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미래 (특별 보급판) -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쓴 시민을 위한 대중 교양서 노무현 대통령의 진보의 미래
노무현 지음 / 동녘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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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은 도서이다. 나는 진보적인 사상이 강한 분에게 이 책을 추천드린다.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고백하기에 노동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다고 한다. 문재인 정권에 이르러 문재인 정부에 불만을 느낄 진보 내지 노동운동가분들이 많을 것이라 본다. 그런분들에게 이책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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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5-24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무현, 문재인이 오른편 자유한국당보단 진보지만 진정한 왼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어려운 여건에서도 잘 하고 있는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8-05-24 22:35   좋아요 1 | URL
사실 저도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고, 금전적으로 안정적일 때 노무현 재단에 후원했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을 읽는 처지에 노동자의 슬픔을 어찌 모를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지금 이순간을 하나의 전환기라고 봅니다. 자본론을 읽어도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로 이향되는 것은 자본주의가 완벽한 조건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비에트 러시아의 실패는 그런 자본주의적 조건 즉 물질적 토대가 되지 않아 실패했습니다. 노무현이란 존재는 즉 전과정적인 존재라고 봅니다. 다들 목적지를 원하지만 그 과정을 싫어합니다.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2018-05-24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4 2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5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5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본론 공부 - 김수행 교수가 들려주는 자본 이야기
김수행 지음 / 돌베개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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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행 교수가 작고하신지 3년이 다 되어 간다. 한국 경제학과 학문에서 그 분이 보여준 업적은 정말 탁월하다. 특히 고전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자유주의 경제학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모두 알려주신 학자이니 일반 경제학자와 비교하여 그 기여도가 상당히 높지 않을 수가 없다. 김수행 교수님은 경제학을 전공했고, 영어 원문을 토대로 <국부론>을 번역하고, <자본론>은 독일어 원문이 아닌 영문 중역본으로 한국에 제시했다. 한국 마르크스 연구자로 <자본론>을 번역한 곳은 비봉출판사와 도서출판 길이란 곳이다. 비봉출판사는 김수행 교수님의 서적을 주로 출간한 곳이고, 도서출판 길은 강신준 교수님이 번역하여 출판한 곳이다.

 

한국의 <자본론>은 출판사 2곳에서 점유하고 있다. <공산당 선언> 정도는 많은 서적업체에서 발간하나, 유독 <자본론>2곳에서 서로 대조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페이스북에서 임승수 작가의 글을 봤다. 이분도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운동가이고, 그는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을 토대로 글을 썼다. 그가 적은 페이스북 글이 생각난 이유는 최근 진보언론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진보언론사나 보수언론사는 모두 엘리트직종이 많다. 엘리트의 이름이 문제가 아니라 엘리트로서 보여준 행동들이 일반 서민 내지 대중과 부합되지 않는다.

 

보수언론은 대중을 겨냥하여 프로파간다를 내세우는 엔터테인먼트 계열이고, 진보언론은 대중을 선동하기보단 계몽하려 드는 선민의식이 너무 강하다. 노 키드 존과 관련하여 보수와 진보는 서로 가게를 중시하거나 기혼여성의 권리를 중시하는 답 없는 게임을 했다. 하지만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 공부>에서 이미 그분은 알고 있었다. 진보라는 분들이 <자본론 공부>라는 간단히 정리한 이 책을 읽었다면 생각이 다르게 흘러갈 것이다. 최근 부동산 가격이 증가하고, 시장위축으로 인해 대부분 사람들이 부동산 시장으로 몰린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 주변 다른 건물의 가격이 오른다. 문제는 주로 투기대상이 되는 아파트라도 아파트 단지 인근에 위치한 상가건물,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나가면 위치한 번화가 역시 투기의 열기에 의해 임대료가 마구 올라간다. 2년 임대한 가게주인이 수입이 2배가 오르면 임대의 가격은 그 2배가 아니라 그 이상이 된다. 잘 되는 가게 원래 계약자를 내보내고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를 세운다. 이미 그 건물의 식당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또 다시 찾아올 확률이 높다. 높은 가게세로 문을 닫거나 가게를 옮기는 부류가 많다.

 

지방도시 중하위층들이 많이 밀집한 주거지에서 가건물로 된 점포 한달 임대료가 70만원이 이른다고 들었다. 만일 아파트가 몰린 대규모 상가건물이라면 점포세가 수 백만원에 이르고, 고기 집은 천 만원 이상 호가하는 경우가 많다. 임금이 올라 아르바이트생을 해고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사장이 혼자 열심히 일해도 돈이 잘 벌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임대료의 고공행진이다. 편의점 한 달 임대료가 500만원이고, 아르바이트생 파트타임 고용은 100만원이라고 하자, 만일 임대료가 20% 오른 것과 이번에 최저임금 20%가 오른다. 아르바이트생은 2명을 이용한다.

 

임대료는 100만원이 오르고, 아르바이트생에 대한 월급은 40만원이 오른다. 사장은 수익에 빟해 지출이 많아 결국 아르바이트생 1명은 해고한다. 시간당 1100원 올라 일일 8시간 월 22 근무해도 20만원이 추가로 나간다. 임대료는 수 백만원이 나간 것은 아깝지 않고, 아르바이트생의 임금상승은 아깝다고 중소기업이 죽는다고 한다. 1달 공장 임대료는 고정비용이고, 사람들이 먹고사는 월급은 고정비용이 아니라 호혜를 베푼다고 생각한다. 임대료의 상승은 물가를 오르게 하고, 가게 점포가 스스로 물러나게 한다. 그러면서 고용노동자가 해고되고, 개인 사업가는 상가 문을 닫는다.

 

점점 갈수록 대규모 자본의 상점이 몸을 키우고, 개인사업자들의 자리가 없어지고, 이들 역시 고용노동자로 편입된다. 계속 되는 반복적인 오류에 경제는 어렵다. 물건을 생산하면 소비를 해야 한다. 소비를 하려면 경제적 여건, 즉 생계수단의 확립이 필요하다. 현재로 생계수단이 확립되지 않으면 누가 다른 사람의 상품을 살 것인가? 친구가 옻나무 액을 파는 일을 하다 접었다. 처음에 옻나무 액을 사는 부류는 적당히 먹고사는 중산층이다. 하지만 경기가 나쁘게 되니 옻나무 액을 팔리지 않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경제가 돌기 위해서는 생필품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필품에서 조금 더 나아가 약간의 여유를 소비할 수 있을 때 돌아간다.

 

휴일을 늘려도 사람들은 집에만 있는 이유는 생필품도 비싸지만, 여행경비는 더욱 비싸기 때문이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물가와 더불어 임금의 격차이다. 임금이 혼자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라면 가족부양이 어렵다. 최근 결혼문제와 관련하여 비혼자들이 늘어가는 추세이다. 자유주의적 발상도 있지만,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물질적 토대가 결국 사회적 시스템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결혼을 위해서 집이 필요하나, 집값이 너무 비싸서 통상임금으로 도저히 청년들이 자기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없는 것이다.

