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결된 분석, 종결될 수 없는 분석*

G.엘리어트
김 수 정 옮김
사회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 [역자주] 이 글은 알튀세르의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와 얀 물리에-부탕의 알튀세르 전기 제1권을 대상으로 한 엘리어트의 평론이다(Gregory.Elliott, "Analysis terminated, analysis interminable", Economy and Society, vol.22 no.2, 1993 May). 최근 출판된 알튀세르의 자서전과 곧 출판예정인 물리에-부탕의 알튀세르 전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 조언해 주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출판된 루이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사망 이전 이미 지적 장으로부터 갑작스레 사라졌던, 이로써 지적 전성기를 이양하는 것처럼 보였던 한 맑스주의 철학자를 새롭게 조명하도록 관심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고백'은 그의 삶과 저작의 최후진술로서 수용되고 있으며, 어느 저작보다도 모호한 그 텍스트는 투명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자서전'과 동시에 출간된 전기 제1권은 알튀세르 자신의 '난폭한 분석'을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징후적 독해를 가능케 해주는데, 그 책은 알튀세르가 '선행한 미래'속에서 자신의 역사를 재기술했던 정도를 지적해주고 있다. 알튀세르적 공산주의에 공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은 알튀세르의 '맑스로 가는 길'에 대해 새로운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훌륭히 해명해주고 있다.
그 자료는 알튀세르의 공산주의 기획에 대해서는 논하고 있지 않지만, 알튀세르적 맑스주의에 포함된 동시대성/비동시대성의 복합을 강조하고 있다.

일단 모든 것이 말해진 후에도, 모든 것들은 여전히 말해져야 할 것들로 남아있다...모든 것들은 여전히 말해야 할 것들로 남아있다. 모든 것들은 항상 말해져야 할 것들인 채 남아있다. (앙드레 고르, {반역자})

루이 알튀세르의 장례식에서 낭송된 한 텍스트에서, 자크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그는 수많은 삶들...수많은 개인적, 역사적, 철학적, 정치적 모험을 거쳐갔다. 찬란하고 도발적인 그의 사고, 그의 살아가고 말하고, 가르치는 방식의 위력에 의해 수많은 담론들, 행위들, 존재들이 나타나고, 굴절되었으며, 영향받았다. 별의 별 얘기들, 상충되는 언급들조차도 그 풍부한 진원을 소진시킬 수 없을 것이다(1990).

