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인훈의 대표작 <광장>을 두 번 완독했다. 정확히 말하면 세 번째 읽은셈인데, 처음은 문학과지성사에서 첫 전집(세로쓰기)으로 나온 1976년판이고, 두 번째는 한국문학대계 중 한 권으로 출간된 두산동아판(1995년), 이어서 오늘 읽은건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한 최종 결정본(2015년 6판) 전집 중 한 권이다.
<광장>이 현대한국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장편이라는건 만천하가 아는 사실이어서 나 역시 문학과지성사에서 첫 전집을 출간하기 전에 신구문화사판, 민음사판을 구입한적이 있을정도로 <광장>의 중요성을 일찌기 인식하고 있었지만 막상 작품을 꼼꼼히 읽고 이해한건 최근 들어서다.
2
"우리 가슴속에서 불타야 할 자랑스러운 정열, 그것만이 문젭니다. 이남에는 그런 정열이 없었습니다. 있는 것은, 비루한 욕망과, 탈을 쓴 권세욕과, 그리고 섹스뿐이어습니다. 서양에 가서 소위 민주주의를 배웠다는 놈들이 돌아와서는, 자기 몇 대조가 무슨 판서 무슨 참판을 지냈다는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인민의 등에 올라앉아 외국에서 맞춘 아른거리는 구둣발로 그들의 배를 걷어차고 있었습니다. 도시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일본 놈들 밑에서 벼슬을 지내고 아버지 같은 애국자를 잡아 죽이던 놈들이 무슨 국장, 무슨 처장, 무슨 청장 자리에 앉아서 인민들을 호령하고 있습니다. 남조선 사회는 백귀야행하는 도시 알 수 없는 난장판이었습니다. 청년들은, 섹스와 재즈와 그림 속의 미국 여배우의 젖가슴에서 허덕이지 않으면, 재빨리 외국인을 친지로 삼아서 외국으로 내빼고 있었습니다.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그 험한 사회의 혼탁에서 잠시 몸을 빼고, 아름다운 아내와 쪼들리지 않을 만큼 한 살림을 꾸릴 수 있는 간판과 기술을 얻기 위해서, 외국으로 간 것입니다." - <광장> 96쪽(2015년, 문학과지성사)
비극의 출발은 일본제국주의를 물리친 승전국도 아니고, 프랑스대혁명의 주인공인 부르주아도 아닌, 단지 타의에 의해 해방을 맞이한 점령국 미국의 식민지 백성이라는데 있다. 우리는 마르크스도 미국의 천민자본주의도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게 아니고, 식민지 백성으로서 전수받았을뿐이다. 그리고 미군정은 점령자로서 식민지 남한을 자기 식대로 통치함으로써 오늘날 비극을 배태시켰으며, 비극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
"북조선에는 혁명이 없었던 탓일 것 같았다. 인민 정권은, 인민의 망치와 낫이 피로 물들여지며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 약소 민족의 해방자이며 영원한 벗인 붉은 군대가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바스티유의 노여움가 기쁨도 없고, 동궁 습격의 아슬아슬함도 없다. 기요틴에서 푸르던 피를 본 조선 인민은 없으며, 동상과 조각을 망치로 부수며, 대리석 계단으로 몰려 올라가서, 황제의 안방에 불을 지르던 횃불을 들어본 조선 인민은 없다. 그들은 혁명의 풍문만 들었을 뿐이다." - <광장> 150쪽
그렇다고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을 완수한 러시아는 오늘날 별수 있던가? 제아무리 혁명을 경험한 그들이라지만 오늘날 러시아는 독제자 푸틴의 파쇼체제에서 단 한 치를 벗어날 수 있었던가? 오늘날 러시아는 구체제와 뭐가 다를게 있던가?
3
<광장>의 몇 가지 특징. 1) 소설은 상당 부분 주인공 이명준의 생각과 회상에 의해 진행된다. 2) 과거의 회상이 현재와 교차되며 회상 장면이 수시로 등장하기 때문에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스토리가 햇갈린다. 3) 현재와 과거의 회상 장면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을때가 있다. 4) 책 뒤 해설에 이명준과 관련된 주요내용이 시간 순서대로 요약된 부분이 있다. 이를 참고하면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된다. 5) 마치 시처럼 비유와 상징을 사용한 문장이 종종 등장한다.