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번째 대멸종 시그널, 식량 전쟁 - 기후 변화와 식량 위기로 포착하는 파국의 신호들 서가명강 시리즈 34
남재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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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서가명강 시리즈!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로부터 시작된 21세기북스의 인문교양 시리즈로

나의 관심사들이 골고루 구성되어 있어서

개인 소장용으로 갖고 있는 책들도 족히 대 여섯권 가량 된다.

이번에 서가명강 서포터즈가 되어서 만난 첫 책은

환경문제를 다룬 <6번째 대멸종 시그널, 식량 전쟁> 이다.

벌써 34권 째 출간되었다.

서울대 교수들의 강의이다 보니 다른 교양서들에 비해서

과학적인 데이터가 많고 학문적으로 접근하면서 낯선 용어들을 많이 접하게 되다 보니

더더욱 필사가 필요한 시리즈인데

이 책은 그동안 만났던 서가명강 시리즈에 비해서 비교적 술술 읽혔다.

아마도 식량 문제라는 것이 우리 삶에 가장 현실적인 이슈인 관계로

나랑 동떨어진 이야기로 읽히지 않기 때문인 듯 싶다.

가독성이 좋은 점에 하나 더 보태자면

강조하고자 하는 중요한 내용들을 교수님이 친절하게 반복 설명을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식량 위기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 내주니 독서의 집중도가 높아질 수밖에.


국내 최고 기후 전문가로 통하는 남재철 교수는

기상청장을 역임했고 남극 세종과학기지에서 기상 담당 연구원이었으며

국제 무대에서도 기상과 기후에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던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특임교수이다.

'농림기상학' 이라는 학문으로 전문 분야인 농업과 기상을 결합하여

"기후 변화와 식량 위기로 포착하는 파국의 신호들" 을 하나 하나 짚어내고

4부에 걸쳐 독자앞에 펼쳐 보인다.

'농림기상학' 은 농업 및 산림 자원의 생산성과 관련된 기상 요인들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현대 사회가 당면한 기후 변화와 그에 따른 지속 가능한 해결책들을 창출함으로써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산림 자원을 관리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오랜 시간 이어져온 자연의 법칙은 기후를 결정하고

그러한 자연에 적응하기 위해 인간은 삶의 매커니즘을 구축해 왔다.

그렇게 지속가능한 생존이 되도록 했는데 매우 중요한 영역에서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식량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는 핵심은

바로 기후 변화에 있다!

그리고 그 균열의 시작은 통상적으로 1760년부터 1840년 사이로 언급 되어지는 산업혁명이다.

인류는 생존을 넘어서 탐욕으로 점철된 역사 위에 있다.

사회, 경제적 요인이 이와 뒤섞여 에너지를 낭비함으로써

지구 시스템을 크나큰 부담을 주었고 현재도 진행중이다.

산업혁명 이후 모든 것이 갑작스럽고 큰 폭으로 변화했다.

인구수가 증가했고 에너지와 물 사용 등 그 변동 추세가 속도를 늦추기는 커녕

오히려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온갖 자원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심지어 자연의 법칙들을 무리하게 거스르려 하고 있다.

욕망 추구라는 인간의 본능을 이성적으로 제어하려고

파리기후변화협정 등을 통해 일부는 노력하고 있지만

너무 광범위하게 산업활동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로 인해 화석연료의 사용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협정을 통해 다같이 기후 위기를 극복해보자고 모인 나라들이 대부분

지구상에서 온실 가스를 많이 배출하여 기후 위기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인식하고 있지만 실천으로 가는 과정이 너무 더딘 점도 지적하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은 경제를 위축시킬 수 있는 소지가 많아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적극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기후변화 문제는 여러 이유로 불편한 진실이 되어가고 있다!

Question 1. 중세 온난기와 소빙하기를 겪으면서 어떤 문제가 생겼는가?

Question 2. 빙하가 녹으면 고대 바이러스가 또 활동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럼 새로운 바이러스가 나타날까?

Question 3. 지난 100년간 한반도의 기후는 어떻게 변해왔는가?

Question 4. 코로나 19 팬데믹을 계기로 탈세계화 흐름이 나타났는데, 

이것이 식량 안보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Question 5. 과연 기후 변화가 전쟁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

Question 6. 기후 변화로 인해 많은 생물종이 멸종하면, 

새로운 생물종이 자연스럽게 새로 태어날 수도 있을까?

Question 7. 왜 지구 기온 상승을 산업혁명 이전 

대비 1.5도 이내로 제한해야 하는가?

Question 8. 플라스틱 사용 제한이 실질적으로 기후 변화 완화에 도움이 되는가?

Question 9. 우리나라 식량자급률과 곡물자급률의 현황과 문제점은 무엇인가?

 


책 전반에 걸쳐 저자는 현재 우리나라와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직면한

기후위기와 식량위기에 대하여 더 이상 행동을 늦출 수 없는 문제의식을 던진다.

위 9개의 질문들은 바로 그에 따른 해결책으로 제시된 이야기들과 맥을 같이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기후 변화와 식량 위기의 상관관계였다!

기후 변화와 식량 위기라는 이 둘의 연관성은 사실

누구나 대략 짐작하기에 그리 난해한 연결고리는 아니다.

그러나 과학적이고 구체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한없이 막연해지기 마련이다.

<6번째 대멸종 시그널, 식량 전쟁>의 저자 남재철 교수는

지금처럼 식량 잉여 시대에 변화 없이 풍요만을 추구하며 기후 위기에 대응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식량 부족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사실 그 경고는 자연이 이미 인간에게 다양한 방면에서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지구는 1960년부터 2020년 사이 특히 기온이 엄청 올랐고

선진국들이 위치한 북반구에서 특히 크게 올랐다.

