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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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대중적인 견해와는 반대로 사랑은 이타적이 아니다. 최초의 끌림은 상대방의 자기 충족과 통합적 개체에 관한 호기심 어린 존경,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이 자아의 한 부분이 되고 그 정신적 균형의 중요한 부분이 되려는 소망에 근거하고 있다. 상대방의 자기 충족 욕망을 창조한다. 즉, 상대방에 대한 존경은 상대방의 특질을 받아들이려는 소망이 된다. 자아의 충돌은 상대방의 커져가는 지배력을 물리치려는 개별적 시도로 이어진다. 사랑은 상대방과 최종적으로 마음을 터놓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에게 자신이 어떻게 대우받고 싶은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랑은 이기심의 절정이다. 자아는 또 다른 존재를 흡수하여 풍요로워지려고 한다. 사랑은 다른 이에게 심리적으로 활짝 여는 것이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완전히 상처받기 쉬운 상황에 처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상대방을 체내화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자아의 교환이기도 하다. 상호 교환이 부족한 사랑은 어느 한쪽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으며 떠올랐던,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글이다. 어디에 저장해 놓았는지를 몰라 이곳저곳 아케이브를 뒤지며 한참을 찾았다. 결국 핸드폰의 사진앨범 스크린샷 파일에서 이 글의 토막을 발견했다. 파이어스톤의 짤막한 글을 읽으며 생각했다. 이 글은 사랑에 대한 글이고, 결국 성숙과 독립, 마지막엔 자유에 관한 글이구나.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의 주인공 캄빌리의 이야기는 바로 사랑과 성숙, 독립과 자유라는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상호교환이 핵심인 사랑, 바로 그 사랑의 외피만 가져다 입은채 타인을 억압하는 것들이 세계의 도처에 깔려 있다. 때때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의 입과 목소리는 너무 달기 때문에 달다고 말할 수 없는 음료와 같다. 마실수록 달콤한, 달짝지근함에 입안이 텁텁해져 오는, 사랑하는 이의 손에서 내 손으로 건네진 것이기에 마실 수 밖에 없는 음료. <보라색 히비스커스>의 주인공 캄빌리는 바로 이 지독히도 달달한 음료를 아무말 없이 마셔야 한다. 아버지의 회사에서 만든 이 음료, 이것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런데 이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아니, 진정 사랑이기는 한 것일까?


사랑은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며 모순적이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고, 애국자는 나라를 사랑하고, 인간은 동물을 사랑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부모의 뜻에만 따라사는 기계로 만들고, 여성을 성적으로 감정적으로 착취하고, 나라를 위한다며 국민을 짓밟고, 동물의 살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맛있게 먹어버린다. 사랑이라 불리는 것들이 실제로는 우리를 가장 많이 억압한다는 것, 그럴싸해보이는 수사들 때문에 억압의 사실 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억압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도 쉽게 벗어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 폭력도 사랑이라고 믿고 싶게 만드는 것.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잔인하게 인간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 중 하나이다.


가족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아름다운 외피를 두른 폭력에 불과했다. 폭력이 폭력으로 보이지 않게끔 베일을 두르고, 자유를 전적으로 박탈한 뒤 자유란 위험한 것이라고 속이고, 지배자의 언어를 제외한 모든 언어를 금한다. 캄빌리의 아버지가 행하는 선행조차도 자신이 세운 편협한 도덕관에 따른 결과일뿐이었다. 캄빌리는 유산한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용서' 받아야 하는지, 다른 종교를 믿는 할아버지가 왜 지옥에서 구원되길 기도해야 하는지, 자기생각을 당당히 말하는 이들을 아버지가 왜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혁신된 민주주의를 외치며 정의를 표방하는 신문사를 운영하고, 자신이 축적한 부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생활이 힘든 마을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며, 많은 자선단체에 익명으로 기부하는 아버지. 아버지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는 사랑했을지 모르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개인을 향한 구체적 가치를 사랑하는데는 무능했다.

