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8
최명희 지음 / 매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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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희 작가는 전주라는 땅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땅이야말로 사람의 몸과 혼을 키우는 터전이라고 한다. 그래서 꽃심을 지닌 땅, 전주는 백제라는 나라와 문화를 키워냈으며, 백제는 비록 망했지만 죽어도 죽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런가. 이성계의 시조 조상 이한 공으로부터 사대조 목조 이안사까지 전주 토호였기 때문이다. 이안사가 고향을 등지고 정착한 곳은 연변 혹은 간도였다. 전주 이씨에게 전주와 간도는 조상의 묘가 있는 곳인 셈이다. 어찌 보면 조선은 백제와 고구려의 맥을 잇는다 할까.

꽃심이란 뭘까. 고갱이 정신 같은 것일 것이다. 그 정신은 전주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는데, 한마디로 완전하고 원만하고 광대한 삶을 의미한다. 그만큼 자연의 넉넉한 품 안에서 평화롭고 풍요롭게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터무니없이 짓밟히고 빼앗겼을 때 어찌 원통하고 억울하고 분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 땅의 백성들은 후백제의 견훤을 '완산의 아들'로 추앙했고 백제의 회복을 염원했다.

그러나 승자인 고려는 그 백제 유민들의 저항 정신을 꺾어 놓기 위해 철저하게 역사를 왜곡하여 견훤은 잔인 무도한 왕으로 기록에 남았다. 게다가 그 땅을 저주하여 전라도 인들은 억울하게 차별 냉대를 받아야했다. 그런 통분의 세월을 해원한 이가 바로 태조 이성계였다. 왕을 낳은 땅이 된 전주는 승격되고 숭앙받았다. 그러니 백제는 죽어도 죽지 않은 것이다. 그 백제는 곧 백성이기도 하다.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백성들의 꿈, 꽃심을 지닌 땅 전주는 지금도 역사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지향이 아닐까.

물론 그것은 전라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일 수도 있다. 나로부터 역사를 바라본다면, 비록 한순간 살다가 죽는 찰라의 인생일지라도,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역사를 재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나의 관점과 행동에 의해 후손들의 삶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면 역사란 업보이고 운명인 셈이다. 개인의 역사든 국가의 역사든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업보는 갚아야 하고 운명은 감당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점점 나아지지 않을까.

이씨 조선은 망했다. 백제와 고구려의 꿈도 다시 좌절되었다. 국토가 분단되고 나라 이름도 둘이 되었지만, 나라 이름이 바뀌어도 민족의 꿈까지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백제가 신라가 되고 고려가 되고 조선이 되고 대한민국이 되어도 국파산하재, 땅은 그대로이듯 말이다.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나 역시 한반도에 사는 사람으로서 이 땅의 기운을 받은 이상, 그 자연과 문화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이을 것은 잇고 버릴 것은 버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1942년 여전히 망한 조선을 부여안고 변한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하며 기득권을 놓으려 하지 않는 종가 어른 앞에서 신세대 조카는 이렇게 말한다. 경천동지할 소리였을 것이다.

“贖良을 하십시오. 집안 노복 종들을 모두 면천을 시켜 주세요. 더 늦기 전에 지금 풀어 주시지요. 세상은 이미 옛날의 세상이 아닙니다.”

만약 그때라도 그렇게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은 또 어떤가. 항상 만시지탄을 하게 되는 건 아닌지. 그래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기 전에 조짐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조짐을 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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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eBook ]토지 03권 - 박경리 - 사실 두 사나이는 용이의 복잡한 마음을 이해하기는 하나 그의 슬픔을 공감할 수는 없었다. 아니, 강청댁의 죽음 자체가 이들에게는 마치 일상다반사같이 무감동하게 바래 봬졌던 것이다. 그것 참 안됐네, 하며 조의를 베풀 상황이 아니었다. 시시각각으로 발소리도 없이 다가오고 있을 병마,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덮쳐올지 모르는 보이지 않는 재앙 앞에 마을 전체는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머지않아 집집에서 병자의 신음이 들려올 것이다. 시체는 줄을 잇고 마을 뒷산으로 떠날 것이다. 아니, 시체를 거둘 사람조차 없을 만큼 마을 전체를 휩쓸고 지나갈지도 모를 일이다. 이십여 년 전 잊었던 악몽은 보다 강한 빛깔을 띠고 사람들 가슴속에 절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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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eBook ]보바리 부인 -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이봉지 옮김 - 보바리는 엠마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점차 그녀를 잊어갔다. 그녀의 영상을 붙들어 두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그녀의 모습은 점점 그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그는 낙담했다. 물론 그는 밤마다 그녀의 꿈을 꾸었다. 항상 같은 꿈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그녀를 껴안으면 그녀는 곧 그의 품속에서 폭삭 썩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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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씨부인은 자기 죽음이 가까워오고 있으리라는 예감 아래 가엾은 환이에 대한 조처를 생각해보는 데 저항을 느끼지 않는다.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을 최씨 가문에 머슴살이를 했다는 기분에서, 엄청나게 불리어나간 재산의 일부를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에 저항을 느끼지 않는다. 결국 자기는 최씨 문중의 사람이 아니었고 다만 타인, 고공살이에 지나지 않았었다는 의식은 그의 죄책감을 많이 무마해주는 결과가 되었다. 나는 당신네들 편의 사람이 아니요, 나는 저 죽은 바우나 간난할멈, 월선네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었소. 윤씨부인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자기의 권위와 담력과 두뇌는 오로지 최씨 문중에 시종하기 위한 가장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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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아들을 원했다. 튼튼한 갈색 머리 아이의 이름은 조르주라 할 것이다. 남자아이를 낳고 싶다는 것은 지난날 그녀가 경험한 모든 무력감에 대한 복수를 의미했다. 남자는 적어도 자유롭다. 그는 온갖 열정을 경험할 수 있고, 세계 각국을 돌아다닐 수 있으며 장애를 극복하고, 까마득한 쾌락까지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여자는 계속 저지당한다. 여자는 기운 없는 동시에 유연하며, 약한 육체에 법률적 속박이라는 이중의 핸디캡을 갖고 있다. 여자의 의지는 끈으로 고정된 모자에 달린 베일처럼 이리저리 바람에 흔들린다. 항상 욕망에
이끌리지만 언제나 세상 체면이라는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다.
어느 일요일 새벽 여섯 시경, 아침 해가 솟을 무렵 그녀는 해산했다.
"딸이야!" 샤를이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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