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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장을 넘기면 드문드문 창이 열린다.그 창으로 본 자연엔 필터를 거치지 않아 날카로움을 그대로 간직한듯 한 햇살이 비어져 나온다.그 햇살 아래 가차 없이 드러나는 생명의 경이로움이 날 사무치게 흔들어 준다.
내가 발 딛고 살고 있는 이 산하의 모든 자연이 내게 던지는 언어를 난 듣지 못하고 살고 있었구나 싶다.늙은 기자의 통역으로 난 자연의 편안한 순리를 퍼뜩 되새긴다.
봄에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파릇한 새싹의 생명력을 기특히 여겼건만,이런 막연한 생각 다른쪽에 진정 과학적이고 구체적인 해답을 흙이 쥐고 있었다.
....언 땅이 녹고 햇볕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흙의 관능은 노곤하게 풀리면서 열린다.봄에 땅이 녹아서 부푸는 과정들을 들여다 보는 일은 행복하다. 땅 위의 눈을 녹인 초봄의 햇살은 흙 표면의 얼음을 겨우 녹이고 흙 속으로 스민다. 흙 속에서는 얼음이 녹은 자리마다 개미집 같은 작은 구멍들이 열리고, 이 구멍마다 물기가 흐른다. 밤에는 기온이 떨어져서 이 물기는 다시 언다. 다음말 아침에 다시 햇살이 내리쬐어서 구멍마다 얼음은 녹는다. 물기는 얼고 녹기를 거듭하면서 흙 속의 작은 구멍들을 조금씩 넓혀 간다. 넓어진 구멍들을 통해 햇볕은 조금 더 깊이 흙 속으로 스민다. 그렇게 해서 봄의 흙은 헐거워지고, 헐거워진 흙은 부풀어 오른다. ......풀싹들은 헐거워진 봄 흙 속의 미로를 따라서 땅위로 올라온다. 흙이 비켜준 자리를 따라서 풀은 올라온다.
겨울을 밭에서 나는 보리는 이 초봄 흙들의 난만한 들뜸이 질색이다. 한창 자라날 무렵에 헐거워진 흙들이 뿌리를 꽉 껴안아 주지 않기 때문이다.그래서 흙을 이해하는농부는 봄볕이 두터워지면 식구들을 모두 보리밭으로 데리고 나와서 흙을 밟아 준다. 농부는 보리가 봄을 다 지낼 때까지 부풀어오르는 흙을 눌러 놓는다 p28-29
그의 자전거를 따라다닌 여행은 내게 우리의 숲과 강,길 등 내 옆에 없는 듯 있었던 순리를 경각시켜 주었다. 모두들 나름의 이유를 진리를 품고 그 자리에 있었던 것. 자연의 복원 능력앞에 인간은 제발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함을,인공이 얼마나 공포스런 퇴락을 가져오는지를 느끼며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제첩국 한 사발 속에도 작은 숲이 들어 앉아 있다고 말을 건네는 기자의 음성이 들린다. 그의 흔적을 따라 걷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