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영화 <강철비>를 보면서 나는 순간 놀라운 것을 보았다. 작품 내 새로운 대통령이 1권의 책을 들고 있었다. 분명 제목은 영어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저자의 이름이 어렴풋이 보였다. 저자의 이름은 브루스 커밍스 교수, 미국에서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은 사람이다. 최근에 현실문화연구 출판사에서 나온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을 읽어보았다. 책을 보면 아주 복잡다양한 한국전쟁에 대해 소개했다. 한국전쟁은 미소냉전의 이데올로기의 격돌로 이루어진 전쟁이기도 하나, 그 전쟁의 뿌리에는 깊은 원망과 증오가 숨어있었다.

 

전쟁의 역사는 단순히 타국과의 갈등이 아니라 오히려 내부에서 발현된 갈등이다. 한국전쟁은 두고 남침 내지 북침이라는 다양한 표현도 있지만, 이데올로기를 넘어 다시 생각해보면, 매우 비극적인 전쟁이다. 한국전쟁은 20세기 최고의 내전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두고 광복후에도 전쟁에서 보여준 참혹한 복수극 내지 학살은 이미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내재되어 있었다. 광복절 이후 미군정은 친일세력을 정부세력을 편입하고, 이들은 역사의 청산 대신 권력의 총을 받았다. 독립군들은 대부분 미군정보단 자치적으로 활동하거나 혹은 중국 내지 소비에트와 연계했다.

 

독립군 대부분이 대종교 신자인 점에서 민족주의자 내지 사회주의 또는 무정부주의자도 많았다. 일본 패망 전에는 미군의 입장에서 공동전선을 이끌 군세이나, 일본이 물러간 한반도에서 보자면 앞으로 신탁통치에 방해될 존재이다. 그런 갈등에서 친일의 잔재는 우리 사회에 그렇게 흘러갔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을 두고 냉전을 넘어 민족 내부에서 보여준 증오와 공포에서 학살극이 이어졌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것이다. 친일파에 대한 조선 민중의 증오, 그런 민중으로부터 공포를 느끼는 친일세력의 대립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2. 내전, 끝나지 않은 비극

친일과 군부의 정권장악, 영화 <강철비>에서 곽철우는 북에서 내려온 엄철우에게 자신의 정치철학관을 말해준다. 분단된 나라에서 살아가는 국민들은 분단으로 인한 고통보단 그 분단된 것을 이용하는 자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고 말이다. 에릭 홉스봄이란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는 19세기를 두고 혁명의 시대라 말하며, 그에 따라 넘어가면서 자본과 폭력의 시대로 연계된다. 혁명의 시기에서 18세기 말 프랑스대혁명을 필두로 유럽은 노동문제와 인권문제로 혁명이 일어나고 수많은 민중들이 권력에 의해 압박당한다. 그리고 20세기 민주주의가 도래해도, 그것은 진정한 의미로 민주주의가 아니라. 국가권력이 주도적으로 움직인 민주주의이다. 20세기는 전쟁의 시기이고, 전쟁은 자본의 경쟁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한국전쟁은 민족 내부 갈등과 더불어 자본의 논리에 의해 일어난 전쟁이기도 하다. 대부분 식민지 시절 친일세력은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장악하고, 억압받은 민중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착복을 당했다. 그런 와중 북한에서 소련의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가 전시공산주의로 변모되었고, 한국은 미국의 자본주의 경제구조가 도래되었다. 자본주의 구조적 문제는 자유주의 내지 민주주의와 상관성을 가지지만, 결코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는 자본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지만, 자본으로 자유를 파괴하는 것은 분명 자유주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북한과 남한의 차이점은 자유라는 슬로건은 모두 내걸지만, 한 쪽은 자본을 국가권력에 의해 장악하고, 다른 한쪽은 국가권력과 유착하여 장악했다.

 

위쪽은 정치권력이 없으면 피지배계급이고, 아래쪽은 경제력이 없으면 피지배계급이 되었다. 21세기에 도래하면서 역사와 경제학적 구조에 의해 전시공산주의보단 자본주의가 더 효율적인 정치경제구조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영화리뷰 하면서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바로 영화 <강철비>를 이해하려면 역사적 맥락과 정치, 사회, 경제적 흐름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강철비>는 상당히 어려운 영화이다. 기존 한국의 블록버스터 체계에서 상당한 도전을 보여준 작품이다. <쉬리><공동경비구역 JSA> 등 북한과의 갈등을 빚는 영화에서 북한의 어느 개인은 인간적이지 모르나, 북한이란 정치적 체계 그 자체에 대해 악의 축이란 이미지를 강하게 부여했다.

 

물론 폭력국가 내지 테러리즘이 강한 곳이 북한인 것은 사실이나, 이 문제는 상당한 딜레마로 작용한다. 어느 정권이든지 통일이란 주제에 항상 눈여겨보고, 북한과의 외교안보전략이 정권에서 제일 큰 과제이기도 하다. 보수정권조차 북한과의 외교정책을 중요하게 여기고, 한편으로 북한과의 외교적 갈등을 군사적 대응체계로 보여주기도 한다. 북한은 정치경제적으로 실패한 나라이다. 하지만 실패했다고 해도 북한이란 정치적 체계는 붕괴하지 않았고, 붕괴의 위험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적 붕괴보단 숙청이란 단어가 우리에게 익숙하다. 정치와 군사세력이 일치하면 그 국가는 군사력을 통솔할 수 있는 장성들이 최고 권력자가 되나, 한편으로 가장 먼저 죽어줘야 하는 대상이 된다.

 

3. 차가운 머리를 가진 영화 <강철비>

영화 <강철비>는 매우 담담한 영화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로 꺼내기 힘든 부분을 있는 그 자체의 사실을 영화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외교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나라는 항상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국가로부터 간섭을 받는다. 사람들은 한국의 최고 우방국을 생각하면 미국을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은 최고의 우방국을 한국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이 여기는 우방국은 일본이다. 일본과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는데, 주한미군보다 주일미군의 세력이 더 강대하다. 오키나와에 미공군 내지 미해군이 대기중이고, 그 외로 괌에 위치한 기지에도 주둔한다.

 

일본 훗카이도에 미공군기지 역시 주요 군사력 중에 하나이다. 아마 올해 들어 한국의 밀리터리마니아에게 가장 인상적인 영화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이 영화라고 볼 것이다. 물론 미국에 비하면 비교하기 힘들지만, 군사작전과 전략, 무기체계와 첩보전은 상당히 잘 짜여진 연출이었다. 감독 양우석이 <변호인>으로 흥행할 때, 그에게 무기는 오로지 송강호 씨의 흡입력이었다. 송강호 씨가 보여준 <변호인>에서 그가 차지한 비중이 너무 거대했다. 그러나 송강호 씨는 그 거대한 모습을 감춘 듯 작품 속을 유영했다. 그렇기에 송강호 씨의 연기는 더욱 중요했다. 하지만 <강철비>에서 주인공인 곽도원 씨와 정우성 씨의 연기배분을 잘 정리했다.

 

작품에서 샷과 샷의 전환에서 치밀한 상황을 아주 명쾌하게 전환해 나갔다. 첩보전이나 심리적인 요소에서 시간을 끌기보단 그런 요소들을 빠르게 진행하여 작품의 긴장감을 더욱 상승시켰다. 작품 중간의 격투나 전투장면은 억지로 길게 끌지 않았고, 특히나 <군함도>처럼 영웅 캐릭터가 잘 죽지도 않고, 다쳐도 금방 회복되는 무리한 연출을 넣기보단 오히려 첩보전에 어울리는 장면으로 위기를 넘긴 게 좋았다(북한군 특수부대원이 넘버1을 암살하려 할 때 시신과 넘버1를 바꿔치기한 장면).

 

4. 영화 시작점인 쿠데타 요소는 무엇을 말하는가?

북한에서 정권이 바뀌면 그전에 승승장구하던 자를 숙청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번 북한정권에서도 자신의 형제나 숙부조차 처형하고, 많은 군부세력이 바뀌는 일이 뉴스지면에 나온다. 어제까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술잔을 나누며 웃었던 자들이 어느 순간 어둠으로 사라진다. 영원할 것 같은 권력의 좌, 하지만 눈 밖에 나는 순간 차가운 감옥에 갇히거나 고통스러운 고문과 죽음이 기다린다. 그들이 죽음에서 무슨 죄를 지었는가? 라는 의문보다 무엇을 위해 사라져 가는가? 라는 권력의 관계성을 봐야 한다.

 

영화를 보면 이중교란이 나온다. 반역자를 제거하라고 말한 자가 반역을 저지른다. 그가 반역을 저지른 이유를 본다면, 계속되는 군부와 당 내 권력자의 숙청, 그동안 자신들이 살아온 인생과 국가 자체의 이데올로기가 그렇게 만들었다. 현실과 이상, 그리고 권력과 미래의 관계성에서 극단적 선택을 택한 것이다. 단지 영화에서 본다면 북한군이 쉽게 남한으로 넘어올 수 있는 비밀통로가 있다는 설정은 무리수이기도 하나, 영화는 하나의 설정이란 조건에서 본다면, 그들이 처음부터 노린 전차의 탈취, 군병원의 습격은 첩보전의 긴박함을 보여준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아니라면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이상에 갇혀 몰락할 때, 권력이란 이름은 그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다. 문제는 권력은 내부의 문제이기도 하나, 그 권력의 중심부가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주변국가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북한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문제는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고, 핵전쟁이 일어나면 전후복구비만 아니라 많은 인명이 손실되고, 특히나 남북 간의 화해는 전혀 진정될 수 없다. 하지만 이대로 장기전이 되면 국가 내부적으로 큰 소란이 일어나고, 전쟁에 따른 인명과 재산손실 역시 만만치 않다.