 

집을 사기 위해서 대출을 해야 하나, 대출도 어느 정도 수준을 지녀야 가능하다. 물가의 상승에 비해 임금은 전혀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경기는 어렵고 최저임금에 대해 부정적으로 본다. 경제는 잘 안 돌아가고, 부동산 시장은 여기저기 몰리나, 실제 혜택을 받는 사람보다 아닌 사람들에게 그 혜택이 가고 있다. 하지만 이에 반해 대기업은 해마다 수익이 계속 증가하고, 거기에 더해 프렌차이즈 시장까지 점유하여 동네가게들을 모조리 문 닫게 만든다. 그러나 막상 고용하는 인력은 정규직보단 비정규직, 비정규직보단 인턴 내지 아르바이트생들을 추구한다. 임금의 가치가 낮을 뿐만 아니라 쉽게 해고될 수 있는 이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어떻게든 지켜야 하니 필요이상의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는 것이다.

 

취업시장에서 늘 고용자들은 불안해야 한다. 서로 경쟁을 하고, 불리한 일을 마다하지 않으면 계약조건이 고용주에게 유리해야 한다. 자본주의시장사회라면 계약조건의 그 목적은 이윤의 추가 창출과 임금의 추가 저감이다. 지금 언론과 여론이 참 한심한 수준인 이유가 청년실업과 결혼문제를 운운해도 그 모든 문제의 시작점은 임금과 고용의 관계인데, 그 문제를 사회적 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려 하는 것이다. 정말 그 개인이 공부도 안 하고, 아무 준비 없이 취업노선에 뛰어든다면 개인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대학4년은 기본이고 토익에 자격증 심지어 어학연수도 다녀와도 쉽게 자리를 찾을 수 없다. 물론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 경쟁자가 몰린 탓도 있지만, 그들의 노력에 비해 찾아오는 대가는 합리적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중소기업에 사람이 없어 문제라고 하지만, 실제 중소기업의 임금과 복지처우가 열악하기 때문이란 점도 이유다. 사실 임금문제 가지고 최저임금제를 부정적으로 보는 기자들이 받는 월급이 최저임금이라면 납득할 수 있지만, 그들은 그렇게 받지 않는다.

 

자본론에 대해 공부하면 사회적 시스템이 경제적, 물질적 구조에 의해 지배받고, 법과 제도는 바로 그런 기득권을 위해 체계화시킨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해고는 법적인 절차에 의해 존중받지만, 노조활동에서 비롯된 파업과 단체행동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다. 결국 가지지 못한 자들이 불리한 결과로 마무리된다. 다행히도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는 아직까지 군주정이 많았다. 프랑스는 민주정이 되다가 나폴레옹이 황제로 되고, 그가 몰락하지 부르봉왕가가 다시 집권하다 또 다시 나폴레옹3세가 집권하기도 했다. 독일이나 그 밖의 나라를 보면 왕이 없더라도 군사정권 내지 경찰세력을 지배하는 권력자들이 강력한 정치적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경제학적으로 자유가 있었지, 그것도 모두의 자유가 아니라 자본의 크기에 비례하여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현대사회는 그나마 선거제도가 어느 정도 확립되어 정부가 어느 정도 경영권자들에 대해 법적인 제재를 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쉽지 않다. 대한항공 회항사건을 두고 항공보안법으로 보면 분명 최소 1년 이상의 징역이나, 9개월 징역으로 끝난 재벌가의 모습을 보면 그 황당함을 알 수 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해결하려면 사회적 권력이 어떤 관계성에서 드러나는지 이해해야 한다.

 

자본주의 시장체계가 도입되기 전인 농업사회와 봉건시대라도 제물이 많은 영주나 또는 상인들이 많은 영향을 주변에 미쳤다. 화폐가 중심이 아닌 농산물이 중심일 때 상인은 영주에 비해 힘을 발휘하지 못하더라도 자금을 가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압력을 넣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 공납폐단이 심한 이유가 관리들의 부정도 있지만, 상인들이 중간에서 이윤을 챙기기 위한 작업도 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제대로 행정조율이 필요하나, 왕조시대나 봉건사회, 독재 및 관료주의 사회는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권력자들이 상인들과 담합하여 서로 이익을 나누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인은 국민의 투표권에 의해 결정되고, 추후 그 투표권으로 심판을 받는다. 물론 심판하는 자들이 어리석으면 더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 영주와 군주는 태어나면서 비리를 저지르게 되면 결국 반정이 따라올 수 있지만, 민주주의국가에서 국민의 투표로 선출되면 자신의 비리조차 하나의 정당성으로 부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론 공부>를 읽는다는 것은 최근 이슈화된 경제민주화가 제대로 통용되기 위해 자본주의란 과연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다. 모두 힘들다고 말하나, 왜 힘든지를 모르면 아무 것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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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참으로 여러 가지 바쁜 시기이다. 55일 어린이날을 시작하여 58일 어버이날, 515일 스승의 날, 성년의 날과 부부의 날, 하다못해 음력을 기준으로 부처님 오시는 날 역시 5월이다. 5월의 푸르고 더운 봄은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여유와 더불어 의무감을 부여하는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5월은 그렇게 아름다운 일만 존재하는 달은 아니다. 5월은 언제나 슬픈 일도 있다. 523일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한 날이 다가오고, 그 이전 518일은 광주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이 떠오르는 날이다.

 

최근 지만원 씨가 지목한 광수73호가 사실은 광주시민군이었고, 그는 평생 조용히 아픔을 숨긴 채 살아가고 싶으나, 그분의 따님이 자신의 아버지가 전혀 상관없는 북한 특수부대란 오명을 지만원 씨에게 받자, 그 가족들은 과거의 아픔을 알리기 시작했다. 5월의 즐거움과 감사함이 따르는 이상으로 슬픔은 크다. 실제 광주518 망월묘역에 가면 유가족들이 한약 한복을 입고 묘비를 닦아주고, 기념전시관을 들여다보면 피가 묻은 옷들이 여기저기 전시되어 있다. 5월이란 그런 시기이다. 모든 생명이 움을 트는 시기라면 어느 생명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꺼져가는 것을 말이다.

 

5월의 시작은 May-day, 즉 노동절이다. 한국에서 근로자의 날이나, 외국에서 노동절로 통하고, 노동절이 되면 유럽의 선진 국가들은 국경일로 휴무를 취하고, 각종 노동운동 관련 행사가 길거리에서 일어난다. 노동이란 단어를 들으면 한국에서는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본인 자신도 임금을 받고, 5일에 8시간 근무하기 바라면서 왜 그런 것인가? 사회적 통념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자신은 힘든 공사장과 공장 같은 곳이 아니라 돈도 많이 받고 쾌적한 곳에만 일하기를 바라는 심리일 것이다.

