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풍각쟁이야 - 대중 가요로 본 근대의 풍경
장유정 지음 / 민음인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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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일이다.음악학자 강헌의 대중음악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강헌은 약속 시간보다 30분 이상 늦었다.떡진 머리에 술냄새를 풀풀 풍기며 강의실에 들어왔다, 전날밤 세게 돌렸던게 분명하다.그 정도 몰골이라면 경험상 새벽 3시는 넘겨야 나올 수 있는 자세였다.그런데 강의실에서는 별로 탓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그가 늦은 30분은 청강생들에게도 주독을 날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맨정신의 강사가 들어왔으면 강의실 내에서 나는 감냄새를 눈치챘을 것이다.하지만 강사와 학생들은 술 먹은 자들이 함께 공유하는 '침묵의 카르텔'로 지난 밤의 기억은 묻어두었다.

강헌의 이야기 중 핵심적인 것은 '대중음악 자생론'과 '대중음악 이식론'의 문제,그리고 '일제시기 대중가요에 나타난 친일성'등 이었다.강헌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술이 깰 때쯤 알콜기운과 함께 머릿속에서 증발해버려서 알 수가 없다.그 중 유독 기억나는 것은 '감격시대'( 거리는 부른다/환희에 빛나는...)의 친일성에 대한 강헌의 비판이었다.강헌이 직접 피아노를 치며 당시 일본군의 행진가와 비교하며 들려주었기 때문이다.그 때 까지만해도 '해방의 기쁨'을 표현한 노래로 알고 있던 가요가 '친일가요였'다니....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비분강개하다가  술기운에 또 졸았다.

가수가 되지 못한 한을 품은 저자 장유정은 <오빠는 풍각쟁이야>에서 1930년대 대중가요의 형식과 텍스트를 분석한다.(왜 1930년대냐? 전기녹음이 29년에 도입되고 음반이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어필한 시기이다)강헌이 술 먹고한 강의에서 다루었던 주제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강헌이 어떤 입장이었는지는 아직도 생각나지 않는다,다만 그가 김창남,노동은,이영미등과 비슷한 선상에 서 있다고 추론한다면 저자는 조금 다른 입장에서 대중가요를 바라본다.물론 위의 저자들 역시 조금씩 입장의 차이가 있을 것이며 그 내용을 내가 잘 알지도 못한다.단 <대중가요 이식론>과 <대중가요 자생론>의 구분으로 거칠게 나누어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먼저 <대중가요 이식론>은 일제 강점기의 대중가요가 전통과 단절된 채 일본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계보를 따져보면 '창가-유행창가-유행가'라는 도식을 그릴 수 있다.일본 번안 창가가 일본 자본과 손을 잡으며 유행가로 흡수된다.이 유행가는 왜곡된 현실 인식을 조장하고 현실 순응,현실 도피를 그 목적으로 삼는다.저자는 <대중가요 이식론>과 <대중가요 자생론>이 다른 층위를 서로 연구하고 있다고 전제한다.그리고 비판의 화살을 '이식론'쪽으로 던진다.우선 '이식론'은 대중을 단순히 수동적인 소비자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이식-주입'이라는 대중문화 접근에 대한 원론적인 지적이다.저자는 비판의 대상이 된 30년대 트로트를 분석하면서 그것이 단순히 지배이데올로기의 강화내지는 순응을 위해서만 작동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트로트 가사에 나타나는 애상미,허무감,상실감,수동성 등이 ('목포의 눈물', '황성의적' 등) 소극적 저항으로서 초극의 의지를 갖는 민요의 '한'의 정서와 연을 맺는 다고 말한다.또한 일제 강점기에 나타다는 '기쁨과 희망'의 정서 ( '감격시대' 등의 노래) 역시 일제를 칭송한다기 보다는 '좌절된 미래'에 대한 '웃음으로 눈물 닦아내기' '희망으로 삶을 버텨내기'라고 읽는다.저자는 대중 가요가 대중의 삶과 관계 맺는 진정성에 촛점을 맞춘다.

