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꽃나무 우리시대의 논리 5
김진숙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차에 걸친 희망버스, 연인원 수만명의 자발적인 참가자들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정문 앞을 찾았다. 이제 조남호 회장에 대한 청문회가 내일(18일)에 있을 예정이고, 진보 정당들 이외에 민주당까지도 이 문제를 적극 이슈화하며 조남호 회장의 불법적인 정리해고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겠다며 벼르고 있으니, 어쩌면 조금은 해피 엔딩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섣부른 낙관은 금물이고,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렇게 한진중공업 사태가 조금이나마 전향적인 방향으로 해결되리라는 희망이 보이게 된 건, 거의 전적으로 그녀 덕분이다. 반년이 넘도록 영도조선소 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중인 그녀, 김진숙 민노총 지도위원.

그녀 스스로 한진중공업의 전신 대한조선공사의 불법 정리해고 희생자인 채 아직도 복직되지 못하고 있는 당사자로서, 오십이 훌쩍 넘은 '중늙은이 아줌마'가 죽을 각오로 크레인 위에서 버텼기에 가능했다.

그녀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떤 삶이었기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기에, 이미 두명이나 죽어내려간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위에 올라갈 각오를 했던 걸까. 한진중공업에 무슨 일이 있는지, 그녀가 무슨 요구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모르는 사람도 그녀의 이름 석자, 김진숙을 알고 감동하고 감탄하고 더러는 욕하는 시대, 그녀를 편들던 아니던 그녀를 좀더 깊이 알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 아닐까.

조금씩 그런 우려들이 나오는 거 같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정리해고 철회, 비정규직 철폐"의 외침 대신 그녀에만 집중하는 지금의 모습들이 꼭 달 대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것 같다는 우려다. 그렇지만 그녀의 안부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그녀가 지금 목숨을 걸고 그곳에 있는 이유로 관심이 옮아가는 건 생각보다 쉬울지 모른다. 더구나 그녀 김진숙이 지난 시간 써온 글, 뱉은 말들과 행동의 연장선 상에서 마치 나침반의 자침처럼 한 곳만을 흔들림없이 향하고 있다면.

이 책, '소금꽃나무'를 낼 때 김진숙 그녀는 먼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따위 게 책으로 만들어낼 만큼 가치가 있는 걸까, 그따위 걸 책으로 만들어 내자고 나무를 베어내도 되는 걸까." 그리고 펴낸 책 앞머리에 이렇게 글을 박아 넣었다.

"소금꽃나무를 읽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살았냐고 묻곤 한다. 난 내 삶을 살았던 것 뿐이다. 누구에게든 삶이 있듯 내 삶은 그랬던 것 뿐이다. 내가 지닌 이력 중 아무것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채 쉰둘. 살아 내려간다면 단 한가지만큼은 선택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꿈꾸며 85호 크레인, 169일을 맞는다.
_2011년 6월 23일 김진숙."

그녀 김진숙의 지난 생을 기록하고, 그녀가 만난 노동자들의 삶과 고통을 기록하고, 그렇게 2011년 한국 사회로 치달아온 야만의 세월 노동자들의 투쟁과 희망이 담긴 책, '소금꽃나무'를 읽으며 줄곧 눈물이 나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비정규직 문제나 소규모 사업장 노조 문제와 같은 문제를 정면으로 맞부딪히고 싸워온 그 대담하고도 치열한 순수함 앞에서, 열정 앞에서, 부끄러웠다.

그 눈물은 김진숙 때문이라기보단, 그녀가 온몸으로 가리키고 있는 이 사회의 부조리 때문이란 게 더 맞을 거 같다. 1970년 전태일이 스스로를 불태웠던 시대로부터 멀리 나아갔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기껏 비정규직들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짐을 전가시킨 것에 불과했음을 깨닫는 건 너무나도 아픈 일이다.

김진숙 그녀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기엔 그런 손가락조차 귀한 시대, 'Golden Age' 도금시대를 살고 있는지라 그녀의 존재 자체, 목소리와 몸짓 모두를 아끼고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렇게 달을 보기 전, 김진숙이라는 손가락 앞에서조차 이토록 부끄럽고 아파해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랄까, 세례식이 필요한 거 아닐까. 이런 야만과 부조리 앞에서 이토록 무감각한 우리라면. 그게 내가 이 책을 모든 사람에게 떠맡기듯 기어이 강권하고 싶은 이유다.

* 아래는 김진숙 지도위원이 2003년 김주익 열사를 추모하며 바친 추모사 동영상.

"1970년대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두산중공업 배달호의 유서와, 지역을 건너뛴 한진중공업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민주당사에서 농성하던 조수원과, 크레인 위에서 농성하던 김주익이 죽는 방식이 같은 나라.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국경을 넘어, 업종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리는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그들을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저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으므로 깨지는 겁니다. 만날 우리만 죽고 천날 우리만 깨집니다. 아무리 통곡하고 몸부림을 쳐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2003년 김주익 열사 추모사)


* 그리고 '소금꽃나무'를 굳이 사서 보진 않겠다는 사람들을 위한 부분 발췌.


"싸워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노동자들의 투쟁은 위험해 보인다. 싸워서 얻은 해방감을 단 하루도 누려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노동조합을 지키겠다고 목숨까지 거는 이들은 무모해 보인다. 그들은 아직도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북선은 우리가 만들었다."