약자는 다름아닌 자신의 언어와 세계를 가지지 못한 자들이다. 캄빌리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알려준 기도문이나 아버지가 듣고 싶어하는 말 이외에는 말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말을 했을때 '저 말을 내가 했었어야 했는데'라고 바란다. 캄빌리는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아버지의 욕망을 따른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며 억압자의 논리를 내면화한다. 아버지의 법에 따라 가치판단의 기준을 세운다. 캄빌리는 아버지의 세계에서 성장했고 그 성장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페오마 고모네를 만나며 캄빌리는 다른 세계와 조우한다. 누구를 기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말하고 떠들고 행동하는 이페오마 고모와 사촌들은 캄빌리를 아버지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초대한다. 두 세계가 부딪히며 충돌하고 분열한다. 죄책감이 밀려오지만 해방감을 느낀다. 캄빌리는 그렇게 자신의 언어를 배운다. 그가 만났던 수많은 자유로운 자아들과 상호작용하며.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억압적 가정에서 스스로 성장하는 개인과 나이지리아 역사가 절묘하게 엮이는 지점에서 억압적 체제의 이중성에 대해 폭로한다. 캄빌리의 아버지 유진은 이 이중성의 화신이다. 나이지리아인이지만 서구의 사고방식을 철저히 내면화한, 그럼에도 가족에게는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를 고수한다. 캄빌리에게 아버지는 사랑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를 상징적으로나 실제로나 죽여 넘어서야 했다. 힘은 우리가 그 대상을 '믿을 때' 에만 존재한다. 캄빌리가 아버지의 권위를, 가부장제의 실재를 믿지 않고 오로지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일을 할 자유가 있단 사실을 믿을때 그 폭압적 힘은 존재할 근거를 잃는다. 그냥 하는 것, 이유를 묻지도, 자격을 따지지도 않고 하는 것, 사랑은 한 자아가 다른 자아를 완전히 흡수해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하고 넓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캄빌리는 성장한다. 모순되고 이중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의 언어를 찾아가는 캄빌리의 성장은 어쩌면 작가 아디치에가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는 용기있는 개인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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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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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대중적인 견해와는 반대로 사랑은 이타적이 아니다. 최초의 끌림은 상대방의 자기 충족과 통합적 개체에 관한 호기심 어린 존경,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이 자아의 한 부분이 되고 그 정신적 균형의 중요한 부분이 되려는 소망에 근거하고 있다. 상대방의 자기 충족 욕망을 창조한다. 즉, 상대방에 대한 존경은 상대방의 특질을 받아들이려는 소망이 된다. 자아의 충돌은 상대방의 커져가는 지배력을 물리치려는 개별적 시도로 이어진다. 사랑은 상대방과 최종적으로 마음을 터놓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에게 자신이 어떻게 대우받고 싶은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랑은 이기심의 절정이다. 자아는 또 다른 존재를 흡수하여 풍요로워지려고 한다. 사랑은 다른 이에게 심리적으로 활짝 여는 것이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완전히 상처받기 쉬운 상황에 처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상대방을 체내화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자아의 교환이기도 하다. 상호 교환이 부족한 사랑은 어느 한쪽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으며 떠올랐던,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글이다. 어디에 저장해 놓았는지를 몰라 이곳저곳 아케이브를 뒤지며 한참을 찾았다. 결국 핸드폰의 사진앨범 스크린샷 파일에서 이 글의 토막을 발견했다. 파이어스톤의 짤막한 글을 읽으며 생각했다. 이 글은 사랑에 대한 글이고, 결국 성숙과 독립, 마지막엔 자유에 관한 글이구나.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의 주인공 캄빌리의 이야기는 바로 사랑과 성숙, 독립과 자유라는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상호교환이 핵심인 사랑, 바로 그 사랑의 외피만 가져다 입은채 타인을 억압하는 것들이 세계의 도처에 깔려 있다. 때때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의 입과 목소리는 너무 달기 때문에 달다고 말할 수 없는 음료와 같다. 마실수록 달콤한, 달짝지근함에 입안이 텁텁해져 오는, 사랑하는 이의 손에서 내 손으로 건네진 것이기에 마실 수 밖에 없는 음료. <보라색 히비스커스>의 주인공 캄빌리는 바로 이 지독히도 달달한 음료를 아무말 없이 마셔야 한다. 아버지의 회사에서 만든 이 음료, 이것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런데 이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아니, 진정 사랑이기는 한 것일까?


사랑은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며 모순적이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고, 애국자는 나라를 사랑하고, 인간은 동물을 사랑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부모의 뜻에만 따라사는 기계로 만들고, 여성을 성적으로 감정적으로 착취하고, 나라를 위한다며 국민을 짓밟고, 동물의 살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맛있게 먹어버린다. 사랑이라 불리는 것들이 실제로는 우리를 가장 많이 억압한다는 것, 그럴싸해보이는 수사들 때문에 억압의 사실 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억압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도 쉽게 벗어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 폭력도 사랑이라고 믿고 싶게 만드는 것.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잔인하게 인간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 중 하나이다.


