Reflections and Propositions”, Crisis & Critique, vol. 1, no. 3, 2014; Penelope Deutscher and Cristina Lafont eds., Critical Theory in Critical Times: Transforming the Global Political and Economic Order,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7을 각각 참조.]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이하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네 가지 신화에 대한 해체에 함축되어 있는 세 가지 쟁점을 착취, 배제, 리프리젠테이션 representation이라는 개념들로 표현해보려고 한다. 내가 제안하는 을의 민주주의의 주요 주제들이기도 한 이 세 가지 쟁점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적인 분석에서 충분히 해명되지 못한 대중적 해방운동의 쟁점을 더 명료하게 드러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1. 착취

 

우선 착취라는 쟁점이 중요하다. 위에서 지적된 네 가지 신화 및 그것이 함축하는 이론적실천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와 그것에서 유래하는 담론과 실천이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유 중 하나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자본주의적인 착취라는 문제를 해명하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착취가 문제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 빈부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불평등의 심화와 확산이 노동의 불안정성만이 아니라 개개인의 삶의 불안정을 초래하면서 착취의 문제는 다시 한 번 인문사회과학계의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다.[기본소득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착취의 문제가 중요한 쟁점이 된다. 기본소득의 옹호자인 필리페 판 파레이스는 분석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 착취 개념을 해체하고 있다.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를: 기본 소득에 관한 철학적 옹호󰡕, 조현진 옮김, 후마니타스, 2015 참조. 곽노완은 마르크스주의적 착취 개념과 기본소득론을 결합시키려는 시도하고 있는데, 사실 마르크스의 착취 개념의 고유성이라는 문제를 부의 원천이라는 문제로 대체하는 데 그치는 것으로 보인다. 곽노완, 기본소득은 착취인가 정의인가? 판 돈젤라의 기본소득반대론에 대한 반비판과 마르크스주의 기본소득론의 재구성, 󰡔마르크스주의 연구󰡕 82, 2011 참조.]


하지만 착취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분석이 전적으로 만족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알튀세르가 착취에 대한 회계적 관점이라고 부른 것에서 출발하는 게 좋다. 그는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1978)에서 마르크스주의에 고유한 관념론의 요소들(노동자운동 외부에서 과학의 수입,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 ‘헤겔 철학의 전도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진화론적 역사주의, 개인들 사이의 투명한 관계로서 공산주의 등)을 거론하면서 󰡔자본󰡕에 끼친 이러한 관념론의 효과로 잉여가치를 생산된 가치와 가치-임금[valeur-salaire: 생산과정에서 선대된 가변자본]의 차이로서 회계적으로 진술하는[Louis Althusser, “Le marxisme aujourd’hui”, in 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textes, op. cit., 301; 오늘의 맑스주의, 󰡔역사적 맑스주의󰡕, 51.] 착취에 대한 회계적 관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착취에 대한 회계적 관점이란, 필요노동(곧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 이외의 잉여노동을 통해 생산된 잉여가치를 착취의 본질이라고 이해하는 관점을 뜻한다.


이러한 회계적 관점 대신 그는 착취를 그 구체적 조건들 및 형태들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착취는 한편으로는 노동과정의 냉혹한 제약들(시간, 강도, 파편화)과 분업의, 그리고 노동조직의 규율의 냉혹한 제약들 속에서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력의 재생산조건(소비, 주거, 가족, 교육, 보건, 여성 문제 등) 속에서만 사고될 수 있다. 분명 마르크스는 착취를 가치의 단순한 회계적 공제와 혼동하지 않았다. 그는 노동과정 및 노동력 재생산과정 속의 착취형태에 대해 말함과 동시에 잉여가치의 형태들(절대적 잉여가치, 상대적 잉여가치)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러나 그는 항상 낯선 것으로서 등장하는 장()들에서, 추상적 장들이 아니라 역사적’, ‘구체적장들에서, 주요 서술순서 주변에서 그것에 대해 말한다. 마치 주요 서술순서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순서를 깨뜨리고 방해해야만 한다는 듯이![Louis Althusser, Ibid., 301-302; 알튀세르, 같은 책, 같은 곳. 강조는 인용자.]

