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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 개정판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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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은 나의 무지와 게으름을 정직하게 대면하게 한다. 습관의 거처는 몸이다. 아는 만큼 살아간다.

 

<동의보감>의 서두를 장식하는 '신형장부도'는 서양의 해부도와 달리 살아 숨쉬는 인간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몸이면서 곧 우주인 생명의 활동을 위주로 하는 저술임을 예고하고 있다.

 

허준과 동의보감

대중문화에 의해 조작된 허준의 이미지 때문에 허준의 진면목이 봉쇄된 면이 있다. 라이벌 양예수에 대한 설정은 선악 이분법 구도일 뿐 동양사상의 시각에서 보면 더 근본적인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스승 유의태는 실존인물이 아니며 한의학에서의 몸은 해부학적 신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살아있는 몸으로 해부학 자체가 의학의 진보를 말해주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예진아씨와의 러브스토리는 우정이 사라진 자리를 연애와 사랑이 채운 근대의 투영일 뿐이며 에로스의 화신이면서 명의가 되는 길은 없다. 허준이 '허준'이 된 것은 명의라서가 아니라 <동의보감>이라는 저서 때문이다. 허준은 의학 이전에 학문을 좋아했고 경전과 역사에 능통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즉 대표적인 유의였다. 1596년 선조가 허준에게 의서 편찬을 명했을 때 그의 나이 58세였다. 다음해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초기 작업이 중단되고 의서 편찬은 허준 개인 몫이 되었고 어의 업무와 병행하느라 작업 속도가 지연되었다. 그러다 1608년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여 69세에 의주로 유배를 갔고 1년 8개월의 유배기간 동안 <동의보감>이 완성되었다. 71세에 유배지에서 돌아와 마침내 완성하였고 77세로 생을 마친다. 전란과 역병의 시대에 선조가 당부한 것은 이 땅에서 나는 약재들의 명칭과 용법을 널리 보급하여 스스로 자신의 몸을 돌볼 수 있게 하라는 것이었다. 허준은 방대한 내용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분류, 배열하고 양생과 의술을 새로운 차원에서 통합하여 내경-외형-잡병-탕액-침구로 이어지는 독창적인 목차를 만들었다. 또한 일반 백성들이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처방과 약재들을 적극 포괄하고 있다. 이 작업을 하기 위해 <동의보감>이 기대고 있는 하나는 유불도 '삼교회통'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동양의학사의 방대한 산맥이다. 상통하는 듯하면서도 엇갈리는 삼교가 공통적으로 마주칠 수 있는 교집합이 의술이다. 무엇을 추구하든 '몸'이라는 지평을 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의보감>이 망라하고 있는 문헌은 <황제내경>, <상한론>, <천금요방>, '금원사대가', 명 이천의 <의학입문>에 이르고 조선의 의학적 전통도 포함되어 있다. "환자가 책을 펼쳐 눈으로 보면 허실,경중,길흉,사생의 조짐이 거울에 비친 듯이 명확하니 함부로 치료하여 요절하는 우환이 거의 없을 것"(집례)이라는 말처럼 <동의보감>은 아픈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의술과 서사의 만남

<동의보감>이 예상 외로 재미있고 낯설지 않은 이유는 특유의 글쓰기 방식에 있다. 당시는 구술의 시대였고 분과와 장르 사이의 넘나듦이 자유로웠다. 과학과 미신이라는 선명한 이분법이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학과 민담 사이의 거리도 아주 가까웠다. 반면 현대는 담론의 장벽 때문에 병원과 약국에 이야기(서사)가 없고, 그래서 의학은 재미없고 지루하고 다만 무서울 따름이다. 구어체와 대화를 많이 구사하면 말에 리듬이 붙는다. <동의보감>의 화법도 대구와 열거법이 빈번하게 구사되고 운문의 배치로 구성되기도 하여 의학적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유효하다. 지식과 신체성을 연결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낭송이 있다. 핵심 사안들은 암송하여 늘 몸에 붙이고 있어야 그 안에 담긴 심오한 이치를 터득할 수 있고 의술이 수행된다. 한의학에서 질병이란 특정 장소 및 세균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에 치유 역시 몸과 일상, 그리고 외부의 기운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근본적인 치료가 가능하다. 그래서 치유 과정 자체가 한편의 풍속적 서사가 된다. 의학이란 생리구조와 처방에 대한 장황한 나열이라고 굳게 믿는 한 의학을 배우고 싶다는 욕망을 원초적으로 차단하고, 자신의 몸을 스스로 치유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원천봉쇄하게 된다. 그러나 <동의보감>의 의사들은 의술이야말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이자 노래이고, 명의란 거기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탁월한 연출가라고 말한다.