'루이 알튀세르라는 이름과 관련된 독특한 모험'은 지워질 수 없는 고유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전후 변증법의 모험과 결부되어 있으며, 모국 프랑스의 경계를 넘어선 상징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알튀세르에 의해 역사주의라고 비판받았던 사르트르는 1960년 그 유명한 정식속에서, 맑스주의는 '우리시대의 넘을 수 없는 철학'임을 확언하였다(1976; cf. Althusser and Balibar 1970).
그 시대의 일반적인 이미지에 따르자면, 맑스주의에 의해 '표현'된 역사적 계기는 이미 극복되었으며, 1968년 6월 30일을 기해 당대 사고의 초월할 수 없는 지평은 로티(Rorty)의 '북대서양 포스트모던 부르조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로 양도되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맑스주의를 진정 동시대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 전후 철학자는 1990년 10월 공식적인 장례식이 있기 전에 이미 지적인 잔여로 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지적 장으로부터 알튀세르가 사라진 것은 그가 등장한 것만큼이나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이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한때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던 '이전의(former) 철학적 의식'에 대해서 그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묶고 있는 연관은 쉽게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부가 지배적이면, 억압 역시 존재한다. '후대의 엄청난 겸손'(E.P.Thompson 1980)은 대상의 가치를 진정 의미있게 하는 지침으로서도, 또 선대에 대한 호의적인 찬미로서도 의미가 없다. 더우기, 그 문구는 알튀세르가 표현했던 것--'시대의 환상'의 정점 혹은 '니이체, 맑스, 프로이트적 시대(Nietzschean, Maxo-Freudian age)'의 완성(Baudrillard 1990)(알튀세르주의는 맑스주의의 최고의 단계인가?)--이 현재의 이론적 무의식을 구성하는 요소임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그러나 악명높게도 알튀세르는 한 사람의 맑스주의자일 뿐만 아니라--설상가상으로 --(프랑스)공산당원이었다. 그는 1970년대 말에 철학적-정치적 기소사건(actes d'accusation)에 연루될 뿐 아니라, 1980년 11월, 35년간의 동료이자 4년간의 아내--엘렌느 리트만--를 살해함으로써 그 광기에 있어서는 니이체의 친구였다. '망각도, 혐오도, 어떠한 아니러니도 비판의 그늘조차 만들지 못한다'(Althusser 1969). 그 사건에서 첫번째 선택(망각)은 우리들에게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늘 말해지듯이, 억압된 것은--누군가의 불편함 속에서--회귀한다. 최근 분과의 경계를 넘어서 알튀세르적 프로그램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 시도되었다(Resch 1992).
1988년 알튀세르주의의 유산에 관해 개최된 회의의 논문들은 이제 책으로 묶여져 나왔다(Kaplan and Sprinker(eds) 1993). 무엇보다도, 프랑스에서 얀 물리에-부탕이 쓴 알튀세르의 전기 제1권과 알튀세르의 '자서전'이 동시적으로 출판된 것은 영국이나 대륙 모두에서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Kaplan and Sprinker 1993). 지난해 4월 출간후 몇달 이내에,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4만부가 팔렸으며, 프랑스 언론의 지속적인--아마도 진지한--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2시간의 TV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알튀세르에 의해 쓰여진 가장 장문의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기 시작하였다. 생애 말년을 산송장인 채 인고해야 했던 그 사상가는 {맑스를 위하여}나 {자본론 읽기}에 대해서는 듣도 보도 못했을 수많은 독자들 가운데서 사후적인 생존을 누리고 있다.
예상가능한 일이었지만, 영국에서는(1992년 10월 BBC의 Late Show) 주로 알튀세르의 '고백'에서 단서를 취해서, 전부는 아니더라도 주로 '알튀세르 사건'의 선정적인 차원에 촛점을 맞추었다. 리뷰에 붙여진 천편일률적인 제목들--'한 맑스주의 살인자','성, 살인 그리고 철학','맑스와 살인자'--은 주류언론에 의해 유행이 지나간 사상에 부착되어 사망자에게 헌정된 공간이 어떠한 것임을 보여준다. 만약 프랑스 해설가들이 부주의로 인해 알튀세르의 아내 살인을 실패한 신(맑스주의)을 저버리지 못한 것보다 약한 비중으로 다루었다면--엘렌느 리트만의 전기가 있는데도 반공산주의적 덕목과 스탈린주의적 야수성을 설파하면서 도덕 운운하는 것은 그럴듯한 것이 못된다--, 영국과 미국의 몇몇 언론들은 다음과 같은 등식을 내놓을 채비가 되어 있었다. 雜報=철학, 또는 (알튀세르주의적) 맑스주의=광기=살인. 오류투성이의 기사로 도덕적인 대중들을 격노시키는 것은 {선}지(영국의 대표적인 대중지: 역자주)의 '오지아스왕의 외양간'란과 {타임}지의 문학란의 몫이었다. 이로써 대중들은 파리인들이 물들어 있는 이론적 반인간주의에 분연히 반대하고 부지불식중에 가치들의 관대함에 반대하는 선서를 하게 되었다.
'나와 나의 글은 별개의 것이다'라고 니이체는 그의 자서전으로 추정되는 책 속에서 선언했다(1975). 그 점은 모든 사상가들에게 적용되며, 알튀세르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사고의 발생, 구조, 타당성, 효과는 사상에 대한 인신 공격적인 기소나 무죄증명과는 별개의 쟁점들로서, 분석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어쨌든, 알튀세르주의적 맑스주의의 비밀은 그의 사춘기시절 침상(혹은 그 문제와 관련된 그의 부모님의 결혼생활의 부도덕성)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는 드러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원인에 대한 플레하노프의 경솔한 분석에 '원칙적으로' 반대하면서, '개념은 침대속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Althusser and Balibar 1970). 사르트르적인 테마를 변형시키면, 문제는 간단할지도 모르겠다. 즉 루이 알튀세르는 광적인 우울증에 의한 살인자가 되었으며, 그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광적인 우울증 살인자가 루이 알튀세르는 아니다. 문학란에 표현된 정신병자 운운하는 얘기의 부적절성은 위의 두 문장에 담겨있다.
알튀세르의 쇄신된 명성/악명에 대해 언급되어야 할 첫번째 것은 그의 텍스트 두 권의 지위는 그의 성격만큼이나 복잡하다는 점이다. 1976년에 쓰여진 {사실}(Les faits)은 미완의 것으로 알튀세르의 제자인 레지 드브레이가 편집하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L'avenir dure longtemps)라는--무산된--저널에 싣기로 되어있었다. 입원이 거듭되고 있던 중인 1985년 봄, {사실}의 4배(270페이지) 분량의 원고는 매우 조급한 가운데 쓰여졌으며, 원래는 출판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알튀세르가 남긴 가족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가장 가까운 유족(조카)이 유언집행자가 되어, '현대 출판기념기관'의 후원과 올리비에 꼬르뻬와 얀 물리에-부탕의 신중한 편집 하에 유작들을 출판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공적 생활 이전에 이미, 그리고 그 기간 내내 지속되던 정신적 고통에 대한 알튀세르의 헛된 투쟁--그의 가장 뛰어난 에세이 [프로이트와 라깡](1971)에서 환기되었던 '기억도 기념도 없는 전쟁'--은 마침내 그것을 기념하게 되었고 일종의 회고록을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과거의 그가 어째서 그랬다는 식의 자서전 작가의 얘기를 믿을 수 있는가? 의심의 여지를 추론할 수 있는 기반은 다름아닌 {사실}과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간의 균열에서 드러난다. {사실}은 특유의 간명한 (그리고 아이러니한) 제목 하에서 코믹한 기록들로 구성되어 있다(예를 들면 거기에는 교황 요한 23세 그리고 드골장군과 만난 허구적인 얘기들이 들어있다). {미래}의 방식은 반대인데, 거기에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관통되고 있는 거짓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않는 비극적인 상흔이 담겨있다. 본질적으로 동일한 영역을 다루면서도, 두 저작은 매우 상이하며, 알튀세르의 운명에 대해 상보적이기 보다는 대안적인
관점들을 제시하고 있다.
독해에 엄격하지 않다면, 독해란 종종 지나치게 담백한 것이어서 그의 말 그대로 알튀세르를 받아들이게 하고, '쓰여진 담화를 직접적으로 투명한 진리, 즉 목소리를 가진 실재적인 담화'로 받아들이게 만든다(Althusser and Balibar 1970). {자본론 읽기}의 저자들이 애초부터 주장했듯이, 순진한 독서란 없다. 알튀세르 자신이 취한 맑스에 대한 전략--잠재된 구조(또는 이론적 '문제틀')를 재구성하기 위한 '징후적 독해'--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모델로 하고 있었다. 알튀세르 건에 대한 그 자신의 분석과 그의 비이성--아내 살인과 자기 파괴에서 정점에 이르는 얽혀진 인과의 실타래--에 대한 이성의 해명은 유비적으로 읽혀질 필요가 있다. {미래}에 담긴 꿈의 분석은 문자 그대로 징후적인 독해를 요구한다.
1956년까지 알튀세르의 생애를 재구성하는 작업은 물리에-부탕에 의해 완벽하게 이루어졌는데, 이로써 우리는 알튀세르 자신의 의도가 개입된 저술에 대해 적절한 비판을 가해볼 수 있다. 왜냐하면 수많은 알튀세르들이 있었고, 그 중 알튀세르가 쓴 것은 단 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데리다에 의해 기념된 복수적이고 모순적인 실체들을 모두 포함하지도(심지어는 거쳐지나가지도) 못하는 사람이고, 따라서 기타 사정을 감안해서(en connaissance de cause) 접근해야 하는 단지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전기작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우리가 완전한 전기를 가진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알튀세르가 '자신과 타인의 전기적 상황'이라고 칭한 것과 그와 관련된 사실들의 적나라한 실재는 구성되는 과정에 있다. 그의 무의식의 완전한 비논리성은 밝혀지는 것을 꺼려한다. 이 점에 관해서, 알튀세르는 다른 곳에서 '무(nothing)는 분석의 출발점인 무의식적 요소만큼이나 간단하다. 그러나 무는 무의식적 요소의 개별 조합과 마찬가지로 복잡하다'라고 언급했다.
그의 서명 하에 사실이라고 제시되는 것들 속에서 알튀세르가 취한 당혹스러울 정도의 명쾌함은 엄청난 복합성 속에 있는 개별조합을 봉쇄하고 있다. 마치 파스칼에 반대하여 알튀세르의 심장은 나름의 이성을 가지고 알튀세르의 머리 속에서만 알려질 수 있는 듯. 더우기 젊은 알튀세르에게 드리워진 '알튀세르'의 그늘--'선행된 미래'(cf. 1969) 속에서 그 자신의 역사를 구성하는 것--은 권위있는 판본(왜냐하면 저자날인이 되어 있으므로)으로 받아들여졌다.
{미래}는 아내 살인후 프랑스 형법 64조에 의해 면소(non-lieu: 무책임)판결을 받은 후, 그가 즉시 면죄받고 (사회적으로) 거부당한 사연을 공개적으로 설명하는 저작으로 소개되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고 이제까지 나 아닌 다른 모든 사람들이 나 대신 말할 수 있었고, 또 법 소송절차가 내게 모든 공개적인 해명을 금지했기 때문에, 여기서 내가 공개적으로 나 자신을 해명하기로 작정한 것이다.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우선 내 친구들을 위해서, 그리고 가능하다면 나 자신을 위해서, 나를 짓누르던 이 무거운 묘석을 들어내기 위해서다. 그렇다. 나 혼자서, 스스로 그 누구의 조언이나 협의도 없이 나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다. 극도로 심각했던 상황으로부터, 나의 살인으로부터, 그리고 특히 그런 소송절차에 대해
실제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전혀 반대할 수도 없이 혜택을 입게 된 그 면소판결의 애매모호한 결과로부터 나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내가 생존해야만 했고 사는 것을 배워야했던 것은 바로 이 면소판결의 묘석 아래서, 침묵과 공개적 죽음의 묘석 아래서이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주의를 전후해서--그 기간에도 마찬가지로--또 다른 알튀세르가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작가는 {미래}가 저널도, 회고록도, 자서전도 아니며, 오히려 그가 한 때 그의 전기작가에게 '외상의 기록'라고 불렀던 것임을 명기하고 있다. 그는 '엄밀하게 사실에 충실한다'라고 주장하지만, 즉각 결정적인 조건을 덧붙였다. '환상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지나간 삶들을 돌아보는 평온한 회상이 아니라, 예고된 죽음에 대한 번민에 찬 회고를 다루고 있다. 편집자의 말에 의하면, {미래}는 '사실'과 '환상'이 뒤섞여있는 혼합물이다.
데리다는, 알튀세르에 대한 공적 담화는 맑스 혹은 레닌이라는 이름과 알튀세르란 이름을 결합시키려고 하지만, 그의 친구들은 다른 인물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파스칼, 도스토예프스키, 니이체, 아르토. 이러한 통찰을 예견이라도 했듯이, 알튀세르는 푸코가 편집한 피에르 리비에르의 증언들과 루소의 {고백록} 등을 거론하면서('아! 나는 루소가 아니다'라고 덧붙이는데), 자신의 텍스트를 자리매김한다. 아마도 다른 자서전으로는 사르트르의 {말}와 슈레버 대법원장의 {나의 정신병에 대한 회고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파편적인 그리고 '난폭한 (자기)분석'이다. 다시 말해, 프로이트의 담화 속에 있는 니이체적인 증언에 가까운 어떤 것이다. 알튀세르가 루소의 특권과 해악--"나는 전세계의 누구와도 같지 않다"--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의 고백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말 그대로 '예외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고백의 이중성과 마찬가지로 해악의 대부분 역시 보이지 않는 위험에 맹목적일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된다. {미래}는 고질적인 광적 우울증을 보여주는 증후이기도 한데, 그는 공적인 대화요법을 통해 그것을 몰아내보고자 했던 것이다.
{미래}는--고통스럽게도--범죄의 장면으로부터 시작되고, 철저한 자기 조사후 '옛친구인 의사'의 설명적인 주해로 마감되며, 결론에서 그는 면소판결을 재언급하고 있다. 이 책의 전반부는 두 차례의 전쟁기간 동안 알제리와 남부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록하는 '가족 소설(family romance)'의 형태로 주인공의 정신병의 기원(혹은 그의 광기의 기원)을 밝히는 데 할애되어 있는데, 그것은 곧 '가족 공포물(familial horror story)'임이 드러난다. 그의 이모로부터 알튀세르는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된다. 어머니의 연인은 1차대전 중 사망했으며, 그녀는 그후 그 연인의 형으로부터 받은 결혼제의를 수락했다. 그리고 그녀는 하나뿐인 아들에게 젊은 시절, 결국 그녀 생 전체의 사랑이었던 연인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로써 알튀세르는 참담한 결론을 도출해내었다. 즉 그는 만들어진(made) 것이 아니라 그냥 태어났을(born) 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사랑의 진정한 대상은 어릴적 루이라는 세례명 속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이름은 3인칭 대명사인 '뤼'(lui: 그)를 말하기도 하는데, 익명의 제3자를 부르는 것처럼 울림으로써 나 자신의 모든 고유한 인격을 박탈하는 것이었으며, 내 등 뒤에 있는 그 남자를 암시하고 있었다. 뤼(Lui), 루이(Louis), 나의 삼촌, 어머니는 내가 아니라 삼촌을 사랑했다.