또한 저자는 <이식론>이 1920년까지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전통가요의 배제했다는 점등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식론'은 1930년대 대중가요를 일본음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던 '트로트'(유행가)로만 한정하기 때문에 당시 대중들과 관계 맺고 있던 다앙한 장르의 '대중음악'의 면면을 살피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1920년대까지 지배적이었던 '전통가요'(가사,시조,민요 등등)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문화와 접목되면서 '대중가요'에 그 주두권을 내주게 된다.저자는 '트로트'가 가장 많은 사람을 받았지만 '1930년대의 대중가요=트로트'라는 공식에는 부정적이다.저자는 '트로트' 역시 당시 '대중가요'의 하위 장르 중 하나였다고 말한다.'전통가요'가 밀려난 30년대 조선의 대중음악 시장은 '재즈송,신민요,만요,트로트'가 서로 각축을 벌이는 문화경쟁의 장이었다.

장르별로 보면 '재즈송'은 서구 팝음악에 영향을 받은 곡이다.주로 번안곡이 중심이된다.'재즈송'은 1930년대 도심을 중심으로 형성된 모던보이/모던 걸 등으로 상징되는 '근대성'과 관련이 있다.주로 도시의 향락과 퇴폐적 정서가 주를 이룬다.이난영의 <다방의 푸른꿈>의 경우 직접 들어보면 블루노트계열이 쓰인 도시적 블루스의 느낌이 강하다는 것을 쉽게 알아 차릴 수 있다.'재즈송'은 1940년대 일본이 연합국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적성국의 음악이라하여 금지된다.

'신민요'는 '대중가요의 자생론'에 가장 큰 힘이 될 만한 장르이다.('우리 것을 추구하던 생산자와 우리 것을 갈망하던 수용자가 만들어낸 자생적인 대중가요'라고 한다.)'신민요'는 말 그래도 민요적인 전통을 이어받은 창작자가 있는 가요이다.(예를 들면 김세레나가 리메이크한 <갑돌이 갑순이>같은 노래다.)주로 경기소리의 영향을 받았으며 악기 편성에 있어서 과거보다 다양한 경향을 갖는다.대개  전통가요 창법을 연수받았던 기생들 음반 취입을 많이 했다고 한다.

'만요'는 '웃기는 노래'이다.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오빠는 풍각쟁이' 또는 서영춘이 리메이크해서 기억하고 있는 '서울구경' (시골 영감 처음타는 기차놀이에..차표파는 아가씨와 실랑이하네..) 등이다.(오빠는 풍각쟁이야도 개그맨 이성미가 개그 코너화 한 적이 있다.) '만요'는 '시대성'을 핵심으로 하여 '해학'과 '풍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김대행은 이 웃음이 '웃음으로 눈물닦기'라고 말하며 삶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언어적 해결로서의 성격을 갖는다고 말한다.희망이 없는 시대에 웃음으로 카타르시스를 구한것이 '만요'의 역할이었다는 것이다.

'트로트'는 1930년대 최고의 인기장르였다.다른 모든 장르를 함한 것 만큼의 음반녹음이 남아있으며 위의 장르 중 현재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장르이다.트로트는 일본의 엔카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저자는 일본음악 역시 서구 음악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것으로 본다.그렇기 때문에 '트로트=왜색'이라고 쉽게 단언해서는 곤란하다고 말한다.그 기원에서는 일본의 영향이 있지만 오히려 '문화의 다양한 교류'에 의해 발생하고 토착화하여 성장한 장르로 보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트로트의 발전과정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트로트의 가사는 크게 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하나는 '시대성'을 반영한 곡,그리고 다른 하나는 '보편성'을 반영한 곡이다.저자는 1930년대에 불려져서 아직도 애창되는 곡들은 후자에 해당한다고 본다.'시대성'을 반영한 두 목숨의 저승길'(1930년대 사랑지상주의가 불러온 동반자살을 소재로 한 곡)등은 당시에는 인기를 끌 수 있었겠지만 그 시대가 바뀌면 보편적인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된다.'시대의 풍자'를 토대로 하는 '만요'가 수명이 짧은 것도 그 이유에서이다.반면 최초의 대중가요라고 할 만한 <황성의 적>(황성 옛 터에 달이...) <타향>(타향살이 몇 해 런가) <애수의 소야곡>(운다고 옛 사랑이..)등은 우리 민족이 갖고 있던 '임의 부재에서 생기는 정서' 에 보편적으로 편승하기 때문에 현존할 수 있는 것이다.트로트가 현재까지 사랑을 받는 것을 설명하는데 유의미하다고 보여진다.물론 '임의 부재에서 생기는 정서'(김소원의 '진달래꽃'같은 정서이다.) 를 현 시대에도 우리민족의 '보편적 정서'라고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보편적인 정서'라는 것도 '문화교류'에 의해 어느정도 재편되는 것이라고 본다면 말이다.또한 '보편적정서'라는 것의 실제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기기는 한다.(경험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편이긴 하지만 말이다.)