경제를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현대 사회는 활발한 산업활동으로 인해 온실가스를 배출하며

지구온난화를 키우고 있고 그로 인해 지구는 기온이 증가하며

북극의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상승하는 도미노 현상을 야기하고 있다.

힘 없는 작은 섬들은 하나둘씩 무인도화 되고 있고

빙하가 줄면서 그 영향으로 가뭄과 산불이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변화하지 않으면 사막화로 번지는 건 이제 시간문제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물 부족 현상도 심각한 수준이다.

한국의 경우 뚜렷했던 4계절의 변화가 점점 모호해 지고 있으며 


폭염과 열대야도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다.

'기후 문제' 라고 말하기엔 부족한, '기후 위기' 라고 진단하는 이유는

최근 이러한 기후 변화들이 광범위하고 빠르며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수천년 혹은 수십만년 동안 전례없던 수준이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에 위기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 모든 변화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 종족이 문제이다.

날씨는 변해야 하는 게 맞고, 기후는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게 맞다.

사람의 기분은 짧은 시간에 시시각각 바뀔 수 있지만

사람의 성격은 오랜 시간 형성되어 온 경험과 환경의 결과이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변한다면 누구나 그건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 19 팬데믹, 시리아 난민, 2022년 이른 봄 꿀벌 실종 사건 등이 바로

변하지 말아야 할 기후가 변함으로써

인간 사회에 위험 신호를 보낸 심각한 문제들이었다.

코로나 19 팬데믹의 경우 인간 종족과는 다른 생태 환경을 가진 종들이

인간의 무분별한 착취로 인해 그들의 영역으로부터 밀려나게 되면서

인간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인간 세상에 침투했다.

이는 결국 인간의 탐욕이 빚은 처참한 결과로 이어졌고

기후 위기까지 더해져서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시리아 난민은 기후 위기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2010년 경에 중동지역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던 것을 가리켜 '아랍의 봄' 이라고 부른다.

이는 시리아 내전과 난민을 발생시킨 이슈였는데

더 깊숙히 파고 들어가보니 사실 기후 위기와 깊은 연관이 있는 문제였다.

지구촌의 식량에 있어서 큰 지분을 차지하는 곡물들, 


즉 옥수수, 밀, 콩 등의 급격한 가격 상승이 발생할 경우

이는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시위로 권력자들에게 문제를 해결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하곤 한다.

2007~2008년에 걸쳐 주요 곡물 생산국에서 기후 위기로 인한 심각한 가뭄이 발생했는데

국제 원유 가격 상승으로 연쇄 반응이 일어나면서 국제 밀 가격이 폭등하기에 이른다.

밀을 생산하는 곳에서도 식재료가 부족하다 보니 당연히 수출을 중단하게 되었고

밀 수입국가의 국민들에게는 사회적으로 불안을 느끼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폭동으로 이어졌고 정권이 무너지는 사태로 번지기도 했었는데 


이와 같은 상황이 2010년에 또 다시 발생했다.

전 세계 밀 수출량의 1/4을 차지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2010년 대가뭄이 들면서 과거와 똑같은 과정이 반복, 증폭되었다.

밀을 주식으로 사용하는 아랍 곳곳에서 국제 밀 가격의 폭동에 대한 책임을

장기 집권한 독재자들을 포함한 책임자들에게 물으며

그 와중에 시리아 내전이 발생하면서 지금까지 시리아 난민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유럽을 포함한 세계 전역으로 흩어져 살게 된 것이다.

이 문제의 시작이 바로 기후 위기이기 때문에

시리아 난민을 '기후 난민' 이라고 바꿔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기후 위기로부터 시작된 시리아 난민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시리아 난민 문제는 유럽 국가들 간에 국제적 갈등을 야기했고

더 나아가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알리는 브렉시트까지 초래했다.

기후 위기가 파생시킨 나비효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상황은 지금도 현재 진행중이며

국제사회가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본다는 게 암울한 지점이기도 하다.

기후 위기는 결국 인간에게 위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꿀벌이 사라지는 문제는 단순히 하나의 종이 소멸되는 차원을 넘어선다.

2022년 이른 봄에 전체 개체수의 약 16%인 78억 마리가 사라진 것이 뉴스에 연일 보도되었다.

이런 반응은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도 멸망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전 세계 야생 식물의 90%와

세계 농작물의 75%가 꿀벌의 수분으로 생산된다고 한다.

꿀벌은 건강하고 안정된 생태계를 유지하고 우리의 식량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일시적 이상기온 현상으로 기후 변화가 일어나면서

꿀벌들이 계절을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꽃 가루 수정이 제 때에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고

병해충 발생까지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꿀벌의 면역력까지 떨어져

월동기 중에 활동하다가 집단 폐사에 이르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꿀벌이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면 농작물의 생육과정에 문제가 발생하여

결국 인류에게는 식량 위기로 연결될 수 밖에 없다.

꿀벌 실종 사건은 결코 하찮거나 인류와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기존의 활동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인간은 생존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것이 자명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은 만들지 말자고

오피니언 리더들, 환경 활동가들이 그렇게 목소리 높여 호소하고 행동하는 이유이다.

 

 



 

식량안보를 걱정해야 할 일이 머지 않았음을 인식하고

농업에서 곡물자급률과 식량자급률을 끌어 올리는 방법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당장 곡물자급률이 낮아지는 것부터 막는 방법으로

우선 사료용 곡물 수입을 줄이는 것이다.