강간당한 아내로서 기억되는 '상처로 피흘리며 수난당하는 어머니'--루시엔느 알튀세르, 원래는 베르제. 1975년 남편이 죽은 후 그녀는 처녀적 이름으로 다시 바꾸었다--는 거세시키는 어머니로 묘사되고, 자신의 공포심에 내몰려져 알튀세르와 누이동생 조르제트에게 사회적, 성적 '위생'의 권한을 철저히 행사했다. 그녀의 독재적인 칙령이 집행되던 가정에서 아버지는 문자 그대로 혹은 수사적인 의미에서 부재하였으며, 아들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느낌을 심어주었다.
알튀세르가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그 결과는 한없는 고독이었으며, 그것은 알제 시를 굽어보고 있던 불로뉴 숲 혹은 외조부가 은퇴해서 돌아간 곳인 모르방시의 라로슈미에의 '어릴적의 낙원'에서 외조부('나의 진정한 아버지이자 유일한 아버지')와의 관계에 의해서만 완화될 수 있었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아버지 없는 자식', '고독'과 관련된 테마는 후일 그의 철학적 저술에서 나타날 것이었다고 말한다(예를 들어, 1971; cf. Elliott 1988). '여인을 쫓아다니는 것'(Cherchez la femme)은 그의 개인사를 해명하는 실마리가 된다.

어머니는 나를 깊이 사랑했다. 그러나 내가 그 방법을 이해한 것은 훨씬 뒤에, 나자신을 분석함으로써였다...불행한 여인인 어머니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 즉 어머니가 진정으로 사랑했으며 영원히 사랑한 죽은 남자의 이름을 본떠서 루이라고 이름 짓지 않을 수 없었던 한 아이, 그 아이를 가지게 된 운명을 어머니 나름대로 살았던 것이다...나는 여기서 내가 겪었던 것, 그리고 내가 그것에 대해 이해한 것을 재구성하고 있다...내 경우 죽음이란 나의 어머니가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나 이상으로 사랑했던 한 남자의 죽음을 말한다. 나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속에는 뭔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를 떨게 만들며 내게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앞으로의 내 운명을 영원히 결정한 것이다. 이제 더이상 환각이 아니라 내 삶의 현실 그 자체가 문제된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하여 각자에게 있어서 환각은 삶이 된다.

그게 무엇이든간에, 그것은 알튀세르의 존재를 구조화했던 기획--'어머니의 욕망을 실현함으로써 그녀를 유혹하는것'--을 만들어냈다.

