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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파스칼 키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2월
평점 :
문학 덕후라면 파스칼 키냐르는 첫 입에 감히 '정복' 이라는 말을 꺼내기는 무리수일 것 같고
다만 조심스럽게 주변이라도 맴돌고 싶은 작가가 아닐까 싶다.
그런 마음에 <음악 혐오> 부터 만나 보겠노라 책장에 들였지만
첫 인연은 따로 있었나보다.
을유문화사 고전 시리즈 신간으로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부터 만나게 되었으니.
이런 경우는 며칠 전 존 버거를 통해 이미 겪기도 했다.
마음이 가면 책으로라도 만남의 시기를 앞당기고 싶어서
<A가 X에게>, <다른 방식으로 보기> 를 곁에 두었지만 결국은
<결혼식 가는 길> 을 가장 먼저 만나보게 되었드랬다.
문학이나 작가와의 '연'은 독자의 의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을 넘어서서,
때로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을 세상은 '우연' 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필연으로 가기까지 어쩌면 당사자에게만 보이지 않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삶의 경험과 문득문득 떠오르는 이미지들로 인해서
독자는 자기 자신도 모르게 어떤 작가나 작품에 이끌리듯 책을 펼친다.
좀 더 특별한 연이 있는 것처럼 여겨져서 언제나 문학은 나에게 신비롭다.
파스칼 키냐르의 글도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당당하게 자신의 문학론을 설파해가는 파스칼 키냐르의 거침없는 문장들 속에서
신비로움과 통찰이 주는 그만의 깊이를 처음으로 겪어보았다.
그리고 감당하기로 들어간다...
당황스러운 첫 독자는 그의 문장을 내 온몸으로 담아내고 감당해야 하는 첫 발을 내디딘 느낌이다.
언어가 표현하는 그 속내가 접하면 접할수록 너무 깊어서
내 눈으로 문장은 읽고 있으나 그의 말대로
언어 속에 빠져 익사할 수 있는 덫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서
집중, 몰입하면서 읽지 않으면 여지없이 헤매게 된다.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을 읽다 보면
이성과 언어에 파묻혀 작품 전체를 보는 시야를 잃게 되는 오류,
그의 말대로 홀려버려 독자로써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음을 일러둔다.
좀 각오하고 보시길...!
파스칼 키냐르가 말하는 문체는
그것을 읽는 자를 전속력으로 덮쳐드는 방식으로,
독자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초반에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키냐르의 문장에 적응하는 새벽의 시간을 잘 보내고 나면
곧 몰입으로 인한 보상의 시간도 올 것이다.
각오할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부부 관계가 주는 편안함은 곧 예측 가능함에서 오는 것일 터.
파스칼 키냐르와의 만남은 바로 이 부부 관계가 주는 편안함의 극단에 있다.
한 마디로 예측 불허.
독자로 하여금 쉬이 예상을 허용하지 않는 파편적인 글들이 난무하다 보니
어떤 연결고리를 스스로 찾고 전체의 맥락을 짚어보려는 독자의 노력에
끊임없이 제동을 거는 느낌이랄까...^^;;
첫 느낌은 이렇듯 정신을 못 차리게 어려운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끝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나서 책을 덮었는데 뭔가 개운치 않다.
'내가 읽은 게 뭐지???'
(자연스럽게 자기반성의 시간이 이어지고 ㅋㅋ)
이어서 '다시' 책을 펼치게 하는 그런 마력이 있다.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속에는 그가 보물처럼 여기는 소론집들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함도 있다.
독자의 주도하에 연결점을 찾아 책 한권을 이해하고 싶지만
파스칼 키냐르의 책은 녹록지 않기에
그의 문학론과 문체를 오롯이 수용하는 방법으로 나는 여러 번 곱씹기를 택했다.
그랬더니 어렴풋이 짙은 안개가 깔린 새벽이 점차 상쾌한 아침 하늘을 보여주는 느낌이다.
언어, 말이 주는 덫에 빠지면 안 된다는 깨달음도
비로소 파스칼 키냐르 덕분에 눈을 뜨게 되었고
저자가 심어준 가상의 삶 이야기를 인간 고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미지로 한결 더 깊어지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물론 그간 소설을 즐겨 읽으면서 작중인물과 그를 둘러싼 환경과 사건들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몰입하게 되는 과정들을 경험하긴 있으나
막연하게 스며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속 이 구절 덕분에
소설을 읽는 나의 행위에 대해서 좀 더 선명한 접근점을 찾은 것 같다.
음악이 현악기 속에 있지 않듯이
소설은 일상의 언어 속에 있지 않다.
문학 언어, 나이 없는 언어가 지역 특색을 띤 언어,
날짜 붙여진 언어보다 낫다.
소설은 언어 속에 있지 않다.
꿈이 결코 언어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꿈은 언어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언어 없는 동물들도 꿈을 꾼다.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P.157
이 책은 사실 키냐르의 책마다 "사색적 수사학" 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고 있다.
