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기행을 벌이며 폭정을 일삼던 카롤 2세에 맞서 이온 안토네스쿠 장군은 1940년 9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카롤 2세를 쫓아내고 19살인 미하이 1세를 왕으로 세우고 전직 정권과 관련되어 있거나 또는 무능한 80명의 군 인사들을 퇴역시키며 권력을 잡았다.


한편 이 시기에 대외적인 상황은 루마니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940년 6월에는 독일군에 의해 파리가 점령당했으며 이는 루마니아의 몇 안되는 우방국인 프랑스마저 몰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틈을 타서 소련은 루마니아로부터 베사라비아(몰도바)를 강탈해갔고 나치 독일은 유전 지대를 통한 석유 공급을 요구해왔다. 이러면서 한 때 친영적 성향을 보이던 안토네스쿠는 친독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41년 6월 22일, 안토네스쿠 정권은 베사라비아를 되찾기 위해 독일과 연합을 맺고 대소전에 참여를 선언했다. 이때는 마니우 같은 반독 정치인들이 보기에도 대소전 참전은 정당화 될 수 있었으며 국민들 사이에서도 지지가 높았다. 어쨌거나 독일군의 공세 흐름 덕분에 1941년 7~8월 베사라비아가 루마니아의 수중에 들어왔고 미하이 1세를 비롯한 많은 인사들은 여기서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다.


실제로 만약 이때 전쟁에서 발을 뺐다면 루마니아가 전범국 신세를 면했을지도 모르는게 영국 정부는 1941년 12월까지도 루마니아의 어려움을 이해한다는 뜻에서 아직 루마니아에 대해선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토네스쿠 정권은 드니에스테르를 가로질러 소련 국경을 넘어버렸는데 스탈린그라드까지 진출한 루마니아군 1개 사단은 포로가 되었으며 나머지 6개 사단은 전쟁 동안 크리미아 반도에 묵여있는 등 커다란 실책을 저지르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에 루마니아도 유대인 학살에 동조했다고 한다. 먼저 학살이 시작된 곳은 베사라비아 지역과 부코비나 지역으로 110,033명이 넘는 사람들이 강제 이송되었다. 그 과정이나 이송 후의 열악한 환경으로 그 중 59,392명이 1943년까지 사망했다. 이러한 안토네스쿠 정권기 내 유대인 학살 정책으로 사망한 인원은 약 40만명 가까이 되며 이는 추축국 중에서 심각한 편이었다.


결국 이러한 루마니아의 추축국 행보에 미국은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 있었던 회의 이후 모든 적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면서 다소 루마니아에 대해 온건한 편이던 영국의 타협 시도를 물 건너가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안토네스쿠 정권은 줄을 잘못 섰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독일의 압력에 적당히 얼버무리기만 했고 연합국과의 접촉 시도는 베른, 이스탄불, 마드리드, 스톡홀름에서 이뤄졌지만 연합국의 단호한 태도로 인해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1944년 8월 23일, 보다못한 미하이 1세는 안토네스쿠를 왕궁으로 불러들인 뒤 갑작스럽게 체포해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겼다. 그 후 독일 공군은 부쿠레슈티 왕궁을 폭격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소련군이 진입하면서 루마니아도 공산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1. 루마니아는 2차대전 초기 추축국 가담은 나름 명분도 있었고
2. 또 실질적으로 성과를 거두기도 했음.
3. 그러나 제때 물러나지 못한 덕분에 전쟁에서 못빠져나왔고
4. 그 결과 소련의 공산화 물결을 피해가지 못함.


출처

- 에드워드 베르, <차우셰스쿠 악마의 손에 키스를>, 연암서가, 2010, p122~134

- http://www.worldwar2.ro/generali/?article=96 (WorldWar2.ro - Marshal Ion Antones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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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사령장관이 미드웨이 공략을 계획한 이유 중 하나는 하와이 점령을 위한 발판 마련이었다. 또한 존 스테판의 <Hawaii under the Rising Sun>에서도 일본군은 예전부터 하와이 침공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으며 1942년 9월까지도 하와이에 대한 상륙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과연 만약 일본군이 미드웨이를 점령했다면 하와이까지 진출하는게 가능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예측 가능한 조건 하에서는 당시 일본군은 절대 하와이를 점령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인데 먼저 막강했던 미군의 하와이 방어 전력을 봐야 한다.



