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 지역은 본격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우다가 독립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커져나갔었다. 이는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에 성공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20세기 초반에 들어서는 민족주의가 더욱 급진화된 '대세르비아주의' 단체들이 등장했는데 각자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인민 방위대 (Narodna Odbrana)

1908년에 창설된 단체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보스니아 지역의 세르비아인들을 돕기 위해 설립. 이들은 세르비아 육군 대위인 밀란 바시치를 영입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인사들에 대한 테러 활동을 펼쳤으며 세르비아 당국의 제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무려 국내에만 220개의 지부를 설치할 만큼 조직력이 있었다고 한다.

1914년 6월 28일에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암살 사건이 벌어지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암살범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배후로 인민 방위대를 지목했었는데 이때 대 세르비아 선전포고 직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표한 암살 사건 최종 보고서에도 암살 배후에 인민방위대가 있다는 내용이 나와있었다고 한더.

그러나 정작 이 시기에 인민 방위대의 지도자 밀란 바시치는 사망한 뒤였으며 조직은 사실상 와해 후 흑수단에게 통제되고 있는 중이었다.. 즉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여기까지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담이지만 설령 제대로 파악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는게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내부 사정을 살펴보면 예전부터 세르비아를 무력으로 손보자고 한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를 비롯한 군부 세력 뿐만 아니라 베르히톨트 외무상 같은 민간 정치가들과 여론도 세르비아를 작정하고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세르비아 정부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최후통첩안 내용의 상당부분을 수용했음에도 몇개가 거부되었답시고 전쟁을 일으킨거였고.

2. 흑수단 (Crna ruka)

드라구친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비밀 결사 단체로 구호는 '단결 아니면 죽음'이었다고 한다. 이들의 창설자인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은 1903년 알렉산더 오브레노비치 왕과 왕비인 드라가 마시나 및 그들의 친인척이 계속 자행한 권력형 부정축재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켜 왕과 왕비를 죽이고 카라조르지예 가문의 페타르를 왕으로 옹립한 경력이 있는 인물이다.

그러한 행보를 보였던 그가 전면적으로 나오게 된 파시치 수상 같은 민간 정치가들이 현실과 타협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압력에 굴복하는 모습에 국민들과 각 군부대의 장병들이 시위를 비롯해 격렬하게 나오는 여론에 발맞춰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흑수단은 청년장교들과 하사관들을 중심으로 한 비밀 조직으로서 처음 구축되었는데 꼴에 단체라고 행동 강령도 있었다고 한다.

- 1조 우리 조직은 세르비아 인만의 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 2조 우리 조직은 문화적인 행동보단 혁명적인 행동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일반 대중으로부터 비밀을 유지한다,

- 3조 우리 조직의 명칭은 '단결 아니면 죽음'이라고 한다. 암호명은 블랙 핸드(Black hand)

- 4조:

ㄴ 1항 우리 조직은 강령에 발맞춰 공적인 수준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계급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ㄴ 2항 세르비아 인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서 혁명적인 조직을 창건한다.

ㄴ 3항 국경 밖에서도 우리의 목표에 반대하는 적(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들과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해 싸운다.

ㄴ 4항 세르비아와 세르비아 인에 대래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모든 국가, 조직, 그리고 개인들과 접촉을 계속 유지한다.

결론을 요약하자면 폭력적인 방법으로 대세르비아를 건설하자는 것인데 하필이면 디미트리예비치는 뒷공작에 매우 능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흑수단을 보호할 목적으로 변호사 출신이자 광적인 민족주의자인 요바노비치가 이끄는 그룹과 외교 전문가인 라텐코비치가 이끄는 그룹을 영입해 민간인들까지 끌어들이는 치밀함을 보여줬다.

이렇게 흑수단에 영입된 민간인들은 흑수단의 세포 조직을 활성화 시키는 역할을 했다. 동시에 '피예몽'이라는 민족주의 신문을 발간해서 대중들이 민족주의 감정에 고취할 수 있게 했으며 그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인민 방위대도 하부 조직으로서 흡수했다. 이처럼 목표 실현을 위해서 암살, 테러, 밀수 등 각종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한 걸 보면 비합법 조직이지만 한편으론 1차대전 이전까지 세르비아 정계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군부 장교단과 밀접한 관련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기도 하다.

p.s. 참고로 흑수단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암살에 관여하다가 1차세계대전이라는 대형사고를 불러오는 바람에 세르비아 정부로부터도 버림받아 싹 다 조직이 박살나고 디미트리예비치는 처형당했는데 그때 "대세르비아여 영원하라!"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함.

p.p.s.또 흑수단은 거창한 목표와는 달리 대형사고 치면서 싸그리 망했음에도 그들의 망상스러운 정신은 아이러니 하게도 2차세계대전 당시 미하일로비치 대령의 체트니크, 그리고 발칸의 도살자로 유명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한테로까지 이어지게 됨.