 

어린 시절, 대부분 어른들은 공장에 가면 돈도 많이 못 벌고 힘든 일만 한다고 했다. 우리 세대의 부모들은 다들 공사장과 공장에서 몸을 축 내면 일을 했고, 그렇게 몸이 망가진 채 노년을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면 가는 경우가 많다. 안전도구와 지침은 필수적으로 착용하고 지켜야 하나, 막상 현장에서 그런 일들은 잘 지켜지지 않는다. 최근 서해 쪽 고속도로 건설 중에 노동자 4명이 공사용 난간이 무너져 30m 가량 낙하했다. 그곳에 안전관리자와 공사관리책임자는 없었다. 건설노동자는 하루하루 일을 해야 임금을 받는다. 그들과 상대하면 매우 거친 인간이고, 보통의 상식으로 대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힘든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은 근무하는 중간에 막걸리와 소주를 마시며,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에도 언제나 반주이다. 담배를 마구 피며 던지지만, 사실 누구보다 인간적인 분들이다. 자신의 몸을 망가져 가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챙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분들의 마지막은 언제나 슬프다. 자신의 실수보단 안전문제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안전에 대한 관리기준은 결국 투자에 비례한다. 기업에서 수급한 공사금액에서 하도로 넘길 때 이윤을 챙기기 위해 안전관리를 소홀히 한다. 안전모와 안전화는 개인의 것을 사용해도 안전비계나 도구들 300만원 아끼려 할 때 사고로 그 수십 수백 배를 손해 보는 일이 많다.

 

그런데도 계속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사고의 확률은 전체 공사 진행과 대비하여 매우 적게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목숨보다 고귀한 게 이윤이다. 이윤의 가장 큰 조건은 빠른 시간에 해당 공정을 정리하여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전 공정이 계속 발목을 잡으면 다음 공정까지 더 많은 시간을 소요되고, 그때까지 대출이자의 상환금은 높아지고 이윤은 축소되며, 다음 계약을 착수할 시간적 여유가 줄어든다. 결국 자본의 순환을 위해 인간의 생명과 건강은 무참히 밟히는 현실이 우리 사회의 슬픔이다.

 

이런 사회적 약자에 대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보장해준 시기는 얼마 되지 않는다. 과저 노동자 몇 명이 사고로 죽어도 뉴스조차 나오지 않았다. 건설로 통한 선진한국을 이룩하기 위해 부정적인 언론을 내보서는 안 되었다. 공장에서 어린 소녀들이 열악한 환경에 병에 걸려 피를 토하고, 폐가 손상되어 차가운 방에서 외롭게 생을 접어갈 때 세상을 그녀에게 따듯한 손을 내밀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여공소녀들이 먼지가 날리는 공장 닭장에서 울어야 했다. 우리는 그런 과거를 잊고 살았다. 오늘날의 한국을 이룩한 것은 한강의 기적이 아니다.

 

한강의 둔치에서 눈물을 흘리던 어린 소녀와 강변에서 홀로 외롭게 술을 마시며 달래던 많은 노동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강은 기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라 기만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는 매우 짧다. 주권을 빼앗긴 것과 더불어 전쟁의 상흔이 아직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적으로 냉전이 지배적이었고, 자본주의 시장체계가 부흥하던 시절이다. 돈이 국가를 위해서라면 무조건 희생되던 시절, 막상 돈이 국가로 모여도 그것을 위해 일하던 사람들에겐 혜택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임금은 제자리고, 노동 강도는 더 강해졌다.

 

5월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저 행사에만 집중하지만, 5월은 저항과 혁명의 시기이다. 55일 현대철학과 경제학 그리고 문학과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친 카를 마르크스가 태어난 날이다. 200주년이 된 그의 탄생기념일이고, 그가 저술한 <자본론>이 세상에 알려진지 약 150년이 넘었다. 현대 경제학을 바라보면, 고전경제학의 시초인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어도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제시한 자본주의의 문제는 지금 보아도 큰 괴리감이 없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속에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의 삶은 겨우 조금 나아진 점이다.

 

지금 한국이나 유럽에서 만 5세의 어린 아동이 공장 엔진에서 고된 노동을 하지 않는다. 방적기계를 돌리다 이제 중학교 되는 어린 소녀가 손가락이 잘리거나, 30세 정도 청년들이 폐암이나 폐질환으로 사망하지 않는다. 이 모든 일들이 마르크스가 150년 전에 목격한 일들이다. 마르크스를 두고 사람들은 그저 사회주의 사상가 내지 공산주의 이론가 창시자 정도로 알 것이다. 주변에 어느 누가 경제학과를 나와 내가 개인적으로 <자본론>을 읽어봤냐는 말에 대부분 아직이란 대답이 많았다.

 

경제학에서 거시경제학과 미시경제학으로 구분하여 배우고, 거기에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보단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 경제노선을 더욱 선호하는 한국 경제학이다. 문제는 사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도 엄연히 노동자의 자리로 들어가는데, 신자유주의 노선을 따르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사회적 문제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만 하라고 배우고 생각해도 막상 현실의 벽은 이론적 역량과 별개의 문제이다. 신자유주의에서 경쟁의 자유라고 해도 그건 공정한 조건이지, 대기업과 정부기관의 유착관계, 법과 도덕을 초월한 경제논리에서 스미스의 <국부론>은 결코 예상하지 못한 문제였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저술한 시기는 지금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다. <자본론>을 읽으면 단순히 자본주의 문제점을 거론한 게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를 연구한 서적이다. 자본의 흐름과 유통만 아니라 자본의 시작과 탄생, 자본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역사와 정치, 더 나아가서 혁명과 사회적 헤게모니까지 이어진다. 마르크스는 기존 사회는 관념으로 통찰하는 것을 지나 물질적인 토대가 되어 움직인다고 보았다. 가령 한국에서 법을 제정하고 개정할 때 임금이나 아동정책, 그리고 교육정책을 보면 인구감소와 영아출생 그리고 결혼비율에서 조인한다.