 

5. 역사는 현실과 과거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의지에 따라 전쟁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미국에 의한 작전통제권이 이루어지고, 더 크나큰 위협으로 중국과 일본이 크게 관여한다는 점이다. 20세기 한국전쟁에서 모택동은 17세기 병자호란 때 개망나니 같은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를 가진 자가 결국 조선에 침입한 적을 막아내었다는 논리다. 모씨의 역사는 350년 차이가 나는데, 아직 중국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두고 우리는 왜놈의 난을 부린 최악의 상황이라면, 중국은 항왜원조(抗倭援朝)라 부른다. 왜국에 저항하여 조선을 돕는다. 201712월 중반에 한국대통령은 중국에 방문했다.

 

이때 중국 주석은 난징대학살 기념행사에 갔다. 난징대학살 정도의 사건이라면, 일본에서는 자위적인 행위인 원폭투하 희생자를 기리는 날이고, 한국에서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과 맞먹는다. 그 나라에서 가장 빼놓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날에 타국의 대통령이 방문을 하자, 중국 주석은 바로 만나지 않고, 행사 후 만났다. 만일 한국의 대통령이 중국의 행사장에 갔다면 일본은 항의했을 것이고, 자국에서는 중국에 너무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들을 것이다. 반대로 주석을 바로 만나지 못해 외교적으로 무시당하지 않았냐는 말을 나오기도 한다.

 

한국전쟁 기념일에 대통령이 UN묘지에 참석하지 않고, 외국정상이 왔다고 그들을 만나러 갔다면 그것이 더욱 문제가 아닌가? 정상은 자국민과 자국의 이익이 우선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역사란 계속 되풀이 되고 비극은 제2 내지 제3의 배우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것이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영화 <강철비>에서 잘 나오는 게 바로 일본과 한국의 관계에서 미국의 입장이다. 영화가 그렇다고 하나, 사실 말을 하지 않아도 미국은 한국보다 일본의 편을 들어준다.

 

아베를 비롯한 일본 권력가들이 지금 노리는 것을 일본헌법 개정이다. 일본의 군사력은 자위대라 하지만, 자위대는 군사조직이 아니다. 군사조직이 일본에 생기면 그들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된다. 전쟁이 다시 할 수 있는 것은 한반도에 전시상황 무력개입이 가능하다. 한국전쟁으로 일본에 난민이 오면 인도적인 대우보단 사살 내지 감금이란 비인도적 행위를 할 것이란 기사를 보았다. 미국이 우리의 절대우방이라면 일본에 간 우리 한국인 전쟁난민이 인권유린당해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나, 사실 주한미군조차 우리나라 법규자체에 상당히 큰 면책권을 가지고 있다.

 

6.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미국이 우방이라 하나, 그들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우리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 미국과 동맹을 맺고 교역을 하는 것이다. 영화리뷰를 쓰면서 미국경제학자 책이 생각난다. 미국의 재정은 감축되고, 국민 대다수는 빈곤계층으로 몰려간다. 부익부 빈익빈이 미국을 병들게 한다. 문제는 부자들의 증세 아닌 감세는 국고를 비게 하고, 그 국고는 간접세로 빈곤한 자들의 주머니를 노린다. 직업이 1개 아니라 2~3개 가지고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미국인들의 현실에서 암울한 이유는 미군의 군비는 엄청나다는 점이다.

 

군비의 확장은 단순히 평화유지만이 아니라 방위산업체와 계약을 맺고 상당한 액수의 무기를 구매한다. 무기체계는 독점적 구조이기에 독점시장이 형성되고, 그 세금은 미국 국민 대다수가 부담하고, 나머지는 이윤은 상위계층에게 몰린다. 전쟁의 경제학이란 말이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하고 난 뒤 이라크를 경비를 보던 군사세력은 미군이 아니라 블랙워터라는 군수경비업체였다. 이들을 고용한 미국은 엄청난 예산을 투입했다. 군인이 아닌 민간이 이라크를 지킨다는 방식으로 움직이나, 군방산업체와의 계약은 결국 독점으로 이어진다.

 

이라크전쟁은 테러국가 내지 불량국가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뒤에 에너지 자원, 경제 등의 효과가 동원되는 전쟁이다. 기업의 이윤인지 국가의 이윤인지 몰라도, 결국 누군가 이익을 보고, 단지 그 이익을 더 많이 보는 기업이 속한 국가는 이익을 볼 수 있는 게 정치적인 전략이 될 수 있었다. 전쟁나면 가장 이익 보는 것은 2종류이다. 그 나라에서 이데올로기로 정치적인 입지를 굳힐 수 있는 사람, 전쟁무역으로 매출을 올리는 무기상인이다. 하지만 그런 이익은 강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노릴 수 있는 조건이다.

 

7. 약자에게 선택은 없다.

중국이 임진왜란을 두고 항왜원조(抗倭援朝)라고 부르면, 위에서 언급한 모택동이란 인물은 한국전쟁을 무엇이라 불렀는가? 항미원조(抗美援朝)라고 불렀다. 영화 <강철비>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군수뇌부가 중국 외교군사라인과 연락을 취할 때, 그가 이렇게 말한다. 중국과 조선은 형제의 나라라고 말이다. 중국과 조선이 형제의 나라로 불린 것은 조선이 홍타이지에 의해 침략당한 정묘호란 시기이다.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낸 후 이괄의 난을 겪은 후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서인정권은 17세기 명·청 교체시기에 전략을 잘못 세워 결국 정묘호란을 맞이하고 후에 병자호란으로 이어진다.

 

명나라와 조선은 군신의 관계 내지 아버지와 아들이라 한다면, 청나라는 조선에게 형제의 나라가 될 것을 종용했다. 물론 조선의 아버지가 사라진 후 청나라는 조선에게 아버지 노릇을 하기 위해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인조를 남한산성에서 내려오게 만든다. 그 이후에 조선은 청나라를 엄청 무시하고, 명나라 만력제 이후 자신에게 벼슬의 칭호는 필요 없다는 선비들이 많으나, 그들은 배고픔과 가난으로 죽어가는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았다. 명이 중원 누비든 청이 누비든 조선의 백성이 가장 소중한 게 당연한 일이나, 그렇지 않았다. 지나간 명분에 사로잡힌 채 망령의 굴레에 계속 집착했다.

 

영화 <강철비>는 선조-광해군-인조로 넘어가는 조선의 모습이 생각난다. 북한은 중국, 한국은 미국을 의지하나, 결국 마무리는 우리의 몫이다. 핵무기 여파가 일본 이지스함에게 미치자, 미국은 한국정부 편에서 벗어나 일본의 입장을 대변한다. 미국CIA 한국지사장도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게 아니라 일본에서 대기를 한다. 한국정세를 보고 일본과 같이 처리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전략방침이란 점을 보여준다. 정말 그럴까? 아닐까? 하지만 어느 정도 현대사회에 국내 정치를 넘어 외교, 안보, 군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약간 의식하고 있는 부분이다. <강철비>에서 그 요소를 너무 대놓고 밝힌 것이 묘미이다.

 

한반도의 상황이 너무 위급해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딜레마, 전쟁의 집중화이냐 아니면 조금 더 대화를 나눌 것인가? 정권의 대변자 내지 권력자 중에 현재를 유지하느냐 아니면 변화를 주는가에서 새로운 상황이 도출된다. <강철비>에서 곽철우는 자신의 소신을 이야기한다. 한반도에 강력한 핵을 가져야 한다고 말이다. 핵무기를 가질 수 있는 국가는 강대국으로 한정되어 있고, 한국은 가질 수 없는 나라로 되어 있다. 핵무기를 가진다는 점은 최악의 상황에서 국토를 유린하면 상대편을 모조리 말살할 수 있는 대안을 가진 것이다.

 

영화에서 재미있는 대사가 나온다. 북한은 20년 전에 밟아야 했다고 말이다. 핵무기가 나오기 전에 모조리 섬멸했다면, 지금 북한은 핵무기체계를 완비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핵무기의 위력은 같은 무게라도 1945년 일본 본토를 강타한 2개의 핵폭탄보다 더 강력하고 위험하다. 게다가 핵폭탄이 터지면 화염, 폭풍, 방사능만 문제가 아니다. 폭발이 일어나면 연쇄적으로 폭발물 내지 인화물 역시 타격을 입어 연쇄반응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서울 경기권에 대다수 국민뿐만 아니라 모든 자본과 인프라가 밀집하고, 후방인 전남과 경남지역에는 핵발전소가 포진한다.

 

핵무기가 한반도 아무 곳이나 타격해도 무사할 수 없다. 전쟁을 막기 위해 외교안보 군사력이 중요하나, 영화에서는 그 이상의 군사력을 원한다. 영화를 보면서 한국의 우방으로 미국이 가장 중요한 위치이나, 한편으로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이 무시를 못한다. 미국의 입장에서 일본은 한국과 비교하여 더 중요한 국가이다. 일본 자체가 극동아시아에서 소비에트연방과 중공을 견제하기 위한 전진기지로써 성장했고, 그것을 토대로 일본은 산업경제를 발달시켰다. 일본 극우는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을 부정하면서도 받아들인다. 야스쿠니 신사에 전범들은 미국의 핵투하 이후 국제재판 이후 사형당하고, 거기에 봉인되었다. 그들의 후손은 야스쿠니에 가서 전범을 기리고, 미국의 편을 들어 일본헌법을 개정하려 한다.

 

영화 <강철비>에서 이런 국제 정서속에 2명의 철우가 나온다. 우리는 영화에서 2철우의 한자이름에서 북한의 鐵友는 강한 친구이고, 한국의 哲宇는 생각하는 공간으로 나온다. 정말 2명의 철우가 필요하다. 우리에겐 이 힘든 국제세계에서 강한 힘을 가져야 살아남을 수 있지만,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하지만 영화는 그게 정말 어렵다고 말한다. 북한의 철우는 가족과 같이 살지만, 한국의 철우는 가족과 떨어져 산다. 남북이 통일되기 전에 한국의 철우조차 자기 가족과 다시 결합하지 못한다.

