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토요판에 실린 콩고 출신 "난민 불인정자" 인터뷰 기사 


그리고 이 기사에 실린 여러 댓글들 ... 


http://v.media.daum.net/v/20180624102618125?rcmd=rn



한국이 얼마나 민족주의로서의 국민주의가 강한 나라인지 새삼 느끼게 되는 댓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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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예멘 난민 문제가 상당한 화제를 모으고 있다. 


관련 기사들 가운데 오늘자 한겨레 토요판 기사를 링크해둔다. 


예멘서 온 7살 소녀는 도화지에 감옥을 그렸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0258.html


미투운동,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확대한 최저임금법 개정안과 더불어 예멘 난민 문제는 


국민주권을 표방하는 문재인 정권의 민주주의의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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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학술정책에 관한 한겨레 연속 기획 기사입니다.


지난 첫번째 기사는 인문한국 정책의 문제점에 관한 것이었고,


두번째 기사 제목은 "무탈한 '연구비 출납'만이 학술정책의 전부인가"입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491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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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 기사를 링크합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48186.html


적절한 시점에 나온 뜻 깊은 기획 기사라고 평가할 만합니다.


인문학의 새 판을 어떻게 짜야 할지 깊은 성찰과 고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좀 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비전 아래 인문학의 토대를 다지고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짧게는 지난 10여 년 동안, 길게는 지난 60여 년 동안의 한국 인문학과 인문학 정책에 대한 


포괄적인 반성 작업도 수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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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에서 내는 [철학논집] 53집에 게재될 논문을 한편 올립니다. 


이 논문 역시 완전히 교정이 끝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인용이나 토론을 원하는 분들은 [철학논집]에 실린


판본을 대상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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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초월론: 데리다와 이성의 탈구축

 

 

[주제 분류] 현대프랑스철학, 정치철학

[주제어] 자크 데리다, 유사초월론, 포스트 담론, 대체보충, 자기면역

[요약문]

이 글은 자크 데리다의 사상을 유사초월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데리다는 초기에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늘 허무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 같은 비판에 시달려왔으며,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자 데리다라는 문구로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데리다는 자신이 포스트모더니스트라는 점을 강력하게 부인해왔다는 점에서 이는 부당한 비판이며, 더욱이 데리다 철학의 내적 논리를 고려할 때에도 이러한 비판들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는 유사초월론의 관점에서 데리다 철학을 이해할 경우 데리다 사상을 좀 더 일관되게 그리고 좀 더 적극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사초월론이라는 개념은 데리다가 칸트에서 시작된 초월론 철학의 흐름에 속해 있으며, 그 문제의식을 더 급진적으로 발전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 유사초월론은 초월론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사이에 불변적인 위계를 설정하는 대신, 양자 사이에 상호조건의 관계를 설정하기 때문에, 초월론적인 것은 급진적으로 역사화된다. 이는 데리다가 이성과 정의의 문제를 아포리아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이유를 더 잘 해명할 수 있게 해준다.

 

 

 

I. 데리다는 포스트모더니스트?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외국에서만이 아니라 국내에서도 늘 몇 가지 수식어와 결부되는 인물이다.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상대주의, 허무주의 ... 사실 유명한 철학자들은 대개 이런저런 수식어들을 통해 알려지기 마련이다. 가령 플라톤은 이데아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철학, 스피노자는 범신론,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헤겔은 변증법,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또는 공산주의), 하이데거는 현존재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데리다가 몇 가지 수식어를 통해 사람들 입에 거론된다는 사실에 특이한 점은 없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데리다를 수식하는 이 표현들은 대개 부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데리다를 수식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 문구들 중에서 데리다 자신이 직접 사용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수식어들이 부정적 성격을 띤다는 것을 점을 잘 드러내주는 증거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어떤 철학자를 규정하기 위해 그 철학자가 사용하지 않는 문구, 더욱이 그 철학자를 비판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문구를 동원한다는 것은 철학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또 다른 예를 든다면, 냉혹한 군주론자 마키아벨리나 범신론자스피노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데리다가 자신의 철학을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또는 해체주의로 규정하는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항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또 󰡔마르크스의 유령들󰡕 및 나의 작업 일반을 포스트모더니즘 내지 포스트구조주의라는 ”()의 단순한 한 가지 종()이나 경우 또는 사례로 간주하려는 모종의 성급한 시도 때문에 충격을 받는다. 이 통념들[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옮긴이]은 바로 가장 미흡한 정보를 지닌 공중(대개의 경우 거대 언론), “해체를 필두로 자신이 좋아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쓸어 담는 잡동사니 부대자루들이다. 나는 내가 포스트구조주의자도 포스트모더니스트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러 번에 걸쳐, 내가 하려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일러두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왜 내가 이 단어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지 설명했다. 나는 결코, 더군다나 내 나름대로 활용하기 위해 모든 메타서사의 종말의 예고에 관해 말한 적이 없다. ... 또한 사람들은 앞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하지만 역시 아주 부당하게도, 위대한 메타서사 담론, “큰 이야기와 비교해 볼 때 해체주의자들또 다른 잡동사니 통념은 보잘 것 없이 약하다고 비난하곤 했다.[자크 데리다 외 지음, 󰡔마르크스주의와 해체: 불가능한 만남?󰡕, 진태원한형식 옮김, , 2009, 163~64. 강조는 데리다.]

