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소득자인 나나 동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모여 주식을 연구하고,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를 공부한다.
2. 책을 단 한 권도 읽은적 없지만 생활에 아무 불편함을 모를뿐더러 무엇보다 한가하게 책읽을 시간이 없다.
3. 외모, 어떤 직장인가, 경제여건, 사회적 위치만이 가장 중요한 결혼조건이다.
4. 어떤 이의 위치를 가장 잘 아는 방법은 그가 무슨 차를 소유했냐 여부다.
5. 의사니 변호사니 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세상살이 이치는 따르르꿰지만 인문적 지식은 무지하다.  
6. 교회다니면 무조건 천당간다. 기왕 나갈바엔 말빨서고 영향력있는 큰 교회일수록 좋다. 
7. 휴대폰 문자나 카톡 짧은 글, 휴대폰 검색글 읽기에도 바쁜데, 언제 책이니 긴글을 읽겠는가. 
8. 남이 부러워하고, 잘 산다는건 맛있는것 먹고, 홈쇼핑, 해외여행, 고급 양주 마시고, 좋은 옷입고 함께 모여 밥먹고 이야기하고.....
9. 그렇잖아도 골치아픈 세상, 그냥 가볍게 가볍게 농담따먹기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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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낮의 다름, 혹은 이중성. 홍상수의 영화들은 대부분 이런 이중성을 드러내거나 밝히는데 초점을 맞춘다. 관객들은 마치 교회에서 목사의 설교를 듣는 자세로 영화를 바라보거나 등장인물들의 허접함과 속절없음에 고개를 흔들기 마련인데, 이내 그들의 누추한 모습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도 되는양 곤혹스러워한다.

그의 다른 영화들이 그렇듯 <밤과 낮>역시 일상성 속의 사소함을 포착한다. 주목할것은 밤과 낮 같은 표리부동, 혹은 이중성은 어느 누구만의 모습이 아니고, 인간 모두의 실존적 조건이다. 영화에서 '작은 새'가 나오는 장면이 두 번있는데 바로 그것을 뜻한다. 둥지에서 떨어진 새, 사람들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작은 새.   

그의 영화들은 짐짓 윤리성을 비켜가는듯 하지만, 실제는 지극히 윤리적이다. 원래 미적쾌락, 유희적 요소가 강한 예술이, 특히 통속적 오락성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가 윤리성을 천착하면 자연 무거워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홍상수는 무거움을 해소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으로 유머와 술을 배치한다.

관객들은 술마시는 장면과 뜬금없는 유머를 통해 잔뜩 움츠러들었던 긴장감을 해소하고 따듯한 위안을 받는다. "누구나 그럴수 있지" 하면서....일상 가운데 음험하게 배어있는 위선, 혹은 이중성을 드러내기. 홍상수 영화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람은 되기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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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6시 기상해서 오전 9시까지 독서실 오전 일과를 끝내고 아들과 교대. 오전 9시~ 오후 6시까지는 순전히 내 개인시간이다. 오후 일과는 오후 6시부터 새벽 1시까지. 개인 시간은 낮잠 90분, 트럼펫 연습 90분을 빼면, 독서와 공부가 전부다. 맘만 먹으면 하루종일 책을 읽을 수 있다. 원하는 책 맘껏 구입하고 읽기, 그리고 글쓰는것. 오랫동안 바라고 소망하던 꿈이었다. 이게 지금 이뤄지고 있으니 더이상 무엇을 바라랴!

오전엔 <월든>을 드문드문 읽다가 점심식사 후에는 <전쟁과 평화>(민음사) 제 4권,  <백년의 고독>(민음사),  중국 근대단편문학선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창비)을 교대로 읽었다.  근자 독서의 중심에 발터 벤야민을 비롯한 인문학서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지만, 와중에도 문학은 언제 어느때든 독서의 즐거움, 삶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최근 출간된 민음사판 <전쟁과 평화>는 문학동네판과 같이 모두 네 권으로 이뤄졌는데, 톨스토이의 역사관, 사상관은 3권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저자의 역사가, 사상가로서의 모습을 알기위해서는 3권과 4권에 특히 주목해야한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은 국내에 처음 소개될때 이미 읽으바 있지만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사실 이 작품을 확실하게 이해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소설문법과 독해력, 나아가 라틴 아메리카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배경지식이 요구된다. 장담하는데, <백년의 고독>은 괴테의 <파우스트>,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렇듯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막상 읽은 독자는 손꼽을 정도에 불과하고 설사 읽었다해도 제대로 이해한 독자는 10프로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중국 근대단편선집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창비)에 수록된 루쉰의 단편 <아Q 정전>을 읽었다. 이 단편 역시 엔간한 독자라면 무수히 듣고 익히 알겠지만 이효석의 <메밀꽃 필무렵>이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처럼 그저 제목만 아는 단편소설이 아닐까싶다. 내심 문학독자로 자부하고 있었지만 부끄럽게도 60중반에 이르러서야 겨우 루쉰의 위대함, 진면목을 알게되었다.