출처

- 김성진, <발칸 분쟁사: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역사>, 우리문학사, 1997, p57~63

- 박상섭, <1차세계대전의 기원>, 아카넷, 2014, p244~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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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이탈리아의 졸전 이미지가 유명한지라 1차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군도 호구였다는 인식이 퍼져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1차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은 2류 수준이었다는 것과는 별개로 호구 수준까지는 아니었음.


일단 이탈리아 전선은 서부전선과는 달리 험한 산악지대 였음. 여기는 싸우다가 산사태 날 확률이 높은 지형에다가 워낙 험해서 군수물자 보급을 빠르게 할 수 없는 동네인지라 아마 1차대전 주요 전장 중에 가장 최악인 곳을 꼽으라면 바로 캅카스와 이곳을 선택할 수 있을 정도임.


그런데 1차세계대전 내내 이탈리아군의 방침은 이손초 강을 공격전선으로 삼아서 드라바 강과 사바 강으로 열린 관문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본토를 공격한다는 전략이었고 실제로 3개월 한번 공세할 정도로 프랑스군이나 영국군보다 공격 빈도도 높았음. 생각해보면 1류 국가였던 영국, 프랑스도 그나마 평지인 서부전선도 참호뚫고 전진하느라 큰 희생을 치렀는데 얘네는 무려 산악지대에서 저짓할 수 밖에 없었으니 피해가 많이 나오는건 당연한 일임.


또 하나 재미있는건 이탈리아군은 1870년 이탈리아 통일의 핵심인 사르데냐 왕국군 계열 장교단이 잡고 있었는데 그들은 유대인의 입대 허용에 대해서도 관대한 태도를 보였었음. 그리고 참모총장인 루이지 카도르나 장군은 전쟁 중에 후퇴한 장군들을 죄다 면직시키는 굉장히 원칙적이었기에 규율과 군기는 의외로 잘 잡혔었다고 함.


거기다가 이탈리아는 통일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다가 지역 차이도 심한 곳이라서 북부 출신과 남부 출신들의 통학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는데 이 와중에 비록 성과는 전혀 없었지만 산악지대를 열한차례나 공격을 했으며 카포레토 공세 직전 이탈리아군은 드디어 방어선을 뚫는데 성공함.


그리고 곧바로 이탈리아군 역사상 가장 최악의 참패인 카포레토 전투가 시작되는데 분명히 이 공세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군을 독일제국군이 적극적으로 도왔었는데다가 독가스 공격을 날렸음. 휴돌턴이라는 장교도 이탈리아군의 방독면이 효과가 없었다고 기록한 걸 보면 이때까지 서부전선과 달리 이탈리아 전선에는 독가스 살포가 거의 없었다보니 당연히 이탈리아군이 제대로 화학전에 맞설 수가 없었다고 봄.


그 외에도 이탈리아 개개인 장병들도 나름 잘 싸웠었음. 앞서 말했듯이 산악지대 지형의 특성상 암석에 포격이 맞아서 이게 전장에 떨어져 다수의 사상자가 나오기도 하는 상황과 엄격한 규율 속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묵묵하게 이탈리아군 장병들을 싸워왔음.


또한 알프스 지리에 익숙한 산악부대 '아르디티'는 독일군의 충격 전술 부대 스톰 트루퍼에서 모티브를 따온 산악부대로서 단도 등을 활용한 백병전에 능했음. 이들은 육탄전과 기습 훈련을 비롯한 각종 특수훈련들로 단련된 최정예들이었으며 기관총과 기관단총 같은 자동화기 뿐만 아니라 수류탄도 대량으로 보유했으며 단도도 백병전용으로 자주 사용했다고 함. 월급과 식사 및 병영의 질도 일반부대보다 좋았는데 덕분에 단결심과 동지애는 뛰어났다고 함.


이렇듯 이탈리아군은 물론 무능한 면이 있긴 했었어도 의외로 괜찮은 부분도 없진 않았었음. 그리고 2차대전 당시 무솔리니 정권의 이탈리아군의 무능함과 비교해보자면 1차세계대전 이탈리아군은 정말 양반임.


출처:

- 존 키건, <1차세계대전사>, 청아람미디어, 2016, p326~327, p485~487

- https://en.m.wikipedia.org/wiki/Arditi

- https://en.m.wikipedia.org/wiki/Battle_of_Vittorio_Veneto

- https://www.history.co.uk/italy-in-wwi

- https://encyclopedia.1914-1918-online.net/article/warfare_1914-1918_italy

- https://encyclopedia.1914-1918-online.net/article/arditi

- https://m.dcinside.com/board/kaiserreich/14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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