 

이러한 이상한 평가 방식은 국내의 경우에 한층 더 심각한 형태로 표현되는데, 이는 1990년대 이후 포스트 담론을 비롯한 서양 이론의 수용 방식이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라고 부른 바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이 문제에 관해서는 진태원, 좌파 메시아주의라는 이름의 욕망, 󰡔황해문화󰡕 2014년 봄호;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란 무엇인가, 󰡔황해문화󰡕 2014년 겨울호를 참조.]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는 간단히 말하면 오늘날 한국 인문학에서 회자되는 많은 담론들이 미국을 통해 가공되고 변형되고 수입된 담론이라는 사실[진태원, 좌파 메시아주의라는 이름의 욕망, 194.]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은 일부 독자들이 오해하듯이, 원래는 해방적이고 비판적인 사상으로서의 프랑스 철학이 제국주의의 본산인 미국을 경유하면서 그 비판적 잠재력을 거세당한 채, 국내에는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인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변형되어 수입되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프랑스 철학 사상을 비롯한 유럽 사상을 창조적으로 수용하여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포스트페미니즘 등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이론적 담론들을 만들어낸 영미 학계의 생산적 변용 능력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실제로 원래 프랑스 학계에는 존재하지 않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식민주의 같은 담론은 역으로 최근 프랑스 학계에 역으로 수입되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라는 주장은 오히려 미국에서 변용되고 재창조된 담론들을 글로벌한 첨단 유행 담론으로서 그때그때 재빨리 수입해서 등재지 논문들이나 교양 대중 저술을 생산하기 위한 편리한 자원으로 이용하는 데 골몰하는, 지난 20여 년 동안의 유행의 흐름 속에 비친 한국 인문학의 지적정치적 자화상을 드러내보이[진태원,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란 무엇인가, 앞의 글, 229~30.]기 위한 목적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에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포스트 담론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 우리가 이 담론들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묻기보다는, 그것이 학문의 본고장인 미국 학계에서 첨단의 담론으로 유행한다는 사실만으로 앞 다퉈 수입하여 소비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 담론들과 관련하여 무언가 의미 있는 논쟁과 토론 대신에 일방적인 거부와 맹목적인 추종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는 이러한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데리다는 포스트 담론의 대표자로 널리 간주된다. 해체나 차연, 로고스중심주의 같은 단어들은 그의 철학을 지칭하는 용어들만이 아니라 포스트 담론 일반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지난 1980년대 말 이래 30여 년이 지나는 동안 그의 사상에 관해 무언가 독창적이거나 깊이 있는 저작들이나 논의들이 존재해왔느냐고 질문해본다면, 그 답변은 다분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김진석 교수의 초기 저작이나 김상환 교수의 몇몇 글, 또는 문성원 교수의 저작을 제외한다면,[김진석, 󰡔탈형이상학과 탈변증법󰡕, 문학과지성사, 1993; 문성원, 󰡔해체와 윤리: 변화와 책임의 사회철학󰡕, 그린비, 2012; 김상환, 󰡔철학과 인문적 상상력󰡕, 문학과지성사, 2013을 각각 참조.] 사실 국내에서 데리다는 이름만 유행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데리다는 늘 포스트 담론의 대표자로 거론되곤 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포스트 담론의 빈곤을 비판하기 위한 사례로 동원되곤 한다. 그의 사상의 실제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아무런 이론적 영향력을 미친 적이 없는 데도 포스트 담론의 대표자로 간주되는 이 현상만큼,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 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없다.


내가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 현상에 대해 서두에서 길게 논의한 까닭은, 데리다와 관련하여 이성과 반이성이라는 주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주제에 관한 선입견들을 교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체주의의 대표자로 간주된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데리다가 ()근대성, 따라서 반이성, 반합리성, 반주지주의의 대표자로 이해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앞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데리다 스스로 자신의 철학을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포스트구조주의, 또는 심지어 해체주의의 일종으로 규정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규정이 사실은 포스트 담론 및 데리다의 비판자들에 의해 주로 사용되어온 것이 사실이라면, 이성과 반이성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데리다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해석의 틀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유사초월론(quasi-transcendental)이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데리다 철학과 이성의 관계를 재조명하고 싶다.[데리다의 철학을 유사초월론의 관점에서 탐구하는 기존의 연구로는, Rodolphe Gasché, The Tain of the Mirror: Derrida and the Philosophy of Reflection, Cambridge, Mass., 1986; Matthias Fritsch, The Promise of Memory: History and Politics in Marx, Benjamin, and Derrida, New York, 2005; Maxime Doyon, Der transzendentale Anspruch der Dekonstruktion, Würzburg, 2010 등을 참조. 로돌프 가셰의 저서는 데리다 철학에서 유사초월론 개념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밝힌 업적이 있으며, 마티아스 프리취의 연구는 벤야민과 마르크스의 사상을 데리다가 유사초월론의 관점에서 종합 내지 재구성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또한 막심 두아용의 연구는 지금까지 나온 저작 중에서 데리다의 유사초월론 개념에 대한 가장 체계적이고 충실한 연구다. 국내의 논의로는 진태원, 시간과 정의: 벤야민, 하이데거, 데리다,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편, 󰡔철학논집󰡕 34, 2013, 174 이하 참조.]


 

II. 유사초월론이란 무엇인가?

 

근대철학에서 초월론적(transzendental) [‘transzendental’(또는 영어로는 ‘transcendental’)이라는 용어 번역의 경우 예전에는 주로 선험적이라는 번역어를 많이 사용해 왔으며, 최근 칸트의 주요 저작을 번역해온 백종현 교수는 초월적이라는 번역어를 제안한 바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전통적인 초월개념과의 구별을 위해서, 그리고 칸트의 철학적 독창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오히려 초월론적이라는 번역어가 더 적절한 것 같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계속 초월론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 그리고 ‘a priori’선험적이라고 번역하겠다.] 철학은 칸트에게서 시작된다. 칸트에게 초월론은 인식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인식의 선험적(a priori) 가능성”[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6, 132(A56/B80).]의 조건을 탐구하는 철학적 탐구 양식을 가리킨다. 이러한 초월론적 탐구 절차에 의거하여 칸트는, 주체 이전에, 그리고 주체 바깥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물들의 질서와 그 근거를 탐구하는 전통적인 철학에 대하여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수행하게 된다. 곧 이제 사물들의 질서는 주관성 내부에, 정확히 말하면 초월론적 주관성 내부에 그 근거를 두게 된다.


