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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투스 단원인 J씨와 트럼펫 연습. 아마추어 트럼펫터가 베토벤 <교향곡 7번>을 연주하기엔 너무 벅차다. 가령 1악장 경우 3옥타브 A음과 B음을 한 마디에 한 음씩, 때로 10여마디 가까이 한 호흡으로 연주 해야한다. 이것을 잘 하려면 먼저 3옥타브 고음을 수월히 내야하고, 어텍을 가볍고 투명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뿐만이 아니다. 16분음표 붓점이 연속되는 이른바 '말타기 리듬'을 제대로 연주해야 하고, 2악장, 3악장은 그렇다쳐도 4악장은 강력한 주력이 없으면 아예 불가능하다. 

숙고 끝에 한 주에 두 차례 J씨와 연습을 함께 하기로 했다. 내 제안에 J씨도 동의했다. 개인연습은 각자하고, 아르방 2권 듀엣곡을 통해 앙상블과 주력을 향상시키려는 거다. 대략 두 시간정도 연습을 하면 어느정도 효과가 있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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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씨와 점심을 마치고 오랜만에 한길문고에 들렀다. 책구경이나 하려던 심사였지만 어찌 구경만할까. 호주머니 탈탈털어 최근 출간된 민음사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권, 8권을 구입했다. 

내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프란츠 카프카,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언젠가 기어이 정복해야 할 세 개의 고봉(高峰) 가운데 하나다. 평생 숱한 책을 읽으면서도 이 세 작가의 작품을 한시도 잊어본적 없다. 뚜렷한 이유는 없다. 굳이 말한다면 등산가 힐러리를 흉내내, 그냥 그 책들이 있기 때문이랄밖에. 그렇다. 그냥 책들이 있기 때문이지 달리 이유가 없다. 한때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책이라 묘하게 호기심이 끌린적 있다. 유별난 지적욕구, 고급한 문학취향, 세간의 평가가 워낙 강력하다거나 '불멸의 고전' 운운도 한 몫 거든셈인데, 이것저것 알만한 나이인 지금은 호기심 따위에 끌릴처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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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완네 집 쪽으로>에 해당하는 민음사판 1권, 2권을 오래전에 읽은 바 있지만 더 이상 진도가 더 나가질 못했다. 귀가 후 '소돔과 고모라' 1권에 해당하는 7권을 펴들었다. 단숨에 1부 샤를뤼스와 쥐피앵의 동성애 관련 부분을 읽었다. 내용이 내용인지라 슬슬 몰입이 된다. 저녁 식사후 7권을 잠시 덮고, 제 1권 <스완네 집 쪽으로>를 다시 펴들었다. 과거 수십 차례도 더 읽었을 '프티드 마들레느 과자와 홍차 에피소드'를 다시 읽어보기 위해서다.

 최근 우연히 카프카를 시작했는데 프루스트가 다시 사정권에 들어오다니, 공교롭다면 참 공교로운 일이다. 책 읽는데 무슨 방법이 따로 있겠는가. 그냥 내 식대로, 내 방법대로 해보자. 일단 카프카는 그간 하던대로 이주동 교수와 막스 브로트의 평전과 작품을 병행하고, 프루스트는 직접 작품으로 들어가야겠다. 다만 순서대로 읽지 않고, 오늘처럼 1권과 7권을 병행하는 식이다.

마치 평탄대로를 걷다가 우연히, 참 우연히 아무 장비도 없이 히말라야 고봉을 등정하는 식이다. 물론 말이 안 된다. 하지만 그동안 머리속으로 꾸준히 준비해온지도 모른다. 장비야 서가에 오래전부터 비치되어 있었으니 등에 둘러매면 그만이고.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그냥 올라가보자. 까짓 실패하면 죽기 전에 다시 시작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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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의 대표작 <광장>을 두 번 완독했다. 정확히 말하면 세 번째 읽은셈인데, 처음은 문학과지성사에서 첫 전집(세로쓰기)으로 나온 1976년판이고, 두 번째는 한국문학대계 중 한 권으로 출간된 두산동아판(1995년), 이어서 오늘 읽은건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한 최종 결정본(2015년 6판) 전집 중 한 권이다. 

