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여기보다 훨씬 넓은 세계에서 왔잖아. 여긴 네 목적지도 아니었어. 이렇게 좁고 갑갑하고, 꽉 막혀 있는 세계는]

"사랑은 석유 냄새 같아."

"미안해. 그게 네 잘못은 아니지만, 그래도 잘 모르겠어. 이게다 뭔지, 난, 지금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이곳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들이 이곳을 덜 미워하게 하지는 않아. 그건 그냥 동시에 존재하는 거야. 다른 모든 것처럼."

그러나 이제 단희에게도 입자들은 의미라기보다는 냄새에 가까워졌다. 둔감해진 후각기관은 한때 조안이 했던 것처럼, 공기 중에서 어떤 기억과 감정을 읽었다. 입자들이 단희를 그 시절로 데려갔다. 의미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들에게로 추상적이어서가 아니라그 자체로 너무 구체적이어서, 언어로 옮길 수 없는 장면으로, 조안이 말했던 그 공간들로.

[고마워요. 이제 충분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담당자가 누구인지 몰라도, 너에게 속은 거네. 말만 그럴싸하고 사실은 하나도 준비된 게 없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는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훌륭한 선생님께 배우고 있잖아요."

"되긴 뭐가 돼. 초등학생 장기자랑 수준이라도 되면 다행인데."

그런데도 왜 마리는 무대에서 춤을 추려는 것일까? 단순히자기만족을 위해 춤을 추는 것과, 사람들 앞에 서서 춤을 추는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심지어 마리는 그 무대를 꽤 중요하게생각하는 듯했다.

"저는 선생님과 제가 하고 있는 것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이건 같은 춤이 아니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하든 무시할 수 있어요. 어차피 그들은 제가 뭘 하는지 모르니까요."

모그들은 플루이드의 완성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모그들은 새로운 세상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모그들은 모그들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모그들은 더 많은 모그들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모그들은 …………에 관해 ………하고 있었다.

의견들은 일치하지 않았다. 충돌하는 목소리들이 부딪쳤다.
파편을 맞은 듯한 통증을 느꼈다. 세부 사항은 알 수 없었다.
대화의 단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지금까지 이 세계에 맞추려고 노력한 건 우리 모그들이에요. 당신들이 아니고요."

"난 네가 적어도 이 수업에는 진심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그게 전부 그 끔찍한 계획을 완성하기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했다고?"

나는 배신당한 어린아이처럼 행동했다. 어른답게 구는 대신내가 느끼는 분노를 마리에게 쏟아냈다. 마리와 내가 공유했던모든 것이 거짓에 불과하다고 느꼈다.

로라는 말했다. 사랑과 이해는 같지 않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지막 순간, 나는 라이오니로서 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나는 그들에게 작별을 고했고, 기계들은 나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결국 돌아와주어서 고맙다고.

"나를 이용한 거야? 이미 태어난 나는 어쩌고?"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태어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나에게 주어진 이 태생적 결함이, 사실은 결함이 아닐지도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 나의 원본이 아니라, 그 자체로최후이자 유일한 존재였던 라이오니의 모습을.

실패한 테러리스트. 마리는 지금도 그렇게 불린다. 그 사건은 운이 나빴다면 돌이킬 수 없는 재난으로 번졌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혼자 이곳에 왔고, 그게 잘못된판단이었음을 깨닫고있다. 루지가함께 가주겠다고 했을 때 제안을 받아들였어야했는데, 용기와 대담함도생존 지식도 부족하면서 대체 왜 혼자 오겠다고 우겼던 걸까. 후회하면서도 나는 내가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를 생각한다.

어제까지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오늘내가 같은 복도를 다섯 번째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기록한 지도는 엉망이었다. 그것이 지도기록에서 음성 기록으로 일지 형식을바꾼 이유다.

어쩌면 친구들의 말이 옳았던 것 같다. 나는 동료 로몬들의태도를 배워야 했다. 나흘간 쉬지 않고 걸었지만 의미 있는 단서를 찾지 못했다. 여기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기계들은 3420ED의 복잡한 미로 가장 안쪽에 그들만의 소박한 문명을 구축하고 있었다. 시스템이 나에게 준 사전 정보로 추측해보자면, 이곳에서 거대 문명을 이루었던 인간들은 감염병으로 모두 사망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그러나 기계들은 감염되지 않았고 살아남아 거주지 일부를 차지했다. 그들이 거주지 전체를 점령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인간들이 설치해둔 함정을 제거하지 못했거나, 이 넓은 공간 전체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기계들이 인간 지배자를 대체한 거주구에서는 인간이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유기물이나 흩어진 사체, 지문이 남은 소도구들 따위를 발견하기가 어렵다.

라이오니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가 무척 원망스럽다. 기계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한때 기계들의 주인이었던 라이오니는 기계가 아닌 인간이었다. 

셀이 저렇게 확신하는 것을보니 나와 닮은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광학 신호 입력기가 없는 셀이 나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판단하는지는 의문이다.

우주에는 두 종류의 멸망이 있다. 가치 있는 멸망과 가치 없는 멸망. 인류가 행성과 행성들 사이, 별과 별들 사이로 널리 퍼져나가 번영한 이후 우주곳곳에서는 매일 어떤 거주지가 죽음을 맞이하는 동시에 새로운 거주지가 탄생한다. 

멸망의 규모는 작게는 한 사람 혹은 한 가족이 거주하는 소규모 거주선에서부터 크게는 행성계 전체를 집어삼킨다. 그렇게 수많은 멸망이 남긴폐허를 뒤적이다 보면, 죽음은 모두 같은 죽음이고 그 앞에서 우주의 모든 생명체는 동등하게 무력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그렇지 않다. 어떤 멸망은 다른 멸망보다 더 가치 있다. 적어도 우리 로몬에게는 그렇다.

우리는 멸망의 현장으로 떠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죽음의 냄새에 이끌린다. 로몬들은 유능한 유품정리사이자, 멸망의 단서를 탐색하는 1급 수사관이다. 행성 하나의 생태계가 삶과 죽음의 순환 위에 세워져 있듯이 죽음의 순환을 우주 전체로 확대해보면 멸망의 가치가 드러난다. 

잘못된 종에 갇혀 있다는 감각. 나는 평생 감금되어 있다는감각을 느껴왔다. 그건 어쩌면 내가 이 비좁은 배양실에 갇혀서도 아직 정신을 잃지 않은 유일한 이유일 것이다.

나는 루지의 말을 듣고도 그 의뢰를 한참이나 살펴보았다.
그리고 고민 끝에 의뢰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내게 주어진 첫단독 의뢰였다. 타인의 기준으로는 그저 쓸모없는 요청, 무시해버려도 아무 상관 없는 한 줄의 의뢰였지만, 나는 그것이 내가치를 비로소 증명할 때가 되었다는 시스템의 시험이라고 생각했다. ‘너도 쓸모 있는 로몬이라는 걸 증명해봐‘라고 말하는.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루지의 말대로 그건 그냥 시스템의 오류였다. 나의 탄생이 시스템의 복제 오류였던것처럼.

그런데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생애 중 어느 때보다도 가장 치명적인 위기에 직면한 지금, 나는 뜻밖에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나는 두렵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안도감이 동시에 찾아온다. 그 안도의감각은 이곳에 도착한 이후 나를 계속해서 감싸고 있지만, 여전히 그 감각의 근원을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어렵다.

죽음에 기생하여 생명을 이어가는 삶의 방식. 내게는 눈앞의 이모든 것들이 아주 익숙하다.
"너희들, 로몬들과 똑같은 짓을 하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