"우리들의 미래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몹시 궁금하거들랑 비정규직이라 불리는 그들을 보라."

"동지 여러분. 저는 우리가 참 멀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뒤돌아보니 우리가 떠나온 자리에 이들이 서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제는 노예의 사슬에서 벗어났다고 믿었습니다. 어느 날 되돌아 보니 우리가 벗어던졌다고 믿었던 사슬이 이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돼 있었습니다. 비정규직의 자리에서마저 쫓겨난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입니까...민들레에게 올라오라고 할 게 아니라 기꺼이 몸을 낮추는 게 연대입니다. 낮아져야 평평해지고 평평해져야 넓어집니다."(2006년 부산지하철 고용승계쟁취 결의대회,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미래다')

"나는 교향악단을 구경한 적도 없고 오케스트라 같은 건 지나가다라도 본 적이 없다. 내가 만약 단 한 번만이라도 여러분들의 연주를 듣고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나는 엄청난 죄책감에 사로잡혔을 거다. 한 달에 70만원을 받고 그마저도 잘릴까봐 전전긍긍하면서 그 음악이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하면 누가 그 음악을 듣고 행복할 수 있겠는가. 모멸감을 느끼면서 만들어진 음악이 도대체 누구의 영혼을 살찌울 수 있겠는가." (마산 예술 노조 복직 투쟁)

"요즘 십대들이 무섭다지만 그때 십대들이 더 무서웠다. 먹고사는 일에 목숨 걸었던 그 무서운 십대들이 결국은 독재를 유지시켰던 균주였고 지금도 먹고 살게만 해준다면 인권이나 환경이나 인간에 대한 예의 같은 건 삽시간에 나발이 되고 마니까. 먹고살기 위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넘어간 일이 얼마나 많았을 것이며, 죽고 싶도록 부끄러웠으나 내가 무슨 힘이 있냐는 체념과 타협한 일은 오죽이나 많았겠는가."

"정문 앞에서 끌려 나가던 동료들을 창문 너머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무수한 자괴감에 대해,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동료들을 밖에 둔 채 들어가서는 수많은 시간을 죽고 싶은 채 살아 있어야 했던 열패감에 대해, 그리고 비겁이라는 감옥을 제 손으로 짓고 들어가 10년(전교조가 합법화되기까지)을 장기수로 복역해야 했던 그들이 그 감옥에서 이제는 출감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하여 따뜻한 밥상 앞에서 더 이상 목 메지 않기를, 누군가가 두들겨 맞는 시위 장면을 보더라도 더 이상 채널을 돌리지 않기를, 빨래를 걷다 말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다보는 일이 없기를, 아이들에게 정의라는 단어를 말할 때, 도리 같은 단어를 말할 때, 공연히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더 이상은 없기를..."

"노무현 정권의 필살기는 투쟁이나 구속이나 수색 같은 특수하고도 전문적인 분야들을 좀 더 대중화해 일반인들도 누구나 향유할 수 있도록 한 점과 음지에서 했던 일들을 양지에서 내놓고 하게 한 게 아닐까. 이게 절차적 민주주의다. 저 시절엔 기가 질려 "동네 사람들아!"를 못했다면, 이 시절엔 절차대로 한 일이니 아무리 불러도 동네 사람들이 안 오는 거다."

"사람들은 이제 내가 땟국이 빠져서 얼굴이 허여멀건 게 도시 티가 난다고 했지만, 나는 햇빛을 못 봐서 허옇게 뜬 얼굴을 볼 때마다 설움이 왈칵 솟고는 했다. 회사 옥상에 높다랗게 붙어 있던 '수출만이 살길이다'라는 큰 간판이 언젠가 '수출강국'으로 바뀌어도 전혀 강하지 못했던 아이들은 그 간판 아래 짓눌린 채 배추 잎사귀처럼 누렇게 시들어 가고 있었다."

"그 책(전태일 평전)을 끝내 들추지 말았어야 했을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난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 꺼이꺼이 지리산 계곡처럼 울었다. 가슴에 큰 산 하나가 들어앉아 그 산에서 돌덩이가 와르르 쏟아져 양심에 돌팔매질을 해대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살아온 삶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삶을 산 사람. 그러나 그 삶을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끌어안고 뒹굴었던 사람.
난 뭘까. 그의 삶에 비한다면 내 삶은 뭘까. 똥구덩이 같은 현장에서 혼자 비단신을 신고 내내 똥을 탈탈 털고 있었던 넌 뭐냐. 시집을 끼고 다니며 니체도 모르는 아저씨들을 비웃으며 그들과 나는 다르다고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던 넌 누구냐. '노동자'란 말에 멸시를 보내며 '회사원'이라는 자만의 웃음을 질질 흘리던 넌 도대체..."