 

생명과 질병의 탄생

근대의 도래와 더불어 인간에게 있어 자연은 물질로 이루어진 대상물에 불과해졌다. 그러나 손진인(손사막)에게 인간의 유일성과 고매함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천지만물들과의 대칭적 접점이 훨씬 넓고 강렬하기 때문이다. "하늘의 형은 건에서 나오니, 태역, 태초, 태시, 태소가 있다. 태역은 기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고, 태초는 기가 시작하는 것이며, 태시는 형이 시작하는 것이고, 태소는 질이 시작되는 것이다."(내경편, '신형') 태역-태초-태시-태소라는 동양우주론은 그저 막연하거나 추상적인 언술이 아니라, 힘에서 기로, 기에서 형으로, 형에서 질로 이어지는 단계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쾌한 언술이다. 태초에 기가 있었고, 이 기를 바탕으로 생명의 원천인 정,기,신이 다시 만들어진다. 즉 정기신이란 '기의 생명적 변주'이다. 이렇게 우주론을 통해 몸과 생명의 원리를 전면에 배치한 것이먈로 허준의 독창성이며, <동의보감>이 의서를 넘어 '자연철학서'로 탄생되는 지점이다. 정은 생명의 물질적 토대, 신은 물질을 움직이는 무형의 벡터이다. 이 둘을 결합한 것이 정신이다. 물질과 비물질을 선명하게 구획하지 않고 중첩되어 있다고 보았다. 나누어서 말할 때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기는 정과 마찬가지로 곡식에서 유래하지만 정과 달리 어딘가에 저장되는 게 아니라 주로 몸 안팎을 돌아다니면서 항상성을 유지시켜 주는 에너지의 흐름이다. 정리하면, 정은 생명의 기초를 이루는 물질적 토대, 기는 이 질료를 움직이는 에너지, 신은 정기의 흐름에 벡터를 부여하는 컨트롤러다. 이 셋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면서 변전을 거듭한다. 이 배치에선 개념적 정의보다 그 개념을 둘러싼 이웃항들의 계열이 더 중요하다. 정-진액-골수-신장-생식, 기-호흡-폐-패기, 신-변화-무형-심장-마음. 정기신, 이 삼박자의 리듬은 막강한 파워를 내재하고 있다. 정기신 자체가 우주에 가득한 '기'와 순환을 하기 때문이다. 이 '기의 바다'에서 어떻게 유영할 것이가, 그 용법이 내 존재와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인간의 몸과 자연의 현상은 어떤 중간 매개없이 '곧바로' 직결된다는 점에서 몸은 소우주다. 여기에 은유는 없다. 시공간이 변화해 가는 리듬을 자연이라 한다. 차이 속의 되돌아옴이 순환이며, 이 순환의 우주적 리듬이 역이다. 계절과 인생도 생로병사의 리듬을 밟아간다. "형기가 갖추어진 다음에 아가 생긴다. 아란 채이고, 채란 병을 말하는 것으로 병은 이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사람은 태역으로부터 생기고 병은 태소로부터 생긴다."(내경편, '신형') 아-채-병이 <동의보감>이 말하는 질병의 진행과정이다. 그런데 태역에서 태소로 이어지는, 기형질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질병도 함께 탄생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모든 존재는 원초적으로 질병을 안고 태어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건강/질병의 이분법을 근본적으로 해체한다. 질병이 곧 존재의 축이자 무게중심이며, 따라서 아프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아프냐가 삶의 척도가 된다. 이것이 바로 의료가 단지 기술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비전이 되는 지점이다.

 