 

물질적 토대, 즉 인구의 비는 관념적인 조건이 아니라 현실 있는 그 자체의 조건이다. 인구의 비례에 따라 시장체계는 변화하고, 정책도 바뀐다. 자본이 인구문제를 야기 시켰으니, 이제는 인구의 문제가 자본주의 체계를 위협한다. 사람들이 인구가 감소해도 오히려 기술발전이 되어 노동인력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 분명 기술발전과 과학의 진보는 인력의 감축을 유발하고, 사람의 손을 기계로 대체할 수 있다. 하지만 기계로 대체하면서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진 상품의 수보다 기계에서 찍힌 상품의 수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말은 무엇이냐? 결국 고생산성이 인력이 감축하여 노동력의 투입을 감소시켜도 그 상품에 대해 구매해야 할 대상들은 더욱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구매자들이 부족하고, 상품은 나와도 팔리지 않는다. 상품이 팔리지 않으면 기업은 이윤을 추구할 수 없고, 끝내는 기업을 접어야 한다. 인력의 감소는 경제활동에서 생산만 보는 게 아니라 소비의 대상까지 이어진다. 교육대학교 학생들이 과다선발로 인해 임용 후 대도시권 진입이 어렵다고 한다. 대도시권이 아닌 농촌과 어촌의 모든 학교의 필요교사 인원을 더해도 서울의 교사 수보다 적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수도권 초등학교 정원이 감축하고, 변두리지역은 폐교에 이른다. 폐교가 되는 순간 임용교사의 취업률은 저하되고, 결국 교육대학교 정원수는 감축된다. 학생 수가 감소되면 교육관련 업체와 학원, 각종 아동 생산품들의 소비가 감소되고, 그 아동들이 성장함에 따라 관련 생산품들의 소비 역시 감소된다. 인구의 감소, 노동력 감소로 외국인의 이민을 늘리면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한국에 정착하기 어렵고, 정착하기 위해 의식주에 많은 비용이 필요하며, 그 이상의 생산품을 소비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

 

정책의 방향에서 마르크스의 고찰과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의 연구는 거의 들어맞는다. 단지 마르크스가 부정적인 대상이 된 이유는 그의 예언이 일치하지 않았고, 제대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은 산업혁명이 이룩한 지 반 세기가 도래하던 시대다. 공장의 매연과 폐수는 강과 하늘을 덮고, 많은 하층민들은 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렸다. 주간의 공장은 어느덧 24시간 체계로 바뀌었고,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에 오던 사람들은 아침에 가서 다음날 아침에도 공장에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마르크스는 그런 이들에 대한 연민감과 그들을 착취하는 부르주아를 경멸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은 국가체계 상 위협적이었고, 그는 환대받는 학자가 아니라 주의와 감시의 대상이었다. 마르크스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박사학위까지 받은 엘리트이다. 헤겔학파 청년이던 마르크스는 관념적인 망상을 떠나 실제적 현실을 보자고 했다. 라인신문을 다니다 폐간되고, 파리와 브뤼셀로 옮기면서 그는 새로운 사상을 연구하고 전파하려 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만큼 대단한 인물이 있으니 그는 평생 마르크스의 친구이던 프리드리히 엥겔스, 마르크스의 연인이며 아내인 예나였다. 예나는 베스트팔렌 가문의 영애였다. 부유한 귀족집안 출신인 그녀가 평생 화려하고 품위 있는 귀족의 딸이 아니라 노동운동가의 아내로 살아야 했다.

 

가난과 배고픔, 질병과 추방이란 아픔에서 그녀는 마르크스와 평생을 나누었다. 영화 <청년 마르크스>에서 예나는 상당히 도발적이고 정열적인 여성으로 나온다. 마르크스가 홀로 영국에 가야할 때, 그는 고민한다. 아내와 어린 딸을 나두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르크스에게 예나는 오히려 그 길을 가라고 권유한다. 위대한 혁명사상가와 혁명가는 그 자신만으로 위대해진 것이 아니다. 그 옆에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던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적인 아버지 장 자크 루소는 테레사라는 여성이 있었고, 볼셰비키 혁명을 이룩한 레닌과 트로츠키 역시 자신과 함께 한 여성이 있었다.

 

영화에서 마르크스의 열정적 삶을 그릴 때, 좌절과 시련의 시간에서 예나가 보여준 용기, 그리고 예나와 마르크스가 서로 격렬한 애정행위를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마르크스가 나오는 점, 마르크스의 삶을 조명한 점에서 상당히 이 영화는 정치적인 이념이 가득한 작품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삶에서 예나의 모습은 없을 수가 없었고, 엥겔스의 옆에도 공장에서 노동하던 여성 메리의 모습 역시 지울 수 없었다. 혁명에 대한 열정과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무모하게 대항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예나의 모습에서 영화는 지겨울 것이라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영상시간 100분이 금방 갈 정도로 영화 프레임은 갈등과 갈등 그리고 저항과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져 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마르크스가 프루동 박사와 대립하게 된 동기가 나온다. 프루동은 <빈곤의 철학>이란 서적을 내놓는다. 가난하고 소유물이 없이 평등하면 좋을 것이란 생각이다. 장 자크 루소의 사상에서 조금 틀어진 사고방식으로, 루소는 너무 가난해도 안 되고, 너무 부유해서 안 된다고 했다. 루소의 <정치경제론><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으면 마르크스의 사상가 매우 흡사한 게 많았다. 루소는 인간의 불평등이 자연적 원인이 아니라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란 것을 밝혔다. 단지 마르크스가 제시한 것처럼 그 수학적 원리를 내세우지 못했을 뿐이다. 산업혁명이 아직 제대로 태동하지 않았고, 농업과 수공업 중심이 되던 사회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착취의 개념을 시간과 노동력의 착취, 그리고 노동력과 생산수단 간의 관계, 임금과 물가 간의 관계를 연구했다. 실제 <자본론>을 읽으면 재미있는 말이 나온다. 물가가 상승하면 상품의 가격이 상승하여 자본가는 이윤을 확대하고, 물가가 하락하면 임금을 하락하거나 동결하여 지출을 감소하여 이윤을 확대할 수 있고, 또한 가격이 저하되면 상품이 박리다매하기에 이윤을 확대할 수 있다고 말이다. 어느 것이나 자본가가 손해 보는 일이 없다. 그 조건이 노동력의 착취가 계속 되는 조건 아래서 말이다.

 

영화는 마르크스가 라인신문 폐간에서 <공산당 선언>이 나오기까지의 여정을 그린다. 그가 다투던 대상은 권력을 가진 정부와 자본가만이 아니다.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하던 이들이었다. 현실을 망각한 채 형제애를 외치는 바이틀링, 현실물질 조건을 경시하던 프루동과 바쿠닌, 그 외의 많은 사회운동가 역시 다투었다. 현재 이중에서 가장 신뢰하고 높은 가치를 지닌 인물은 마르크스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승리자가 되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추구하던 사회는 영원히 올 수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생산조건이 어느 일정단계 이르면 더 이상 생산할 필요 없이 컨트롤하게 되어 노동착취가 일어나지 않을 생산단계가 목표였다.

 

러시아 소비에트의 실패는 생산조건에서 생산수단의 기술력 한계, 생산품에 대한 보급, 생산품이 사회에 끼치는 실용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소비에트가 존재해도 이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미래에는 지금과 비교하여 훨씬 더 좋은 생산품과 뛰어난 과학기술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이런 생산품을 대중에게 보급하기 좋은 수단은 자본주의 경제구조밖에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 구조에서 대부분 시민인 노동자를 희생하지 않고, 더 나은 방향으로 삶을 보장하게 만드는 것이 마르크스가 남긴 업적이다.