 

곽철우의 막내아들이 말한다. 아빠 엄마하고 다시 살면 안 되냐고 말이다. 우리 한국 사회조차 곽철우의 모습처럼 살아가는데, 그 이상의 길을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그렇게 같이 가야 하는 것이다. 곽철우와 성형외과 의사는 부부였으나, 그들은 이혼했다. 부부는 헤어져도 그들의 자식, 즉 우리의 미래는 그들이 다시 결합하는 것을 원한다. 어느 누군가를 적으로 보거나 대화의 상대로 보지 않으면 그들과 다시 결합할 수 없고, 미래의 우리들은 다시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영원한 아픔을 가지고 가야 한다. 안타까운 사실은 무뚝뚝한 엄철우 역시 딸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아버지란 점이다. 2명의 철우가 만나 그들이 하고자 하는 사명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2명의 철우가 원하는 것은 그들의 자녀,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 살아가려는 것이 아닐까?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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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절의록 호남문화 연구총서 13
김동수 지음 / 경인문화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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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위해 순절한 분에게 물론 감사의 마음을 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감사의 의미를 담아야 할 대상은 그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에 치중하는 게 아니라, 후세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가령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과 같은 경우 조선시대 후기에 그렇게 인정받지 못한 인물이다. 그러나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읽으면 남명 조식 선생에 대해 나온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 같은 시대에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만나지 못한 사이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조선 명재상 중 하나인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선생은 2사람 모두 친분이 있었다.

 

퇴계 선생이 먼저 1570년에 타계하시고, 그 뒤에 남명 선생이 2년 후 타계하신다. 남명 선생이 돌아가기 전 퇴계 선생과 일전에 1번도 만나지 못해도 같은 경상권에 사는 학자로서 그의 뒤에 따라가겠다고 하신 일화가 유명하다. 성호 선생은 그 내용을 사설에 담았다. 문제는 남명 조식이란 인물이 조선 성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지만, 그렇게 큰 대접을 받지 못했고, 서원에 퇴계 이황 선생과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배향되어도 남명 선생은 배향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남명은 조선시대 분당정치사에서 북인의 학문적 스승이었다. 그의 학문은 단지 하나만 말한다.

 

학문의 기본적 원리와 배울 덕목은 이미 선현들이 모두 남겨주었으니, 이제 우리는 그것을 보는 것을 넘어 실천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실제 역사 속에서 북인의 활약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볼 수 있다. 의병군에서 최초로 발의한 인물은 홍의장군(紅衣將軍)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이다. 그분은 남명 선생 수재자인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제자이고, 남명 조식 선생의 손녀와 결혼했다. 곽재우의 거병은 남해바다의 이순신 장군과 동시에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들이었다.

 

그러나 북인들의 활약은 대부분 경상권이다. 경상우도와 좌도 퇴계와 남명의 제자들이 분포했고, 초기 경상도 학자들은 2사람에게 학문을 배웠으나 점차 2사람에게서 제자들이 분리되기 시작한다. 남명 조식 선생에게 정인홍, 곽재우, 김우옹, 최영경 같은 학자들이 있었고, 퇴계 이황 선생에게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 이들의 제자인 이억기 장군 같은 인물도 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의병과 관군 모두 왜적에 항거했지만, 한편으로 당쟁의 소용돌이에도 같이 있었다. 외부의 적인 왜군과 내부의 적인 당쟁이 있었다.

 

이런 관점을 내가 제시하는 이유는 이번에 읽은 <호남절의록>이란 도서가 얼마나 편중되어 있는 서적이란 사실을 철저히 알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번역하신 사학과 학자들도 인정했지만, <호남절의록>이 작성된 시기는 정조시대이고, 정조는 영조의 세손이다. 영조는 경종의 동생이나, 사실 경종이 죽은 후 등극된 임금이다. 당시 경종은 대다수의 소론과 일부 남인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고, 영조는 노론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경종 사후 영조가 오르자 소론의 영수인 김일경 등이 과거 영조에게 한 행동과 노론4대신을 죽인 죄로 죽임을 당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노론대신이 경종을 살해하려는 의도가 명백한 일로 참살되었는데, 영조는 자신의 형보다 자신을 지지한 대신에게 편중했다. 권력을 부자와 형제조차 냉정하다. 영조 집권 당시 일어난 난이 이인좌의 반란이다. 이인좌는 경종의 죽음에 불만을 품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올라가면 1618년 사르후 전투와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이 올라가있다. 정묘년과 병자호란의 치욕적인 일은 한국 역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은 상처이다. 인조 임금은 청나라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9번 머리를 받는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절차를 수행했다.

 

당시 사료를 보면 인조의 행동에 사대부들이 실망을 하여 효종까지 출사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인조는 광해군 실각 이후 등극된 임금이다. 그는 서인의 반정을 중심으로 움직인 존재이다. 그가 올라간 순간 청나라의 습격을 받고, 인조반정 다음해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이괄의 난과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조선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들이 패배한 이유는 과거의 문제점을 보지 못하고, 백성을 진정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성리학의 틀에서 명나라를 절대적 존재로 보는 사대주의가 나라를 버렸다.

 

물론 <호남절의록>18세기말 성리학의 관점에서 적은 도서이다. 정조는 상당히 우수한 군주이나, 그 역시 성리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에 있다고 하나, 19세기 후반 메이지유신을 거친 후 강대국이 되었고, 청나라는 19세 중반 영국과의 아편전쟁의 패배로 큰 타격을 입는다. 조선은 그러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성리학적 관점 조선왕조의 시대라면 당연히 <호남절의록>은 절대적 가치를 내세운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책을 천천히 읽은 국사를 생각하면 나라가 망한 이유가 다시금 보인다.

 

국가를 위해 희생된 순국자는 칭송받아야 할 것이나, 이 책에 적힌 이름은 대부분 양반 사대부 집안이다. 그들은 명나라와 조선임금만 생각하지 조선에 살고 있는 백성에 눈을 두지 않았다. 광해군이란 인물을 두고 참으로 재미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바라보면 광해군의 분조활동에 의해 의병들이 전국적으로 창궐하고, <호남절의록>에서 세자의 분조역할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으나, 광해군의 분조활동을 드러내는 것보다 광해군 집권시기 혼주(昏主) 내지 폐주(廢主)의 이미지를 더욱 부각했다. 사르후 전투에서 강홍립은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에 항복하고, 정묘호란 시기 조선을 밟아대는 존재로 여겼다.

 

하지만 정묘호란 당시 조선과 청나라의 화의에서 강홍립의 역할이 컸고, 그가 없었다면 조선의 많은 백성들은 고초를 당해야 했다. 그가 중재하지 않았다면 조선왕실 역시 큰 피해를 봐야 했다. 다급한 상황에 이르러 강홍립이 중재한 사실은 빼놓고, 오히려 그를 나라를 배신한 역도로 몰아넣었다. <호남절의록>은 광해군 시대의 부정, 북인세력의 부정이 강력히 깔려있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死) 당시 수많은 선비들이 화를 당했다. 정여립과 단지 친하거나 글을 나누었거나, 그와 인척이거나 또는 의심가는 인물들이 모조리 화를 당했다.

 

남명 조식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의 제자이며, 상당히 학문이 높은 최영경이란 선비는 송강 정철의 무리한 수사로 인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 외에도 아무 죄 없는 학자들이 정여립 옥사에 연루되어 죽었으니 그 원한이 골수에 새겨져버렸다. 남인과 북인은 원래 동인이었으나, 북인에게 기축옥사는 친구와 친척, 동문수학하는 이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건이었다. 우습게도 송강 정철도 왕세자 문제를 선조에게 언급하는 바람에 선조에게 미움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다. <호남절의록>에서 이런 내용을 다루지 않는다. 정치적 입장이 상당히 많이 반영되었다.

 

<이순신과 임진왜란>이란 서적에서 <선조실록>을 보면 왜적이 침탈해 전국이 지옥처럼 변하는데, 임금을 명을 받은 송강 정철은 어서 달려오지 않고, 기생을 끌어안고 술을 마시며 시조나 읊어대었다. 송강 정철의 국문학적 가치는 높지만, 그가 해온 행동들을 보면 결코 의로운 인물은 아니다. 서인들이 만든 기축옥사로부터 인조반정은 어떻게든 숨기고 싶은 지난날의 과오이다. 문제는 그 과오를 정당히 밝히는 게 아니라 억지로 가면을 씌우게 만든 책이 <호남절의록>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시작으로 앞에 잠시 1555년 을묘왜변을 언급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뒤에 바로 오는 게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그리고 이괄의 난 평정이다. 이들의 난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데도 막지 못했고, 막을 수 없어 도망친 후 그 죄를 모조리 광해군에게 이전했다. 명나라를 구하지 못하고, 그대로 청나라와 외교정책을 펼친 점, 1609년 광해군이 왕으로 오르자 제일 먼저 한 것이 일본과 국교를 다시 시작한 것이다. 만일 일본과 앙금을 남긴 채 계속 지닌다면 왜적과 호란 사이에 더욱 난감한 상황이다. 전쟁이 나면 제일 고생하는 부류는 여인네와 백성들이다. 여인네들은 체력적 한계로 도망치지 못하고, 싸우지도 못한다.