소의 트림으로 발생하는 메탄가스 배출을 줄이는 방법으로

이미 많이 알려져 있는 육식과 소고기 섭취를 줄임으로써 사료용 곡물의 사용을 줄이는 것과

음식물 폐기물 처리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와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것도

기후 변화와 식량 위기를 극복하는데 중요한 정책이 될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환경문제에 있어서 가장 먼저, 그리고 중요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문제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변화를 향한 개개인의 의지" 이다.

기후위기는 나, 이 나라, 지구인으로서 먼 이야기가 아니다.

나만 살고 사라지면 그만인 지구가 아니다.

나의 자녀들, 자녀의 자녀들, 자녀의 자손들이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가야 할

우리 모두의 삶의 터전이다.

지구는 이미 고생대부터 현재까지 다섯 번의 대멸종을 겪었다.

그 시기에 살고 있는 생물종의 70%에서 90%가 없어지면 대멸종이라고 부른다.

대멸종후 살아남은 생물 종들이 자연 진화해서

새로운 지구생태계가 만들어졌고 인류는 현재를 살고 있다.

지난 다섯 번의 대멸종은 대규모의 화산폭발이나 소행성과의 충돌 같은 자연적인 원인이었지만

여섯번째 대멸종은 인간에 의한 기후 변화가 트리거로써 작용할 거라는 분석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후 변화가 세계를 빈곤하게 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은 여전히 미약해 보이지만

결코 풍요로운 시대가 영원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지구가 식량, 에너지, 물을 공급하며 부양할 수 있는 최적의 인구수가

50억명이며 최대 부양 인구수가 80억명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문제는 현재 최대 부양 인구수를 넘었고

UN의 전망에 따르면 2057년이면 100억명을 넘을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코로나 19 팬데믹 같은 바이러스를 퍼뜨리거나 자연재해에 기대보거나 전쟁을 일으키는 등

인구수를 인위적으로 줄이기 위한 방법을 인간들끼리 강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18세기 말~19세기 초영국의 경제학자 맬서스의 저서 <인구론> 의 주장을

현실에서 적용할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파국이고 비극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바꿔야 한다는 인식의 시작은 바로

나 자신만을 위한 행동이 아닌

타인의 안녕을 바라는 이타적인 마음에서부터 비롯된다.

물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인 정책들을 지구공동체의 연대로

 

실현가능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리아 난민이나 꿀벌 실종 사건 이외에도

기후 변화가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며

대멸종 시그널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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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과 쉼 - 쥐고 놓는 연습
백영옥 지음 / 김영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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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 온라인서점 MD, 패션지 기자, 라디오 DJ, 시사 교양 프로그램 MC 에서 ​

글을 쓰는 작가가 되어 백영옥 작가가 처음으로 낸 

생활철학서, 인문 에세이 <힘과 쉼> 을 만났다.

​물론 이 책의 그녀의 첫 저작은 아니다.

소설집, 장편소설, 에세이도 여러 편 있지만 그 중에서

더 자세히 들어가 나와의 인연은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부터 시작된다. https://blog.naver.com/hyuna5071/220794637611  


생활철학서 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제목과 부제이다.

<힘과 쉼>... 그리고 쥐고 놓는 연습.

그렇지.... 우리의 삶은 어쩌면 힘주고 힘을 빼는 일의 반복일테니.

행복하고자 하는 건 모두의 바램일텐데

 모두에게 그런 바램이 가닿지는 않는다는 것이 모순이다.

너무 간절히 바라다 보면 바램이 불순한 욕망이 되어 변질되고

스스로 통제가 안 되어서 오히려 집착하게 되는 것이 무리도 아니다. 그 정도가 지나치면 힘 빼는 법 조차 잊게 되는 것 같은데 그래서일까.

모든 것이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자본주의 논리의 강박 속에 이미 스며들어 

인간 고유의 지혜로움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되면 

인간만이 가능한 통찰은 온데간데없고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본연의 '중심' 을 잃어간다.

유독 뭔가 고장난 것 같은 내가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읽으면 좋을 인문 에세이였다.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아는 것,

그 삶을 위해 무엇을, 언제 잡고 언제 내려놓아야 하는지 

아는 것 모두 중요하다. 

알아내고 발견할 수 있게 하는 세상의 만물들 중에서 

나에게 엄지척은 다름 아닌 '책' 이었다.

삶이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듯 한 사람의 생각과 경험, 

역할과 정체성 또한 가만히 고정되어 있지 않는 것.

나의 해석은 세상 가치 있는 모든 것은 그러므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물며 내가 가만히 고여있기만 한다면 무엇을 발견할 수 있겠나.

이것이 바로 내가 책을 늘 곁에 두는 이유이다.

또한 현재의 나에게 '살아있는 책'이 되어 깨우치게 해줄 이들을 위해 

나의 한 켠을 늘 비워두고 맞이하려는 마음이다.

작가가 오랫동안 생각해온 이 책의 제목은 '나로 사는 힘' 이었다고 한다. 

힘에만 집중했던 작가에게 쉼의 가치를 깨닫게 해준 계기는 

그러나 그리 멀리서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

21개월 된 조카 아기가 뒤집기에 성공하던 순간들, 

첫걸음을 내딛기 위해 힘 주며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들에서 

세상의 모든 힘을 끌어모았다가 목표한 것을 성취하고 난 후 

긴장을 풀며 힘을 빼는 모습에서 '힘' 의 반대편에 있는 '쉼' 을 떠올린다.

성인이 되어서는 불안함을 잊으려 계속 힘주고 있는 상황에 너무 젖어들어 

언젠가부터 힘 빼는 법을 잊어버리곤 한다.




그런 현대인들에게 백영옥 작가는 12개의 키워드로 말을 건다.