저자는 결론에서 과거 대중가요 연구의 주를 이루어온 전통가요의 단절론에 대해 반기를 든다.즉 '우리나라의 음반사가 전통의 일방적 쇠퇴와 새로운 양식의 대체라는 비극적 성격을 띠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대중가요의 주요기능은 계몽이라기 보다는 삶의 위안이었다.이를 무시하고 대중가요에 진지함이 없다며 가벼운것 만을 비판하는 것은 대중문화의 속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본다.하지만 저자는 1930년대 트로트의 예를 들어서 대중가요가 '삶의 진정성'을 살피는 방향으로 모색되어야만 한다고 본다.(현대 트로트는 진정성은 탈취되고 퇴폐,향락의 정신만 남았다.)그 근간에 민요가 가진 '건강성과 진정성' 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타인과 나를 하나로 묶어주는 대중가요만이 시대를 건너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결론은 좀 모호하다.민요의 텍스트가 가진 장점을 대중가요에 반영하자는 취지이지만 저자의 전공을 너무 살려버린 느낌이 강하다.사이버 문화가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는 시점에서 대중음악에서 민족음악의 성격을 어떻게 반영할지에 대한 문제는 저자의 몫은 아닐게다.대중음악의 성공에 저자가 말하는 텍스트의 문제 역시 중요하긴 하지만  부차적인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대중음악의 성공은 곡이 가진 특성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윤도현의 <아리랑>을 대표적인 예로 든다.<아리랑>을 락으로 편곡한 것 말이다.이것은 단지 월드컵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민족적 정서가 과도하게 분출될 수 있는 장이 펼쳐져 있어서 가능한 성공이었다고 보여진다.텍스트에 '건강성과 진정성'을 찾는 노력은 현재 노래운동을 중심으로 했던 포크가수들이 그 맥을 있고 있다.(모던락 하는 친구들도 가끔 그런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병적인 우울이 선뜻 선뜻 보인다.)그렇지만 대중음악계에서의 위치는 미미하다.소수의 음악인 셈이다.(..이럴때면 김광석이 아쉽다.) 문제는 '건강성'을 담보한 음악이 어떤 실험과 혁신을 통해 대중들에게 회자되게 하느냐 하는 점이다.이것은 역시 가수가 되지못한 학자보다는 가수가 되어버린 딴따라들의 몫이 될 가능성이 크다.