나는 어머니가 아주 옛날부터 다른 루이에게 바라고 기대한 것을 실현했으며, 또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 즉 지혜와 순결성, 덕성, 지고의 지성, 영육의 분리, 학업에서의 성공, 그리고 나아가 '문필가적' 경력을 이루어냈으며...최종적으로는 고등사범학교, 그것도 나의 삼촌 루이가 들어가려고 했던 생-클루의 고등사범학교가 아니라 그보다 더 좋은 윌름의 고등사범학교에까지 들어간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아시다시피 나는 지식인이, 그것도 대중매체 속에서 자기 '손을 더럽히기'를 완강히 거부했던 지식인이 되었으며 나의 어머니가 자랑스럽게 읽던 몇몇 책의 첫 페이지에 이름이 나오는 유명한 철학자가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욕망을 실현함으로써 어머니의 사랑을 얻는 것은 알튀세르에게는 에고(정신적, 육체적)를 형성하였으며, 그것은 그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기획의 역설적 효과--그의 스승과의 관계에서도 반복되었듯이--는 애초의 자아 탈중심성(ex-centricity)을 악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사람을 유혹하는 것은 알튀세르 자신이 스스로를 배신하고자 하는 유혹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내가 아니라는 느낌을, 실재로 존재하는게 아니라 다만 인위적으로, 그리고 속임수들을 통한 유혹적인 기교들인 바로 그 인위적인 것들 속에서만 내가 존재할 뿐이라는 느낌을 가졌다'.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이 매달리고 있는 '폭로'에서 알튀세르란 사람은 철학적 소양에까지 사기를 치고 있는 사람으로 규정된다(보다 정확히는 철학적 소양이 없다고 간주된다). 그 사실이 어쨌든 간에, 윌름가의 고등사범학교 입학 시험에서 6등을 하고 난 이후 그의 정규교육은 1939년 9월 전쟁이 일어나자 중단된다. 그 당시 일반적이던 카톨릭 극단적 분파와 왕당파 간의 정치적 선택의 와중에 그는 리용의 빠르끄 리셰로 옮겨갔으며--'인민전선보다는 히틀러가 낫다'--, 1940년 여름 제3공화국의 붕괴 후 자신의 정치적 선택을 분명히 하였다. "일, 가족, 당"에 헌신했던 사람 중의 하나가 알튀세르이다. 체포의 경험이 형식적인 영향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체포로 인한 여러가지 곤경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는 거기에는 장점도 있었다고 강조한다. 사르트르가 점령기간(Occupation) 중이 가장 자유로왔다고 느꼈던 데 비해, 알튀세르는 전시감옥 속에서 만큼 안전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27살에 마침내 그는 수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로버트 다니엘이라는 친구를 가지게 되었는데, 알튀세르는 그를 '여자처럼 부드럽게 나를 대해주었던 사람(내가 가져본 적이 없는 진짜 어머니)'으로 회고하였다. 따라서 1945년 해방은 알튀세르를 고양시키기 보다는 방향을 상실하게
만들고 마음붙일 또다른 사람을 찾아 헤매게 하는 '융합에의 향수'를 부채질하였다.
전후, 유대관계는 핵심적인 3가지로 줄어들었다. 고등사범학교는--'그것은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환경, 양수의 대체물이었다'--그가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1948년 철학 교수 자격시험(agr gation)에서 2등을 한 이후로 학문생활을 보장해주었다. 1946년 그는 엘렌느 리트만을 만나게 되고--유대인 레지스탕스, 前 공산주의자였던 그녀는 어려운 생활에 처해있었는데--, 1948년에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엘렌느는 '내가 알지 못하던 세계, 연대와 투쟁의 세계, 행동의 세계...용기의 세계라는 커다란 선물을 해주었다'. 그러나 너무도 기적적으로 벌어진 구원의 전망은 곧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감정으로 바뀌었다. 8살 연상이자 28살에 알튀세르의 동정을 앗아간 엘렌느과의 관계는 애초부터 잊지 못할 것이었다. 그것은 그를 심각한 우울증으로 몰아넣어 피에르 말르가 정신분열증으로 진단한 후에 20여일간 첫번째 입원을 요하게 했다(줄리앙 아쥬리아게라의 진단에 의해서 심각한 우울증으로 바뀌지 않았다면, 사건은 거기서 종결되었을 것이다 Roudinesco 1986). 알튀세르에 따르면, 그와 엘렌느는 서로에게 필수불가결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알튀세르는 부모를 대신해서 정기적으로 아픈 그녀에게 안마를 해주었던 반면, 엘렌느은 그가 소망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녀는) 내게 훌륭한 어머니이자 아버지였다. 나보다 나이가 많고 유달리 인생 경험이 많았던 그녀는 마치 엄마가 자기 아이, 기적같은 자기 아이를 사랑하듯 나를 사랑했으며, 동시에 아버지처럼, 그것도 좋은 아버지처럼 나를 사랑했다. 그것은 그녀가 현실세계에 대해, 내가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그 무한한 세계에 대해 나를 깨우쳐 주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녀가 내게 가지고 있는 욕망, 그 비장한 욕망에 의해 나로 하여금 남자로서의 역할과 그 남성적 면모에 눈을 뜨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 여성이 한 남성을 사랑하듯 나를 사랑했던 것이다!

이러한 통과의례와 불가분하게 알튀세르는 프랑스 공산당의 세계로 이끌려 들어갔는데, 그는 그 때가 로마 카톨릭 신앙을 버린 이후였다고 말한다. 레지스탕스에 의해 키워진 희망이 냉전의 희생양이 되고, 1944-7년의 '연합전선'이 1948년 '양대진영'으로 분열되었을 때, 알튀세르는 프랑스 공산당 자체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성 시프렝의 말을 환언하면, "당밖에서는 어떤 정치적 구원도 가능치 않다". 정황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국면은 새로 입당한 지식인에게는 가혹한 것이었을 것이다. 니짱(Nizan)의 책 {음모}에서 세르쥐 프뤼베나지는 전전 공산주의 지식인들의 경험을 정확히 전달해준다(사회적 원죄(출신성분)문제는 결코 제기되지 않았다 (1988). 알튀세르가 {맑스를 위하여} 서문에서 말했듯이--아마도 {음모}를 염두에 둔 (부인하는) 것일텐데--문화적 냉전기에 사회적 원죄의 비방은 만연하고 번성한 것이었다('쁘띠 부르조아 출신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순수한 행위 속에서 사회에 진 빚을 갚아야 한다고 느꼈다...그들 생각으로 상상적인 '그 빚'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진 것이다...)(1969).
그러나 정작 정황을 강조하는 맥락은 엘렌느가 당으로부터 축출되었을 때 그녀를 재입당시키려는 알튀세르의 노력을 설명하는 부분에 존재한다. 이 쟁점은 너무 폭발적인 것이어서, 어떤 구원도 당이 아니면 불가능했듯이 그 가운데는 저주의 조짐도 있었을 것이다. 알튀세르는 기본적으로 그 사건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언급만을 되풀이 했는데, 즉 그의 아내의 불운이 엘자 뜨리올렛과 다른 이들의 적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후일 거기에 가담했던 사람 중의 하나인 엠마누엘 르 르와 로드리에 의해 세부사항들이 확인되었다(1982). 엘렌느 사건을 받아들이면서, 알튀세르는 그녀가 이중첩자라는 누명을 벗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그녀를 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고등사범학교(ENS)에 있는 프랑스 공산당 세포들로부터 히틀로-트로츠키주의자(그 시기에 독특한 스탈린주의적 합성물)와 어울렸다는 심문과 검열에 대해 자신을 해명하는 것이었다. {미래}에서 알튀세르는 {사실}과는 다른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 자신은 평화운동으로부터 엘렌느를 추방하자는 만장일치의 견해에 동조했지만, 그의 동료(엘렌느)와의 관계를 절연하라는 지국의 지시는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동지 엘렌느의 일시적인 추방에 슬퍼하면서도 그녀의 사랑에 위안받은 알튀세르는, 이러한 '파리의 한가운데서 일어난 모스크바식의 재판'으로 인해 프랑스 공산당과 그
지도방침에 대해 현실주의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한 평가는 로랑 카사노바의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로랑 카사노바는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적 교정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그는 '부르조아적'인 산수를 사용한다고 생물학자인 마르셀 쁘레낭을 호통쳤다.
그의 인식론에 대한 대중적인 거부감에 대해서, 뤼센코이즘과 같은 미친짓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알튀세르의 주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1969, 특히 1977을 참고할 것). 그러나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그의 혜안은 후속적인(1978년에 극적으로 표현되었던) 탈환상의 결과로 역으로 재투사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가 자신의 동료에 대한 제재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취한 상대적인 평온함은 잘못된 기록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분명하다.
{사실}에서 독일에서의 감옥생활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알튀세르는 보초에게 탈출이 시도되었다는 생각을 갖게하고 그리고 나서 몇주 후에 적들이 '탈출자'를 잡는데 실패했을 때 실제로 탈출을 시도하는 계획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에게, 그것은 '모든 철학적(정치적, 군사적) 문제 중의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그 속에 남아있으면서도 원환으로부터 빠져나오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다. 그의 집착을 밝혀낸 후에도 {미래}는 '원환들 중의 원환'--가족, 학교, 동료들, 당, 병원--, 그리고 그것들 간의 상호함축과 중복결정이 '우연적 필연성'을 통해 독특한 운명을 만들어낸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자신의 정식을 적용하자면, 그의 발화는 호가 구부러져 있지만 만들어져 있지 않는, 그리고 좋은 것처럼 보이다가 점점 사악해져 결국은 엄청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원환으로부터의 탈출구를 찾지 못한 자신의 무능력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사르트르에게는 실례의 말이지만, 지옥은 남의 일이 아니다.
그 스스로 인정하는 바에 의하면, 알튀세르와 엘렌느는 죽는 순간까지 서로가 있어도 또 없어도 살 수 없는 부부였다. 그녀를 버팀목 삼아 또 피난처삼아 의존하면서도, 그의 자기파괴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엄청난 테러를 감행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즉 그녀에 의해 버림받는 것. 그의 재발하는 우울증에 의해 고통과 좌절의 짐을 지고 있었던 엘렌느는, 거기에다 정신병이 광적일 때 그가 범한 '도발'과 치욕(예를 들면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에 무너졌다. 하필이면 일들이 1980년에 돌이킬 수 없이 치명적으로 엉망이 되어버렸는가에 대한 적절한 설명은 알튀세르 자신의 분석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가 또다른 우울증--지금까지 것 중 가장 심한 정도의 것--에 빠졌을 때, 그 때 엘렌느는 그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자살에 대해 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1980년 9월에 대한 알튀세르의 끔찍한 이미지에 의하면, 뒤따라 일어났던 일이 '의도적으로 만든 고독의 밀실에서 둘만의 지옥'이며, 그것은 살인에 의해 끝이 났다. '나 자신의 파괴는 상징적으로 타인--무엇보다도 가장 절친한 친구들과 내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의 파괴로 나타났다'.
그 무렵, 최소한 이년에 한번 정도 병원 신세를 지게 했던 고통스런 광기의 발작에서 알튀세르를 벗어나도록 하려는 수많은 '치료'가 무위로 끝났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정신병력에 대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솔직하다. 환자들이 '스탈린'이라고 별명을 붙인 어느 병원 보조원이 담당했던 전기충격요법에 고분고분 따랐던 사실을 비꼬아서 설명하는 부분에서부터 1950년-1962년 사이에 로랑 스티브냉에게 받은 최면분석 그리고 의학적인 정신분석에 이르기까지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고 있다. 그 뒤 마침내 그는 르네 디아켕과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그는 정신과 의사의 무례함으로 알튀세르를 대하지 않았다(흥미롭게도, 알튀세르는 이러한 선택의 근본적인 이유를 상세히 밝히지 않는데, 이러한 선택은 라캉의 '프로이트로의 회귀'(1971)에 대한 그의 현대적인 승인과는 대조적이다). 그는 자신의 우울증의 의식적인 테마들을 자포자기에 대한 공포로 이름짓는다. 즉 그에게는 불가능한 사랑의 요구에 쉽게 허물어져 버리는 것에 대한 공포, 남의 이름을 사칭하는 자로 대중 앞에 폭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것이 1965년 가을에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가 출판된 바로 직후, 명성의 절정에 있을 때, 그가 겪은 '극적인 우울증'의 원천이다) 등이 그것이다. 그가 자신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순결'을 앗아간 어머니에 의한 '거세'에 이르기까지 추적해들어간 분석의 무의식적인 암시와 의미가 어떤 것이든 간에, 이러한 과정은 분명히 심각한 우울증에서 광기의 절정으로 옮아 가는 경과를 포함한다.