"'자네 살었을 때 열심히 살게나. 죽어서 천당이 뭔 필요냐. 현실에서 앗싸리 끝내 불제. 천당에도 사장이 있다먼 아무리 좋아도 난 거그 안 갈라네. 왜? 그거 가 봐야 읎는 사람은 또 노동자로 살아야헝께. 사실 하난님도 썩은 디를 포크레인으로 파다파다 못 파서 도로 덮어버린 디가 우리나란디 그 냥반 붙잡고 나가 먼 야글 더 허간디.' 그라먼 우리 마누라가 '당신은 하난님헌티도 팍 찍힌 사람잉께 잘혀 보씨요' 그러면서 웃어 불제라." (대우조선 노동조합 상집 인터뷰 취재 중)

"내 조카는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도 아니고 좌파도 아니다. 다만 민주노총이 어떤 합의를 하면, 자기는 알지도 못하는 그 내용에 따라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일 뿐이다...나는 내가 민주노총이라는 게 참 자랑스러웠다. 운동한답시고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면서도,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다. 늙은 아버지까지 안기부에 경찰에 시달리게 만들었으면서도, 그까짓 상처쯤이야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걸로 다 덮을 수 있었다.
그렇게 살았는데, 점점 안 좋아지는 세상. 지 잘난 맛에 살았던 그 잘나 빠진 이모가 조카를 파견 노동자로 만들어 버린, 아......나는 20년동안 뭘 한 걸까. 내가 20년동안 한 건 뭐였을까. 일요일도 없고, 재고 조사하는 날은 밤도 없는 조카 앞에서 나는 이모가 열심히 싸워서 민주노총 사업장은 대부분 주40시간이 됐다고 자랑할 수가 없었다. 상여금도 없고 체력 단련비도 없고 효도 수당도 없고 하다못해 월차도 없는 조카의 1,000만원도 안 되는 연봉 앞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은 열심히 싸워서 그들의 성과금이 너의 1년 연봉을 넘는다는 자랑도 할 수가 없었다. 민주노총의 투쟁이건 산하노조의 투쟁이건 비난이 난무할 때, 조중동만 탓하기엔 참 옹색해져 버렸다."

"제일은행 노동자들이 잘릴 때 주택은행 노동자들은 시금치를 무치거나 아이의 장난감을 고르는 일이 더 중요했고,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잘릴 때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은 대부분 잔업을 하거나 축구를 보고 있었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이 먼저 잘릴 때 남성 노동자들은 이제 시집이나 가라고 농담처럼 말했고 형님들이 잘릴 때 동생들은 '헹님도 인자 낚시도 실컷 댕기고 땡잡았네.'라고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웃으면서 했던 똑같은 말을 울면서 듣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수백만의 머리에 총알이 박혔지만 아무도 자기가 그 대상이 되리라는 걸 상상할 수 없는 이 짜릿한 러시안룰렛게임. 이미 1,300만 중에 840만이 비정규직이지만 아직도 내가 비정규직이 되리라는 걸 예상하지 않는 이제는 자본과 노동의 전선이 아니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전선이 돼 버린 이 스릴 넘치는 치킨 게임."

"우리 사회에는 학번 없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리고 그 학번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여 간다고 나는 믿는다. 학교를 떠나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아마 학번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학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한 번도 빛나는 자리에 서 보지 못한 사람들. 한 번도 스스로가 자랑스러워 보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의 대에서 이루지 못한 학번의 꿈을 자식 대에서라도 이루기 위해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무모한 돌진. 그 무모함이 만들어 내는 온갖 왜곡되고 기형적인 현상과 구조들. 그건 우리가 바꿔야 할 모순의 가장 밑바탕이기도 하다."

"담당 검사님은 그러시더군요. 병원에서 폭력을 휘둘렀다면 사진을 찍어놨다고 고발을 하지 그랬냐고. 물론 노조 측에서도 사진을 찍었지요. 역시 카메라는 빼앗겨서 박살이 났구요. 그들 숫자가 훨씬 많았고 힘도 훨씬 셌으니까요. 그중 심하게 다친 조합원들 열 명이 전치 10일에서 4주까지 진단서를 첨부해 폭력을 주도했던 병원 측 관리자 스물한 명을 고발도 했구요. 그러나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더군요. 노조 측에선 열세 명이 사법 처리당하고 세 명이 구속되었는데도 말입니다. 새삼스럽게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해야 되는 게 아니냐며 흥분하려는 건 아닙니다. 제가 겪은 법은 늘 그래 왔으니까요. 그걸 다시 한번 확인했을 뿐이었습니다. 아주 생생하게.
그래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하라는 검사님의 충고도, 목적이 아무리 옳아도 불법에 대해선 처벌할 수 밖에 없다는 판사님의 지엄하신 판결에도 얼른 고개가 끄덕여지질 않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구구절절한 항소이유서를 쓰는 거구요."

"계란으로 바위치기래도 할 수 없고 대답 없는 메아리래도 어쩌겠습니까. 힘이 약해 만날 당하고 깨지기만 하는 약자들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그렇게라도 서로에게 힘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을.
조합원 대부분이 스물을 갓 넘은 아가씨들인 일흔여 명의 작은 노동조합. 병원 측의 잔인하고도 악랄한 탄압과 일상적인 폭력을 그들만의 힘으론 도저히 막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 그들과 함께 했고 저의 작은 힘이나마 보태 노조가 지켜졌다면 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낸 거라는 생각으로 오히려 가슴이 뿌듯합니다.
이 땅 어느 구석에선가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가 탱크 앞에서 맨주먹으로 자기는 노예가 아니라고 외치며 대항할 때, 우리가 외면한다면 도대체 우린 무엇이란 말입니까."
(1995년 동래봉생병원 노조파업과 관련, 3자개입, 집시법 위반 등으로 구속되었을 때의 항소이유서 중)


* 그리고 그녀, 김진숙의 크레인 위 유일한 소통의 끈 트윗.(@JINSUK_85)