 

알튀세르가 착취의 구체적 형태들 및 조건들이라고 부른 것은 착취가 한편으로 노동과정의 냉혹한 제약들 및 규율의 냉혹한 제약들 속에서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력의 재생산조건 속에서만 사고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알튀세르는 인용문 뒷부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심적 서술순서추상적 장들”(󰡔자본󰡕 1권 서두에 나오는 상품, 화폐, 자본에 관한 장들)을 한 편에 놓고, 다른 편에는 주요 서술순서를 깨뜨리고 방해하는, “항상 낯선 것으로서 등장하는 장들”, “‘역사적’, ‘구체적장들을 다른 한 편에 놓는다.[이러한 서술 순서의 이중성의 쟁점은 다음 글에서 더 상세하게 논의된다. Louis Althusser, “Avant-propos du livre de G. Duménil, Le concept de loi économique dans le Capital”(1977), in 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textes, op. cit.; 제라르 뒤메닐의 저서 “‘자본의 경제법칙 개념의 서문, 배세진 옮김, 󰡔웹진 인-무브󰡕 2018.11.3. http://en-movement.net/198 (2018.11.28. 접속)]


알튀세르의 주장을 이해하려면 󰡔자본󰡕 1권의 서술 순서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Karl Marx, Das Kapital, I, in Karl MarxFriedrich Engels Werke Bd. 23, Berlin: Dietz Verlag, 1987; 칼 마르크스, 󰡔자본󰡕 1-1,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2013.] 주지하다시피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를 차용하여 서술된 󰡔자본󰡕 1, 특히 그 1편과 2편은 각각 상품과 화폐, 화폐에서 자본으로의 전화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부분에서 마르크스는 상품에서 출발하여 사용가치와 가치,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을 분석하고,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의 이중성을 드러냄으로써 일반적 가치형태로서의 화폐상품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상품이 아니라 화폐가 거래의 목적으로 나타나는 유통형태(G-W-G)의 비밀을 G-W-(G + G)로 밝혀냄으로써, 가치의 원천이 되는 성질을 자신의 사용가치로 지니는 특수한 상품인 노동력 상품이 자본의 가치증식의 원천이 되며, 또한 여기에서 잉여가치의 추출로서 착취가 이루어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착취의 문제는 총 생산된 가치에서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가치를 뺀 잉여가치의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3편과 4,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하(8노동일이하)에서는 1-2편의 논리적 순서에서 독립하여 자본주의의 현실적 역사의 전개과정을 분석하면서 초기 자본주의에서 이루어진 가혹한 착취의 현실 및 이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특히 󰡔자본󰡕 1권 말미의 이른바 본원적 축적에서는 자본주의의 성립 당시에 나타났던 폭력적인 수탈과정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Karl Marx, Das Kapital, I, Ibid.; 칼 마르크스, 󰡔자본󰡕 1-2,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2013.]


그런데 여기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자본의 논리적 전개과정을 서술하는 데서 나타나는 착취는 말하자면 정상적인 착취를 개념화하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나타나는 폭력을 수반하는 착취, 따라서 초과착취는 이러한 정상적인 착취에 외재적으로 추가되는 것으로 서술된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경제적 과정에서 나타나는 논리적개념적인 수준의 착취가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 계급적 폭력에 의해, 따라서 정치적으로 강제되는 초과착취가 덧붙여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후자의 초과착취는, 경제적 과정에서 실현되는 정상적인 착취(말하자면 실체로서의 착취)에 대하여 역사적정치적 현실에 따라 가변적인 강도로 더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우연적 성질처럼 사고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착취에 대한 회계적 관점에서 벗어나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본󰡕의 서술 순서의 이중성에 주의해야 한다는 알튀세르의 말은 이러한 괴리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는 이중의 쟁점을 지닌 지적이다. 첫째, 기술적 쟁점이 있다. 만약 회계적 관점에서 착취를 이해하게 되면, 착취를 줄이거나 착취에서 벗어나는 것은 잉여가치 몫을 둘러싼 분배투쟁의 형태를 띠게 된다. 곧 자본이 전유하는 잉여가치의 몫이 클수록 착취가 심한 것이며, 반대로 노동자들에게 분배되는 잉여가치의 몫이 커질수록 착취의 강도는 약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잉여가치가 어느 정도 분배되어야 정의로운 수준의 착취가 이루어지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극단적으로 모든 잉여가치를 실제 생산자인 노동자가 전유한다면 착취는 소멸하는 것인가?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이는 경제성장률이 제로가 된다는 것 또는 모든 인간 사회에 공통적인 잉여생산의 가능성이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이점에 관해서는 던컨 폴리, 󰡔자본의 이해: 마르크스의 경제이론󰡕, 강경덕 옮김, 유비온, 2015, 71 이하 및 류동민, 󰡔시간은 어떻게 돈이 되었는가?󰡕, 휴머니스트, 2018, 92 이하 참조.] 또한 착취의 본질이 회계적 공제에 있다는 관점을 받아들이면, 자본주의는 과잉착취의 경향을 늘 포함하고 있다고 고발한다고 해도, 이는 자본 운동 자체의 논리에 외재적인 것이지 그 구조 자체 내에 필연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이 자본의 논리 자체에 외재적인 경험적 조건의 문제라면, 우리는 복지국가를 통해 아니면 기본소득제의 실현을 통해 이러한 조건을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다.