나는 매우 빨리 우울증에서 때로 격렬한 진짜 광기의 모습을 띠는 하이포매니아 hypomania로 옮아 갔다.그리고 나는 스스로 외부 세계, 나의 친구들, 계획들, 문제들 등 모든 것에 전지전능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쉽고, 쉬웠던 것처럼 보였다...이러한 예외적인 용이함과 자부 속에는 커다란 공격성향이 존재한다. 이러한 공격성향은 성적인 불구와 이에 따른 우울증의 환각증상처럼 진정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우울증 성향과 이를 조장하는 성적인 불구의 환각들에 대한 단순한 방어였기 때문이다...지독한 성적 불구라는 공포와 전지전능하고자 하는 나의 욕망, 즉 과대망상증은 쉽게 말해 동전의 양면이었다: 완전하고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하여 내가 결여하고 있는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과 내가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

역설적으로, 정신병원이 알튀세르의 성적 불구상태를 증명했다 하더라도, 정신병원의 '안전함'은 전지전능의 욕망에 부응하였다. 아카데미와 당의 동아리들 안에서 그가 공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가운데도 동일한 드라마가 연출되었다. 정치적, 철학적 저술 속에서 알튀세르가 밝히고 있는 자신의 저술목적이 주석가들에 의해 종종 무시되기 때문에 다음은 환기될 필요가 있겠다.

내가 스스로에게 빚지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도 빚지고 있는 것은 고등사범학교에서의 철학교사라는 직업과 철학, 정치,당, 내 책들, 그것들의 영향들에 대한 나의 특별한 집착을 개인사를 통해 설명하는 것, 다시말해 나의 주관적인 환상들을 나의 객관적이고 공적인 활동들에 투여하고 각인시키는 일로 이끌어갔던 나 자신을 내가 어떻게 발견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알튀세르가 설명하고 있는 바는, 루이 알튀세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알튀세르주의의 장인이 되었는가이다. 기원과 타당성의 문제를 합성시키지 않는다면, 기원에 대한 그의 성찰은 '상상적 맑스주의'(imaginary marxism)--레이몽 아롱이 알튀세르주의에 붙여준 이름이며, 알튀세르는 이에 동의했다--를 정교화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그일 수 있었는가를 해명하는 요소들을 제공한다(cf. Aron 1969).
{미래}에서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와 (자신의 것을 포함한) 맑스주의적 저작들의 철회를 거부하였는데, 이 점에 대해 적대적인 비평가들은 {미래}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철회에 참여하기는 커녕--이 사실은 틀림없이 어떤 독자들에게는 조바심이 나도록 만들고, 다른 독자들에게는 확신을 줄 것이다--알튀세르는 그와 그의 동료들이 프랑스 공산당 안에서 수행한 철학적-정치적인 '진지전'을 사과하지 않았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스릴과 말초성(spill)을 경멸하면서 맑스의 유물론적인 '영감'에 대한 지속적인 헌신을 확언하였다. 프랑스 공산당을 비판하면서도(예를 들면,5월 사태에서 프랑스 공산당의 배반적인 역할), 알튀세르는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공산당원이 되는 것이 사리에 맞음을 정력적으로 옹호하면서, 그가 왜 자신이 선택한 길을 고집했던가를 설명한다.
 