"저는 지금 주익 씨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하루를 보내고, 주익 씨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잠을 자고,
주익 씨가 살아생전 나지막이 봤던 세상의 모습들을 봅니다. 그리고 저는 주익 씨가 못해 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할 겁니다.
그래서 이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끓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이 되도록 제가 가진 힘을 다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4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과 결혼, 그 풀리지 않는 함수관계에 대한 사려깊은 답안, 읽고 나선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ytzsche.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으로 필명을 떨친 그녀가 죽기 일년 전에 남긴 유작이자 또다른 명작이라 감히 칭하고 싶다. 사랑이란 감정이 어떻게 맥놀이하는지를 보여주는 건 이미 숱한 작가들이 숱한 작품에서 묘사하려 애썼던 것이지만, 제인 오스틴이다. 그녀의 문장은 비단처럼 매끄럽고 섬세하며, 그 와중에 날카롭고 예민한 성찰까지 녹아들어 있는 거다.

게다가 이미 이전에 놓쳐버렸다, 지나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다시 어떻게 안에서부터 불붙기 시작하고 상황에 따라 어떻게 꺽이고 젖혀지는지, 그리고 다시 만개하는지를 이토록 흡인력있게 묘사해내다니.

결혼이란 문제는 흔히 사랑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인 양 이야기하는 게 현명함을 가장하기 쉽다. 자못 어리숙하다느니, 세상물정 모른다느니, 결혼은 또다른 현실이라느니 따위의 야박한 '설득자'들 앞에서, 사랑과 결혼, 연애와 결혼은 별개라는 식으로 편히 갈라놓고 이야기하는 건 제인 오스틴이 목도했던 근대 초기의 세태와 작금의 세태가 과히 다르지 않은가 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생각하고 움직이는 프레임도 그런 식이다. 감정에 몰입하기보다는, 결혼을 디딤돌로 얻을 수 있는 물적 조건-적나라하게 말하자, 그때나 지금이나 재력과 '신분'을 업그레이드할 기회인 거다-에 집중하라!

오스틴은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펼쳐 놓으며 그들의 결혼, 혹은 결합이 서로에게 어떤 시너지를 줄 수 있는지, 면밀히 따져묻는 당대인의 모습을 눈 앞에 보일 듯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런 세밀화의 풍경엔, 불타오르는 사랑 앞에 모든 게 무너져내리는 듯하던 '로미오와 줄리엣' 류의 눈먼 사랑이라거나 그 반대의 팜므파탈이 나설 공간은 없다. 얼핏 보기엔 우리 옆을 스치는 여느 남녀의 범상한 연애담과 결혼담에 지나지 않을 법한 담담하고 평이한 풍경 속에, 그녀는 잃었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의 마음이 다시 열리고, 의심하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그 국면을 너무도 강렬하게 돋을새김해 놓는다.

하여, 사랑은 판타지일 뿐이라며 어른의 조언을 따르라는 '설득', 그에 반해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라는 또다른 '설득', 혹은 지난 일은 어쩔 도리가 없이 지난 일일 뿐이라는 옛사랑의 '설득' 따위에서 방황하며 더러는 길을 잃고 더러는 홀로 야위어가던 앤 엘리엇은, 누군가의 설득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로맨스를 찾아간다. 그건 처음부터 로맨스로 시작해 무책임한 결말을 비워두는 이야기도 아니고, 시니컬한 냉소로 시작해 황폐한 풍경만 지루하게 내뿜는 이야기도 아니다. 주위의 설득으로 이미 한차례, 로맨스를 버리고 '현실'을 좇았던 여인이 이제는 안간힘을 쓰며 스스로의 로맨스를 복구해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연애담 혹은 결혼담은, 둔한 눈으로 보면 얼핏 '다들 그러고 사는 것'이라며 무시하고 지나치기 쉬운, 삶의 어떤 결정적인 국면을 포착해내어서는 그 안에 숨어있는 내면의 폭풍과 결단의 순간들을 너무나도 특별하고 따뜻한 시각으로 어루만져 주는 거다. 그것이 이 소설을 읽고 나서 감정이 격동했던 이유 아닐까 싶다. 평이한 일상에 그토록 밀도높은 생기와 현실감, 극적인 감각을 불어넣어준 오스틴 덕분에, 심장이 문득 두근거렸다. 어떤 의미로던 이 책 '설득'은 너무도 늦게 한국어로 번역된 거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긍정의 배신 -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많은, 그렇지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뿐인, 자기계발서 나부랭이들.


왜 이렇게 자기계발서니, 에세이니, 심리서적 따위가 많아진 걸까. 어느 순간 '멘토'를 자처한 사람들의 도덕교과서는 어떻고. 서점에 가서 자기계발서류의 도서가 빼곡한 공간에 가거나, 그런 비슷한 내용의 책들을 굳이 섭렵하고 있다며 자랑하는 사람들을 볼 때, 어쩔 수 없는 답답함과 일종의 혐오감이 스물거리곤 한다는 걸 솔직히 고백한다.

"암은 내게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멋진 일이었다." - 고환암 생존자인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

"부정적인 인간들은 역겹다! 그들은 당신과 나처럼 긍정적인 사람들의 기운을 빨아먹는다. 그들은 훌륭한 회사, 팀, 관계의 에너지와 생명을 빨아먹는다...그런 사람들을 피하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라 해도 당신을 고갈시키는 사람과는 관계를 끊어버려라. 당신은 그런 사람들 없이 더 잘 살 수 있다."