현대철학자들 가운데 칸트의 초월론 철학을 자기 나름대로 재개한 사람이 바로 에드문트 후설이며, 후설 이후의 현대 철학, 곧 현상학에 영향을 받은 철학, 따라서 실제로는 거의 모든 유럽 철학이 한편으로는 칸트-후설 식의 초월론적 문제설정을 계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문제설정을 변형하고 또 넘어서기 위해 고투했다. 가령 칸트나 후설과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질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을 초월론적 경험론(empirisme transcendantal)으로 지칭하는 것[초월론적 경험론으로서 들뢰즈 철학에 대해서는 안 소바냐르그, 󰡔들뢰즈. 초월론적 경험론󰡕, 성기현 옮김, 그린비, 2016 참조.]이나 푸코가 󰡔지식의 고고학󰡕에서 역사적 선험”(a priori historique) 개념에 준거하고 말년에는 현재의 존재론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작업을 재설정하면서 비판을 더 이상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는 형식적 구조들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사건들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구성하도록 이끌어온,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우리가 하고 사고하고 말하는 것의 주체들로서 인지하도록 이끌어온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역사적 탐구”[M. Foucault, “Qu'est-ce que les lumières?”, in Dits et écrits, vol. II, “Quarto”, Paris, 2001, 1393.]로 정의하는 데서도 칸트의 영향과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살펴볼 수 있다.

20세기 후반 유럽철학자들 가운데 칸트-후설의 초월론적 문제설정을 가장 충실하게 계승한 사람으로 흔히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를 꼽지만, 데리다 역시 그 나름의 방식으로 매우 철저하게 초월론적 탐구 방식을 수행했으며, 또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파리 고등사범학교 졸업논문[J. Derrida, Le problème de la genèse dans la philosophie de Husserl, Paris, 1990. 이 논문은 1955년에 제출되었으며, 1990년에 단행본 저작으로 출간되었다.]에서 󰡔기하학의 기원서론󰡕(1962), 그리고 󰡔목소리와 현상󰡕(1967) [J. Derrida, La voix et le phémonène, Paris, 1967; 󰡔목소리와 현상󰡕, 김상록 옮김, 인간사랑, 2006.]에 이르기까지 데리다는 후설 현상학에 관해 지속적으로 탐구했으며, 최고의 후설 전문가 중 한 사람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목소리와 현상󰡕 이후 데리다는 더는 현상학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지 않고, 그 대신 그가 기록학”(grammatologie) [이것은 원래 문자학이라는 언어학의 한 분야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고대 상형문자나 설형문자, 표음문자 등을 비교연구하는 학문이 곧 문자학이다. 데리다는 이 학문을 가리키는 명칭인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ie)의 어근을 이루는 gramme라는 그리스어가 문자또는 기록을 뜻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문자 기록을 포함한 기록 일반에 관한 학문을 지칭하는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기록학은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De la grammatologie, Paris, 1967)만이 아니라 초기 데리다 철학의 한 가지 중핵을 이루는 개념이다. 번역에 관해 한 마디 해둔다면, 국내에는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의 세 번역본이 존재한다. 1996년 민음사에서 나온 김성도 번역본과 2004년 동문선 출판사에서 나온 김웅권 번역본, 그리고 2010년 민음사에서 나온 김성도의 수정 번역본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세 권의 번역서는 모두 심각한 오역을 포함하고 있어서 활용이 거의 불가능하다.]이라고 부른 문제설정에 입각하여 (문자)기록(écriture)과 차이, 산종(散種, dissémination)의 개념들을 탐구하면서 서양 형이상학의 탈구축을 시도한다.[이 시기의 대표작이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문자기록과 차이󰡕(1967), 󰡔산종󰡕(1972) 등이다.] 하지만 기록학의 문제설정만이 아니라 그 이후 데리다의 작업에서도 초기 현상학 연구에서 수행된 후설 현상학에 대한 엄밀한 탈구축의 논리는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러한 탈구축의 논리를 집약하는 개념이 바로 유사초월론이다.


데리다의 유사초월론은 아주 간단하지만 수수께끼 같은 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칸트 이후의 초월론 철학이 가능성의 (선험적) 조건을 탐구한다면, 유사초월론은 가능성의 조건은 동시에 불가능성의 조건이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데리다가 자신의 유사초월론 개념에 관해 명시적으로 논평하는 아주 드문 곳에서 부연하는 것을 조금 더 들어보자.

 

초월론적인 것의 문제는 '유사'(quasi-)라는 말에 의해 변형되어 왔으며, 따라서 만약 초월론성이 나에게 중요한 것이라면, 이는 단순히 그 고전적인 의미에서 그런 것이 아니다(비록 고전적 의미의 초월론성이 나에게 여전히 아주 흥미롭지만 말이다). ... 이 새로운 형태의 초월론적 질문하기는, 고전적인 초월론적 진지함의 유령을 단순히 흉내내는 데 그치지 않으면서도 이러한 유령 내에서 본질적인 유산을 구성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 나는 지난 30년 동안 규칙적으로, 그리고 아주 상이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가능성의 초월론적 조건은 또한 불가능성의 조건인 것으로 정의해야 할 필연성으로 인도되었다. 이는 내가 무효화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분명 가능성의 기능을 불가능성의 기능으로 정의하는 것, 곧 가능성을 불가능성으로서 정의하는 것은 전통적인 초월론적 관점에서 볼 때 정통적인 입장과 매우 어긋나는 태도이며, 내가 아포리아의 숙명성이라는 문제로 되돌아갈 때마다 항상 다시 출현한 것이 바로 이러한 정의다. [J. Derrida, “Remarks on Deconstruction and Pragmatism”, in Chantal Mouffe ed., Deconstruction and Pragmatism, LondonNew York, 1996, 83-84.]