 

마르크스와 많은 사상가들이 활동하면서 유럽의 19세기는 혁명의 시대를 만들었고, 유럽은 혼란의 시기를 보냈다. 어느 누구는 마르크스에 의해 일어난 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나, 다르게 생각하면 마르크스의 사상이 없이 계속 고된 노동을 많은 시민들을 괴롭혔다면 그들의 죽음 역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영화의 제작진이 프랑스계열이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대화는 독일어로, 마르크스가 유럽을 망명할 때 프랑스어로, 마지막으로 생을 마친 영국에서 영어로 대화한다.

 

하지만 영화제작진들이 프랑스이기에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간한 <공산당 선언>이 등장한 후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을 보여주며 마친다. 혁명은 참으로 달콤하면서 위협적인 단어이다. 실상 19세기는 유럽만이 아니라 남미에서 일어난다. 혁명이 있었기에 근대가 있었고, 근대가 있었기에 현대가 있다. 현대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권이다. 인권은 국가에 의해 생명과 재산이 보호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결합한 적에서 기업에서 노동자의 생명과 재산은 보호되는 게 아니고, 그저 관리되는 것이다.

 

노동자의 생명이 산업재해로 잃으면 막대한 벌금과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고, 때에 따라서 영업시설을 며칠 간 정지해야 한다. 운이 없을 경우 언론에 노출되어 기업이미지 훼손으로 영업 손해를 보기도 한다. 노동자의 재산은 오직 자신의 신체밖에 없다. 신체가 손상당하는 재해현장에서 기업은 그저 약간의 보상비와 노동관리청에 부과하는 세금만 더 납부할 뿐이다. 그나마 제대로 신고하면 모르지만, 산업재해가 발생되면 산업재해보험금을 더 납부해야 하기에 일반 진료로 돌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비정상적이고 무책임한 일이 있기에 마르크스의 사상이 소비에트 붕괴와 함께 사라졌다고 믿은 20세기 말의 사고방식은 틀렸다.

 

21세기 역시 인간이 소외와 착취는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더 교묘하게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고 있었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은 자연을 착취의 대상물로 삼아 정복하기 시작했고, 그 정복이 끝이 나면 마지막에 인간은 인간을 착취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대해 많은 이들은 그 결과의 고통만 알지 그 과정의 흐름을 알지 못한다. 영화 <청년 마르크스>에서 마르크스는 그 과정을 찾아가며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가 마르크스의 삶을 알고 사상을 알아도 당장은 사회를 변혁하기 어렵다. 하지만 조금씩 변화하며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 모두 고민하고 생각해야 한다.

 

나의 삶도 중요하지만, 미래의 후손에게 더 나은 삶을 물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미래가 더 이상 의미 없다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삶을 위해 우리는 투쟁을 한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평생 사회적 약자 극빈층 노동자를 위해 살았다. 우리는 마르크스와 같이 살아갈 수 없고 살아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가 말한 인간의 가치와 삶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청년 마르크스>를 본다면 그가 위대한 사상가 이전에 한 여인을 사랑하고, 늘 현실에서 방황하고 좌절했던 청년이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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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 되었다. 나는 그것을 생각조차 못하고, 그냥 가만히 잊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조짐을 조금 이상하게 다가온 것은 429일이었다. 나는 2018428일 토요일 생애 처음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마치고 짐을 정리한 후 인천공항 인근에 있는 호텔에서 1박을 한 후 29일 낮 비행기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거기서 하루를 쉬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우연히 공항인근에 위치한 마트로 갔다. 공항과 지하철역과 인접한 마트라서 그래 큰 규모는 아니지만, 신문을 팔았는데, 거기서 우연히 재미있는 그림을 보았다. 카를 마르크스의 사진을 인쇄물로 나온 신문기사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430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중앙역에서 파리 동역에 가는 고속열차를 타고 난생 처음으로 프랑스로 가보았다. 평소 내가 마르크스의 책을 이래저래 읽었지만, 대부분 내가 읽는 철학, 문학, 인류학 등 관련도서들은 주로 프랑스학자의 책이었다. 가령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야생의 사고>, 루이 알튀세르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철학에 관하여>, <재생산에 관하여> 등의 서적을 읽었다. 물론 독일과 미국, 영국의 학자의 책을 읽은 것은 아니나, 20세기에 등장한 학자 중에 대부분 주류는 프랑스였다.

 

프랑스학자의 책을 읽으면 프랑스가 어떤 곳인지 대충 이해가 간다. 100% 좋다고 할 수 없지만, 한국과 다른 문화적 범위, 문화적 수용, 그리고 오랜 문화역사의 토대가 남아있다. 개인적으로 파리대학교와 파리고등사범학교를 가고 싶었다. 특히 파리 파리고등사범학교 주변을 가고 싶었다. 알튀세르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그의 자서전인 책을 읽으면서 그가 머문 파리고등사범학교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원래 알튀세르는 가톨릭 신앙을 믿는 집안이었으나, 추후 마르크스주의로 돌아선다.

 

그의 마르크스주의는 네오-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알튀세르적 마르크스주의로 변환되나. 마르크스의 학문의 영향이 얼마나 크게 끼쳤으면 프랑스 8대학과 10대학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관련 학문이 강하다. 그런 파리에 갔는데, 그런 대학교 가지 못한 것이 다소 아쉽다. 물론 파리에 가니 그런 이유를 잘 알 것 같았다. 에펠탑 앞 하천 건너 위치한 에밀 졸라 거리에 우리의 숙소가 있었다. 그 숙소에서 실제 에펠탑까지 걸어가는 시간은 20~30분 내외였다. 그 곳을 처음 방문을 430, 길을 찾기 어렵고, 스마트폰 인터넷을 신청하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지만, 결국 찾아 갔다.

 

문제는 다음날, 51, 바로 메이데이, 또는 인터내셔널을 기념하는 노동자의 날이었다. 한국은 근로자이나, 외국은 노동자였다. 하다못해 프랑스 파리에 가장 많은 마켓인 Mono prix 마저 가게를 열지 않았다. 참 곤란했다. 호텔에서 조식을 신청하지 않더라도 중식과 석식이 문제였다. 우리가 노동절 전후로 파리에 갔으니 상점이 문을 닫고, 루브리박물관이 문 닫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참 아쉬웠다. 파리에 가는 것이 쉽지 않으나, 그날이 그런 날이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하지만 나는 기분이 나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날이 노동자의 날이고, 한국에서 비교할 수 없는 노동자의 인권에 대한 존엄성을 찾았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52일 오르쉐박물관에서 19세기 그림을 보았다. 그때 우연히 파리코뮌에 대한 그림을 보았다, 1871년 일어난 그 학살의 비극, 보통 사람들은 프랑스혁명에 대해 깊이 모를 것이다. 사실 1789년 바스티유의 프랑스대혁명은 귀족과 왕족의 죽음을 알지만, 일반 파리시민의 비극은 모른다. 파리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운동에서 파리의 자유와 평등 거저 얻은 것도 아니다. 심지어 프랑스 지식인은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인들은 처벌하더라도 알제리에 대한 식민지정책에 불만을 표출했다.