(* 보라색 구절들은 책에서 인용. 딱히 읽지 않고 넘어가도 됨)

누군가 누군가에게 작정하고 가르치는 말투로 내리는 '교시'는 대개 뻔하다. 긍정적 사고, 긍정적 태도가 성공을 부른다! 긍정적인 생각은 당신을 변화시킬 수 있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끌어당깁니다, 라고 말하는 책들 말이다. '좋은 생각'류의 야릇한 '군대 정훈도서'같은 책이나 '시크릿'같은 책들은 제목만 바뀌고 저자만 바뀐 채 같은 메시지를 반복한다.


'긍정의 배신'이 보여주는 긍정적 사고의 허위성.

'긍정의 배신'은 이런 쓰레기들을 수십수백권 읽는 것보다 나은 하나의 성찰을 던진다.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라는 메시지는 눈앞에 닥친 엄연한 위기와 곤란함을 오로지 자신의 마음의 문제로만 치환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자신 이외엔 오로지 '자신의 성장, 발전, 성공'을 위해 존재하는 외부세계일 뿐이라는 자폐적이고 허위적인 태도를 낳고, 위기에 처한다. (당연하다.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도 없이 무조건 답은 마음가짐의 문제, 한가지라고 하니까.)

"긍정적 사고에서 말하는 우주에 다른 사람들이 과연 존재하는지는 불명확하다. 그들이 우리와 똑같은 것을, 예를 들어 똑같은 목걸이를 원한다면 어쩔 것인가? 아니면 선거나 축구 경기에서 우리와는 반대 결과를 희망한다면? '시크릿'에는 디즈니월드에 놀러갔다가 기구를 타기 위해 너무 오래 기다리는 바람에 실망한 콜린이라는 열 살 소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소년은 '시크릿' 영화를 보고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다른 아이들은 어쩌란 말인가? 콜린이 '시크릿'에서 얻은 힘 탓에 뒤로 밀려나 기다리게 된 아이들은? 원하는 대로 여자에게 끌어당겨진 남자도 마찬가지다. 그 남자 역시 그녀와의 만남을 원했을까? 아니면 그녀의 환상 속에서 인질이 되어버린 것일까?"

"긍정적 사고의 세계에서 다른 사람은 당신의 보살핌을 받거나 당신에게 달갑잖은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기 위해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당신을 보살펴 주고, 칭찬하고, 긍정해 주기 위한 존재다...사람들은 자기 감정을 차단하고, 그 결과 심각한 감정 결핍 상태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비극과 진정한 드라마로부터 물러선다는 것은 긍정적 사고의 핵심에 깊은 무력감이 놓여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왜 뉴스를 나 몰라라 하는가?...아무리 태도를 개조해도 '민간인 사상자 수가 늘고 있습니다.'라거나 '기근이 확산되어..'로 시작하는 뉴스 헤드라인을 좋은 소식으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부정적인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뉴스를 보지 말라는 것, 그러니까 환경을 바꾸라는 얘기는 우리가 희망한다고 해서 바꿀 수 없는 '진짜 세상'이 저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시인하는 셈이다. 이런 무서운 가능성에 '긍정적으로'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은 찬성과 지지, 좋은 뉴스, 미소 짓는 사람들로만 조심스럽게 구성해둔 자신의 세계로 후퇴하는 것 뿐이다."


마음만 잘 먹으면 자신의 마음도 몸도, 심지어 온 세계가 자신에게 복종할 거라는 엉성한 환타지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조잡하기 짝이 없는 '구라'일 뿐이다. 그 구라의 최고봉은 아무래도 신의 세계를 만들어낸 중세의 종교적 사고겠지만, 지금 '긍정적 사고'를 설파하는 저간의 흐름들은 이미 종교적 도그마를 넘어선 수준에서 사람들의 뇌를 딱딱하게 만들고 있다.


알면서 속아주는 '구라'의 효용(?)

물론 '구라' 나름의 효용은 있을 수 있다. 애초 이 책, '긍정의 배신'을 쓴 작가가 겪었듯 암이라거나 실직같은, 당장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달리 뭘 할 수 있겠는가. 아마 난 안 될 거야, 라는 패배적이고 부정적인 사고방식보다는 조금이라도 밝은 면을 보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며 의지하는 게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 태도를 강요하는 병원의, 사회의, 사람들의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는 건 절대로 자연스럽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 순간에 형을 면제받을 것이라는 희망에 매달린, 죽어가는 사람의 낙관주의를 못마땅하게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실제로 암을 치료할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심리학자들은 자기들 용어로 '이점 발견'이라고 하는, 암에 긍정적인 감정을 키우는 방식으로 기울었다."

"그 도그마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감정과 병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유방암 환자들에게 뭔가 할 일을 부여한다. 치료 효과가 나타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야 할 일이 생기는 것이다. 환자는 자기 기분을 관찰하면서 세포 차원의 전투를 돕기 위해 정신적 에너지를 끌어올려야 한다...동시에 그런 도그마는 암 연구 및 치료 산업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외과 의사나 종양학 의사 이외에 행동과학자, 치료사, 동기 유발 카운슬러, 훈계를 늘어놓는 자기계발서 저자들도 참여할 길이 열렸다."

