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죽음 - 삶의 존엄과 자살의 자유에 대하여 산책자 에쎄 시리즈 6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김남시 해제 / 산책자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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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자살을 한다. 최진실, 노무현, 정몽헌, 최진영..활자화된 이름들의 죽음 이외에도 도처에서 학생이,회사원이, 주부가, 아이가 죽음을 선택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지만 사람들은 대개 그들의 선택에 대해 원망하고 훈계한다. 더러는 비웃음이 섞인 훈계일지도 모른다. 니가 힘들다는 그 삶, 난 잘 살고 있는데..하며.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한 사람에 한번쯤 생각해본 사람까지 합한다 해도, 어쨌던 '공식적'인 차원에서는 그들은 소수자일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자'의 이름으로 자살의 경박함과 무책임함을 비난하고, 사회는 종교와 철학과 과학의 이름으로 자살을 단죄하는 판이라 그렇다. 이미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살려두기 위한 '반면교사'나 '예외'가 된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와 같다.)

(참고 : [리뷰]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 새물결))


"자살이라는 문제는 심리학적 접근으로 풀 수 없다. 생명 법칙이 깨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명에 대해
내리는 판단은 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 하에서 이루어진다."


자살을 적대시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또 일견 그럴 듯 하다. 기본적으로 생명은 소중하고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 채 사회적으로 얼마나 많은 역할과 기대가 그(녀)에게 감겨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주변인과 공동체에 커다란 아픔/손실을 주는 이기적인 행동이란다. 잠시의 우울함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어른스럽지 못한' 나약함의 소산이라고도 하고, 몸이 건강하지 못한 것과 같이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증좌라며 심리적/생리적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까지 곁들여진다. 게다가 여전히 신의 뜻에 어긋난다는 등의 종교적인 믿음이 단단한 실체로 작동하고 있기도 하다.

"자살학의 진단이 틀리지 않다고 해도, 자살을 이미 감행했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은 공허할 뿐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인생상황'이라는 것은 아무리 해도 절대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다. 외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마디로 아무것도 없다. 당사자만이 안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렇다.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힘들다는 사람들을 끌어와 앉혀서는, 니가 죽으면 남은 사람들이 뭐가 되겠니, 하며 니가 맡아야 할 역할을 끝까지 수행하라는 압박이다. 단적으로 최진영의 죽음이 그랬다.
그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조카는 어떡할 거냐, 엄마는 어떡할 거냐, 누나 볼 낯이 있겠냐, 따위 오지랖 넓은 한가한 이야기만 잔뜩 해댔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에는, 본인이 어떤 고민에 빠져 있었는지, 어떤 과정 끝에 죽음을 선택한 건지 등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의 노력은 없었다. '우울증'이란 단어 하나로 끝이었다.

"그(자살을 거부하는 자)는 자신의 고독조차 온전히 체험하지 못한다...그저 주어진 삶을 긍정했으며, 터져
나오는 구토를 애써 부정했다. '긍정과 부정의 균형'은 사실 평형을 이룬 게 아니다. 생물로서의 본능과 사회의 요구에 따르며 자신에게 지워진 무게를 별거 아니라고 한사코 우기는 셈이다."

자살은 말처럼 쉽지 않다. 아메리가 굳이 '자유죽음'이란 단어를 쓸 만큼, 자살은 '자유를 집중적으로 체험하는 순간', 그래서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상황으로 스러지고 만다는 깨달음을 거쳐야 가능한 거다. 자살하고 나면 모든 게 무의미해질 거고, 더이상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게 될 거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사회성/기능성'에 기반한 사회의 협박 이외에도 스스로 죽기를 거부하는 강렬한 생물학적 본능이란 것도 넘어야 할 거대한 벽이다. "태어난 이상 살아야만 한다"는 생명의 논리를 온몸으로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인생은 최고로 가치있는 자산이 아니다."

그럼에도 죽고자 한다면 그런 상황은,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자연본능과 사회의 명령을 거부하는 행위다. 나는 자연적인 죽음을 거부한다, 사회적인 동물로서 사회가 요청하는 온갖 생산활동-애낳고 밥벌이하는-을 계속 수행할 것을 거부한다. 일체의 구속을 벗어던지고, 생명체로서 가장 근본이 되는 생명보전의 대원칙까지 벗어던지겠다는 선언이다. 그것은 자신이 판단하건대 더이상의 삶은 부질없는 생명의 연장일 뿐 죽음보다 못하다는 결론이 지어진 후에야 가능하다. 그것은, 아메리가 말하듯, 삶을 던져 '자유'와 '삶'의 의미를 지키겠다는 모순적인 선언이기도 하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그런 극단적인 판단에까지 이르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개개인마다 다를 거다. 다르지만 또 같을지도 모른다. 아메리는 하나의 단어를 제시한다. 에셰크(Lechec), 치욕적인 꼴을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것. 죽음이 그를 세상으로부터 몰아내기 전에 이미 세상이 그를 버렸다. 더이상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인간성과 존엄성을 저버리는 행위라고 느끼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미래가 더이상 없는 중증 환자, 삶의 전부라 여겼던 사랑의 실패자, 심지어는 대입시험에 실패한 사람, 남들 눈에 어이없고 하찮아 보일 문제라 해도 판단은 본인이 하는 거다. 삶의 결정적 순간은 본인만이 안다.

