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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 붕괴
해도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평점 :
<진공 붕괴>라는 제목으로 <검은 절벽>, <텅 빈 거품>, <마리 멜리에스>, <콜러스 신드롬>, <에일-르의 마지막 손님>, <안녕, 아킬레우스>라는 여섯 개의 단편이 담겼다. 같은 작가에 의해 쓰여진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우주, 인공지능, 타임리프, (아마도 우주에서 온) 크리쳐 등, 다양한 소재들을 딥한 스릴과 함께 그려냈다. 다 읽고 나니 저자가 악동으로 느껴진다. 한국형 감정서사가 없으나 그래서 뻔하지 않고 엄청 재밌다. SF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어서 추천하고 싶다.
다 재미있지만 첫 단편 <검은 절벽>이 가장 좋았다. 다목적 탐사선인 ‘다이버전스’의 승무원 라미는 태양계 외곽의 카이퍼벨트를 시작으로 떠돌이 쌍행선인 네그니스 탐사 까지 마치고 태양계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지구의 시간으로는 21년, 시간의 상대성으로 다이버전스에서는 19년, 그리고 장기수면을 할 수 있는 승무원 체감 경과 시간은 4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리는 임무다. 여기까지는 SF다운 장엄하고 웅장한 세팅이다. 태양계 밖으로 열두 명이나 사람을 보낼 수 있는 미래임에도 주인공 라미에게는 “지긋지긋한 가족과 풀리지 않는 인간관계, 보장 없는 미래에서 해방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손에 넣은 기회”와도 같은 탑승이었다. 현생과 공유가능한 고민을 가진 미래인물, 라미는 이 짧은 단편에서 조차 담당교수와 동료에게 과학전공하고 우주선까지 타는 사람으로서 알아야 할 우주 지식을 몰라 “너 따위”라고 불리우며 무시를 받는다. 하지만 라미는 인공지능 심리상담사, 러브조이에게는 무한한 사랑(!)을 받는다. 인공지능 입장에서 보자니 우주과학 지식은 미미하나 감성지수가 높은 라미가 이 열두 명의 인간들 중 가장 치명적인 주인공감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열두 명의 개개인 입장에서 보면 장르가 다 다를 수 있다는 것도 이 작품의 매력이다. 베르너, 피에트 입장에서는 크리쳐물, 하미교수에게는 스릴러물, 셔머, 텅, 리우에게는 하드보일드, 혜나에게는 치정물, 그리고 주인공 라미에게는 로맨스라고 할 수 있겠다.
“별이 빛나고 바닥이 없는 시커먼 절벽이라니. 그마저도 헬멧의 연약한 조명이 닿지 않으면 모습을 감춘다.”(p.23)
“사방이 별 천지다. 별이 너무 많아서 익숙한 별자리조차 찾기 어렵다. 처음 깨어났을 땐 그래서 난감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 낯섦에 홀릴 것만 같다. 아름답기 그지없다”(p.31)
열 두명이 각자 나름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 공간이 아름다운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 바닥없는 시커먼 절벽같은 우주라는 점을 환기시키는 묘사도 인상적이다. 라미는 당장 와이어건을 놓치면 저 끝없는 우주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게 되는 상황임에도 아름다운 우주를 느끼며 간간히 넋을 놓는다.
우주과학 연구원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해도연 작가님의 세 번째 작품집이라고 한다. 장르물에 일가견이 있는 정보라 소설가님은 이 책을 “개연성 있는 과학적 상상력에 푹 빠지기 좋은 기회”라고 평했는데 완전 동의한다. 소설 속 인물에게 빨간색 민소매 터틀넥을 입히고 고양이를 제논이라 부르며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경주’, ‘제논의 역설’과 같은 흥미로운 이론을 소설에 녹여낸다. “별빛 눈동자와 알레르기와 시간을 되돌리는 힘 모두 같은 유전자의 다른 모습일지도 몰라. 연구 과제로 괜찮겠네.”(pp.266-267) 나는 <콜러스 신드롬>에서 이 부분 읽다가 이런 인물의 묘사가 간간히 저자와 연결되는 코드로 읽혔다. 뿐만 아니라 오징어먹물스파게티를 상대방과 함께 먹을 때 한번은 느껴보았을 그 경험에 대해 이런 소설이 탄생하다니. 작가에게 더 새로운 요리를 권해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무조건 ‘검은 절벽’이 제일 재밌었다. 검은 절벽을 다이브하는 장면이 나의 원픽이다. <진공 붕괴>라는 전체적인 제목도 인상적이다.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들이 조금씩 균열이 생기면서 이야기가 탄생한다. 어떤 작은 일의 연속선상에서 개연성있는 사건들을 만들어가는 작가의 탐구력 성향이, 소설가로서의 욕심이 보인다. 더 붕괴되라. 하지만 아주 천천히 붕괴되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