*** 신나라에서 유성기로 듣는 가요사 라는 형태의 유성기 복각음반집을 발간했다.다행히 그 음반이 회사 자료실에 있어서 틈틈이 주요 곡들을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이건 순전히 내 운이다.)30년대 가수들의 창법은 순수하다.꺽기가 트로트의 필수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실이지만 30년대 가수들은 지금 같은 잔재주를 부리지 않았다.이 책같은 경우 유성기 복각음반 컴필레이션CD같은 것이 하나 있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한다.이애리수의 <황성의적>은 어떠했는지...얼굴없는 가수 미스 리걸의 목청은 어떠했는지...기생가수 왕수복,선우일선은 또 어떠했는지.. 비용부담이 있었겠지만 그 정도 기획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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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4-09 11:58   좋아요 0 | URL
이식론 운운 하는 자들은 논리를 모르는 자들이라 생각합니다.
식민지라면 그 문화의 영향을 받았음이 명백한 것인데 말입니다.
그 과거를 부정하는 것을 논리라고 하는 것이 웃길 따름이죠.
문학자들중에서도 7.5조를 부정하는 넘들이 많아요. 3음보라고 우기죠 ㅋㅋ
그게 그건데. 일본에 있다고 그게 싫다는 말은,
그럼 국어 수학 사회 과학이란 말도 다 버려야 한다는 말인데... 우습죠. ㅎㅎㅎ
건강함은 딴따라의 몫일 수 있죠.

드팀전 2007-04-09 13:16   좋아요 0 | URL
여기서 비판이 되는 성공회대의 김창남교수나 이영미씨 등입니다....이들을 논리를 모르는 자들이라고 하긴 좀 그렇구요.아무래도 '트로트'가 '전통가요'로서-요즘도 트로트가수들은 전통가요라고 부릅니다- 마치 우리 고유의 음악인것처럼 둔갑되는 상황에서 문제의식이 출발했겠지요.거기에 노래가 가진 사회적의미를 살펴서 '노래운동'으로 발전시킨 사람들의 80년대 민족민중문화론의 의식성도 한몫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저자의 말을 인용합니다.
"이들은 1980년대 당시의 한국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진단을 내리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노래 운동을 강조한 결과,일제 강점기 대중가요를 '거짓의 노래'로만 바라보고 이후 대중가요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마저 낳았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그러나 1980년대라는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그들의 진지한 고민은 분명히 의의를 지닌다고 본다."......이식론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흔히들 좌파 문화운동가였다는 점과 글샘님의 좌파적 지향사이에 딜레마가 생기네요.^^ 결국 선별적 수용이라는 답으로 나오겠지만.^^.....일단 거칠게 보면 '체제'에 '순응'하는 것을 '거짓'으로 보는 좌파문화이론에 대한 비판적 접근으로도 볼 수 있을 겁니다.물론 이건 저자의 시각은 아니고 제 비약입니다만...과연 '체제'는 전부 '매트릭스'일까요? ...