가족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아름다운 외피를 두른 폭력에 불과했다. 폭력이 폭력으로 보이지 않게끔 베일을 두르고, 자유를 전적으로 박탈한 뒤 자유란 위험한 것이라고 속이고, 지배자의 언어를 제외한 모든 언어를 금한다. 캄빌리의 아버지가 행하는 선행조차도 자신이 세운 편협한 도덕관에 따른 결과일뿐이었다. 캄빌리는 유산한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용서' 받아야 하는지, 다른 종교를 믿는 할아버지가 왜 지옥에서 구원되길 기도해야 하는지, 자기생각을 당당히 말하는 이들을 아버지가 왜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혁신된 민주주의를 외치며 정의를 표방하는 신문사를 운영하고, 자신이 축적한 부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생활이 힘든 마을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며, 많은 자선단체에 익명으로 기부하는 아버지. 아버지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는 사랑했을지 모르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개인을 향한 구체적 가치를 사랑하는데는 무능했다.

약자는 다름아닌 자신의 언어와 세계를 가지지 못한 자들이다. 캄빌리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알려준 기도문이나 아버지가 듣고 싶어하는 말 이외에는 말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말을 했을때 '저 말을 내가 했었어야 했는데'라고 바란다. 캄빌리는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아버지의 욕망을 따른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며 억압자의 논리를 내면화한다. 아버지의 법에 따라 가치판단의 기준을 세운다. 캄빌리는 아버지의 세계에서 성장했고 그 성장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페오마 고모네를 만나며 캄빌리는 다른 세계와 조우한다. 누구를 기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말하고 떠들고 행동하는 이페오마 고모와 사촌들은 캄빌리를 아버지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초대한다. 두 세계가 부딪히며 충돌하고 분열한다. 죄책감이 밀려오지만 해방감을 느낀다. 캄빌리는 그렇게 자신의 언어를 배운다. 그가 만났던 수많은 자유로운 자아들과 상호작용하며.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억압적 가정에서 스스로 성장하는 개인과 나이지리아 역사가 절묘하게 엮이는 지점에서 억압적 체제의 이중성에 대해 폭로한다. 캄빌리의 아버지 유진은 이 이중성의 화신이다. 나이지리아인이지만 서구의 사고방식을 철저히 내면화한, 그럼에도 가족에게는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를 고수한다. 캄빌리에게 아버지는 사랑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를 상징적으로나 실제로나 죽여 넘어서야 했다. 힘은 우리가 그 대상을 '믿을 때' 에만 존재한다. 캄빌리가 아버지의 권위를, 가부장제의 실재를 믿지 않고 오로지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일을 할 자유가 있단 사실을 믿을때 그 폭압적 힘은 존재할 근거를 잃는다. 그냥 하는 것, 이유를 묻지도, 자격을 따지지도 않고 하는 것, 사랑은 한 자아가 다른 자아를 완전히 흡수해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하고 넓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캄빌리는 성장한다. 모순되고 이중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의 언어를 찾아가는 캄빌리의 성장은 어쩌면 작가 아디치에가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는 용기있는 개인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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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읽는 인간 : 오에 겐자부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1.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집어들었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메마른 문체, 무심한 묘사, 무구한 죽음. 세상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사는 한 결코 알 수 없는 기묘한 느낌이다. 도대체 포크너는 왜 죽음을 이렇게나 음울하고 우스꽝스럽게 그려낸 것일까. 한 줄씩 읽어내려가다 멈추어섰다. 이해할 수 없는 포크너의 세계는 나의 독서를 중단시켰다.


 그리곤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을 집어들었다. 이 책에서 겐자부로는 짧막하게나마 포크너에 대해 언급한다. 포크너는 슬픔, 비탄, 회한의 감정을 소설의 동력으로 여긴 작가라 한다. 그제서야 내가 포크너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책 너머의 작가의 삶. 다시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다시 꺼내본다. 이제는 진실로 포크너의 '슬픔'을 느껴본다.


