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친 8주간의 기록
에바 로만 지음, 김진아 옮김 / 박하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 내가 정신병원에 간 날은 목요일이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독일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며 등장한 신예작가라는 문구가 무색하지 않던 에바 로만의 자전적 소설이다. 작가 자신이 심각한  우울증으로 정신 병동에 갇혔던 8주간의 경험을 그리고 있는데, 일단 군더더기가 없다. 처음 쓰는 책이라는데도 어쩜 이리도 유려하게 물이 흘러가는 듯이 하고 싶은 말만 얄밉게 해대는지 감탄했을 정도로...이런 재능을 가진 여자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회사(어떤 회사인지는 모르나, 작가 자신이 정신이 피폐해지면서까지도 다녀야 한다고 하는걸 보면 꽤나 좋은 회사였던 것 같음.)에 다니느라 우울증에 걸렸다니 할 말이 없더라. 그러니까 때론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내진 뭘 잘 하는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피는거다.단지 그것만으로도. 물론 대체로 낭비없이 지나가는 인생이란 없다고 보면 되지만서도, 그러니까 내 말은 정답은 그것에 가깝다는 이야기. 하여간 완벽한 부모의 기대에 남모르게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온 밀라는 어느날 더이상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지 마비 환자도 아니건만 자살도 못할 정도로 무기력해진 그녀는 결국 항복을 하고 정신병동에 입원한다. 낯선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는 불안감과 서먹함, 막막함은 둘째치고, 그럼에도 그보다 그녀를 더 지배하고 있던 것은 안도감이었다고 한다. 이젠 더이상 정상처럼 보여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대한. 다시 살고 싶어지면 좋겠네 라는 희망을 안고,  어디선가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 오지 않을까 기대를 하는 그녀. 처음엔 과연 자신의 병이 나아질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던 그녀는 심리상담을 힘겹게 거치면서 점점 자신의 문제에 접근하게 되는데...


우울증 치료에 관한 완벽한 보고서라고 해야 할까? 우울증 외 그녀가 정신병동에서 만난 여러 환자들과의 만남와 에피소드들은 다 흥미롭고 유익한데다,  미쳤다는 이유로 한 곳에 모여 있는 그들이 서로를 도우면서 공감을 나누는 장면은 괜히 짠하면서 기특했다. 어쩌면 냉정한 독일 사회에서 가장 인간적인 곳이 정신 병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들은 거기서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기대고 이해하고 응원해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도 아픈 사람이기에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보다는 한결 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봐주면서 말이다. 그런 유대속에서 사회와 인간들 속에서 다칠대로 다친 그들이 상처가 나아져서 나가는 모습은 참으로 희망적이었다. 정신병은 참 고치기 힘들다고 하던데, 그런 면에서 주인공이 어리버리한 신입 환자에서 8주간의 힘겨운 나날을 보낸 뒤 고참 환자가 되어 나가는 모습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왠지 내 여동생이 정신병동에서 퇴원하는걸 보는 듯한 기분이랄까. ( 미쳤음에도 흔들리지 않은 ) 탁월한 균형 감각에 통찰력, 문제를 파고드는 집요함에 문제를 직시할 줄 아는 영리함, 군더더기 없는 전개와 설득력 있는 묘사, 거기에 과장하지 않는 유머 감각에 따스한 인간미까지...독일 문단에서 그녀의 등장에 환호했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칭찬을 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던 작가, 이 책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민낯이 아름다운 여인네를 보는 듯했단 것이다. 가식적인 매력에 덕지덕지 바른 화장, 뻔히 들여다 보이는 교태 없이도 어쩜 이리도 아름답던지...자연 미인을 보면 눈이 시원해진다고들 하지? 이 책을 보니 내 마음이 시원해졌다. 그녀의 장점들이 궁금하신 분은 이 책을 보심 되실 것이고, 나는 어린 그녀가 자신의 입원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남겨준 통찰력 있는 문장 몇 개를 여기에 적어놓고 간다. 아름다운데다 통찰력까지 있다니...가히 부러움의 종합체다.


"진단을 받고 사흘 뒤 어머니가 정신과 전문 병원에 자리가 났으니 그리로 옮길 거라고 했다. 그곳에서 지내며 치료를 받을 거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 안에서 뭔가가 멈추고 새로운 것이 시작되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안심이었다. 나는 정신질환을 확진받았다. 즉, 내게 잘못이 있는 게 아니다. 이기적이거나 게으른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죄책감 없이 마음놓고 아파해도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런 긍정적인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제 나는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였다."--15

 

'여긴 정신병원이야. 여기서 더 이상 이상해질 수 있을 것 같아? 남들 눈치보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 조급하게 생각할 거 없어, 아무 생각 없이 자기 자신이 되어 보는거야."--26


" 저 선생님.........제가 여기 와야 하는게 맞나요?" 