<광장>이 현대한국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장편이라는건 만천하가 아는 사실이어서 나 역시 문학과지성사에서 첫 전집을 출간하기 전에 신구문화사판, 민음사판을 구입한적이 있을정도로 <광장>의 중요성을 일찌기 인식하고 있었지만 막상 작품을 꼼꼼히 읽고 이해한건 최근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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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슴속에서 불타야 할 자랑스러운 정열, 그것만이 문젭니다. 이남에는 그런 정열이 없었습니다. 있는 것은, 비루한 욕망과, 탈을 쓴 권세욕과, 그리고 섹스뿐이어습니다. 서양에 가서 소위 민주주의를 배웠다는 놈들이 돌아와서는, 자기 몇 대조가 무슨 판서 무슨 참판을 지냈다는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인민의 등에 올라앉아 외국에서 맞춘 아른거리는 구둣발로 그들의 배를 걷어차고 있었습니다. 도시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일본 놈들 밑에서 벼슬을 지내고 아버지 같은 애국자를 잡아 죽이던 놈들이 무슨 국장, 무슨 처장, 무슨 청장 자리에 앉아서 인민들을 호령하고 있습니다. 남조선 사회는 백귀야행하는 도시 알 수 없는 난장판이었습니다. 청년들은, 섹스와 재즈와 그림 속의 미국 여배우의 젖가슴에서 허덕이지 않으면, 재빨리 외국인을 친지로 삼아서 외국으로 내빼고 있었습니다.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그 험한 사회의 혼탁에서 잠시 몸을 빼고, 아름다운 아내와 쪼들리지 않을 만큼 한 살림을 꾸릴 수 있는 간판과 기술을 얻기 위해서, 외국으로 간 것입니다."   - <광장> 96쪽(2015년, 문학과지성사)  

비극의 출발은 일본제국주의를 물리친 승전국도 아니고, 프랑스대혁명의 주인공인 부르주아도 아닌, 단지 타의에 의해 해방을 맞이한 점령국 미국의 식민지 백성이라는데 있다. 우리는 마르크스도 미국의 천민자본주의도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게 아니고, 식민지 백성으로서 전수받았을뿐이다. 그리고 미군정은 점령자로서 식민지 남한을 자기 식대로 통치함으로써 오늘날 비극을 배태시켰으며, 비극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  

"북조선에는 혁명이 없었던 탓일 것 같았다. 인민 정권은, 인민의 망치와 낫이 피로 물들여지며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 약소 민족의 해방자이며 영원한 벗인 붉은 군대가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바스티유의 노여움가 기쁨도 없고, 동궁 습격의 아슬아슬함도 없다. 기요틴에서 푸르던 피를 본 조선 인민은 없으며, 동상과 조각을 망치로 부수며, 대리석 계단으로 몰려 올라가서, 황제의 안방에 불을 지르던 횃불을 들어본 조선 인민은 없다. 그들은 혁명의 풍문만 들었을 뿐이다."   - <광장> 150쪽

그렇다고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을 완수한 러시아는 오늘날 별수 있던가? 제아무리 혁명을 경험한 그들이라지만 오늘날 러시아는 독제자 푸틴의 파쇼체제에서 단 한 치를 벗어날 수 있었던가? 오늘날 러시아는 구체제와 뭐가 다를게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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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몇 가지 특징. 1) 소설은 상당 부분 주인공 이명준의 생각과 회상에 의해 진행된다. 2) 과거의 회상이 현재와 교차되며 회상 장면이 수시로 등장하기 때문에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스토리가 햇갈린다. 3) 현재와 과거의 회상 장면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을때가 있다.  4) 책 뒤 해설에 이명준과 관련된 주요내용이 시간 순서대로 요약된 부분이 있다. 이를 참고하면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된다. 5) 마치 시처럼 비유와 상징을 사용한 문장이 종종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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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고 미루던 카프카 읽기를 시작한다. 실은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 솔출판사에서 간행한 카프카 전집을 비롯해서 국내 카프카 연구자인 독문학자 이주동 교수의 <카프카 평전>(2012년, 소나무)과 <군중과 권력>(1987년, 한길사)의 저자로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는 엘리아스 카네티의 <카프카의 고독한 방황>(1983년, 홍성사) -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현혹, Die Blendung>(1981년, 국제문화출판공사)을 쓴 소설가이기도 하다 -  카프카에 관한 한 가장 권위있는 막스 브로트의<나의 카프카>(2018년, 솔), 국내 카프카학회에서 출간한 몇 권의 카프카 연구서 등 대부분의 책들을 진즉 구입했다. 하지만 달랑 한 두 권 읽고 끝낼 일이 아니다보니 단단히 마음 준비를 하지 않으면 책을 펴들 수가 없었던 거다.      

