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세계대전의 패전으로 동맹국 진영 국가들은 위기에 처했다. 우선 독일은 제국 체제의 붕괴와 함께 로자 룩셈부르크와 볼프강 카프 같은 반공화국 세력의 난동으로 혼란에 빠졌으며 오스트리아도 헝가리와의 이중제국 체제를 상실했다. 터키도 그리스와의 전쟁과 왕정 붕괴라는 혼란을 겪었다.


특히 헝가리는 다른 참전국들보다도 심각한 영토 손실로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이는 독일의 경우보다 심했다. 전쟁 전 헝가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동 통치자로서 제국의 절반을 차지했다. 이때 헝가리에서는 남슬라브어를 비롯해 루마니아어, 슬로바키아어 등 여러 언어가 사용되었는데 그 중 헝가리어 사용자가 가장 큰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1차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구성하던 각 민족들의 독립을 불러왔고 1920년 6월 4일, 체결된 트리아농 조약은 전쟁 전 영토의 70%와 전체 인구의 3분의 2를 잃게 만들어 헝가리를 최대 피해자 처지로 몰락하게 했다. 거기다가 1918년 11월 정전 이후로도 헝가리 내 이민족들은 연합국의 보호 아래 자신들의 영토를 직접 다스리기 시작했다.


이런 분열을 막기 위해 미할리 카롤리라는 귀족 출신 정치가가 나와서 개혁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개혁을 통해 헝가리 내 이민족들이 광범위한 자치를 누리는 가운데 민주주의가 정착되면 연합국의 적개심은 완화될 것이고 옛 영토도 조만간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내대봤다. 그러나 이는 곧 헛된 희망임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바로 연합국의 지원을 받은 루마니아군이 트란실바니아의 넓은 평원을 점령해버리고 계속 진군할 태세였기 때문. 카롤리는 프랑스에게 루마니아군이 철군할 수 있게 설득했지만 실패하고 말았고 1919년 3월 말 물러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인 출신 사회주의 지식인 벨라 쿤이 이끄는 공산당 세력에게 부다페스트가 넘어가고 말았다.


벨라 쿤 정부는 헝가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연합국보단 소비에트 러시아에게 의지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쿤 정부는 슬로바키아 점령 지역의 일부를 되찾는 한편 급진적인 좌파 정책들을 펼쳐나갔고 1919년 5월에는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성립을 선포했다. 6월 25일에는 아예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선언하기에 이르었다.


영토 해체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전례없는 위기를 맞은 헝가리 기득권층은 영토 해체보단 사회주의자들에게 맞서 싸우는 길을 택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남서쪽 지방도시 세게드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루마니아군이 부다페스트에 진격해 벨라 쿤 정부를 무너뜨리기 냅뒀다.


한편 혁명이 진압된 이후 진행된 반혁명의 지도부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해군의 마지막 사령관이었던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과 기성 엘리트층이 중심이었다. 그 밑으로는 귤라 굄뵈스 대위를 비롯한 젊은 장교들이 중심이 된 유사 파시즘 성향의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의회자유주의와 전통적인 권위 복구를 둘다 부정하며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뿌리를 뒀다.

출처: 로버트 팩스턴, <파시즘: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교양인, 2004, p7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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