"자유죽음은 순전하고 지극한 부정이다. 여기에 어떤 긍정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자유죽음은 실제로
'무의미'하다...(그러나) 지성의 논리로 볼 때 자유죽음이 무의미하다고 할지라도, 자유죽음을 택한 결단마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자살은 오히려 '인간성'과 '존엄성'에 기댄 최후의 선택일 수 있다.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거다. 죽음을 향해 마지못해 꾸역꾸역 나아가는 인생과 '에셰크'에 맞서 스스로의자유죽음으로 직접 끝낸 인생 중 어떤 것이 정답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겠지만 최소한, '자살할 권리'는 복권되어야 한다. 인간이기에 스스로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하나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자살을 결심하고 수행하기까지, 그 어느때보다도 강력하게 스스로의 자유를 체감하고 밀도높은 삶을 살았다고 본인이 느낀다면 본인 이외 다른 누가 그 삶에 대해 주제넘은 훈계와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찾아온 죽음, 이는 겁쟁이의 죽음이다.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택한 죽음은 다르다. 깨어있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택한 죽음, 이것은 자유죽음이다."

아메리는 자살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는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 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삶의 욕구'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주목하려고 한다. 꾸역꾸역 생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살아내겠다는 다짐에 충실하고자, 삶의 가치와 인간적 존엄을 지켜낼 자유를 극한으로 수행하고자, 맹목적으로 살아남는 대신 차라리 인간으로 죽음을 택하겠다는 결단이다.

"삶의 이야기는, 그 삶이 어떤 것이든 간에 실패의 이야기이다." 사르트르.
"잠이 좋다. 더 나은 것은 죽음이다. 절대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가장 좋았으리라." 하이네.
"I sometimes wish I'd never been born at all". 퀸, 보헤미안 랩소디.

그렇게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융통성없고 고집스러운, 순진하다 못해 꽉 막힌 쑥맥들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더더욱, 그들에 대한 존중과 포용이 필요하다. 그들이 가진 '에셰크'에 공감하고 포용하려는 자세가 없는 사회야말로 자살의 온상이다. 실패와 좌절의 두려움을 참을 수가 없어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훈계와 비웃음, 그리고 권해지는 자연적인 죽음은 최악의 '에셰크'인 거다. 우리 사회의 드높은 자살율엔 이유가 있다.


책이 드러내는 몇 가지 아쉬운 지점

#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나 생각이 삐져나오면 '요새 삶이 힘드냐', '우울하냐'고 물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은 그럴 때만 입에 올려야 하는 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죽을지 살지의 문제가 김밥을 먹을지 햄버거를 먹을지의 문제만큼 유쾌하거나 사소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꼭 우울하거나 피폐해졌을 때만 떠올려야 하는 건 아닌 거다. (그렇다고 요새 내가 삶이 힘들지 않다거나 우울하지 않다는 건 아니..ㄹ 거다.)

진지한 것과 우울한 건 다르다. 그건 어쩌면 우리 사회가 '자살'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이다. 죽음과 관련된 것들에 병들고 패배한 듯한 이미지를 부여한다. 봄이라고, 볕이 따시다고, 만물이 생동한다는 따위, 죽음을 터부시할 이유가 하필이면 손꼽을 수 없을만큼 쌓여있는 이 때라도, 살아갈 자유가 있다면 동시에 죽을 자유도 있는 거다. 동전의 양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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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에서 시민으로 - 한국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 돌베개 석학인문강좌 4
최장집 지음 / 돌베개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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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들은 읽고 나면 숙성시킬 시간이 필요하다. 사방팔방으로 울림이 번져나가는 책, 그게 소설이던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되었던, 들불처럼 사방으로 번질 수 있는 의미의 갈래들을 하나씩 새겨보고, 그게 어떤 의미와 연결될 수 있는지를 되짚어보는 과정은 읽는 것 자체와는 또다른 큰 쾌감을 준다. 그리고 그런 책들에서 자신이 애써 고삐를 추스려 잡아 자신의 말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그 중의 아주 조금에 불과하다. 뭐, 고작해야 학사 나부랭이인 내 수준에서 그렇단 얘기다.

최장집 교수의 이 책, 그의 다른 책들처럼 굉장한 책이다. 나는 그저, 내 나름의 맥락에서 그 중 일부를 떼어서 조금이나마 사고를 자극하고 정렬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이 글은 '리뷰'라기보다는 일종의 발제문.


'갈등'과 '분열'을 조장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전제로 한다. 특정 주제에 대해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는 두 개의 집단이 맞서고, 두 집단은 모종의 타협이나 정치적 과정을 거쳐 적절한 균형을 만들어낸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있지만 정치의 영역에서는 그런 무조건적인 통합의 메시지는 국가주의나 집단주의를 초혼할 뿐이다. 시끄러울 수 밖에 없다. 국회는 안건을 갖고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게 당연하고, 시민들 역시 떠들어댈 광장이 필요하며, 시스템이 안배한 통로 속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괴로운 사람은 초법적 수단조차 동원해야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갈등선'이 비로소 그어지는 거다.


갈등을 부정하고 묵살하는 사회

문제는 우리 사회가 그런 '갈등'에 대해 그 존재부터 부정하고, 묵살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시스템 내의 '갈등 발견&해소 프로그램'은 협소하고 취약하기 짝이 없어서, 모든 갈등은 사회적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치환된다. 결국 사교육비 많이 부담하라는 교육문제, 애기 외롭지 않게 키우라는 출산율문제, 손 많이 씻고 쇠고기는 알아서 골라 먹으라는 보건문제, 우유 많이 먹고 성형외과 찾아가라는 젠더문제, 눈높이를 낮추고 기술을 배우라는 취업문제. 사실은 사회 문제, 즉 사회적인 갈등선을 빚어내는 문제들이 대부분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소하도록 종용되고 있다.