따라서 만약 마르크스주의가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 내 개선만으로는 착취를 폐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착취를 폐지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론적으로 좀 더 정확히 보여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착취에 대한 회계적 관점에 입각해서는, 따라서 󰡔자본󰡕 1권에서 구현된 논리적 서술 순서를 그대로 전제한 가운데서는 제대로 수행될 수 없다는 것이 알튀세르의 관점이다. 그렇다면 비회계적 관점에서 이해된 착취, 항상 초과착취로, 따라서 구조적 폭력 및 초과폭력의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착취가 󰡔자본󰡕의 논리적 서술에서 이론화된 착취 개념과 어떻게 논리적으로 결합될 수 있는지 설명해야 하는 과제가 제기된다. 착취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계급이 잉여를 전유하지 않는 방식으로 생산조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던컨 폴리, 󰡔자본의 이해󰡕, 73 253 이하 참조.]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잉여노동시간의 결과인 잉여생산물을 어디에 얼마나 소비하고 투자하는가를 사회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민주주의의 원칙[류동민, 󰡔시간은 어떻게 돈이 되었는가󰡕, 96.]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사실 정상적인(경제논리적인) 착취와 초과적인(경제논리에 외재적인) 착취의 논리적 구별을 이미 전제하는 게 아닌지 질문해볼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에마뉘엘 테레처럼 착취는 잉여노동량만이 아니라 그 사용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착취의 문제는 정치적 문제[Emmanuel Terray, “Exploitation et domination dans la pensée de Marx”, in Combats avec Méduse, Paris: Galilée, 2011, 155, 157.]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경제와 정치 또는 지배 사이에 내재적 관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앞의 해법들보다 더 탁월한 통찰을 지니고 있지만, 착취의 문제를 인간학적인 차원(성적 지배, 인종적 배제 등)과 충분히 결부시키지 못한다는 한계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

 

2. 배제

 

착취가 노동과정 및 노동규율의 냉혹한 제약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노동력 재생산의 조건 속에서만 사고될 수 있다는 알튀세르의 주장은, 달리 말하면 착취가 권력 및 지배의 문제와 소외 내지 비인간화의 문제(따라서 구조적 폭력과 극단적 폭력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Etienne Balibar, “Exploitation, aliénation, domination”, in Catherine Colliot-Thélène ed., Que reste-t-il de Marx ?, Rennes: Presses universitaires de Rennes, 2017; 착취, 구준모 옮김, 󰡔웹진 인-무브󰡕, 2018.3.13. http://en-movement.net/139?category=733236 (2018. 11. 28 접속).] 착취가 문제가 된다면, 이는 착취가 동시에 지배의 형식이자 과정이면서 또한 예속적 인간들(불구화되고 배제된 인간들)의 생산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착취 개념을 이렇게 확장하면, 마르크스(주의) 분석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쟁점들이 등장하게 된다.


먼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생각해볼 수 있다. 푸코에 관한 진부하고 피상적인 통념 중 하나는 권력의 계보학을 반()마르크스주의적인 것으로,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와 전혀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한 마디로 말하면 푸코는 니체주의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푸코는 몇몇 인터뷰에서 󰡔감시와 처벌󰡕에서 자신이 수행한 권력의 계보학은 󰡔자본󰡕의 분석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역설한 바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언급이 대표적이다.

 

저 자신의 경우, 마르크스에서 제가 관심을 갖는 부분, 적어도 제게 영감을 주었다고 제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자본󰡕 2권입니다. 곧 첫 번째로는 자본의 발생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자본주의의 발생에 대한 분석, 두 번째로는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적 조건에 대한 분석, 특히 권력 구조 및 권력 제도의 확립과 발전에 관한 분석과 관련된 모든 것입니다. 따라서 다시 한 번 아주 도식적으로 떠올려보면, 자본의 발생에 관한 첫 번째 책과 자본주의 역사, 계보에 관한 두 번째 책 가운데 2권을 통해, 그리고 가령 제가 규율에 관해 쓴 것에 의해 저의 작업은 모두 동일하게 마르크스가 쓴 것과 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겠습니다.[Michel Foucault, Colin Gordon & Paul Patton, “Considerations on Marxism, Phenomenology and Power. Interview with Michel Foucault”, Foucault Studies, no. 14, 2012, 100-101.]