일단 출발은 이주동 교수의 <카프카 평전>이다. 저자는 카프카학회 회장직을 역임하는 등 평생 카프카를 연구한 학자인데 이 교수의 평전은 상당 부분 막스 브로트의 저서에 빚지고 있다. 물론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 생전에 가장 가까운 친구였고, 카프카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위치였기에 일차적으로 그의 평전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 다만 브로트는 친구 카프카와 평생을 가까이 했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카프카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카프카를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이 교수의 입장에서 <카프카 평전>이 과연 이 부분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이 교수의 평전과 함께 솔출판사 전집 중 단편집인 제 1권 <변신>을 병행해서 읽을 예정이다. 계속해서 막스 브로트의 평전을 마저 읽고, 최종적으로 작품읽기에 돌입해야겠다. 현재로서는 일기나 편지까지 읽고 싶지는 않다. 시간이 무한정 주어지는게 아니니 한 작가에게만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국문학의 경우 카프카뿐 아니라 여러 작가의 작품을 이미 젊은시절에 읽은적 있지만 솔직히 대부분 이해하질 못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인데 평생 문학을 가까이 했으면서도 현재 상태에서 카프카에 대한 이해력은 거의 백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60중반 너무 늦은 나이지만 이제라도 이해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카프카는 물론이고 아직도 읽어야 할 작가가 내게는 너무 많다. 호메르스, 단테, 세익스피어, 세르반테스, 플로오벨, 스탕달,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마르셀 프루스트, 카뮈,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 토마스 만  등등. 젊은시절의 독서야 막연한 지식욕, 지적 과시, 낭만적인 문학취향 등이 두루 짬뽕되었기 때문에 텍스트를 엄밀하게 이해하기는 불가능했고, 더우기 문학공부를 체계적으로 하지 않은 나로서는 심도있는 이해를 한다는게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진정한 독서는 지금부터라는게 내 생각이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래봐야 기껏 10년 남짓할까? 그러나 이마저도 건강해야 가능하다. 아~ 인생은 짧고 읽어야 할 책은 넘쳐나니 이게 과연 행복한 고민인지 아니면 불행한 노릇인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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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터 뒷산에 아득한 솔숲이 우중충하게 그늘진 밑으로 마을 초가집들은 선경과 같이 은은히 안겨 있다.
조각달은 어느덧 서천에 기울어졌는데 딱따구리는 뒷산에서 울고 소쩍새는 동구 앞 느티나무 속에서 운다. 고요한 이 밤에 한줄기 시냇물이 은파를 번득이며 들 가운데로 감돌아 흐르는데 큰 내의 여울물은 바다같이 훤하게 남쪽으로 트여 있다."  - 이기영의 <고향>(문학과지성사) 184쪽

이기영의 장편 <고향>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중반이니 나의 어린시절인 1960년대 중반과는 40년이라는 적지않은 시차가 있다. 따라서 물리적인 시대 배경은 물론이려니와 식민지 체제하에서 가난과 억압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린 20년대 농촌 풍경을 60년대와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작가가 묘사하는 농촌의 자연 풍경과 농민들의 삶의 애환만큼은 거리를 뛰어넘어 어린시절에 보던 농촌의 모습과 흡사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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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의 소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소위 하드보일드 문체로 불려지는 헤밍웨이의 판박이다. 이 소설은 외형적으로 서부극과 스릴러 장르를 취하지만 '자본주의의 우화'라는 야심찬 주제를 구현하고 있다. 작가는 작품 곳곳에 심오한듯한 경구, 혹은 짧은 대화체를 삽입함에도 불구하고, 작품 수준은 평범한 대중소설을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원작을 영화화한 코엔 형제의 동명 영화가 차라리 뛰어나고, 원작을 거의 손상없이 영상으로 옮긴 코엔 형제의 영화가 성공한 것은 전적으로 하비에르 바르뎀(안톤 시거 역)의 뛰어난 연기 덕분이다. 아래의 시는 코맥 매카시가 소설 맨 앞 장에 인용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이다.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 W. B 예이츠
    
저 곳은 늙은이가 살 나라가 못된다. 서로 껴안고 있는
젊은이들, 나무의 새들
- 저 죽어가는 세대들- 은 노래 부르며,
연어 폭포, 고등어가 우글대는 바다,
물고기, 짐승, 또 새들은 온 여름 내내 찬미한다.
온갖 잉태하고 태어나고 죽는 것을.
관능의 음악에 사로잡혀, 모두가
늙지않는 지성의 기념비를 소홀히 하고 있다.
    