정기신과 양생

양생의 기술을 닦는다는 것은 몸과 우주, 삶과 죽음에 대한 전혀 다른 윤리적 태도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배려와 자기수련 혹은 자기치유는 고대그리스 시대 양생술의 핵심이기도 했다. 나를 이루는 정기신은 자연과 연동되어 있다. 내 안에 있는 자연의 동력을 어떻게 최대한 활용할 것인가가 <동의보감>의 양생의 출발점이다. 핵심은 '형과 기가 맞는다'는 것이다. 서로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태과와 불급 모두 위험하다. 태과는 넘치는 것인데, 넘친다는 건 그 체로 사기다(기가 실하다). 불급은 모자라는 것인데, 모자란다는 건 꼭 필요한 정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기가 허하다). 존재는 이미 질병을 안고 태어나고, 후천의 삶이란 이 어긋남을 어떻게 조절하는가에 달려 있다. 결국 병을 고친다는 건 존재의 원초적 간극을 넘어서는 것이면서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자신의 '본래면목'을 찾아가는 길이다. 양생술의 첫번재 테제는 '정을 보호하는 것이다'. 정의 핵심은 신장에 저장되어 있는 정액(성호르몬)이다. 군화는 심장의 불이고, 상화는 뿌리가 없이 떠도는 불로 주로 간과 신장에서 작용한다. 상하의 불이 다 망동하면 정액이 시도때도 없이 샌다.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욕망의 흐름을 정확히 볼 수 있어야 한다. 욕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리적,정서적 흐름뿐만 아니라 이 욕망을 조종하는 사회적 표상과 자본의 원리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국가가 성을 관장하면서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쾌락을 활용하고 조절하는 능력과 권한을 잃어버렸다. 반면 <동의보감>에서는 성욕의 범람을 경계하면서도 성욕의 심리적,생리적 기전을 적극 드러냄으로써 도를 이야기한다. 양생술에는 생명의 원기를 잘 다스리고 좋은 관계를 구성하는 윤리적 실천도 포함된다. 이 방면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개념은 기다. 기를 움직이는 건 감정의 오르내림과 몸의 에너지를 돌리는 것인데 일차적으로 모두 호흡작용과 연결된다. 감정이 조절되지 않으면 기의 손실을 피할 수 없다. 그중에서도 화를 내는 것이 가장 기의 손실이 크다. 조절이란 맥락 자체를 재구성하는 힘이고 그러기 위해선 사건이나 대상과 거리를 두는 '객관화의 능력'이 필요하다. 이것을 '자기배려'의 기술이라고 한다. 자기를 충분히 배려할 수 있어야 비로소 윤리적으로 좋은 관계를 이룰 수 있다. 일상의 관계 안에서 스스로 자신의 기를 조절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 양생술이 추구하는 윤리적 지침이다. 이 기의 조절능력을 기르기 위해 가장 중요한 척도는 자연의 변화, 즉 주야와 계절이다. 청춘이든 노년이든 중요한 건 소통과 순환이다. 이것에는 기혈의 흐름뿐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 시공간적 배치 등이 함께 작용한다. 소통과 공감이란 존재 전체의 장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잘 사는 것은 잘 죽는 것이기도 하다. 죽음의 지혜없이 존재의 구원은 불가능하다. 마음을 닦는다는 건 궁극적으로 생사의 문턱을 넘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훈련이다. 마음은 특히 신에 해당하고 신을 주관하는 건 심장이다. 한의학에선 오장육부가 다 마음의 작용과 연결되어 있다. 비우고 또 비우면 병을 치유하고 도와 하나가 된다. 도란 바로 구체적으로 '몸과 세계', '마음과 사물'이 일치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신과 기가 모여 형이 단단해진다. 그때의 신체적 잠재력은 엄청나다. 명리와 희로, 소리와 색, 기름진 음식, 신이 허하고 정이 흩어지는 이 다섯 가지를 비워야 한다. 비우고 또 비워 타자와의 공감의 장을 확장하다보면 몸과 우주 사이의 능동적 소통도 가능해진다. 죽음에 대한 훈련은 이때 비로소 가능하다. 자본주의 문명은 그 자체로 담음의 절정이다. 물질적 태과와 정신의 불급, 이 간극만큼 몸의 기혈이 막혀 있다. 이 태과불급이 낳는 질병이 암과 우울증이다. 가장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걷기는 몸의 기운을 순환시킴으로써 망상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우리가 가진 물질적 부의 순환이다. 부가 주는 번뇌의 장은 엄청나다. 최종단계는 마음에 새겨진 온갖 소유의 흔적들을 지울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모두가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나 아닌 존재로 변이할 수 있는 것이 곧 무상성이자 자연이다. 이 자연의 역동적 흐름에 고정된 주체 같은 건 없다. 생명의 무수한 변이만이 있을 뿐. 이것이 '통즉불통'(통하면 아프지 않다)의 세계다.

 

내 안의 타자들

차이가 곧 생명력이므로 차이 속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존재에 대한 긍정이 가능하다. 차이가 기존 표상의 낡은 틀을 깨는 것이라면 그과정을 통해 자신의 우주적 연기조건을 보는 것이 깨달음(깨고 도달함)이다. 그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성을 온전히 긍정할 수 있는 힘이 나온다. 그 첫 스텝은 타자와의 마주침이다. 타자는 내 안에도 있다. 내경편의 구성을 보면 생명의 토대인 '정기신'과 그 구체적 표현형식인 '오장육부' 사이에 존재하는 타자들이 있다. 몽, 성음, 언어, 충, 소변, 대변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분명 내 몸 안의 풍경이지만 그 위상학적 좌표는 불분명하다. 이 타자들은 안과 밖, 그 사이 혹은 경계에 존재한다. 우리 몸 자체가 타자들의 집합이다. 오래 전 세포에 들어온 미토콘드리아가 타자들의 원조다. 덕분에 세포의 능력은 업그레이드되었고 생명력의 토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꿈은 미래에 대한 망상이거나 성적 충동이 잠복해 있는 무의식적 기제다. <동의보감>에서 꿈은 사기가 안으로 들어와 오장으로 흘러들게 되면 혼백과 함께 정처없이 떠돌기 때문에 꾸는 것으로 꿈의 내용도 사기의 정체에 따라 달라진다. 꿈은 그 자체로 몸과 마음의 병리적 표현이므로 건강하고 청정한 삶을 위해서 사라져야 한다. 꿈없이 푹 자려면 머리가 차가워져야 한다. 그래야 머리에 있는 피가 간으로 수렴된다. 소리는 나와 외부 사이를 연결해주는 메신저다. 목소리의 이상징후는 몸의 생리적 이상과 맞물려 있다. 언어는 성음의 결정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표상을 만들고 세계를 구성한다. 분명하게 말하고 똑바로 답하는 것이 언어다. 말을 잘 한다는 것은 심신의 소통이 원활하다는 의미이다. 소리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해가 진 뒤, 식사할 때, 누운 채로, 길을 걸을 때 말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고전을 낭송하는 것은 자신의 소리와 교감하는 최고의 방법 가운데 하나다. 지구의 진짜 주인은 벌레들이다. 이 게임에서 인간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어떻게든 평화공존해야 한다. 이것들을 무작정 몰아내면 내적 긴장감이 떨어져 아토피를 비롯한 각종 면역계 질환을 앓게 된다. 똥과 오줌이란 너무 익숙해져서 더이상 새로운 관계가 가능하지 않은 존재에 해당한다. 그럴 때는 미련없이 떠나야지 붙들고 있으면 몸안에 담음과 어혈, 소화장애 등 각종 병을 일으킨다. 똥오줌 역시 바깥으로 나오면 다시 외부의 조건들과 만나 순환이 가능해진다. 똥오줌을 잘 살펴봄으로써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차릴 수 있다. 똥오줌을 시야에서 치워버리는 것과 청결강박증은 함께 간다. 그 결과 샤워문화는 물의 재앙을 초래하고 피부는 나날이 건조해지고 있다. 아토피와 전지구적 사막화가 그 병증이다.