 

여기서 푸코가 말하는 󰡔자본󰡕 2은 마르크스 생전에 마르크스의 감수를 거쳐 출판된 프랑스어판 󰡔자본󰡕 2권을 뜻하며, 따라서 독일어판으로 하면 󰡔자본󰡕 1권의 4편 이하를 가리킨다는 점을 감안하면, 알튀세르와 마찬가지로 푸코 역시 자본의 논리적 연역이 전개되는 부분과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과정이 서술되는 부분을 구별하면서, 전자에 대하여 후자에 우위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알튀세르가 이를 착취의 전개과정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푸코 자신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에 관한 마르크스의 분석을 권력 구조 및 권력 제도의 확립과 발전에 관한 분석으로 읽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의 분석에서 푸코가 주목하는 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성립하고 전개하기 위한 조건이 바로 규율의 기술이었다는 점이다.[이에 관한 더 상세한 분석은 진태원, 마르크스와 알튀세르 사이의 푸코, 󰡔철학사상󰡕 68, 2018 참조.] 본래적 의미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구성되기 위해서는 노동의 형식적 포섭을 넘어선 실질적 포섭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곧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노동자들, 특히 그들의 신체가 자본의 명령에 효과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순순히 복종하지 않으며,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노동자 자신 및 그의 온전한 신체로부터 분리할 필요가 있다.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규율 기술이었으며, 마르크스가 14편의 결합노동에 대한 분석 및 기계제 대공업에 대한 분석에서 보여준 것이 바로 이점이다.

 

노동수단의 획일적인 운동에 노동자가 기술적으로 종속되어 있고 남녀를 불문하고 매우 다양한 연령층의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는 노동 단위의 독특한 구성은 군대와 같은 규율을 만들어내고, 이 규율은 공장 체제를 완전한 형태로 발전시켜 앞에서도 얘기한 감독 노동을 발전시키며, 그리하여 노동자들을 육체노동자와 노동감독자로[즉 보통의 산업병사와 산업하사관으로] 완전히 분할한다. [...] 노예 사역자의 채찍 대신 감독자의 징벌 장부가 등장한다. 물론 모든 징벌은 벌금과 임금삭감으로 귀착된다.[Karl Marx, Das Kapital, I, op. cit., 447; 칼 마르크스, 󰡔자본󰡕 I-1, 572-73.]

 

따라서 이는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규율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규율의 역사적 시기는 신체의 능력 확장이나 신체에 대한 구속의 강화를 지향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메커니즘 속에서 신체가 유용하면 할수록 더욱 신체를 복종적인 것으로 만드는, 또는 그 반대로 복종하면 할수록 더욱 유용하게 만드는 관계의 성립을 지향하는, 신체에 대한 새로운 기술이 생겨나는 시기다.”[Michel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Paris: Gallimard, 1975., 162; 󰡔감시와 처벌󰡕, 217. 강조는 인용자.]


그런데 마르크스는 규율 기술을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또는 다른 관점에서 보면 착취의 강도를 강화하기 위한 보충적인 기술로 간주한 데 반해, 푸코는 규율 개념이 착취 개념에 기능적으로 종속된다고 간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푸코는 착취가 여러 가지 규율의 기술 중 한 가지 사례라고 보았으며, 규율은 공장만이 아니라 학교에서 병원에서, 수도원에서, 군대에서, 감옥에서도 사용되었던 새로운 권력의 일반적 형식이라고 간주했다.

 

규율은 복종되고 훈련된 신체, ‘순종하는신체를 만들어낸다. 규율은 (효용이라는 경제적 관계에서 보았을 때는) 신체의 힘 force을 증대시키고 (복종이라는 정치적 관계에서 보았을 때는) 동일한 그 힘을 감소시킨다. 간단히 말하면 규율은 신체와 능력/권력le pouvoir을 분리시킨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신체를 적성aptitude’, ‘능력 capacité’으로 만들고 그 힘을 증대시키려 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에너지와 그로부터 생길 수 있는 역량puissance’을 역전시켜, 그것들을 엄격한 복종관계sujétion로 만든다. 경제적 착취가 노동력과 노동 생산물을 분리시킨다면, 규율에 의한 강제는 증가되는 적성과 확대되는 지배 사이의 구속관계를 신체를 통해 확립해둔다.[MIchel Foucault, Ibid.; 같은 책, 같은 곳. 번역은 수정.]


실로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가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규율 기술이 14-15세기 수도원에서 처음 생겨난 이후, 사회의 말단 곳곳에서 적용되고 변형되고 확산되어 18세기 이후에는 근대 권력의 지배적인 형식으로 일반화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푸코가 보기에는 규율이야말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성립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노동자의 신체 및 노동력, 그리고 생산력이라는 것 자체를 만들어내는 권력의 기술이었으며, (회계적으로 이해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착취 개념에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것은 바로 규율 권력이었다.