복불복 마인드로 순치되어 버린 파편화된 개인

그리고 조용한 사회. 누군가 '노'라고 이야기하면-갈등을 말하려 하면-사회 불만세력, 반정부세력, 심지어는 국론 분열과 국력 낭비를 조장하는 매국노로까지 매도당한다. 지금의 비정규직 정책에 반대한다, 한미FTA에 반대한다, 재개발 정책에 반대한다, 등등 이어지는 '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답은 언제나 그렇듯 무조건적인 사회 통합의 강요, 국가발전 한길로 매진해야 할 시기에 힘 빼지 말자는 국가주의적 교시였다. '노'라고 말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스템적 안배나 기제가 없는 상황에서 번번이 '불법'으로 밀려나는 최악의 상황에선, 1박2일식 '복불복 마인드', '나만 아니면 돼'라는 파편화된 개인들은 그러한 무서운 국가 앞에 무력할 뿐이다.


똘레랑스는 갈등 인정 이후의 문제다

그게 민주주의일까. 황장엽이 말하고 보수세력들이 떠드는 '한국식 민주주의'가 그런 거라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국가주의, 혹은 다른 무엇이다. 민주주의는 최장집의 표현을 고대로 빌건대 "폭력을 배제한 갈등과 타협에 기초한 정치체제"에 가까운 무엇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한 똘레랑스는 고사하고 갈등 자체를 터부시하고 있는 거다. 시끄러운 국회가 싫다, 시끄러운 광장이 싫다, 결국 '시끄러운 게 싫다'란 정도로 요약될 갈등 상황 자체에 대한 혐오나 염증이 문제다. "정치인 아저씨들은 왜 맨날 싸워요?"라고 묻는 어린애의 똘망한 눈망울 앞에 무조건 부끄러워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실제적인 갈등을 대체하는 추상적 전선(戰線)

혹은 갈등을 묵살하고 없는 것 취급하는 것과 동시에, 추상적인 양극 구도로 몰아간다. '민주 대 반민주', '진보 대 보수', '평화개혁세력 대 냉전수구세력' 따위의 갈등선은 뭔가 선명하고 뚜렷해 보이지만, 사실은 더이상 내용도 없고 실천적 의미 또한 던져주지 못하는 죽어버린 그림이 아닐까. 87년을 기점으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고 나서, '민주', '진보', '개혁' 따위의 단어로 지시되는 내용은 그때그때 바뀌어 버렸다. 이미 갈등선이 그 고도로 추상화된, 그렇지만 그래서 오히려 쉬운 단어의 세계를 넘어서 복잡다단한 현실세계로 넘어온 거다.


'부러지지 않는 쌍쌍바', 자잘한 균열선들의 긍정적 역할

두 개의 그림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쌍쌍바 여러개를 고르게 포개어 쪼개는 그림, 그리고 쌍쌍바 여러개를 무질서하게 포개어 부러뜨리는 그림. 첫번째 그림에서 쉽게 부러질 쌍쌍바가 '민주 대 반민주'니 '진보 대 보수'니 따위의 극단적이고 추상적인 갈등선으로 일관하는 사회의 파국 혹은 불건전성을 의미한다면, 둘째 그림에서 좀처럼 부러지지 않을 쌍쌍바들은 예컨대 '동성애 찬성 대 반대', '증세 찬성 대 반대', '등록금 무료 찬성 대 반대', '모병제 찬성 대 반대' 따위 수많은 이슈에 대한 자잘한 갈등선을 품어내는 사회의 건전성을 의미한다. 최장집은 정당정치가 그러한 자잘한 갈등선을 반영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의 부재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어떠할까. 정당 정치는 마비되었고, 광장 정치(광장 민주주의라 높이 평가되기도 한)는고양되지 못한 채 배설되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근대 정치에 걸맞는 '자유주의적 인간형'조차 제대로 세워지지 못한 채 지지부진하다. 거대한 국가와 동등한 계약관계로 묶인(혹은 묶였다고 상정되는) 주체적이고 자율적인인간, '시민' 대신에 NL(민족민주)이니 PD(민중민주)니 통일조국, 민주국가건설을 위한 '민중'만이 화석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광기에 가까운 월드컵 응원 열기, 골프와 피겨, 축구 선수에 대한 과도한 국가적 상징화, 새롭게는 '국격'이니 '국위 선양'이니 따위의 국가주의적 수사에 푹 절어 있는 것이 하나고,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면 '네티즌 수사대'가 몰려들어와 융단폭격을 하는 원시적/집단주의적 작태가 다른 하나다.


'민중'에서 '시민'으로 바꿔내지 못한 한국 민주주의

최장집이 이른바 386세대, 운동권에 대해 비판하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기득권 세력, 구조에 대한 거울 이미지로서 스스로를 형상화하고 안티화해내면 되었을 뿐인, 역사적인 한계기도 하지만 능력 부족이기도 했던 부분이다. '민중'이란 불분명한 역사적 집단에 기대어 '역사의 정방향으로의 발전'을 믿었던, 지금과는 정반대의 뒤집어진 세상만 꿈꾸면 된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불철저했던 문제의식은 곧 김대중/노무현 두 자칭 '진보성향' 정권의 실패 원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결국 김대중과 노무현, 이명박은 동일한 문제를 내재하고 있다, 혹은 이명박은 10년 '좌파 정부'의 예정된 귀결이었다고 판단한다.