 

백성들은 억지로 군사로 징병되고, 어리석은 지휘관의 명령에 목숨을 잃게 된다. 목숨을 잃기 위해 군에 입영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약자로 입영한 것이다. 60세까지 군역을 해야 하는데, 갓 태어난 아이가 군적에 오르고, 이미 백골이 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군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백골징포와 황구첨정의 폐단이 이미 17세기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 시대의 기득권은 서인이었다. 그들은 자기만의 이상 속에서 백성들이 추위와 굶주림, 적들의 칼과 창 앞에서 베어지는데도 망상만 꾸고 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조금 다른 양상이다. 이 당시 의병들은 각기 출현했으나, 병자호란은 조금 다르다. 의병이 창궐해도 전국적으로 큰 성황을 이루지 못했다. 백성들은 알았다. 혼주 광해군을 내쫓아도 사실 인조 역시 별반 차이가 없었고, 광해군이 억지로 올린 토목공사도 인조에서 멈추게 아니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 전주에 있는 태조 이성계 초상을 모신 경기전은 광해군 시대에 재건된 건축물이다. 전쟁 속에서 궁궐이 없어져 대군의 집에서 조회를 해야했던 선조였다. 폐모살제(廢母殺弟)와 관련하여 인조는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와 손자를 죽게 만들고, 자신의 조카 역시 반역자들이 옹립하자 사약을 내린다.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광해군과 아들손자를 죽이고 조카까지 죽인 인조에서 왜 이리 다른 양상이 보이는가? 광해군의 어머니는 생모도 아닌 아버지의 계비로서 자신보다 어렵다. 그러나 인조는 자신의 친자식을 죽게 만든다. 이런 정치적 사건을 전후맥락을 따져 보면 <호남절의록>의 목적은 진실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희생된 순국자를 위한 기록인가? 책을 읽어가면서 인조부터 시작하여 계속 이루어진 서인(노론)들의 정권통치를 정당화하는 문맥으로 이어진다.

 

책 초반에 동래부사 송상현을 너무 뛰워준 것부터 문제였다. 왜적이 3시간만에 동래읍성을 함락했는데, 그는 자신의 첩을 피신하게 했다고 하나, 사실 성안에 수많은 백성들은 도망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 채 모조리 학살당했다. 경상권 최전선 성문이 단시간에 무너진 것은 일본군이 강한 것도 있지만, 전쟁의 기록에서 본 것처럼 화포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 것이다. 화포를 이용하면 장거리 적에게 큰 타격을 주고, 성 아래보다 성위에서 발사하는 대포는 더 멀리 나가고, 성 아래서 발사하는 대포는 성 위로 오르기가 어렵다. 조총은 화약의 양과 탄환의 무게가 대포보다 못하기에 사정거리로 따지자면 대포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 연합군이 승리한 이유는 일본군보다 더 강력한 장거리용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군사들에게 대포를 이용하여 적진을 공격하고, 평소 훈련을 했다면 그렇게 단시간에 무너질 수 없다. 단지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한 이유로 충신으로 올린 그 자체가 한심한 자태이다.

 

무기가 정비되지 않았거나 군사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지휘관의 무능과 실책이다. 문관이 무관의 병법이나 지휘방법조차 모르고 그 자리에 앉는다면 적들에게 이로움만 주는 꼴이다. 만일 죽기를 각오하고 혼자 장렬히 전사하면 모르지만, 성안의 병졸과 백성들은 말이 다르다. 그들이 죽어도 어떤 기록도 남지 않고, 보상과 영광조차 없다. 그들은 목적은 전쟁에서 어서 벗어나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다. 이미 곡식을 탐내는 탐관오리가 판을 치고, 조정에서 이들에 대한 구휼정책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적이란 그저 왜만이 아니라 조선이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왕이 몽진하여 북으로 갈 때 백성들은 궁궐을 태우고, 양반 사대부집안을 불태우며, 일부 상인들은 왜적에게 호의적으로 대했다. 민심은 왜 천심인가? <호남절의록>에서 민심의 향방을 묻는 글은 없다. 번역하신 분도 공신록에 대한 설명문을 언급할 때 역사적 사실을 전후맥락에 맞게 적어내었다. 하지만 책 자체가 당시 조선시대 한문서적을 한글로 번역했기에 역사적 평론을 거론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정말 나라를 사랑해서 죽은 사람이 만일 수 백 년 뒤 일본에 의해 조선이 망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절의를 지키는 것은 중요하나, 절의를 지키기 전에 그런 상황을 막는 것 역시 중요하다.

 

광해군를 어리석은 임금이라 했지만, 막상 정묘·병자호란 당시 공신을 보면 광해군 시절 무과에 급제하여 변방에 나간 인물이 많았다. 이미 광해군은 청나라의 불온함 움직임을 보고 거기에 대비하기 위해 병력을 확충하고 훈련을 시켰고, 불천지 원수인 왜국에 주문하여 무기까지 수입한다. 항일전쟁사에서 임진왜란 이후 조선독립전쟁사라면 임진왜란의 역사정신을 따라볼 수 있다. 일제에 의해 유린당한 조선이 이미 없어졌기에 다시 고국을 되찾고, 자유를 향한 분투는 순국자의 진정한 애국정신이다. 그런 애국자들은 병자호란의 인조와 서인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조선독립을 위해서라면 중공과 소련, 미국과 유럽연합국이라도 손잡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발적 의지는 무참히 깨져 광복 아닌 광복을 맞이했으나, 21세기 우리 대한민국에서 다행히도 그들의 죽음과 공로를 기억해주고 있다. <호남절의록>에서 예로부터 전라도 지역은 의병도 많았지만, 그 지역이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점령당하지 않은 영토이다. 게다가 전라도는 곡창지대라 많은 식량이 나오며, 전라도를 잃은 것은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과 같다. 한편으로 곡창지대만큼 많은 수탈과 억압을 당한 지역이다. 농민이 쌀을 추수해도 대부분 나라와 권력자가 빼앗아 가버린다.

 

의병의 역사가 있는 만큼 동학운동사도 있고, 민족의 독립운동과 저항정신, 심지어 518의 민주화 투쟁도 있다. 21세기 <호남절의록>을 읽으면서 호남은 저항의 지역이기도 하나, 그만큼 아픔과 시련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국가의 주인이 국민인 현세대에서 백성을 하늘로 봐야 할 그들이 오히려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지배이데올로기만 만들기 바쁜 것을 <호남절의록>이란 도서로 확인했다. 물론 기억하고 칭송해야 할 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그 진의를 다시 파악할 필요가 있다. 21세기 전쟁에서 의병은 필요 없다. 의병이 되기 전에 이미 국가전산자료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다.

 

무기도 조총같이 수십m만 가는 게 아니라 수 천까지 날아가는 미사일이 날아온다. 물론 전쟁나면 탁월한 지휘관 내지 용사가 탄생하겠지만, 지금 무기는 과거처럼 검술과 궁술로 좌우되는 게 아니라 무기의 성능에 따라 달라지니 전쟁은 될 수 있으며 피하는 것이 상책이고, 억지로 죽음의 길을 선택해야 할 이유도 없다. 명예가 전부이던 과거 조선이나, 그 명예를 위해 억지로 전쟁에 끌려가던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르후 전투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 그 희생을 만든 자들은 반정을 만들고, 그 이상의 조선인들을 죽게 만들었다. 역사란 반성을 해야 한다.

 

병자호란의 패배로 인조는 혼자서 삼궤구고두례 절차를 수행해야 했지만, 일제에 의해 망한 조선은 국민 모두가 삼궤구고두례보다 더한 치욕을 당해야 했다. 이것을 두고 공신목록을 기록했다면, 이런 행위를 지금에 와서 계속하거나 용인한다면 똑같은 일들이 반복될 것이다. 그런 <호남절의록>이라 책 내용을 다 읽으면 비장미를 억지로 밀어붙인 것이 왠지 안타깝고 한심스럽다. 하지만 이런 책이 있어야 후대에 알려지고 우리가 과거의 일을 다시 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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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7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12-07 08:56   좋아요 0 | URL
어느순간 제 글이 헬조선의 기원을 찾아가는 블로그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없는 사람, 백성을 위한 양반들은 바른말을 하다 의금부에 끌려가서 맞아죽고
또는 사문난적으로 몰려 끔찍한 보복에 집안이 몰락합니다.

앵반이란 존재가 행정가 및 사상가로서 백성의 삶을 돌봐야 하는데
그리고 문자를 모르는 백성을 위헤 학문을 해야 하는데 시문놀이만 추구했죠.

돌이켜보면 남인계열 학자들이 조선후기에 성리학 외에 의학, 복서, 지리학
수리학, 천문학 등을 연구하는데, 다 농사에 도움이 되고 주변 지여에 살아가는
백성의 삶을 유지하게 되는 방편인데 말입니다.

예전에 성호사설을 읽으면서 성호 이익선생이 길을 가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어느 늙은거지가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면서 제발 죽여달라고 외치는
글귀가 생각납니다. 다 떨어진 옷에 추운 겨울에 비참한 몰골을 하는
그 모습을 생각할 때면 성호선생은 눈물이 난다고 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기까지 조선은 그야말로 완벽한 헬조선이었죠.
하다못해 이익 선생의 아버지 이하진도 바른 말 하다 귀양가서 죽고
형인 이잠은 바른 말을 하다 장살당해 죽으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역사이고 그런 역사를 만든자들이 책임의식 없이 성리학에 의한 영웅주의만 외치니....

yamoo 2017-12-07 2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양난 이후 조선 조정이 한 행태를 보면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

남인이 상대적으로 부국강병을 위주로,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많이 시행하려고 한 듯합니다. 노론 세상이 되니 헬조선이 된 듯....그러고보니 헬조선의 계보의 중조는 아마도 노론 일당 체제가 득세한 조선 후기가 아닌가 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12-08 20:16   좋아요 0 | URL
항교에 가면 제일 먼저 할일은 송시열과 송준길을 배향대상에서 제외하는 겁니다. 백성들이 배고픔에 절규할 때 대동법을 시행햐라 하는데, 이때 김육이 제안하자 같은 서인 그리고 노론의 창시자인 우암 송시열이 반대합니다. 산당 즉 재야에서 활동하는 사대부들이 농민을 보살펴주지 못할 망정 계속 착취하는 형국에서 헬조선의 역사는 다시금 불국토로 만듭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란 국가에서 과거의 영웅을 말한다면 대부분 이순신 장군을 말할 것이다. 성군(聖君)인 세종과 성웅(聖雄) 이순신, 세종대왕은 조선의 문()을 열었다면, 이순신 그 자체로 무()의 완성이다. 일전에 이순신 장군의 일대를 방영한 <불멸의 이순신>이란 작품이 있었다. 거기서 보인 이순신의 모습은 보통 인간으로 감당하기 힘든 고난을 헤치고 나간 불굴의 무관(武官)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이순신이 상대로 하던 적은 과연 왜적이었을까? 임진왜란사를 연구하면 참으로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임진왜란이 7갑자 즉 420년 전에 계속 우리 조선 한국 땅을 고난의 세계로 만들었다.