"유방암을 선물로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자리에서 밀려나 빈곤을 향해 추락하고 있는 실업자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기회'로 받아들이라는 말을 듣는다...긍정적이 되면 구직 기간에 기분을 더 좋게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더 빠르고 행복하게 문제를 매듭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들일지 모른다. 다들 알고 있지만 애써 눈돌려 밝게 보려고 하는 와중에 굳이 찬물을 끼얹는 건 무슨 놀부 심보냐고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력으로 어쩔 수 없어 보이는 일들에 대응하고 버텨내기 위해서 나름의 방식으로 '도전'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그 도전에 잘 대응하면 '더 큰 성취, 발전, 성숙' 따위가 수반될 거라는 믿음. 다만, 그 이면이 문제라 그렇다.

이러한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기 위해 억압되는 감정과 정당한 분노는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애썼음에도 끝내 실패하는 경우에는 어떡해야 하는가. 나아가서는, 개인적 차원의 긍정적인 사고 말고도 예컨대 발암물질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거나 정리해고 실시요건을 강화하는 식의 구조적 해결책이 옳은 경우도 있지 않을까.


다시 묻는다. 가난, 실업, 비만은 개인의 마음의 문제인가.

그렇게 낙관론과 긍정적 사고 속에서 사람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독거리며 개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해왔다. 병을 이겨내고 취직을 하고자 긍정적인 마음, 밝은 생각만을 줄곧 가지려 노력하고, 가난을 이겨내고자 '치즈는 누가 옮겼는지' 주저앉아 따져볼 겨를도 없이 치즈를 찾아 바삐 헤매게 된다.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이제 그건 중요치 않다.

"암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은 감정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끔찍한 비용을 강요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긍정적 사고는 분노와 공포라는 실체적 감정을 부정하고 쾌활함의 분칠 아래 묻어 두도록 요구한다. 불평을 듣느니 가짜 쾌활함을 상대하는 것이 나은 만큼 의료 종사자나 환자의 친구들에게는 몹시 편리하다."

"긍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이제는 성공을 이끄는 자기실현적인 예언이 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고용주나 긍정적 사고를 믿는 동료들로부터 거부당하는 의미심장한 실패로 이어진다는 부정적인 의미에서는 분명히 그렇다. 권위자들은 부정적인 사람들을 떨쳐 버리라고 강조하면서 또 하나의 경고를 보내고 있다. 항상 미소를 띠고, 쾌활하게 행동하고, 흐름을 따라라. 그렇지 않으면 배척될 각오를 하라."

"긍정적 사고가 실패해 치료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암이 퍼지게 되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럴 때 환자가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충분히 긍정적이지 못했다고, 애초에 암이 생긴 것도 부정적인 태도 탓이었다고 자책하게 된다. 이 지점에 이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충고는 '이미 피폐해진 환자에게 추가적인 부담이 된다'고 한다."

"작가로 변신한 한 생존자는 유방암이라는 선물을 계시적인 힘의 발현으로 해석했다. 그녀는 '암이 준 선물'이라는 책에서 '암은 진정한 삶으로 가는 차표다. 암은 진정한 뜻에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삶으로 가는 여권이다.'라고 썼다...이 모든 긍정적 사고는 유방암을 통과의례로 변형시켜 버린다."

그렇게 불만과 분노, 현실에 대한 성찰같은 걸 도외시한 결과는 자신의 내부에서, 외부에서, 그야말로 사방에서 드러났다. 긍정적인 사고, 밝은 사고의 마법을 믿는 사람들의 눈빛은 대개 광신도의 그것과 비슷해 보인다. 턱없이 순진한 기대와 희망을 부지런히 배반하는 현실 앞에서, 그들은 더욱 코너로 몰린다. 무조건 믿고 위로받을 것이 절실해질 만큼. 비합리의 세계다.

외부적으로는 당장의 현실적인 경고와 신호들을 무시한 채 긍정적 사고만 따르다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세계금융위기가 책에서는 큰 예시로 꼽혔다. 나더러 예를 하나 꼽으라면, MB 정부의 숱한 정책적 실패 중 하나를 꼽겠다. 4대강 사업은 어떨까. 회의적인 목소리, 불평과 비판 여론을 무시한 채 자기들만의 낙관론 속에서 미친 듯 내달렸던 4대강은 파국을 맞고 있다.


인민의 아편, '긍정敎' 혹은 '정신승리법'을 권하는 사회.

문제를 제대로 진단하지 않거나 못한 채 무조건 긍정하자는 절대적 메시지는 당연히 문제를 낳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위험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처음에 말했듯 갈수록 '긍정'의 힘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쓰레기같은 책들을 볼 때 느낀 답답함과 혐오감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정신승리법'을 점점 더 필요로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했다.

왜 그렇게 된 걸까. 왜 서점엔 갈수록 자기계발서니 동기유발 코치서적이니 따위가 기승을 부리는 걸까. 사람들이 '긍정적'이 되려 한다고 해서, 꼭 합리적인 의심이나 성찰, 회의적인 태도 따위를 버리기로 작정했다고 생각진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류의 책들이 잘 팔려나간다는 건 하나의 징후다. 거대한 무기력감, 절박함, 패배의식이 자라나고 있다는 반증 같은 것.

이 책이 아쉬운 건 그 지점이다. '긍정'의 힘을 전도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예견하지 못한 경제위기나 삶의 위기가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그 반대 방향으로 힘이 작용하는 시기는 아닐지, 그렇게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구조적 난관에 봉착해 하릴없이 '정신승리법' 따위로 만족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 거라면. 그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답은 있긴 할까.