김대중과 노무현, 그들을 박제화한 '민중'의 배신은 당연하다

과연 그런 걸까. 판단은 유보하되 의견을 말해 보자면, 김대중과 노무현, 두 대통령의 죽음에 비통해 하던 이들은 '민중'이었지 '시민'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세속된' 이해관계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갈등을 시스템 내에서
해소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시민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격앙된 상태에서, 또 이명박이 퇴행시켰거나 노출시킨 허술한 민주주의에 놀란 상태에서 '민주 대 반민주'라는 손쉬운 갈등선에서 어느 한 쪽을 택한 '민중'이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이명박 덕분에 갑자기 '민주'의 화신, 실패한 영웅으로 부활했지만, 사실 그들은 재임 중 수많은 이슈에 대해 사람들을 실망시켰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도 시스템 내로 그런 이슈, 갈등을 들고 들어와 해결하는 기제를 마련치 않았다. 그 결과다. '민중'은 속되고 삿되다 하여 정치권에서 다루지 않는 온갖 생활 밀착형 이슈들, 부동산과 주식과 교육과 취업과 세금의 문제에서 또다시 '김대중과 노무현'의 가치를 배신하고 있다. 이명박의 지지율을 보면 알 일이다.


운동권 세력이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 기여한 것이 무엇인가

그건 한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을 10년을 날려버린 정치권의 실패다. 그들은 "샐러리맨 세금낮추기 정당", "공휴일에 지하철 막차시간 연장하기 정당", "대학생 일자리 보장 정당" 따위, 좀더 세분화되고 생활에 발딛고 있는 이슈로 자잘한 찬/반 균열을 그어줄 수 있어야 했다. 그런 이슈들의 묶음으로 커다란 '진보'를 형상화할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이 곧 '구체에서 추상으로' 나아가라는 구호의 함의였을 거다.

사실 국가 발전을 위해 다른 갈등들을 묵살하는 기득권 세력의 몸짓은 지금의 '운동권' 세력에게도 여기저기 발견된다. 조직 내 성추행 사건을 덮는다거나, 전경과 대치하기 위해 필요악으로 동원되는 '사수대'의 군대식 규율, '민주주의'의 대의를 위해 개인의 도덕률과 사명감의 차원으로 모든 것을 치환해 버리는 방만함까지.


자잘한 이슈들을 그어내고 반영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좀더 갈갈이, 중층적으로 찢겨야 한다. 무슨 모세의 기적도 아니고 반공이니, 신자유주의니, 혹은 친미/반미니, 심지어는 희화화된 형태의 '보수꼴통'과 '친북좌파'의 굵고도 무식하며 무시무시한 일도양단식 균열말고. 그런 세속화되고 일상적인 형태의 자잘한 균열들이 좀더 촘촘하게 그어지고 나서야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고착되고 성숙을 향해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서구처럼 국가 이전에 '시민'이 먼저 형성되는 것이 실패하였다 치더라도, 이제라도 강력한 국가 앞에서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시민'을 불러내는 정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분열을 말할 때다. 지금처럼 인터넷 상에서 서로 ^^해가며 좌빨이니 우빨이니 맞지 않는 화살만 잔뜩 주고 받는 소모적인 이야기로 분열하는 게 아니라, 정말 서로의 이해관계가 상충하고 입장이 다름을 확인하기 위한 분열 말이다.



덧댐.

어쩌면, 이명박을 뽑은 국민들이 '돈을 많이 벌게 해줄 것'으로 기대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으로는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뿐이다. 물론 근본적으로 '경제발전'에 대한 감수성과 비판의식을 키워내야겠지만
'돈을 많이 벌게 해줄 것'에 대한 디테일과 방법론이 경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는 '진보'를 자처한 진영이 그 이슈를 송두리째 방기했음을 반증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형태의 삶의 부유함을, 어떻게 창출할 건지에 대한 미시적 수준의 갈등선을 역시 그었어야 한다는 거다. 이 역시 이명박의 집권이 김대중/노무현으로 상징되는 운동권 세력이 정치적 발전에 소홀했던 덕택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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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에 반대한다 - 왜 우리는 이기기 위한 경주에 삶을 낭비하는가?
알피 콘 지음, 이영노 옮김 / 산눈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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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도발적인 책이다. "경쟁에 반대한다"

경쟁에 반대한다고? 시장 논리와 무한경쟁을 통한 효율성 제고의 신화가 경제 영역을 벗어나 교육, 정치, 문화 전 분야로 뻗어나가는 이런 시기에, 예컨대 '불공정한 경쟁'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경쟁' 그 자체에 반대한단 제목이다. 이런 책은 둘 중 하나 아닐까,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제목으로 '낚아보려는' 책이거나 혹은 작심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려보겠다는 결기 어린 책이거나. 둘 중 어떤 걸까, 이왕이면 후자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처음 집어들었다.