그녀의 이야기 속으로 더 내밀히 들어가기 전에 보여진 12개의 키워드 중에서 

당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자신이 가장 편하게 느끼는 키워드에 아무래도 마음이 가지 않을까? 

내게 그런 키워드를 묻는다면 

느림 / 감정 / 비움 / 경청 / 휴식 / 자아 / 공감 / 성장 이다.

완독한 후에 인상적인 문장들은 그렇다면 어떤 키워드에서 발견했을까? 

결과적으로 키워드마다 필사하지 않은 구절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공유하고 싶을 정도로 인상깊었던 문장들을 꼽는다면 이런 것들이다.


​"빈곤의 시대와 풍요의 시대는 가치 판단의 기준이 달라진다."


"휴식의 강도보다 빈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은 

심리학에서 행복이 강도가 아닌 빈도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새로운 행복학 연구들은 삶에서 '축적' 못지 않게 

'배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불필요한 관계를 정리하는 게 삶의 만족도를 높인다는 요지다." 


"세상 모든 일은 결국 태도의 문제다.

맞벌이 아내의 육아를 '돕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며, 

아이와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노는 것'이다. 

수동이 능동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부름에 '응답하는 능력'이라는 뜻을 가진 '책임감'을 갖게 된다."  


이번 주면 어느덧 72주차 주간일기에 접어든다.

공개적인 글로 올리다 보니 당연히 불특정 다수가 나의 일기를 접하는 상황이지만 

내가 처했던 상황과 당시 나의 감정과 생각들을 

주저리 주저리 풀어놓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해방감과 뿌듯함 비슷한 감정들을 느끼곤 한다. 

글쓰기의 투사 효과에 대한 부분을 읽다 보니 

실생활에서 적용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내 마음에서 분리해 다른 곳으로 쏘는 행위, 투사!


"한 발짝 물러난 거리에서 자신의 상황을 바라보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고 그것만으로도 소진된 마음은 충전되기 시작한다."


72주차를 앞두고 지금껏 내가 주간일기를 쓰고 있는 이유를 

명징하게 표현한 문장이다. 

맞다... 나는 주간일기를 쓰면서 나의 한 주를 돌아봄으로써 

앞으로 또 소진될 것이 뻔한 나의 현재에서 미래를 대비해 충전해 오고 있던 것이다.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일기를 쓰는 것?

일기를 쓰는 주체는 당연히 '나' 이기에 호칭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앞으로는 3인칭 관찰자 시점에 맞는 호칭을 새롭게 창조해 봐야겠다.

무엇이 좋을까?

당장 이번 주 72주차 주간일기부터 적용해 보리라!

이렇게 해서 백영옥 작가의 인문 에세이 <힘과 쉼> 은 

나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책이 되었다.


​"꽃길만 걷겠다는 낙관이 아니라, 두렵고 떨리지만 돌길이 나와도 걷겠다는 희망이다.

우리의 마음을 끄는 건 결코 완전무결함이 아니다.

결국 결함이다."


백영옥 작가의 책을 보면 이렇게 

니맘내맘같은 문장을 많이 건지게 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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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을 받아들일 때 얻는 것들
나카무라 쓰네코.오쿠다 히로미 지음, 박은주 옮김 / 북폴리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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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같으면 나와는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넘겼을 텐데


지난 8월에 생전 처음 해본 대장 내시경검사에서 용종이 나오고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기까지 숱한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던 나흘을 보내고 나니


나의 일상과 나이들어감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는 걸 실감했다.


더 이상 나이 듦을 저항하고 부정한다고 해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순리가


나만 비켜가는 것도 아니고 행복할 리 없다는 것도.


노화를 자각하게 되는 순간은 점점 더 심심치 않게 직면하게 될 것이고


좋든 싫든 간에 이 사실을 감당해야 한다면


내가 직접 내 삶을 꾸려가는 경험들을 축적하는 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데 지혜로운 방법이지 않을까.

<나이 듦을 받아들일 때 얻는 것들> 은 92세와 54세 정신과 전문의가 만나


일반인으로서 자신들에게 닥친 실제 노년의 삶과


연구자의 입장에서 불안없이 노년을 맞이하는 방법을 동시에 이야기한다.


은퇴한 선배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아 여전히 활동 중인


54세 오쿠다 히로미가 이 책을 열고 대담을 이어간 후 마지막에 덮기까지


나카무라 쓰네코와의 편안한 대화를 통해 나이 듦의 철학을 들려주는 북폴리오 에세이이다.



100세 시대라 일컫는 요즘은 단순히 삶과 죽음을 운영하는 것에서 나아가


남아 있는 미래가 긴데서 오는 불안을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또 하나의 관건이 된 것 같다.


아무런 계획과 설계없이 긴 노후를 마냥 떠안을 것인가,


아니면 자연스럽게 나이 드는 방법과 노년에 대처하는 자세를 설정할 것인가.


답은 너무나 뻔하다.


54세의 오쿠다가 92세의 나카무라 선생님에게 독자를 대신해서


나이 듦에 대해 묻고 선생님의 무겁지 않으면서도 편안한 답을 통해


중장년층의 노년에 대한 고민을 정리해보는 시간으로 삼아도 좋을만한 책이다.


더불어 세상에 흩어져 있는 노화에 대한 다양한 정보나 여러 의견들을


간명하게 정리한 칼럼까지 독자에게 유익하게 스며들 내용들이 담겨 있다.


미술 전시회 관람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곳곳에 편안한 그림들이 숨어 있는 이 구성, 개인적으로 참 맘에 든다.