"물질적으로 또 주관적으로 더 나은 삶을 원한다면 태도를 바로잡고, 감정의 반응을 수정하고, 자신의 마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자기를 향상시키는 다른 방법, 예컨대 교육을 통해 어려운 신기술을 습득한다거나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사회 변혁에 나서는 것은 생각할 수 없을까? 하지만 긍정적 사고에서는 모든 도전이 내면적인 것이며 의지를 통해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문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의 미래 - 앨빈 토플러 (반양장)
앨빈 토플러 지음, 김중웅 옮김 / 청림출판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2008년 입사 후 연수 과제로 제출한 글.)
시대를 막론하고 다들 자신이 살던 시대야말로 격동기이고, 앞날이 어떻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위기의 시대라고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지금의 시대 역시 초강대국인 미국 중심의 일극 세계질서가 공고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순간 근대 국가 중심의 세계질서가 흔들리며 국경의 개념, 시간의 개념이 모호해지고 있다. 누구는 이를 미국 제국주의의 탓으로 돌리기도 하고, 자본의 거침없는 확장이라 보기도 하며, 혹은 전례없는 수준으로 인간 문명이 비약해 나가는 것이라고 낙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책 『부의 미래』의 저자 앨빈 토플러는 이러한 비관과 낙관 모두가 얼마나 취약한 현실인식에 기대고 있는지, 또한 지금의 변화가 얼마나 근본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는지에 대해 심도있는 성찰을 시도한다.


앨빈 토플러에 따르면 기존의 경제학이 갖고 있는 기계론적이고 몰역사적인 전제들에 대한 중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한다. 물질로 이루어진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지식이 그 가치의 중심을 이루는 지식상품들이 시장의 태반을 차지하고 비화폐경제가 갈수록 중요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의 경제이론에 기대어 사회 변화를 탐구하고 앞으로의 전망을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새로운 심층 기반, 즉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시공간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탐지하여 새로운 가설과 이론을 세워나가는 것이 다가오는 미래를 대비하는 현명한 방법이라고 한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상용 정보통신기술의 비약적인 성장으로 인해 시간이라는 자원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더이상 범용 인재를 생산하기 위한 규격화된 교육과 일반화된 커리큘럼으로는 지식사회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할 수 없으며, 포드식 공장제에 적응시키기 위한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체화시키는 것 역시 창의력과 개인의 영감에 기대야 할 미래 사회에서는 지양되어 나가야 한다고 본다.

그가 제시한 큰 문제 중 하나인 시간의 비동시성으로 인한 사회 발전의 지체 현상은 사실 한국사회에서 특히 두드러진 것이다. 농업에 기반한 전근대적인 시간개념, 산업화시대를 특징짓는 근대적 시간개념, 그리고 일부 첨단산업을 기반으로 한 탈근대적인 자율적 시간개념이 혼재되어 있으면서, 토플러가 말한대로 특히 관료 집단이나 구체제 세력이 사회 전반의 발전을 가로막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기업가 정신을 바탕으로 한 혁신적인 집단이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새롭게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려 할 때, 이를 가로막는 구태에 젖은 집단들의 방해를 좀더 제어할 수 있다면 비동시적인 시간으로 인한 자원의 낭비, 소모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공간상의 변화 역시 한국에서 여실히 감지된다. 한국이라는 일개 국가가 통제하기 쉽지 않은 가상 공간이 엄청난 규모로 확장되었고, 황사나 우주 산업 등 국가 차원에서만 접근할 수 없는 수많은 이슈들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어로 된 사이트가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의 히트 수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한국은 이러한 공간상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국가 중의 하나이다. 다만 북한 사이트를 접근할 수 없도록 했다거나 영어병용 사이트가 많지 않아, 실제로 타국과의 자유로운 소통은 두드러지지 않은 편이지만 이는 향후 개선될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최근에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 선정사업을 통해 우주산업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인 바 있지만, 이 역시 외국의 발사대, 선진적인 교육 기술, 우주 공간을 활용하기 위한 여러 국제적 합의들에 근거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토플러의 말대로 이 시대의 가장 획기적인 전기는 무엇보다 우주를 인간이 경제적으로 개척하기 위한 단초를 열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우리 역시 이러한 대오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토플러가 무엇보다 강조했던 것은 바로 지식 자체가 갖고 있는 혁신성이었다. 유사 이래 인간이 지금까지 이룩한 부를 가능케 했던 것은 바로 과학이었으며, 스스로에 대한 회의를 지속시키며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과학에 근거한 지식만이 이후 우리가 계속 발전하기 위한 원동력인 것이다. 프로슈머라는 단어가 어느 순간부터 유행하고 있지만, 생산하는 소비자라는 프로슈머는 과거의 상품경제가 지식 중심의 경제로 진보하는 하나의 중대한 지표로 이해하는 토플러의 깊은 통찰은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더 많은 경제적 가치를 생산하며 자본 경제에 더 많은 공짜 점심(free lunch)를 제공하고 있는 프로슈밍은, 생산성을 증가시키고 기존 관료와 구체제를 자극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예측이 전부 옳으리라 생각지는 않으며, 근본적으로 경제 기반이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중요한 것은 화석 연료에 기반한 지금의 경제가 분명히 난관에 봉착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과, 지식재를 다루는데 기존 경제학의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압축적인 성장 경로와 그로 인해 누적된 사회적 피로를 감안했을 때,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심도있는 성찰은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ve Jobs (Hardcover) - A Biography
월터 아이작슨 지음 / Simon & Schuster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등학교 때였던가, 문/이과의 커다란 갈래길 앞에서 문과를 택한 이후로 내게 컴퓨터라거나 공학이라거나 IT 같은 것들은 점점 낯선 영역이 되고 있었다. 2000년대 초에 닷컴열풍이 불었을 때라거나, 한국 내의 싸이월드니 아이러브스쿨이니 뭐니 싸이트를 개발한 사람들이 돈을 엄청나게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나 길을 잘못 들었던가, 하고 가볍게 생각했을 뿐.