부제는 더욱 웃긴다. "왜 우리는 이기기 위한 경주에 삶을 낭비하는가?" 누구는 낭비하고 싶어서 하나? 그리고 나라고 지기만 한 경주는 아니었단 말이다, 라고 저쪽에서 루저 1이 울컥 핏대세워 이야기한다. 이번엔 졌지만 다음에 이기면 된다고, 더 큰 것을 얻을 수도 있을 거라고 저쪽에서 또다른 루저 2가 자신없이 중얼거린다. 이건 낭비가 아니라 '두걸음 전진을 위한 한걸음 후퇴'라고 해병대 팔각모자쓴 저쪽 루저 3은 강단진 표정으로 이를 악문다. 1%의 인재가 나머지 사람들을 먹여살려 준다는 이야기는 이런 식의 경쟁, 줄세우고 비교하고 99%를 '비인재', 루저로 모는 무한경쟁 무한찬양의 극단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당장 이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싫어도 경쟁 속으로 뛰어들고, 혹은 더 큰 과실을 위해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경쟁에 참여하고 있다. 치열한 몸값경쟁을 통해 낙찰, 낙찰가 88만원인 거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배웠네 하는 사람들도 이야기한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여태 인류의 발전 과정을 보면 끊임없는 약육강식의 갈등, 적자생존의 경쟁 상황 속에서 이런 '빛나는 문명'을 꽃피운 거랜다. 한국 사회로 스코프를 좁혀보아도 국내 기업간의 이기기 위한 경주, 뼈를 깍는 경쟁을 통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난 거 아니냐는 이야기다. 초등학교 때부터 진단평가니 뭐니 시험을 보고 경쟁을 붙여야 아이들의 학업성취도도 올라가고, 그래야 우리 지자체의 경쟁력-이라고 쓰고 명문대 합격률이라 읽는다-도 올라가고 국가 경쟁력도 올라가고 나아가 인류 전체의 복지에도 공헌할 거라는 투다.

인류의 놀이문화를 봐도, 어쩌면 경쟁은 인간의 본성일 거라는 지레짐작이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이미 우리는 고대 그리스 이래 스포츠와 놀이 문화조차 '인격 형성과 성숙에 도움이 된다며 경쟁 일편향으로 기울어져 왔으니, 지금의 축구나 야구 같은 현대 스포츠가 전쟁과 같은 양상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더욱 폭력을 조장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어쨌든 경쟁적 스포츠로 인간 본성에 내재한 전투적 본능을 달랜다는 해석도 있는 거다. 스포츠맨십 따위 치장을 걷어내고 나면, 남는 건 굳이 승자와 패자를 가려내고 승리를 통해 쾌감을 만끽하려는 욕구다. 승패 따위 가리지 않는 게임은 솔직히 지루하지 않은가, 라고 물어보기도 우스울 만큼 재미있으려면 당연히 경쟁적이어야 한다고 모두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티비에 만연한 온갖 버라이어티에서 보이는 경쟁 구도들, 갈수록 선연해지고 말초적으로 변해가는 경쟁들이 그 단적인 사례들 아닐까.)

그렇지 않다는 거다. 경쟁을 통해 더욱 생산적이고 효율적이라는 믿음, 경쟁을 통해 삶이 윤택해지고 의미가 생긴다는 믿음, 심지어는 경쟁이 '인간 본성' 그자체에서 비롯한다는 믿음, 이 모든 것들이 잘못된 오해거나 혹은 악의적인 이데올로기라는 게 이 책의 골자다. 스스로에 대해 확신이 없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는, 자존감 부족이 바로 경쟁사회의 원인이자 결과, 그래서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는 진단. 실은 협력을 통해 더욱 재미있을 수 있고 생산적일 수 있으며, 개인의 자존감 역시 더욱 고양될 수 있는데, 충분히 그런 사실을 증명하는 연구 결과들도 이미 나와 있음에도 워낙 근본적인 문제라 꼼짝도 안 한다는 거다.

생각보다 학술적으로 깊이 들어간 책이고 책 자체가 하나의 주장을 위한 탄탄한 논문이라 해도 좋을 만큼 논리 정연하고 논거가 풍부하다. 교육 심리학자인 저자는 기존의 학문적 필드에서 '정설'이라 일반화되어 버린 설들에 대한 강력한 반박을 하고 있어서 상당 부분 '팩트' 싸움, 유의미한 해석을 도출하는 실험의 인용 여부 및 신뢰도 싸움일 수 있는 건 사실이다. 다만 총 10장으로 구성된 챕터 중 무려 아홉 챕터나 할애해서 집요하게 보여주려는 것, "승리와 성공은 다르다"라는 명제 아래 지금의 "경쟁"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키워드, "협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상하게 하려는 저자의 의도와 문제제기는 정말 너무나도 무겁다.

사실 이미 경쟁을 조장하는 구조가 문제냐, 경쟁적인 마인드에 절어버린 사람이 문제냐, 하는 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와 같은 무의미하고 무익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예컨대 '키작은 사람은 루저'라는 말에 분개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 경쟁시스템에서 '키'라는 요소로 패배할 수 있다는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한편 '키'라는 요소조차 타인과의 경쟁구도 속에서 생각하는 멘탈리티를 이미 장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키'라는 신체적/천부적 조건조차 이 도박장이나 주식시장같은-대부분의 사람이 돈을 잃는다는 점에서-경쟁시장의 칩으로 훌륭히 쓰이고 있는 거고, 또 칩으로 이미 유통되고 있으니 사람들은 '키'를 둘러싼 경쟁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뫼비우스의 띠.