이 인용문에서 데리다 자신이 명시적으로 지적하듯이, 30여 년 넘게, 1962년 출간된 󰡔기하학의 기원서론󰡕에서부터 1993년 출간된 󰡔아포리아들󰡕[J. Derrida, Apories, Paris, 1993.]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데리다가 2004년 사망할 때까지도 계속해서 데리다 작업의 중심적인 축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 바로 유사초월론 개념이다.[반면 리처드 로티는 데리다 자신의 명시적인 언급에도 불구하고 데리다 철학이 유사초월론 철학이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부정한다. 그는 데리다가 초기의 철학적 작업에서 후기에는 글쓰기’(writing)와 문학을 중심으로 한 사적 아이러니스트’(private ironist)로 이행했다는 자신의 분석 도식을 고수하면서, 데리다 자신의 자기 해명을 인정하지 않는다. R. Rorty, “Is Derrida a Transcendental Philosopher?” In Essays on Heidegger and Others: Philosophical Papers, Cambridge, 1991; “Is Derrida a "Quasi"-Transcendental Philosopher?”, Contemporary Literature, vol. 36, no. 1, 1995 참조.] 그리고 유사라는 접두어가 붙은 유사초월론의 핵심은 가능성의 초월론적 조건은 또한 불가능성의 조건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데리다가 후기 철학에서 아포리아’(aporia)라는 또 다른 개념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데리다 저작에서 아포리아 개념이 뚜렷한 철학적 중요성을 지니게 된 것은 󰡔법의 힘󰡕(1990)에서부터다. 자크 데리다, 󰡔법의 힘󰡕, 진태원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4 1부 참조.]

 

III. 유사초월론의 논리

 

하지만 유사초월론의 논리는 간단한 정식의 외양과 달리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 데리다가 전통적인 초월론 철학의 관점을 넘어서 유사’-초월론으로 나아갔는지 이해하려면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초기의 탈구축 작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인식의 선험적 가능성을 근거 짓기 위해 초월론적 탐구를 수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후설은 초기의 기술적(descriptive) 현상학 작업 이후에는 초월론적 현상학 연구로 방향을 전환한다. 초월론적 현상학은 세계의 존재 및 의미 자체가 초월론적 주체에 의해 수행되는 의미부여 활동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후설은 (데카르트 및) 칸트의 초월론 철학의 한계에 대해 이런저런 비판들을 제기하지만, 데카르트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초월론적 주체성의 계보에 자신의 현상학을 위치시킨다.[에드문트 후설, 󰡔데카르트적 성찰󰡕, 이종훈 옮김, 한길사, 2016 참조]


데리다는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에 관해 두 편의 저작을 남기는데, 첫 번째 저술이 󰡔기하학의 기원서론󰡕(1962)이며,[E. HusserlJ. Derrida, L’origine de la géométrie, PUF, 1962. 이 책은 후설의 유고로 출간되고 나중에 󰡔유럽 학문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에 부록으로 수록된 기하학의 기원(1939)이라는 논문을 데리다가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여기에 후설의 논문보다 4배나 더 분량이 많은 역자 서론을 붙여서 출판된 책이다.두 번째 저술이 󰡔목소리와 현상󰡕이다. 후자의 저술은 후설 현상학에서 기호 문제에 대한 입문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후설 현상학에서 표현(Ausdruck)과 표지(Anzeichen) 개념의 차이에 주목하여 자기 촉발(auto-affection) 내지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기”(s’entendre parler)에 기반하고 있는 후설 현상학의 로고스중심주의 또는 음성중심주의를 탈구축한다. 반면 전자는 기하학과 같은 과학의 이념적 대상성(ideale Gegenständlichkeit)”[E. Husserl, Die Krisis der europäischen Wissenschaften und die transzendentalen Phänomenologie, hrsg., Walter Biemel, Husserliana bd. 6, Haag, 1976, 368; 에드문트 후설, 기하학의 기원,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이종훈 옮김, 한길사, 1997, 543.]의 구성 및 전승 가능성을 초월론적 현상학의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하는 후설의 작업에 전제되어 있는 것이 경험적 사물로서의 문자기록(écriture)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에 대한 탈구축을 시도한다.


기하학의 기원에서 후설의 관심은 어떻게 (모든 학문의 이념성과 똑같이) 기하학적 이념성이 개인의 마음에서 생기는 그것 본래의 근원이것에서 기하학의 이념성은 그것을 처음 고안한 사람의 정신인 의식의 영역 속에서 이룩된 형성물이다으로부터 이념적 대상성으로 나아가는가[E. Husserl, Die Krisis der europäischen Wissenschaften und die transzendentalen Phänomenologie, 369;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543-44.] 하는 것이다. 후설은 이러한 기하학의 이념적 대상성은, 최초의 기하학자의 주관적 형성물을 넘어서 언어공동체로서 인간들의 공동체를 전제하며, 또한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의 전승 가능성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주관적 관계와 전승 관계는 문자, 기록된 언어의 표현에 의거하고 있다. 이 기록 언어의 중요성은 개인의 구어적(口語的)인 말이 없이도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이며, 말하자면 잠재적으로 형성된 의사소통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통해 인간성(인류)을 공동체로 만드는 일은 새로운 단계로 고양된다[E. Husserl, Die Krisis der europäischen Wissenschaften und die transzendentalen Phänomenologie, 371;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548. 번역은 약간 수정.]는 점에 있다. 곧 문자로 표현된 언어를 통해 과학적 발견은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에게, 또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승될 수 있으며, 각각의 후속 세대의 학자들은 이러한 전승을 바탕으로 최초의 기하학자 내지 자신들의 선배 기하학자들이 사라진 이후에도 새로운 발견을 수행하고 과거의 발견을 정정하거나 폐기하고 또한 발전시키고 하는 등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문자기록은 보편적 기억과 지식의 저장고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기하학의 이념적 대상성의 구성에서 초월론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후설은 언어의 두 측면을 구별한다. 하나는 후설이 언어적 신체(Sprachleib)[Ibid., p. 369; 같은 책, 544]라고 부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순수하게 물체적으로 고찰된(rein körperlich betrachtet) 문자 기호(Schriftzeichen, 데리다 자신의 프랑스어 번역어로는 signes graphiques)[Ibid., p. 371; 같은 책, 548]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전자의 것이 기하학의 이념적 대상들의 구성 및 전승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면, “단순히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것으로서의 후자는 단지 수용적 태도로 파악된 수동성을 나타내며, 사람들로 하여금 이념적 대상성들을 능동적으로 복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연상에 의해 지배된 말하기와 읽기로 빠져들[Ibid., p. 372; 같은 책, 550]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자 언어가 지닌 이 두 가지 측면 중에서 후자를 환원함으로써 전자의 측면을 보존하고 활성화하는 것이 기하학의 구성 및 전승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데리다의 탈구축적인 독서가 개시된다. 데리다의 말을 직접 인용해보자.