 

얼굴은 통로

얼굴은 오장육부의 아바타다. 눈은 간, 귀는 신장, 코는 폐, 혀는 심장이다. 장부는 구체적인 장기인 동시에 기운의 분포도다. 간은 간이면서 간의 기운이 작용하는 영역과 흐름을 동시에 의미한다. 이 점이 임상의학과 확연히 구별되는 지점이다. 그래서 장기의 건강성 여부는 그 장부의 기운이 미치는 전체 영역의 유동성, 즉 리듬과 강밀도가 관건이다. 폐기와 관련된 병이 생기면 폐를 직접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폐경맥이 흐르는 팔과 손에 침을 놓는 원리가 그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순환과 접속이다. 다른 장기들과 기운을 원활하게 주고받는가, 자기가 담당하는 구역에 제대로 된 에너지를 순환시키고 있는가. 이런 순환과 접속은 몸의 내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계절적 순행과 같은 외부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오장은 간,심,비,폐,신이고 육부는 담,소장,위,대장,방광,삼초부(구체적인 장기가 아닌 기운의 분포도)다. 삼초부를 뺀 오장오부는 음양의 관계로 묶여서 오장은 내부를 구성하는 음, 육부는 외부적인 양이다. 이것은 다시 오행에 배속된다. 음양이 변주되는 것이 오행, 즉 목화토금수로 이 순서는 상생의 흐름이다. 이 다섯 가지 스텝이 천지만물의 운행을 주관하며 내 안의 장부도 이런 원리의 투사다. 오장의 '간심비폐신' 순서가 바로 목화토금수의 리듬이다. 봄-바람-동쪽-신맛-간(담), 여름-화-남쪽-쓴맛-심(소장), 늦여름(환절기)-토-중앙-단맛-비위, 가을-금-서쪽-매운맛-폐(대장), 겨울-수-북쪽-짠맛-신(방광)의 계열이 된다. 본디 시공간엔 이름도 주인도 없다. 생성소멸하는 흐름만 있을 뿐이다. 그 변화의 국면에 차서(질서와 순서)를 부여한 것이 달력이다. 우리의 시공간이 연출하는 1년의 리듬은 항상적이되 동일하진 않다. 그러나 인간은 이 차이와 생성의 향연에 참여하는 방법을 망각하여 스텝이 꼬여 버렸다. 시간과 공간이 따로 노는 것이다. 겨울엔 봄을 기다리고 봄엔 가을을 꿈꾸고, 여기에선 저곳을.. 이런 엇박들 속에서 '지금, 여기'의 시공간성은 해체되고 남는 것은 오직 부질없는 망상들의 반복뿐이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지금, 여기'의 현장을 오롯이 주시해야 한다. 상생이 원활하다는 건 태과와 불급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상극의 원리 또한 그 역할이 과도하면 상대가 찌그러들고 대충 하면 만만하게 볼 것이다. 상생과 상극을 합쳐서 생극이라고 하고 이 생극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변이가 일어난다. 병이 상생으로 이어지면 고치기 쉽지만, 상극으로 일어나면 고치기 어렵다. 하지만 거꾸로 상극의 흐름을 역이용해서 병을 고치기도 한다. 소화가 안 될 경우 비위를 직접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비위를 괴롭히고 있는 간담을 손보는 것이다. 몸이 좋지 않으면 여러 병증이 동시에 일어나는데, 상생상극으로 얽히고 설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맥점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치유의 서사'가 달라진다. 서사적 치법이 가능한 것은 병을 관계의 표현으로 보기 때문이다. 특정 장기의 국소적 병인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병증과 연관된 계열들을 찾아내고 그 계열 전체를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치유의 원칙이다. 오장육부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축은 심장과 신장이다. 