그렇게 보면 참 공고하다. 아무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경쟁하는 동물이 아니며, 경쟁 말고 협력을 통해 보다 나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떠들어봐야, 마치 맑스주의를 오늘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래그래, 니말은 다 알겠는데, 참 논리정연하고 그럴 듯하고 멋져보이는데, 그래서 어쩌라구. 그런 차갑고 단단한 벽에 부딪히는 느낌 때문에 책을 읽어내리다가 덮어버리기를 몇 번. 단순히 경쟁 말고 협력에 의한 문화, 경제, 사회가 가능하겠구나 정도 고개 몇 번 주억거리고 말 일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뭔가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 지, 기업 구조, 경제 시스템, 학업 시스템 따위 거대한 것들 말고 당장 경쟁에 길들어버린 '내 입맛'은 어떻게 바꿔야 할지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데, 저자는 치사하게 자기 전문분야인 '교육'에 대해서만 몇 마디 아이디어를 던져주고 말았다.

그냥, 계속 생각해 볼 만한 책이고 어쩌면 좀 확장해서 읽어보아야 할 책일지도 몰라서, 정리가 채 되지 않은 상태로 글을 쓰고 있다. 아니, 정리해 버릴 책이 아닌 거다. 계속 책상 위, 머릿속에서 ing로 남아있어야 할 책, 남아있어야 할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외부의 자-타인이 되었건 그들이 정해둔 기준이 되었건-를 빌어 스스로를 재어 보며 위축되거나 과시하지 않고, 스스로 혼자 설 수 있도록 좀더 애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취직 시즌이라 알게 모르게 또 마음속의 자를 가동해보는 자그마한 모터 소리가 윙윙 들리는 거다. 내가 다니는 직장은 어디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어디쯤, 이런 식의 등수 놀이를 피하려면 다소간 '도 닦는 마음'이 필요한 거다. 스포츠에 비기자면,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려는 축구를 하기보다는 자신의 신기록을 갱신하려는 역도나 높이뛰기쯤에 임하는 마음이랄까.

책을 보면서 문득 떠올랐던 대학교 2학년 때의 기억 하나. 학과 신입생들을 맞이하는 새내기준비위원회 회장을 맡아서는 오리엔테이션에 뭐하고 놀지, 뒷풀이에선 뭐하고 놀지, 새터가서는 또 뭐하고 놀지 나름 열심히 고민고민했었다. 뭐 결과물이야 통속적이고 보잘것 없었지만, 만약 내가 '경쟁'과 '협력'을 감별해낼 만큼의 미각을 갖고 있었다면 좀더 신선하고 즐거운 놀이들을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다. 함께 즐겁고, 서로의 얼굴을 기억해내고 이름과 쉽게 매칭시킬 수 있게 만드는 게임들. 누구보다 앞서고, 누굴 제치고 이기려고 바둥바둥대느라 잔뜩 지치고 상처받았을 녀석들하고 굳이또 그런 게임을 할 필요는 없었던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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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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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끼가 한 남자에게, 한 남자와 여자에게 빨간 점을 찍는다. 그 전까지는 그야말로 '갑남을녀', 익명의 바다를 떠다니던 남자와 여자에게 이름이 붙었다. '덴고'와 '아오마메'.

그의 소설은, 그의 소설 중 내가 좋아하는 류의 소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나, 주인공은 특정 분야에서 나름대로 특출하달 정도의 재능을 갖고 있지만 의지와 욕구가 부재하다. 맘만 먹으면 그래도 꽤나 해낼 수 있는데, 그 마음 먹기가 힘들다. 딱히 무얼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고, 사실 뭘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는 상태. 둘, 주인공은 다른 등장인물과의 관계나 세계 그 자체에 대한 회의나 비현실감을 끈질기게 품고 있다. "여기는 여기가 아닌 세계구나"류의 대화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 내내 반복되는 질문, 우리가 지금 같은 시공간에 있는 걸까. 셋. 도무지 주인공의 문제가 해결되는 법이란 없다. 기껏해야 원점, 이거나 여기가 내가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할 수 있는 딱딱한 바닥면이구나, 정도의 확인에서 그친다.

그건 왠지 내 이야기다. 얼마전 하루끼와 관련한 잡지 인터뷰에서도 말했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어필하는 부분은 바로 그런 부분이다. 적나라하게 지금 자신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 맨날 보여주면 짜증나서 죽어 버릴지도 모를 볼품없고 엉성한 상태지만 그래도 가끔은 거울을 들여다보듯 날 비추어 볼 수 있는. 그의 이야기에서 공통된 부분들, 딱히 신나게 달리지도 않고 드라마틱하고거창한 결말도 없으며 주인공은 늘 사변적이고 주춤거리는-때로 아주 답답하고 짜증나는-캐릭터에 딱히 꿈이나 야망이랄 것도 없고 사실 뭘 하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누추하고 김빠지며 '참 사느라 애쓴다' 싶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그의 소설을 보는 이유는, 그게 지금 내 삶과 많은 부분과 맞닿아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가 바닥이구나, 싶어서다. 그건 내가 살아감에 대한 일종의 데카르트식 '방법적 회의'를 가능케 하는 최후의 지반일 수도 있겠다.