루쉰은 이 한 편의 단편만으로도 동양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아야 할 작가라고 생각된다. 분량으로 치면 불과 몇 쪽 안되는 <아Q 정전>, 그런데 이 단편이 중국민족의 특성을, 당시 상황을 너무도 리얼하게 너무도 명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과연 이 단편과 겨룰만한 작품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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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을 읽는 중이다. 자본 비판, 유물론과 신학의 결합, 전통 예술의 아우라 상실과 복제 예술품의 등장 등 다양한 주제들이 언급되는 발터 벤야민의 작업은 주로 19세기 유럽, 특히 파리가 배경이지만 오늘날 한국사회에도 적용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에겐 더 급한 주제들이 있다. 가령 우리사회 곳곳에 널린 적폐들, 여전히 권력기관의 위세에 눌린 민주화 문제, 샤머니즘, 기복신앙을 맴도는 불교와 기독교, 화해무드인 남북문제, 노동문제, 성소수자, 근자 새롭게 대두된 난민문제 등등.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딜레탕트인 나는 벤야민을 어데까지 공부해야할까. 한마디로 쉽지 않은 노릇이다. 우선 지금까지 읽고 공부한 내용을 나열해본다. 

1. 아트 앤 스터디 8개 강좌 수강 
2. 평전, 전기, 해설(<아케이드 프로젝트>해설 포함) 등 2차서 읽기.
3. 벤야민의 주요 글을 발췌 수록한 반성완 교수의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읽기. (<일방 통행로> <베를린 연대기>, <베를린 유년시절>읽기 포함)

아마추어라면 누구나 여기까지 공부는 대체로 가능할 것이다. 한데 지금 내 앞에는 아직 더 읽어야 할 책들이 쌓여있다. 최성만, 최문규, 문광훈 등 국내 연구자들의 연구서, 보들레르의 시, 카프카, 프루스트의 소설, 그밖의 최근 번역된 새로운 평전, 최종적으로 <아케이드 프로젝트> <독일 비애극의 기원>을 비롯한 번역 원전들이 그것. 그렇다면 앞으로 어느정도 어데까지 더 파고들어야 할까. 

- 앞으로 공부 계획

원전 읽기, 연구서 읽기 등은 유보내지 포기하고, 위 1~3까지 이미 했던 공부를 다시 한 번 반복하는것도 좋겠다. 공부라는게 하기로들면 끝이 없다. 전문 연구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공할것도 아닌데 굳이 끝까지 파고들 필요가 있을까. 한때는 발터 벤야민을 계기로 비판이론가인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등 프랑크프르트 학파의 작업, 데카당한 난해시로 치부했던 보들레르도 이 기회에 함께 살펴볼까, 해봤지만 나의 지적 한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무엇보다 더 재밌고 급한 공부들이 많은데 굳이 발터 벤야민 하나에 매달릴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이 든다. 끝까지 파고들지 못하는거, 도중에 엉거주춤하기, 이래서 바로 아마추어 소리를 듣는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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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결하게 되고싶으면 여러분은 절제를 해야 한다. (...) 몸을 부지런히 놀리는데서 지혜와 순결이 온다. 나태로부터는 무지와 관능이 온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관능은 마음의 게으른 습성이다. 깨끗지 못한 사람은 열이면 열 게으른 사람이며, 난로 옆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이며, 해가 떠 있는데도 누워 있는 사람이며, 피곤하지도 않는데 휴식을 취하는 사람이다. 깨끗지 않음과 온갖 죄악을 피하려거든 외양간의 청소라도 좋으니 부지런히 일을 하도록 하라.” - H. D. 소로 <월든>, 김석희 역, 열림원 338쪽 

 

늦으막 시작한 독서실 업무는 때로 심신 모두가 과중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적당한 긴장과 절제감은 물론이고, 규칙적인 일과와 부지런한 몸놀림으로 인해 신체 건강이라는 부수적 잇점이 따른다. 특히 소로의 말대로, 노동의 피로로 인한 욕망, 관능의 저하는 최상의 혜택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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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건 나이가 많다고 해서 젊은이보다 더 나은 선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얻는 것보다 잃는게 더 많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사려가 깊어지고, 인생에 대한 확고한 가치관이나 신념이 생기는 줄 알았다. 사실 60중반이면 적지 않은 나이다. 그동안 쌓은 세상 경험도 적지않고 이것저것 본 것도 많으니 제법 아는게 많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래 살고 경험한게 많다고 해봤자 세상의 지극히 일면적인 부분에 불과하다. 그것도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실상은 어설프고 피상적이다. 아는건 고사하고 오히려 험만 더 크고 편협한 기질만 더욱 강화되는 것 같다. 나이들면 꼰대가 된다더니 정말 남의 애기가 아니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지도 못한채 어정쩡한 상태로 인생을 살아갈뿐 기껏해야 안정, 현실안주만을 떠올리며 변화와 모험을 기피한다.

 

3

인생의 가치가 최저로 하락한 노년기에 확실치 않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 인생의 황금기를 돈벌이로 소진하는 사람을 보면, 훗날 고국에 돌아와 시인의 삶을 살겠다며 인도로 돈을 벌러 떠났던 어느 영국인이 생각난다. 그는 인도로 가는 대신 당장 다락방에 올라가 시부터 썼어야 했다.” - 71

 

그러기에 살아오면서 뭔가 하고자 하는 일들을 지금 당장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 예컨대 글쓰기, 어떤 책을 완독하겠노라는 계획, 그밖의 마음 속에 오래 간직한 소소한 꿈들을 이루기 위해 지금 당장 계획하고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므로 언젠가 독서실을 정리한 후 시간이 한가해질 때 하겠다는 생각은 부질없는 희망일뿐이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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