내가 당에 남았을 때...공공연하게 반대파적인 입장에서 그렇게 함으로써...최소한 형식적으로는, 당내에서의 반대파적인 활동이 진지한 이론적, 정치적 기초들 위에서 가능함을, 따라서 당의 전화가, 아마도 결국에는, 가능함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에 그의 가톨릭 스승이었던 장 귀똥(J.Guitton)에게 보내는 1972년의 편지에서 알튀세르는 이렇게 쓰고 있다. '철학이 하나의 전투라는 것은 옳습니다. 물론 나는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싸움입니다. 그리고 내가 다시 싸움을 시작한다면, 그것은 내 건강이 조금은 나아지고 있다는 표시입니다'(귀똥 1988). 1978년 3월 좌파연합의 패배 이후, 십여년간 쌓인 희망들이 꺾이면서, 알튀세르에게는 더이상 그런 희망이 나오지 않았다. 1978년 12월 3일자의 귀똥에게 보내는 다음 편지에서 그는 '나의 사고 세계는 무너졌습니다. 나는 더이상 사고를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젊었을 적) 이전 시절의 말을 빌어 나는 당신의 기도를 애원합니다.' 모든 중재는 무위로 끝났고, 알튀세르는 그의 운명에 굴복하고 말았다. '나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일부가 사후에 살아날 것이다'라는 니체의 초인적인 희열의 메아리 처럼(1975), {미래}의 말미에는 필사적인 의지로 낙관주의가 드러난다.

그래서, 그 드라마들에도 불구하고, 삶은 아직 아름다울 수 있어. 나는 예순 일곱이지. 하지만, 나는 느끼지--혼자 힘으로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청춘이 없었던 나--나는 비록 상황이 이내 끝나버리는 게 틀림없을지라도, 예전같지 않게 젊다고 느껴.
그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아마도 미래는 오래 지속될 것이다--그러나 이 문구의 저자때문은 아니리라.
극도의 열정을 가진 이 결론은 알튀세르의 병세의 회복을 나타내기 보다는, 그의 되풀이 되는 우울증의 조증 단계를 무심코 드러낸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프랑스의 선정적인 언론에서 푸대접을 받은 이 저술이 완성된 지 몇주 후, 그는 다시 병원으로 되돌아갔다. 루이 알튀세르의 시대는 왔다가 사라졌다. 대부분은 사후에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지배적인 인상은, 최종심급의 고독한 시간 속에서 엘렌느의 파괴에까지 이른 알튀세르의 자기파괴이다. 얀 물리에-부탕의 포괄적인 조사에 따르면, 이러한 성향이 일관되게 스스로를 비하하는 가운데 텍스트에 무언중에 반영되고 있다. 이러한 자기훼손은 데리다가 조사에서 언급한 많은 사람들에 의해 보증된 사실을 숨기고 있다. '알튀세르는 재능있는 사람이었다. 그 자신의 소망은, 그의 유작으로 그의 수수께끼가 백일하에 해명되는 것이었으며, 이로써 더 이상 해명이 필요치 않게 되고 익명성이 주는 해방감 속으로 풀려나게 되는 것이었다'. {미래}는 그러한 열망을 좌절시키며, 대신에 1980년 1월의 사건에 따라다니는 관음증을 더욱 더 부채질했다. 왜냐하면, 그 책이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 중 한 명인 피에르 마슈레이가 말한 것처럼 '거짓말 투성에다 반쯤만 진실인 것'은 아닐지라도, 물리에-부탕이 충분히 증명한 것처럼, 그 책은 한 사람의 삶을 파산이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다시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사소한 쟁점들은 제쳐두고(물리에-부탕은 알튀세르가 비트겐슈타인에 대해(la Wittgenstein), 나아가 철학사 전반에 대해 무지한 척했다고 지적한다), 전기작가는 네가지 주요한 측면에서 알튀세르를 수정하고 있다. 첫째--그리고 결정적인 것으로--알튀세르의 가족 소설이 반전되는 것은 1964년 7월로 시기확정 될 수 있다. 그것은 엘렌느 리트만으로 인한 것이다. 물리에-부탕이 인용한 1964년 7월 26일자 편지에 의하면, 그녀의 동료(알튀세르)에 의해 충실하게 재현된 원초적 재앙으로서 가족의 역학은 이미 그녀가 '난폭하게 분석'했던 바이다. 1950년대 알튀세르의 절친한 벗, 쟈끄 마르탱--그는 자살하였고, {맑스를 위하여}는 그에게 감동적으로 헌정되었다--처럼 그녀 역시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는데, 성년기의 광적인 우울증의 음영을 어린 시절에 투사하도록 알튀세르를 부추켰던 것은 바로 엘렌느였던 것이다.
첫번째 사실과 연관되어, 젊은 알튀세르의 존재에서 중심적인 인간관계는 정작 그의 말 속에서는 소극적으로 다루어 지고 있으며, 대부분 검토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알튀세르는 누이동생 조르제트와 강력한 심적 유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의 '신경병'력은 알튀세르의 병력에 흔적을 남겼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1964년 여름 엘렌느의 폭로 서한을 받은 지 두주 뒤에, 알튀세르가 1980년의 시나리오를 예견하는 몽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기록된 것 가운데 발견될 수 있는 그 몽상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의누이를 죽여야 한다...더욱이 그녀의 동의 아래 죽여야...'
물리에-부탕이 밝혀낸 다른 주요한 논점으로는 알튀세르의 로마 가톨릭과의 관계 그리고 엘렌느의 레지스탕스 경력에 관한 것이 있다. 전자와 관련해서 보면, 알튀세르는 전전에 푀네스 크레티앙(Feunesse Chretienne)에 소속된 카톨릭-민족주의 행동가였는데, 그것은 악숑 프랑세즈(Action Fran aise: 프랑스 행동당)와는 다른 노선이지만 그가 기꺼이 인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우익적이었을 개연성이 있다. 보다 중요하게는, 전후 그의 좌파로의 무게중심 이동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의 최종적인 결합은, 그가 세례를 받은 유일하게 신성하고 사도적인 가톨릭 신앙과의 어떠한 '단절'(인식론적이든 아니면 다른 것이든)도 수반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의 최초 저작(1949)이 암시하듯이, 카톨릭 좌파인 푀네스 드 레글리즈(Feunesse de l' glise)와의 관계는 그가 프랑스 공산당과 밀착한 뒤에 절정에 달했다. 그는 1950년과 1952년 사이에 푀네스에서 발을 떼었으며, 1953년 바티간 교황청이 푀네스와 '노동자 설교단'을 파문했을 때야 관계를 단절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와 카르디날 레츠를 자유롭게 인용하고, 성 테레사 아빌라의 저작들을 레닌전집과 함께 서가에 꽂아 놓으며, 들리는 바에 의하면 '세계를 변혁시켜라'는 맑스의 정언과 더불어 파스칼의 갈릴레이적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라는 문구를 서재 벽면에 꽂아 두었던 이 철학자는 자신의 정체성--지난 날의 카톨릭신도--에 거의 운명적인 사랑으로(amor fati) 반응하였다.
물리에-부탕의 설명에 의하면, 알튀세르가 충성을 서약한 조직이 그의 동료(엘렌느)의 복권에 시큰둥했던 것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 모호한 에피소드에 대한 최종적인 조명은 전기의 제2권에 기약되고 있다. 일단 물리에-부탕은, 알튀세르가 경솔한 짓을 했다고 지적하면서도, 평화운동에서 엘렌느를 배제하는 데 동의했다는 알튀세르 자신의 주장은 파국적인 신경쇠약으로 인한 차폐(遮弊) 기억 (screen memory)일 것이라고 암시한다.
왜냐하면 알튀세르 자신의 주장과는 반대로, 이 신경쇠약은 엘렌느와의 관계를 위험한 것(liasion dangereuse)이라고 본 고등사범학교(ENS)의 당세포의 의지에 굴복한 뒤에 걸린 것이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물리에-부탕은 알튀세르의 악덕을 자신의 미덕으로 삼았다. 즉 그는 '자서전'을 읽는 독자를 위해, 아직 결론이 내려져서는 안되는 '억압된 역사의 귀환'을 목표로 거의 완벽하게 추적해 들어갔다. 그가 알튀세르의 수수께끼를 해결하지 못했다 하더라도(아직은?), 그는 그 수수께끼를 조사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업적은 그 주제를 연구하는 모든 연구자들에게 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칭찬은 이 정도로 하자. 반대로 공산주의와 맑스주의에 대해서는 알튀세르는 전기작가의 악덕을 자신의 미덕으로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제2권은 수정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1권은 이러한 측면에서는 부당하다고 할 정도로 반감으로 채색되어 있다. 반스탈린주의자들의 정서에는 공격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비시(Vichy)정권과 점령기간(Occupation)이 끝난 후, 사회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날 프랑스 지부(SFIO)가 냉전과 프랑스 식민주의를 부추기는 상황--두 비평가에 의해 원정 사회주의(socialisme expeditionnaire)로 요약된 상황 (Ross and Jenson 1988)--아래, 프랑스 공산당(PCF)은--레지스탕스와 관련 이후로는 계속 고립되어 있었는데--좌파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래도 나은, 방어적인 선택지였다.
여기서 에릭 홉스봄이 이 문제에 할애한 약간의 기록이 물리에-부탕의 장황한 설명보다 훨씬 값어치있겠다. 그 세대의 공산주의적 지식인들이 직면한 딜레마에 대한 알튀세르의 '활자화되지 않은 원고'를 언급하면서, 홉스봄은 1964년에 이렇게 살펴보고 있다.