 

본질적이고 구성적인 신체성(incorporabilité)의 운동으로서 언어는 또한 모든 절대적으로 이념적인 대상, 곧 진리가 사실적이고 우연적으로 신체화(incorporation)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역으로 진리는 말과 문자에 대한 순수 권리 속에서 자신의 기원을 지니고 있지만, 일단 구성되고 나면 그 자신이 [말과 문자] 표현을 경험적 사실로서 조건 짓는다. ...... 우리는 앞서 진리는 현행적으로 또는 사실적으로 사고되지 않고서도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을 보았으며, 바로 이것이 모든 경험적 주관성, 모든 사실적인 삶, 모든 현실적인 세계로부터 진리를 근본적으로 해방시키는 것이다. 동시에 인간성(인류)을 공동체로 만드는 일은 새로운 단계로 고양된다.” 인류는 실로 초월론적 공동체로 나타난다. 진정한 문자기록 행위는 우리에 의해, 그리고 우리를 향해 수행되는 초월론적 환원이다. 하지만 [경험적] 세계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의미가 우선 [경험적] 세계 안에서 수용되고 감각적인 시공간성 안에 맡겨질 (pouvoir) 어야(doit) 하기 때문에, 의미는 자신의 순수한 지향적 이념성, 곧 그 진리 의미를 위험에 빠뜨려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적어도 그것의 몇몇 동기에 따르면, 경험론의 반대인 어떤 철학 내에서 경험론 및 비철학과 합치할 수밖에 없는 어떤 가능성, 곧 진리의 소멸의 가능성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E. HusserlJ. Derrida, L’origine de la géométrie, 90-91. 강조는 데리다의 것이며, 꺾쇠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추가한 것이다.]

 

이 대목은 데리다의 탈구축 작업의 고전적인 면모를 잘 드러내준다. 데리다는 우선 언어의 신체성물체성을 구별하는 후설에 맞서, 언어가 지닌 본질적이고 구성적인 신체성(incorporabilité)”, 곧 지금 여기에 최초의 기하학자가 현존해 있지 않아도 우리가 그의 이념적 대상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초월론적 매체로서의 언어는 또한 모든 절대적으로 이념적인 대상, 곧 진리가 사실적이고 우연적으로 신체화(incorporation)되는 장소라고 지적한다. 이 말의 뜻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접하고 사용하는 이런저런 구체적인 언어 속에 물체적으로 신체화되지 않고서는 언어의 초월론적 기능 역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경험적인 언어와 초월론적 언어, 또는 언어의 경험적 측면과 초월론적 측면을 구별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경험적 언어가 성립되고 사용되는 것 속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데리다가 “[경험적] 세계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의미가 우선 [경험적] 세계 안에서 수용되고 감각적인 시공간성 안에 맡겨질 (pouvoir) 어야한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그런데 후설 자신도 지적하듯이, 경험적인 언어는 우리가 기하학의 이념적 대상을 명증적으로 이해하고 또 그것을 보편적으로 전승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의 그러한 능력을 방해하거나 잠식하며, 따라서 그것을 실패하게 만드는 가능성을 지닌 것이다. 후설은 언어가 지닌 초월론적 명증성의 능력으로 인해 이러한 경험적 우연성과 난점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간주한다. 하지만 데리다가 지적하듯이 언어의 초월론적 기능 자체가 언어의 사실적이고 우연적인 신체화를 전제하는 것이라면, 후설이 경험적 언어로 국한했던 의미 전달의 실패 가능성은 사실은 초월론적 언어 그 자체에 본래적인 실패 가능성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데리다가 의미는 자신의 순수한 지향적 이념성, 곧 그 진리 의미를 위험에 빠뜨려야 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문장에서 데리다가 말한 것, 곧 일체의 경험론 및 비철학에 맞서 철학적 진리의 가능성을 초월론적으로 정초하려는 후설의 현상학 내에는 본래적으로 진리의 소멸의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언어의 초월론적 활동이 경험적인 언어 속에서 그것의 물체적 구현, 물질적 신체화 없이 성립하거나 전개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런데 경험적 언어는 본래적으로 진리 의미의 전달 가능성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방해하거나 잠식할 수 있는 가능성, 따라서 진리 의미의 전달 불가능성을 함축하는 것이라면, 진리가 성립하거나 전달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은 진리의 성립 가능성 내에 본래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데리다가 가능성의 초월론적 조건은 또한 불가능성의 조건인 것이라고 유사초월론을 정의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와 동일한 논리는 데리다의 다른 저작에서도 여러 차례 나타난다.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에서 데리다가 루소에게 가져와서 탈구축의 핵심적인 개념 중 하나로 발전시킨 쉬플레망’(supplément) 개념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프랑스어 쉬플레망은 영어의 서플먼트(supplement)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보충이나 추가또는 부록을 의미한다. 요컨대 어떤 본체나 중심이 먼저 존재하고, 그것에 부족하거나 결여되어 있는 것을 채우기 위해 덧붙여지는 것이 바로 쉬플레망이나 서플먼트의 일반적인 의미다. 하지만 데리다는 쉬플레망의 일반적 의미에 담겨 있는 본체와 보충물, 중심과 부가물 또는 기원적인 것과 사후에 덧붙여진 것 사이의 위계 관계를 뒤집어, 본체와 중심, 기원적인 것이야말로 보충물이나 부가물 또는 사후적인 것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데리다는 우리에게 정상적인것으로 나타나는 본체와 보충물, 중심과 부가물 사이의 관계가 사실은 폭력적인 억압과 전위(轉位)를 통해 사후에 정상적인 관계로 구성된 것이라는 점을 밝혀준다.