사실 1999년, 대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컴퓨터를 사고 인터넷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그런 기기장치라거나 IT와 관련된 것들은 그저 '주어지는 것'들이었다. 어떤 기반으로 서비스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발전 양상이나 추세가 어떤지, 어떻게 더 편하고 그럴 듯한 기능을 추가할 수 있을지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기술'보다는 '컨텐츠'가 중요하다 생각했다.

뭐랄까, 이과생에 대한 문과생의 다소 근거없는 우월감 같은 게 작용했던 거다. 한국의 '사농공상'의 뿌리깊은 이공계 천시는 아니라지만, '기술'의 발전은 당대의 사회적 필요와 철학에 의해 이끌어지며 그 기술을 활용할 알맹이가 있어야 비로소 유의미한 그릇 같은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사회와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생각했다.

지금도 일정 부분은 그렇게 생각한다. 트위터가 마치 세상을 바꿀 1인 미디어의 도래를 알리는 듯 요란을 떠는 사람들이 있었고 넷북이 제3세계의 교육환경을 혁신할 듯 기대했던 사람들도 있었으며, '아이폰'의 도래로 사람들의 생활이 엄청 스마트하게 변할 거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지만, 실제로 세상이 어디 그렇게 변했거나 변하고 있나. 아니다.

스티브 잡스, 그의 전기는 그렇게 '기술'에 대해 무지하고 관심도 없던 내게 제법 재미있게 컴퓨터의 발전 과정이라거나 웹브라우저 표준 경쟁, 기타 IT 디바이스들의 진화와 응용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가 천재라거나 대단한 위인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지금도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최소한 그의 삶을 따라가다보면 현재의 IT세상이 어느정도 보이는 거다.

저자는 제법 공정하게 스티브 잡스의 성격이라거나, 그의 리더십, 독특한 스타일 등을 묘사하고 있다. 묘사된 내용에 따르자면 스티브 잡스는 동양 철학, 혹은 선(禪)이나 뉴에이지에 영향을 짙게 받았으면서도 본인의 까칠하고 냉정한 성격이나 사회적이랄까 사교적이지 못한 대인 관계를 고수한, 결점 많은 보통 인간이다. 결함이 남들보다도 많아 보인다.

그렇다고 능력있는 CEO였거나 개발자였을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를 다시 애플로 돌아오게 했던 건, MS와의 싸움에서 일체형, end to end의 폐쇄형 방식을 고수하다 패배했던 그의 고집스러움이었다.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 패배하고 이후 여러 시도들이 무위로 돌아갔는데, 아이팟을 필두로 폐쇄형 방식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면서였다.

풍향이 바뀌었을 뿐 아닐까. 우연히, 혹은 자연히 풍향이 바뀌면서 폐쇄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애플의 잠재력이 부각되었고, 그에 더해 아이팟이니 아이폰이니 아이패드니, 몇가지 아이템을 떠올리면서 이런 대역전극이 벌어진 셈인 거 같다. 잡스가 위대해서라거나, 혁신적이라거나, 천재라거나, 조직을 잘 운영했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마케팅은 잘 했지만.

애플의 이미지가 갖는 '(독재자/빅브라더에 저항하는) 전사'의 이미지, '범속한 대중에 휩쓸리지 않는 섬세한 취향을 가진 생산자'의 이미지 같은 것들이 그런 거다. 그에 더해 그의 극적인 신상품 발표라거나, 특히나 한국의 경우 시대에 뒤처진 공룡 몇마리가 횡행하던 쥬라기공원같은 국내시장에 아이폰이 던진 충격으로 더할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카카오톡같은 어플 하나로 얼마를 벌었네, 페이스북이 기업공개해서 얼마를 벌었네, 하는 기사들, 정확히 말하자면 소위 '대박'꿈을 확대재생산하는 기사들이 쉼없이 쏟아지고 있다. 스티브 잡스의 평전, 그의 평전을 덮으며 얻었던 건 그의 인생을 따라 훑어볼 수 있었던 IT의 발전상, 그리고 (금전적) 성공이 한 사람의 선택과 인생을 어떻게 우상화하는지.

기본적으로 남의 인생, 우연으로 점철되어 굴곡진 인생을 따라 읽으며 배울 점이란 게 있을까. 그의 철학이나 신념이 전면에 드러나는 인생이라고 해도 그럴진대, 마케팅에 능했던 한 기업가의 인생이란 걸 보면서. 매번 이런 류의 평전을 보면서 부딪히는 회의의 벽을 넘지 못했다.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은 잘 쓰고 있지만, 그의 삶엔 관심없단 결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