키냐르에게 많은 스승들이 읽다고 이미 책 속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을 여는 인물은은
전통적인 서양철학사에 반기를 든 1세기 로마의 수사학자이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개인 교사였던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이다.
서양철학사에서 잊혀진 이 인물의 반철학적 전통을 통해
키냐르는 이성적 논증보다 이미지 탐구에 천착하는 것이
어떤 문학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전통의 기원을 끌어올려 거침없이 보여준다.
"이미지 예술은 각 말을 관습과 분리해서 자연의 본성과 다시 이어 준다."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을 언어로 표현하여 설득하고
누군가에게는 영향을 끼침으로써 수사학이 갖는 힘이 있던 시대에
프론토의 사색적 수사학은 당시로선 이단, 비주류, 비정상의 범주에 속한 것이었다.
인간의 지적인 반응을 부각시킬 뿐, 인간의 정서 유발은 안중에도 없었던
소피스트들의 수사학과 달리 프론토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로고스 방식 외에 에토스와 파토스의 방법도 끌어 들였으니.
키냐르는 이미지를 늘리고 신화를 구축해갔던 프론토의 수사학을 통해
당시 박해받았던 한 전통의 기록을,
망각되어왔던 이미지와 메타포의 흔적들을 정리하려는 것이라 밝히기도 하였다.
다수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전통이라는 힘을 얻은 것에 대항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또한 시간의 힘 앞에서 너무나 쉽게 잊혀지기도 한다.
파스칼 키냐르는 이러한 반철학적 흐름의 계보를 추적함으로써
자신의 문학 이론을 좀 더 선명하게 보여주고자 했다.
수사학의 기원을 되짚으며 키냐르의 문학론을 만나는 여정이 내게는 참으로 뜻깊은 시간이었다.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발견했기 때문에.
독자, 플롯, 서스펜스, 작가의 문체와 어조, 멋진 서사의 조건,
키냐르식 소설가 분류법, 심연, 페르소나, 메타포, 그리고 이미지.
파스칼 키냐르가 문학을 옹호하는 방법을 이렇듯 폭넓게 만날 수 있었는데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로고스가 가하는 폭력에 관한 부분이었다.
메타포(이동)를 통해 존재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존재자 속으로 옮겨가도 결코 거기에 체류하지 않는다.
언어는 결코 직접 말하지 못한다.
언어는 잠깐의 휴식도 알지 못한 채 자신을 실어 나르고,
빼내고, 솟구치고, 지나간다.
우리는 얼굴을 가질 수 없는 말들을 전달한다.
폭로되는 사실은 언어 속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 이동하고 옮겨 가며 흔적 아래로 사라지고,
제 붕괴에서 떨어지는 돌 틈으로 끊임없이 달아나며,
모든 단일성의 맥락을 벗고 드러난다.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P. 26
책방투어를 하다 보면 인문학 관련 서적들이 많은 곳에서
이따금씩 발견하게 되는 작가들 중에 한 명이
바로 파스칼 키냐르의 스승이었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조르주 바타유.
도서관에 가야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파스칼 키냐르와 조르주 바타유는 나에게 이전까지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이
각각 알고 싶은 작가들이었는데 이렇게 연결점이 생긴다.
세상도 이렇듯 다 연결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문학은 반反윤리다.
그것은 고상하게 다듬어진 정서이고,
제 질료의 추출, 언어의 추출이고,
제 원천에 자리한 약동의 재생이다."
"문학적이라는 건 관습에서 문자가 절대 분리되지 않는
생물학적 바닥까지 거슬러 오르는 무엇이다."
"소설은 언어로 만들어진 세상이 아닌 다른 무엇을 담는다."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P.50
언어는 사람의 지혜로서는 알 수 없는 진리를
신이 가르쳐 알게 하는 '계시'의 관점이 아니라
그저 신호하고 가리킬 뿐이라는 걸 기억한다면
언어 속에 빠져 익사하는 일은 좀 줄어들까?^^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은 이것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라고 고정관념을 건드려주는,
내게는 키냐르의 문학론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이 그러했다.
다른 독자들은 모르겠고, 나에게 다소 이런 고정관념이 있었던 듯 하여.
작가인지 사상가인지 모를 경계에 서 있지만
존재감 만큼은 확실하고도 커 보였던 키냐르의 문체를 만나
개인적으로 어지러웠지만 그 안에서 발견한 깨달음들이 적지 않아서
더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내용은 이렇다 하고 이 책의 외적인 속성으로도
내용을 담은 폰트가 취향저격이었고
요철감이 느껴지는 책표지의 두께감과 색감,
키냐르의 얼굴이 있는 폭넓은 띠지도 맘에 든다.
원래 띠지는 읽고 나면 버리는 타입이지만 이건 보관해야지!
키냐르의 문장을 처음 만난 기념으로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타자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선에서
나 스스로 의미부여하고 해석하면서 사는 삶이 곧 내가 주인인 삶 아니겠어?^^
텀을 두지 않고 두 번 연속 읽는 책이 흔치 않은데 키냐르는 그걸 해냈다...
(내가 뭐라고...후훗...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