 

프랑스를 알려면 이런 역사를 알아야 한다. 문화예술은 바로 이런 역사적 현실에서 나오고, 그 조건을 이해하지 못하면 전후맥락을 잃기 때문이다. 그리고 53일 하이델베르크에 가고, 54일 프랑크푸르트로 향했다. 55일 우리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괴테하우스를 찾아 다. 길 기가 어려워 잠시 인터넷 와이파이가 되는 카페에 갔다. 그때 우연히 독일 신문을 봤는데, 자주 본 얼굴 하나가 나왔다. 머리 모양이 다르나, 분명 카를 마르크스이었다. 55일은 한국에서 어린이날이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카를 마르크스의 탄생일이이다.

 

올해 2018년은 마르크스가 세상에 나온 지 200년이 되는 날이다. 그가 이룩한 업적을 생각하면 51일 파리가 너무 인상 깊다. 길거리에 문을 닫은 상가, 길거리에서 시위하는 파리시민, 마르크스의 존재는 이렇게 현대인의 가슴에 살아있는 것이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귀환한 날은 56,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6시 반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내리니 낮 12시였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과 택시를 타고 신혼집에 오니 저녁 8시였다.

 

다음날 57, 그날은 어린이날 대체휴일이란 추모공원 봉안당에 모셔진 아버지에게 찾아가 성묘를 했다. 성묘가 마치고, 내 차에 엄마와 아내를 잠시 두고, 내 친구의 유해가 묻은 수목장 공간에 갔다. 친구가 이제 세상을 떠난 지가 3년이 다 되어 간다. 사람의 감각은 참으로 무섭다. 내 손에 아직 친구의 관을 잡고 병원 장례식장과 화장터 입구까지 운구한 느낌이 아직도 살아있다. 마르크스의 탄생과 노동절 그리고 친구의 묘비와 아버지의 봉안당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왜 우린 아직도 이렇게 가슴을 펴지 못하고 계속 울분을 감추어야 하냐고 말이다.

 

친구 여동생에게 1월 문자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친구가 분명 안전사고 산업재해로 세상을 떠났지만, 회사는 친구가 약을 먹는다는 이유로 다른 식으로 접근하려 했다. 재판이 2년이 훨씨 넘어도 계속 진행되고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 결혼식 때 친구의 여동생이 축의금을 주었다. 겉으로 미소를 띠고 있지만, 마음으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2018년 신년 대학동기들이랑 연락하여 죽은 친구의 부모님에게 인사가고 싶다고 했지만, 친구의 어머니는 우리를 보면 그 친구의 얼굴이 너무 생각나서 우리보고 오지 말아 달라 했다.

 

이게 노동자의 현실이고, 그 노동자의 가족이 처한 현실이다. 신문기사를 보면 노동자의 기사가 올라온다. 그들의 현실은 너무 딱하다 불쌍하다. 진보언론이 겨우 그들을 다루주고 있지만, 이상한 나라의 페미니즘이 있어서 짜증난다. 이상한 나라의 페미니즘은 노동자를 깔보고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산업재해로 친구를 잃고 가족이 크게 다친 것을 본 입장에서 상처를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노동자가 있기에 우리는 하루를 편하게 생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혼여행은 힘들지만 즐겁지만, 그곳에 본 내 경험에서 한국의 현실은 그저 암울한 비극일 뿐이다.

 

진보언론과 지식은 정권이 교체 되어도 당장 노동자의 앞날은 나아진 게 없다 한다. 물론 사실이다. 하지만 퇴보된 것도 아니다. 나도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겪었기에 그 마음을 알지만, 당장 해결될 수 없는 것은 안다. 하나하나씩 실오라기를 풀어나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소비에트 붕괴 시 마르크스의 죽음이름으로 끝날지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예언은 맞지 않아도, 마르크스의 분석은 틀리지 않았다. 그가 태어난 지 200주년 그의 꿈은 그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난 게 아니다. 그가 항상 마음에 두고 있던 자들이 세상에서 계속 고통 받는 한, 마르크스의 이름은 영원히 우리의 기억에서 돌고 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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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5-23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화애니비평님 늦게나마 결혼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신혼 생활 보내세요!

만화애니비평 2018-05-23 21:58   좋아요 1 | URL
아하하 와이프에게 충성해야 결혼이 편하다는 그 진실이 차츰 깨닫게 됩니다..ㅎㅎ

2018-05-23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4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8-05-23 2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만애비님 결혼 축하드립니다!!
무려 신혼여행에다 마르크스와 알튀세르를 엮어내시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8-05-24 09:09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마르크스가 엥겔스와 함께 대화했던 그 카페에 가다보니 그런가봅니다..ㅎㅎ

북다이제스터 2018-05-23 23: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생애 처음’ 결혼식을 축하드립니다. ㅎㅎ

만화애니비평 2018-05-24 09:10   좋아요 1 | URL
생애 처음인지라 요새 정신없이 바쁜가봅니다. 감사합니더...ㅎㅎ

짜라투스트라 2018-05-24 14: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비자가 잠시 불편해도 노동자가 편해진다면 그 사회는 노동자의 권리가 존중받는 선진 사회겠죠 그런 사회의 모습을 경험하고 오신 듯 하네요^^

만화애니비평 2018-05-24 15:01   좋아요 0 | URL
한국은 소비자나 노동자 모두 불편한 곳이죠...
외국을 가니 종업원이 직접 메뉴판을 주고, 돈을 계산할 때 오는 점에서
한국의 소비자는 노동을 대신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순신의 7년 세트 - 전7권
정찬주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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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련 드라마를 보면 대부분 고관대신과 일반 신료를 보면 표준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역사적 사료를 보면 조정대신들이 의논이나 토론할 때 방언이 많이 섞여서 잘 알아듣지 못할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언어의 존재성에서 언어란 사회적 관계성을 내포하고 있다. 사회적 관계성이란 비단 국내적 상황이 아니라 지역적 조건에도 관련이 있다. 외지에서 살아오다 이제 조정에 와서 표준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그렇게 흔한 것은 아니다. 평생 전남지역이나 부산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말투가 새삼 다름을 알게 된다.

 

물론 서울사람들이 지역에 내려가면 자신의 말은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그러나 일정 기간 지나면 어느 정도 대화는 성립된다. 그 지역의 특성, 그 지역의 사람들, 그 지역의 역사, 그 지역의 아픔까지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이순신의 7>이란 소설은 그런 작품이다. 이순신과 관련된 미디어로 제일 유명한 작품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영화 <명량>이 있다. 전자는 이순신의 일대기를 약간의 픽션을 잡어 넣어 어느 정도 재미를 보여준 드라마이라면 후자는 명량대첩의 이순신을 하나의 영웅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본 영화이다.