 하나의 소설은 작가의 생과 긴밀히 소통하며 협력한다. 작가는 자신의 관점, 가치관, 크게는 자신의 생을 투영해 글을 쓸 수 밖에 없는 존재다. 한 권의 책을 읽는 다는 것은 한 명의 작가를 만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삶'을 알게 된다는 것은 그 작가의 작품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작가의 생은 독자와 소설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2.


# 오에 겐자부로의 작가인생을 만든 책과 작가들  

 오에 겐자부로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소설가이다. 이 소설가가 자신의 50년 작가인생을 만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읽는 인간]을 펴냈다. 그를 진정한 작가로 만든 것은 책이었다고, 겐자부로는 말한다. 그는 [프랑스 르네상스 단장]을 읽고 도쿄대학 불문과 진학을 결심했다. 포, 오든, 엘리엇은 이상적인 소설의 문체에 대한 영감을 준 시인들이다. 그는 시인의 위대함을 흠빡 받아들여 자신만의 문체를 다듬는다. 시인 블레이크의 슬픔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장남 히카리의 고독을 자기것처럼 느끼도록 했다. 아들이라 해도 알 수 없었던 타인의 고통은 함께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한다.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는 아들과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 책을 넘어선 우정

 인간은 모두 홀로 존재하는 섬이라 했다. 그 섬에 닿으려 바다로 책을 띄운다. 책이 만들어낸 물결의 파장은 저 쪽 섬 누군가에게로 가닿는다. 그리고 그 섬의 누군가가 내가 읽었던 책을 집어들고, 다시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띄어보낸다. 이렇게 책은 그에게 또 다른 책을 불러왔고, 그 책에는 친구의 아름다운 우정이 담겨 있었다.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은 책에 대한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다. 한권의 책은 인간(人間)의 사이(間)로 들어간다. 겐자부로에게 책은 혼자 읽는 행위를 넘어선 타인과의 소통이다. 나는 책과 우정이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단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 오에 겐자부로의 독서법

 겐자부로의 독서법은 평범하지만 어렵다. 바로 번역본과 원본을 비교하며 읽는 재독(再讀)이다. 이 방법을 택하면 작가가 왜 특정한 상황속에서 특정한 어휘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그 미묘한 차이가 작품의 채도와 음영에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어내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여린 감각적 차이에 대한 깨달음은 자신으로 스며와 오로지 자기만이 쓸수 있는 글로 다시금 채색된다. 또 다른 방법은 3년마다 읽고 싶은 대상을 새로 골라 그 작가, 시인, 사상가를 집중해서 공부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확실히 겐자부로를 노벨문학상 작가라는 명예의 전당에 이름 올렸다. 나는 할 수 있는 방법인가? 이는 또 다른 문제인데, 읽는 도중 나를 픽- 웃게 만들었다. 전업작가로 마음을 굳히지 않는 이상, 밥벌이의 지겨움이 가로막을것이 분명하다. (^^)




3.

 위대한 작가들에게는 보통 인생의 아이러니가 작동한다. 작품은 위대할지언정 그들의 삶은 평이하지 않다는 것, 심지어 최대의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도 이 아이러니에서 벗어나기 힘든 인물이었다. 인생 최대의 슬픔이라 여긴 아들의 장애는 삶의 '비탄'을 불러왔다. 하지만 나는 그의 삶에서 비탄이 아닌 다른 감정들을 발견했다. 장애가 있는 아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아버지의 따뜻함을 보았다. 원본과 번역본을 친절하게 비교 설명하는 모습에서 교수님의 인자함을 느꼈다. 새 책을 내놓던 날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자신의 책을 밀어낸 것을 보고 작가생활에 위협을 느끼는 모습에서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보았다. 오에 겐자부로의 삶에는 오히려 반딧불이와 같은 희미하지만 따뜻한 위로가 있다고, 그의 책은 끊임없이 나에게 알려주었다.


 자, 이제 나는 그의 소설을 읽을 준비가 조금은 되지 않았을까.










* 이 책은 위즈덤하우스에서 무료로 제공받은 책의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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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황금방울새 - 전2권
도나 타트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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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방울새(The Goldfinch):도나 타트]

 

 

1. 책 자체에 대한 평


 뉴욕 박물관 테러사건으로 인해 엄마를 잃게 된 13살 소년 시오, 그 테러현장에서 죽어가는 한 노인에게 그의 반지와 명작 <황금방울새>를 받게된다. 그 이후로 시오를 둘러싼 인물들의 죽음과 그림이 오묘하게 얽혀가며 느리고도 힘겹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시오에게 엄마의 죽음은 잊혀질수 없는 화상자국 같은 것이고 결코 지울 수 없는 감정적 상처이다. 그 누구도 엄마만큼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이 없는 세상에 혼자 남았다는 절망감, 그 절망감은 시오의 삶을 무력하게 만든다. 오직 시오가 기댈 곳은 엄마가 죽던 그 날에 건네 받았던 황금방울새의 그림과 그림으로 이어진 호비아저씨와 피파뿐.