신장의 물은 위로 올라가서 연료가 되어 주고, 심장의 불은 그 연료들을 데리고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 이 '수승화강'에 문제가 생기면 '음허화동'이 발생한다. 음이 비어서 화가 동한다는 뜻이다. 신장의 음이 약해서 올라가지 못하면 심장의 불이 제멋대로 망동한다. 현대인들한테 가장 많은 증상이다. 하체가 빈곤하면 신장이 약하고 그 결과 불이 상체로 치성한다. 얼굴이 뜨거워지고 머리가 달아오르면서 망상 속을 헤맨다. 한편 물이 올라가지 못해서 아래로 고이는 것도 문제다. 무릎관절에 습이 적체되어 관절염이나 부종, 자궁질환 등에 시달릴 수 있다. 이 수액대사를 움직이는 건 감정이다. 간은 분노, 심장은 기쁨, 비위는 생각, 폐는 슬픔, 신은 공포를 주관한다. 감정은 어떤 것이든지 속도가 지나치면 가장 먼저 혈에 문제가 생긴다. 성욕과 관련한 음화가 끓어오르면 피가 경맥을 이탈하여 제멋대로 돌아다니게 된다. 발바닥으로 사랑을 하면 된다. 발바닥에 신장의 경맥이 흐르기 때문에 용천혈에서 사랑이 감지되어야 그 신호가 온몸을 부드럽게 감쌀 수 있다. 발바닥이 있는 곳이 곧 내 삶의 현장이다. 음양의 이치상, 기쁨은 발산하는 양기이고 슬픔은 침잠하는 음기이다. 그래서 기쁨은 쉽게 잊혀지고 슬픔은 오래 간다. 이런 이치를 깨우치고 감정의 무의식적 벡터를 벗어나야 한다. 날조된 기억이 상처다. 슬픔이나 결핍 같은 부정적인 힘이 아니라 능동적인 가치에 의해 자신의 삶을 고양시키려면 칠정을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해야 한다. 즉 삶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과거와 미래를 철저히 '지금, 여기'의 관점에서 시간을 재구성한다는 뜻이다. 양자역학적으로도 나는 오직 지금, 여기만을 살 수 있을 뿐이다. 내경(몸 안의 풍경)이 본체라면 외형(몸 바깥의 형상)은 작용에 해당한다. 외형의 모든 색깔과 형태, 동작은 다 내경의 표현이다. 이중에서 포인트는 얼굴이다. 눈-귀-코-입과 혀다. 얼굴을 보면 오장육부와 정기신의 기운적 배치를 다 알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건 표정, 곧 얼굴의 색과 빛깔이다. 이것은 심상의 '표현형식'이다. 사람의 몸에는 구규(아홉 개의 구멍)가 있는데 그중 일곱 개가 얼굴에 모여 있다. 나머지 두 개는 전음과 후음으로 생식기에 있다. 그중에서 눈은 가장 중요한 구멍이다. 일단 눈을 총괄하는 건 간맥인데 신장과 심장이 배후에서 돕는다. 귀는 신장의 구멍이다. 신장에서 수 기운이 올라와야 청력이 작동한다. 청력이 약하면 생리적으로 평형감각을 잃는 동시에 사건을 통째로 보는 힘, 즉 맥락을 온전히 파악하는 힘이 딸리게 된다. 그럴 때 나타나는 증상이 외부적 힘에 맹목적으로 이끌려 가는 충동이다. 코는 천기가 드나는 통로다. 코를 통해 폐의 상태를 관찰할 수 있다. 입은 비위와, 혀는 심장과 연결되어 있다. 입과 혀는 말을 '만드는' 기관이기도 하다. 좋은 말과 맑은 소리를 내는 수승화강을 이루는 최고이 방편이다. 이렇게 일곱 개의 구멍을 칠규라고 한다. 구멍은 안과 밖의 통로, 곧 창이라는 뜻이다. 이 창을 통해 몸은 외부 세계와 소통한다. 이 창으로 들어오는 다양한 차원의 정보를 통해 세계를 구성한다. 얼굴은 기운들이 들고나는 통로이고 이 통로는 투명하고 다이내믹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얼굴은 오직 미적 대상일 뿐이다. 동안과 꽃미남과 같은 척도(욕망)를 향해 달려가는 순간 몸과 몸 사이의 교감능력은 제로상태가 된다. 그 이전에 몸 안에서 내경과 외형 사이의 통신망이 교란되어 버린다. 자기 몸으로부터의 소외에선 개별 신체의 다양성과 특이성은 사라지고 누가 더 척도에 가까운가라는 서열만 따지게 된다. 서열에 대한 집착이 바로 권력이다. 왜 대중들은 기꺼이 자신의 몸을 권력의 시선에 가두고자 하는 것일까? 왜 기꺼이 섹시함이라는 이미지의 노예가 되고자 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질 때가 되었다.