 

어느 것이 좋다 안 좋다 에서 생각해보면 나는 전자가 좋다고 생각했다. 이순신의 끈기와 인내심은 분명 높다. 하지만 일방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는 수하에 많은 장수를 거느린 전라좌수사 겸 수군통제사이나, 막상 회의를 진행할 때 첨사나 만호 같은 상급무관만 아니라 권관이나 주부, 하다못해 일반 수군병졸이나 격꾼까지 모아서 회의를 진행했다. 단순히 위에서 내려보내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수시로 보고를 받고 토의하여 최상의 결론에 도달하는 리더쉽이 2323승의 비결이었다.

 

그런 비결을 보자면 <명량>이란 영화에서 다소 떨어지는 감이 든다. 그나마 <불멸의 이순신>에선 사사로이 병졸 하나하나를 다독거리는 모습에서 이순신 전대의 비결이 나온다. 화살촉 하나 만드는 노인, 배에 올라 열심히 톱질을 하는 목수, 화살을 열심히 날리는 수군 궁병까지 찾아간다. 조선시대 계급사회에서 양반과 상민의 차이는 엄청난데, 거기에 수군통제사라면 당상관 중에서도 상위계급이다. 그런 높은 자리에 있는 장수가 일개 군졸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이해해주면 어느 누가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을까?

 

군대생활에서 일개 사병과 대대장의 차이는 어마하다. 이순신은 지금의 직급에서 생각하면 대대장보다 높은 해군참모총장이다. 해군참모총장이 직접 전선에 올라가 총탄이 날라 오는데도 피하지 않고 사병을 독려한다면 그 선단은 최고의 용사로 거듭날 것이다. 지금의 군대를 보면 위의 참모진은 안전한 후방에서 마치 체스나 장기 두듯이 전력을 움직인다. 그들의 지휘는 곧 사병들의 목숨 1명을 버릴 것인가? 혹은 100명을 버릴 것인가? 하는 숫자 계산놀이만 하는 셈이다.

 

<이순신의 7>을 보면 이순신이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 우리가 늘 미디어에서 보던 이순신은 표준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순신은 건천동 일원에서 어린 시절을 잠시 보내고, 청소년과 청년기는 충난 아산 외가 쪽에서 보낸다. 결혼은 보성군수 방진의 딸과 하여 전남 보성으로 내려갔기에 그가 겪은 언어적 구조는 서울 표준어보다 지방의 방언이 더욱 많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이야 서울 부산까지 거리가 KTX2시간 반, 항공기로 1시간, 자동차 4시간 이상이면 돌파한다. 그 과거시대 걸어서 한양까지 1달이고, 말을 타고 가도 2~3일은 걸린다. 교통적 편리함은 곧 왕래할 수 있는 시간길이를 척도 할 수 있고, 그 길이에 대한 시간은 타 지역에 대한 정보와 이해도까지 이어진다.

 

높으신 양반들은 표준어, 하층민들은 방언을 사용하는 점은 언어에 담긴 사회적 권력을 의미한다. 반상관계의 엄격함에서 전쟁에서 과연 그런 단합력이 나올 수 있었는가? <이순신의 7>은 임진왜란 발발 전부터 노량해전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마지막 마무리는 <이순신의 7>에 대한 후기를 적어준 홍기삼 문학평론가의 글이다. 홍기삼 동국대학교 전 총장의 글을 보면 내가 이 책을 보던 내용과 그가 봤던 부분은 차이가 난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내 감이 맞은 것이 있었다. <이순신의 7>을 작성한 정찬주 작가의 고향은 보성이다.

 

전남지역의 해안가는 부산경남과 마찬가지로 왜구들의 침입이 잦았다. 특히 1555년 을묘왜변 당시 전남 강진 일대는 큰 위기에 봉착했고, 이순신의 조력자 중 하나인 동고 이준경 선생이 지휘하던 관군은 왜구를 무찔렀다. 을묘왜변은 보통 왜구의 숫자와 규모가 달랐다. 제법 큰 군사규모를 가진 해적군단이었다. 전남지역의 앞바다에 계속 왜구가 출현하고, 임진왜란 이전에도 계속 침입하여 많은 양민과 관군들을 피살했다. 보성 역시 해안가가 옆에 있었고, 보성 좌측으로 장흥군과 강진군, 우측으로 순천시와 여수군이 위치했다.

 

이순신이 처음 부임한 곳은 전라좌도 수군영이다. 전라우도 수군영은 해남에 있었다. 전라지역이 경상지역보다 일본 대마다보다 멀기 때문에 군사들은 경상도 수군기지에 더 많았다. 장비와 재물 그리고 지원도 그렇다. 이순신이 속한 전라좌수영은 수군기지 고을도 부족하고, 인력도 부족하고, 전선도 부족했다. 1년 동안 좌수사로 활동하면서 다른 수군기지보다 더 강한 전력을 갖춘 것은 그의 능력이었다. 하지만 거북선을 축조하고, 군량미를 만드는 것은 혼자서 불가능하다. 그것을 같이 만들어나갈 인재들이 필요하고, 그들의 마음을 잘 알아줘야 했다. <이순신 7> 앞부분을 보면, 진무를 맡은 수군집안에 사람이 죽어 이순신이 조문가는 장면이 나온다.

 

좌수사가 일개 수군 병졸을 위해 조문을 가고, 거기에 필요한 장례음식과 물품을 대주는 모습이 나온다. 전쟁 중에 아군의 병력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 작전을 유리한 쪽으로 검토하며, 전투과정 중 사망한 병졸 하나하나 기록하고, 그들의 유해를 집으로 보낼 때 곡식이나 물품을 보내고 위로했다. 특히나 전몰장병을 위해 제사를 올리는 장면에서 많은 수군 장병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순신이 엄정하고 군기를 세우는 무관인 것은 분명하나, 사실 부하 장병을 아끼고, 백성을 사랑하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은 어렵다.

 

TV에서 보이는 이순신은 이상화 된 인물이지만, <이순신의 7>은 이상적인 인물보단 서민과 같이 숨을 쉬는 정겨운 모습으로 나온다. 송희립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면, 이순신은 충청도 사투리를 사용한다. 사투리는 단순히 방언으로 볼 게 아니라 문화와 역사적 공간을 이어주는 전달수단이기도 하다. 홍기삼 문학평론가가 주목한 방언의 가치, 그리고 임진왜란에서 호남이 없었다면 절대로 조선은 없었다고 하는 그 사실에 주목한다. 이 책을 읽을 때 단순히 소설 그 자체도 좋지만, 비봉출판사에서 출간한 <충무공 이순신 전서>, <이순신과 임진왜란>, <난중일기>, <징비록> 모두 같이 보면 좋다.

