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암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해 《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오쿠이즈미 히카루)를 보고 나쓰메 소세키 소설을 한번 만나볼까 했다. 생각만 하고 바로 책을 만나지 못했는데, 마침 그때 소세키가 마지막에 쓰고 끝맺지 못한 《명암》이 나왔다. 그전과 그 뒤에 다른 책을 몇권 샀지만 그건 아직 못 보았다. 마지막에 쓴 것보다 먼저 쓴 것을 보는 게 더 나았을까. 《풀베개》는 보통소설과 달라 보였는데 《명암》도 좀 그렇다. 소세키 소설은 줄거리보다 다른 것을 보아야 한다는데, 난 여전히 그것을 잘 즐기지 못한다. 이야기가 시작하고 펼쳐지고 어떤 식으로든 끝나야 하는데. 끝이 나도 ‘이게 뭐야’ 할 때도 있다. 《풀베개》가 그랬던가. 작가 이름도 알고 책도 여러 권 봤지만 잘 모르겠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 봐도 모르겠다. 책을 아예 읽지 않고 글을 보면 그런가 보다 하지만, 내가 책을 보고 그 책 이야기를 보면 그렇다. 그런 글 많이 본 것도 아닌데.

 

 책을 보면서 무슨 말을 써야 할까 생각하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한번 더 볼까 했는데 이건 그러지 않았다. 첫째는 책이 두꺼워서고, 둘째는 다시 여러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기운이 감도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서다. 소세키 소설을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소설 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쓴 소설은 담백했다. 담백은 “①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함. ②맛이나 빛이 산뜻함. (내 국어사전)”이다. 먹을거리에서 담백한 맛은 간이 세지 않고 심심한 맛일 것 같은데. 글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이상할까. 소세키는 서른여덟에서 세상을 떠난 마흔아홉까지 소설을 썼다. 난 글을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게 쓰는데, 소세키는 좀 달라졌겠지. 다른 소설에서는 한사람 마음밖에 모르지만 여기에서는 여러 사람 마음을 알 수 있기도 하다. 쓰다 요시오는 소세키 소설에 나오는 여러 사람을 섞어놓은 것 같단다. 다른 소설을 봤다면 그런가 했을 텐데. 소세키는 여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쓰지 않았는데 이 소설 《명암》에는 썼다. 아니 소세키가 여자 마음을 알고 썼다기보다 소세키 자신이 생각하는 걸 쓴 것 같았다. 인물이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기보다 작가가 제어한다고 할까. 그런 게 어떤 건지 나도 잘 모르지만, 어쩐지 그런 느낌이 좀 들었다.

 

 줄거리를 아주 정리 못할 건 없다. 쓰다 요시오와 오노부는 결혼하고 반년이 지났는데, 지금까지 별 문제없이 지냈다. 쓰다가 치질 수술(이건 소세키 경험이다)을 받으러 병원에 가고 조금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다. 쓰다와 오노부가 여러 사람을 함께 또 따로따로 만난다. 쓰다 친구 고바야시는 오노부한테 쓰다 이야기를 흘린다. 쓰다 동생 오히데는 쓰다가 오노부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 말은 오노부가 병원에 가서 병실 밖에서 우연히 들었다. 고바야시는 그렇다 해도 동생 오히데는 왜 그랬을까. 오히데는 오노부와 쓰다가 서로 좋아하는 것을 시샘한 건지도. 오히데는 얼굴이 예뻐서 지금 남편과 결혼했다. 오히데 남편은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듯했다. 이렇게 쓰다보니 오히데 마음을 조금 알게 되었다. 고바야시는 남한테 미움받는 걸로 자기 자신을 알렸다. 일부러 미움받으려 안 좋은 말을 하다니. 좋아하는 것과 미워하는 건 아주 다르지 않구나. 고바야시는 미움받기보다 사랑받고 싶은 건지도.

 

 오노부는 쓰다를 보고 자신이 먼저 결혼하고 싶다 생각하고 실제 그렇게 되었다. 오노부는 쓰다가 자신을 좋아하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힘들게 여겼다. 오노부가 쓰다를 처음 봤을 때는 다 좋게 보았는데, 함께 살면서 안 좋은 점을 보게 되었다. 그것을 오노부는 자존심 때문에 고모네 식구한테 말하지 않았다. 오노부 자신은 행복하다고 한다. 오노부는 고바야시나 오히데한테서 다른 여자 이야기를 듣고 쓰다한테 그것을 제대로 묻지 않는다. 그런 거 보니 좀 답답했다. 이건 쓰다도 마찬가지였다. 쓰다는 오노부와 결혼하기 전에 사귄 기요코를 잊지 못했다. 쓰다가 기요코를 만나 다시 시작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쓰다는 기요코가 왜 갑자기 자신을 떠나 다른 사람과 결혼했는지 알고 싶었다.

 

 해설을 쓴 강상중은 오노부를 밝음(明)이라 하고 기요코를 어둠(暗)이라 했다. 아내가 아닌 아내가 될 뻔한 사람을 만나면 불륜이 되겠지. 소세키 소설에는 불륜이 나오기도 하는데, 소세키는 이 소설을 어떻게 끝내고 싶었을까. 쓰다는 오노부 몰래 기요코를 만나러 온천여관에 간다. 이만큼 이야기하는 것도 꽤 길었는데, 남은 이야기는 어느 정도였을지. 질질 끌지 않고 끝냈을 것 같기도 한데, 제대로 말하지 않는 쓰다를 보면 그러지 않았을지도. 이 소설 읽기도 힘든데 쓰기는 더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소설 써서 소세키가 일찍 죽은 건 아닐지. 별 생각을 다했다. 쓰다와 오노부가 여러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할 때 상대를 떠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현실에도 그런 사람 있을까. 있으면 엄청 피곤할 것 같다. 소세키가 그런 경험을 해서 소설에 쓴 것인지, 실험한다 생각하고 그렇게 쓴 것인지. 상대 마음을 떠 보는 것은 지금도 많이 나온다. 소세키는 일백년 전에 지금 나오는 소설과 다르지 않은 소설을 썼다고 봐야겠구나. 이런 걸 느끼는 것만으로도 소세키 소설 만나볼 만하겠다.

 

 

 

희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