쉬플레망은 원래 루소가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자크 루소,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주경복고병만 옮김, 책세상, 2002.]에서 문자 기록의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다. 루소는 자연 상태의 인간에게 언어란 몸짓에 불과했을 것이며, 인간은 자신의 정념을 표현하기 위해 비로소 목소리를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루소는 이 최초의 언어는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조음적(articulé)이라기보다는 음량과 강세, 억양이 중시되는 소리였을 것이고, 자음보다는 모음을 위주로 하는 소리였을 것으로 본다. 그러다가 목소리가 단조로워지면서 자음이 증가하고, 강세와 음량이 줄어들면서 조음이 증가하게 되고, 감정표현보다는 명확한 의사전달이 중시되는 방향으로 언어가 바뀌어가게 된다. 조음적인 언어가 등장하고 의사소통이 언어의 주요한 기능이 되면서 사용된 것이 바로 문자 기록인데, 루소는 이 문자 기록을 위험한 보충물”(dangereux supplément)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원래 문자 기록은 목소리에 기초한 고유한 의미의 언어를 보조하고 보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인데, 이 문자 기록은 점차 고유한 언어를 대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루소의 이 개념은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드러나는 루소의 아포리아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될 뿐 아니라, 플라톤에서 루소, 후설에서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온 서양의 현존의 형이상학 또는 음성 중심주의의 맹점을 분석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 개념이다. 데리다가 플라톤의 󰡔파이드로스󰡕[J. Derrida, “La pharmacie de Platon”, in La dissémination, Paris, 1972.]나 루소의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또는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구조 인류학󰡕에 대한 분석에서 밝혀주고 있듯이,[J. Derrida, De la grammatologie 참조.] 서양의 철학자나 이론가들은 문자 기록을 폄하하고 목소리나 말 또는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하여 주고받는 대화를 진정한 언어로 간주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처럼 문자 기록을 폄하하고 있음에도 이들은 문자 기록의 존재를 완전히 제거하거나 배제하지 못하며, 이를 일종의 필요악으로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데리다는 이러한 양면적 태도는 사실은 서양의 형이상학에 내재하는 아포리아의 징표라고 말한다. 곧 순수하고 충만한 현존이나 기원(목소리, , 대화, 로고스 등)을 인정할 경우 이를 보충해야 할 도구가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으며(왜냐하면 보충은 결함을 지닌 것에게만 필요하기 때문에), 반대로 보충의 필요성을 인정할 경우에는 결국 현존과 기원의 불완전성, 결핍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소가 문자 기록의 위험성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한 쉬플레망이라는 단어는 데리다에게는 존재나 구조, 또는 언어나 기타 다른 모든 체계에서 작동하는 일반 논리를 보여주는 개념이 된다. 요컨대 우리가 현존, 기원, 중심 등으로 부르는 것은 사실은 무한한 차이와 대체의 작용으로부터 사후에 파생된 것이며, 이러한 차이와 대체의 작용은 결국 기록의 경제(이는 곧 차이(差移, différance)의 경제이기도 하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쉬플레망, 곧 대체보충 개념은 유사초월론의 논리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IV. 유사초월론은 진리와 정의를 부정하는가?

 

마지막으로 과연 데리다가 초기 저작에서 후기 저술들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유사초월론이 진리와 정의를 부정하거나 상대화는 것인지, 곧 데리다가 부정적인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인지 질문해볼 수 있다.

유사초월론의 가장 기본적인 정식이 가능성의 초월론적 조건은 또한 불가능성의 조건이고, 초월론적인 근거는 자신이 근거 짓는 경험적인 것에 의존한다면, 또는 데리다가 대체보충개념을 통해 보여주듯이 토대로서의 기원(가령 로고스)은 최초의 것 내지 절대적 원리가 아니라 자신에게 후속하는 것(가령 문자기록)에 의존하며 더욱이 이러한 의존 관계를 은폐하는 것이라면,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진리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보편적인 해방의 주체(가령 프롤레타리아로 대표되는)와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데리다가 진리나 해방 또는 정의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에서 데리다가 분석한 대체보충의 논리를 다시 살펴보면, 루소는 목소리에 기초를 둔 진정한 언어를 보충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문자 기록이 오히려 그것을 대체하게 된다는 점을 문자 기록에 고유한 위험성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보충하는 것은 보충하는 역할에 그쳐야 하며, 자신이 보충하는 것을 대체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 다시 말하면 서양 논리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배중률에 근거를 둔 주장이다. 하지만 데리다는 오히려 보충과 대체는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서로가 서로를 전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러한 기록의 논리, 기록의 합리성은 서양 형이상학에 고유한 로고스중심주의 및 음성중심주의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곧 그것의 맹점을 이룬다[루소는 쉬플레망 개념을 그 의미의 모든 잠재성에 따라 동시에 사용할 수 없다. 루소가 쉬플레망의 의미를 규정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배제하는 것 자체를 통해 자기 자신이 규정되도록 만드는 방식, 그가 여기에서는 부가물로, 저기에서는 대체물로, 때로는 악의 실정성 및 외재성으로, 때로는 다행스러운 보조수단으로 쉬플레망의 의미를 굴절시키는 방식, 이 모든 것은 수동성으로도 능동성으로도, 비의식성으로도 저자의 명철함으로도 번역되지 않는다. 독서는 이 모든 범주이것들은 또한 형이상학의 근본 범주들이라는 점을 지나치는 김에 상기해두기로 하자를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쉬플레망 개념과의 이러한 관계의 법칙을 생산해야 한다. 쉬플레망 개념은 루소의 텍스트 속에 존재하는 일종의 맹점, 가시성을 열어놓고 그것을 한정하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J. Derrida, De la grammatologie, 234.])고 말한다. 기록에 대한 배제는 서양 형이상학, 서양의 로고스중심주의의 역사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단지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는 (심지어 라이프니츠도 포함되는) 역사일 뿐만 아니라, 또한 [형이상학의] 외관상의 경계 바깥에 위치해 있는 소크라테스 이전 사상가들에서부터 하이데거에 이르는 역사이기도 한 이 역사는 그것에 내포된 온갖 차이에도 불구하고, 항상 로고스를 진리 일반의 기원으로 지정해왔다. 진리의 역사, 진리의 진리의 역사는 항상 (우리가 앞으로 설명해야 하는 은유적 교란(diversion)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문자기록의 폄훼이자 충만한(parole) 바깥으로 그것을 억압해온 역사였다.[J. Derrida, De la grammatologie, 11~12.]