 

게다가 정확히 420년 전은 1597년 정유재난이 일어나던 시기이다. 임진왜란이 1592년에 발발한 원인을 보고, 정유재란이 일어난 배경도 봐도 참으로 문제가 많았다. 단순히 이것은 이순신 한명으로 모든 적을 섬멸한 것이 아니라, 전 방위적으로 관찰할 것이 참으로 많았다. 그러나 막상 우리가 접한 임진왜란은 단행본 연구서적 내지 드라마에 더 심한 편중을 둘 것이다. <불멸의 이순신>이나 <징비록>을 보자면, 전자는 이순신을 중심으로 후자는 유성룡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2사람 모두 임진왜란 당시 없었다면 조선의 앞날이 없었다는 점이다.

 

문제점은 드라마가 작가의 상상력이나 허구적인 요소를 다소 집어넣어 이야기를 극적으로 이끌어내나, 대하드라마 사극의 경우 기본적으로 기초 사료와 어느 정도 부합되어야 한다. <불멸의 이순신>은 소설도 있었으나 더 중요한 것은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였다. 칼의 노래를 예전에 약간 읽은 기억이 있다. 문체가 매우 비장하고 엄중했다. 이순신의 마음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말 그대로 칼을 마음에 품고, 자신은 언제나 칼 위에 걷고 있는 칼집 같은 모습이었다. 칼을 가지고 있기에 그 자신조차 벨 수 있다는 각오에서 더 이상 무슨 수식어를 붙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임진왜란을 말하기 전에 이순신이란 한 인간을 말할 수 없겠지만, 임진왜란이란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성인(聖人)이란 단어처럼 일반사람에게 식견으로 묻자면, 성인이란 의미는 석가나 그리스도 같은 신과 같은 존재, 혹은 신의 권위를 가진 자로 본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성인이란 단어는 동양에도 있었다. 한국은 이미 서구화되어 기존 동양적 정신이 많이 파괴되었다. 역사학(歷史學)이란 학문이 동양의 영역이 아닌 서구의 관점이 되어 있기에 우리의 문화와 사적(史的) 영역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서양을 알기 위해 고대 그리스로 넘어가자면 유명한 철학자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과거의 철학자는 형이상학자이나, 한편으로 수학자 내지 의학도이기도 했다. 때로는 정치가와 철학자를 병행하기도 하나, 서구의 역사에서 정치, 철학, 군사, 의학 등의 분야가 서로 관계성을 유지하기보단 각자의 학문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반해 동양의 학문은 다르다. 동양의 학문은 철인(哲人) 군주 밑에 다른 철인들이 정사를 돌보는 구조였다. 그것은 바로 유학자(儒學者)들이고, 조선에서 성리학자(性理學者)들이다.

 

이들이 관점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예를 들어 우리가 좋아하는 소설, 게임, 콘텐츠로 삼국지(三國志)가 있다. 삼국지에서 유명한 장수로 유비와 조조, 관우와 제갈량 같은 불세출의 인물이 모여 있다. 이들은 황건적 당시 의병을 일으키고, 동탁의 난을 잠재우며, 천하삼분지계로 전쟁의 소용돌이에 있었다. 그러나 막상 소설을 보고, 게임을 하는 도중 뭔가 느끼는 바가 있다. 단순 롤플레잉게임(RPG)이라면 몰라도 정식적인 삼국지 시리즈에서 군주의 역할은 전쟁을 하는 것도 중요하나, 전쟁과 더불어 내정을 관리해야 하고, 외교와 인사문제를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경영(經營)이란 관리체계가 어느 정도 지켜지지 않으면 전쟁에서 무조건 패배란 점이다. 이순신의 영웅적인 모습에서 그의 무술능력과 더불어 지장으로 보여주는 책략가란 점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그가 뛰어난 지략무장만 생각하지, 그가 그 이전에 준비해둔 작업과 계획, 군영을 다스리는 태도와 피난민의 대책, 군량미 보급과 지원에 대한 관리는 잘 몰랐다. 유명한 대첩에서 많은 왜적을 쳐부순 것만이 많은 사람들의 기억이다. 그리고 그가 처해진 모함에서 이 문제가 어떤 전후맥락이 있는 것인지 생각할 점이 많다.

 

임진왜란은 이미 경고된 전쟁이었다. 임진왜란 이전 전남 남해안에 왜적이 노략질을 하고, 담당관아 무관과 병사를 참살했다. 사실 이것만은 전부가 아니다. 1555년 을묘왜변이 전남지역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왜적은 남원과 전주까지 올라올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 만일 그때 왜적을 맞지 못하였다면 최초로 몽진을 한 군주 선조가 아니라 명종이었을 것이다.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만 보는 것이 아니다. 오늘 지금 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일들을 다시 보고, 지금 현재 처해진 우리 모습을 반성하고 거기에 대한 채비를 하는 것이다.

 

서애 유성룡이 피눈물을 머금고 작성한 <징비록>은 그야말로 우리가 놓치고 놓친 지난날의 과오를 드러내던 책이다. 이 책을 제대로 보고 반성했다면 정묘·병자호란, 일제의 침탈에 대비했을 것이다.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읽는 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런 일들은 다시 되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란 인물은 성웅으로 우리에게 그저 하나의 콘텐츠로 소비되어온 인물이나, 막상 학문적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은 점이 많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은 왕으로부터 면사(免死)라고 적인 첩을 받는다. 하지만 정사 선조실록에서는 선조가 아닌 명나라 왕에게 하사받았던 것이다.

 

면사권한을 내린 자가 선조가 아닌 명나라 왕이라면 말이 상당히 달라진다. 조선의 성리학에 너무 치중하여 자국의 안위를 파괴했다. 성리학의 시작은 남송에서 시작되어 한족(漢族) 중국인들에 의해 조선까지 넘어왔다. 조선은 명나라와 인접한 국가고, 태조 이성계는 원나라를 섬기는 고려보다 새롭게 떠오르는 명나라에게 자신의 대의를 내보냈고, 그것은 성공했다. 즉 정치적 이념과 통치방법론에서 불교와 유교 사이의 고려보다 유교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이 되게 한 과정인 셈이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을 호령해도 조선은 여전히 성리학에 빠져있었고, 그것은 결국 자신에게 큰 독이 되었다. 이순신은 성리학을 잘 아는 무관이었다. 그러나 성리학 안에 빠져있지 않았다. 성리학의 문제와 더 나아가 심각한 폐단은 현장중심의 경영체계가 아니라 시문놀이 하는 맹한 성향이다. 임진왜란 발발 이전 조선에 심각한 사건으로 기축옥사를 생각할 수 있다. 옥사에서 형사업무 최고책임자로 송강 정철이 있었고,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인 세력을 숙청한다.

 

그 뒤 왕의 후사문제를 잘못 언급하여 귀양 가게 되고, 귀양지에서 전쟁의 소식을 들은 다시 선조 곁으로 오라는 명령을 듣는다. 문제는 전시상황은 모든 업무가 비상이기에 신속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송강 정철이 보여주던 일은 참으로 한심했다. 최고 권력자리에 있다가 귀양을 간 것이 마음에 큰 상처였는지 그는 수 일 안에 올 수 있는 거리를 2주에 거쳐 왔고, 중간에 들린 관아숙소에서 기생을 불러 술자리를 만든 후 시조나 읊어주고 있었다. 한국 최고의 문학을 만든 자이나, 전쟁에서 보인 행동은 최악이었다.

 

이런 모습은 비단 정철만이 아니다. 이순신이 수군삼도통제사에서 억울하게 물러난 후 원균이 통제사로 부임하자, 수사(水使)들의 능력도 의심스러웠다. 배설이란 장수는 원균 아래에서 도망쳐 배를 보존케 한 것은 큰 공이나, 그는 이순신 막하로 오고 나서 큰 전쟁이 두려워 병영을 탈영한다. 전시 병영을 탈영하면 참형에 다스린다. 목을 벤 후 군문 높이 목을 효시하여 진중의 소란을 잡는다. 배설이 아니더라도 주변에 보인 장수들이 능력을 인정받아 온 것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이 작동해서 온 것이다.

 

이순신의 할아버지는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하고, 아버지 역시 세상의 큰 뜻을 품지도 못한 채 살아간다. 이순신은 사림정치세력이었고, 그는 율곡 이이 선생과 같은 덕수이씨 문중이나. 어릴 적 서애 유성룡과 친한 이유로 남인과 같은 영역으로 몰렸다. 유성룡은 이순신에게 늘 지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은 친구였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도 이순신의 활약을 전하고, 이순신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노량해전에서 끝이 나자 북인 이산해에 의해 탄핵되어 정승의 자리에서 파직된다.

 

전시행정의 도체찰사로 활약한 그로써 이순신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며, 그가 백의종군할 때도 항상 위로해주었다. 백의종군은 이순신의 무장으로서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정치권력의 균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선조의 아들 광해군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지 않으나, 책 전반적인 관점을 보면 광해군의 정치적 업적을 인정한다(책에서 광해군이 아닌 광해임금이라 한다, 이 부분은 명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의 관점과 유사하다). 그 이유는 광해군은 정치적 행위를 실제 현장중심과 연계된 점이고, 실사구시를 통해 시문놀이 하는 정치적 행태와 반대로 갔기 때문이다.