나는 밖으로 나가기 전 마지막 용기를 내 그에게 물었다. 그는 재밌다는 듯, 그러나 너그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제 생각엔  아주 딱 맞습니다."--36


뭔가 잘못됐다.오늘부터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왜 이렇게 힘들여  일해야 하는가?--47


낯선 사람들과 이렇게 빨리 친해질 수 있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입원한 지 2주도 안 됐지만 이미 고정적인 친구 그룹이 생겼고 밖에 있는 내 절친들과 보낸 몇 달  보다 이곳에서의 2주가 훨씬 재미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우리는 하나같이 다 맛이 갔으니까.--73


"이렇게 한번 표현해 봅시다. 우울증은 절대 혼자 오는 법이 없어요. 우리 병원에 오는 환자들 보세요. 다들 이런 저런 병을 줄줄이 달고 들어옵니다. 영혼이 아프면 우울하고 기분이 안 좋죠? 우린 그걸로 영혼이 아프다는걸 알 수 있고요.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언제 영혼까지 돌보느냐고 합니다. 우리 머리와 이성은 영혼보다는 일, 육아, 경제 위기, 일상 같은 외부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중요한건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사이의 균형을 찾는겁니다. 우리 영혼은 인내심이 강해서 힘든 상황도 아주 잘 견딥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외면당하게 되면 골치 아픈 존재가 됩니다. 다른 방법을 통해서 소통을 시도하는 거여요. 몸을 통해서 아프다는 사실을 알리는 거죠. 허리 통증, 피부병, 불면증...어떤 증상이든 나타날 수 있어요."--81


잠시 후 상담자가 모두에게 묻는다.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엄격하라고 누가 가르치던가요? 왜 무조건 완벽해야 합니까? 완벽하지 못해도 충분히 잘 하는 겁니다. 완벽하지 못한 나를 사람들이 존중한다는 게 상상이 안 됩니까? 아니면 ...완벽하지 못하면 사랑받지 못할 것 같아요?"

목안에 걸려 있던 자그마한 응어리가 커져서 목이 터질 듯이 아프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 울상이다. 여섯 명의 어른들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 자신을 불쌍해하며 속으로 울고 있다. 어쩌면 심리 치료라는 것은 자신을 가엾게 여기는 일이 아닐까. 평소에는 절대 허용되지 않은 자신에 대한 동정심을 표출하는 일.---95


어릴 적의 말라는 공상을 좋아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였다...어른이 된 말라는 시간을 어기는 일이 없고 모든 일을 똑바로 처리하고 강박적으로 자신을 통제하며 즉흥성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여자다.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맞추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 도대체 사람이 얼마나 생각없이 살면 내가 원하지도 않은 삶에 적응하려고 발버둥치다가 정신병원에까지 들어올까? 왜 갑자기 내가 원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을까?--96


나는 혼자 가만히 미소짓는다. 나는 여기 들어온 환자들의 병명과 비밀도 알지만 행인들이 우리보다 덜 아프지 않다는 사실 또한 잘 안다. 사실 그들은 우리가 즐기는 이 휴식을 부러워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줄도 모르고 동물원의 원숭이 구경하듯 쳐다본다. 그리고 병원 간판은 우리가 사이코 족속임을 말해준다. 나는 구경꾼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환자들의 목에 흰색 팻말을 걸고 다니는 상상을 해본다.

우울증 :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냄.

거식증: 먹이 주지 마시오.

나는 잠시 '에비!' 하면서 구경꾼들을 놀래줄까 하는 유혹을 느낀다. 미친 사람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132


" 어이구, 이 아가씨야, 왜 모든 걸 그렇게 심각하게만 생각해요?"

"생각을 해봐요. 이제 겨우 스물 여덟인데 지금 사는 삶이 못마땅해요. 그럼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인생을 바꿔요. 해보지도 않고 겁에 질려서 엉뚱한 걸로 인생 망치지 말고요."

"그렇게 간단하다고요?"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네, 가끔은 그렇게 간단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옳고 그르고를 따질 필요가 없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냥 결정을 어떻게 내리느냐의 문제여요. 일단 결정을 내리면 훨씬 좋아질 겁니다."--141


"머리가 생각하는걸 다 믿지는 말아요."--174


"엄마, 지금 엄마가 나한테 얼마나 큰 걸 기대하는지 아세요? 그냥 행복해지길 바란다고요?"

내 입에서 행복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신기하다. 금지된 것을 말하는 것 같고, 처음 듣는 말 같고, 왠지 홀가분하다.

"그냥 행복해 지라구요? 그게 얼마나 큰 요구인지 아세요? 행복해지라구요? 삶에 만족하는 균형잡힌 인간이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어떻게 하는 건지 좀 알려 주세요, 행복해지는 방법 말이여요. 전 아무리 해도 안되더라고요. 행복해지는건 그렇게 쉬운게 아니여요. 지금 난 행복할 수가 없어요."--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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