이 글의 목적은 마르크스주의적 착취 개념과 푸코적인 규율 권력론 가운데 어떤 것이 더 논리적으로 우위에 있는가를 따지는 데 있지 않다. 이는 누가 마르크스주의자이고 누가 푸코주의자인지(또는 포스트 담론의 지지자인지) 가리고자 하는 문제나 아니면 푸코가 마르크스(주의)와 과연 양립 가능한지 아닌지 따지는 문제로 귀결되기 쉽다. 전자가 무익한 정체성 투쟁 내지 인정투쟁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마르크스주의 및 착취의 이론적 우위를 가정한 가운데 푸코가 이것으로 포섭될 수 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다. 이런 질문이 과연 마르크스주의에, 더 나아가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을 위해 바람직한 것인지는 의문이다.[푸코 자신도 자신의 작업을 일종의 역사유물론에 대한 탐구로 이해한 바 있다.] 오히려 내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푸코가 규율 권력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리고 이후에는 생명권력 및 통치성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적 착취와 지배, 그리고 비인간적 예속 과정에는 경제적 분석 및 계급적 분석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인 권력의 메커니즘이 필요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며, 이는 비회계적인 관점에서 착취를 이해하기 위해, 곧 잉여가치의 추출은 동시에 권력의 형태이자 비인간적 예속화의 형태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통찰이라는 점이다.[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쉬운 것은 미하엘 하인리히나 던컨 폴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데이비드 하비 역시 푸코의 권력 분석의 함의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하비는 영어권에서 푸코를 자주 맑스와 전혀 대립되는 사상가로 간주되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하면서 푸코가 맑스의 논의를 일반화시켰다는 점을 인정한다. 데이비드 하비,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강의󰡕, 276.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와 푸코의 차이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회계적 관점을 넘어서는 착취에 대한 분석에서 이러한 차이가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푸코의 규율 권력 분석이 예속적 주체화assujettissement의 메커니즘에 관한 분석이라는 점 역시 중요하다. 특히 푸코는 광인들의 정신의학적 예속화(󰡔광기의 역사󰡕), 학생들의 규범적 예속화(󰡔감시와 처벌󰡕), 성적 예속화(󰡔성의 역사 1󰡕)와 같이, 계급 지배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예속화 작용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예속화는 경제적으로 기능적인 예속화를 넘어서 그러한 예속화에서 배제된 더 근원적인 예속화 작용들을 수반한다. 사실 푸코는 규율권력의 특징 중 하나를 여백marges”이나 잔여résidus”를 만들어내는 데서 찾는다. 곧 규율화된 군대의 출현 이후 비로소 탈영병이라는 존재가 생겼으며, 학교규율이 정신박약을 출현시켰고, “비행자(非行者)délinquants”를 만들어내는 것은 경찰의 규율이다. 그리고 정신병자malade mental”잔여 중의 잔여, 모든 규율의 잔여이며, 한 사회에서 발견될 수 있는 학교, 군대, 경찰 등의 모든 규율에 동화 불가능한 자라고 할 수 있다.[진태원, 마르크스와 알튀세르 사이의 푸코, 앞의 글, 226-27.]

 

따라서 규율 권력은 단순히 자본주의 체계의 기능을 위해, 그것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기능주의적 요소들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에서 주변화되고 배제된 이들앞에서 보았듯이 마르크스 자신이 사회의 찌꺼기로서 룸펜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름으로밖에 부르지 못했던 이들을 함께 생산해낸다. 그렇다면 규율 권력은 예속적 주체화의 권력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배제의 권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마도 더 정확히 말하면 배제를 통한 예속화의 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의 배제는 절대적 배제(곧 사회 내지 공동체 바깥으로의 추방)라기보다는 내적 배제라고 할 수 있다. 내적 배제는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일정한 부류의 사람들(이들은 사회의 대다수일 수 있다)을 사회 속에서 2등 시민, 2등 국민, 따라서 2등 인간으로 존재하고 살아가도록 강제하는 제도적실천적담론적 메커니즘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 널리 확산되어 있는 용어법을 따르자면, 사람들로 하여금 을로서, 또는 병이나 정과 같이 을의 을로서 존재하고 행위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바로 내적 배제의 메커니즘이다. 오래 전부터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바로 여성들이야말로 이러한 내적 배제의 대상이 되어왔다고 주장해왔으며, 특히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마르크스의 착취 개념만으로는 가정 내에서 여성들의 착취라는 문제, 또는 착취 과정에 구조적으로 개입하는 젠더 차별의 문제를 제대로 해명할 수 없다고 비판해왔다.[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및 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 등을 참조. 또한 아시아 지역의 여성노동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마리아 미즈를 비롯한 독일 페미니즘 이론의 난점을 극복하려는 피터 커스터스, 󰡔자본은 여성을 어떻게 이용하는가󰡕, 박소현장희은 옮김, 그린비, 2015의 작업도 참조하라.]