나이 듦에 대한 불안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행복에 대한 만족도는 크기보다는 횟수에서 좌우된다고 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고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을 헤아리다 보면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신체의 부자유, 욕망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날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물론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라서 다소 겉도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래도 인간에게는 경험치가 주는 성숙도가 매우 결정적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부터 노년의 삶을 준비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걸 다행이라고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노화의 시간은 그들이 적응할 수 있는 만큼의 속도로 흘러가기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나이 듦에 익숙해지기도 한다.


한편 참으로 무섭기도 하고.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차가 명백하게 존재한다.



두 정신과 전문의의 대담 중에서 유의미하게 다가온 이야기들은 이런 것들이다.


보통 사회는 20대부터 50대까지 중심이 되어 돌아가고


60대부터는 곁에서 도와주는 역할이 되어 일반적으로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어 있다.


주연에서 조연으로 밀리는 것이 한편 서운할 수는 있으나


달리 생각하면 책임이나 압박에서 자유로워 지는 거라고도 볼 수 있다.


이쯤에서 정신승리하자는 거냐고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본질은 나 자신을 옭아매던 욕심에서 점점 자유로워지자는 것이다.


'젊음' 이라는 키워드, 젊은이들의 방식을 선호하고


그것이 마치 사회의 기준이 되어버린 분위기때문에 어려운 미션일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젊음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지자는 것이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생각은 리즈시절 그대로인데 몸과 건강은 이미 세월을 정통으로 맞아


그 간극에서 혼란스러울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기 때문에.


너무나 바쁘게 살다가 이제 조금 여유를 찾게 되는 나이가 되어


평화롭고 변화가 없는 단조로운 삶이 되어도


그 나름대로 불안한 건 마찬가지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인생은 어차피 고통의 연속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쇼펜하우어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삶의 질은 달라질 수 있다고도 했다.)


지나치게 여유가 있는 것도 불필요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그럴 땐 우선 불안의 뿌리를 찾는 것 또한 중요하다.


다음으로는 낮에는 몸을 바쁘게 움직이고 일하다가


밤에는 아무 생각없이 푹 자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최고라고.^^


사실 이건 노년에게만 국한된 팁은 아닌 듯.


너무나 기본이지만 불안 없이 노년을 맞이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방법으로


하루 7시간의 충분한 수면과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하는 것을 추천하고 있다.


여기에 추가로 가부좌를 하고 코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하는


비파사나 명상이나 마음챙김 명상까지 현실적인 조언들도 놓치지 않았다.


사실 어떤 인생도 완벽하지 않고, 모두 불완전하다.


어띠까지나 내가 결정해서 내 삶을 꾸려가기에 달려있다.


에세이 <나이 듦을 받아들일 때 얻는 것들> 의 후반부에 가서는


안락사나 존엄사에 대해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연명치료가 여전히 이슈가 되고 있다는 것이 글을 통해 감지되기도 했다.


일본의 의료는 현재 연명지상주의이기 때문에


가족이 연명치료를 원하면 아무리 90세에 가까운 노인일지라도


인공호흡기를 달아야 하는 게 현실이다.


의사 또한 이 지점에서 임의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생애 말기에 꼭 챙겨야 하는 것은


가족에게 확실하게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다.


의료 선택에 대해서 사전에 스스로 자기 의사를 표명하는 존엄사 선언서를 남겨두는 것을 말한다.


연명치료에 대해 당연히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고


가족들에게도 경제적, 정신적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 되기 때문에


여러모로 이를 미리 준비해두는 것은 권장할만한 일일 것이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에 미리 준비해두지 않았을 경우


닥칠 혼란에서 당사자는 더이상 자기결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존엄사 선언서를 마련해두는 일이 물론 현실적으로 녹록지 않은 면도 있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보니


가족간에 연명치료에 대해서 드러내고 이야기하는 것이 껄끄러운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차치하고 이 사안은 나의 삶을 내가 결정하는 일의 중요성과


주체적으로 결정할 때 내 삶의 만족도도 높아진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논의가 될 것이다.


그저 '누워있는'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을 존엄한 죽음이라 말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생명 연장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상태에서 인공영양, 정맥영양으로


죽음을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시기까지 늦출 수는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짚고 싶은 내용은 고독사에 관한 생각이다.


누군가에게 미움받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일본인의 국민성을


고독사에 대한 시각으로 엿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했다.


92세의 정신과 전문의 나카무라 쓰네코는 그래서 고독사를


미움받을 일을 차단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꽤 이상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듯 하다.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않은 채 혼자서 죽음을 맞이한다' 는 의미로 고독사를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이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엄마의 배속에서 나와 바로 눈을 뜨고 다리로 몸을 지탱해서 일으켜 세우는 여타 동물들과 달리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오롯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해 나간다.


생이 그러한데 인간의 죽음 또한 가족에게 어떠한 폐도 끼치지 않고 행해질 수는 없다.


죽는 순간마저 가족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고


그로 인해 미움을 받을까 염려하는 그 심정이 한편 안타깝기도 하다.


죽음 이후는 당사자가 생각할 부분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 가족의 몫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는


그들이 곤란하지 않도록, 걱정하지 않도록 인생의 끝맺음을


자신이 직접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다.



고독사를 이야기하다 보니 아들러 심리학의 일본 전도사격인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가 떠오른다.


2014년에 일본을 거쳐 국내에서까지 오랫동안 흥행을 거둔 이 책은


개인적으로 아들러 심리학에 눈을 뜨는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속내를 말하기보다는 자신을 억누르는 걸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 일본인들이지만


그 점은 한국도 못지 않아서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다고 들었다.