항상 그렇듯 건조한 인생을 쌓아나가다 어느 순간 문제가 불거진다. 두 개의 달이 떠있음을 퍼뜩 깨닫게 되듯 일상에 그어진 작은 균열을 발견하고 나면 쭉쭉 균열이 사방으로 번지는 건 금방이다.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밋밋하고 조용했던 인생을 복기하다 보면, 정작 본인의 문제랄까, 본인의 결락이 심각함을 발견하고 그것에 매달리게 된다. 외부의 문제는 최초의 자극, 계기일 뿐 이내 시선은 내부로 향하게 되는 거다. 그 내부엔 자신의 가치, 자신의 사랑, 자신의 치부가 오롯이 숨겨져 있다. 모든 문제를 자기화하고,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내밀한 것으로 되돌이하고 마는 강력한 산화력이 발휘되지만, 그건 이기적이라거나 탈정치라거나 혹은 관념적, 사변적이라는 표현과 맞춤하지는 않다. 자신을 먼저 찾아내고 알아내려는 노력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A에서 A'로 바뀐 자신은 드디어 뭔가를 의욕하기 시작한다. 범속한 일상에서 무기력하고 무의지한 모습으로 일관하던 주인공이지만, 조금은 '의지'라는 것을 품게 된다. 그건 아마도 수많은 상실을 거친 후, 내적으로는 거의 세계대전에 가까울 만큼 혁명적이고 치열했을 전투를 거친 결과이겠지만, 정작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별반 다를 바 없다. 하루끼가 찍어 놓은 빨간점을 지우고 일상에 풀어주면 다시 이전처럼 이름없고 얼굴없는 대중 속으로 빨려들어갈 거다.

그의 이야기가 하나의 커다란 원을 돌아서 원점으로 돌아온다 싶은 게 그래서다. 결말이 이상하다 싶다는 소감들도 그래서 아닐까 싶다. 1984나, 1Q84나 다르지 않다. 내면에선 폭풍우가 일고 숱한 상실과 모험을 겪었지만, 외부로 드러나는 건 거의 없다. 여전히 세계는 해가 뜨고 달이 뜨고, 신은, '리틀 피플'은 기분이 좋지 않으면 천둥치며 으르렁대는가 하면 사람들의 일상 역시 똑같이 지루하게 반복된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도 바뀌는 건 없는 거다. 건방지지만, 그게 세상이다, 라는 정도의 말을 해야 할 타이밍이다.

어쩌면 고마쓰니, 교쿄니, 아유미니, 교쿄의 남편이니 하는 등장인물들, 소설속 그리고 현실속 모든 동시대인들 역시 제각기의 모험 중이었을 거다. 상실감을 품고 뭔가를 계속해서 흘리듯 잃어버리면서, 허랑하게 뱉어지는 메마른 말들을 주고 받는 그들이었다. '리틀 피플'의 위협은, 주변의 소중하고 취약한 것들을 사라지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협박은 꼭 덴고나 아오마메에게만 전달된 것은 아니었을 거다. '리플 피플'이란 일종의 비료랄까, 원래 내면에 있던 씨앗을 이상성장시킬 뿐이다. 상실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을 조금 일찍 상실시킬 뿐이다. 그렇게 제각기의 전투와 모험을 마치고, 두권짜리 장편소설 분량의 이야기를 마치고 일상으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복귀했겠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루끼가 빨간 점을 찍고 들어올리기 전까지는.

그들은,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덴고'와 '아오메마'가 1984년에서 어느 순간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없는 1Q84년으로 흘러들었듯, 일상의 어느 순간 어디서 그런 갈림길, 혹은 스위치를 건드릴지 모른다. 기지개를 연달아 네번 켜본다거나, 왼쪽신발과 오른쪽신발을 바꿔 신어본다거나. 굳이 그런 거 아니어도 호, 흡, 호, 흡 대신 호, 호, 흡, 흡 하는 정도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런 사소한 스위치 하나만으로도 이미 우리는 불가역한, 돌이킬 수 없는 세상으로 옮겨지는지 모른다.

그건 사실상 매순간 돌이킬 수 없는 시공간에 떨어지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지만 좀처럼 그 무게감때문에 직시하고 싶지 않은 깨달음과도 같다. 매순간 돌이킬 수 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많은 소중한 것들을 함께 쓸어내버린다는 것. 시간이 흐른다는 것 자체가 내 현재, 내 소중한 살점들이 흘러가 버린다는 거니까 사실은 같은 말이다. (불가역한) 시간, 과 상실, 이란 단어. 그리고 '리틀 피플'의 협박이란, 사실 언제가 '상실'에 있어 맞춤한 때인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일종의 공갈협박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작용한 게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상실할 때였는지도 모른다.

1984년과 1Q84년이 결국 다르면서도 같을 수 밖에 없는 이유, 소설의 시작점과 마침점이 다르면서도 같을 수 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깨달은 후에도 별다를 바 없이 계속 똑같이 살아가게 되는 이유, 그 모든 이유는 아마도 시간 = 상실, 삶 = 상실, 실용적이지는 않은 깨달음 때문 아닐까 싶다. 딱히 그걸 알았다고 해서 어째야 할지 대책이 안 서는, 그저 거기서부터 다시 뭐든간에 쌓아올려볼 수 밖에 없는 '방법적 회의'의 밑장.