이런 측면에서 낸시 프레이저의 최근 작업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하버마스 이후의 비판이론이 오랫동안 자본주의 비판을 소홀히해왔다고 지적하면서,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입각한 자본주의 비판을 넘어서는 확장된 자본주의 비판의 필요성을 제기한다.[Nancy Fraser, “Behind Marx’s Hidden Abode: For an Expanded Conception of Capitalism”, New Left Review, no. 181, 2015; “Roepke Lecture in Economic Geography: From Exploitation to Expropriation”, Economic Geography, vol. 94, no. 1, 2018; Nancy Fraser & Rahel Jaeggi, Capitalism: A Conversation in Critical Theory, London: Polity, 2018을 각각 참조.]  프레이저는 이를 특히 하나의 ‘ex-’에서 다른 ‘ex-’로의 전환이라고 규정한다. 곧 마르크스주의적인 자본주의 비판의 핵심 개념이었던 착취 exploitation’에서 수탈/비전유 expropriation’으로의 전환이 바로 그것이다. 프레이저가 말하는 확장된 자본주의관은 크게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이는 마르크스가 유통관계에서는 풀리지 않는 자본의 가치증식의 수수께끼를 생산의 감춰진 장소에서 밝혀내듯이, 마르크스(주의)의 착취 개념(곧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면 착취에 대한 회계적인관점)만으로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착취의 조건을 설명하기 위해 착취 개념을 넘어서 수탈/비전유 개념을 제안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착취 개념은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자유롭고 평등한 교환 관계라는 허상 속에 존재하는, 그러한 관계의 숨겨진 조건으로서의 자본주의적 착취의 냉혹한 현실을 밝혀내고 있지만, 이러한 착취 자체가 또 다른 조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맹목적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프레이저의 명쾌한 정식에 따르면, “자본이 수탈하는/비전유하는이들의 예속 subjection, 자본이 착취하는이들의 자유를 위한 숨겨진 가능성의 조건[Nancy Fraser, “Roepke Lecture in Economic Geography: From Exploitation to Expropriation”, Economic Geography, op. cit., 4. 강조는 원문.]이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착취하는 이들의 자유란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언급했던 노동자들의 이중의 자유를 의미한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신분적 예속에서 자유로워야 하며 또한 생산수단의 소유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자유로운 노동자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생산되고 재생산되어야 한다. 곧 생명체로서 탄생해야 하고 양육되어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로 성장해야 하며, 또한 성인이 되어서도 그의 삶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노동을 맡아서 수행해주는 누군가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후자의 생산노동과 재생산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 따라서 생산적 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축적의 회로 바깥에 존재한다. 또한 중심부 자본주의 노동자들 및 그의 가족들이 생필품을 싼 값에 구입해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변부 국가들의 자본주의적 회로 안팎에서 저임금과 초과노동의 강제에 예속되어 있는 다른 존재들이 항상 이미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프레이저가 말하는 착취와 구별되는 수탈/비전유라는 개념이다.


둘째, 이러한 수탈/비전유가 자본주의적 착취의 가능 조건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좁은 의미의 경제적 과정 이전과 이후에 이루어지는 정치적 예속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정치적 예속이 반드시 법적신분적 예속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법적형식적으로는 자유롭고 평등할 수 있지만, 실제의 삶의 조건 속에서는 2등 시민, 2등 인간으로서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예속의 메커니즘을 가리킨다. 프레이저는 특히 인종적 예속을 이러한 정치적 예속의 핵심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프레이저에 따르면, 오늘날 자본주의적 착취와 폭력, 예속의 현실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착취개념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이를 수탈/비전유라는 개념으로 확장해야 한다. 이것은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착취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예속적 주체화의 메커니즘, 곧 내적 배제의 메커니즘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배제의 문제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거론했던 푸코와 프레이저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 사이에는 당연히 관점의 차이 및 갈등의 소지가 존재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차이 및 갈등을 배타적인 양자택일(또는 삼자택일)의 대상으로 간주하기보다, 말하자면 이접적인 종합또는 생산적인 경합의 문제로 사고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3. 리프리젠테이션

 

만약 그렇다면 오늘날 자본주의를 위한 저항 내지 투쟁은 회계적 관점에서 이해된 착취에 맞선 투쟁으로 한정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계급적 지배의 문제로 국한될 수 없는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한 지배와 소외, 예속화와 배제의 권력에 대한 투쟁을 요구한다. 이런 관점에서 마지막으로 리프리젠테이션의 문제를 제기해볼 수 있다. 아마 착취 및 지배, 소외에 대한 저항과 관련하여 리프리젠테이션이라는 개념이 왜 문제가 되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는 리프리젠테이션이 대개 대의 민주주의적 맥락의 대표라는 개념, 특히 의회적 대표라는 개념으로 이해되거나 아니면 미학적 맥락에서 재현으로 또는 인식론적 의미의 표상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더욱이 이 상이한 의미들에 따라 규정된 서로 다른 리프리젠테이션들이 서로 분리된 채로 단독적으로 통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리프리젠테이션 개념은 통용되는 용법으로 환원될 수 없는 두 가지 핵심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착취와 배제, 소외의 문제를 사고하고 그것에 맞서기 위한 투쟁을 고려하는 데도 중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다.