 

따라서 계속 데리다 자신의 말을 인용하자면,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를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추구하는 작업, “여전히 잠정적으로 에크리튀르라고 불리는 것을 둘러싼 끈기 있는 성찰과 엄격한 탐구는, 문자기록에 대한 과학 아래에 머물러 있기는커녕, 또는 모종의 몽매주의적 반동에 의해 조급하게 그러한 과학을 쫒아내기는커녕 그러한 학문으로 하여금 자신의 실증성을 가능한 한 멀리까지 발전시키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현재, 지식의 울타리를 넘어서 예고되고 있는, 환원 불가능하게 도래할(à venir) 세계에 충실하게 그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어떤 사유의 방황일 것이다.”[J. Derrida, De la grammatologie, 14.]


데리다는 후기 저술에서는 특히 실천철학의 문제와 관련하여 유사초월론의 논리를 발전시켰다.[막심 두아용은 앞서 언급한(7) 참조) 저서에서 초기 저작에서 데리다의 유사초월론은 하이데거의 문제설정에 따라 현존의 형이상학을 탈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춘 반면, 후기 저작에서는 그리스-기독교 전통의 뒤나미스 및 가능태(dynamis und des Möglichseins)”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지적한다. M. Doyon, Der transzendentale Anspruch der Dekonstruktion, 200. 단절 및 산종을 통한 데리다 사상의 일관성 또는 일관성 속에서의 차이들과 산종들을 파악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견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상세한 검토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선다.] 이 경우에도 유사초월론은 해방이나 정의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법의 힘󰡕에서 고전적인 해방의 이상이야말로 내게는 다른 무엇보다 시의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자크 데리다, 󰡔법의 힘󰡕, 61.]고 말하면서 해체는 정의다[같은 책, 33]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해체 또는 탈구축이 정의라는 데리다의 주장은 탈구축이 아무런 불의나 부당함, 폭력의 요소를 포함하지 않는 순수한 정의 그 자체라는 자화자찬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탈구축, 해체가 정의의 해체 불가능성과 법의 해체 가능성[같은 책, 34] 사이에 있다는 것, 해체 불가능한 것, 계산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정의(곧 초월론 철학의 논리에 따르면 초월론적 근거를 이루는 것)가 법(경험적인 것, 실증적인 것)의 해체 또는 탈구축을 이끌어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법을 넘어서는 것, 계산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정의 그 자체가 그 자체로 정의롭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이는 특히 후기 데리다의 이른바 윤리적 전회를 레비나스 사상의 수용이라는 시각에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평가 방식이다. 이 문제에 관한 비판적 토론으로는 M. Hägglund, Radical Atheism: Derrida and the Time of Life, Stanford, 2008 3“Arche-Violence: Derrida and Levinas” 참조.오히려 계산 불가능한 정의, 선사하는 정의라는 이념은 그것 자체로 고립될 경우에는 항상 악이나 심지어 최악에 더 가까운 것이 되고 마는데, 왜냐하면 이는 가장 도착적인 계산에 의해 재전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자크 데리다, 󰡔법의 힘󰡕, 59.] 데리다가 구체적으로 부연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역사에서 이처럼 그것 자체로 고립된 계산 불가능한 정의의 사례를 많이 알고 있다. 프랑스혁명 당시 자코뱅의 공포정치나 스탈린주의, 나치스의 유대인 대학살, 문화혁명, 크메르 루즈의 학살 등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며, 그 밖에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크거나 작은 숱한 폭력과 대항폭력, 극단적 폭력들이 또한 존재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계산 불가능한 정의와 계산의 원리로서의 법은 서로가 서로를 전제하는 것이며, 서로 분리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양자의 관계는 오염의 관계이자 협상의 관계이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일방적으로 지휘하거나 규정하는 관계는 아니다.