 

몸-병-약, 관계와 배치

오행이 생명과 우주의 기본원리라면 오운육기는 천지가 벌이는 구체적인 기운의 각축이다. 하늘에는 오운이, 땅에는 육기가 형성되었다. 이 기운들의 변화로 기후가 형성되고 지리적 특성이 만들어진다. 인간이 겪는 병의 많은 부분은 운기로 인해서다. 인간은 시공간을 떠나서 살 수 없기에 시공간의 기운은 존재의 토대인 것이다. 기후적 조건들이 몸과 결합하면 그 해만의 고유한 병들이 탄생한다. 산다는 건 몸과 외부 사이의 '기싸움'이다. 이 기싸움의 균형점이 깨질 때 각종 병들이 발생한다. 병이 있는 곳에 약이 있다. 병과 약은 불멸의 파트너다. 병이 구체적으로 현현하는 방식과 경로는 외감, 내상과 허로, 기타등등 각양각색이다. 외감이란 외부의 기운에 감한다는 '감기'다. 내상과 허로는 외부의 기운보다는 몸 자체의 기운조절에 실패해서 생긴 병들이다. 내상이 또 외감을 불러들이기 때문에 결국은 한통속이다. 원인이 몸 안에 있는지 바깥에 있는지 명확하게 분류하기 어려운 돌림병이나 광기, 옹저 등 병 자체의 개성과 독립성이 강한 기타등등의 경우도 있다. 잡스러운 병들을 관통하기 위해 의사는 이 병들의 베이스캠프인 천지운기를 파악해야 한다. 운기의 핵심은 절기다. 절기는 태음력과 태양력의 결합으로 사람들이 계절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인식론적 최소단위이다. 절기의 변화는 결코 외부적 조건만이 아니라 내 몸과 마음에도 있다. 산다는 건 이 안팎의 기운들이 리듬을 타는 것이다. 도시인들의 권태와 무기력은 이 리듬으로부터 이탈했을 때 나타나는 병증이다. 그 리듬을 주도하는 기본코드가 육기, 즉 풍, 한, 서, 습, 조, 화다. 풍은 목의 작용으로 봄을 주관한다. 한은 수의 작용으로 겨울을 주관한다. 화는 군화와 상화로 나뉘어서 군화의 작용을 열(화)이라 하여 늦봄에서 초여름까지 주관하고 상화의 작용을 서라 하여 여름을 주관한다. 습은 토의 작용으로 장하(늦여름)을 주관한다. 조는 금의 작용으로 가을을 주관한다. 육기란 결국 계절들의 구체적인 표현형식이다. 시공간에 따라 다르게 펼쳐지는 운기들의 큰 단위가 60갑자다. 60년을 단위로 천지의 기운이 되돌아온다고 보았다. 이 차이 속의 되돌아옴이 순환이고 항상성의 리듬과 차이의 생성이 순환의 기본원리다. 이 순환의 장을 떠나지 않는 한 몸은 평생 '감기'를 앓을 수밖에 없다. 어떤 종류의 감기인가, 얼마나 아픈가, 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가 등이 문제일 뿐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운들의 좌충우돌, 그 작용의 발현이 병인데 이 병의 자취를 찾아내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의사들의 소임이다. 병을 찾는 것은 보고 듣고 묻고 만져서 아는데 정보의 양이 많아질수록 의술의 수준은 떨어진다. 정보가 누적된다는 건 그만큼 시선이 산포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정보의 양이 아니라, 핵심을 간파하는 안목이다. 진단이건 처방이건 다다익선은 금물이다. 현대의학과는 아주 다른 방식이다. 조기검진과 정기검진이 만병통치약처럼 말해지지만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드러나는 국면과 양상이 전혀 달라진다. 요즘엔 의료자본의 시선이 더 막강하기 때문에 환자의 몸을 보는 궁극적 척도는 '자본'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많이, 비싸게, 자주' 할수록 건강해질 거라는 믿음은 우리 시대가 앓고 있는 새로운 미신이다. 한의학에서 진단이란 '표(겉)에서 리(속)를 추론하는' 기술이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눈빛에 신이 들어 있는가 아닌가이다. 신이란 '생명에의 의지'다. 결국 병을 고치는 건 의사가 아니라 환자 자신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몸 전체, 특히 얼굴에는 모든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마는 심, 코는 비, 왼뺨은 간, 오른뺨은 폐, 턱은 신의 부위다. 모든 정보들이 집약, 응축되는 결절점을 찾아내지 못하면 오진은 물론이고 쓸데없이 약을 많이 써서 요행을 기다리게 된다. 현대의학이 병을 명명하는 방식은 병에 시공간적 좌표를 부여하는 방식이지만 <동의보감>의 명명법은 음양(속성), 표리(위치), 한열(성질), 허실(성쇠)과 같은 팔강변증의 분류학적 배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팔강변증의 배치에선 주체와 객체가 분명히 나뉘어지지 않는다. 병은 이 경계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외감으로 인한 병들은 육기(풍한서습조화)가 태과/불급의 상태에 빠져 육사가 된다. 육기 가운데 풍은 백가지 병의 으뜸이다. 풍이 변화되어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중풍의 원인은 풍이 아니라 화다. 대체로 칠정으로 인해 열이 지나치게 생긴 탓이다. 치법은 순환이다. 육기 가운데 한의 비중이 가장 크다. 