우선 리프리젠테이션 개념은, 낸시 프레이저의 표현을 빌리면 틀 짜기framing’의 위상을 지닌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낸시 프레이저, 󰡔지구화 시대의 정의󰡕, 그린비, 2009.프레이저는 지난 20여 년 동안 자신이 수행해왔던 정의의 두 가지 차원, 곧 재분배와 인정을 넘어서 세 번째 차원을 고려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것은 곧 정체성의 차원인데, 이는 리프리젠테이션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여기에서 정체성이란 일차적으로 사회정치적인 정체성을 가리키며, 이는 국민적 정체성이나 계급적 정체성, 인종적 정체성 또는 성적 정체성의 문제 등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탈형이상학의 관점에서 볼 때 정체성, 특히 사회정치적 정체성이란 초월적인 기원(신성과 같은)이나 자연적인 본성(혈통이나 문화적 전통 같은)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라 상상적이며 구성되는것이다. 그리고 프레이저에 따르면 이처럼 정체성들을 형성하고 변형하고 재구성하는 틀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리프리젠테이션이다.


프레이저와 약간 다른 맥락에서, 곧 포스트 담론의 맥락에서 문제를 정식화해볼 수도 있다. 특히 자크 데리다의 탈구축 이론에 따르면, 재현이라는 작용에 선행하여 현존하는 사물 그 자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존하는 사물은 재현 작용에 의해 성립하며, 그러한 작용에 의존한다. 둘째, 이처럼 재현 이전에 사물의 현존이 미리 존재한다는 생각, 따라서 기원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서양 형이상학에 고유한 특성 중 하나이며, 이런 의미에서 서양 형이상학은 현존의 형이상학métaphysique de la présence이라고 할 수 있다.[현존의 형이상학은 현전(現前)의 형이상학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하이데거 국내 수용 과정에서 하이데거의 Anwesen 개념을 현전이라는 번역어로 옮긴 하이데거 연구자들의 영향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Anwesen 개념은 영어로는 presence, 불어로는 présence로 번역되는데, 하이데거 자신이 사용하지 않은 현존의 형이상학이라는 개념을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이론화한 사람은 자크 데리다이며, 데리다 사상의 영향력으로 인해 현존의 형이상학이라는 개념이 현대 인문사회과학의 공통 개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현전보다 현존이라는 개념이 더 자연스럽고 가독성이 있다.] 현존의 형이상학은 기원 그 자체, 현존 그 자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기원 및 현존은 재현 작용에 의거하여 사후에 성립한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을 자신의 기능으로 삼고 있다. 이런 관점에 의하면 재현으로서의 리프리젠테이션 이전에 그 자체로 성립하는, 따라서 자연적이거나 불변적인 계급적 본질이나 성적 본질 또는 인종적이거나 민족적국민적 본질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전형적인 현존의 형이상학이다. 아울러 현존의 형이상학은 단순히 사실에 대한 그릇된 표상에 머물지 않고, 실천적인 장애로 기능한다. 재현에 앞서 현존하는 사물의 본질, 계급적 본질이나 성적 본질, 인종적이거나 민족적국민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이면 본질적일수록 자기를 중심화하고 심지어 절대화하며 다른 본질이나 정체성을 하위의 것으로 포섭하고 종속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중심의 신화, 대문자 주체의 신화, 이행의 신화가 모두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아울러 그것이 순수한 본질을 강조하는 만큼, 계급적 관계이든 성적 관계이든 또는 인종적이거나 국민적 관계이든 간에 그 내부에 있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억압하거나 배제하려고 한다. 따라서 이는 용어모순적이게도 배제적 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로 간주하는 도착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그렇다면 재현 작용 이전에 선행하는 순수한 본질은 존재하지 않으며, 재현 작용 또는 재-현 내지 재-현시화re-presentation 작용이야말로 실재와 정체성을 생산하고 재생산하고 변용하는 틀 짜기의 작용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대표로서의 리프리젠테이션의 문제도 재고찰해 볼 수 있다. 지난 20여 년 간 특히 영미 정치학계를 중심으로 대표의 문제에 관한 새로운 탐구가 진행되어 왔다. 논자에 따라 대표론적 전회representative turn’라고 하거나[특히 Nadia Urbinati/Mark Warren, “The Concept of Representation in Democratic Theory”, Annual Review of Political Science, vol. 11, 2008.] 구성주의적 전회constructivist turn’라고 하는[특히 Lisa Disch, “The ‘Constructivist Turn’ in Democratic Representation”, Constellations, vol. 22, no. 4, 2015.] 이러한 재해석 작업의 요점은 정치적 대표에 관한 표준적 설명을 해체하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대표라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통상적인 생각이 가정하듯, 인민 내지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이므로, 민주주의를 원래의 민주주의와 다른 것으로, 다시 말하면 인민 내지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대신 그 대표자들이 간접적으로 수행하는 민주주의로, 따라서 순도가 덜할뿐더러 때로는 민의를 왜곡하거나 변질하고 소수의 권력자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표는 민주주의 본질”[Sofia Näsström, “Representative Democracy as Tautology”, European Journal of Political Theory, vol. 5, no. 3, 2006, 330.]