  이야기는 조용하고 담담하게 그러나 끈질기고 오래오래 흘러간다. 약 1000페이지에 달하고 2권에 이르는 분량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도나 타트는 장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시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치밀한 서사, 그 사건에 대한 소년의 생각과 감정은 과연 작가에게 어휘의 다양성은 무엇인가 라는 감탄을 남길만 했다. 무엇보다도 명작이라 불리는 그림들과 시간을 아로새긴 고가구들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들은 평소 관심을 가지지 않던 이가 읽더라도 그 작품들을 인터넷으로나마 찾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러한 소설적 요소 못지않게 그녀의 문장, 문체, 분위기는 이 소설이 영화화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시각적인 효과를 주었다.


 충분히 감탄할만한 장점을 가진 소설이었다. 하지만 이야기의 속도나 전개방식, 문체나 스타일이 나에게는 그다지 매혹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야기는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나아갔다. 또한 소설 전반에 흐르는 알수없는 가벼움과 피상성이 있었다. 주인공 소년 시오는 남들은 상상하지 못할 끔찍한 테러로 엄마를 잃고 살아남은 소년이다. 그러나 테러라는 상황의 특수성에 비해 시오가 하는 생각과 행동들은 그 나이때의 아이가 할법한 투상적인 것 뿐이었고 깊은 성찰이나 성장은 없었던듯 했다. 도나 타트는 이러한 가벼움을 의도적으로 소설속에 넣은 것일까? 혹은 테러라는 생명의 위험을 겪어보지 못한 나의 한계였을까? 상처받은 감정과 마주보고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계속해서 되새김질하며 자신의 인생을 겉도는 듯한 소년의 독백들이 지겹도록 이어지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시오는 인생에서 밀려오는 폭압적인 파도에 계속 물을 먹고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황금방울새>만을 붙잡고 파도에 함께 넘실거릴수밖에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계속해서 보여주었다.


 추리와 서스펜스, 긴장감 있는 스릴을 원하시는 분께는 절대 추천하지 않는다. 반면 담담하지만 인생의 우연적 불행을 한 소년이 어떻게 더듬거리며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하신 독자분께는 권하고 싶다.




2. 책의 홍보카피에 관해  

 

사라진 <황금방울새>는 어디 있는가

유려한 수사와 숨 막히는 서스펜스로 완성한 상실과 집착, 운명에 관한 도나 타트의 놀라운 통찰

"우리의 정신을 자극하고 심장을 두드리는 아름다운 소설"

2014년 퓰리처상 수상작

완독률 98.5%의 압도적 1위!



 이 세상의 아들, 딸들이 부모의 자식이라면 책은 출판사의 자식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이라 한들 그 자식에 대해 잘 모르는 부모도 많듯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출판사도 있는것 같다. 부모의 품을 떠난 아들, 딸들이 출가하여 자신의 인생을 살듯이, 출판사의 품을 떠난 책도 독자들에 의해 자신의 길을 나아간다. 따라서 나는 이 단락에서 출판사와 책의 관계에 대해서도 평하고자 한다.


 상단 기울임 처리된 회색의 카피들은 책 표지에 보이는 도나 타트의 황금방울새에 쏟아진 찬사들이다. '사라진' 황금방울새는 어디 있는가?, 유려한 수사, 숨 막히는 서스펜스, 완독률 98.5%의 압도적 1위. 황금방울새에 대해 인터넷을 통해 누구라도 검색해본 사람이라면, 혹은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코너를 한 번이라도 서성거려본 사람이라면 이 화려한 수사들에 어찌 책을 사지 않고 서점을 나설 수 있을것인가.