그러나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는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고약한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를 억지로 이어가기보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사람을 찾는 게 더 현명한 일이다.


혼자인 건 부끄러운 일이고 고독은 비참한 것이라는 이상한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자신을 몰아세우고 결국은 자기 혐오에 빠지기 쉽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남을 의식하지 말고 자기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에 대해 불안해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나의 결정을 가지고 지금 결론을 내봤자


훗날 어떻게 변할지 인간으로선 알 도리가 없다.


또한 지금의 행복도 같은 형태로 내내 지속되지 않을 것이며,


현재 괴롭더라도 그 또한 영원히 계속되지도 않는다.


"그 때는 그게 최선이었어!"


이렇게 되뇌여도 내가 선택한 결과가 좋지 않을 때도 올 것이다.


자신을 탓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럴 때는 자신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질 것을 주문하면서 동시에


혹여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지더라도 그것이 그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 자신을 믿어주면 될 일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 몸의 자유를 점점 잃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때 하고 싶은 일을 미루지 말고


많이 해둘 것을 당부하는 92세 정신과 전문의의 조언이 가슴에 박힌다.


'지금, 그리고 여기' 에 집중하며

미래를 위해 현재의 나와 나의 시간을 희생하지 않는 것!


북폴리오 에세이에서 건져낸 지혜의 한 줄이다.


일본의 두 인생 선배가 전하는 진솔한 대화 속에서


각자가 소중하게 여겼던 삶의 철학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을 잘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나이 듦을 받아들일 때 얻는 것들> 이 일깨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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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인간 - 인생을 단단하게 살아내는 25가지 지혜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강민지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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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고 보니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책을 만나는 일은

적어도 나에게는 필연이었나보다.

니체와 쇼펜하우어가 사랑하는 스페인의 17세기(1601년생) 철학자의 책이라는 소개 정도로도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데

되짚어 보니 올해 여동생의 생일선물로 내가 구입해서 보내 준 책 역시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아주 세속적인 지혜> 였다.

첫 만남은 내가 미처 어떤 인물이었는지도 모른 채 무심코 나를 스쳐 갔지만

결국은 이렇게 내 손안에 발타자르 그라시인의 교양 철학책이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나보다.

뭔가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던 것처럼 나혼자 의미부여하면서

신비로움을 지닌 채 책을 펼쳐보았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25세에 사제 서품을 받고 이미 28세부터 인문학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3년 간의 수도원 수련기를 마치고

'인간의 근본' 에 관한 삶의 지혜를 설파해온 철학자이다.

니체와 쇼펜하우어에게 영향을 준 인물인 만큼

고난과 시련이 불가피한 우리의 삶에서

의연하고 단단하게 살아낼 수 있는 인간 덕목 25가지를

<완전한 인간> 이라는 주제 아래 소개하고 있다.

낯선 책과 친해지고자 접근할 때 나의 습관들 중 하나는

제목을 두고두고 읽어보며 저자의 의도를 여러 방면으로 짐작해 보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모든 책에 자신의 의도나 메시지를 심어놓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독자 입장에서 나름 진지하고 거창하게 의미를 부여하며 읽었는데

막상 저자에게 확인해보면 '별 생각없이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맞아떨어졌다~'

뭐 이런 경우가 적지 않아서 당황스러웠던 적이 있었기에.

그간 국내 작가들과의 북토크 경험상 그랬다.^^

그런데 이런 번역본은 저자의 의도를 짐작해 보기에 앞서 원제부터 체크하고 본다.

"El Discreto"

스페인어 "El Discreto"'신중한', "입이 무거운, '빈틈없는' 이라는 뜻을 지닌다.

책 제목에서부터 다소 의역의 향기가 묻어나는 <완전한 인간> 같은 번역본은 그래서

그 원제를 확인하고 나서 읽어 보니

'완전한' 이라는 의미를 선뜻 떠올렸을 때의

'complete', 'perfect', 'flawless' 와는 결이 좀 다르게 수용된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이 교양 철학책을 열고 닫을 때 하나의 문장을 내세웠다.

"어디서든 우리는 철학을 해야 합니다."

인간은 각자 자신만의 기질과 기량을 갖고 태어나며

자신만의 능력이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다는 신념이 있다면

이 세상의 고난들에 쉽게 좌절하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자기 자신을 갉아 먹는 것은 변덕이라 칭했고

자신의 탁월한 능력을 한 번에 드러내지 않아야 하며

어떤 식으로든 박수를 받는데 급급한 허풍쟁이를 또한 경계하였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스스로 다스릴 줄 안다는 것은

사려깊은 단어를 사용하고 절제할 줄 알며 끝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완전한 인간을 신중한 인간이라고 그 의미를 전환시켜 볼 때

개인적으로 신중한 인간과 맥을 같이 하는 지혜로운 자는

저자가 소개하는 25가지 인간 덕목 중에서 '끝을 생각하는 사람' 이라고 생각한다.

유한한 인간의 본성을 더 어리석게 만드는 치명적인 요소를 욕망이라고 볼 때

인간은 스스로 최고치라 생각하는 그 순간이 영원할 거라 착각하며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지 못하고 질주한다.

그 행동이 추후에 자신에게 독이 되어 오는 것도 모른 채.

인간의 바램이 현실로써 영원할거라고 믿는 이 어리석음과

인간끼리 서로를 해치는 역사가 반복되는 한

인간의 타락은 불가피한 걸까 씁쓸하게 자문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제안하는 인생의 지혜를 찬찬히 짚어나가다 보면

그러한 인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위대함, 숭고함, 그리고 탁월한 면면은 여전히 빛을 잃지 않는다.