로 간주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이는 우선 대표라는 것이, (1) 이미 그 자체로 존재하는 국민 내지 유권자가 (2) 역시 그 자체가 이미 보유하고 있는 공통의 이해관계 내지 의지를 (3) 그 대행자로서의 대표자가 말 그대로 대표/재현하는 것, 곧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표 이전에는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는 개인들과 집단들이 자신들의 공통의 의지를 거의 주장하지 못하기때문에, 따라서 실제로는 정치적 주체 내지 행위자들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이 자신들의 공통의 의지를 갖고 행위하기 위해서는 대표 제도와 권위 부여 절차”[Iris Marion Young, Inclusion and Democrac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130 이하.]가 필수적인 것이다. 더 나아가 대표는 유권자 내지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가로 막거나 제한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러한 참여의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한 연구자가 적절하게 말하듯이 대표의 반대말은 참여가 아니라 배제”[David Plotke, “Representation is Democracy”, Constellations, vol. 4, no. 1, 1997.]인 것이다. 가령 20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대표될 수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부재하는 존재자였으며, 자기 자신을 현시하고 재현할 수도 없었다.[이런 측면에서 보면 남녀 동수제 parité’의 문제는 리프리젠테이션의 주제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쟁점을 제기한다. 조앤 W. 스콧, 󰡔성적 차이, 민주주의에 도전하다󰡕, 오미영 외 옮김, 인간사랑, 2009 참조. 나에게 이 점을 일깨워준 문지영 선생께 감사드린다.] 오늘날 한국에서 19세 미만의 시민들은 정치적으로 보면 그냥 부재하는 존재자들일 뿐이다. 더욱이 정치적 대표, 따라서 자기 재현 및 현시의 근원적인 전제가 국민적 소속이라는 것을 진지한 문제로 생각하는 한국의 마르크스주의자를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리프리젠테이션의 문제는 단순히 이미 주어져 있는 정치적 틀 내에서 누구를 자신의 지지자로 포섭할 것인가, 어떻게 적대적 정파 및 세력을 약화시키고 우리의 세력을 강화할 것인가, 따라서 결국 어떻게 집권당이 되고 대통령이 될 것인가의 문제로 국한될 수 없다(이 문제들도 당연히 중요하다). 그것은 누가 과연 대표될 만한 존재자인가, 누가 대표 가능한 이들의 범주에 속하고 대표 불가능한, 또는 대표되지 않아도 무방한 이들의 범주에 속하는가, 그러한 분할은 어떤 기준에 따라 작동하며 그것은 계급적 관계 내지 젠더 관계 또는 인종적이거나 국민적 관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또한 그것을 어떻게 전환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가령 󰡔불화󰡕에서 랑시에르가 민주주의를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고 규정했을 때, 그가 말하는 몫이란 재분배적인 차원에서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도 소수자 집단의 정체성 및 권리에 대한 인정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 양자를 물론 포함하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 기존의 틀 짜기 질서, 그가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고 부른 치안의 질서 내지 아르케의 질서에 대한 해체와 전위(轉位)를 함축하는 것이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정치의 쟁점을 정체화 identification 대 주체화 subjectivation의 문제로 규정한 바 있다.[자크 랑시에르, 정치, 동일시, 주체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길, 2013(수정 2) 참조.] 전자가 기존의 치안 질서를 자연적인 것으로 전제한 가운데 그 속에서 각각의 집단과 개인들에게 정체성과 몫을 할당하는 작용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이러한 치안의 질서를 해체하고 전위하는 작용을 지칭한다. 랑시에르 자신은 양자를 다소 배타적으로 대립시키고 있지만,[이는 랑시에르의 치안 개념이 기본적으로 탄성이 부족한 개념이라는 것, 곧 치안의 역사성을 사고하지 못하게 만드는 개념이라는 점과 연결되어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정치의 핵심 쟁점 중 하나는 틀 짜기로서 리프리젠테이션의 문제라는 것, 따라서 주체화의 문제라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IV.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마르크스주의의 네 가지 신화 및 그것의 해체에서 제기될 수 있는 세 가지 쟁점이 마르크스주의의 탈구축과 관련한 유일한 관점이라거나 가장 포괄적인 시각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이러한 해체와 재구성이 오늘날 마르크스주의가 좀 더 이론적실천적으로 적합성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 중 하나라는 점은 지적해두고 싶다. 이러한 탈구축 작업을 거치지 않는 한, 마르크스주의는 계속해서 자신의 게토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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