늙은이는 그저 하나의 하챦은 물건,
막대기에 걸쳐놓은 다 헤진 옷, 만일
영혼이 손뼉치며 노래 부르지 않는다면,
유한한 옷의 조각 조각을 위해 더욱 더 소리높여
노래 부르지 않는다면,
또한 거기엔 영혼의 장려한 기념비를 공부하는
노래 학교만이 있다.
그래서 나는 바다 건너
성스러운 도시 비잔티움으로 항해해왔다.
    
오 마치 벽의 금빛 모자이크 속에 있는 것처럼
신의 성스러운 불 속에 서있는 성인들이여,
성화로부터 나오라, 감돌려 내려오라.
그래서 내 영혼의 노래 스승이 되어라.
나의 심장을 삼켜라, 욕망으로 병들고
죽어가는 동물에 얽매여
심장은 스스로가 뭔지 알지 못하니, 그리고 나를
영원한 예술품 속에 넣어다오.
    
한번 자연을 벗어나면 나는 결코
자연을 닮은 육체의 모습을 취하지 않으리라.
오직 희랍 금 세공공이 졸리운 황제를 깨어놓기 위해
혹은 비잔티움의 귀족과 귀부인들에게 과거, 현재, 미래를
노래해 주도록 황금 가지 위에 않혀놓은
쳐늘인 황금 혹은 황금 에나멜로 만든
그러한 형상이 되리라.

 


         
 

 

현기영의 단편 <순이 삼촌> <아버지> <길>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륭 이야기> 등 제주 4. 3항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읽다. 소설을 읽기에 앞서 도올 김용옥 교수의 '여순 항쟁'과 '제주 4. 3항쟁' 강연, 주철희 박사의 '여순 항쟁' 관련 강연이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현대사에 속하는 여순항쟁과 제주 4. 3 항쟁은 나뿐 아니라 아마 우리 국민들 대다수가 잘 모르는 실정이다. 그도그럴것이 반공과 안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온 과거의 권위주이 정부는 소위 '빨갱이'라는 단어를 금기 중의 금기어로 맨 앞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올해로 70주년을 맞는 '여순항쟁'과 '제주 4. 3항쟁'의 참상을 국민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그동안 관련 단체의 많은 노력이 있어왔지만 솔직히 최근까지도 전문 학자들조차 자기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따라서 아무 제약없이 연구하고 대중들에게 알리는 작업은 지금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근 두 항쟁에 대한 언론과 지역사회의 관심이 급증하고 있는데, 먼저 도올 김용옥 교수와 주철희 박사의 강연이 비교적 대중들이 이해하기에 쉽고, 전문가의 저서로는 '여순항쟁'을 연구한 주철희 박사의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디자인 흐름)가 추천할만 하다. 아울러 제주 출신인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과 지난 90년대 후반에 출간된 현기영의 <순이 삼촌>(창비 출간)을 비롯한 몇몇 단편도 '제주 4. 3 항쟁'을 이해하는데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주말 저녁 EBS TV <한국기행>을 시청하고 있자니 마침 제주도 화산성 편을 방영하고 있다. 화면 가득히 펼쳐진 제주의 평화로운 농촌 풍경. 밭일 하는 농부들이 어린 당근을 솎아내고 있다. 해녀들의 물질, 밭에 돌담쌓는 장면도 연이어 나온다. 아, 중산간 마을도... 해안가 5킬로 내륙쪽은 모조리 불태워졌다는 그 중산간 마을......육지의 흔한 여느 농촌마을처럼 평화로운 농촌 풍경인데도 불구하고 문득 처참했던 '4. 3항쟁'의 광경이 오버랩된다. 평소에 보던 익숙한 관광지 제주가 아니라 70년전 상흔으로 얼룩진 제주가 연상되는거다. 

아직 깊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제주. 주철희 박사 말마따나 역사 서술을 비롯한 모든 공적 기록은 '사건'이 아닌 '항쟁'으로 명확하게 인정되어야 하고, 정권이 바뀌더라도 공권력의 민중에 대한 속죄는 계속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게 진정한 '제주 4. 3항쟁'이 역사 속에서 바로 서는 일이 될테니 말이다.

* 중산간 마을

한라산 자락이 뻗어내려오다 평지 지형을 이루면서 마을이 형성된 곳으로 해발고도는 100~300미터 가량이다. 바닷가에 해안마을이 있다면, 한라산 자락 사람이 살 만한 초지에 자리잡은 마을이 중산간 마을이다. 중산간 마을에서 한라산 방향으로 더 올라가면 사람이 살 수가 없고, 바닷가 쪽으로 내려가면 바다에 기대서 살아가는 해안마을이 나온다. 그리고 중산간의 사람들은 주로 목축과 농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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