 

선조와 호종신하들은 전장의 다급함과 전략적 관점을 잘 알지 못했다. 전술의 기초도 모르고, 적을 이기기 위한 작전문서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시문놀이에 젖어 말만 앞세우고, 선조는 작전을 내리려면 적과 가까운 곳으로 정부를 옮겨야 하나, 계속 북쪽에 머물면서 몸을 사리기만 바빴다. 선조의 문제는 그가 몽진을 한 것이 아니다. 몽진을 한 후 보여준 대응방법이었다. 변방의 장수가 전쟁을 할 때 군주는 절대 그의 지휘권을 간섭하면 안되나, 선조는 늘 그렇게 해왔고, 그런 실수가 패배를 불러왔다.

 

선조와 서인세력은평양성전투나 벽제관전투에서 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무기는 화포를 중심으로 반격했으면 싸울 만 했으나, 오로지 기병을 통한 돌격이나 내세웠다. 왜군의 조총사격술에 신립이 탄금대전투에서 패배했다. 자신들이 왜 패배했는지 이유도 모르고, 명나라가 와서 현실을 말해줘도 그것을 받아들이기보단 명분만 길게 늘여놓았다. 명나라 장수는 명분을 앞세우고 실리를 추구했다. 조선이 망하는 것은 명나라에게 중요하지 않으나, 조선이 망한 후 왜적이 넘어오는 것은 문제다. 그들은 항왜원조(抗倭援朝)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조선을 다시 세우게 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이란 단어를 남발했다.

 

재조지은의 문제점은 선조와 호종대신들의 고도의 정치적 전략이 숨어있다. 사실 전쟁이 나면 제일 공을 세우는 자는 왜적을 무찌르고 몰아내는 자이다. 변방의 장수들은 목숨을 내걸고 하루 24시간이 죽음과 같이 숨을 쉰다. 그러나 선조는 호종한 대신에게 많은 공을 전해주었고, 그 이유는 자신이 의주로 가면서 명나라 왕에게 요청하여 명나라 군대를 파병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전쟁을 자신들의 손이 아닌 타국의 힘을 빌린 점에서 이미 병자호란의 그늘이 조선을 삼키고 있었다. 선조는 자신의 아들인 광해군에게 변변치 않게 대하다, 전쟁 중 분조지휘를 마치고 돌아오자 매우 따듯하게 대해준다. 하지만 이내 다시 차갑게 대하고, 광해군이 분조활동과 무군사 책임자로 큰 활약을 해도 공신의 축에 넣지 않았다.

 

왕의 가족에게 공신은 어림이 없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자신의 피난길에 동행한 다른 왕자에게 호종공신으로 책봉하는 점은 아이러니이다. 조선의 모든 백성은 알고 있다. 조선의 위기를 탈출하게 한 인물은 이순신과 수군, 그리고 의병이나, 그들을 치켜세우는 것은 선조에게 정치적으로 큰 타격이고, 그런 선조와 함께한 간신배 세력에게 치명적인 약점이다. 만일 이순신이 살아남아 전쟁이 정리된다면 선조와 서인세력에게 큰 타격이 될 것이다. 면사 첩은 선조가 아닌 명나라 왕이 하사하고, 하다못해 명나라 왕은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명나라의 수군 제독자리를 수여한다.

 

조선장수가 명나라 최고 지휘관의 자리에 올라간 것이다. 이순신을 두고 당시 참전한 명나라 장수는 그를 제갈량과 동급으로 보았다. 제갈량은 창과 활을 못 다루나, 창과 활을 다루는 자들을 다루어 적을 섬멸했다. 이순신은 조선수군 몇 십 배나 되는 왜적을 격파했다. 명량해전의 기적적 승리는 하늘이 준 행운이 아니었다. 단지 조선과 명나라에게 이순신이란 인물이 있었던 그자체가 행운이었다. 이순신은 조류와 암초 그리고 지형 등을 고려하여 작전을 개시했고, 그의 전략은 상대 총지휘관의 목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런 이순신이 다시 온다면 선조나 서인세력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으며, 전시 국방부장관을 맡은 유성룡과 이원익의 경우 그 공이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 이순신이 선조에 의해 잡혀갈 때 유성룡은 제대로 돕고 싶었으나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이원익은 목숨을 걸고 이순신을 변호했고, 병조판서를 맡은 정탁 역시 이순신의 업적을 고려하여 그의 안위를 보존해 달라고 했다. 이순신의 인품과 능력은 이미 선조실록이나 많은 기록에 남아있다. 이순신이 다른 무관과 다른 점은 학문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고 그리고 후에 망한 이유는 무관을 천시한 문치의 맹점이었다.

 

현장을 잘 아는 자가 대비하기보단 문관이 더 높은 자리에서 명령을 하고, 문관이 만호, 첨사, 부사 등과 같은 자리에 있는 것도 문제였다. 동래부사 송상현을 두고 부산시민들은 영웅으로 생각하고, 동래충렬사에 그를 모신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 송상현이란 인물은 시문놀이만 빠진 문관에 불과했다. 정발장군은 부산진성을 수호하다 순국했다. 현재 지역적으로 부산광역시는 조선시대 이름이 부산이 아니다. 부산이란 말은 부산진성(釜山鎭城)이 있었고, 원래 부산의 지역명은 동래부였다. 동래부라고 하면 동래읍성이 총지휘부고 동래부사 송상현은 부산지역 전체 수비를 담당하는 최고지휘관이다. 그러나 그 성은 4시간 안에 무너지고, 그는 죽음을 당했다.

 

이때 송상현이 화포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무관이었다면 쉽게 성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 덕분에 많은 조선인들은 죽임을 당했다. 단지 일본 왜군에게 살해당한 이유로 충신의 반열에 올랐지만(아니라면 후에 예송논쟁의 주인이 그와 동본이라 더 올라갈 수 있다), 송상현의 죽음이나 평양성전투를 본다면 당시 무관을 대하는 조선의 수준을 알 수 있었고, 전시행정을 보면 전투능력을 알 수 있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력과 병력이나, 그와 더불어 보급이다. 군량미가 없으면 싸울 수가 없고, 물이 없다면 그 진중은 이미 패배선언이다.

 

병사의 손에 제대로 된 활이 없고, 옷을 제대로 구비되지 않으면 전투 그 자체가 무리고, 수군에서 대포사격을 위한 화약이 없다면 역시 싸울 수 없다. 이순신의 경영관리는 보급의 체계화이다. 더 나아가 피난민을 수용하여 관리하여 그들에게 농지를 제공하고, 상업적 교류를 도모하여 전시 중에도 경제활동이 되도록 유도했다. 생선을 잡고 소금을 구워 팔며, 식량이 남으면 조정에 바치기도 했다. 전시 군량미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으면 군령에 의해 참형에 처해진다.

 

이순신의 승리는 모든 게 요행이 아니라 체계화된 시스템이었다. 병사 하나의 공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병사의 죽음을 두고 기록에 남긴다. 장계에 자신보다 부하의 덕을 칭송하니 감히 누가 따르지 않을까? 그런 면이 있었기에 언제나 철저한 준비를 했다. 이순신의 죽음을 두고 설전이 많다. 자살이었는지 아니면 속임수였는지 말이다. 진린의 기록이나 이순신의 아들과 조카의 기록을 보면 그의 죽음은 순수하게 교전 중에 벌여진 사태이다. 그런데도 승리로 이끈 것은 자신의 죽음으로 지휘통제력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현대전은 양상이 다르지만, 과거 전쟁은 총지휘관이 죽으면 그 사단은 모든 행동을 정지된다.

 

적장을 잡는 순간 적의 병졸은 항복을 한다. 다른 지휘관이 비상사태를 인식하고 인계받으면 되지만, 그것이 되지 않으면 무력화된다. 자신의 죽음 곧 조선수군 지휘부의 붕괴이고, 그동안 자신이 보여 온 전술과 전략을 자신의 아들과 조카에게 요청한 것이다. 주도면밀한 이순신이 만일 다시 조정에 나온다면 영웅의 귀환을 두고 정치적 혼란은 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선조는 자신보다 이순신이 조선 그 자체라는 점을 알았다. 이순신과 더불어 죽음의 세계에서 나라를 구한 의병장을 소홀하게 대한 이유는 바로 정치적 입장이었다.

 

김덕령 의병장은 모함으로 장살을 당하고, 홍의장군 곽재우는 김덕령의 죽음과 이순신의 모함을 보고 산으로 숨어버렸다. 광해군은 선조에게 정치적으로 최악의 라이벌이고(이 책에서 <난중일기>의 내용이 나오는데, 광해군이 건강이 편찮아 하자, 이순신이 매우 걱정하는 글귀가 나온다), 전시 중에도 전쟁 후에도 왕위 전위 소동으로 정치적으로 큰 파란을 일으킨다. 우리는 임진왜란을 왜 다시금 봐야 하는 것인가? 최근 일본이 헌법 개정을 하고 있다. 일본은 자위대가 군대가 아닌 자치대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일본 자체적으로 군대라는 기관을 만들기 위해서다.

 

일본의 정치세력 대부분 대동아전쟁의 후손이고, 전범들의 악행을 반성하기보단 오히려 영웅으로 모신다. 이런 시기에 우리가 과거의 일들을 지나쳐버리면 제2의 임진왜란이 오지 마란 법은 없다. 임진왜란 시기 명·청 교체시기이고, 지금 북한이란 폭력국가는 여전히 군사돌발을 일으키고 있다. 임진왜란에서 처음 풍신수길이 조선에게 요구한 것은 명나라 가는 길을 열어달라고 한 것이다.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선이 교행해줄 것을 요구했다. 대동아전쟁을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는 자들이 북한과의 군사적 무력충돌이 생기면 어떤 일이 있을까?