상한병에 걸리면 정신없이 떤다. 상한이 무서운 건 그 잠복성에도 있다. 추울 땐 추위를, 더울 땐 더위를 제대로 겪어야 한다. 육기 가운데 서는 여름의 화기다. 하지 이후에 열병을 앓는 것이 서병으로 소위 '더위 먹는다'는 것이다. 육기 가운데 습은 비위의 운화작용과 연결되어 있다. 사지권태, 관절염, 소화불량, 부종 등 몸을 무겁게 하는 증상들은 거개가 습으로 인한 병이다. 조는 습을 말리는 기운, 곧 기화작용에 해당한다. 이 과정도 지나치면 너무 심하게 말려 버려서 존재 전체를 메마르게 만든다. 화는 계절과 무관한 뿌리없는 화, 곧 위화로서 시도때도 없이 어느 장기든 다 넘나들 수 있다. 음허화동도 이 화기의 태과로 인한 것이다. 열이 망동하면서 몸 안의 각종 음액을 다 증발시킨다. 상화를 어떻게 조절하고 활용할 것인가가 우리 시대 '문명생리학'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다. 내상은 내부의 기가 상하는 것으로 음식상과 노권상이 있다. 육식-과식-야식 다음으로 많은 식상이 주상이다. 육식도 열이고 술도 열이니 진액이 다 고갈될 수밖에 없다. 술독이 오뇌로 이어지는 축에서 벗어나려면 일상의 리듬을 통째로 바꾸어야 한다. 노권상에도 두 가지가 있다. 힘을 많이 써서 상한 것은 순전히 기를 상하여 땀이 없는 것이다. 마음을 많이 써서 상한 것은 혈까지 상하여 땀이 있는 것이다. 허로증은 내상 가운데 좀더 치명적인 상태로 제일 문제적인 허증은 음허다. 그 증상은 매일 오후에 오한, 발열이 있다가 저녁이 되면 약간 추우면서 풀린다. 결국 내상이나 허로 모두 핵심은 조절이다. 몸 안팎의 기운이 다 문제가 생기거나 뭐라 규정할 수 없는 기운에 노출될 때 아주 색다른 병들이 생겨난다. 우리시대도 광우병이나 조류독감, 구제역, 무병 등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은 채 차곡차곡 쌓여가는 소위 만성질환이다. 쌓이고 막혀서 생기는 병증들의 종결자가 암이다. 암은 이웃세포와의 교류를 거부하고 자신만을 증식하는 세포다. 암세포는 늘 생겨나고 또 사라진다. 면역계가 암세포를 통제할 수 있으면 공존가능하다. 무조건 절개해야 하는 게 아니라 잘 풀어주면서 함께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 병과 몸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관계와 배치다. 병을 중심에 놓고 몸을 본다면 병이란 내 몸의 가능성이자 잠재력이다. 병이 원수와 적이 아니라, 친구와 스승과 연인이 되는 식의 대전환이 가능하다면 몸이 연출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의 축제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병이 있는 곳에 약도 존재한다. 약이 없다면 병도 없다. <동의보감>의 탕액편 순서는 수부, 토부, 곡부, 인부 순이다. 수가 제일 먼저 나온 것은 물이 만물의 근본이기 때문이고, 토가 두번째인 것은 땅이 만물을 기르기 때문이며, 곡식이 하늘과 땅에서 인간을 기르므로 곡이 그 다음이다. 곡식 다음에 사람이 나온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대자연의 질서 속에 있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뒤에 이어지는 분류도 약성보다는 자연철학적 분류에 입각하고 있다. 수부를 보면 물의 종류가 많다는 사실이 놀랍다. 수부 마지막에 나오는 약은 육천기로 물이 아니라 공기다. <동의보감>에서 처방이란 약재의 잠재력 및 여러 약재들 사이의 '힘과 기'를 배합하는 관계의 기술이다. 가장 중요한 건 계절과의 조화다. 봄에는 서늘한 풍약, 여름에는 매우 차가운 약, 가을에는 따뜻한 약, 겨울에는 매우 뜨거운 약을 넣는다. 이것은 생화의 근원을 끊지 않기 위해서다. 아울러 시대상황과의 조화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배합의 기술을 방제학이라 한다. 방제의 하이라이트는 군신좌사이다. 몸의 병을 다스리는 행위와 유교적 통치의 기술을 오버랩시킨 것이다. 단방이 아닌 경우 한의학의 약처방은 기본적으로 이 구조를 바탕으로 한다. 이런 배치에는 약이 '약'이 되는 건 어디까지나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라는 전제가 담겨 있다. 처방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정기는 보하고 사기는 사한다'는 것이다. '토한하' 삼법은 사기를 빼내는 가장 빠른 치법이다. 이열치열, 이이제이의 전략에 가깝다. 이 삼법은 상당한 체력과 통증이 수반된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극심한 냉대를 받기 시작했다. 치료는 무조건 통증을 완화시켜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때문이다. 이것은 병을 치유한다기보다 병을 망각하는 방법이다. 병도 생로병사를 한다. 약은 이 시간성에 개입하는 것이다. 병은 내 몸과 외부의 기운이 어긋나서 발생하므로 그 책임은 일단 나에게 있다. 따라서 아프다는 건 내가 내 몸에 대해 책임을 지는 행위다. 겪어야 할 것은 겪어야 한다. 병이건 삶이건 아파야 낫는다.