그렇기에 인간을 향한 기대와 희망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완전한 인간은 자신의 판단력이 옳고 자신의 취향이 성숙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항상 주의깊게 말하며 천천히 행동합니다.

위대한 사람은 진실과 보여지는 것을 구분합니다.

훌륭한 사람은 위선적인 것들도 모두 꿰뚫고, 눈치채고, 깨닫고, 이해하며,

자신만의 기준으로 상황을 정의합니다.

위대한 인간은 함부로 감탄하거나 함부로 깔보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평가를 이야기할 뿐입니다.

<완전한 인간> 중에서



인상깊게 여긴 덕목들 몇 가지를 풀어놓긴 했지만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말하는 '신중한 인간' 이 되는 인생의 지혜 25가지는

결국 하나로 수렴되는 듯 하다.

카이사르도 진실은 완전함이라고 여겼던 것처럼

인생을 단단하게 살아내기 위해 나아가는 완전한 인간은 곧 진실한 인간이라고.

이 교양 철학책에서 소개하는 그 25가지 덕목을 다 갖춘 사람을

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리도 만무하지만

불완전한 인간이 이 덕목들을 다 갖췄다고 해서 완전한 인간이 될 수도 없다.

그런 사람은 단언컨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본 위대한 인간이란

동시에 이 모든 덕목을 발휘할 수 있지도 않으며

여러 완벽함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한 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다고 그는 '정의'한다.

탁월한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나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제안하는 25가지 지혜 중에서

자신이 추구하고 싶은 덕목 하나 정해서 노력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운좋게 25가지 인간의 덕목 중에

내 안에서도 하나쯤은 발견할 수도 있고.^^

더불어 '나'라는 우주가 변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지.

변화하고 진화하는 것은 하나의 방향도 아니고 그 방향이 정해져 있지도 않는 것.

(요즘 다윈주의에 빠져있는 관계로...^^;)

그저 성장하든 퇴보하든 항상 변화를 거듭할 수밖에 없는 인생에서

자신이 주인이 되는 나아감을 추구함으로써 성숙해지는 일.

이것으로부터 완전한 인간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성숙한 인간과 진실한 인간의 상이 내 안에서 겹쳐지는 듯 하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완전한 인간> 은 이렇게 내 안에 이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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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상인가 - 평균에 대한 집착이 낳은 오류와 차별들
사라 채니 지음, 이혜경 옮김 / 와이즈베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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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각 집단마다 추구하는 이익과 가치관이 있다.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이 자동 승격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거대한 사회를 상대로 한낱 개인이 저항해야 하는 순간에

공동체의 연대를 발휘하는 이들도 있다.

인간의 본질 중에 본질인 존엄함은 계급이나 인종, 성별과 관계없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간 인간의 역사에는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적인 범주에 의해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측정하고 표준화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다.

누가 누구를 정상인지 아닌지 정의할 수 있는가!

'적절하다, 평균이다, 정상이다, 표준이다' 라는 개념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왔으며 누가 설계했는가?

자신의 성장과정 속에서 정상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문을 가져왔던 사라 채니가 <나는 정상인가> 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의학과 감정의 역사에 관한 연구를 통해 저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정상인지 아닌지 걱정하고

내가 정상인의 범주에 속하는지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도대체 정상이라는 관념이 뭐길래???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태초에 정해져 내려오는 것도 아닌

'정상성' 개념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걸까.

사라 채니는 정상성이란 기준은 통계학의 급속한 발전을 계기로

다양한 학문들이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과학적 관행 속에서 광범위하게 뿌리내리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 역사는 겨우 200년 밖에 되지 않음에도

오늘날 우리의 법률, 사회구조, 건강과 정상성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즉, 정상성 관념은 자연 법칙이 아니라 지난 수 세기 동안

인간 세상에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설계된 것이며

서구의 기준에서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개인의 방식에 반한다면

모든 공동체를 서슴없이 타자화한다고 경고한다.

표준, 평균, 기준, 정상의 개념이 생겨나게 된 배경부터

인간의 몸과 마음, 성생활, 감정, 자녀, 사회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에 교묘히 파고든 정상성의 민낯을 파헤친다.

저자가 개인적으로 겪었던 인생 경험들 속에서

평균에 집착해온 인간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이것은 비단 저자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정상의 범주에 속했을 때 안정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평균과 달라 보이고 싶은 욕망 또한 내재되어 있다.

또는 평균이나 기준에 속하지 않으면 마치 내가 비정상인 것 같아 불안감을 느끼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더 바람직해 보이는 쪽에 줄을 서고

나만 아니면 된다는 자기중심적인 못된 심리가 작용하면

다른 집단들을 주변화하는 경향까지 보인다.

인간의 지난 역사 중에서 미국 연방정부가 기숙학교 제도를 도입해 부족 문화를 뿌리 뽑아

원주민을 적응시키고 동화시키는 정책을 펼쳤던 것만 봐도 그러하다.

미의 보편적 기준은 이것이다~ 라고 떠들어 대지만

그런 기준을 정하라고 어느 누가 자격을 부여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당연히 정상에 대한 보편적 기준도 있을 수가 없다.

결국 인간 세상은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하고 지배되는 형국에서

결정권은 바로 서구의 남성 연구자들이 부유한 서구 백인 남성을 중심으로 삼았고

모든 기준이 이를 바탕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을 들춰 냈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사회적 사다리 맨 꼭대기에 자신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고 믿었고 그 시스템을 강화시켜온 과정들이

평균에 대한 집착을 낳았고 연쇄반응이 일어나 약자를 차별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계급, 인종, 젠더, 종교적 신념이라는 기준과 함께 작동해온 정상성은

1801년 이탈리아의 천문학자에 의해 궤도의 평균치를 산출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정상성 개념이 대두되었던 초창기에 '평균' 이라는 의미는

현대인들의 인식과 다르게 '완벽' 을 의미했었다.