 

한국에서 전쟁이 나서 난민들이 일본에 가면 인도적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죽여야 한다는 망언에서 임진왜란이란 형태는 끝이 나도, 임진왜란이 가진 의미는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내용적으로 큰 결함이 없지만, 사실 이미 1권 서두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백선엽이란 육군 예비역장군은 한국전쟁의 영웅이라 하나, 그는 일제 만주군관으로 활약한 친일파이다. 항일애국투사를 죽이는데 혈안이 된 자가 이순신 장군을 운운하는 게 참으로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순신은 일제에 억압당한 민중의 빛이었다. 항일정신이 이순신에게 이어진 것이라면 백선엽 장군이 <이순신과 임진왜란>에서 자신의 발언이 얼마나 모순인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더 심한 모순은 이순신 장군이 다시 조명된 것은 정조대왕 시절이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뒤 100년 정도 그의 기록은 삭제되거나 사라졌다. 이순신은 전투에서 싸운 장수이지만, 그를 지우고 싶은 이들은 전장이 아니라 선조 옆에서 호종하던 세력이다. 동인에서 남인영수(유성룡, 이원익, 이덕형)의 지지를 받은 장수이며, 더구나 남인과 서인이 제일 심각하게 대립하던 예송논쟁 시절, 남인의 논객 윤휴는 이순신과 인척관계였다.

 

윤휴의 서모(庶母)는 덕수이씨, 충무공 이순신의 첩의 딸이었다. 윤휴는 남원윤씨로 이순신 장군 밑에 활약한 무관이 많았던 집안이다. 한편으로 사돈관계이기도 했다. 윤휴는 오리 이원익과 인척관계고, 오리 이원의 손녀사위인 미수 허목과 사돈관계(친한 친구)였다. 임진왜란이 당연히 왜군과의 전쟁이었을까? 인조와 효종을 지나 숙종까지 이순신의 이름에 그늘은 있었다. 칠량해전에서 원균이 왜 통제사로 갈 수 있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역사를 다시 봐야하고, 그 역사를 서양의 눈이 아닌 조선의 눈으로 다시 봐야 하는 것이 <이순신과 임진왜란>에서 전하고 싶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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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9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30 0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7-11-30 0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 속에서 대의를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모습이 일반적이기에, 대인 또는 성인의 모습이 더 위대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11-30 09:24   좋아요 1 | URL
대의를 위해 싸운 자를 외면하고
옆에서 아첨떠는 인간들이 승승장구하는
과거와 최근 이명박근혜 정부의 현실태를
보자면 작금의 역사는 과거의 일로 치부해서는
안되는 일이고,그곳에서 연꽃처럼 피운
분들의 노고를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게
후세의 도리인 것 같습니다.
 
본투리드 방석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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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사무실에 이것 사용하고 있는데, 엉덩이가 너무 푹신해서 좋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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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브루스 커밍스 지음, 조행복 옮김 / 현실문화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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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평창 올림픽이 개최된다. 올림픽 마스코트가 백호와 반달곰을 기반으로 제작된 캐릭터이다. 이 캐릭터를 보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단방에 생각한 것이 있었다. 곰과 호랑이는 한국인의 국조 단군신화에 나오는 존재이다. 단군신화는 한국인의 시작이고, 한국의 역사와 신화의 시작이다. 단군신화가 없다면 한국인이란 정체성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988년 서울에서 개최된 올림픽 역시 호돌이와 반달곰 캐릭터가 등장했다. 한국에서 단군신화를 결코 놓칠 수 없는 이유는 많을 것이다. 하지만 단군신화의 중요성은 단순히 국제행사의 마스코트로 상징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은 하나의 민족이지만, 국가는 2개로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전신은 고종황제께서 반포하신 대한제국(大韓帝國)에서 따온 말이고, 한국(韓國)은 고대 우리의 국가인 삼한(三韓)의 한()을 가지고 온 것이다. 생각하면 그렇지 않은가? 한국이란 국가는 우리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우리는 남한(南韓)이라고 말하고, 저 위에 있는 정권은 북한(北韓)이라고 한다. 반대로 북한은 자신을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이라고 한다. 그들은 자신을 두고 북조선(北朝鮮)이라 하고, 우리를 보고 남조선(南朝鮮)이라 한다.

 

단어를 본다면 북한은 조선을 우리는 한국을 인용하는 점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역사, 그리고 대한민국 이전의 역사 조선, 조선이란 국가가 단군조선을 계승한 점을 생각하면 국가의 이름에 아주 깊은 뜻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전쟁이나 전투에서 다른 국가와 민족보다는 같은 국가 내에서 같은 민족끼리가 더 잔인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부른다. 신화에서도 그리스비극 오이디푸스왕과 아가멤논왕의 가족이야기는 비극을 넘어 인간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같은 종족이기에 같은 형제이기에 갈등은 더욱 무섭다.

 

집안에서도 마을에서도 친하게 지낸 사람끼리 다투면 그 화가 더 심해진다. 타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높을수록 증오와 복수는 깊어지는 게 인간이 가진 딜레마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4주년이 되고, 광복절은 61주년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일제로부터의 광복과 한국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조선총독부에 의해 징용에 끌려간 청년들, 위안부 성노예로 끌려간 소녀들의 영혼은 안식을 찾지 못했다. 이들의 영혼을 위로받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영원히 독립국가라 말할 수 없고, 한국이 통일되기 전까지 한국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한국전쟁(韓國戰爭)은 종전(終戰)이 아닌 휴전(休戰)이다. 최근 북한 핵문제나 휴전선 귀순병사 사건을 보면서 우리에게 남겨진 지난날의 슬픔을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문제로부터 시선을 돌리면 안 된다. 조선을 잊는 것은 분단 이전의 한국을 버리는 것이고, 일제와 전쟁을 피해 멀리 외국 타향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고려인들을 버리는 것과 같다. 이 모든 비극의 씨앗은 그 당시 살아간 이들만 아니라 이들의 후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후예들은 아직도 우리라는 사실을 가끔 우리들은 망각한다.

 

예전에 형과 집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우리 집안은 일본제국주의에 많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큰형님과 동생분이 징용에 끌려가고, 해방 후 돌아오신 할아버지의 큰형님은 그만 병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본래 집안이 양반가문이나, 몰락한 남인의 후예이기에 그 여파로 할아버지는 한자를 제대로 읽지 못한 농부였다. 그래서 한국전쟁 전후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자유주의는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그러나 한국전쟁 시기 밤이면 늘 시골집 근처에 있는 저수지 들풀 사이에서 숨어 지냈다고 한다.

 

게다가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아무 관련도 없는데도 빨갱이로 몰린 누명도 있었다고 했다. 비록 20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분이 살아온 인생은 순탄치 못한 굴레의 연속이었다. 징용에 끌려갈 뻔했으나, 스스로 몸을 자해하여 운 좋게 징용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가족의 비극적 시나리오에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을 읽었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도서로 가장 잘 읽은 서적은 박태균 교수의 <한국전쟁>, 김태우 박사의 <폭격>이었다. 한국전쟁사를 일방적인 관점이 아니라, 미국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군사기밀해제문서를 다각적으로 정리하여 만든 도서이다.

 

전쟁은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전후맥락을 관찰해야 하고, 특히나 그 시대에 전쟁 당사국이 아닌 주변 국가의 정치군사적 갈등도 확인해야 한다. 한국전쟁을 시기적으로 잘 정리하고 풀이한 도서는 박태균 교수님의 서적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한국전쟁에 가려진 분노와 역사적 관점은 브루스 커밍스와 김태우 박사의 책이다. 김태우 박사의 책에서 북한이 패배한 전쟁이 아닌 것처럼 보이나, 사실 북한은 상당한 피해를 받고 모든 것이 사라진 전쟁이라 말한다. 이에 반해 브루스 커밍스는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이기지도 못하고, 압록강에서 후퇴하여 패배한 전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승패가 나누지 못한 패배한 전쟁이라 말한다.

 

전쟁은 패배하지 않아도 패배라고 말하는 이유는 미국은 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고, 그들이 저지른 행동들이 결코 떳떳하지 못했던 것이다. 최근 노근리 사건을 대두되고 있는데, 노근리 학살과 관련하여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한국전쟁에서 한국인이 300만명이 사망하고, 그 중 반 이상이 민간인이다. 한국인에 대한 학살이 미군도 그러하나 왜 자국민끼리 그럴까?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에서 미군과 중공군의 개입보다 한국인끼리의 혈전에 많은 생각을 보여준다.

 

전쟁의 시작은 1950년이 아니라 1932년부터란 점이다.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국이 설립된 시기, 만주군관학교에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군장교로 임관하고, 그 중 일부는 유명한 대한민국 육군 장군이 되었다. 대한민국 초기 육군 장군과 육군사관학교는 친일세력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들과 더불어 경찰과 관료조직은 친일파들이 메우게 되었다. 이들은 자국민에 대한 탄압이 무척 잔혹했고, 항일독립투사에 대한 탄압도 지독했다. 민간인 학살에서 보여준 만행은 이가 떨리는 정도이다.

 

어느 친일파 장교출신 육군 장군은 한국전쟁 당시 마을 소년을 산에 끌고 와서 10명 중 9명은 일본도로 목을 베고, 나머지 1명에게 죽은 9명의 머리를 가져가게 했다고 한다. 군부와 경찰에 대한 불신과 문제점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등장하고,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중에 가장 많이 몸담은 단체가 대종교이다. 대종교는 국조 단군을 모시는 민족종교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 신자였다. 대종교 신자가 해방 후 서울에 오니 당시 자신을 지독하게 고문한 일본순사가 한국경찰이 되어 있었다. 항일무장투쟁을 하던 김원봉 대장도 해방직후 일제시대 순사를 했던 친일파에게 잡혀 고문을 당하고, 북으로 넘어갔다.

