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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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대중적인 견해와는 반대로 사랑은 이타적이 아니다. 최초의 끌림은 상대방의 자기 충족과 통합적 개체에 관한 호기심 어린 존경,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이 자아의 한 부분이 되고 그 정신적 균형의 중요한 부분이 되려는 소망에 근거하고 있다. 상대방의 자기 충족 욕망을 창조한다. 즉, 상대방에 대한 존경은 상대방의 특질을 받아들이려는 소망이 된다. 자아의 충돌은 상대방의 커져가는 지배력을 물리치려는 개별적 시도로 이어진다. 사랑은 상대방과 최종적으로 마음을 터놓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에게 자신이 어떻게 대우받고 싶은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랑은 이기심의 절정이다. 자아는 또 다른 존재를 흡수하여 풍요로워지려고 한다. 사랑은 다른 이에게 심리적으로 활짝 여는 것이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완전히 상처받기 쉬운 상황에 처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상대방을 체내화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자아의 교환이기도 하다. 상호 교환이 부족한 사랑은 어느 한쪽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으며 떠올랐던,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글이다. 어디에 저장해 놓았는지를 몰라 이곳저곳 아케이브를 뒤지며 한참을 찾았다. 결국 핸드폰의 사진앨범 스크린샷 파일에서 이 글의 토막을 발견했다. 파이어스톤의 짤막한 글을 읽으며 생각했다. 이 글은 사랑에 대한 글이고, 결국 성숙과 독립, 마지막엔 자유에 관한 글이구나.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의 주인공 캄빌리의 이야기는 바로 사랑과 성숙, 독립과 자유라는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상호교환이 핵심인 사랑, 바로 그 사랑의 외피만 가져다 입은채 타인을 억압하는 것들이 세계의 도처에 깔려 있다. 때때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의 입과 목소리는 너무 달기 때문에 달다고 말할 수 없는 음료와 같다. 마실수록 달콤한, 달짝지근함에 입안이 텁텁해져 오는, 사랑하는 이의 손에서 내 손으로 건네진 것이기에 마실 수 밖에 없는 음료. <보라색 히비스커스>의 주인공 캄빌리는 바로 이 지독히도 달달한 음료를 아무말 없이 마셔야 한다. 아버지의 회사에서 만든 이 음료, 이것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런데 이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아니, 진정 사랑이기는 한 것일까?


사랑은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며 모순적이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고, 애국자는 나라를 사랑하고, 인간은 동물을 사랑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부모의 뜻에만 따라사는 기계로 만들고, 여성을 성적으로 감정적으로 착취하고, 나라를 위한다며 국민을 짓밟고, 동물의 살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맛있게 먹어버린다. 사랑이라 불리는 것들이 실제로는 우리를 가장 많이 억압한다는 것, 그럴싸해보이는 수사들 때문에 억압의 사실 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억압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도 쉽게 벗어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 폭력도 사랑이라고 믿고 싶게 만드는 것.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잔인하게 인간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 중 하나이다.


가족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아름다운 외피를 두른 폭력에 불과했다. 폭력이 폭력으로 보이지 않게끔 베일을 두르고, 자유를 전적으로 박탈한 뒤 자유란 위험한 것이라고 속이고, 지배자의 언어를 제외한 모든 언어를 금한다. 캄빌리의 아버지가 행하는 선행조차도 자신이 세운 편협한 도덕관에 따른 결과일뿐이었다. 캄빌리는 유산한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용서' 받아야 하는지, 다른 종교를 믿는 할아버지가 왜 지옥에서 구원되길 기도해야 하는지, 자기생각을 당당히 말하는 이들을 아버지가 왜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혁신된 민주주의를 외치며 정의를 표방하는 신문사를 운영하고, 자신이 축적한 부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생활이 힘든 마을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며, 많은 자선단체에 익명으로 기부하는 아버지. 아버지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는 사랑했을지 모르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개인을 향한 구체적 가치를 사랑하는데는 무능했다.

약자는 다름아닌 자신의 언어와 세계를 가지지 못한 자들이다. 캄빌리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알려준 기도문이나 아버지가 듣고 싶어하는 말 이외에는 말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말을 했을때 '저 말을 내가 했었어야 했는데'라고 바란다. 캄빌리는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아버지의 욕망을 따른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며 억압자의 논리를 내면화한다. 아버지의 법에 따라 가치판단의 기준을 세운다. 캄빌리는 아버지의 세계에서 성장했고 그 성장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페오마 고모네를 만나며 캄빌리는 다른 세계와 조우한다. 누구를 기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말하고 떠들고 행동하는 이페오마 고모와 사촌들은 캄빌리를 아버지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초대한다. 두 세계가 부딪히며 충돌하고 분열한다. 죄책감이 밀려오지만 해방감을 느낀다. 캄빌리는 그렇게 자신의 언어를 배운다. 그가 만났던 수많은 자유로운 자아들과 상호작용하며.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억압적 가정에서 스스로 성장하는 개인과 나이지리아 역사가 절묘하게 엮이는 지점에서 억압적 체제의 이중성에 대해 폭로한다. 캄빌리의 아버지 유진은 이 이중성의 화신이다. 나이지리아인이지만 서구의 사고방식을 철저히 내면화한, 그럼에도 가족에게는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를 고수한다. 캄빌리에게 아버지는 사랑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를 상징적으로나 실제로나 죽여 넘어서야 했다. 힘은 우리가 그 대상을 '믿을 때' 에만 존재한다. 캄빌리가 아버지의 권위를, 가부장제의 실재를 믿지 않고 오로지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일을 할 자유가 있단 사실을 믿을때 그 폭압적 힘은 존재할 근거를 잃는다. 그냥 하는 것, 이유를 묻지도, 자격을 따지지도 않고 하는 것, 사랑은 한 자아가 다른 자아를 완전히 흡수해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하고 넓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캄빌리는 성장한다. 모순되고 이중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의 언어를 찾아가는 캄빌리의 성장은 어쩌면 작가 아디치에가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는 용기있는 개인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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