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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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읽으며 천천히 곱씹어보며 읽는 맛을 느꼈다. 포장되지 않은 솔직함이 매력적이었고,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은 담백한 느낌에 푹 빠졌다. 미사여구 필요없이 핵심을 찌르는 단순함에 꾸미지 않은 숭고함을 느꼈다. 별로 중요치 않다는 느낌에 기억에서 편집되어버린 사소한 것들에 대해 잘 끄집어내어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런 시선을 가진 사람이 쓴 책이라면 그의 글을 좀더 읽어보고 싶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알랭 드 보통의 다른 책도 꼭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읽게 된 그의 책이『공항에서 일주일을』이다.

 

공항은 여행지에 도달하기 위해 거치게 되는 통과의례이다. 그동안 그저 어쩔 수 없이 거쳐야하는 곳이기에 어떻게 하면 공항에서 머무는 시간을 줄일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조금 아쉽다. 모든 여행의 시작과 끝은 공항이고, 공항에서의 느낌을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해놓아도 좋았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글을 보니 공항에서 느끼게 되는 감정을 콕콕 잘도 짚어준다. 알랭 드 보통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만약 화성인을 데리고 우리 문명을 관통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깔끔하게 포착한 단 하나의 장소에 데려가야 한다면, 우리가 당연히 가야할 곳은 공항의 출발과 도착 라운지밖에 없을 것이다. (16쪽)'

알랭 드 보통은 2009년 여름, 공항을 소유한 회사에서 일을 하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런던에서 가장 큰 공항의 두 활주로 사이에 자리잡은 최신 탑승객 허브인 터미널 5에 작가 한 명을 일주일동안 초대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출발 대합실의 D 구역과 E 구역 사이에 특별히 배치한 책상에서 탑승객과 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책을 쓰기 위한 자료를 모으게 될 것이라는 점. '혼돈과 불규칙성이 가득한 세계에서 터미널은 우아함과 논리가 지배하는 훌륭하고 흥미로운 피난처로 보인다.' 그가 묘사한 공항 터미널을 보니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명분은 없다고 보인다. 내가 작가라도 덥썩 물고싶은 작업일테니.

 

공항에 직접 가서 내 눈으로 보는 듯 생생하게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무래도 알랭 드 보통의 문체에 호감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공감하게 되는 일이 많아진다. 어떤 방을 배치받았는지, 룸서비스에 대한 감상은 어떤지, 공항체험의 극히 사소한 부분까지 세세하게 이야기를 펼치는데, 그 이야기에 흥미로운 마음으로 몰입하게 된다. 작가가 어디 어디를 여행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공항에서 보이는 풍경만을 묘사했을 뿐인데도 그것이 의외로 재미있는 것이다. 특히 룸서비스 메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끄집어내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일본 에도 시대에 하이쿠 형식을 완숙 단계로 끌어올린 마쓰오 바쇼의 이런 시구조차 소피텔의 케이터링 사업부 어딘가에서 일하는 익명의 장인이 지은 시구에 비하면 단조롭고 환기하는 힘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햇볕에 말린 크렌베리를 곁들인 연한 채소,

삶은 배, 고르곤촐라 치즈

진판델 비네그레트 소스로 무친 설탕 절임 호두 (27쪽)

단순히 메뉴판을 집어들고 메뉴를 선택해 수화기를 들어 9번을 넣고 주문을 넣으면 끝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붙들어잡고 글로 옮기는 능력이 작가에게는 있다. 비행기의 여행 일정을 알리는 스크린을 보며 무한하고 직접적인 가능성의 느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일러주고, 보안구역에서 느낄 법한 것을 길게 풀어낸다. 모든 인간을 항공기 폭파범 후보자로 보는 보안요원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보안구역을 무사히 통과할 때 마치 고해를 한 뒤 교회를 떠나거나 속죄의 날에 유대교 회당을 떠날 때와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해방감이었을까? 공항검색대를 통과하고 이제 쇼핑센터만 보이는 곳으로 위치 이동을 하게 될 때 무언가 무게감이 훅 달아나는 것은?

 

이 책은 처음부터 마음을 확 사로잡는 것은 아니었다. 쓰윽 읽겠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다시 앞으로 돌아가게 된다. 건성으로 읽었던 부분을 다시 눌러읽으며 곱씹어보게 된다. 묘한 감정이 일어난다. 세상 일은 아무 것도 아닌 듯한 사소한 일에서 역사에 점찍을 만한 어마어마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고, 평범한 듯한 일상에서 커다란 의미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공항을 지난다는 것은 그저 사소한 일일 수도 있으나, 그곳만을 의미 있게 부각시키면 그것 또한 엄청난 의미가 된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느끼게 된다. 접근, 출발, 게이트 너머, 도착 등 네 파트로 나뉜 글 속에서 공항의 현재를 떠올리게 된다. 지금도 떠나는 사람들과 도착하는 사람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뒤엉켜 삶의 소리를 내는 부산한 곳이다. 나또한 공항에 가면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한 절차를 밟아야 하고, 그곳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이 들려주는 공항체험담에 웃고 공감하기도 하고, 씁쓸했다가 미소짓기도 하는 그런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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