 출판사가 뽑아낸 책에 대한 묘사와 카피는 이 출판사의 편집부가 이 책을 한번이라도 읽은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책의 분위기, 정서, 흐름과 맞지 않았다. '숨 막히는 서스펜스'는 어디에도 없었고 오히려 주인공인 시오의 담담한 고백들과 생각, 사건들이 강물이 조용히 흐르듯 이어졌을 뿐이다. 그 나이의 아이라면 작은 일에도 가슴이 덜컹할 마련일법한 일들이 간간히 일어나기는 했지만 그것들을 과연 서스펜스라 부를수 있는건지 의심스러웠다. '사라진 황금방울새는 어디에 있는가'도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이야기의 흐름이 황금방울새의 흔적을 숨기기는 커녕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완독률 98.5% 압도적 1위', 내가 1.5%안에 드는건 아닌지 스스로 염려스러웠다.


 너무나 화려한 수식어로 기대를 한껏 부풀어 오르게 한 뒤 완전 정반대의 것을 보여준 [황금방울새]. 굳이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나는 오늘 소고기가 먹고 싶어져 가족들에게 외식을 가자고 한다. 그러자 아버지가 "내가 더 맛있는거 먹여주지!"하며 무엇인지 밝히지는 않은체 그 음식에 관한 찬사를 줄줄이 늘어놓는다. 소고기보다 맛있는게 있다고?하는 생각에 기대에 부푼 나는 점심부터 굶으며 아버지를 따라나서는 것이다. 그러나 내 식탁에 놓인 이 음식의 정체는 소고기와 비슷한 뒷고기도 아닌 해파리 냉채무침? 그 집 해파리 냉채무침이 TV에 방영될 정도로 맛집이라 한들, 예상을 뒤엎는 내용물의 반전은 그 음식 고유의 맛을 해치기에 충분한 것이다.


 출판사의 찬사 가득한, 실제와는 다른 반전적인 카피만 아니었더라도 황금방울새에 대한 나의 실망은 이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책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하지만 그 기대는 누가 만든 것인가? 출판계 사정도 어려운 것을 알고, 따라서 마케팅이 얼마나 판매에 큰 영향을 끼치는지도 알지만 책을 읽어보지 않은 이상 '유려한 수사'나 '숨 막히는 서스펜스'라는 수식어를 쓸 수 없을것 같다. (이게 정말 나만 그렇게 느낀것인지도 헷갈린다.) 과장된 문구와 책과는 살짝 비켜간 분석이 책의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주었고, 마지막엔 '출판사가 도나 타트한테 잘못했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3. 결


 [황금방울새]를  읽으면서, 서평을 쓰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세상의 모든 책은 각각의 매력이 있다는 혼자만의 가치관에 따라 별점은 매기지 않는 것이 나의 철칙 중 하나이고, 이 책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책이 가진 매력은 충분했고 그 이유를 100가지는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출판사의 홍보카피는 책의 매력을 훼손시킬 정도로 극단적이었다. 그 점에서 마음이 대단히 불편했고 과연 서평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평은 출판사를 위한 것인가? 독자를 위한것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서평은 독자를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황금방울새]에 대한 서평은 책 자체에 대한 평/홍보카피에 관해, 2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서술했다. 그러나 이 글도 한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참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무료로 제공받은 책에 대한 서평이며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을 쓴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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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 유시민의 30년 베스트셀러 영업기밀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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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유시민]

: 유시민 / 생각의 길

 


1.

 한번도 글쓰기와 관련된 책에 관심을 가지지도 사지도 읽어보지도 않았다. 글쓰기를 주제로 한 책들은 보통 글쓰기 기술과 같은 방법론에만 치우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까, 하여 막연히 피해왔다. 또한 글쓰기를 제일 잘 배울 수 있는 방법은 '자유롭게 사고하고 무조건 많이 써보기'라 생각했고 글을 쓰는 일 자체도 지극히 나 자신만을 위한 사적인 영역으로 여겼다. 그런데 취업준비생 시절 유시민 작가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 내 처지에 대해 위로받았던 구절이 많았던 탓일까. '유시민' 작가의 글인생과 글쓰기 방법이 궁금해져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않는 글쓰기 책을 도서구입목록에 올려놓았다.

 

 

2.

 작가는  「1.논증의 미학 」에서 글쓰기의 세 가지 규칙을 이야기한다.

첫째, 취향 고백과 주장을 구별한다.

둘째, 주장은 반드시 논증한다.

셋째,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한다.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규칙 이외에도 즉각 실천 가능한 실용적인 방법이 여럿 제시된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기, 글을 쓰고 난 뒤 운율을 살리기 위해 소리내어 읽어보기, 단문으로 써보기, 군더더기 없애기, 한자/일본말/서양말 오남용하지 않기 등이 있다.