1942년 4월 하와이 주둔 미군 지상병력은 6만명이 넘었고 육군항공대는 8,900명이었다. 거기다가 미 육군은 빠른 시일 내 육군 지상군과 항공대 규모를 11만 5,000명까지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참고로 이 수치는 해군 전력은 제외한 결과이다. 대부분의 병력은 오아후 섬에 주둔했는데 이 섬은 기동방어전을 펼치기에 좋은 지형이었다.



반면 일본군은 하와이를 점령하는데 필요한 전력을 3개 사단에 4만 5,000명이라고 보고 있었는데 이건 턱 없이 적은 병력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일본군은 7,000km가 넘는 곳을 가로질러 이 규모의 병력을 수송할 만한 능력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고 설령 어찌 저찌해서 섬을 점령한다고 해도 워낙 본토와는 거리가 떨어져 있는지라 보급을 충분히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백번 양보 해서 수송 선단을 확보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일본군은 미군의 방어를 뚫고 상륙할 능력이 없었다. 일본군에게는 상륙작전 지원에 필요한 함포 사격이나 항공지원에 대한 교리가 없었고 오아후 섬의 크기와 미군 방어선의 깊이를 생각해보면 우회기동은 불가능하기에 정면 공격만 가능했다. 당연히 과달카날의 사례처럼 저 상황에서 정면 돌격했다간 바로 박살날테니 성공 가능성은 없다시피 하다.



더욱이 일본군은 항공모함들로만 하와이의 제공권을 얻어야 했다. 약 2,000km나 떨어진 미드웨이에서 하와이 상륙 작전을 지원하는 일은 말도 안되니 말이다. 거기다 일본군 기동부대는 전력이 정점에 달했을 때도 수주일 동안 적대수역에서 전투를 하며 적을 굴복시킬 수준의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1942년 4월 하와이에는 275기의 작전기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늘어가고 있었다. 또 새러토가와 와스프가 작전기들을 추가로 수송해올테니 일본군은 항공모함 6척을 죄다 끌고 왔어도 하와이 주둔 미군기와 비슷한 수의 비행기들을 가지고 전투를 해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하와이 해역에서 항공모함들이 오래 머무를 수 있도록 보급을 유지할 방법이 없다.



1941년 12월 이후 일본군 점령지들에 공업지대가 전무하다는 부분도 눈여겨 볼 만하다. 당장 독일만 하더라도 체코슬로바키아 공업지대와 프랑스 파리, 생나제르 조선소, 루마니아의 유전지대를 활용할 수 있었지만 일본은 태평양 지대에서 구축함 이상의 군함을 만들 수 있는 조선소가 없었다. 규슈 이남의 일본군 점령지 중 쓸 만한 드라이독은 기껏해야 싱가포르 정도가 전부였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 획득한 자원들도 일본으로 싣고 가야만 완제품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치명적인 문제점이었다. 거기다가 일본 본토의 공업지대는 1930년의 군비 확장 기간 동안 생산한계점에 도달해 있었고 생산잠재력이 충분한 미국과는 달리 일본은 단기간 내 설비를 확충할 능력이 없었다. 그리고 무리하게 확장했던 남태평양 지역은 자원 획득 관점에서 불모지였다.


출처: 조너선 파셜,앤서니 털리, <미드웨이 해전: 태평양전쟁을 결정지은 전투의 진실>, 일조각, 2019, p603~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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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0-03-01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주만 기습 공격에서 항공모함과 유류저장소를 파괴하지 못한게 일본군의 패착이었다 봅니다. 최근에 본 영화 미드웨이에도 잘 나오더군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