글샘 2007-04-09 20:24   좋아요 0 | URL
과연 '우리만의 것'이 가능한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정말 우리의 것은 아리랑 뿐인지... 운동가요만 긍정적인지... 그렇게 치자면, 유신시대의 건전가요(좋아졌네, 조국근대화의 기수... 같은) 들의 자리는 어딘지,
또 그렇게 치자면, 유치원에서 배웠던 숱한 노래들이 몽땅 일본 어린이 노래의 표절임이 분명한데,(나비야, 주먹쥐고 등등) ... 너무 우리것 아닌 것을 부정하는 시각이 강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좌파는 아닌 거 같애요. 기존 문화를 무시하는 민중문화론 이런 거 딱 싫어하거든요. 머리로는 따라가도 마음은 아닌... 운동가요도 물론 좋을 수도 있지만, '해골이 두쪽나도 죽는다' 이런 건 싫어하기도 합니다.
저는 남들 다 하면 싫어지는 것 같기도 하구요. ㅋㅋ 지향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짱꿀라 2007-04-09 23:04   좋아요 0 | URL
어찌 드팀전님의 리뷰를 읽고 있자면 감탄에 감탄이 나옵니다. 부드러운 선율이 계속이어지듯 글의 흐림이 이렇게 자연스러운 분들 제가 몇 분 보지 못했는데 역시 드팀전님은 일품의 문장을 가지고 계십니다. 부럽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드팀전 2007-04-09 23:42   좋아요 0 | URL
글샘님>'우리만의 것'은 존재하지 않지요...저자의 주장 역시 그 선상에 있습니다.유신시대 건전가요는 프로파간다 송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의무적으로 삽입해야되었으니까요..'들국화'는 유신시대는 아니었지만 그때까지 잔존하던 의무적인 건전가요를 무반주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넣어서 예술적으로 들리게 만들었던 멋진 밴드였지요.^^
기존 문화를 거부하는 민중문화론은 저 역시 거부하지만 시대적 특수성을 반영해주면 이해도 가능합니다.기존의 대중문화가 실제 이데올로기적이면서 탈이데올로기적으로 작용했기때문에-사실 그게 이데올로기의 작용방식이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반작용의 요소가 컸다고 봅니다.글샘님이 예로 드신 <파업가>는 특정목적에 사용되는 특수한 노래로 봐야겠지요.'투쟁가'는 동일선상에 놓인 반대편 예를 들자면 '군가'와 비슷한 성격을 갖는다고 봅니다.리듬이나 멜로디 역시 비슷하지요.80년대 문화운동가들이 만들고자 했던 '노래운동'의 성격과는 조금 다른 성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노찾사'같은 경우가 김창남 등이 주도했던 '노래운동'의 예가 될 듯합니다.'노찾사'는 좋아하셨겠지요.^^
산타님>...** 민망하게 자꾸 ..쑥쓰....걍 대충씁니다.오늘 이 글은 아침 회의를 기다리다가 간부회의가 길어져서 쓴 글인데 ..ㅋㅋ 쓴 시간 보이시죠.아침 9시 18분...결국엔 아침 회의를 안했답니다.고맙죠 뭐.^^ 오늘 책을 몇 권 샀는데 출판사 돌베게 의 카탈로그가 들어있더군요.보관함에 몇 권 넣어둔 옛 선인들의 책들이 많았습니다.님이 생각나더군요.^^ 더운 여름에 보려고 꼽아놓고 있습니다.여름에는 집중력이 떨어져서 딱딱한 책은 피하는 편입니다.산문들이 좋더라구요.^^ 특히 옛분들의 여백있는 마음이 더위를 쫓는데 일품이었습니다.좋은 책있으면 여름용으로 추천해주세요.

점판 2007-10-19 18:35   좋아요 0 | URL
곡조풍(曲調風)을 보고('감격시대'를) '친일 가요'냐 아니냐 따지는 강 헌이라는 사람, 정말 딱하다. 일제 당국(총독부)의 검열을 피하자면 가사도 은유적으로 표현해야 하고 곡도 일부러 행진곡풍으로 만들어야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모른다면 그 시대에 무지하기 짝이 없는 것이거늘---. 비정상적인 시대에는 본의와는 다르게, 아니 정반대로 처신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을, 왜 그렇게도 단순 무지하게만 소설을 쓰는지---. 그리고, 무지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도 꼭 알아 두어야 할 것은, 그 당시, 바로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하자말자 조선 민중이 모두 일제의 패망을 확신에 가깝도록 점치던 때였고, 일제도 스스로 망조(亡兆)가 온 것을 의식했는지, 몽양 여운형을 화의(和議) 특사(特使)로 중국(장개성)에 두세 차례 파견한 숨은 역사도 있는데(결국 장개석이 만나 주지 않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일제가 얼마나 다급했는가를 말해 주는 것인데도), 모르는 무식쟁이들이 모여 참으로 별별 소리 다하고 있네! 그리고, 어느 나라나 민족의 역사를 봐도 시대가 불안하거나 전시에는 꼭 유언비어나 참요(讖謠)가 민중 사이에서 나오기 마련인데, 이런 이치를 모르다니! 또 하나, 중일전쟁 시기에는 가요계에서 '친일'이니 뭐니 하는 것과 같은 유사한 가요도 나오지 않고 있던 때인데(태평양전쟁 기간이 되어서야[1941년 후반쯤] 일제가 평상시에 눈엣가시 같은 '유행가'란 명칭을 전면 금지하는 바람에 '가요곡'이니 '신가요'니 하는 명칭으로 불렸다는 것도 좀 알아 주었으면='감격시대'는 '유행가'라고 음반에 적혀 있고=), 시대 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니로고!그래, 역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가요 연구가'라고 하니 ㅡ 이런 '절름발이'류도 다 있나,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