 

따라서 친일파와 친일파에게 불만을 가진 한국인의 대립이 이미 1930년대부터 존재했고, 쥐잡이작전은 육군사관학교에 가장 인기 높은 전략이다. 그런데 그 작전의 기원은 일본군이 하일유격대를 처치하기 위해 고안한 고도의 전략이다.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은 대부분 중국 및 러시아 일대에서 활약했고, 사회주의 노선 항일투쟁가들은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여 활동했다. 중국내전에서 조선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의외였다. 한국전쟁은 중국과 소비에트연방, 그리고 미국의 파워게임에서 시작되었으나, 이미 그 전초는 한국인 내부에 있었다는 점이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미국인이나, 은근히 한국사회와 역사, 게다가 문학과 신화 등 전반적인 한국문화를 이해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의 갈등은 당시 전쟁만이 아니라 21세기에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책의 서문에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자신의 책을 바친다고 적었다. 반정부 인사, 평화중재자, 정치가로 활동한 그를 말이다. 지금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두고 호남에 태어났고, 한국전쟁 전에 인민위원회 활동으로 빨갱이란 꼬리표가 따라 다닌다. 하지만 브루스 커밍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몸담은 곳은 공산주의 세력과 무관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닌 각종 인민위원회는 자생적 조직이라 말했다.

 

그런 증거는 미군의 문서에서 발견되었고, 당시 미군은 한국의 자체조직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으며, 이들을 공산주의와 같은 세력으로 보았다. 대표적인 학살사건은 제주도의 4·3사건이고, 당시 제주도 주민들은 아무런 통신장비도 없었기에 공산세력과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생리를 잘 이해하지 못한 미군과 서북청년단은 경찰세력으로 편입하여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다. 아직도 제주도는 4·3사건의 비극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다. 당시 몇 만명의 주민들이 살해당했고, 몇 만명의 주민은 일본으로 대피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은 아직도 일본에 있다고 한다.

 

빨갱이로 낙인찍히면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에게 화가 미친다. 빨갱이라고 지목된 남자의 아내 여동생, 누나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윤간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희생자의 성기 안에 수류탄을 넣었다고 한다. 이 글귀를 보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 잔인함이란 인간으로 해서 안 될 경계선을 넘은 것이다. 3살짜리 어린 여자아이가 총에 맞아 울고 있으니, 총에 달린 검으로 그 아이의 목을 베기도 했다. 당시 8살 소년은 자신의 여동생이 억울하게 죽어간 모습을 보았다. 평생의 상처가 되어 부모의 이름조차 말하지 못하다, 드디어 21세기 (진정한 의미로) 민주주의 정부가 도래하면서 당시의 비극을 말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미국은 한국에 대해 더 심각하게 대했다. 지금은 우방국가라고 하지만, 당시 한국전쟁 전후는 일본의 전진 군사국가, 일본의 전후경제 복구를 위한 체계로 보았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군수물자 공장을 맡은 일본은 경제적으로 급성장을 했다. 미군에 의해 항복한 전범들은 일부 사형에 처해졌지만, 그들의 후손 대부분이 일본의 총리와 의원직을 차지하고 있다. 아베 신조를 비롯한 자민당 의원은 대부분 우익정치가 내지 군인들의 후손이다. 미국에게 가장 치욕을 당한 그들이 이제는 태평양 국가 중에서 미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가 되었다.

 

한국인들은 미국의 최고 우방은 한국이라 여기나, 사실은 일본이다. 동북아시아 미군기지 중 가장 핵심 전략은 일본 오키나와 주변에 포진하고 있다. 괌은 미국의 영토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미국영토가 아닌 미군의 군사력은 일본에 많이 포진하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은 내전이고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좌우된 전쟁이다. 하지만 전쟁에서 보여준 잔인성과 비극은 이미 뿌리내린 씨앗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이나 북한군과 아무 관계없어도 단지 북한군의 의복을 세탁을 해준 이유로 많은 여성들이 살해당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 내지 사상 따위는 전혀 모르는 까막눈이며, 오로지 원하는 것은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식량이었다. 이런 민간인들의 속성을 모르는 미군과 주변 강대국, 일제강점기 때부터 싹이 튼 원한과 공포는 광기의 도가니로 몰았다. 한국전쟁이 세계전쟁사 특히 항공전쟁사에서 가지는 의미가 중요한 점은 세계 2차 대전보다 한국전쟁에서 폭격기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활약했고, 폭격기는 각종 군사시설 및 산업시설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들을 죽이게 만들었다.

 

한국인은 대부분 흰색옷을 입으니 그들은 민간인인 것을 알아도 흰색만 보이면 무조건 폭탄을 투하했다. 민간인들에게 대피할 것을 권유해도 떠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있다. 한국인은 기본적으로 농업에 종사하고, 집안의 조상이 산에 있기에 쉽게 고향을 버릴 수가 없었다. 여기에 만주군관학교 출신 친일파장교들이 수행한 독립군 토벌작전도 포함되어 있다. 간도나 만주의 조선인들은 몰래 독립군에게 식량과 군자금을 지원하는 지원세력이었다. 그곳 출신 청년들은 독립군의 용사가 되어 일제에 항거했다.

 

조선의 민간인을 친일파 조선인들이 무참하게 살해하였던 것이다. 이런 그들이 이승만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한국전쟁까지 이어졌다. 제주도 4·3사건 당시 제주도 주민들은 대부분 희생자의 친척들이었다. 이들의 증오와 복수심은 지금도 제주도의 한으로 남아있고, 이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더 심한 억압과 폭력을 가한 것이다. 제주도만큼 심하게 압박을 받은 곳은 전라도지역이다. 전라도는 동학운동 시절 가장 착취를 많이 당한 지역이고, 외세가 가장 많이 초토화시킨 지역이다. 청일전쟁에서 전라도 지역이 많은 타격을 받았고, 일제강점기 시대에 가장 많은 곡식을 수탈당했다(왜 군산시가 항구도시로 성장했을 수 있는가?).

 

전라도 지역사람들이 폭압을 당한만큼 그들 역시 저항을 많이 했다. 그래서 제주도처럼 이데올로기의 대립에서 많은 사람들이 갈등을 빚은 곳이었다. 지금 전라도 내부에서는 자신들끼리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립하기보단 타 지역과 갈등을 빚고 있다. 518의 비극에서 아직도 빨갱이로 낙인이 찍히고 있는 그들을 보면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한국전쟁 전후의 한국사를 보면 항상 피해자가 악마나 마녀 내지 적으로 간주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나, 단지 그것은 살아남은 하나의 국가나 사회적 합의체이지 그 사회 내의 존재들이라면, 결국 역사적 진실은 다시 우리에게 찾아오는 법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책을 보면서 E.H Carr<역사란 무엇인가>가 다시금 떠오른다.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일이고, 그것은 하나의 진실이다. 하지만 진실은 어느 관점에 따라 사실과 왜곡으로 변모된다. 20세기 한국에서 광주는 불온세력이 포진한 지역이라면, 21세기 현재 광주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성숙시킨 곳이다.

 

서평을 보자면 한국전쟁 전후로 민간인 학살을 한국인과 미군만 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겠지만, 북한군 역시 민간인을 학살했다. 문제는 민간인학살을 하던 전범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그 죄를 건들면 아직도 이데올로기적인 마녀사냥을 구가한다. 당시 한국전쟁의 전환점은 미군의 군사력이다. 미군은 2차 세계대전 시에도 국방력을 그렇게 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군사력이다. 한국전쟁을 기해 미국은 방위산업체의 확대되고, 지금 미국의 방산업계는 세계 최고이다. 한국전쟁은 미국에게 있어서 2차 세계대전처럼 파시스트에게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세계 패권을 잡기 위한 싸움이다.

 

그 전쟁은 베트남전쟁도 이어지고, 냉전체계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당시 미국 상원위원인 메카시가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메카시즘은 미국정치와 사회를 숙청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고, 그 시기 한국은 공산진영과 전쟁을 벌였다. 브루스 커밍스의 책에 언급했지만, 더 자세한 것은 <폭격>이란 도서에 나와 있는데, 미군은 유색인종인 동양인을 상당히 무시했다. 일본 상공에 폭격을 하나 한국의 농촌을 폭격하는 심정이었다. 한국인도 그들에게 하나의 gook(동양인을 멸시하는 말)이었다. 그렇게 학살하고도 이기지 못한 전쟁, 게다가 민간인학살까지 저지른 일들이 한국전쟁은 미국에게 잊어진 전쟁이 되었다.

 

다르게 생각하면 미국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디어가 참 많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에게 베트남 그 자체가 적이나, 한국은 적이 아니라 반쪽자리 우방국이다. 압록강까지 올라가 흥남부두에서 쫓기듯 내려온 그들에게 한국이란 인상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을 두고 변증법적인 논리로 보자면, 한국전쟁 이전 일제치하에서 조선인들을 상대로 횡포를 부린 친일파와 그들과 대치한 민중의 갈등에서(방안에 가득 찬 메탄가스), 소비에트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 정체세력이 총(라이터)을 발사한 것이다.

 

1950년보단 못하나, 아직도 그 메탄가스는 여전히 우리 주변을 부유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갈등은 정치적 세력으로 표출되며, 정당간의 대립은 한국전쟁과 그 이전에 존재했던 과거의 그늘에서 나오고 있다. 저자의 놀라운 관찰력은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로 나올 때의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영부인 권양숙 여사는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의였다. 아버지는 사회주의 단체와 연계되어 있지만,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란 점에서 그가 실제 전쟁에서 한국군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과거를 가지고 색깔론을 상대편 후보가 펼쳤다. 그 시대가 한국전쟁이 끝난 지 54년이 넘어도 그런 말이 나왔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계속 우리 사회에 남아있다면 한국전쟁의 불씨는 꺼질 수 없을 것이다. 당장 북한과의 대화를 해야 하나, 한국사회의 갈등은 국내외적으로 정치, 군사, 외교에 큰 갈등을 야기한다. 전 정권의 정부는 일제가 저지른 위안부 문제와 징용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려 했다. 당시 자국민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지울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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