자진탈당한 공산주의자들--자진탈당은 오랜 분열이 낳은 자동적인 결과였는데--은 거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당이 갈수록 사회주의 운동으로 나아갔던 프랑스 같은 나라들에서, 당을 떠난다는 것은 정치적인 무능력과 사회주의에 대한 배반을 뜻하였다. 그리고 공산주의적 지식인들에게 학문적 문화적 인물로 성공하고 정착하는 것은 보상이 될 수 없었다. 탈당하거나 출당된 사람들의 운명은 반공주의였거나, 소소한 잡지의 독자들 말고는 기억할 수 없는 망각에 빠지는 것이었다. 반대로, 당에 대한 충성은 최소한의 영향력이라도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1977).

한국전쟁 때 사르트르가 분투했던 것처럼, 이 상황을 파악하는 홉스봄의 극단성 역시 너무 경직되어 있고, 국외자의 입장에서 프랑스 공산당의 정치적 실천을 이론화한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앤더슨이 주장하는 것처럼, 당에 남든, 당을 떠나든 간에 알튀세르나 사르트르 같은 사람들은 동일한 신념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그 신념은 정치적 현실에 의해 강화된 것이었다. 그때 공산주의 운동은 대중적인 사회주의적 정치를 유일하게 구현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들은 무슨 일을 해도 욕을 먹었다. 당을 선택함으로써 알튀세르가 치른 대가--당시 노선의 긴박함에 복종--는 어느 모로 보나 커다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댓가로 받은 기회 역시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된다. 1960년 자유, 평등, 박애의 공식적 수호자들에 의해 알제리의 수도 한가운데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었는데(현재의 아름다운 파리쟝 정신(Parisian souls)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는 더러운 손(dirty Parisian hands)을 가지고 있었다), 알제리에서 태어난 알튀세르에게 당이라는 선택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물리에-부탕의 속편을 잠시 제쳐두고, '상상적 맑스주의'라는 테마--레이몽 아롱이 딱지붙이고 알튀세르가 승인한--를 잠시 언급해보자. 레이몬드 윌리암스(1976-7)는 전후 영국의 맑스주의의 조류를 '합법적' 맑스주의, '실천적' 맑스주의, '강단'맑스주의라는 세가지로 구분하였다. 알튀세르의 기획은 세번째 범주로 분류되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프랑스에서는 그의 기획은 매우 실천적으로(operative) 동기화된 것이었다. 그의 동기는 당의 공식적 이데올로기를 이론적으로 재구성함을 통해 프랑스 공산당의 전화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알튀세르의 맑스주의가 흔히 정통적인 것(legitimating)으로 여겨지는데,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프랑스 공산당에 남아서 계속 활동할 수 있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정통성의 옷을 입어야만 했던 것이다. 당의 전화는 전통을 옹호함으로써만 진행될 수 있었다. 알튀세르는 자서전에서 이러한 전략을 전쟁 계략(ruse de guerre), 즉 신앙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이단을 창시하는 계략으로 밝히고 있다(스피노자는 오래 전에 이 점을 분명히 하였다. 텍스트가 없다면 이단도 없다). 알튀세르의 모험은 '이론주의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론적인 정치함에 준하는 전도를 통해 정치사의 시간을 10월혁명의 시간으로 되돌려 놓는 도박, 이는 맑스의 문구 하나하나에 집착하는 것(Marxological)은 아닐지라도 맑스의 자구로 되돌아가자는 호소였다.
알튀세르는 맑스주의 경전에 대한 '징후적 독해'와 그를 통한 맑스주의 요체의 재구성 작업이 가진 경향성을 솔직하고 분명히 인정한다. 그 자신이 주장하는 바, 그의 목적은 당(PCF)내의 선배들과 분리의 선을 분명히 하여, 그들이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발행한 부도수표로 부터 당대의 맑스주의를 해방시키고 그것을 진정 현대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이를 기꺼이 인정한다. 왜냐하면 나는 스스로 맑스주의의 원칙들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 맑스 속의 모든 것과 그에게 남아 있는 이데올로기--무엇보다도 '변증법적인 것'이라는 변호론적 범주들, 심지어 변증법 그 자체--를 정말로 금압하였기 때문이다. 역사의 우연적인 발전이라는 기정 사실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변증법은 그 유명한 '법칙들'의 외피 속에서 당지도부의 결정을 소급해서 변명(정당화)하는 것일 따름이다.