 


3.

다른 글쓰기 책은 읽어보지 않아서 비교할 요량도 능력도 없다.

그러나 타도서와의 비교없이도 그의 책에서 몇 가지 좋은 점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좋은 점, 전체적으로 그의 책은 작가 자신의 글쓰기 조언처럼 쉽고 이해가 잘 되었으며 동시에 재미있었다.

이것은 작가가 스스로 제시한 글쓰기 철칙을 자신의 책 쓰기에서도 철저히 지켰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번째 좋은 점, 그가 제시한 글쓰기 방법들은 '방법론'에 불과한 이론이 아니라 누구라도 쉽게 도전해보고 바로 실천할 수 있는 핵심을 담은 실용적인 것들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즉각 적용할 수 있는 것들에는 '단문으로 쓰기', '불필요한 조사 생략하기', '쓴 글을 소리내어 읽어보기'였는데, 확실히 이 규칙들을 투사해 내 글을 바라보니 수정해야 할 부분이 많이 보였다.

 

 세 번째 좋은 점, 신문기사, 책, 칼럼, 헌법재판소 판결문 등 다양한 자료를 발췌, 활용하여 원래 글과 고친 글, 더 고친 글을 서로 비교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수정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이러한 나열과 비교는 잘 고칠수록 글이 얼마나 더 나아질 수 있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어 매우 유용했다.

 특히 헌법재판소 판결문을 인용한 예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매우 공감되었다.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한 헌법재판소 결정문 중 김이수 재판관이 제시한 소수의견의 한 대목은 '판결문조차도 이렇게 쉽고 아름답게 쓰일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법학을 전공한 학생으로서 몇 번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조차 이해할 수 없는 판례문을 그저 지식의 총체인양 비판의식 하나 없이 4년이나 공부했단 사실이 후회가 되는 순간이었다. 김이수 재판관의 판결문과 다른 재판관들의 판결문을 비교해놓은 부분은 반드시 공들여 읽어보시길 권한다.


 

4.

 첫머리에 제시된 '취향 고백과 주장을 구별하고, 주장은 반드시 논증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글쓰기의 철칙 3가지는 나에게 상당한 반성의 기회를 주었다. 책을 읽고 내가 쓴 글을 다시 한번 검열하게 되었는데 수 없이 많은 결함들을 발견하였다.나는 가끔 취향과 주장을 구분조차 하지 못한다. 다름을 인정해야 할 취향은 논증하고 논증해야 할 주장은 취향으로 여기며 합리화할때도 있었다. 일관된 주제로 글을 쓰는것이 아니라 머리속에 떠오르는 상념들을 무더기로 자백하듯 쏟아버릴 때도 있다. 장문을 선호하여 복문을 자주 쓰는 습관 탓에 단어들이 마구 엉켜 주어와 서술어가 맞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의' 와 같은 조사를 남발하고 능동형으로 써야 할 단어를 수동형으로 쓴 것도 많은 문제 중의 한가지에 불과했다. 스스로를 너무 끌어내린것 같지만 사실이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니 그 결함의 존재가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실망스러움이 나를 놓지 않았다. 이 글에서도 고칠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글을 유시민 작가의 글쓰기 철칙으로만 쓸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문법오류나 외래어 오남용, 혹은 자신의 지적수준을 자랑하기에만 급급하고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어려운 글을 쓰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이라는 것은 쓰는 사람의 사유의 흐름과 깊이, 문체 등 다양한 요소가 함께 뒤엉켜 흘러내리는 고유의 분위기 또한 중요하기 때문에 이 방법들만이 '정답'이라고 여기는 것도 피해야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말처럼 읽는 사람이 글쓴이의 마음과 생각을 느끼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써야한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점이다.


 

5.

 논술이나 논문과 같이 단순 글쓰기 이상의 수준의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더 높은 수준의 글쓰기 책을 권한다. 반면 글쓰기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쉽게 이해하고, 재미있게 읽으며, 곧장 적용하여 글쓰기의 향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글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어린 시절 틀린 그림 찾기를 하듯 흥미롭고 쉬운 방법으로 고칠 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총 평은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은 글쓰기의 기초이자 기본에 대한, 그러나 우리가 항상 잊고 있는 것에 대한 책이며, '글쓰기 책, 한 번 읽어보길 잘 했다.'로 요약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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