상식적으로 평균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규모의 표준이 필요하다.

완벽함을 추구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평균을 추구하기에 몰두했고

그 기준은 단연 부유한 서구의 백인 남성 엘리트를 기초로 과학적 표준을 만들어 왔다.

저자의 표현을 정확히 빌리자면 그 표준은 바로...

 

 

 

백인 남성이자 건강​한 신체를 지닌 중간계급

성별과 성 정체성이 일치하는 이성애자인 것이다.

 

 

 

이러한 기준은 질병에 있어서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1990년까지는 약물 실험 대상이 남성인 경우가 흔했다.

질병은 남성과 여성, 그리고 피부색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을 간과하였다.

호르몬 수치 변동이 적은 남성이 비용도 적게 들고 여러모로 편한 실험 대상이기 때문에

의약품과 치료법들을 남성에 맞추다 보니

여성들에게는 늘 적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사례를 소개하면서 모집단 설정을 잘못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렇게 표준을 정하고 보니 이 범주에 속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부적합자가 되는 것이고

부적합자는 바로 노동계급이나 유색인 등 자신과는 다른 집단으로 규정하며

곧바로 배제하는 수순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표준화 과정이 결코 소수의 일탈적 주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구 과학계와 의학계에서는

우생학이 이미 주류를 형성하던 시기였고

세계 곳곳에서 타자라 여겨진 이들을 파괴했던 교묘하고도 섬뜩한 역사가 있다.

우생학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늘 호기심이 있었기에

관련된 내용들을 읽는 동안에 나의 집중력은 탑이었다는 것.^^

찰스 다윈과 띠동갑 정도 차이 나는 사촌 동생 프랜시스 골턴이

아이러니하게도 '우생학' 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는 건 워낙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다.

자신이나 그의 부유한 친구들 같은 적합자에게는 더 많은 자녀를 낳도록 독려하고,

반대로 부적합자에게는 자녀를 덜 낳게 하거나 심지어 상황에 따라서는

특정인에게 아예 출산을 금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국가 자원을 개선하는 역할을 한다는 명분으로 우생학을 공고히 했던 과학자였다.

더 놀라운 것은 우생학을 지지했던 명단에 헬렌 켈러와

카네기, 록펠러 등 자산가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노동자들이 인종 과학에 있어서 적합자이길 바라는 그 마음은

뭐 이해하기 어렵진 않지만 절대로 공감할 수는 없는 일!

골턴이 살았던 시대에는 과학이 정상화의 핵심수단으로 작용했고

당시 위계적이고 규범적인 관념이 백인이자 남성을 정상이라고 규정한 것이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우생학적 선동에 영감을 받았던 또 다른 인물은 바로 나치의 히틀러.

그래서 그가 통치할 당시 독일 식민지 전역에서 서로 다른 인종의 결혼을 금지시키기도 했었다.

이는 반유대주의를 강화하는 분위기로 흘러가기도 했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비정상이라고 판정하고 그 존엄함을 멋대로 제한하는 이 어이없는 오류를 보면서

우생학이 부여한 정상성 개념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얼마나 위험한 권력이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생학 연구의 가장 악의적인 대목은 적합자의 범주로

백인 남성이자 엘리트로 정한 후에 인간이 만든 이상에 맞추기 위해

인류를 고의적으로 변형시킬 수도 있다는 섬뜩함에 있다.

이것이 현재의 인종차별주의, 장애인 차별주의, 호모포비아, 트랜스포비아로

흘러들어와 세상의 차별들을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이다.

우생학에서 만든 인간의 이상을 현재로 가져와보면 대략 이런 것이 아닐까.

'정상체중' 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저 평범한 것보다는

어떤 이상적인 것을 떠올리는 게 더 쉬워지는 메커니즘에 이미 길들여져 버렸다.

자본주의 원리가 팽배해지면서 정상 여부나 기준을 판단하는 중심에는

개인의 안녕이나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성과로 귀결된다.

어느 것 하나 인간 중심적이거나 인간친화적인 것이 없다.

이럴 거면서 왜 인간은 그리도 표준이나 평균을 정하려고 하는 것인가.

 

 

이미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정신과 의사들은

정상성이 사회적 관습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 경계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전문가의 횡포를 가동하여

관습을 따르라고만 권고했을 뿐이다.

당시 취약계층이나 미혼여성, 흑인, 노인, 성소수자 등등 사회의 주변인들은

저항할 힘조차 없기 때문에 가장자리에서 근근히 살아가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정상' 을 부여한 이들은 '비정상' 들에게

폭력을 일삼고, 차별하며 그들끼리 혐오하게 만든 역사가 씁쓸하다.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들을 돌아보게 해준 <나는 정상인가> 덕분에

사회의 불평등이 유래한 또 다른 갈래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평균'이 정상이라는 것은 오해일 뿐임을 자각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인류에게 주어진 이 문제를 해결해나갈 동력이 절실해지는 시점이다.

차별을 정당화하는데 정상성을 사용했던 집단의 교묘한 술수를

이제라도 직시하고 견제해야 한다.

그들의 술수가 교묘하다는 건 달리 말하면 정상성이 허구적인 관념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근대 서구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허구적인 신념체계였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인간 문명에 침투해 있으니

왜곡된 기대치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문제의식부터 심고 보자.

기어코 평균에 속하려는 나를 진단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나는 정상인가..."

이 질문이 과연 물어볼만한 가치는 있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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