알튀세르주의--그리고 맑스주의 일반--의 '비'(NON)동시대성에서 '비'라는 접두어는 근자에 지적 사조에 대해 자주 붙여지는 접두사이다(1980년대 중반의 두 비평가의 말에 따르면, 알튀세르의 맑스주의는 '비틀즈의 음악이나 고다르의 초기 영화들처럼 이미 한물간 것이고, 멀지 않지만 흘러가 버린 과거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한다'(Ferry and Renaut 1985)). 전진이 항상 진보를 이룩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의 다음과 같은 경고판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모험 동산에 세워질지도 모른다.'부인(contradiction)은 오류의 논파를 의미하지 않으며, 혁신이 항상 앞서감은 아니다'(Gay 1989에서 인용). 그러나 '멀지 않지만 흘러가버린 과거'는 자서전에서 부분적으로 확인된 무언가를 지시한다. 그 말은, 알튀세르의 '상상적 맑스주의'가 맑스주의와 '포스트맑스주의' 사이에 철학적 점이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정도를 의미하는 데, 그 점이적 철학적 구성물의 성마른 효과로서 전자에서 후자로의 지적인 이행이 촉진되었다.
알튀세르를 추도하는 미려한 문장 속에서 테드 벤튼(T.Benton 1990)은, 대부분의 포스트맑스주의적인 이론화가 알튀세르의 테제들을 일면적이고 반맑스주의적인 것으로 급진화켰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예들은 다양하게 열거될 수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이미 형이상학적으로 공허한 포스트맑스주의의 봉화를 예견했던 차원으로 논의를 국한시켜서, 한 가지 쟁점, 즉 '역사의 종언'에 대해서 {미래}와 물리에-부탕의 전기가 제공하고 있는 매혹적이고도 명쾌한 자료를 살펴보자.
알튀세르 자신이 말하는 알튀세르주의적 맑스주의의 일관된 테마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데 있어' 역사철학의 유혹이 공산주의자들을 곤혹스러운 정치적 망설임으로 이끈다는 것이다(1992). 말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알튀세르는 생산력 발전을 통한 공산주의로의 전진이라는 큰 이야기(meta-narrative)를 가진 교조적인 역사유물론에 반대해서, 그것은 경계적 이성의 간계라는 형태로 헤겔적인 神政論을 사이비 유물론으로 '전도'시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 류의 '철학적 소설들'에 공통된 원죄는 매우 '사실적인'(realistic) 화법구조 속에 존재하는데, 그 소설들은 역사유물론의 본연의 임무--'구체적 상황'을 나은 쪽으로 전화시키려는 모든 정치적 실천에 필수불가결한 '구체적 상황'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인 국면의 특수성을 파악하는 데서 벗어나 상황을 추상하여 한 사람의 영웅과 예정된 종말로 얘기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철학적 소설가들'--알튀세르는 사르트르를 예로 드는데--은 맑스가 조롱한 혁명의 연금술사들처럼 '행동의 지침'으로는 부적합하다.
사르트르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은 점을 상기시킨다. 알튀세르는 스탈린식으로 '우파 헤겔주의적'인 역사철학(소비에트의 존재근거로서 경제주의)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스탈린주의에 반대해서 나온 모든 종류의 '좌파 헤겔주의적' 변종(혁명의 이성으로서 인간주의)에도 반대했다는 사실. 알튀세르가 알튀세르가 되기전인 1950년에 이미, 그는 알렉산더 코제브의 {헤겔 독해 서문}(1947)에 의해 프랑스에 배양된 헤겔적 맑스주의의 핵심적 가정을 거부하였으며, 그후 후꾸야마가 전도의 전도방식을 통해 새로운 삶을 부여한 '역사의 종언' 역시 거부하였다. 알튀세르는 전후 프랑스의 지적 풍토에서 이러한 경향이 현저함에 주목하면서,
코제브가 이러한 지적 풍토에 부여한 '경악할만한 관료제적 내용'을 비판한다.
물리에-부탕이 밝혀내고 있는 바, 1949년 12월 25일에서 1950년 1월 22일 사이에 예전에 스승이었던 쟝 라크로와에게 보낸 72페이지나 되는 장문의 편지에서,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와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자신의 애착을 설명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헤겔적인 관념을 맑스에게 덧씌우는 이뽈리트를 비난하는 내용도 들어있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1859년 서문의 문구를 인용하면서, 청년 알튀세르는 맑스가 공산주의를 역사의 종언--변증법과 모순들이 보편적인 조화로 나아가면서 사라지게 될 어떤 영역의 종언--이 아니라, 전사(pre-history: 前史)의 종언--역사적으로 결정된 경제적 소외/착취의 종언--으로 사고하였다고 주장했다.
'역사의 종언'과 관련된 문헌들을 섭렵하면서, 페리 앤더슨(1992)은 '역사의 종언'을 프랑스에 전파하는 데 있어 쿠르노(Cournot)가 수행한 역할을 논의하고 있다. 그가 알게 모르게 무시하고 있는 것은, 쿠르노가 알튀세르주의적 맑스주의의 '역사적 종언' 비판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알게모르게'란 의미는 알튀세르가 쿠르노를 지나가면서 슬쩍 단한번--긍정적으로--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1971). 최근 엠마누엘 테리(E.Tarray
1992)의 논문은, 마치 파스칼적인 모험과도 같이 알튀세르가 역사유물론을 전화시키고 공산주의에 개입하는 데 미친 쿠르노의 은밀한 영향력을 표면화시켰다. 결과적으로, 알튀세르적 역사유물론은 철학적으로 역사주의(경제주의적이든 인간주의적이든)가 아니다. 후기 알튀세르의 범주를 사용하자면 역사는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으로서, 논란많은 소외(agonistic
alienation)--원시공산주의에서 계급사회로의 하강--도, 소외의 평온한 승화(irenic sublation)--기원 속에 맹아적으로 존재하는 계급없는 텔로스의 실현--도 아니었다. 역사적 과정의 복합성을 가정하고 존중하기 때문에 역사유물론은 '보증의 철학'이 아니라, 역사적 우연의 이론이었다. 이것의 정치적 함의는 명백하였고, 마침내 도출되었다. 도래할 공산주의 사회의 구성적인 복합성은 역사의 환원불가능한 복합성과 조응한다. 알튀세르가 의미한 바는 반유토피아적인 공산주의였다. 이러한 공산주의는 뒤르케임의 기능주의와 '문명과 그 욕구불만들'(cf. Freud 1973)에서의 프로이트적인 리얼리즘을 결합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는 전망과 명백히 상치되며, 암묵적으로는 '정치의 종언'(엥겔스의 {반듀링론}과 레닌의{국가와 혁명}에 그려진 생시몽적 '사물의 관리') 이라는 기획이 필요치 않았다.
'이론적 반인간주의'의 배후에 있는 충동을 헤아리기 위해서,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진정한 실천적 인간주의에 권위를 부여한 유일한 (입장)이었다는 알튀세르의 과잉된 주장({미래})을 승인할 필요는 없다. 옳든 그르든, 알튀세르의 공산주의는 스스로를 온건한 그러나 엄혹한 목적에 묶어 두었다. 즉 지상에 천국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지옥을 뿌리뽑자. 달리 표현하자면 그것은 (프로이트가 인간의 조건에 부여한 '공통의 불행'을 배제하지 않고) 인류의 세속적인 유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실천적 인간주의에 대한 그의 투탁은 엄격한 이론적인 언명들로 악명높은 한 저작 속의 몇몇 미려한 인간주의적 문구 속에 나타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알튀세르의 장례에서 데리다가 인용한 것--는 알튀세르를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사람으로, 그리고 알튀세르적 맑스주의를 의미있는 독자성을 가진 것으로 만들어준다.

그렇다, 우리는...우리의 동의없이 우리를 지배하는 동일한 신화들에 의해, 동일한 테마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체험되는 동일한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 그렇다...어떤 역사(History)에 의해서도 사라지지 않는 시간 앞에서, 동일한 절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동일한 빵을 먹고 있다. 우리는 동일한 분노, 동일한 반역, 동일한 광기를 가지고 있다(적어도 그럴 가능성이 늘 임박한 듯 서성이고 있는 기억 속에서는). 그렇다, 마치 억척어멈처럼, 아주 가까이, 바로 문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우리 모두 치르고 있으며, 우리 모두는 끔찍스러운 맹목성, 눈 속의 재와 입안의 흙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새벽과 밤을 같이 나누고 있으며, 동일한 심연, 즉 우리의 무의식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우리는 동일한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이것이 모든 일이 시작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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