* 리뷰랄까, 내가 쓴 건 지독히도 재미없는데 소설은 사실 꽤나 재미있었다. 그렇지만, 하루끼가 이리저리 뒤척여가며 보여주는 그의 '밑장'은 여기서 보던 저기서 보던 똑같다. 그의 문제의식이나 글쓰기의 주제가 더이상 커지거나 발전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이미 그가 다루는 주제는 인간이 나고 자라면서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외로움, 상실감이라는 거대한 것, 그걸 이야기하는 그의 내공은 절정을 친 지 오래고 지금은 이리저리 변주만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물론 이야기는 세련되고 풍성해졌으며 더욱 '열렸지만', 핵심은 '상실의 시대'에서 이미 다 쓰여져 버렸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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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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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에 휩쓸리지 않는 책읽기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무언가 자신의 사고 궤적을 이어나가는 행위랑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소설이나 문학류 이외의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 서적을 본다는 건 당시 자신이 갖고 있는 의문점, 고민이라거나 관심분야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 독서 리스트를 쭉 이어나가보면 그자체로 나름의 스토리랄까 문제의식이 뻗어나가는 그림이 잡히는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분노하라'라는 책이 내 손에 쥐어진 건 꽤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람들이 다들 쥐고 있는 이른바 '핫한' 책들은 일단 피하려고 하는 묘한 청개구리 심리에다가-아직 '정의란 무엇인가'는 좀체 보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지구 반대편 레지스탕스의 목소리를 빌려 굳이 '분노하라'는 말을 전해듣지 않아도 될만큼 무시로 분노하고 있지 않은가. 그냥, 워낙 감각적인 표지가 맘에 들었다.


삶으로 말한다, '앵디녜부(Indignezvous)!'

저자는 이제 무관심과 냉소를 넘어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행동을 위한 에너지로서 분노를 말하고, 분노의 결과로 행복을 말한다. 삶의 안전망으로 기능해야할 사회보장 제도의 축소, '일반의 이익보다 특정인의 이익을 앞세우'게 된 경제 시스템, 정부와 대기업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쓰고 있는 찌라시 언론들,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대물림하는 교육. 분노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이런 식의 현실분석은 이미 차고 넘친다. 집회나 시위현장에서 배포되는 얇은 전단에 더욱 정밀하고 응축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에 기반한 결론, 혹은 주장도 같다. 이제 그만 속고, 그만 참고, 그만 당하자고. 분노하고 저항하자는 거다. 다만 이 책은, 그 뻔하고 당위적이며 선동적인 이야기에 담긴 무게가 다르다. 메시지의 진정성, 신뢰성이 다른 거다. 그러니 울림이 다를 수 밖에.

1917년에 태어난 저자는, 나치와 싸우며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다가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갇힌 채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중 탈출하고 다시 투쟁, '유엔 세계인권선언문' 작성에 참여했으며, 여전히 인권과 환경 등 사회문제 전반에 발언하며 활동하고 있다. 올해 아흔네살이다. 그런 '늙은이'가, 그런 '꼰대'가 좋은 게 좋다느니, 철 좀 들으라느니 따위 이야기가 아니라 '분노하라'는 거다.


90대 노인의 '격렬한 희망'에 위로받다

결국 이 책을 읽고 발견한 건, 육체적인 쇠락에 지지 않고 탄탄하며 쌩쌩한 열정과 젊음을 가진 어느 존경할 만한 투사의 삶이다. 그리고 그의 삶 자체로 느껴지는 위로다. 나보다 앞선 그의 삶과 신념과 가치를 발견하고는, 왠지 그의 여전히 탄탄할 것 같은 등을 바라보는 안온함과 믿음직함을 느끼게 되는 거다. 근 한세기동안 명멸해온 거대한 폭력과 광기를 지켜봐온 그가 희망을 말하니까.

그의 견지로 봤을 때 MB치하 3년간의 고난, 괴로움은 그야말로 '이 또한 지나갈 것'이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좌절과 절망을 느꼈을까.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편에 서왔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제 한세기를 살아온 노인의 혜안으로 젊은이들에게 고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총대를 넘겨 받으라, 분노하라는 거다.


수많은 한국의 레지스탕스에게. 특히 김진숙에게.

이 책의 소감은 사실 책에 씌여질 종류의 것은 아닌지 모른다. 분노하고, 행동하라는 그의 분명한 메시지에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한국에 태어난 건 다행인지 모른다. 갈수록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어렵고 분노의 대상이나 책임의 소재를 밝히기 어려워지도록 복잡해지고 은폐되어지는 사회시스템의 진화 속에서도, 한국은 여전히 날것의 국가폭력, 비인간적인 자본의 모습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용역깡패의 모습으로, 어용 언론의 모습으로, 유치한 고소고발로, 크레인에 올라간 사람의 밥줄을 끊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분노하기 유리할지도.

역시, 내게 책읽기는 사유의 연장이다. 요새 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는 한진중공업의 그녀, 김진숙. 사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할아버지까지 찾아갈 것도 없었다. 젊어서부터 안 해본 것 없이 노동해온 오십대의 그녀가 도무지 한눈에 보기에도 어처구니없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에 대항해서 크레인에 올라간지 180여일이 가까워진 참이다. 한국의 자본권력, 그리고 그를 비호하는 국가권력은 최소한의 설탕코팅조차 없이 쓰디쓴 현실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참이다.

스테판 할아버지(저자)는, 그녀의 이런 투쟁을 안다면 노구를 이끌고 크레인 위에라도 오를 사람이다. 그리고 김진숙 그녀는, 레지스탕스 할아버지처럼, 그리고 거리의 신부 문정현신부님이나 다른 한국의 이름없는 레지스탕스들처럼, 아무리 나이를 먹고 육체가 노쇠해져도, 지금과 같이 그런 열정과 분노를 가지고 우리에게 든든한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그러려면 이 팬시하고 '깔쌈한' 표지의 책은 서가에 꽂아놓을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슴에 꽂아두어야 할 일이다.

그러면 혹시 또 아나, 우리는 백발 성성해진 김진숙이 2011년 한진중공업 사태를 이야기하며 분노하라, 그리고 저항하라며 쓴 또다른 뜨거운 책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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