 

계산 불가능한 정의는 계산할 것을 명령한다. (...) 계산 가능한 것과 계산 불가능한 것의 관계를 계산하고 협상해야 하고, 우리가 던져져있는 곳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발견하는 곳에서 재발명되어야 하는 규칙들 없이 협상해야 할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스스로를 발견하는 장소를 넘어서, 그리고 기존의 식별 가능한 도덕이나 정치 또는 법적인 지대를 넘어서, 민족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등의 구분을 넘어서 마찬가지로 가능한 한 멀리 이렇게 해야 한다. 이러한 해야 함의 질서는 정의에도, 법에도 고유하게 귀속되지 않는다. [같은 책, 60. 강조는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데리다가 전개하는 유령론(hantologie)[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옮김, 그린비, 2014(수정 2).]이나 그 이후에 발전시킨 자기면역’(auto-immunity) 개념 [자기면역은 원래 생물학 및 의학에서 유래한 용어로 우리말로는 보통 자가면역이라고 한다. 하지만 철학에서 ‘auto-’라는 접두어가 자기라는 표현으로 주로 번역되고, 실제로 데리다 역시 autoimmunité 개념을 그리스어 ‘autos’ 및 라틴어 ‘ipse’에 기반을 둔 주권 개념을 탈구축하기 위한 목적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자기면역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겠다. 이 개념에 대해서는 특히, J. Derrida; Foi et savoir, Paris, 2001; 󰡔신앙과 지식/세기와 용서󰡕, 최용호신정아 옮김, 아카넷, 2016; 자가면역: 실재적이고 상징적인 자살(2002), 󰡔해체 시대의 철학󰡕, 손철성 외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4; Voyous, Paris, 2003 참조.] 역시 유사초월론의 실천철학적인 표현들이라고 볼 수 있다. 데리다는 이 모든 경우에서 해방이나 정의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데리다는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지금까지의 모든 해방의 정치가 경험적인 조건들을 넘어서는 순수한 해방의 정치를 추구했으며, 이것이 낳을 수 있는 도착이나 퇴락의 효과들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본다. 따라서 유령론이나 자기면역에 기초를 둔 도래할 민주주의는 지금까지의 해방의 정치나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유사초월론 정치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데리다는 󰡔불량배들󰡕에서 모든 정치체, 특히 민주주의 정치체는 자기의 권력, 자기의 힘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이때의 자기는 그리스어로는 autos, 라틴어로는 ipse에 해당하는 것으로, 데리다는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원리 내지 가치를 이루는 자유, 평등, 인민 등과 같은 개념들이 모두 이러한 의미의 자기”, 또는 자기성”(ipséité)의 성립 가능성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나는 자기성이라는 말을, 모종의 나는 할 수 있다”(je peux), 또는 적어도, 모임 내지 회합/의회(assemblée), 함께-있음, (또는 흔히 말하듯) “함께 살아가기의 동시성 속에서 자신을 재전유하면서 자신에게 자신의 법, 자신의 법의 힘, 자신의 자기 표상/자기 대표(représentation de soi), 주권적 모임(rassemblement)선사하는 /권력으로 이해하겠다. [J. Derrida, Voyous, 30.]

 

그것은 민주주의에서 이루어지는 일체의 정치적 행위, 곧 선언하고 발언하고 투표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또 때로는 저항하고 봉기하고 변혁하는 모든 행위는 다른 사람의 권위나 도움, 또는 강제나 제약 없이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이를 수행하는, 따라서 자기 자신으로서 성립하고 실존하고, 유지될 수 있는 어떤 자기의 가능성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에티엔 발리바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근대 민주주의 정치는 데모스의 자율성에 기초한 해방(émancipation)의 정치인 것이다.[Etienne Balibar, “Trois concepts de la politique: émancipation, transformation et civilité”, in La Crainté des masses, Paris, 1997; 정치의 세 개념: 해방, 변혁, 시민인륜, 󰡔대중들의 공포󰡕, 서관모최원 옮김, 도서출판b, 2007 참조.] 그리고 데리다는 이러한 자기의 권력이 주권이라는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고 본다. “모든 국가 주권 이전에, 국민국가, 군주정의 주권 이전에, 또는 민주주의에서는 인민 주권 이전에, 자기성은 적법한 주권 원칙, 어떤 권력이나 힘, 크라토스(kratos), 크라티(cratie)가 지닌 인정되거나 신임이 부여된 지배권(suprématie)을 명명한다.”[J. Derrida, Voyous, 31.] 따라서 자기가 없이 민주주의가 성립 불가능하다면, 또한 주권 없이도 민주주의는 성립 불가능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자기의 힘으로서의 주권은 민주주의를 포함한 모든 정치체의 초월론적 조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데리다는 또한 동시에 민주주의의 토대로서의 이러한 자기의 힘, 자기의 주권성을 위태롭게 하고 약화시키는 힘으로서의 자기면역을 민주주의에 고유한 것으로 포함시킨다. “자기면역은 ... 나 또는 자기, 에고 또는 자기(autos), 자기성 자체를 손상시키는(entamer) , 자기의 면역성 자체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 단지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시성/자기 준거성(sui-référentialité), 자살의 자기(soi)를 위태롭게(compromettre) 만드는 것[Ibid., p. 71]이다. 생물학이나 의학의 차원에서 자기면역은 심각한 질병이지만, 정치의 차원에서 자기면역은 타자와 이질적인 것을 배척하고 자기의 동질성을 강화하려고 하는 (실존하는) 민주주의 정치체의 자기 동일화 경향, 배타적 경향을 약화하고 탈구축하기 위한 힘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또 다른 진리를 구성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적인 것의 또 다른 진리, 타자, 이질적인 것, 타율적인 것, 비대칭적인 것, 산종적 다수성, 익명적인 아무나”, “누구나”, 비규정적인 각자의 진리 ......” [Ibid., p. 35]


서론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동안 데리다는 포스트모더니스트해체주의자로 지목되면서, 동시대의 다른 프랑스 철학자들에 비해서도 유독 많은 비판과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는 단순히 그의 저작이 난해하고 또 그의 저작들의 번역 상태가 좋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그만큼 그의 사유가 독창적이고 우리에게 낯설게 여겨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민주주의의 기초가 무너지고 적자생존의 원리에 기반을 둔 각자 도생의 생존 경쟁과 약자들에 대한 혐오와 배제가 횡행하는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유사초월론의 논리, 그리고 그것에 기반을 둔 도래할 민주주의의 정치는 다른 어떤 철학보다도 우리에게 귀중한 통찰을 제공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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