 

거기에 조금 추가하면 기축옥사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좋을 것이다. 명량대첩에서 이순신은 앞으로 나가지 않은 장수들에게 호통을 친다. 그 중에 제일 유명한 사람이 안위 장군이다. 안위는 거제현령으로 명량의 승리로 정3품 통정대부까지 이르고 후에 수사 자리에도 오른 장수이다. 그는 사실 벼슬을 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1589년 일어난 기축옥사에서 정여립이 안위에게 5촌 당숙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촌형제들의 아이들도 친하게 지내는데, 조선시대라면 상당히 가까운 사이다. 안위는 기축옥사 여파로 귀양 가고, 전쟁 중 풀려나 활약을 했다. 첨사 이응화 역시 기축옥사와 연루되어 귀양가다 다시 이순신의 도움으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기축옥사가 중요한 이유는 기축옥사에서 가장 많은 화를 당한 곳이 호남지역이다.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 유배올 적에 호남에서 명망 있는 사대부 집안은 3~4곳 정도라고 했다. 많은 동인 계열 선비들이 유배나 죽임을 당했고, 거북선 돌격대장 이언량은 광산이씨인데, 광산이씨 중에 이발과 이길 가족과 친지들은 선조와 정철에 의해 가장 많은 화를 당한다. 임진왜란 시기에도 동인(북인과 남인)과 서인, 관군과 의병대의 체계가 달랐고, 특히나 북인 위주의 의병, 남인위주의 관군은 전쟁 중에 많은 희생을 받았다.

 

전쟁이 종료될 때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한 세력은 남인이었다. 이순신이 서거한 날, 서애 류성룡 선생은 파직되었다. 그가 파직된 이유는 탐욕이 많고 시기심이 넘치고, 군왕을 속이고 조정을 어지럽힌 이유이다. 전쟁 중 도체찰사의 업무와 내정, 외교에서 류성룡 선생이 없었다면 이 모든 게 거품이었다. 이순신의 목숨이 선조에게 위협받을 때 정탁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정탁과 류성룡은 모두 퇴계 이황 선생 문하생이었다. 전장에서 장병들은 죽음과 배고픔에 힘겨워 하는데, 중앙관료와 선조는 권력을 유지하고 누리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만 나온다.

 

홍기삼 문학평론가는 선조를 두고 암군 중에 암군(暗君)이라 한다. 선조를 두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억지로 나쁘게 평가하지 않는다. 기축옥사와 인조반정의 특성은 동인의 제거이다. 동인을 제거한 서인의 관점에서 기축옥사는 당연한 일이고, 인조반정에서 동인이 만든 자리를 처리하는 게 제일 급선무였다. 안위 장군이 업적이 있어도, 정묘호란 때 그를 기용하지 않았다. 안위의 동인제거의 기회를 준 정여립의 5촌 조카이다. 광해군과 동인의 후예 북인을 제거한 서인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광해군의 가치를 깎으려면 선조의 입지를 올릴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 원균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아주 고약하고 나쁜 모습이다. 같은 조선인까지 잡아 죽여 머리모양을 왜군처럼 만들어 행재소로 보낸 공으로 치부하던 그 모습은 사악한 인간 중에 인간이었다. 이순신의 자리를 자기가 차지할 때 그가 한 말은 질투에 미친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수군 장병을 수장시키고, 수많은 전선을 침몰시키며, 조선의 백성들이 왜적에게 도륙당할 때, 그를 기용하고 치켜 세운 선조와 윤두수의 행적은 대한민국 역사가 끝나는 그날까지 잊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선조는 이순신과 원균의 공적으로 동급으로 취급했고, 원균의 집안에 계속 곡식을 하사하여 그의 공을 치하했다. 선조는 이순신의 업적을 끝까지 인정하기 싫어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원균의 집안에게 내려준 곡식을 금지했고,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인조와 서인들은 원균의 집안에게 곡식을 다시 내어주기 시작했다.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시점은 조선시대 후기까지 이어진다. 이순신의 사당을 명나라 장수들이 선조에게 요청했지만, 선조는 끝내 설치해주지 않았다. 홍기삼 문학평론가가 <징비록>의 글을 인용했다. 이순신의 유해가 고향 아산으로 돌아갈 때 많은 백성들이 나와 통곡하고 슬퍼했다고 말이다.

 

그 내용은 비단 백성들만 아니다. 류성룡 선생도 자신이 느낀 슬픔을 백성의 모습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때까지 우리는 이순신의 영웅주의 관점에서 칭송했지만, 인간 이순신에 대한 모습을 잘 몰랐다. <이순신의 7>에서 이순신은 아들과 조카를 똑같이 대해주고, 요절한 두 형님을 대신하여 조카의 생계와 교육, 그리고 결혼까지 챙겨준다. 남솔(濫率)이란 죄가 있다. 부임한 사또가 너무 많은 가족을 임지로 데리고 가면 그들의 부양으로 많은 백성들에게 고통이 온다. 이순신이 남솔에 대해 주변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자, 눈을 흘리면서 답변하길 돌봐줄 사람도 없는 저 어린 것들을 어떻게 내버려두고 갈 수 있냐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며 이순신의 덕을 인정했다. 그 덕분에 이순신의 조카들은 모두 임진왜란에 활약했고, 노량에서 이순신을 대신하여 군함을 지휘했다. 사람을 감동을 시키면 그 감동을 준 자가 죽어도 그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는다. 명예와 체통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지만, 그 명예에 대한 의미를 조금 더 생각하면 현대사회에서도 본 받은 점은 있다. <이순신의 7>에서 이순은 눈앞에 바다를 두고 왜적만 싸운 것이 아니다. 눈앞의 바다보다 더 깊고 거친 마음의 바다 건너편에 있는 권력자들은 이순신의 목을 언제라도 물어뜯을 기세를 보여주었다.

 

드라마에서 원균이 사망하고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될 때 비장미를 보여주지만, 책에서는 비장함을 보여주기보단 공허감으로 보여주었다. 그래도 그가 칼을 잡고 배 위에서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의 주변에 몰려든 조선의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임명사령장을 받지 않고, 그대로 병을 핑계대고 물러났다면 조선의 백성들은 모조리 도륙 났을 것이다. 조선이 망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조선의 백성이 몰살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백성들에게 희망이 있는 것이고, 삶의 목적을 부여했다. 이순신은 백성들의 삶과 희망을 주고 그렇게 세상을 떠나 우리의 바다를 지키는 바다의 신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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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5-23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주는 의미는 단순히 의사소통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5월 23일이 고 노무현 대통령 기일이라서일까요. 충무공의 모습 속에서 노 대통령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네요.

만화애니비평 2018-05-23 21:58   좋아요 1 | URL
안그래도 노짱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예전에 봉하마을에 가서 제초도 하고 그랬는데, 4~6년 전 봉하마을에서 제초기 돌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평이 아직 좋지 않았으나, 이제 재평가 받으니 마음이 참 착찹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