 

여성의 몸과 지혜

<동의보감>이 바라보는 남성과 여성의 몸적 차별상에는 어떤 우열이 없다.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오직 음으로만 된 여성도 없고, 오직 양으로만 된 남성도 없다. 음이 극에 이르면 양이 되고, 양이 극에 이르면 음이 된다. 반면 임상의학은 월경, 폐경, 출산 등을 특별한 치료가 개입해야 하는 과정이라고 간주한다. 그런 의학적 배치 속에서 자란 여성들은 그런 시각을 통해 자신의 몸을 본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대상화'하고, 약간의 문제만 있어도 의사의 도움을 받으려 든다. 병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과 생명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매달의 월경을 통해 자궁은 신호를 보낸다. 여성 질병의 대부분은 월경과 관련이 있다. 생리 안에 감정과 일, 생활리듬 등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하지만 정작 주체들은 듣지 못한다. 그 결과가 각종 여성질환들이다. 자궁의 기혈이 적체되면 섹슈얼리티의 능동적 발현도 어려워진다. 문제는 자궁의 순환이다. 일단 여학생들에게 운동의 즐거움을 허락하라! 14세에 천계가 열리면서 초경이 시작되고, 49세에 천계가 닫히면서 폐경이 된다. 이게 여성의 몸에 흐르는 자연의 리듬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폐경을 받아들이는 자세다. 여성들은 특히 칠정상이 많기 때문에 폐경이라는 사건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병증이 천차만별이다. 중요한 건 리듬이다. 초경이 봄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면 본격적으로 낳고 기르고 키우는 것이 여름, 곧 중년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옮겨가는 순간이 바로 폐경기다. 여름이 가을로 바뀌는 걸 우주의 '금화교역'이라고 한다. 한창 뜨거울 때 입추가 시작되고 태양은 자리를 이동한다. 비로소 열기가 식혀지면서 열매가 익기 시작한다. 폐경기 역시 여성의 인생에 있어 '금화교역'에 해당한다. 금화교역을 멋지게 통과해야 가을의 결실과 겨울의 대성찰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임상의학적으로 폐경기는 여성의 인생에 종착역이라는 이미지가 뿌리깊다. 여성성은 결코 성욕과 구애의 대상으로만 인증되는 것이 아니다. 여성성의 해방이란 오히려 그런 욕망의 배치로부터의 탈주이기도 하다. 폐경기 이후 여성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다른 방식으로 훨씬 더 깊고 넓게 고양된다. 생리가 멈추면 지혜가 쌓이고 이 지혜로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것, 그것이 폐경기 이후 여성들의 가장 자연스러운 코스다. 여성에게 필요한 건 각종 서비스와 호르몬제가 아니라, 스스로의 몸과 그 몸에서 작동하는 우주적 지혜를 알아차리는 배움의 현장이다. 먼저 칠정의 얽히고설킴을 그저 스트레스라는 통칭에 묶어 두지 말고, 자신의 감정과 욕망이 흐르는 길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감정의 회로를 아주 다른 인과 속에서 볼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감정이 흐를 수 있는 통로를 여는 것, 그것이 곧 공감의 기술이다. 삶의 접점을 깊고, 넓게 구축해야 한다. 우리시대에 임신과 출산, 탄생의 전과정은 더이상 자연이 아니다. 철저히 병원에서 관리해야 하는 질병의 일종이 되었다. 분만의 고통은 여성의 우주적 특권이다. 제왕절개는 단순히 통증을 완화시키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내적 생명력을 완전히 침묵시켜 버린다. 그러면 임신과 출산이 모두 스트레스의 원천이 되어 버린다. 출산과 관련하여 아기 또한 탄생의 주역이다. 현대의학은 아기는 완전히 '몰주체적인' 대상으로 단정한다. 사실 아기의 생명력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맹렬하게 활동을 개시한다. 임신에서 해산까지를 모두 의술에 기대는 심리는 출산과 양육에서도 자식을 부모의 부속물로 대하는 사고방식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오이디푸스 가족삼각형의 비극적 구조이기도 하다. 자발성과 능동성을 상실하는 것보다 더 큰 마이너스는 없다. 뭔가를 빨리 터득하고자 하면 그 순간 아이들의 호흡은 가빠진다. 호흡이 빨라지면 마음 또한 자연스레 조급해진다. 이 조급증은 허열을 발생시킨다. 허열이 많으면 자연히 몸의 기운이 상체로 뜨게 된다. 결국 속도와 밀도는 반비례한다. 천천히 배우고 더디게 익혀야 큰 인물이 된다는 '대기만성의 법칙'은 이런 맥락에서 도출된 것이다. 교육의 핵심은 생로병사의 마디를 헤쳐갈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다. 엄마가 호흡을 길고 평화롭게 하는 공부를 한다면 아이 또한 자연스럽게 그 리듬과 강밀도에 접속하게 된다. 중요한 건 칭찬이 아니라 믿음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원초적 차원의 깊은 유대감이 존재해야 한다. 친화력과 신뢰를 동시에 갖춘 리더십을 터득하기 위한 가장 쉽고도 간단한 방법은 경청이다. 경청이란 남이 하는 말을 진심으로 귀기울여 듣는 것이다. 마음을 얻는 것도 이로부터 시작한다. 상대방이 현재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정확히 간파하는 힘이 경청이다. 일단 핵심을 정확히 알아야 새로운 출구나 길을 안내해 줄 수 있다. 귀와 신장, 목소리, 이 세 가지가 역동적인 리듬을 탈 수 있어야 타인과의 소통이 가능하고 리더십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다. 목소리를 크고 낭랑하게 키우면 뼈도 튼튼해진다. 앞으로 기술은 더더욱 고도화되어 일상의 모든 영역을 잠식하게 될 것이다. 이제부턴 그런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삶의 질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그 용법의 핵심은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 마음과 마음 사이를 연결하는 데 있다. 의역의 핵심은 자연이다. 자연은 우리의 시공간이다. 시공간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앎 역시 보편지라 할 수 없다. 삶을 결정하는 건 관계와 배치이지, 어떤 학문의 실체와 내용 자체가 아니다. 의역학은 구체적인 윤리적 실천이 수반되어야 한다. 매일의 일상에서 규칙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몸이 그 리듬에 익숙해지면 그 시공간의 기운을 몸에 저장하게 된다. 이 과정에 반드시 앎의 의지와 욕망이 함께 가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어떤 실천이나 수행도 매너리즘에 빠지고 만다. 글쓰기가 가장 좋은 수련법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글쓰기는 본디 지성의 정점이다. 자신의 몸과 삶을 언어로 조직할 수 있으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집중력이 곧 정기신의 확보다. 자기 자신의 의사가 되는 것이 곧 정기신의 발현이자 존재의 원초적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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